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61-2화 : DP 본부의 운명.(2)
“간다.”
늑대는 다시 짧은 선언과 함께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그 초고속 움직임은 여전히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한 순간, 한순간만…
후웅~ 왼쪽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이미 오른 쪽에서 잿빛 그림자가 흐릿하게 스쳐갔다. 이 때, 내 정글도는 좌우 어느 쪽도 아닌 머리 위로 스윽- 그어지며 가는 빛줄기를 그렸다.
베었나…? 아니, 또… 놓쳤다.
나는 다시 정글도를 어깨위로 가져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글도가 그리 분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약간 아쉬워하는 기색은 있지만 말이다.
“갑자기… 달라졌군.”
뒤쪽에서 들려오는 늑대의 음성과 기색이야말로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런 느낌에… 처음부터 거리를 두고… 속도를 올렸는데 도… 그래도… 크르~ 위험했다.”
어째 조금씩 짐승의 목 울림소리가 섞여 가는 것 같은데…? 쯧! 베지도 못하고 화만 돋구었나?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 아니… 이제야 눈을 뜬것인가 자신의 본성에…?”
“…난 단지 기억해 냈을 뿐…! 너무나 엄청난 적을 만나서… 그 적을 쓰러트리는 데 몰두하여 잊고 말았던… 내가 지금 싸우는… 진짜 이유를 말이오.”
“그렇군. 지켜야 할… 자신의 영혼을 걸고 지켜내야 할 누군가를 떠올린 모양이군. 그래… 인간들은 곧잘 그런 이유로 강해지곤 하지. 하지만 설마… 이렇게 한 순간에 이 정도로… 크르르~ 지금의 그 칼에 어린… 크르~ 강대한 영력은… 어쩌면 라후의 혈족인… 우리의 몸조차… 크르르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뒤쪽의 늑대가 어떻게 변모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그의 동료인지 형제인지 모를 나머지 두 분의 늑대들께서도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젠… 크륵~! 우리도… 제대로… 크르… 싸워주지… 크르르르르~”
지금까지의 늑대들은 마신의 직계답게 어딘가 기품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 날 양쪽에서 포위하기 시작한 늑대들은 그 모든 것을 벗어 던진, 그야말로 야성의 무자비한 살육 본능에 사로 잡혀가는 모습이랄까…?
“크르르~ 비겁타… 크르~ 하지마… 늑대는 본래 떼로… 사냥하는 법… 거대한 사냥감은 더더욱…! 크르르르~”
입술이 말려 올라가며 더욱 흉칙하게 드러난 이빨들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고 있었다. 잿빛 털은 바람도 없는데 위쪽으로 조금씩 피어오르며 일렁이 있었으며 그 밑의 실질적인 몸까지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팽창하고 있었다. 덩치 자체가 커진다기보다는 보다, 터질 듯한 근육질의 몸이 되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저기… 잠깐만. 그만 진정들 하시죠, 네?”
마신일이었다. 그가 이제야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젓고 있었다.
“크르~ 참견… 하지 마~ 크르르~ 아직 시간은… 충분 해.”
간단히 무시당한 마신일은 뒷머리를 극적이며 ‘하하 – 이거 참…’어쩌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역시 지금까지처럼 그의 직접적인 도움은 바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아~ 너무들 하는군. 내가 무슨 소년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뭔가 깨달았다고 뜬금없이 수십 배 강해지는 것도 아닌데… 근데 왜들 이리 민감해져서 난리인지, 원!”
원!이라는 말과 동시에 내 정글도가 스슥 움직이며 동시에 세 곳으로 도기를 뿌렸다. 아무런 예비동작도 마음의 동요도 없이 날린 회심의(?) 기습이었고, 각각 분명히 적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부 너무 얕았다. 역시 쉽지 않…
으왁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내 머리는 크게 벌려진, 수십 개의 상어 같은 이빨로 둘러싸인 동굴 같은 늑대의 아가리 사이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빼는 것과 동시에 아가리가 콰득- 닫히며 몇 방울의 침이 얼굴에 튀었다. 섬뜩함과 혐오감이 교차하며 그 대상을 향해 일검을 날렸다. 그리고 그 직후에야 나는 나의 왼쪽 팔과 오른 쪽 다리도 똑같이 끔찍한 위기에 처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양 쪽 다 이미 반쯤 물려져 빼낼 수가 없었다.
영점 몇 초가 몇 시간처럼 긴 것 같은 순간 속에서 내려진 결론은… 내 정글도가 오른 발을 물어뜯는 늑대의 목을 치는 것으로 내려졌다.
야- 저기 외팔이 간다~ 외팔이~ 외팔이래요~ 어렸을 적 동네를 지나는 장애우를 놀리던 철부지 동네 친구들의 목소리와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런…데, 있…는 건가…? 내 왼쪽 팔…?
