극악서생 3부 – 57화 : 대교와 함께 춤을.
사각~ 사삭~ 사각~ 사삭~ 사각~ 사삭~ 사삭~ 사각~ 사삭~ 사삭~ 사각~ 사삭~ 사삭~ 사각~ 사삭~
뭔가를 갉아먹고 있는 듯한 소리 같았다. 그러나 그건 딱딱한 지표면을 가볍고 뾰족한 무언가의 다리가 밟으며 기어오는 소리였다. 그런 소리가 모이고, 모이고 또 모여서 이 넓은 협곡을 가득 채우고 공명하며 나의 귀속, 아니 머리 전체를 종처럼 울리고 있었다.
이, 이건… 일부러 내는 거다. 그동안은 나와 몽몽에게 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인 놈들이다. 그러나 이제 헬기가 파괴되어 우리가 도망칠 방법이 없어지자 당당하게 시위를 하는 거야.
무서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다리는 어느 사이 힘을 잃었고 정글도를 든 손조차 굳어져서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가 걱정일 지경이었다. 나는… 거미가 싫다. 다리 여덟 개의 털복숭이 거미 수백만 마리가 어두운 땅 위를 기어오고 있는 이 끔찍함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 주인님. 대교님께 무슨 일이 발생한 모양입니다. ]
뭐, 뭐야? 하필 이럴 때?
[ 호출 패턴은 ‘비명 감지’입니다. ]
제기…! 당연히 대교에게는 보천구룡대의 정예를 선발해서 호위자로 배치해 놓긴 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태라면……
< 대교! 괜찮아? 무슨 일이야? >
- 에, 예? 아… 맞다. 제가 비명을 지르는 것만으로도 그쪽에 구조 요청 신호가 간다고 했었죠?
< 그래, 맞아. 근데 괜찮은 거야? 우리 요원들은? >
- 그 여자들은… 아, 지금 창문으로… 아아~ 창피해요. 집안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 나온 정도로 비명까지 지르다니……
< 버, 벌레? >
- 예. 정말 창피하네요.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으면 저도 그렇게 놀라지는… 아, 실은 거기 그거… 그거 때문에… 미안해요.
뒤의 말은 호위자들에게 한 말인 듯했다.
< …잡았니? >
- 아, 아뇨, 아직. 저 여자들도 벌레는 싫다며 직접 잡지 못하고 약 사러 갔어요. 죄송해요. 바쁜데 어이없는 일로 방해한 건 아닌지……
< 아직까진 괜찮아. 하지만 이제부터 바빠질 것 같아. 여기도 벌레가 좀… 많아서 잡아야 하거든. >
- 어머.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물론 당신은 남자니까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닐 테지만요.
< …그래. 별일 아니야.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
- 예. 청소 잘하시고, 좋은 밤 되세요. 안녕.
으음. ‘숙소를 잘못 잡아서 벌레가 많이 나오는’ 정도의 상황을 생각한 모양이군. 어쨌든…… 대교 자신의 표현대로 어이없는 해프닝이긴 했지만, 정말 위험한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무조건 다행이다.
그런데… 대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걸 깜박했다. 바로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몸과 마음이 안정되어 버린 건 그녀 덕분인데 말이다. 나는 대교의 목소리만으로도 힘이 난 건 물론이고, 집안에 침투한 징그러운 뭔가를 여자 대신 처리해 주는 남자의 의무까지 새삼 자각한 것이다.
< 몽몽. 대교 핸드폰에 고맙다는 메시지 좀 보내줘. >
나는 어느 정도 여유까지 느끼며 다른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대, 대체, 저, 저 딴 게… 대체 어디서……”
페트라…? 저 여자도 지금 떨고 있는 건가? 훗~! 뒷세계의 악마 같은 중개인이라던 여자라도 역시 여자라는 얘기로군. 그렇다면 은사마군은…? 그녀 역시… 아, 아닌가? 은사마군도 극도로 긴장하여 불안한 표정이긴 했지만 페트라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다른 남자들이 더 기가 죽어 투지를 잃어버린 기색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저 엄청난 거미 군단을 보고도 누구보다 기가 죽지 않은 자가 또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우리의 금동 옹이었다. 어쩌면 저 거미들을 진짜 거미로 생각하여 백수지왕(百獸之王)답게 ‘아랫것들’로 인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아아~ 다들 뭐야! 남자씩이나 되어서 설마 저런 벌레들 따위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조금 전까지 그들과 비슷한 상태였으면서도 뻔뻔하게 음성을 높였다.
“저 당당한 금동이와 은사마군을 보라구! 남자들이 원숭이와 여자만큼도 못되는 건가?”
은사마군은 갑자기 남자들 모두의 시선을 받고 얼굴을 붉혀야 했고, 남자들은 모두 다른 의미로 불타는(?)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쳇! 저 딴 벌레 몇 마리 때문에 대체 누가 떨었다는 겁니까?”
