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58화 : 생사금마도결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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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58화 : 생사금마도결의 주인.


6-10. 생사금마도결의 주인.

몽몽이 동굴을 여는데 필요한 거미들을 불러모으고 적절한 위치의 폭파 배치를 하는 동안, 나는 은사마군을 시켜 어사조와 터너들을 집결 시켰다. 그 전에 은사마군에게는 먼저 간단히 상황 설명을 해 주었지만 아직 상황을 모르는 다른 이들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거미들이 절벽의 한 지점에 모여드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천주…! 대체 무슨 일인지 제게는……”

“어, 페트라. 보다시피 저 거미들로 막혔던 동굴의 출입구를 열려는 거야.”

“동굴…? 아, 예. 저도 이 지역에 복잡한 동굴이 많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페트라는 말끝을 흐리다가 조심스럽게 전음으로 바꾸었다.

< 그 곳을 통해서 적의 본부로 침투하실 생각이시로군요. >

< 아니. 난 이 동굴이 거기까지 연결되었는지를 모르고… 무엇보다 길도 몰라. >

< 예? 그렇다면 왜…… >

< 절벽 위에 매복 중이던 은사도객들이 사라졌는데, 아무래도 이 절벽 안의 동굴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말야. >

< 아… 그렇다면 그들을 찾아가시려는 거로군요. >

< 그 것도 아냐. >

나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몽몽에게 폭파 지시를 내렸다. 다음 순간, 거미들은 일제히 폭발하며 불꽃과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우리 헬기를 폭파했던 B형 거미들이라 겉으로는 그리 대단한 화력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흙먼지가 조금 걷힌 다음에 보면 확실하게 제 역할을 해낸 것 같았다. 그리고 폭파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2차, 3차, 4차에 걸쳐 100대가 넘는 거미들이 투입된 끝에야 몽몽이 보고했다.

[ 평균 1미터 정도 직경의 통로가 확보되었습니다. ]

그래. 확실하군. 그렇다면…… 나는 즉시 거미들이 뚫어 준 통로 앞으로 가서 아직 흙먼지가 뿌연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모험’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아득한 지하 세계로의 길도 꽤 유혹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으므로……

“은사도객들은 들어라!”

나는 음성에 내력을 실어 안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안에 있다면 이 폭발음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쪽에 출구를 열었다! 우리는 지금 곧 출발해야 하니까! 동굴을 빠져 나오면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장소로 찾아와!”

나는 지하무림의 암호를 써서 집결지의 위치를 알려준 다음 동굴로부터 돌아섰다.

“…은사도객들이 이 안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한 건 아니 거든. 그러니 일단 출구만 열어 주고 가려는 거야. 불만 있나, 은사마군?”

“그렇지 않습니다, 천주.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별로 세심한 배려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암튼 나로서는 최대한 성의를… 응…? 뭐야?

[ 주인님! ]

< 나, 나도 들었다, 몽몽! >

통로 앞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기도 전에 들려온 이 소리는……

[ …분석 결과, 소총 및 중화기 사격에 의한 음향입니다. ]

< 은사도객들이 우리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려는 신호용 사격? 아니, 아닌가? >

[ 그렇습니다. 동시 사격되는 화기의 수가 행방불명된 인원의 수보다 많습니다. 즉, 교전에 의한 음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뭐…야? 설마 적들도 동굴을 통해 우릴 기습하려고 했던 건가?

“잠깐! 모두 여기서 대기해! 아니, 모두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어!”

나는 모두에게 그렇게 소리 친 후 다시 돌아섰다. 거미들을 보내서 실패한 다음의 공격진이라면 아무래도 그보다 업그레이드 된 형태 일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나는 좁고 어두운 통로 속으로 몸을 날려 미끄러지듯 단숨에 통과했다.

< 왓! 몽몽! >

통로를 지남과 동시에 바닥이 사라져 버렸고, 나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어둠 속으로 추락해야 했다. 이대로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리는 것 같다는 섬뜩함이 스쳐 가는 순간, 뭔가 보였다.

