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60-2화 : 가혹한 진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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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60-2화 : 가혹한 진실.(2)


처음엔 아예 보이지 않았지만 내력을 눈으로 돌리자 어렴풋이나마 다른 놈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몇 종류의 파충류가 합쳐진 듯한 괴물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일제히 아가리를 벌려 투명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고 있었다.

‘어, 어쨌든 분명히 내 정글도에 베이긴 했지?’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무작정 정글도를 휘둘렀다.

키악! 캭! 칵.

실제의 생명체가 내는 것 같은 비명이 이어지며 정글도에 베인 놈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요괴인지 뭔지 모를 적의 선발대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격퇴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다! 놈들도 벨 수 있다.’

아무리 투명해도 집중하면 볼 수 있고, 실체가 없는 것 같은 존재라도 내 공격이 먹힌다면… 그렇다면 결국 거미 로봇보다도 상대하기 수월한 놈들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 미지의 적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으므로 결코 방심할 수는 없었다.

“호오~ 멋지군. 보는 건 그렇다고 쳐도, 그렇게 쉽게 적응해 버릴 줄은 몰랐네.”

“적응…?”

“그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무래도 나보다 그 방면의 전문가… 즉, 지금의 그 ‘벌레’들을 부른 사람에게 듣는 것이 나을 것 같군.”

“뭐…? 방금 그건 당신이 어쩐 게 아니었다고?”

“후후- 난 솔직히 아직 명계(冥界)나 마계(魔界)에 속한 미지의 존재를 부르고 사역할 능력은 없다네. 다만 오늘은 그런 쪽의 뛰어난 능력자 한 명이 자네를 만나고 싶어 했을 뿐이지.”

나는 닥터 제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만치 2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앞의 복도에 어떤 남자 한 명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위치였다. 갑자기 보이는 거야 벽과 같은 문에 가려져 있었다가 문이 열린 거라고 해도, 내가 그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는 건 그가 자신의 기를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고수라는 뜻이었다.

“으음~ 저 역시 감탄했습니다. 당신은 아직 이계(異界)의 손님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 보는 적, 그것도 남자가 대뜸 저런 표정을 보이면 보통 불쾌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 남자의 표정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거부감도 없이 그런 느낌이 전해져 오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실 그 친구는 내 명령에 복종하는 부하가 아니긴 하지만…”

“아~ 이제부터는 제가 말했으면 좋겠는데요, 닥터 제이?”

미지의 능력을 가진 남자는 예의를 차리는 것 같으면서도 확실하게 닥터 제이의 말을 끊었다.

“음… 그러겠나? 후후- 아무래도 내가 너무 나선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전 다만 자기소개만큼은 스스로 하고 싶을 뿐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나보다도 약간 작은 키에 체형도 더 가얄파 보일 뿐인 남자였다. 약간 왜소해 보인다 싶을 정도의 체구에 빙긋이 웃는 얼굴, 검은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 모습… 어느 모로 보나 닥터 제이가 동원한 전투원은커녕, 지극히 평범한 샐러리맨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런 남자를 앞에 둔 나의 손아귀에는 이미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우선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마신일’이라고 합니다. 세계정화재단의 한국 지부에서 근무하며 지부장님을 보필하는 ‘비서’입니다.”

정말이지… 평범한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의 자기소개 같은 태도로군.

“…난 지하무림을 대표하는 마군황…! 지하무림은 알고 있겠지?”

“네. 알다마다요. 가끔은 그쪽 분들의 의뢰를 받기도 합니다. 아직 마군황에 복귀한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우리 얘기까지는 듣지 못하신 모양이지만…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제가 보기엔 진유준 씨도 우리가 다루는 분야와 꽤 가까운 체질인 것 같으니 말입니다.”

“…별로 달갑지 않은 얘기군. 어쩌다 보니 유체이탈 같은 건 몇 번 경험해 보긴 했지만 그 이상은 사양하고 싶은데 말이요.”

“흐음. 역시 그 정도 경험은 해 보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조금 전처럼 이계의 생명체를 만나서 정화한 경험은 없었죠?”

나는 남자의 말에 선뜻 대답하는 걸 망설였지만 그는 그걸 긍정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 같았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단하다는 겁니다. 본래 인간이나 이계의 손님이나 같은 기원의 고위 영체… 즉, 신(神)의 후손들이죠. 당신 정도의 고수가 내력을 담은 칼이라면 당연히 이계의 생명체도 벨 수가 있지요.”

“하지만 인간들의 세계와 이계는 전혀 다른 진화를 거듭해 온데다, 보통의 인간들은 이계의 생명체에 대한 인식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고 할까…?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설사 어떤 계기로 그 존재를 볼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걸 벤다거나… 여하간의 위해를 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저희 재단에도 무공만으로 영체를 ‘정화’하는 사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이미지 트레이닝이 필요했답니다.”

‘젠장…! 대충 알아는 듣겠지만, 역시 너무나 딴나라 얘기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아니… 저 마신일이란 남자 말대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는 얘기라고 할까…? 난 안 그래도 자꾸만 현실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여기서 더 영역이 넓혀지면 대체 어디까지 가게 될 건지…’

“그런데 당신은 첫 번째 접촉에서 곧바로 정화에 성공한 겁니다. 유체이탈 같은 경험 때문에… 아니, 아니… 그보다는 본래 ‘적’이라고 인식한 상대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난 분인지도 모르겠군요.”