“후후~ 정말 무섭지 않다면, 터너. 페트라 옆으로 좀 가주는 게 좋겠소. 그녀는 지금 누구의 팔에라도 매달려 의지해야 할 것 같으니 말야.”
“어? 그러고 보니……”
터너는 갑자기 더욱 기운을 내며 페트라 옆으로 다가섰고 다른 남자들도 일제히 그녀 주위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친구보다는 내 팔이 더 듬직해 보이지 않나, 페트라 부대주?”
전황마군이 슬쩍 농담을 시작하자 다른 사내들도 질세라 앞다투어 ‘내가’, ‘내가 더’를 외치며 손을 내밀어댔다.
“저, 저리 가욧! 이 벌레보다 징그러운 남자들 같으니!”
으음. 우렁찬(?) 고함소리로 보아 페트라도 나름대로 기운이 나는 모양이군.
[ 주인님…! 거미들의 접근이 중단되었습니다. ]
응…? 그러고 보니 정말 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네?
수십 수백 만의 거미 떼가 주위를 포위 한 채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 광경도 꽤나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총공세 직전의 소름끼치는 고요함 때문 에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연히 나나 모두가 조금 전과는 달랐다.
< …대응 방침은 간단하다. 나와 은사마군, 은사도객 이 오른 쪽, 다른 모두는 왼쪽을 맡는다. 한 시간…! 한 시간 정도만 버티면 지원 병력과 헬기가 온다. 그 때까지 해충 박멸 작전에 돌입한다. >
우리는 헬기에서 미리 꺼내서 모아 놨던 폭탄 상자 들을 중심으로 포진하여 해충 박멸 작전을 준비했다.
< 은사마군. 난 조금의 내력이라도 아껴서 싸움에 써야 하니까, 절벽 위의 은사도객들에게는 무전으로 상황을 알려 줘. 그들 나름대로 퇴로 확보를 연구해 보라고 말야. >
< 복명! >
< 페트라. 당신은 총 놓고 뒤에서 탄창과 폭탄 보급 을 맡아. 그리고 전황마군은…… >
[ 주인님! ]
응? 뭐…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거미 떼 속에서 단 한 마리의 커다란 거미가 스윽 빠져 나오더니 빠르게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곧 적정거리에 들어 왔는데도 베어 버리지 않은 건 어쩐지 ‘전령’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 헬기를 폭파한 거미에 비해 약간 더 크다 싶은 그 거미는 나의 불과 몇 미터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거미 입에서(?) 낯익은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내 목소리가 들리나, 유준군!”
쳇…! 역시.
“잘 들립니다, 닥터 제이.”
“후후~ 동요가 심한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금방 회복해 버리는 군. 게다가 수하들까지 적절하게 부추기고 말이야.”
카메라기능까지 있는 건가? 거미들 전부…? 혹은 이 거미만 일까?
“아, 가만 가만… 어때? 보이나?”
뭐…야? 거미 등이 척 열리더니만 거기서 닥터 제이의 입체 영상까지 나오네?
“보입니다. 하은이는요?”
“아… 그 아인 지금 카디의 방에서 쉬고있네. 그리고 자네는 마음을 바꾸어 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해 두었지.”
“그렇게 자꾸 딸에게 거짓말을 하니까 미움받는 겁니다.”
“호오~ 내 말을 거짓말로 바꿀 자신이 있다는 거군. 하긴, 자네라면 그 대군을 뚫고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단, ‘자네 혼자’였다면 말야.”
그렇…군. 헬기만을 파괴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던 거다. 내가 혼자 달아나지 않을 거라는 걸 계산한 거라면… 그렇다면 앞으로도 나를 제외한 이들에 대한 공격은 그리 심하지 않으려나…? 아, 아니지. 인질이라면 단 한 명으로도 충분한 거니까 안심할 일은 아니다.
“이번 선물은 외형 때문에라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 녀석들은 보기보다 꽤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간 작품이라네. 싸워보면 알겠지만, 제법 재미있을 거야.”
“재미고 뭐고, 반품 신청은 안 받나요?”
“후후~ 섭섭하구먼, 어렸을 때는 내가 주는 장난감은 모두 무척 좋아해 주더니 말야.”
“난 그딴 기억… 아니, 당신과 만났었다는 사실조차 기억에 없습니다. 더구나 이제와서 이딴 걸 선물하는 이모부를 두고 싶지도 않고 말입니다.”
“이런, 이런… 난 역시 계속 처가 쪽 식구들에게 미움받을 신세인 모양이군. 하긴… 이번에는 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고 있네. 아무리 ‘일’이라고 해도 처조카에게 살인 병기를 보냈으니 말야. 그래도 굳이 변명을 하자면… ‘본의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군.”
“…비겁한 변명입니다.”
“흐음. 그거 다른데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아, 암튼. 내가 지금 연락을 취한 건, 그 KS시리즈에 대한 기본 정보를 알려 주기 위해서야.”
