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64-1화 : 나보다 힘들었던 사람들.(1)
7-6. 나보다 힘들었던 사람들.(1)
이모님의 영어 이름을 그대로 딴 플로라…
요몽 녀석이 피식- 거리는 걸 보면 지들 남매와 비교해서 초보적인 인공지능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긴 하지만, 그래도 본래 정상적인(?) 우리 시대에서는 엄청 뛰어난 인공지능 시스템일 것이다.
어쨌든, 이 신생 비화곡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운용한다는 플로라가 전체적인 점검을 하는 동안, 닥터 제이도 그걸 보고 받으며 체크하느라 나와의 대화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36번 구역의 모든 채널 정상작동 71번 구역의 B12부터 4개 채널은 불안정, 점검 요망.”
“폴! 지금 들었지? 71번 구역으로 가 줘.”
“갈게요. 가긴 가는데…”
낯선 외국남자의 음성이었다.
“이거 사방에서 왜 이러죠? 겨우 10년 정도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곳곳에 녹이 슬었을 줄은 몰랐다고요.”
“뻔뻔하군. 64번부터 89번까지는 본래 자네 구역이었어. 그리고 다른 구역은 대체로 양호해.”
“오우~ 그럴 리가!”
“…쟈니 B 폴… 이 친구는 나도 감탄이 나올 만큼 뛰어난 엔지니어야. 뭐, 다소… 게으른 것이 탈이긴 하지.”
닥터 제이는 폴이란 사람에 대해서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지열을 필요한 에너지로 변환하여 이용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 탄력 받으면 확실하고 안정적이긴 해. 근데 스타트가 좀 느린 게 흠이지. 음… 괜찮은가?”
닥터 제이가 새삼 괜찮으냐고 물을 만큼, 지금 나의 육체는 상당히 심하게 망가져 있다.
헬기군단과의 싸움에서는 그래도 그냥 저냥 넘어갔었지만, 거미군단과 싸울 때 입은 상처, 조담놈의 칼질에 당한 상처, 거기에 늑대 마신들에게 물리고 찢긴 부상까지 하면…
에효~ 누가 보면 이게 ‘몸이냐 걸레냐?’ 소리 나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몽몽과 나 자신의 현천기공에 의한 지혈 및 치유 효과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 회복이 빠른 건 물론이고 흉터도 적게 남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 대한민국 모범 청년의 몸이냐 모범 조폭 칼받이의 몸이지.
나중에 남을 흉터도 문제는 문제지만, 지금 당장은 계속되었던 출혈 때문에 정상 컨디션을 유지하기 어려운 점이 가장 큰 문제이다.
지금까지는 깊은 공력과 악바리 근성의 정신력으로 버티며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부터 닥터 제이가 나와의 대화를 멈추고 딴 짓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피로도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느낌이었다.
비유가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마신 술에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는… 그런 상태라고나 할까?
“미안하지만, 이 곳의 의료실에서 치료해 주기는 좀 그렇고… 이제 그만 지상으로 나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아뇨. 얘기 좀 더 듣고요.”
“얘기는 밖에 나가서도, 그러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어. 내가 이런 곳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뭐겠는가.
우린 이제 이 곳과 암중에 연결된 망을 이용해서 프리메이슨의 도청 없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어. 어느 정도 지역적인 제약이나… 여하간 변수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건 반가운 얘기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그래… 아직도 이 사람에게 묻고 싶고, 알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다.
“심정은 이해해. 하지만 그 정도의 부상이라면 아무리 자네라도… 음, 역시 잠깐 운기조식이라도 하는 건 어떤가. 거듭 미안하지만, 여기서 나갈 때는 어느 정도 내력을 써가며 빠져나가야 할 코스가 있거든.”
당연히…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따로 있든 없든, 오늘의 나 같은 경우에는 무너진 벽과 바위 사이나 정면… 하여간 가급적 험한 코스를 뚫고 나가야 폭파 현장에서 탈출한 자의 모양새를 낼 수 있을 테니…
“그럴까요, 그럼. 음… 하지만 그래도 이건 당장 알고 싶어요. 대교… 얘깁니다.”
그래. 역시 대교에 관한 얘기만큼은 나중으로 미룰 수 없지.
“원판이 지금까지 제게 했던 말들은 대부분… 우리 대화를 도청하는 프리메이슨을 속이기 위해서 한 거짓말이었겠죠…? 하지만 대교… 대교의 과거 기억을 원판이 조작했던 거… 그건 아무래도 거짓말 같지 않아요. 무엇보다, 대교가 지금 분명히 과거의 기억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그래… 처음부터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면 몰라도, 기억하는 장면 중에서 나의 얼굴만이 지워졌다는 건…
“…그래,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하지만 그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네. 아, 잠깐.”
닥터 제이는 잠깐 양해를 구하더니 플로라와 다른 장소의 동료인지 수하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몇몇 낯선 이름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런저런 지시를 내린 후에야 지휘하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다시 나에게 다가오며 나의 몰골을 새삼 살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어떻든, 역시 대교 양에 관한 얘기만큼은 좀더 자세히 듣고 싶겠지?”
“…당연하죠.”
“으음… 그게 말이지. 대강의 상황은 자네가 하운 군에게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우선 하운 군이 대교양의 아버지인 ‘주성후’를 찾아낸 것부터가 딱히 의도했던 일이 아니었다고 하더군.”
