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6-1화 : 환상의 섬.(1)
“금동이와 나, 진유준이 그려진 고대의 그림……?”
언제던가… 강남의 무역센터 건물에서였던 것은 기억이 난다. 고구려 문화 전시회…? 정확한 명칭은 생각 안 나지만 하여간 우리 고구려의 문화재를 복원하여 전시회를 여는 곳에 간 적이 있었다. 소령이가 보여주는 그림은 거기서 본 그림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아무리 봐도 사람 얼굴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만한 타입의 그림이 아니었다.
하지만… 파도치는 바다와 대형 어류(상어?)를 묘사한 듯한 배경과 원숭이, 그리고 칼을 든 남자(나?)의 주위로 네 줄기의 번개가 치고 있는… 이 구도는 아무래도 나와 천우신이 금동이를 구출할 때의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가.
“맞죠? 맞죠?”
“그게, 이건… 음……”
소령이가 반복해서 물었지만 일단 얼버무리며, 이번엔 먼저 슬쩍 주위 상황을 살폈다. 난 아까처럼 소령이에게 접근하고 있는 건데도 미령이는 그때와 달리 총을 빼들기는커녕 놀란 눈으로 노트북 화면과 날 번갈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챈 역시 이제야 천천히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뿐이고… 난 비로소 여유를 가지고 좀 더 바싹 다가가 문제의 그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몽몽. 이거… 그림의 등장인동물(?)들과 상황 묘사는 역시 거의 그때와 일치하는 것 같지 않냐?>
[그렇습니다. 인물의 복장은 일견 주인님이 방문한 시대보다 앞서는 고구려인의 복장과 유사하게 보이나, 그건 주인님의 특정 복장이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전반적인 그림체는 방문한 시대와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저 옷… 고대인들 복장에 땡땡이 무늬를 그려 넣어서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복장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결국 내 전투복을 그린 거라 이거지? 하지만… 내 정글도 디자인은 저렇게 화려하고 멋지지가 않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우신이라면 저렇게 왜곡된 미화를 지시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그 때문에 천우신님처럼 주인님과 동급에 가까운 고수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그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인님 자신은 크게 의식하지 못하셨을지 몰라도, 생사금마도결 특히 삼시전결과 같은 양강 계열의 초식이 펼쳐질 때의 에너지 방사 형태는 저 그림의 묘사처럼 병기 자체의 형태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긴, 그러고 보니 나도 다른 사람들이 발산하는 검기 같은 걸 감탄하며 본 적이 있었지. 대천마(大天魔)의 강렬한… 아니, 아름다움으로 치자면 역시 북천여제(北天女帝)… 나족공주(裸足公主) 자옥령의 검기가 가장……>
[에에~ 나중에 대교님께 이르는 수가 있답니다.]
<…요정 몽. 이럴 때 대교는 아예 논외야. 그 애는 특정한 기뿐 아니라 숨결 한 모금까지 사랑스럽기 때문… 크흠! 음~>
괘씸한 요정 몽 녀석, 이 중요한 진품명품 시간에 주인님께 얼레리 꼴레리 공격을… 으음- 하여간, 이 그림이 진품이라 하면… 확인해야 할 건 한 가지.
“이 그림… 너희들 내부 자료에 있는 거지?”
내 질문에 소령이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역시나 니들이 천이단이었다 이거지? 그렇다면… 응? 뭐야? 이번엔 미령이 표정이 왜 저래?
“어, 언니! 설마 이 그림… 거·기·에 있는 거?”
“응? 아……”
소령이는 확실한 대답을 회피하며 뒷머리를 긁적였지만, 미령이는 서둘러 손을 뻗어 노트북의 뚜껑을 덮어 버렸다. 이상할 정도로 긴장한 건 미령이뿐이 아니었다. 챈 역시 그제야 안색을 굳히며 다른 G.M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저 그림의 출처는 G.M, 현대의 천이단 내부에서도 상위 그룹에만 허락되는 기밀인 모양이다.
얼마 후, 나와 챈 만이 남아 있게 되자 미령이는 소령이를 붙들고 소리쳤다.
“언니 미쳤어? 거기 자료는 또 언제 빼낸 거야? 응? 안 들킨 거야?”
“두 달 전에… 나, 난 그냥 금동이 그림이 있길래……”
“아휴~ 정말 어쩌려고 그래! 그런 짓 했다가 ‘후보’에서 제외되면 어쩌려고……”
거기까지 말하던 미령이는 아차, 하더니 스스로 황당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무슨 ‘후보’라는 발언이 문제인 모양인데… 모텔에서 금동이 얘기할 때에 이어 두 번째 실언을 한 셈이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아무래도 이 분 진 선생께는 그 정도 정보 유출도 문제 될 게 없다고 판단됩니다.”
챈이 미령이에게 아까처럼 그렇게 말해 줬지만, 녀석은 자책 모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듯 입술을 깨물고 어쩔 줄 몰라 하더니만 결국 아무 말 없이 팩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 버렸다. 이어 소령이까지 미안해 어쩌고 하며 따라서 가버리고… 결국 챈과 나만이 남게 되었다.
“상대방 야단치다가 자신이 실수해 버렸으니… 훗~! 녀석도 참.”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이에 비해 힘든 역할을 많이 하는 분들입니다.”
“쟤들은… 음, 그런 것 같군.”
“진 선생은 골든 차일드는 물론이고 아가씨들도 전부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만……”
“…아니. 금동이는 분명히 그렇지만, 쟤들은… 그냥 예전에 알고 있던 애들과 굉장히 닮았을 뿐이지.”