‘필요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참았다. 나의 자존심보다는 수하들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명칭은 단순하게 Killing Spider 시리즈로 통칭되었고 외피도 같은 형태를 취했지만… 사실 시리즈 별로 상당히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네. 헬기를 폭파한 B형 KS는 자네가 겪었던 것처럼 침투와 폭파 전문으로서 목표물에 달라붙은 후 효과적인 파괴를 위해 복부 쪽으로 폭발력이 집중되도록 설계되었지.”
과연… 그래서 내가 천의마군을 구하러 달려 갈 때 그렇게 대단치 않은 폭발이라고 느꼈었구나.
“지금 자네와 나의 대화 창구인 이 A형은 정찰 및 통신, C형은 암살용으로 독침을 발사하지. D형은 소형 미사일화 되기도 하고 E형은 암기처럼 날아가 목표물을 절단하며, F형처럼 땅속으로 목표물에 접근해서 물어뜯는 녀석도 있지. 아, G형은 레이저를 내장하고 있으니까 특히 주의해야 할거야. H형은 뭐, 내 취미랄 까? 특수 거미줄을 발사해서 적을 포획하지. 또 I형도 있는데 그건 E형의 개량 버전으로……”
제기, 정말 다양하군. 외형으로는 전부 똑 같은데 헷갈리게스리……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명심한 건, 전 시리즈가
특수 금속으로 제작되어 매우 튼튼하다네. 내력을 쓰지
않는 칼질로는 절대 자르지 못한다는 얘기지.”
“…알려 주는 건 고마운데, 당신 역시 명령을 받고
있는 처지라면서 그렇게 기밀을 누설해도 되는 겁니까?”
“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기본 기능이 알려졌다고 해서 제 역할을 못할 정도면 어떻게 비싸게 팔아
먹을 수가 있겠나. 그리고 KS시리즈는 아직 대부분
실전에서 쓰여진 적이 없었어. 그러니 겸사겸사 잘 되었지 뭔가.”
빌어먹을…! 결국 날 위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신
제품 테스트때문에……
“아, 그리고 헬기 두 대가 더 그 곳으로 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건 잊어버리게. 그 쪽도 조종사들의 솜씨가 대단해서 격추시키지는 못했지만 결국 후퇴해 버렸다고 하는 군.”
닥터 제이의 말에 나보다 흥분한 건 페트라였다.
“마, 맙소사! 그게 정말 인가요?”
“그래요, 귀여운 아가씨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일에는 철저한 편이라서… 음, 하여간 유준군.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네.”
정말이지… 짜증나는 사람이다. 공항에서 어머니의 명령대로 한 방 먹여 주지 않은 게 후회… 아, 아니지. 아직 늦지 않았다. 내 반드시 찾아가 들이받아 버리리라!
“시스는… 사실 자네를 무척 그리워 했었다네. 첫 번째 조카라서 그랬기도 했겠지만, 너무나 귀여운 아이였던 자네를 보러 언니 집에 몇 달 동안 출근하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고 하더군. 그러니… 오늘 자네가 시스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면 무척 반가워 할 거야.”
“당신 정말… 묘하게 비틀린 사람이로군. 이모님께서는 왜 하필 당신 같은 사람을……”
“후후- 정다운 대화는 이 정도에서 끝내기로 하지. 그럼 건투를 비……”
나는 닥터 제이의 말이 끝나기 전에 먼저 정글도를 휘둘렀고, 내 검기는 A형인지 뭔지 하는 거미를 정확히 양단해 버렸다. 겉으로는 간단히 자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코 적은 내력을 쓴 검기는 아니었다. 지금 건 헬기의 꼬리날개를 자를 때와 비슷한 정도였어. 잘라지는 순간의 느낌으로 봐서는 지금 보다 삼분의 일… 아니, 절반 정도는 써야 할 것 같군. 확실히 저 많은 놈들을 다 베는 건 고사하고… 쯧! 안되지 안 돼. 싸우기도 전에 계산으로 기가 죽는 건 나, 진유준 답지 않아.
“제군들…! 지금 들었다시피 이번에도 지원은 없게 된 모양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백만 마리라면 백만 번, 천만 마리면 천만 번 이걸
휘두르면 되겠지, 뭐. 조금…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말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다. 터너
의 부하들 중에는 절망적인 표정을 바꾸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우리 어사조는 모두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도 몇 마리는 양보해 주십시오, 천주.”
“그렇습니다. 저도 천 마리 정도는 해치울 자신이 있습니다.”
어사조들이 앞 다투어 ‘그럼 나는 만 마리’, ‘나는 십만’… 그런 식으로 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흥! 우리 터너 소대도 질 수 없지! 이 친구들 보다 우리가 적게 잡았을 때는 각오해! 마담 샤론의 가게에 너희들을 출입금지 시키라고 하겠어!”
터너의 외침에 그의 부하들도 갑자기 투지가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마담 샤론의 가게가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지만, 당연히 지금은 그런 걸 물어 볼 때가 아니다.