하더군…? 원판이 단독으로 처리한 일이었고 닥터 제이 역시 나중에 원판에게 들은 얘기라는 건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그러니까 하운 군이 DP의 후계자로 완전하게 결정되기 전이었어. 그 때도 하운 군은 비록 감시와 관리의 대상이긴 했지만 아직 중책을 맡지는 않았기에 통제가 그리 심한 상태는 아니었어.
그래서 손꼽아 기다리는 자네가 무림시기에 거쳐 온 모든 장소의 자취를 찾아다니는 것도 허가될 수 있었던 거지.”
…쯧. 원판에게 이런 식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변태 스토커에 걸렸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었지만, 지금은 좀 느낌이 다르군.
“그런 차원에서 찾아갔을 뿐인 비화곡의 옛터…”
나도 몽몽의 분석으로 비화곡 옛터의 위치는 알지만 아직 찾아가 보진 못했다. 뭐, 언젠가는 한 번…
“하운 군은 자네가 이 시대로 복귀하기 위해서 다시 시간여행을 시도했던 장소, 옛 비화곡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당시에는 그저 인적 드문 산중이었던 곳까지 찾아갔었다고 하지.
그런데 설마 현재의 작고 이름 없는 마을에서 과거의 인물을 찾아 낼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건데…”
그런 식으로 우연히(?) 대교의 아버지인 사영을 찾아냈다는 얘기는 전에도 들었다.
뭐, 사영의 용모까지도 미래 여자 진이 떨구고 간 로봇의 데이터에 있었을 테니 좁은 마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그의 어린 딸까지도 천년 전과 똑 같은 인연으로 그와 맺어져 있다는 사실이었어.”
그래. 이 부분이 좀 애매하다.
원판이 지 복제인 하은이가 진짜 천년 전의 지 동생 진하연인지를 확신하지 못했던 건 나처럼 영체까지 스캔하여 판독할 수 있는 몽몽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런데 그런 원판이 어린 대교를 만나서는 바로 대교임을 알아봤다는 점이 이상한 것이다.
혹시 나처럼 원판도 천년 전에 이미 대교에게 반해서… 그리고 그 감정이 나만큼이나…
“후후- 하운 군은 그때… 대교 양과 재회하는 순간에 너무나 놀라서 그 친구 특유의 쿨- 한 태도마저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더군.”
치이~ 역시 원판도…
“사실…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거야. 겨우 걸음마를 떼었다 싶은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다가와 그런 행동과 말을 하게 되면 말이지.”
응…? 어째 내가 생각했던 얘기가 아닌 것 같은…
“그 어린 소녀… 아니, 아직은 아기에 가까운 아이가 아장아장 하운 군에게 걸어오더니 어색하게나마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해. 그리고는…”
- 불초 소녀… 비화…곡주께… 인사 올립니다.
그렇게 인사했다고 한다, 꼬맹이 대교가.
그리고 또… 아직은 너무나 어리고 미숙한 아이의 음성으로 힘겹게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 저를… 그분… 진유준님께… 저는…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대교는… 대교는 그 때, 대교는 그 때 이미…
“자네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정도, 꿈에서나 막연하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정도가 아니었던 거야. 과거의 영혼 그대로인 것처럼 완벽한 기억을 가지고 환생했던 거지.”
세상에… 대교야… 넌 대체…
“그러니… 그녀를 하운 군이 일찌감치 발견한 건 오히려 행운이라고 할 수 있어. 그때 만약 하운 군이 어린 대교 양에게 최면을 걸어서 과거의 기억을 봉인해 두지 않았다면… 그래서 대교 양의 언행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면… 그랬다면 어땠겠는가?”
나는 이제야 당시의 상황을 모두 알 것 같았고, 닥터 제이는 내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말을 이었다.
“해외 토픽까지는 몰라도… 어쨌든 ‘전생을 기억하는 소녀의 소문’이 나긴 했을 거야. 결국에는 프리메이슨도 현재의 주가혜가 천년 전의 대교와 동일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테고… 당연히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나중에 올 유준 군, 자네를 대비하여 프리메이슨의 입맛대로 키워졌겠지.”
‘인질’…? 그런 거 자체도 물론 곤란하지만, 만약에 대교가 조담놈처럼 날 죽이기 위한 살수로 키워졌다면…? 그랬다면 나는 과연…
“하지만 그때 하운 군은 순간적인 판단과 교묘한 수단으로 감시자들을 속이고 대교 양의 기억을 봉인할 수 있었어. 그로서… 지금까지 대교 양은 주가혜로서 자유롭게 살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원판…! 너, 너어… 이 쒸- 고맙…다…
나는 원판에 대한 지금까지의 복잡다난했던 모든 감정이 무색할 만큼 진심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을 봉인하는 건 대교 양 자신이 동의했다는 점도 알아두게.”
뭐…?
“하운 군에게 대충 상황을 들은 대교 양은, 자신이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는 위험하다고… 장차 자네에게 해가 될 거라고… 그렇게 판단했던 모양이야.”
대교는, 지금의 대교는… ‘자신이 진유준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자신은 진유준이 사랑하는 소녀가 아닐 거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대교가 날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건… 그건 그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던 건가…?
“그래서, 보통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모든 기억을 봉인하는 일도 비교적 수월했었다고… 그러더군.”
그런데… 그럼에도… 원판처럼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데 뛰어난 녀석의 최면에 의한 기억 봉인과… 그걸 스스로 동의하고도… 그러고도 날 완전히 지우지 못했던 건가…?
꿈속에서는 계속 그때를… 나와의 기억을… 그리워했을 만큼… 대교 넌… 어쩌자고 나처럼 못난 놈을 이다지도… 아아~ 대교야, 대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