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62-1화 : 부활하는 비화곡(秘花谷).(1)
7-4. 부활하는 비화곡(秘花谷).(1)
[ 주인님! ]
몽몽이 당황해서 부를 정도로 나의 경공은 급격하게 흐트러지고 말았다. 겨우 균형을 잡기는 했지만 결국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하, 하은이 맞나…? 카디인 거 아냐?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카디가 원판을 오빠라고 부를 리가 없었다.
정말… 하은이가… 원판의 복제…?
원판과 너무나 닮은, 아니 똑같은 하은이. 복제인간이 DP에서 얼마나 쉽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그녀를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하은이가 본래 원판의 쌍둥이인 진하연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오히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치이~ 아무래도 좋다. 만약 하은이가 설사 그런 식으로 탄생했다 해도… 그렇다고 해도 하은이는 달라. 그녀의 영혼도 영혼이고 그녀의 현생도 지난번에 죽은 원판의 복제나 카디와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아기 때부터 부모 품에서 자라 온 자신의 진짜 인생을 가진…
예상치 못했던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나의 귓속으로 다시 하은이의 절규 소리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내가 화이트 오빠의 복제인간이라는 건! 그 딴 건 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이라고 말해!”
제…엔장, 닥터 제이! 진실이 무엇이든, 하은이 말대로 거짓말이라고 말해
나 역시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미안하다. 지금까지 속여 온 건 미안하구나. 하지만 난 너의 어머니,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닥쳐! 그럼 난 뭐지? 엄마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당신을 아빠라고 생각하고 살아 온 나는 뭐지? 화이트 오빠를 오빠로 생각하고 유준 오빠를 오빠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나는 뭐지? 정하은이란 여자는 대체 뭐였어?”
그래… 하은이는 카디와 다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저 녀석이 지금 느끼는 배신감과 혼란은 더욱 클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너는 너, 정하은. 아무 것도 변한 건 없단다 하은아. 모든 것은 네가 생각하기 나름인 거야.”
정론… 닥터 제이의 차분한 대답은 분명히 정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하은이가 그 정도 말에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아, 이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나는 다시 경공을 발동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육체가 설사 원판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할 지라도, 하은이는 어쨌든 하은이이며 1000 년 전부터 내 여동생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나… 하은이가 1000년 전부터 지금과 똑같은 영혼과 똑같은 얼굴로 웃고 떠드는 소녀였다는 걸 알고 있는 나만이 하은이를 절망과 혼돈에서 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주인님. 주인님의 음성을 저쪽으로 전달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
< 그럼 당장… >
“아빠…!”
하은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닥터 제이, 그녀의 아버지를 불렀다.
“나도, 사실은… 아빠를 사랑했어. 지금까지 줄곧.”
맙소사! 하은이가 잠시 아래로 내려트렸던 총구를 다시 들고 있다.
“안돼, 하은아!”
내 목소리가 들리는지 하은이의 표정이 흠칫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짓을 해서는 안돼! 그 분은 너의 아버지야! 그건 내가 네 오빠라는 것이 변함없는 것처럼, 그렇게 변함없는 사실이야! 난 기억하고 있어, 어렸을 때의 네 모습을! 너의 인생은 결코 만들어 진 것이 아니…”
“안녕…”
“뭐?”
하은이는 내가 자신의 영상까지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처음 공항에서 잠시 나와 엇갈렸을 때의 그… 오직 서글픈 쓸쓸함만이 담긴 웃음이었다.
“안녕, 오빠.”
“안돼, 인마!”
쾅! 쾅
하은이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그녀는 자신이 쏜 총탄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가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모습, 바닥에 누운 닥터 제이의 몸이 꿈틀대는 모습까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막지… 못했다. 이로서 하은이는… 저 녀석은…
나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기분으로 더욱 경공 속도를 높였다. 내가 다음으로 우려한 건 하은이가 자기 자신까지 해치는 더 어리석은 짓을 해 버릴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곧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닥터 제이… 그는 하은이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어 자신을 찾아오는 타이밍, 내가 늑대 마신들과 싸웠던 장소에서 자신이 죽을 장소까지 갈 수 있는 시간까지 계산해 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굳이 ‘자식에 의한 죽음’을 택한 이유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결국 뒤늦게야 닥터 제이가 쓰러져 있는 중앙 통제실을 찾아 들 수 있었다.
[ …스캔 결과, LA공항에서 접촉했던 닥터 제이와 100% 일 치. 중요 장기의 파괴로 인해 총격 직후 절명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그래… 역시 하은이가 카디를 쐈을 때와 같은 연극은 아니었구나.