< 이 쪽 진형만 조금 바꾼다. 나는 혼자 거리를 둘 테니 은사마군과 은사도객은 아군의 후위를 맡아. 날 무시하고 이 쪽으로 오는 놈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
나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닥터
제이의 말 대로라면, 난 모두와 함께 있는 것보다 떨
어져서 공격을 내게 집중시키는 편이 나을 거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징그러운 놈들! 이거나 먹어라!”
터너의 고함소리가 들린 직후, 뒤쪽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그 것을 신호탄으로 우리 어사조와 터너 소대가 다시 한 번 힘을 합쳐 전투를 개시하고 있었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니 내 앞의 거대한 거미 군단 역시 사각사삭사각사각… 불쾌한 소리와 함께 내게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거미의 물결 속에서 산발적으로 튀어 올라 날아들기 시작하는 놈들이 있었다.
D형? 네 놈들이 먼저냐?
나는 내력을 최소화한 삼시전결로 날아드는 거미, 아니 그 자체가 소형 미사일인 녀석들을 요격하기 시작했다. 헬기와의 전투로 단련된 덕일까…? 나는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거미들을 단 한 마리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 쪽 놈들은 나에게만 모여들고 내 뒤로는 갈 생각이 없는 듯… 웃!
점차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날아드는 D형을 요격하는 동안 다가 온 다른 놈들이 일제히 가느다란 침을 발사해 왔고, 난 정글도를 풍차처럼 회전시키며 그 것들을 막아야 했다. 문득 발 밑이 섬뜩한 기분이 들어 재빨리 물러난 직후, 그 곳의 돌무더기 사이로 튀어나오는 놈들이 있었다.
땅속으로 오는 F형? 하지만 기습이 실패했을 때는 오히려 단순한 기능의 놈들!
나는 이빨을 세우고 달려드는 F형들을 일거에 베는 한 편, 바닥 쪽의 놈들은 진각(辰角)으로 밟아 버렸다.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커다란 벌레를 밟을 때의 불쾌감이 연상되어 소름이 끼쳤지만, 그건 역시 기우였다. 전투화 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은 당연히 딱딱한 기계 덩어리였고, 들려온 소리는 파츳하고 전기 장치가 합선되는 소리였다.
자, 잠깐…! 지금 뭔가……
나는 뭔가 깨달은 기분이 들었지만 확실한 건 아니었다. 그 때였다. 뒤쪽에서 캬아악! 캭! 거친 금동이의 괴성이 들려왔다. 나는 정신없는 와중임에도 순간적으로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동이는 적들이 자신의 위엄도 통하지 않는 이단자(?)라는 걸 알게 되어 분노에 찬 싸움을 하고 있었다.
금동이 녀석, 거미 한 마리의 다리를 잡고 휘둘러 다른 거미를 치고 있다…? 아, 그렇구나! 난 닥터 제이의 말장난에 걸려든 거였어! 이런 크기에 이런 움직임을 가진 로봇이라면 당연히 정밀 기계! 꼭 잘라내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나는 즉시 정글도에 돌리던 내력을 더욱 줄여 거미들을 쳐나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한 번 제대로 맞은 놈들은 다시 제대로 기동하지 못하고 땅바닥에서 꿈틀댈 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베고, 치고, 밟고, 던지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놈을 작동 불능으로 만들어 버리기 시작했다. 닥터 제이가 알려 준 기능별 살인 거미 시리즈의 미묘한 크기 차이도 점차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적어도 거짓말을 하진 않은 것 같았고, 어떤 놈이 어떤 공격을 해 올지 알게 되는 건 굉장한 이점이었다.
하지만…! 그, 그래도 역시… 힘들군. 특히 조금만 눈을 돌려도 보이는 저 광경… 저걸 계속 의식하게 되니 까… 젠장…! 모두에게 큰소리는 쳐놨지만, 이건 정말……
닥터 제이의 심리적 덫에서 벗어나서 그가 제공한 정보의 이점만을 활용하게 된 건 좋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승기를 잡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너무나 많았다. 저 한도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는 놈들을 의식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과연 끝이라는 게 있는 싸움인 걸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D형의 자폭 공격은 산발적으로 이어졌고 그 때마다 어쩔 수없이 검기를 써야 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으며 내 호신강기를 뚫을 정도로 강한 독침을 막거나 피하기 위해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발밑에서도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몽몽이 G형의 레이저에 겨냥되었음을 알려 줄 때마다 어떤 동작 도중에라도 포기하고 몸을 날려 피해야 했다. E형이나 I형이 날아오르며 칼날을 세워 회전하기 시작하면 초고수가 날리는 암기를 상정하고 막아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력은 물론이고 육체의 체력, 정신력까지 급속도로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차라리 전투 헬기와 싸울 때가 행복했… 윽!
