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6-2화 : 환상의 섬.(2)
1-6. 환상의 섬. (2)
…연옥도.
챈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돌아온 새벽에 나는 오랜만에 연옥도의 꿈을 꾸었다.
눈을 뜬 것은 오전 10시…? 혹은 11시…?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 삐걱댈 정도인 것은 결국 몽몽에게 알콜 해독과 신경 안정을 부탁했을 만큼 많이 마신 술과… 그리고 그와 함께 들이킨 추억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본래의 시대로 돌아온 이후 나는 대교에 이어 두 번째로 자주 연옥도 꿈을 꾸었었다.
어쩔 수 없이 정해진 기간 동안 갇혀 있어야 하는 공간에서 극도로 제한된 의식주만으로의 생활, 한정된 인원과의 협소한 정신적 교류 창구… 그리고 너무나 빡센 훈련!
환경만으로 보자면 군대 생활과 비슷할 정도로 삭막했던 연옥도였지만… 앞서 제대했던 군대처럼 ‘다시 가라고 하면 다 죽여버리겠어’ 같은 공간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운 추억의 장소가 된 이유는 역시 그곳에서 함께 지냈던 천우신과 금동이라는 진정한 친구들과의 기억… 얼굴도 못 봤으면서도 존경심 비스무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연옥서생 사부… 그리고 물론 내가 지금의 무공을 얻고 스스로의 의지로 수련했던 장소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몽몽. 연옥도… 더 찾아봤냐?”
“예. 연옥도는 전의 제 조사대로 800년쯤 전에 화산 폭발로 인해 소멸된 것이 확실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사실, 연옥도의 소멸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되던 사태였다. 거기 있을 동안 몽몽이 계속 조사하고 관측해 보니, 연옥도는 본래 맨틀 층이 약한 곳이라고 했었다.
거기다가 연옥서생 사부가 실시한 모종의 실험… 그걸 실험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하여간 사부가 한 어떤 일로 인해 층에 작으나마 균열이 생겼고… 언젠가 마그마가 뚫고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 것 같다고 했던 것이다.
연옥서생 사부가 있었던 때가 1300년쯤 전이고 실제로 화산이 폭발한 건 그로부터 500년이 더 지난 후이니 사부를 원흉으로 지목하는 건 좀 오버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챈이 ‘연옥도는 환상의 섬으로 부활했다’고 한 건 대체 무슨 뜻인 거야?”
챈 녀석, 기왕 알려주려면 전부 털어놓을 것이지 소위 내부 기밀인 건 빙빙 돌려 말하며 숨겨서 갑갑하다.
물론 녀석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또, 내게는 추가 조사가 가능한 나만의 조직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환상의 섬이란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의 조사를 토대로 추정하자면……”
몽몽은 내가 잠든 사이, 아니 챈이 연옥도를 언급한 순간부터 재조사에 들어가 알아낸 정보를 정리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건가…? 신비롭고 멋지다는 의미보다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이라는 의미로 ‘환상의 섬’이라는 건가? …쳇! 이런 식이라면 연옥도 부활이라고 반길 기분이 안 생기는데… 음, 하지만 아무리 짝퉁 연옥도라도 거기에 내가 떠난 후의 천우신과 소령이… 혹은 대교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렇다면 꼭 한 번 가봐야겠지?
“…몽몽. 계속 좀 더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대교님 보호체재, 소위 조직의 구축이 우선 시 되므로 많은 시간의 할애는 힘듭니다.”
“그야 당연하지. 연옥도와 천이단에 대한 건 나도 챈과 소령이 미령이를 통해 접근해 볼 테니까, 넌 지금의 우선 순위를 유지하라구.”
이젠 챈과 소령이, 미령이… 녀석들이 새로운 천이단과의 직통 채널인 셈이다.
챈의 말에 따르면 소령이와 미령이는 현 G.M을 이끄는 장로들 중의 한 명이 어렸을 때부터 키운 아이들이라는데, 정식으로 호적에 올린 양녀(나이로는 손녀가 어울리겠지만)들이라 서열로 치자면 챈의 고모뻘이 된다나?