나는 꿈처럼 멀쩡한 왼쪽 팔을 슬쩍 들어올려 움직여 본 다음에야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았다. 내 머리를 통째로 삼키려던 늑대는 나의 반격으로 몸통이 깊게 베여(이번엔 소위 영력이 제대로 실렸던 모양.) 몇 미터밖에 간신히 서있었고 발목 쪽을 물어뜯으려던 늑대는 반대로 내 정글도에 목이 완전히 잘려 있었다.
역시 이런 괴물들을 상대할 때는 영력의 사용여부로 이렇게 큰 차이가… 아, 그보다 다른 어떤 방해를 받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 살벌한 입으로 내 왼쪽 팔을 통째로 잘라 씹어 먹었을 늑대. 그 늑대를 돌아보니, 놈은 내가 아닌 다른 방향의 누군가를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신일…? 저 남자가 어떤 술수를 쓴 건지, 하여간 날 도와 준 건가?
“왜… 방해한 거지…? 이제…와서 계약을 깨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분노한 라후의 혈족이 묻자 마신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계약을 깨기 시작한 것은 당신들이 먼저 입니다.”
조용히 웃고 있는 얼굴 그대로였지만 뭔가 달라진 분위기였다.
“계약내용에 분명히 있었을 텐데요? 소환술자 즉 시한부 마스터인 저의 허락 없이는 ‘변신하지 못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랬…던가?”
놀랍게도 늑대의 기세가 급격히 수그러들고 있었다. 잊고 있던 계약내용을 떠올렸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마신일이란 남자가 지금 뿜어내고 있는 어둡고 사이한 기운은 저 라후의 혈족을 압도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던 것이다.
“더 이상 계약자의 의무를 무시할 경우…”
“아, 알겠다. 그렇다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우리도… 우리가 먼저 계약을 파기해서 대가를 치르기는 싫으니까.”
늑대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미 변신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을 확인한 마신일 역시 자신의 어두운 살기를 지우며 밝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에- 역시 현명하시군요. 후후- 라후의 혈족 중에서도 가장 존귀한 삼형제 분들답습니다. 그리고 세 분은 역시 그렇게 젠틀하고 지적인 모습이 더 어울리죠.”
귀족을… 잘도 치고 어르는군. 여태까지 엄청 공손했던 건 전부 가식이었던 건가? 결정적인 도움을 준 건 고맙지만, 사실 내가 저렇게 황당한 괴물들과 싸우게 된 것 자체가 바로 저자 때문이니 고맙다고 하기도 좀…
[ 주인님! 주의하십시오! 적은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
…뭐? 아무…도?
나는 몽몽의 경고를 듣고서야 뭔가를 느끼고 흠칫 놀라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이런 제기…! 기운이 약해지기만 했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걸 깨닫지 못한 건 분명 내 실수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뭐야 저게
내 발을 물려다가 목이 잘렸던 늑대였다. 그게 어느 사이 잘려졌던 목이 다시 붙은 건 물론이고 아주 빠르게 본래의 기운이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저렇게 된 것까지 되살아 날 정도면 부상당한 녀석의 회복은 말할 것도 없겠지…?
돌아보니까, 역시나였다. 정글도에 몸통이 베인 녀석에게서는 이미 상처자국 같은 것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머리 절단 쪽을 보니 그 녀석은 이제 완전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이봐요, 마신일씨! >
< 아~ 네. 압니다, 알아요. 사기 캐릭 얘기하려는 거죠? >
< 당연하지! 당신 말대로 칼에 영력을 실으면 잘리기는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저렇게 빠르게 회복하거나 부활해 버리면… 그럼 뭐 어쩌라고! >
< 진정하십시오. 사실 마계의 귀족이 머리 좀 잘렸다고 죽으면 그게 어디 귀족이겠습니까. 급 낮은 마물들도 잘 안 죽는 판국에. >
< 에이 쒸~ 하여간 그럼 어떻게 죽이냐고! >
< 원래 못 죽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
그냥… 확 저 놈이나 먼저 죽여 버릴까?
< 그러니까… 무작정 버티세요. 이제 34분 20초 정도 남았습니다. >
무작정 버텨? 34분 20초…? 아, 그렇구나. 저 녀석들은 우리 세계에는 계약된 시간밖에 있지 못한다고 했었지?
“인간…!”
날 부른 것은 나에게 목이 잘렸던 늑대였다. 내가 마신일과 전음을 나누는 사이, 그러니까 정말이지 짧은 시간에 회복이 끝난 모양이었다.
“라후의 혈족인 우리는 본래 불사의 존재. 하지만… 아프더군. 더구나 목이 잘리다니, 그건 우리 라후의 혈족에게 있어 최악의 모욕이라는 것을 아는가?”
< 아- 그건 선조인 불사신 라후의 최후 때문입니다. 보다 상급신에게 걸려서 목이 잘렸는데, 그 상급신은 라후의 죽지 않는 목을 어딘가에 봉인되었다는 전설이… >
마신일의 친절한 해설이었다. 해설 내용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어쨌든 결국…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셈이었다. 심판(?) 마신일 때문에 소위 파워업 변신은 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본래의 모드만으로도 충분히 날 농락했던 놈들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유흥은 끝났어. 마계에 돌아가기 전까지 모욕을 되돌려 주는 것만이 목적일 뿐…!”