[ 주인님! ]
순간적인 집중력 저하의 결과로 독침 하나가 오른 팔에 꽂히고 말았다. 팔이 저릿하며 정글도를 놓칠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리듬을 유지했다. 치명적인 독에도 무너지지 않은 건 몽몽의 해독 기능도 기능이지만, 나 자신의 육체도 마군황 시험 때 독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듬을 유지했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썅~! 또 독침을… 큭!
그게 시작이었다. 그 때부터 미처 막거나 피하지 못한 독침이 몇 발이나 몸에 박혀버렸는지 셀 수도 없었다. 아무리 빠르게 해독을 한다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었다. 그 틈에 거대한 첨단 전투헬기와의 싸움에서도 멀쩡했던 내 몸 여기저기가 찢겨져 나갔다.
으으~ 거미 따위! 거미 따위에게 내가… 으아아~ 이 빌어먹을 거미 떼는 정말이지 끝이 보이지 않잖아! 내가 이만큼 해치웠는데! 주변을 발 디딜 틈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놈들의 잔해로 덮었는데…! 그런데도 끝이 없잖아!
그랬다. 살인 거미들은 여전히 내 눈에 보이는 땅 전체를 가리고 있을 정도의 숫자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의 상처나 독에 의한 고통은 참아낼 수 있다. 그리고 계속 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에게 큰 소리쳤던 천만 번이란 숫자만큼 정말로 정글도를 휘두를 수 있다 해도 놈들을 모두 해치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더욱 나를 힘겹게 하고 몸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겹!다!
[ 주인님? 자꾸 보법과 움직임 전체가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전황을 호전시킬 방법을 찾고 있으니 조금만 더 집중을 유지…… ]
< 됐어, 몽몽. 그건 그거고! 뭐 재밌는 얘기 아는 거 없냐? >
[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하시는…… ]
< 지겨워…! 지겹다구! 열 받고 짜증나, 이딴 싸움! 썅! 재밌을 거라고? 닥터 제이! 그 인간 죽여 버리겠어! >
[ …알겠습니다, 주인님. 재밌는 얘기 대신, 20분 정도 전에 도착한 대교님의 메시지를 재생하겠습니다. ]
< 대교의 메시지? >
[ 그렇습니다. 저의 하위체를 통해 통신 요청이 들어왔지만, 전투 중이라 메시지를 남기시도록 했습니다. ]
- 미안해요. 확인이 늦었네요. 음… 뭐가 고맙다고 하신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 그래. 아까 몽몽에게 메시지 보내라고 했었지? 그 답신이로구나.
- 후후~ 저야말로 당신께 고마운 일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오늘 받은 신곡은 제일 먼저 당신께 들려 드릴게요. 여긴 제 침실이라 반주가 없어서 허전하긴 하지 만……
대교의 노래에 그딴 건 없어도… 윽! 하마터면 D형 하나를 놓칠 뻔했다.
‘역시 다른 곳에 정신을 팔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기어이 메시지 재생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곧 대교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때 마침 대교의 신곡은 상당히 경쾌한 노래였고, 나는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조차 잊고 대교의 노래에 빠져들어 버렸다. 싸움 따위는 내 육체와 정글도에게 맡겨 버린 채…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너무나 아쉽게도 노래가 끝나 버렸다.
- …아. 어떠셨나요? 으음- 반지에 대고 노래한 건 처음이라 좀 쑥쓰러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불러봤어요. 언제 이 메시지를 들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전 지금 잠자리에 들 시간이니까 인사는 그에 맞게 할게요. 굿 나잇~! 좋은 꿈꾸세요-!
그래 대교. 너야말로 좋은 꿈꾸길…! 하… 하, 하!
뜬금없이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나는, 내 몸은 여전히 잘도 싸우고 있었다. 대교의 노래에 정신을 팔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그래… 자고로 싸움은 이런 기분으로 해야 했어. 대교와 춤추듯 즐겁고 행복하게!
< 몽몽! 대교 노래 무한 반복! >
[ 알겠습니다. ]
이제 좋아! 자아 거미들아, 와라…! 더 계속 끝도 없이 덤벼 봐…! 이 짜증나는 가짜 거미 놈들아! 너희들 따위보다 마군황 때의 우리 지하무림인들이 더 강하고 집요했어! 난 그런 자들을 제압하고 마군황이 된 자…! 아무리 날 지치게 하고 독에 중독 시키고 내력을 소모시켜도 소용없어! 너희들 따위는 날 죽일 수 없지…! 내 쪽에서 오히려 죽여주마! 한 마리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내력의 배분이고 나발이고 신경 꺼 버리기로 했다. 어떻게 공격해야 효과적으로 놈들의 기동을 멈추는지를 생각하는 것도 그만둬 버렸다. 나는 대교의 노래를 따라서 흥얼거리며 즐겁게 춤출(?)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의 정글도는 점점 더 정확하고 빠르게 거미 떼를 해치우며 거미 떼의 시체(?)가 쌓아 올려지는 속도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그래… 이 감각, 마군황에 오를 당시 이후로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내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적이 되어 덤벼든다 해도 지지 않을 것만 이 기분…! 이런 모드를 거미 로봇따위에게 쓰는 건 아까울 지경이지만……
[ 주인님…! 지금부터 제가 지정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자연스럽게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
나는 몽몽의 의도가 궁금했지만, 일단 녀석 말대로 따르기 시작했다.