< …하은이는? >
[ 카디, 카디아나 정의 안내로 이동 중입니다. 진행 루트와 방향으로 보아 연구소 밖으로 탈출하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
카디와 함께…?
어쨌든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몽몽의 도움을 받아 복잡한 통로들을 가로질러 앞서 갔다. 나는 오래지 않아 하은이 앞을 막아설 수 있었지만…
“…하은아.”
그렇게 간신히 한 번 불러 봤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은이는 이미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었으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나를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하은이가 천천히 내게 다가와 타인처럼 옆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하은이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그제야 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지금은 잡지 않겠다. 어디서든 혼자 숨어서 울고 싶은 만큼 울고, 화내고 싶은 만큼 화를 내. 어렸을 때처럼.”
나는 점차 멀어져 가는 녀석의 등에 대고 말을 이었다.
“다시… 데리러 가마. 어디에 숨어있든.”
어렸을 때처럼… 그래… 최근에야 조금씩 기억이 나기 시작한… 어린 꼬맹이 시절의 하은이는 그 때부터 그랬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마음껏 울거나 화내지 않았었다. 그 어린것이…
< …엄마에게 ‘착한 아이’라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 >
[ …주인님? ]
< …난 괜찮아. 잊고 있던 옛날 일이 생각났을 뿐이야. >
하아아아아~ 나는 길고 깊게 숨을 삼켰다가 그만큼 길게 뱉어낸 후, 하은이의 모습이 사라진 쪽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정하은… 천하의 묘랑(苗琅) 진하연이 이대로 무너질 리 없어. 녀석은 반드시 극복해 낼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어딘 가로부터 묵직한 폭음과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시작한 모양이군. 너도 함께 계획대로 진행해. 이딴 곳 … 완전히 없애 버려. >
[ 알겠습니다. 그런데… 다시 중앙 통제실로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
< 그래. >
짧게 그렇게만 대답했지만 몽몽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머리 위의 이 거대한 구조물 어디에서부터인지 발생한 폭음과 충격파가 처음엔 조금 산발적으로, 그러다가 얼마 안 가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촘촘히 설치된 조명들이 짧은 불꽃을 비명처럼 토해 낸 후 꺼져버린 복도, 그 어두운 금속 복도가 과자 곽처럼 조금씩 찌그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빠르게 멸망하고 있는 거대 연구소에서 나는 그리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도 중앙 통제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과연 중앙 통제실이라고 할까…? 이 곳은 아직 보조 조명이 살아 있군. 장비들도 일부는 아직 동작하는 것 같고 말이야. 어쨌든 그렇다면…
나는 정글도를 들어 애꿎은 기계에게 화풀이라도 하듯 마 구 검기를 날리고 직접 베어 박살을 내기 시작했다. 최소한 100평은 넘을 정도로 넓은 실내였다. 나는 그 넓은 곳에 설치된 장비들을 몽몽이 ‘작동 불능’ 판정을 내릴 때까지 모조리 파괴한 후에야 손을 멈추었다. 그러는 사이 보조 조명은 지가 알아서(?) 꺼져 버려서 나는 완전히 암흑 속에 혼자 서 있는 처지가 되었다.
[ …주인님. 현 장소는 다른 곳보다 안전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약 2분 32초 후에는 이 곳도 위험해 집니다. ]
닥터 제이는 이곳이 완전히 붕괴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 반드시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오라고 했었다. 그건 이 곳 어딘가에 비상 탈출구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 이미 찾았다며, 비밀 통로. >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새로운 저의 스캔 및 침투 방지 장치가 되어 있어서 단시간에 문을 열기가 어렵습니다. ]
…쳇! 닥터 제이 그 양반… 멋대로 죽지를 않나, 마지막까지 속 썩이는군.
나는 한 쪽 구석의 벽 앞으로 가서 잠시… 그러니까 몽몽이 말한 2분 32초 중에서 2분 정도를 가만히 서서 기다려 보았다.
[ 죄송합니다. 역시 시간 안에 해킹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
하는 수 없군.
나는 정글도를 들어 칼날에 월광절화결의 기운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월광절화결의 파르스름한 빛이 차가운 금속 벽을 비추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벽이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저절로 스르르 열리고 있었다. 그 곳에서 쏟아져 나온 빛은 누군가의 손에 들린 랜턴의 불빛이었다. 나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불빛 뒤의 사람에게 말했다.
“늦었잖습니까, 닥터 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