[ 주인님! ]

순간적으로 높인 안력으로 확인한 바닥에 간신히 별 다른 충격 없이 착지할 수 있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총성이 들리고있는 방향을 확인해보니 그 쪽은 그야말로 더한 암흑이었다. 조금 전에는 거미들이 뚫은 통로에서 새어들어 온 빛 때문에 그나마 보였지만 저 앞은 아무리 내력으로 안력을 높여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 몽몽. 빨리 스캔 정보를 보여 줘. >

[ 주인님, 그보다…… ]

응? 아… 거미? 정찰용 A형인 모양이었다. 내 뒤를 따라서 우르르 동굴 안에 몰려들어 온 거미들 중 몇 대가 머리부분에서 척, 척, 헤드라이트를 켜기 시작했다. 훔친 사과가 맛있… 아니 훔친 로봇이 이렇게 유용할 줄이야! 몽몽은 정찰용 A시리즈를 선두로 모든 거미들을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기동시켰고, 나도 경공을 발동하여 거미들과 비슷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경공을 쓸 때보다는 느린 거미들의 속도에 조금 갑갑해 하면서 얼마간을 나아갔을 때, 드디어 3, 40미터 정도 전방에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좋아! 약간의 불빛이라도 있으면 자력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단숨에 거미들을 앞질러 달려나갔고, 순식간에 총격전의 현장에 도착해 버렸다.
어…? 이, 이건……
내 눈앞에 생각지도 않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넓은 공터… 아니, 광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 이게 정말 동굴 안인가 싶게 광활한 공간이었고 그 중심부를 물이, 강이 흐르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영화 속의 장면이 그대로 현실에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물론 감상에 젖어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쾅! 쾅! 쾅!
격렬한 총성과 함께 내 쪽으로도 피잉! 핑-! 유탄이 날았다. 나는 일단 신형을 멈추고 적당한 바위 뒤에 몸을 숨기며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해 보았다. 우선 30미터 정도 떨어진 이 쪽 강가(?)에 있는 ‘저 것’은……
고무 보트…? 형태는 그렇지만 보트치고는 너무 큰 거 아냐…? 그 위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거의 중형 배 수준의 크기인 것이… 아, 잠깐. 저 보트 위에 몸을 숨기고 상류(?) 쪽으로 총을 쏘고 있는 자들은… 그래. 은사도객들이다.
아직 뒷모습뿐이지만 틀림없이 낯이 익은 모습이었다.

< 은사도객…! 나다. 내가 왔다. 뒤 쪽 82도 방향. >

일단 전음을 날렸지만, 물론 대답은 없었다. 지하무림인들 중에서 전음을 쓸 수 있는 건 간부급들뿐이어서 은사도객들은 고개를 돌려 이 쪽을 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좋아. 지금부터 내 말에 1호가 대답해라. 난 너의 입 모양을 읽고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다. >

  • 알겠습니다, 천주.

< 우선 적의 규모는? >

  • 현재 공격 중인 적은 총 일곱 명, 그리고 이 곳으로부터 3, 4킬로미터 정도 더 상류 지점에 이 보트와 같은 규격의 보트 80여 척이 더 있습니다.

80여 척…? 쳇…! 또 물량 공세인 거냐? 옛날 비화곡은 안 그랬는데, 요즘 비화곡은 왜 이래?

  • 각 보트에는 5-7명의 승무원과 무장병이 탑승해 있습니다.

응…? 뭔가 이상한 걸? 저렇게 큰 보트라면 수십 명이 탈 수도 있을 텐데 각각 고작 그 정도만 타고 왔다고? 그렇다면……

< 혹시, 그 배… ‘수송용’인 것 같은가? >

  • 그렇습니다. 저희는 탈출 도중 기동성을 위해 모두 버렸지만, 처음에는 수많은 상자가 적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확인 결과,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적에게 발각되기 전까지 확인한 다른 보트에 적재된 상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어 있다고…? 그렇다면 그 안의 뭔가는 벌써 나왔다는 건가? 그럼 설마 나와 엇갈려서 밖에서 기다리는 수하들에게……

< 몽몽! 오는 도중 아무 것도 감지 못했냐? >

[ 그렇습니다. ]

< 제기랄…! 몽몽, 지금 바깥에 거미들이 얼마나 남아있지? >

[ 아직 전체의 70%가 남아있습니다. ]

그럼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되려나…? 하지만 역시 순서상(?) 이번의 ‘뭔가’는 거미들보다 강한 놈들일 가능성이 높다.

  • 천주! 곧 저희들이 따돌렸던 추적대까지 이 곳으로 올 겁니다! 지금 공격 중인 자들과 달리 화물을 보호하는 특수 부대로서 강력한 화력을 갖춘 자들입니다!