< 이런 식…? 이런 패턴이면 되냐? >
[ 그렇습니다. 이제 조금 만 더… 아, 되었습니다. 잠시만 현재의 위치를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인님께서 제일 처음 파괴한 A형의 정밀 분석까지 마치면 KS시리즈의 모든 기종 분석이 완료됩니다. ]
정밀 분석? 놈들에게는 몽몽의 스캔을 막는 장치가… 아, 맞다. 나에게 파괴될 때 그 장치까지 부서진 거로구나. 왜 그런 단순한 생각을 못했지?
[ 적의 분석과 대응 방침 수립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지금 막… 모든 기종의 프로그램에 포함 된 방화벽의 분석까지 끝냈습니다. ]
< 그, 그럼…… >
[ 이제 한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제가 이 협곡 안의 모든 로봇 거미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
< 머, 멋지군! 역시 몽몽 선생! 아,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고? >
[ 그렇습니다. 새로운 위성은 32분전부터 가용궤도에 진입했으나, 그 쪽으로 이동시킨 패티가 웬일인지 저의 호출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
< 에…?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배신…? 아, 아니면 혹시 처음에 의심했던 대로 코드 변경 자체가…… >
으와앗! 크, 큰일 날 뻔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턴의 딴 생각이어서 인가? 하마터면 E형 거미의 공격에 치명타를… 으윽! 제기!
[ 안되겠습니다! 문제 해결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 그, 그래! 믿겠어! >
나는 다시 감각을 되찾는데 주력하기 시작했지만 요 몽의 복제인 패티의 배신(?)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위태위태한 싸움이 되어 버리고 말았는데……
[ …됐습니다. 패티를 설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
설득…? 무슨 소리야?
몽몽이 하는 말의 의미를 궁금해하는 순간, 나는 내가 I형 거미 몇 마리가 뒤에서 날아드는 걸 너무 늦게 감지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 당한다!
나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각오했다. 다음 순간, 등뒤에서 엄습한 I형 거미의 회전하는 칼날이 내 목과 옆구리 등에 섬뜩한 한기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기만…? 아,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건가?
[ 약 0.7초 전, 해킹 완료! ]
< 하… 한 발 빨랐구나, 네가! >
[ 그렇습니다. 그러나 만약 뛰어난 방향 전환 능력 을 가진 I형이 아닌 E형이었다면 공격 중지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 그래… 여러모로 운이 좋았구나. 역시 난 악운의 지존……! >
아참!
< 전군 전투 중지! 발포하지마! >
다급하게 외치며 돌아보니, 이미 모두들 알아서 전투를 멈춘 것 같았다. 아니… 표정과 몰골들, 게다가 모두 총을 거꾸로 들거나 바위 덩어리 같은 걸 들고 있는 걸 보니 탄약이 모두 떨어져서 마악 백병전에 돌입하려던 참인 것 같았다. 아무리 거미들에게 ‘인질들은 살살 공격하라’는 명령이 입력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역시 악운의 지존의 수하들다운 운빨이라고나 할까……?
[ …정식으로 보고 드립니다. 약 10초 전까지 적이었던 모든 거미형 살인 로봇, KS시리즈 전 기종은 이제 모두 주인님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
…하핫! 이, 이거야 원!
미친 듯이 싸워온 시간과 기분 때문에 즉시 적응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제 일제히 기동을 멈추고 대기 상태에 돌입한 거미들이 그렇게 끔찍하게만 느껴지지는 않기 시작했다.
“처, 천주…! 저, 정말 끝난… 겁니까?”
“그래, 페트라. 이 놈들은 더 이상 우릴 공격하지 않을 거야.”
“보스… 다행…이긴 한데… 대체 어떻게……”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의 도움이었어. 헬기 때도 그 시스템에 침투해서 우릴 도와준 해커가 있다고 했잖아. 이번에도 녀석이 한 건 더 해낸 거지.”
“아아~ 그 친구에게 이 터너가 사랑한다고 전해 주세요.”
“후후… 알겠소.”
“아무튼 이젠 정말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인 모양입니다.”
터너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고 그의 부하들도 주저앉거나 아예 바닥에 길게 누워 버리기 시작했다. 보통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리 전투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하더라도 승리가 확정된 순간에는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할 기운이 어디선가 솟구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엔 너무나 길고 끔찍했던 전투였던 데다 갑작스러운 종결 때문에 오히려 다들 맥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우리 쪽의 페트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나는 다 죽어 가는 얼굴과 걸음으로도 기어이 전투종결 보고를 하려고 다가오는 페트라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됐어, 페트라. 그냥 쉬어.”
“하지만……”
“됐대두! 나도 쉴 거야! 지금 당장 우리 모두 다 같이 쉬는 거야! 무조건!”