복수심에 불타는 선언을 끝낸 늑대를 중심으로 다른 늑대들도 그에 못지않은 기세와 함께 내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처럼 포위망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 마리 전부가 정면승부를 걸어 올 모양이었다.
좋아…! 어디 갈 데까지 가보자구.
나는 다시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며 처음으로 내가 먼저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그 때, 벽의 스피커에서 버럭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 모두 멈춰!”
닥터 제이였다.
“특히 마계의 손님들! 더 이상 움직이지 마!”
그런다고 말을 들을 놈들이… 어? 그래도 어쨌든 일단 멈추긴 하는군. 아무래도… 명령에 따른 게 아니라, 갑자기 끼어드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가 궁금해서 그런 것 같지만 말이다.
“진유준군을 믿고 계속 지켜봤지만… 역시 저 라후의 혈족들에게는 안 되겠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야. 지금부터 그는 우리가 보호한다.”
닥터 제이의 선언과 함께 조담놈과 대결할 때의 방처럼 양쪽 벽이 올라가더니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조담놈 때와 다른 점은 사방의 공간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미리 완전 무장한 병력들이 무수하게 대기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공간이 끝나는 지점의 벽 곳곳에도 또 다른 문이 열려 있었으며 그 곳으로부터도 계속해서 새로운 병력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에효~ 꽤나 마음 졸이게 하더니 이제야 성공한 모양이네요.>
<뭐?>
<뭐, 모두 당신이 저 라후의 혈족을 상대로도 여기까지 버티며 멋진 장면들을 보여 준 덕분이겠지요.>
<마신일…!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후후- 당신이 싸우는 사이 닥터 제이가 DP 마스터의 생사까지 좌우할 수 있는 ‘그들’을 납득시켜서 현재의 상황… 즉, 모든 본부 내의 병사들을 ‘진유준 보호’에 투입하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는 얘깁니다.>
<…당신.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아니, 그전에 잠깐, 그럼 닥터 제이와 당신은 처음부터…>
“신일군. 잘 듣게.”
끼어드는 닥터 제이 때문에 말이 끊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부터 이어질 상황이 알아서 내 의문을 대신 대답해 줄 것 같았다.
“나를 돕겠다고 나섰던 자네의 호의에는 감사하네. 하지만 오해가 있었네. 사실 우리는 진유준군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실력을 테스트하는 중이었어.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일단 그게 나도 짐작하고 있었던 기본 시나리오.
“그러니 이제 자네는 그 곳에서 물러나 주게. 총격전 와중에는 아무리 자네라도 위험할 테니 말이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닥터 제이,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제법 심각한 얼굴로 반발하는군. 이 상황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는 자가…? 역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어. 마신일도 결국 상부의 조직이 속을 정도로 날 몰아붙이면서도 끝내는 내가 살아서 닥터 제이에게까지 갈 수 있게 하는 임무를 띠고 왔던 거야.
“더 고집을 피우면 당장 자네 지부장에게 알리겠네. 오늘 자네가 자네 재단의 원칙을 어기고 소환술을 통한 ‘살인’을 꾀했다고 말일세.”
이젠 완전히 심각해진 얼굴로 이를 악무는 저 표정…
역시 저 남자도 연기파였어.
“…좋습니다. 전 여기서 물러나죠.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설마 당신이 보통 인간들과 병기로서 귀족을 막으려들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단지… ‘먹이’를 주는 행위일 뿐이라는 걸 아는 분이 말이죠.”
멋지군. 책임회피 근거까지 어느 정도 만들어 놓는다 이거지?
“그래도… 유준군이 무사하기 위한 시간 벌이는 되겠지. 자네와 귀족간의 계약시간이 끝날 때까지 말이야.”
스카웃 대상인 나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상부에 보이기 위함…이군. 닥터 제이의 천연덕스런 (어쩐지 그럴 것 같다.) 표정 연기까지 볼 수 없어서 아쉽군 그래.
“하아아~ 이거야 원…! 그러게, 그렇게 귀중한 인물이었으면 미리 자세한 말을 할 것이지!”
음~ 옥의 티다. 아니 옥의 티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초기에 했던 대사를 반복함으로서 연출의 신선함이 떨어지게 되는… …에구. 나 지금 뭔 분석을 하고 있는 거냐?
어쨌든 마신일은 ‘타의에 의해 하던 일을 중간에서 차단당하고 물러나는 자’의 표정 연기를 충실히 시행하며 늑대 라후의 혈족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면목이 없군요.”
“우린… 아무래도 상관없어. 계약 이행에 필요한 인간, 너희들이 진유준이라 칭하는 인간만 있으면 모두 계약 위반이 아니니까.”
마신일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뭐라고 알 수 없는 발음의 인사 같은 걸 남기고 돌아섰다.
[라틴어로, ‘다음엔 정말 즐겁게 해주겠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