< 그보다! 그 화물이 뭔지는 못 알아냈나? 아무 것도? >

  • 그 것은… 죄송합니다. 생포한 자를 추궁해 봤지만 아직 자백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전에 승무원들의 잡담에서 ‘거미’운운하는 소리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 …됐어. 그 거면 충분해. >

…핫! 갑자기 맥이 좀 빠지는 군. 괜히 놀랐잖아…! 저 보트들은 새로 뭘 실어 온 게 아니라, 바로 KS시리즈를 여기까지 공수해 온 거였군. 그리고 회수를 위해 대기 중이었던 거야. 그럼 이거, 이거… 하하하핫~! 얘기 끝났네?

  • 천주! 추적대입니다!

< 아아~ 괜찮아, 괜찮아! >

  • 예?

< 몽몽. 거미 부대 출격! >

이제 우리 꺼가 된 거미 군단이 적의 추적대, 거미 자신들을 수송해 줬던 병력을 간단하게 해치워 버린 후, 나는 당연히 은사도객들의 안내를 받아 적의 보트 함대가 정박해 있는 곳을 찾아갔다. 지하세계의 장엄하기까지 한 규모와 분위기의 강에 엄청난 숫자의 보트가 줄지어 정박해 있는 모습은 상당한 장관이었다.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그게 적군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은사도객들이 운전해 온 보트를 조금 멀찍한 곳에서 멈추게 하고는 한 쪽 발을 난간에 걸친 여유로운 모습으로 명령했다.

< 거미 부대, 2차 공격 목표는 저 멋진 항구. 실시! >

[ 실시! ]

그토록 끔찍하고 암담했던 거미 군단의 해일과도 같은 습격이 적에게 그대로 되돌려지고 있었다. 기습에 놀란 놈들도 즉시 무기를 들고 쏘며 저항을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각각 수십 대의 거미들에게 둘러싸여 비명을 지르는 신세가 되고 있었다.
흐흐흐~! 어떠냐, 이 놈들아…! 몇 시간 전의 우리 기분을 이제 너희들도 좀 알겠지…? 물론 너희들은 운송만 한 거지만… 뭐, 그러니까 나도 ‘죽이진 마라’는 명령을 내려 놓았다구. 아… 하지만 거미들은 역시 이성이 없는 관계로 조금 거칠긴 할 거야. 우리 애들이 겪었듯이!

[ …주인님! 오른 쪽 세 번째 보트를 주목해 주십시 오. ]

< …저거? 저 금속박스 같은 게 실린 보트 말야? >

[ 그렇습니다. 아직 내부 스캔이 가능한 거리가 아 니라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유일하게 군복을 입지 않은 인물이 계속 저 장치 쪽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

흐음. 그러고 보니… 그러네? 주변 군인들의 지원을 받아 어찌어찌 거미들의 포위를 뚫고… 음. 아무래도 곧 도착하겠는걸?

< 1호! 시동키고, 저 쪽으로 이동시켜! 서둘러! >

내가 탄 보트는 곧 지시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 했지만, 몽몽이 말한 자는 내가 경공으로 건널 수 있 는 거리에 마악 도달했을 때쯤 한 발 먼저 도착해 버렸다. 그가 서둘러 금속 박스를 열고 뭔가 조작하는 가 싶더니……!

어랏? 뭐야? 거미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춘다. 저 많 은 거미가 동시에…? 그렇다면 저건 거미들의 ‘비상용 작동 정지 장치’같은 건가? 거미들의 공격을 어이없이 중단시킨 민간인 복장의 사내는 한숨을 돌리는 모습으로 이마의 땀을 닦다가 문득 우리 보트의 접근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 남아있는 병력들에게 그것을 알리느라 고함을 질렀지만 멀쩡한 병력은 이제 겨우 세 명뿐이었다. 그리 고 적인 나는 이미 보트를 박차고 그들 쪽으로 몸을 날리며 생사금마도결을 펼치고 있었다. 풍운지왕결(風雲之王訣)… 백호참격(百虎斬擊)! 일전에 제대로 쓰지 못해서 아쉽던 백호참격이 세 명의 병력들 사이에 떨어진 직후, 그들은 그 파장을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 중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있나 슬쩍 확인한 다음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고 문제의 금속박스 쪽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 서있던 금발의 깡마른 중년 남자, 예의 ‘민간인’이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권총을 빼들었지만 나는 그에게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 고 금속박스를 살펴보았다. 크기가 거의 구형 세탁기 정도… 아, 아니다. 뒤쪽에 덮여 있던 천막을 걷어내니까 대형 자판기보다도 큰 거 같다. 겉으로는 그냥 커다란 금속박스로만 보일 정 도로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이 열쇠 구멍에 특정 열쇠 를 넣고 돌리면 그 위의 작은 덮개가 열리는 구조인 것 같고……