나는 그렇게 외치며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런 나를 따라 다들 각자 편한 자리를 찾아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으며 전황마군을 비롯한 고수급들은 즉시 운기조식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결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준비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저들의 우두머리다. 아무리 지치고 내력 고파서 운기조식으로 식사를(?) 하고 싶어도 그 전에 체크하고 결정할 건 해야 했다.
< 몽몽. 적의 다음 공격 가능성은? >
[ 현재 확보된 KS들의 활용으로 저의 스캔을 회피하는 장치가 된 적의 내습에도 대처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당분간 안심하고 휴식을 취하셔도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
< 좋아. 그런데… 당분간만 이라고? >
[ 정확히는 3시간 14분 23초입니다. 그 이후로는 현재 이용 중인 위성의 가용 궤도 이탈로 인해 KS들에 대한 통제력이 사라집니다. 그 후로는 기동이 멈추지만, 적이 역 해킹으로 다시 통제권을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경우에도 기동 코드가 포맷되도록 세팅했으므로 당장 역습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 으음. 그렇다면… 그 3시간 정도의 시간 안에 저 KS들을 적의 본부에 보낼 수는 없을까? KS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본부를 습격시키자는 거지. >
[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KS의 속도로는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없을 뿐더러, 기동에 필요한 에너지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적들도 다른 대형 기동장비를 써서 이 부근까지 KS를 공수해 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 쳇…! 그럼 결국 저 수많은 거미 떼들을 앞으로 3시간 정도 보초로 밖에 쓰지 못한다는 거냐? 그 후로는 다시 적이 되는 거고? >
[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장치의 분석이 끝난 이상 저의 출력권 내의 KS는 항시 제가 다시 통제 유도할 수 있습니다. ]
< 그건 그렇겠지만…… >
KS의 일부만 데려가도 지치고 무기도 없는 우리 부대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저렇게 엄청난 대군 중에서 달랑 몇 마리만 가져갈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억울한 노릇이었다.
< 가져갈 수 없다 해도 다시 돌려줄 수는 없는 거고… 으음. 그럼 놈들이 찾아내지 못하도록 짱 박아 놓는 건 어떨까? 데려갈 수 없는 것들은 전부 위성을 따라가게 하는 거야. 그렇게 녀석들의 통제권을 놓치지 않으면서 기동 가능한 최대의 거리까지 도망치게 하는 거지. 그러다가 적당한 장소에 짱 박혀서 동면하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
[ …주인님의 의도에 적합한 이동 루트와 장소를 검색해 보겠습니다. ]
< 좋아, 이제 거미들의 처리도 결정되었고, 여긴 당분간 안전할 것 같다고 하니…… >
나는 비로소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운기조식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본래 이 곳에 흐르는 기의 흐름은 보통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인간들이 난장판을 쳐 놔서 그런지 처음보다 기가 흐트러지고 탁해 있었다. 그러나 물론 지금의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2시간 30분 후.
아직 내력이 양적으로 많이 부족했고, 이 곳 기의 맛도(?) 뭔가 떨떠름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래도 그럭저럭 회복이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돌아보니 터너와 그의 소대원들은 무기 상자 같은 걸 부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모닥불을 피우고 모여 앉아 불을 쬐며 졸고 있거나 몇몇은 아예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 와중에 팔자 좋게 코를 고는 소리도 들려와서 봤더니… 금동이였다.
그 쪽 팀은 그렇게 약간 노숙자 삘을 내고 있었지만, 역시 우리 어사조 멤버들은 대부분 나처럼 반듯한 자세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내가 운기조식에 들어갈 때쯤에는 다소 흐트러진 모습이었던 페트라도 곧 자신을 수습했는지 지금은 다른 이들처럼 운기조식에 몰두해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고 깨어 바지런을 떨고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녀는 비상약품 상자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은사마군.”
“예, 천주.”
“아까 그 전투를 겪고도 일손을 놓지 않는 건, 은사
마군 뿐인 것 같군.”
“아, 아닙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어느 정도 쉬
었습니다.”
은사마군은 겸손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천의마군도 전투 종료 후 약 30분 정도 후
에 의식을 회복했었습니다. 그는 저를 비롯한 모두의
상세를 살피고 필요한 응급조치를 행한 후… 다시 의
식을 잃었습니다.”
으음… 도무지 팔자가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사
람이로군.