아, 근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소령이는 물론이고 미령이까지도 과거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선택적 다이렉트 환생의'(?) 대교조차 과거의 이름은 어린 시절 잠깐 불린 아명으로 가지고 있을 뿐인데 ‘랜덤 환생’한 소령이와 미령이가 어째서……
“…그냥 타임씨의 친절이나 변덕… 아니면……”
“또 그 말씀을… 소령님과 미령님 때문인가요?”
“그래, 요정 몽. 특히 그 녀석들의 이름 말이야.”
“흐응~ 그건 저희들도 뜻밖이었어요. 그냥 우연이라고 하기엔 좀… 두 분은 대교님과 달리 ‘랜덤’이 분명한 것 같은데……”
몽몽에게도 환생에 대한 기존의 학술적 용어 같은 건 없어서 우린 일단 대교를 기준으로, 그녀와 달리 하은이와 소령, 미령 자매들처럼 정상적인… 말하자면 누구나 환생으로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올 수도 있다는 불교식(?) 세계관을 인정하고 그런 경우를 ‘랜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일단 ‘랜덤 환생’까지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친다 해도… 하은이의 ‘용모 일치’, 소령 미령 자매의 ‘이름 일치’는 아무래도 좀 심해.
더구나 그녀들 전부가 또 나와 만나게 되었다는 건 확실히… 앞으로 또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몰라도… 아니, 지금까지만 봐도 역시 누군가를 또 만날 것 같지 않냐? 음… 혹시 그 애… 소교는 못 찾았니?”
“아직은요.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곧 소교님도 등장하시지 않을까요?”
“글세… 그게, 나로서는 네 자매가 항상 한 세트로 연상되기는 한다만……”
“후후~ 제 예감으로는 소교님도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타임씨도 기왕에 친절을 베푸는 거라면 끝까지 베풀지 않을까요?”
“정말 친절이라면 무슨 걱정을… 제기, 관두자, 관둬! 설사 타임씨가 무슨 삐딱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해도 그걸 의심하느라 미리 신경을 소모할 필요는 없겠지.
일단 주는 선물은 즐겁게 받아 주겠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만약 소교 녀석도 등장한다면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반가워 해주겠어!”
난 다소 엉뚱한 다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건 몰라도 의심하느라 ‘미리’ 신경을 소모하는 건, 확실히 비효율적인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몽몽… 음주 후의 짧은 취침 시간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네가 알콜 해독과 신경 안정 같은 걸 해 줘서 그런지 컨디션은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다. 땡쓰-다.”
“후후~ 몽몽 오빠의 서비스, 종종 애용해 주세요. 갈수록 주인님 자신의 일은 맡기지 않으셔서 몽몽 오빠가 섭섭해 했다구요.”
“아, 아닙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제 의존도를 줄이려는 패턴은 매우 긍정적인 의식으로서 저 역시 권장……”
훗~! 요정 몽 녀석, 이젠 지 원판이자 오래비인 몽몽을 놀리기까지 하네? 물론 귀여운 여동생의 놀림이라는 건 여동생이 없는 자들의 로망인 면도 있지만… 음,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어제 여동생이 하나 생겼지? 어쩐지… 얼굴 보기 전에 각오부터(?) 하고 가야 할 것 같은 녀석이긴 하지만……
간만의 늦잠을 잔 나를 어머니께선 그리 탓하지 않으셨다. 물론 내가 몰래 밤 마실 나갔던 걸 모르셔서 그런 것도 있지만 결국에는 어제에 이어 당분간 날 부려먹을(?) 생각이셨기 때문이었다.
“…하은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단다. 그러니… 당분간 니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구경도 좀 시켜주고……”
그러다가 마음을 여는 것 같으면 다른 식구들과도, 특히 외할머니와의 만남을 주선하자는 말씀이셨다.
“저도 바쁜 일이 좀 많은데……”
“…큰 애 차가 또 사고 나서 당분간 쓸 중고차를 찾는다더라만……”
“…겸사해서 같이 데리고 다니면 되죠, 뭐. 여동생이 공짜로 생긴 것 같아서 정말 좋아요. 하하핫~!”
“주인님……”
“왜, 요정 몽.”