“…당연히 이 덮개 안의 뭔가를 조작하면 거미들을 멈추는 전파 같은 게 나오는 모양이지?”

나는 천천히 시선을 민간인에게 돌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무, 무슨……”

“열쇠.”

“아, 아니 그건, 그러니까……”

그는 코앞에서 권총을 겨누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겁 을 먹고 버벅대다가 결국 제풀에 포기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얌전히 총구를 내리더니 주머니에서 열쇠 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저기, 난 우디, 닥터 ‘케인 우디’입니다.”

“아, 그래요? 반갑소, 닥터 우디.”

“…대체,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요. 어떻게 KS시리즈 를 역으로……”

“내 부하들 중에도 훌륭한 기술진이 있으니까.”

“그,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단 시간에……”

“그보다…! 댁도 이 거미들의 개발자겠지?”

내가 다시 지긋이 노려보기 시작하자, 닥터 우디는 반사적으로 다시 권총의 총구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닥터 우디는 다시 얌전히 총구를 내리고는 은사도객 3 호, 아니 2호던가? 하여간 자기 목에 칼을 대고 있는 이에게 권총을 건네주어야 했다.

“아, 저기, 그러니까… 진유준씨가 KS시리즈 때문에 고생하고… 그래서 화가, 화가 좀 났을 거라는 건 알지 만… 전부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본래 병기 개발은 대 부분 제이 소장이……”

“닥치고, 이제 내 말에 대답이나 해! 이런 기계가 본 부에 또 있나?”

“그건… 아, 이, 있어요! 실험용이! 하지만 이보다 출 력이 약합니다. 이건 아무래도 실전용으로 만든 거니 까.”

“거 다행이군.”

나는 닥터 우디를 향해 뿜어내던 살기를 거두고 씨 이익- 웃어 주었다.

잠시 후. 동굴 밖에서 대기 중이던 수하들과 터너 소대, 그리 고 거미 군단까지 모두 지하세계의 강가에 집결하게 되었다. 나야 박 터지게 싸운 기억은 지워버리고 흐믓 한 마음으로 거미 군단의 위용을 바라 볼 수 있었지 만, 페트라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아직도 껄끄럽고 불 안한 마음으로 거미들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 페트라…! 이거, 내가 말해 주는 데로 개조할 수 있겠나? 이 쪽 회로와 이 쪽 회로의 선을 여기, 여기, 이 쪽으로 변경하고…… >

나는 뚜껑이 열려진 거미 군단용 기계의 내부를 보 여 주며 몽몽이 알려 주는 데로 페트라에게 전달했고, 가만히 들으며 생각해 보던 페트라는 다행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전자 장비 개조가 특기라는 페트라의 이력서(?)를 보았을 때도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었다.

< 장비만 있으면 20분 안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제 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장비는 헬기가 폭발 할 때 잃 어 버려서…… >

< 그건 걱정 마. >

“닥터 우디!”

“예?”

나는 다시 그를 노려보며 당연히 어딘가 있을 수리 용구를 요구했고, 그는 얌전히 그 것들이 든 박스를 꺼내 놓았다. 사실 이미 몽몽이 스캔해서 위치를 알아냈는데도 굳이 그를 통한 건… 솔직히 ‘재미있어서’였다.
이 닥터 우디라는 남자는 뭐랄까… 나의 살기 어린 눈빛 한 방이면 뭐든 꺼내 놓는 자판기(?) 같다고 할까…? 연구실에서만 틀어박혀 지냈는지 연구소 전체의 사정이나 군사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듯 했지만, 그나마 자기가 알고 있는 건 조금만 겁을 줘도 술술 털어놓는다. 내 느낌이나 몽몽의 거짓말 탐지 기능으로 체크해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그렇게 겁이 많으면서도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은 또 어쩔 수가 없는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페트라에게 은근히 다가가며 물었다.