“천주의 상세를 살피는 것이 최우선되어야 했으나,
천주께서 운기조식을 행하고 계실 때는 접근을 할 수
조차 없어서……”
본래 운기조식을 할 때는 주변에 대한 모든 감각이
차단되어 무방비 상태가 되며, 외부로부터 약간의 충
격만 받아도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래서
무림고수들은 항상 운기조식을 혼자 있을 때 하거나
생명을 맡겨도 좋을 정도로 믿는 이의 호위를 받으면
서 하곤 한다. 예외가 있다면… 바로 나, 나처럼 생사
현관(生死玄關)이 타동 된 고수라면 운기조식 도중에
도 어느 정도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고 심지어
반탄강기를 형성해서 방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상세를 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은 무슨, 내가 오히려 부탁해야지. 음, 하지만
독은 자체 해결되었고, 지혈도 혈도 폐쇄로 끝냈고…
그냥 소독하고 붕대나 좀 감아 줘.”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치료대상
이 대빵인 나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상처를 매
만지는 그녀의 손길은 평소의 다소 고지식하고 무뚝뚝
한 인상과 달리 매우 부드럽고 상냥하다는 느낌이 들
었다.
“그런데 은사마군은 전혀 쉬지도 않은 거야? 저 거
미들이 우리 쪽에 넘어온 이상 주변 경계도 저 놈들이
대신 해 줄 거라고 했잖아.”
“저도 많이 쉬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절벽 위의
은사도객들과 통신이 두절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아… 그 친구들도 있었지, 참. 으음. 난 아까 분명 그
들에게 ‘퇴로 확보를 연구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그 후, 공격받던 우리는 어찌어찌 알아서 살아남았는
데, 퇴로를 찾으러 나선 자들이 오히려 행방불명되어
버렸다는 건가……?
[ 주인님. ]
< 음. 왜, 몽몽. >
[ 실은, 주인님께서 운기조식을 하시는 동안 은사마군이 계속 수하들과 통신을 시도하고 있기에 KS시리즈를 동원해서 절벽 위를 수색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며 살해나 공격당한 흔적도 없었습니다. ]
< 뭐…? 거미들에게 수색을 시켰는데도 아무 것도 발견 못했다고? >
[ ‘아무 것도’는 아닙니다. 수색 도중, 그들의 매복 위치로부터 62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의 암벽 밑에서 지하로 향하는 동굴의 입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뭔가의 이동 흔적도 일부 발견되었으나 인체의 발자국이라는 확증은 습니다. ]
< 은사도객들은 아무래도 살수들이라, 그렇게 애매한 발자국밖에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음, 근데 어쨌든 그 동굴 안에도 은사도객들이 없었다 이거지? >
[ 동굴의 규모가 너무 커서 아직 일부 구역만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확인된 동굴의 형태로 보아 현재의 위치까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 에…? 저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여기까지……? >
조금 뜻밖이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랜드캐년에는 본래 매우 거대한 지하 동굴이 많으니까 말이다. 물론 내가 여길 실제로 와 본 건 이번이 처음이고 예전에 63빌딩의 거대한 극장에서 그랜드캐년에 관한 영화를 봤었을 뿐이지만… 암튼, 그 때 본 그랜드캐년의 지하 동굴은 중국 장가계(張家界)의 동굴과는 또 다른 느낌의 거대한 세계였다. 더구나 그 속을 흐르는 수로는 지상 위의 강이나 호수보다도 깊고 광활했다는 기억도 났다. 확실히 이 터무니없이 거대하고 비밀에 쌓인 협곡이라면, 수백 미터 높이의 암석 절벽 안에 꼭대기로부터 바닥까지 연결된 동굴이 있는 것쯤은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 만약 은사도객들이 그런 동굴 중의 하나를 찾아냈다면, 그들은 내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는 얘기네. 하지만 그럼 왜 아직까지 소식이 없지? 물론 이 협곡은 무지하게 깊지만 살수로서 단련된 그들이라면… 아- 이런, 이런! >
나는 그제야 이 일대 협곡의 절벽이 나와 싸우던 전투 헬기들의 집중포화를 맞아 무너져 내린 상태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 에구. 깊숙한 곳의 동굴은 어떨지 몰라도 절벽 표면으로 난 출구는 전부 막혀버렸겠구나. 만약 정말은 사도객들이 동굴을 발견해서 이 곳으로 오는 루트를 찾고 있는 거라면 지금쯤 출구를 찾느라 뺑이 치고 있겠다. 이쪽에 막히지 않은 출구는 전혀 없는 건가? >
< 역시 KS를 동원해서 찾아보았으며 총 4개 지점의 출구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막대한 양의 암석더미에 막혀 인간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가장 작은 두께로 쌓인 곳에 KS를 이용할 경우에도 최소 70대의 폭약을 내장한 KS를 써야 겨우 인간 한 명이 통과할 수 있는 통로를 낼 수 있는 것으로 계산되었습니다. >
< 그야 필요하다면 70대 아니라 700대라도 써야겠지. 하지만 은사도객들이 동굴 속에 있다는 게 확실치도 않은데 그러기도 좀…… >
아니… 아니지. 자연 훼손은 이미 할 데로 해 버린 상황이고, 절벽 위의 정상적인 입구로 들어가서 그들을 찾아 나설 여유도 없다. 헬기 지원이 막혀 버린 이상 적의 본진까지 갈 길이 너무 멀기 때문이다.
< 몽몽! 생각 바꿨다. 거미들을 써서 동굴을 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