날 전혀 못 알아보는 애들, 그리고 나 역시 알고 있던 애들과 닮았을 뿐…라는 표현을 쓰자니 기분이 웬지… 대교 때처럼 서글플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소령 아가씨가 보여 준 그림은 아마도……”
잠시 감상에 빠져있던 나는 챈의 말에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갑자기 한국어를 쓰기 시작한 건 그렇다 치고… 지금 분명히 소령이라고 했지?
“연옥도(煉獄島)에 있는 벽화일 겁니다.”
에? 거기다가 연옥도~?
“쟤 이름도 소령이라고? 그리고 연옥도…? 그게 아직도 있어?”
하은이, 아니 대교조차 이름이 달라졌는데 어떻게 소령이는 같은 이름일 수가 있는 거지? 그리고 연옥도는 몽몽의 조사에서 안타깝게도 오래 전에 화산 폭발 같은 재해로 인해 사라졌다고 밝혀졌었는데……
“후후~ 역시 그 이름들까지 아시는군요. 조금 전의 아가씨들 중 언니 되는 분은 저희들 G.M의 진짜 명칭… 천이단이란 명칭을 사용하던 시절의 단모(團母)님과 이름이 같지요.”
아핫~! 천우신 그 녀석! 결국 해냈구나!
“진 선생은… 그 때의 암천주와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나누었다는……”
아,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전해졌겠구나. 근데 왜 이제서야……
“…진하사님의 전인이시죠?”
에?
“아까의 그 무공은 전설로만 들어온 진하사님의 생사금마도결……”
“…맞아. 직접 본 적도 없을 텐데 용케 다들 알아보는군.”
“역시…! 하지만 저는 소령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금방 연관지어 생각 못했을 겁니다.”
“그보다… 당신도 방금 언급한 ‘진하사’,라는 호칭밖에 모르는 건가?”
“진하사님이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전승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저희들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전설’이었던 거고 말입니다.”
이거… 아무래도 내 별호(?)만 본명처럼 전해진 모양이다. 하긴 현재의 나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해 놓고도 이제까지 이름이 겹친다는 걸 모르는 걸 보면… 근데… 천이단 씩이나 되는 정보 조직에 뭔가 빠진 기록이 있다는 건…… 천우신… 천우신 그 친구…!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렇게 정보 수집과 보존에 목메던 친구까지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 건가? 남은 사람들 모두에게 가급적 나에 대한 얘기를 후세에 전하지 말아 달라고 한 건 사실 무엇보다 ‘고리아 교’니 ‘대한특공가’ 같은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 놓고 오는 게 맘에 걸려서 그랬던 건데……
“후후~ 전 오늘 밤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전설로만 여겼던 일들을 직접 확인하는 행운을 누릴 줄이야.”
내 신분을 확신하게 되어서 그런가? 이미 적대감 같은 건 찾아보기가 어려웠고, 지금은 ‘뭔가 직접 확인했다’는 사실 자체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색이다.
“…나, 아니 우리 쪽에 대해 전해진 게 또 뭐가 있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은 한정적입니다만… 당시의 암천주께서는 ‘진하사님의 후손이나 전인과 만나게 되면 결코 다투지 말 것이며, 형제의 예를 다하라.’라는 유언을 남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쳇, 새삼 눈물 나려고 하네. 제기- 여러 가지로 더럽게 미안하다. 난 솔직히 대교 말고는 그렇게까지 그리워하지 않았는데……
“진 선생……?”
“아, 그냥… 나도 기분이 좀 묘해져서… 그렇게 먼… 너무나 먼 세월을 넘어… 그 당시 친했던 친구들의 후손…끼리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말야.”
“저도 정말 기쁩니다. 전 노견(路犬) 출신이라 자격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항상 그분들의 전설을 동경하고 있었거든요.”
“노견 출신……?”
“아, 제 고향에서는 버려진 고아를 그렇게 부릅니다.”
“…그거 되게 기분 나쁜 표현이군. 버려진 것도 서러운데 왜 그딴 식으로……”
“후후~ 괜한 말을 한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런 반가운 인연에는 술이 빠질 수 없겠지요?”
“동감!”
챈과 나는 간단히 의견 일치를 보고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불법 침범했던 학교를 떠나 적당한 술집을 찾아 걷고 있다가, 챈은 문득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 한 장을 빼서 건네준다.
“우신 무역회사…? 대표… 재키 챈?”
“저를 거두어 주신 분이 영화 배우 성룡의 팬이었거든요.”
그렇다고 똑같은 이름을 지어 주다니 누군지 참……
“참고로, 위장 회사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실제로 운영되는 건실한 회사이며 올해 한국에서 올린 수익만 해도……”
어쩐지 직접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고, 그게 몽몽의 통역을 듣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했더니… 음, 그럼 혹시……
“아까의 다른 G.M들은 회사 직원이었나?”
“아뇨. 요원들 운영은… 음……”
“아, 미안. 그런 것까지 캐물을 생각은 아니었어.”
어쨌거나, 천이단 요원들은 본래 짱과 그 친위대 빼고는 대부분 위장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대에는 그 전통이 더욱 발달하여 아예 겸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천우신도 워낙에 권력층 자제여서 따로 직업을 가지지 않았을 뿐, 어디 가서 뭘 시켜도 잘 해낼 또순이 타입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연옥도에서의 생활력 하나만 봐도… 아, 그러고 보니… 연옥도! 터줏대감 금동이와 알게 된 섬이며 연옥서생… 내 정신적 사부님의 안식처! 나와 천우신이 몇 년 동안이나 난장 깠던 그 섬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나? 으음~ 이거이거… 이런저런 얘기 다 들으려면 오늘 아예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