“아, 저어… 아가씨가 혹시 우리 KS시리즈를 해킹 한 거요…? 그게… 설사 아가씨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당신들에게는 그걸 동시에 실행할 정도의 출력을 가진 장비가 없었을 텐데 어떻게……”

그는 정말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열심히 물었지만 페트라는 대답은커녕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장담한 데로 말끔하게 개조 작업을 마친 후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천주. 하명하신 데로 끝냈습니다. 저는 잘 모르는 장비지만, 강력한 출력의 전파를 쓸 수 있는 장비가 아닌가 합니다만…… >

< 역시 잘 아는 군. 바로 그거고, 본래는 저 수많은 거미들의 기동을 동시에 정지시키거나 재 가동시키는 장비지, 그리고 지금의 개조로 인해 우리 측의 통제신호를 중계함과 동시에 증폭시키는 장비로 바뀐 거야. 다시 말해, 우리 측 통제 신호가 상황에 따라 약해지더라도 그걸 보강해 주는 역할인 거야! >

상황에 따라 약해지는 게 아니라, 몽몽의 원래 약한 신호를 증폭시키려는 거지만… 어쨌든! 이제 우리는 저 어마어마한 거미 군단을 모조리 데리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 아…! 그럼 천주께선 저 것들을 계속…… >

< 적의 무기로 적을 치는 거야! 조~오찮아? >

< 그, 그건… 그게 합리적이라는 건 알지만…… >

< 왜 그래, 페트라. 보급 전문가가 설마 자기 취향에 맞는 것만 취급하겠다는 거야? >

< …그렇지 않습니다. 자꾸 약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천주. >

페트라는 내 앞에서 물러나며 자신도 모르게 우리가 탄 배 위에도 잔뜩 실려있는 거미에게 시선을 옮겼다. 곧 그 시선을 거둔 페트라는 성큼성큼 닥터 우디 앞으로 다가섰다.

“…당신이 저 것들의 개발자죠? 게다가 오늘 여기까지 가져와 우리를 습격하게 한 거 고요!”

“아, 난… 그게… 조금……”

쫘악~!
주변 사람까지 깜짝 놀랄 정도의 소리와 함께 닥터 우디의 따귀를 날린 후에야 페트라는 닥터 우디로부터 돌어서서 배 안의 거미들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으음.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어, 은사마군…? 은사마군도 설마… 아, 아닌가보다. 아닌 정도가 아니라 나도 직접 만지기는 찝찝한 거미를 손에 들고 박사에게 다가가네?

“이 외형과 표피… 왜 이렇게 실제와 똑같이 만들었죠? 이 정도 크기라면 보통 진짜 거미라고 보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은사마군이 차분하게 묻자, 또 한 대 맞는 줄 알고 긴장했던 닥터 우디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게… 가까운 곳에서 확인되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먼 거리에서는 위장 효과가 충분하고… 그리고 공격받는 대상에게 공포와 혐오감을 일으키는 건 병기로서의 장점이니까……”

“그렇군요.”

은사마군은 그게 궁금했을 뿐이라는 듯 들고 온 거미를 태연하게 박사에게 내밀었다.

“아… 하핫! 아가씨는 다행히 거미를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하긴, 요즘은 거미를 애완 동물로 키우는 사람도……”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딱 잘라 부인한 은사마군의 눈빛에서 비로소 서늘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전… 흉물스런 털이 숭숭 나고 다리가 여럿 달린 것들은 다 싫습니다. 특히 거미의 몇 개인지 모를 눈알들이 번들거리며 동시에 노려보는 시선이 싫고,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그 머리 위에 집을 짓는 무신경함이 불쾌하고, 잡은 먹이를 실에 묶어두고 자신이 배가 고플 때까지 죽음의 공포에 떨게 방치하는 식생활을 증오합니다.”

은사마군에게 거미를 받아들던 박사의 손이 굳어지며 거미를 놓치고 말았다. 은사마군은 자기 발 앞에 떨어져 진짜 거미처럼 버둥대고 있는 거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린 이 것들을 계속 활용할 생각이에요. 그러니 이번 일이 끝나면, 당신 손으로 ‘전부’ 예쁜 모습으로 바꿔 주시길 바랍니다.”