“이 키트 1호는 솔직히 그리 비싼 차도 아니고, 주인님은 현재 어마어마한 돈을 확보한 상태인데 왜 차 얘기만 나오면 소위 비굴 모드로……”
“짜샤~! 너희들을 이용하는 건 대교에 관한 일들로 한정한다고 했잖아. 너희들 덕에 생긴 돈도, 그게 얼마나 많건 내 개인적인 일로 쓰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이 녀석 키트 1호는 비록 너희들처럼 의식이 있지는 않아도 어쨌건 앞으로 아껴 주기로 한 녀석이잖아.”
“주인님의 성격상 그러실 지 모른다는 생각은 했고, 저희들도 주인님의 그런 면이 좋지만… 그래도 당분간 대교님께 소홀하게 되는 건……”
“그건 나도 싫어. 좀 빡세더라도 양쪽 다 챙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음… 근데 하은님은 왜 그런지 대교님을 미워하시는 것 같지 않나요?”
“니가 보기에도 그렇디…? 뭐, 그 때문에 오늘 둘을 만나게 하려는 거야. 이유를 알아야 대처하든지 어쩌든지……”
“…여하간 가자고.”
“응? 뭐?”
조수석의 하은이는 금동이를 안고 앉아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 미안…! 잠시 혼자 딴 생각하다가 그만… 암튼 출발할 테니 안전벨트 매라.”
“훗~! 뜬금없기는……”
끄음~ G.M씩이나 되는 곳의 노림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여유롭네, 이 DP의 공주님은! 뭐… 새벽에 챈에게 ‘원조 주인장의 후예로서’ 금동이는 조금 더 있다가, 그러나 확실하게 돌려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시간이 되어도 G.M들의 습격 같은 건 없는 거지만… 뭐, 일단 녀석의 대응을 지켜보기로 할거나?
“…아까 말했듯, 몇 시간 후에는 멋진 콘서트에 데려다 줄게. 그 전에…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있니? 아, 점심 먼저 먹어야지?”
키트 1호를 출발 시켜 골목을 빠져나가며 묻자 녀석은 잠시 뭔가 생각해 보더니 짧게 대답했다.
“호텔!”
“뭐?”
“나처럼 매력적인 아가씨를 모시려면 최고의 호텔이어야지. 식사는 룸서비스로……”
“야, 너!”
“후후- 농담이야. 근처의 아무 호텔이든, 국제전화할 수 있는 곳이면 아무 곳이고 상관없어.”
“전화라면 아까 집에서… 아니, 지금이라도 내 전화 써.”
난 내 핸드폰…을 가장한 몽몽을 내밀었지만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긴 통화가 될 거야.”
“뭐, 동생이 쓰는 전화 요금 정도야… 그냥 써.”
내가 태연하게 웃으며 재촉하자 녀석은 결국 몽드폰(?)을 받아들었다. 드디어 DP인지에 연락을 하려는 건가…? G.M이 선언한 정오에서 불과 20분을 남겨놓고 이런다는 건 DP라는 곳이 그만큼 신속한 조치가 가능하다는 의미? 챈에게는 천이단에서 전해 내려오는 천우신과 소령이(과거의)의 얘기 듣느라 깜박하고 DP에 대해서는 못 물어 봤는데 과연……
“…미안, 생각이 바뀌었어. 일단… 차를 아무 곳에나 세워 줄래?”
쳇, 내 몽드폰에 통화기록이 남는 게 싫은 건가? 아직 나나 몽몽의 정체를 모를 텐데 왜 이렇게까지……
나는 비상등을 켜고 길가에 적당히 차를 세운 후 하은이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흘끔 백미러로 뒤쪽을 살피더니 금동이가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일 만큼 더욱 꼬옥 껴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으음~ 챈에게 적당히 눈에 띄는 미행을 부탁한 건 나지만, 설마 저렇게 오토바이 두 대로 차를 쫓아오면서 검은 복장에 검은 헬멧이라는… 노골적인 위협 분위기를 조성할 줄은 몰랐다. 하여간 어디……
“갑자기 왜 그러니? 뭐 잘못된 거라도……”
짐짓 모른 체하고 묻자 녀석은 천천히 날 돌아보더니 엉뚱한 소리를 했다.