“…저기… 칭찬은 고마운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소.”

사실 더 얘기가 길어질수록 나에게 유리하겠고, 궁금한 점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당장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당신과 당신의 조직은 이 DP와 어떤 관계지? 아니, 그냥 DP의 또 다른 면모인 건가?”

진짜 단도직입적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직접적인 나의 질문에 마신일이라는 남자는 천천히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우리 재단은 보통 인간들의 다툼이나 이런저런 일들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설사 누군가 신의 영역을 넘보는 야망을 가지고 복제인간을 만들어 댄다거나, 오늘 당신이 그런 사람과 장소를 없애버리려 하는 것도… 모두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요. 제가 오늘 이 연구소에 온 건 단지 지부장님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고요.”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 날 막고 나선 이유는?”

“아, 그건 말입니다. 닥터 제이와 저와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입니다. 적어도 한 번 정도는 그 분에게 닥친 위기를 제가 막아주고 싶었거든요. 게다가 당신의 무공에 대해서 듣고 나니까 호기심에서라도… 으음. 결국 결론은… ‘당신과 싸우고 싶습니다’,로군요.”

“그거 계속… 꽤나 친절하신 설명이군. 당신이 요괴인지 뭔지 모를 투명 괴물들을 보냈을 때부터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훗~! 조금 전의 부정형 요물들은 그냥 인사 대신 보내 본 ‘벌레’들이었을 뿐입니다. 말 그대로 벌레 수준의 … 음. 그보다… 그래도 지금까지 쓸모없는 시간 낭비는 아니었죠? 적어도 내력을 바닥까지 소모했던 상태의 당신에게는 말입니다.”

…내가 얌전히 대화에 응하고 있었던 이유를 뻔히 알고 있었군. 그렇다면 알면서도 일부로 동조해 주었다는 건가…?

“원하신다면… 좀더 시간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만큼 운기조식을 하여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저와의 싸움에 임하시는 편이 저도 더 좋습니다.”

동조 정도가 아니군. 나의 전투력을 못 알아 볼 자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도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좋을 만큼… 그렇게 강하다는 건가…?

“필요 없어!”

“음.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아니, 취소! 아무래도 좀 쉬긴 해야겠어.”

“아, 네. 그러시죠. 기다리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쳇…! 역시 강적이군…! 이 정도 말장난에는 눈곱만큼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거지?

상당히 껄끄럽긴 했지만 번복한 걸 또 번복하기는 좀 그래서… 나는 결국 마신일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앞에 두고 철푸덕 자리에 앉아 버렸다. 눈을 감고 결가부좌를 틀어 운기조식을 시작하면서도 당연히 불안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기에 아직 기본적인 정도의, 그러니까 오감 전부를 닫지 않아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상태는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마신일의 태도가 뜻밖인 건 닥터 제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자, 잠깐! 신일 군…! 자네 정말 유준 군에게 내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는 건가?”

“당연히… 그 편이 더 재밌잖겠습니까.”

“…자네로서는 그렇겠지만…”

“안심하십시오, 닥터 제이.”

[ …주인님. 마신일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검지를 물어뜯어 피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

나는 몽몽의 보고 때문에 기본적인 운기조식까지 멈추고 슬쩍 눈을 떠보았다. 마신일은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으며 그 손의 검지에서는 몽몽의 말처럼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피는 그냥 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뭐야…? 피가… 바닥에 떨어지며… 뭔가 이상한 그림을… 아니 문장…? 하, 하여간 뭔지 몰라도 분명히 의도적인 도형이 그려지고 있잖아…? 내력으로 피와 같은 액체를 조종해서 저렇게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건…

맨손으로 하는 의형수검의 경지…? 아니,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능공섭물의 최고 경지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 바닥에 그려지고 있는 도형과 문장이 구성되는 방식에는 주인님과 같은 내력이 이용되고 있으나, 해당 도형이 특정 목적으로 발동되는 조건과 목적은 무공 계열이 아닙니다.

PK(Psychokinesis) 계열의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증폭하여 차원을 왜곡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형태이며,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이론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저에게도 분명 물리적 에너지의 비정상적인 왜곡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만약 비공인 데이터의 이론과 법칙을 인정하는 형태로 해석하게 되면… 지금 저 남자는 ‘미지의 차원으로부터 뭔가를 소환하려 하는 것’입니다. ]

그, 그러니까… 무슨 마법진 같은 걸 그려서 뭔가 불러내려 한다는 거지…? 그게 아까처럼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놈들에 불과하면 좋겠지만…

“아아~ 정말 오랜만이로군요. 제가 자신의 피를 써서까지 ‘귀족’들을 불러내는 건 말입니다.”

마신일이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부분은 감이 잡혔다. 좀 아까 내가 간단히 없앤 것들은 ‘벌레 급’이었지만 지금은 ‘인간 급’…! 그 중에서도 ‘귀족’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정도의 괴물을 불러내겠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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