말투는 끝까지 예의발랐지만 시선 속에는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죽여버리겠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로봇 디자인 하나 잘 못 했다가 수백 만대의 거미 로봇을 일일이 예쁜(?) 모습으로 바꿔야 할 신세가 된 닥터 우디는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없이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다시 잠시 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완전히 재정비된 부대가 되어 적의 본부를 향해 쳐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압수한 적의 무기로 재무장하고, 강탈한 적의 보트에, 훔친 거미 군단을 바리바리 싣고 말이다.

< 전군… 출진! >

나의 간단한 명령이 떨어지자, 80여 척의 보트가 일제히 시동을 걸고 발진을 시작했다. 우리 인원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심하지 않은 부상을 입은 적병은 모두 보트 조종사로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시역으로 그들의 등에 각각 B형 거미를 한 마리씩 붙여 버렸고 말이다.
나는 질주를 시작한 선두의 보트에서 빠르게 밀려오는 지하세계의 바람을 맞으며 은사마군에게 말했다.

< 은사마군! 이번 일이 끝나면 난 너에게 크게 한턱 쏴야 할 것 같아! 너의 수하들이 이렇게 큰 공적을 세웠으니 말이야! >

< …그렇지 않습니다, 천주. 그들은 천주께서 하명하신 임무를 제때에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적의 수송대를 발견한 것도 그들의 순수한 능력이 아니었고 말입니다. >

< 하하핫~! 거 고지식하긴! 운도 실력이라구! >

< 그게 아니오라, 실은… 정체불명의 인물이 은사도객들을 이곳까지 유도하지 않았다면…… >

< 뭐? >

< 은사도객들이 절벽 위를 수색하여 동굴을 발견한 것까지는 그들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은사도객들이 동굴 안의 헤매고 다닐 때,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그 뒤를 추적하지 않았다면 이 보트들이 정박해 있는 장소를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끝내 상대의 얼굴조차 보지는 못했지만…… >

나는 은사마군이 내미는 것을 받아들였는데, 그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메모지였다.

< 상대는 이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힌 것만을 남겨놓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

알 수 없는 문자…?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메모지에 적힌 문자들은 천년 전 천우신이 내게 가르쳐 준 천이단의 암호문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유출된 암호는 폐기되기 마련이므로 이제는 천이단, 아니 현 GM의 천우신 기념관(?)에나 있을 법한……

< …내가 알고 있는 암호문이군. 나의 옛 친구의… 후인이 남긴 거야. >

…챈. 그였다. 무공은 그렇다 쳐도, 신출귀몰한 것만은 천우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소령이와 미령이까지 데리고 다니며 말이다.

진유준님께서 과거 그 분의 후인이 아니라, 환생한 본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이 것은 저의 시대에 돌아오신 것에 대한 저의 작은 선물입니다.

그렇게 적혀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차례로 소령이와 미령이의 메시지도 있었다.

소령 : 유준 오빠 파이팅~! 하지만 우리 금동이 다치게 하면 안돼요!
미령 : 죽거나 하지 마요. 우리 가혜 언니 울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훗…! 더더욱 지거나 죽을 수가 없게 되었군. 자아- 어디 그럼, 과거의 좋은 인연이 준 선물에 기뻐하며… 악연을 정리하러 가볼 거나!

나의 악연인 원판은 일단 제켜두고라도… 이모님의 악연, 하은이의 악연, 그리고 이제 나의 악연까지 되어 버린 닥터 제이! 원판이 없을 때는 DP의 연구소이자 이 시대의 비화곡을 지배한다는 그도 자신의 신제품 거미 군단을 빼앗길 줄은 몰랐을까…? 거미 군단과 함께 진격하는 우리는 그야말로 파죽지세! 일사천리! 쌍피건식! …마지막 표현은 좀 그렇지만, 하여간 우리는 거침없이 적진을 뚫고 나갈 수 있었다.
거미 군단의 다양한 공격 능력과 떼거지 돌격, 거기에서 우리 측 고수들의 탁월한 사격 능력에 의한 원거리 지원. 그 것이 우리의 기본 전술이었다. 때때로 내가 먼저 적진에 뛰어들어 난장판을 만들며 전열을 흐트러트리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거둔 중요 전적은 비슷한 기종의 보트와 수상스키를 이용한 특수부대와의 조우 6회, 전부 격침! 지하 중간 기지 발견 3회, 싸그리 완파! 물론 그 외에도 강 바깥에서의 다양하고 산발적인 공격도 수시로 있었지만, 머리 수 넉넉한 거미들이 계속 몸빵으로 방어해 주었다. 참으로 여러모로 유용한 거미 군단인 것이다.