“오빠…! 어제 공항에서… 어떻게 한 눈에 날 알아봤지?”
“어, 그야 니가 보내 준 사진을 봤으니까.”
“그 사진만으로 날 알아봤다고?”
사실 몽몽이 선글라스 지우고 확대해 줘서 알아봤지…라고 할 수는 없는 관계로!
“…어렸을 때의 모습도 많이 남아있어, 너.”
상당히 찔리는 군. 15년 전의 꼬맹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잖은가.
“…이상한 오빠. 그런 정도로 날 알아볼 수가 있다니……”
“아… 하핫-!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원래 옛날에는 똘똘했잖냐! 커가면서 맛이 가서 그렇지.”
“후훗~! 그래, 오빤 정말… 내가 그때까지 만났던 중 가장 똑똑하고 친절한 소년이었어. 다들 꺼려하는 나와 하루 종일 놀아 주었고… 그래, 오빠는 블록 놀이 세트로 참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 냈었지.”
뭐야, 이 녀석은 진짜 어렸을 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건가? 녀석이야말로 어머니께서 보내 준 사진으로 날 알아본 건 줄 알았는데… 으윽! 갑자기 양심의 가책이 테크노를 춘다.
“하핫~! 넌 어릴 때 모습이 많이 남아있고… 그리고 지금은 수 억 배 더 예뻐졌어. 암!”
미안하니 돈 안 드는 칭찬이라도 해 줘야… 응? 이거… 이 녀석 지금, 진심으로 웃고 있는 건가…? 이제까지의 꾸민 표정과 비교가 되어서 그런지 확연히 다른 느낌이……
- …그때의 내가 유일한 진짜… 아니, 나란 존재는 처음부터……
에구, 이 녀석 또 외국어로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근데 이번에는 불어라니, 얘 대체 몇 개 국어를 하는 거야?
“…미안해, 유준 오빠.”
“응? 뭐가?”
“…나 아무래도 여기서 내려야겠어. 다른… 약속이 있어.”
“약속? 갑자기 무슨……”
“실은 한국 친구가 있었어. 이따 연락할게!”
“그래도 그냥 내가 태워다 주면 되지 왜……”
하은이는 더 이상 내가 뭐라거나 말거나 금동이를 안고 차에서 내려 버렸다. 나도 차에서 나와 지하철 입구 쪽으로 후다닥 달려가 버리는 녀석을 몇 번 불러봤지만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말려들든 말든 신경 안 쓰다가… 막판에 마음을 바꾼 건가?”
“그런 것 같네요.”
“근데 요정 몽. 단순히 예쁘다는 칭찬해 줬다고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왜 마음을 바꾼 걸까?”
“뭐, 흔한 패턴이잖아요. 어릴 적 첫사랑의 오라버니에 대한 감정을 기억해 내는 건……”
“퍽이나 그런 패턴이겠다. 확실히 어릴 적의 날 기억하는 거 같긴 하지만, 현실의 소녀가 얄팍한 게임 속 캐릭터처럼 순정무지할 리가 없지. 더구나 잰… 음, 어쨌든 추적 장치는 잘 붙여놨지?”
“예. 금동 옹이 일부로 떼어내지 않는 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비록 작은 하위체라고는 하지만 내 귓속에도 하나 있고… 니네 기능에 지장 없겠냐?”
“주인님과의 통신용에 비해 금동 옹에 설치한 건 훨씬 작은 하위체여서 아직 그리 큰 지장은 없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도청도 불가능하고, 만약 하은님이 금동 옹을 데리고 핸드폰 불통 지역으로 가기라도 하면 추적이 곤란해질 거래요~.”
본체 아끼느라 추적 장치를 최소화해서, 우리 시대 핸드폰 기지국들이 수신할 수 있는 간단한 신호를 보내는 기능밖에 없다는 얘기다.
“우리 어마마마 말씀대로라면, 요즘엔 핸드폰 안 터지는 곳이 없고… 여차하면 천이단 친구들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고……”
나는 여유 있게 중얼거리며 하은이가 들어간 지하철 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느긋하게 가는 동안에도 하은이는 지하철 역 안에서 이동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난 어렵지 않게 녀석이 혼자 금동이를 안고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일단… 녀석의 시야를 피해가며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 박스로 이동했다.
[이 곳의 모든 전화기에는 하은님의 지문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
[이동 시간상, 다른 곳의 전화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럼 끝내 아무도 부르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면…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DP에서 보낸 자들이 이미 항상 주변에 5분 대기조 식으로 버티고 있다거나… G.M에서 그렇게 경계하는 거로 봐서 그 정도 요원들을 보유한 곳이라는 추정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하은이는 한국에 오기까지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도망을 다녔다는데… 혹시 녀석은 G.M뿐 아니라 DP로부터도 도망친 건 아니었을까? 오히려 그 편이 더 상황 설명이 되는 것 같지 않냐?>
[모두 가능한 추정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저 녀석, 그 동안 너무 태평했다구.>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아서 전화박스 구조물 사이로 조심스럽게 눈을 내밀고 녀석을 살펴봤지만… 어째 몰래 살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금동이를 쓰다듬고 있는 손길이 거의 기계적으로 느껴질 만큼, 녀석은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내가 바로 옆에 가서 서 있어도 못 알아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야 추적 장치까지 동원한 보람이 없…지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쳇, 저 녀석… 공항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보는 사람까지 심란할 정도로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금동이가 저렇게 얌전하게 하은이를 따라다니는 건 하은이 내면의 어떤 아픔 같은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몽몽. 랜덤인 녀석들은 과거와 완전히 별개의 사람으로 인식하는 게… 역시 그게 옳은 거겠지?>
[제 의견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성향을 보일 가능성이 높으며, 해당 인물이 주인님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일 경우 성향 확인 과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서 녀석이 어떻게 나오는가 본 거지만… 근데 한 편으로 맘이 참 안 좋다. 저 녀석 입장에서는 자그마치 1000년 전 일로 억울한 취급을 받는 것일 테니… 에이- 모르겠다! G.M이 선언한 시간도 지났고 하니, 공연히 기다리게 하지 말고 데려가야겠다. 당장 우리와 관계없는 DP 같은 건 시간 날 때 조사해 보면 되는 거고!>
나는 결국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나보다 한 발 먼저 녀석에게 접근하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한껏 꾸민 웃음을 앞세워 금동이를 가리키며 말을 거는 폼세가 소위 헌팅이 아닌가 싶었다. 하긴, 하은이야 워낙에 어디서고 남자들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급(?) 미모이니……
“진대인!”
응? 좀 전의 오토바이 위협 연기자 두 명이로군. 헬멧 벗은 얼굴을 보니 지난 밤 만났던 G.M들이라 반갑긴 한데, 지금 내 앞에 나서는 건……
“이봐들, 우린 지금 모르는 사이라구. 같이 있는 게 하은이 눈에 띄려면 곤란……”
“챈님이 당장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진대인.”
말이 씹혀서 좀 불쾌하긴 했지만, 일단 녀석들이 턱짓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나 챈은 고사하고 낯익은 누구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주인님! 위험합니다!]
몽몽의 경고와 내 위험 감지 감각이 거의 동시에 오토바이 연기자 두 명의 수상한 움직임을 캐치했다. 즉각 선제 공격? 아니면……
순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나는 결국 양쪽의 두 명이 사람들의 시야를 피해 내게 총구를 겨누는 것을 허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임에도 자신들의 몸과 옆의 기둥 등을 교묘하게 이용해 총을 보이지 않게 하는 폼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숙련돼 보였다.
“…무슨 뜻이지, 이건?”
“챈님은… 더 이상 당신이 관여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이런 씨앙~! 나 또 배신당한 거야?
“…이해해 주십시오. 골든 차일드는 결코 외부인에게 맡길 수 없는 신물입니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던 적의 말을 들으며 하은이 쪽을 보니 하은이도 다소 어색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건 청년을 따라 나서고 있었다.
챈…! 친했던 누군가의 환생도 아니고, 그저 어제 처음 만난 녀석이지만… 그래도 뭔가 필이… 꽤 괜찮은 녀석이라는 느낌이었는데… 근데 설마 호초에 이어 두 번째 배신을 당하게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