< 이봐! 아직도 거미가 싫어? >

적의 본부가 코앞에 도달했을 때, 나는 페트라에게 그렇게 물었다.

< 물론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 녀석들은 진짜 거미가 아니니까…… >

훗~! 사람 마음은 참으로 간사한 것인가 보다. 나도 남의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제 곧 적 본부의 지하 출입문에 도착하게 되면 더 이상 거미 군단을 쓰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다. 지금까지는 배에 싣고 온, 저 크고 무거운 증폭기를 사람이 직접 들고 다니며 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응? 이 목소리와 말투는… 닥터 제이?
동굴 어딘가, 여기저기에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는 모양이다.

“잘 들리나? 잘 들리면 그만 멈춰주게, 유준 군.”

< …전군 정지! >

“그래… 그쯤, 거기쯤이 맞아. 사실 정문은 조금 더 가야 하지만, 지금 자네가 멈춘 곳 부근에도 예비 통로가 있지.”

“…또 무슨 수작입니까?”

“훗~! 수작은 무슨…! 자네가 정문을 뚫고 들어와서 내가 있는 곳까지 오려고 하면… 자네 입장에서는 시간 낭비고, 내 입장에서는 연구소의 소중한 시설이 많이 상하게 되므로 서로가 손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야.”

“다시 말해… 이 부근의 통로는 연구시설이 아닌, ‘적을 상대하는 것이 목적’인 장소와 통한다 이거로군요.”

“빙고! 정답!”

“…그런데, 내가 시간을 조금 단축하려고 당신 입맛에 맞게 움직일 것 같습니까?”

“으음. 시간 단축 말고도 자네가 그 쪽으로 가야 할 이유가 또 있다는 것을 곧 알려 주겠네. 그 전에 한 가지… 내가 자네를 너무 얕봤던 것을 사과해야겠어. 아무래도 결정적인 건 자네의 그 소중한 부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역시… 몽몽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래도 KS시리즈의 공격을 혼자서 그 정도까지 버텨 낼 줄은 몰랐어. 사실… 생사금마도결처럼 난해한 무공을 자네 나이, 자네 정도로 짧은 수련기간, 그런 조건하에서 그 정도 경지까지 익힐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나는 매우 감탄하고 있어.”

뭐야, 이 사람. 무공에 대해서도 좀 안다는 건가?

“음. 나는 하운 군처럼 무공을 직접 구사하지는 못 한다네. 하지만 역시 ‘연구’하는 건 좋아하지. 음악 평론가가 꼭 악기 연주를 잘해야 하는 건 아닌 것처럼, 나도 평가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네. 게다가 후후- 설마 잊고 있었던 아니겠지? 하운 군이 확보한 정보에는 분명 자네의 무공에 대한 것도 있다는 걸 말야.”

원판이 가지고 있는 미래 로봇에는 분명 몽몽에게서 백업한 자료… 즉, 비화곡의 성지에 있는 모든 무공과 심지어 나의 생사금마도결에 대한 자료까지 있다. 그걸 잊고 지낸 건 아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 혹시 생사금마도결을 다른 누군가에게 익히게 했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가요?”

“흐음- 그걸 예상했으면서도 의외로 태연한 걸? 자신이 이미 생사금마도결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익혔다 는 자신감 때문이겠지만… 그 때문에라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지? 바로 그 곳……”

닥터 제이의 말에 맞춰 동굴의 벽 한 곳의 바위, 아니 바위로 위장된 문이 키이잉~ 소리와 함께 열리고 있었다.

“그 문안에 자네의 무공을 자네보다 더 오래, 더 맹렬하게 수련한 자가 있다고 하면 말이지. 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약 20년 전부터 생사금마도결을 익히기 시작했네. 수련기간도 기간이고, 우리 역시 여러 가지로 공을 들였기 때문에 그의 내공은 자네를 능가한지 오래야.”

쳇! 역시… 그 쪽으로도 준비해 놓고 있었군.

“조금 전에는 칭찬해 놓고 이런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의 자네에게는 아직 생사금마도결의 계승자라고 자처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네.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지만, 아직 뭔가 결정적인 부분이 결여되어 있거든.”

“…훗! 내게 결여된 부분이, 그 문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는 있다는 얘긴가요?”

“후후후- 그건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내게 말로 들어서야 납득할 수도 없을 테니 말이야.”

“그으래요?”

< 천주! 안됩니다! 함정일 겁니다! >

내가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자, 페트라가 먼저 날 붙들며 만류했고 다른 이들도 저마다 고개를 젓고 있었다.

< …함정이래도 상관없어. 난 여기서 내린다. 지금부터 지휘권은 페트라가 맡고, 은사마군도 예정대로 움직여. >

< 천주! 어째서 저런 뻔한 도발에 응하시는 것입니까! >

< 왜… 그러냐면 말이지. >

나는 모두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나는… 마군황이기 때문이야. 지하무림의 모두가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음을 증명함으로서 지하무림의 하늘이 된 자…! 이제 다른 자들에게도 너희들이 죽일 수 없는 자는 다른 누구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겠어. 나와 같은 무공, 나를 능가하는 내력, 그 딴 거와 상관없이 말이야! >

내 팔을 붙들었던 페트라의 손에서 스륵 힘이 빠져 나갔고, 나는 훌쩍 몸을 날려 닥터 제이 제시한 문 앞에 내려섰다. 문 안쪽은 동굴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밝은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나는 문안으로 발을 디뎌 걸어 들어가면서 몽몽에게 말했다.

< 쓰바- 기왕 가는 거 졸라 허세는 부려 봤는데… 근데 사실 별로 자신 없다. 몽몽… 넌 왜 말리지 않았냐? >

[ …주인님께선 상대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는 분이 아닙니다. 뭔가 대응책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

< 하아- 이 번엔 그 딴 거 없어, 몽몽. 마군황이란 거… 꽤 피곤한 거야. 강한 힘으로 지위를 얻은 자는 다 비슷하겠지만, 수하들 앞에서 받은 도전을 거부해선 안 되는 거라구. 뭐… 나도 나와 같은 생사금마도결을 익혔다는 자가 정말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

[ …정말 그런 이유뿐이십니까? ]

< 음… 사실 또 하나 있긴 있지. 그건…… >

내가 문득 말을 멈춘 것은 복도의 끝까지 도착했는데도 그 곳이 막다른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왼쪽의 벽이 위쪽으로 스르르 열렸는데, 열리기 전까지는 다른 벽과 구분이 가지 않았었고 열릴 때의 소리도 지극히 작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계속 걸어가면서 내가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문이 내려와서 벽이 되는 기척을 느꼈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5분 정도를 걸어갔을 때, 나는 드디어 다른 곳과 다른 디자인의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생사금마도결을 얻은 자라……!
그런 생각을 되새기면서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의 열 배 가까이 되는 20년의 세월을 수련했다고……?
어쩐지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실내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직은 그리 대단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느낌의 뒷모습이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었다고 해도, 이 시대의 불안정한 기의 흐름 속에서 나보다도 깊은 내공을 쌓았다니…! 지구상에는 아직도 어딘가에 천년 전과 같은 수준의 기가 흐르는 곳이 있는 걸까…? 그건 확실히 궁금하지만 쉽게 알려 주지는 않을 테니… 으음. 그에 대해 물어 보는 건 일단 한판 붙고 나서 생각하자.

“어이~ 날 기다렸나?”

“…당신이 진유준이 맞다면!”

응…? 어쩐지 낯익은 음성인 걸……?

“후훗-! 정말이지 오랜 세월을 기다렸지. 자그마치 20년을 말이야!”

“쯧…! 난 알지도 못하는 사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몸을 기다렸었던 모양이군.”

이거 정말 아무리 들어도 낯익은 음성이다. 게다가 이제 보니 뒷모습도 언제인가 본 듯한……

“다른 놈들이 기다린 건, 내 알바 아니지.”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와 함께 팔을 앞으로 하고 보이지 않게 하고 있던 그의 칼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정글도…? 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맙.소… 사!
나와 똑 같은 얼굴이, 나와 똑 같은 눈과 입으로, 나와 똑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내 어디선가 다시 닥터 제이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유준 군. 자네가 모르게 자네의 유전자를 빼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 자아- 어떤가. 이 것이 자네가 싸워야 할 상대! 자네가 믿고 있던 ‘자네만의 무언가’까지 똑같이 가진… 자네 자신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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