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64-2화 : 나보다 힘들었던 사람들.(2)
- 3부 – 7-6. 나보다 힘들었던 사람들.(2)
“뭐, 자네는 이제 와서 무슨 얘기를 들어도 아직 하운 군을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 친구가 해온 일을 조금은…”
닥터 제이는 몇 마디 더 하다가 문득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말… 안 해도… 감사하고 있다고요. 진심으로… 이번만큼은 원판 그 녀석에게… 그리고 대교… 대교 넌 정말…
나는 당장 대교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려워서 눈을 감고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에게 얘기해 줘야 하는데… 네 잘못이 아니라고…
날 잊은 건 네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날 위해서 선택한 길이었다고… 당장 그 얘기를…
“가봐야겠습니다. 당장.”
“…그런데 혹시…”
닥터 제이는 내 행동을 멈추게 하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며 망설이는 것 같았다.
“…되돌리고 싶지는 않은가?”
“…예?”
“…하운 군이 한 봉인이니, 그 친구라면 다시 봉인을 푸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얘기야.”
“지, 진짭니까?”
“진정하고… 신중하게 생각해. 음… 그래, 하운 군은 불가능하다고 했겠지만 그건 당연히 도청당하는 상황이어서 과장해서 얘기였을 뿐이라고 하더군. 물론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서 ‘힘든 건’ 사실이라고 해. 지금까지 십 수 년 동안 모든 기억을 잃고 새로운 기억을 쌓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비슷한 세월 동안의 기억이 충돌하게 되면 그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는 거지.”
<<여기>>
그러고 보니 원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의 얘기를 하긴 했었다. 진상은 이렇게 다르다고 해도, 대교의 기억이나 감정이 커다란 혼란을 겪을 거라는 건 당연한 얘긴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까지 대교 양이 보인 행동을 보면 오래 전에 봉인된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몰라. 아, 그리고 최근 자네가 대교 양을 만나서 보인 행동 때문에 어차피 지금은 그녀의 진면목을 프리메이슨의 상부에서도 의심하고 있는 상태야. 그러니 이제 그런 이유로 굳이 기억을 봉인해서 숨길 필요는 없다는 얘기지.”
닥터 제이는 지금까지의 그와는 달리 상당히 난처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혼란스럽게 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역시 내가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이런저런 정황을 굳이 확실히 해 두는 걸세.”
“제가… 만약 봉인을 푸는 쪽으로 결정한다고 해도… 원판은 지금…”
“아, 그는 곧 복귀할 수 있을 거야. 비록 여러 가지 계산을 깔아두기는 했다지만 결국 ‘강경책’이었던 이번 일로 오히려 중요 기지가 완전 소멸되어 버렸고 자네와 몽몽 군에게 반감만 샀으니, 하운 군의 ‘유화책’이 다시 인정받을 수밖에 없을 걸?”
그런가…? 내가 지금까지 불쾌하게만 생각했던 원판의 모든 행동이 프리메이슨의 수뇌부에서는 ‘유화책’으로 보였던 건가…?
“…어떤가, 이곳의 시스템으로도 하운 군과 항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되는 대로 대교 양의 기억봉인을 풀라고 말해 둘까?”
내 결정에 따라 대교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지금까지처럼 막연하고 단편적인 꿈속의 기억이 아니고, 내가 몽몽을 통해 보여줬던… 영화를 보는 듯이 그냥 알게 되는 이야기도 아니고… 정말 대교 자신의 천년 전 기억과 감정을 되찾게 된다…?
“음… 내 판단으로는 앞으로 24시간 안에 하운 군이 구금에서 풀려나 본래의 자리로 복귀할 될 수 있을 거야. 대교 양의 기억봉인을 푸는 시도를 하는 건 하운 군이 자연스럽게 대교 양을 만났을 때, 언제라도 가능하지.”
24시간 안에 원판이 복귀…? 그렇다면 그 후… 아무리 길게 잡아도 며칠 안에 대교의 천년 전 기억을 되돌릴 수도 있다는 얘기…! 하, 하지만… 그게 정말… 옳은 일…일까?
“아, 먼저 하운 군의 비서인 ‘란’, 그녀에게는 연락해 둘 수도 있겠군. 그러는 것이 더 빨리 처리될 수 있…”
“…아뇨.”
나는 결국 닥터 제이의 말을 끊고 거부의 뜻을 밝혀야 했다.
“그만… 두세요. 지금 이대로… 이대로 가는 게 좋겠어요.”
그래… 이제와 대교에게 곧바로 예전 기억을 찾게 하는 건 ‘반칙’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교가 너무나 힘겹게 천년의 세월을 넘어 날 찾아온 것처럼… 나도 대교의 본래 기억과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는… 내가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한다는… 그건 천년 전에 대교를 남겨두고 왔던… 대교를 힘들게 했던… 나의 의무가 아닐까…?
“훗~! 웃은 건 미안하네. 자네를 하루 이틀 봐 온 건 아니지만…”
닥터 제이는 미안하다면서도 빙긋이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이를 먹어도 변함없이 자기 멋대로 들쑥날쑥…! 그런데도 두 가지만은 엄격해졌군. 무공과… 사랑…!”
내가 닥터 제이의 지하 비밀 아지트이며 이 시대의 진정한 비화곡을 떠난 것은 1시간 정도 후였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건, 내가 대교의 환생 당시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다. 그 이후에 나는 약 한 시간 정도를 운기조식에 전념하여 약간이나마 컨디션을 회복했다.
그러고 나서 출발하기 전까지 약 20분 정도 더 이런저런 얘기를… 내가 궁금해 했고 닥터 제이가 알고 있는 얘기들을 추가로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곱씹으며 어두운 지하를 걸었고, 이 시대의 비화곡을 떠난 후 40분 정도가 더 지났을 때… 비로소 정상적인(?) 지하 동굴까지 나갈 수가 있었다.
쿠왕~! 크쿠쿡- 쿠크크크…
글로 표현하면 대충 이쯤 되는 소리일까…? 암튼, 나는 마지막으로 내 앞을 가로막은 바위벽을 생사금마도결로 뚫고 그곳을 통과했다. 구멍을 통과한 후에 주변을 돌아보니, 아니 그전에 벽을 뚫자마자 밀려든 공기의 맛(?)으로도 알 수 있었다. 몽몽이 앞서 알려준 대로 이제 자연적이며 정상적인 지하 동굴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현천기공으로 조절하던 호흡을 풀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아아아아아~”
…좋군. 아직 지상의 공기도 아닌데… 그래도 일단은 좋아.
지하 비화곡의 출구 중 하나를 떠난 후로는 공기가 거의 없는 땅 속을 지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연옥도에서 가장 게을리 했다고 자인하는 건, 현천기공에 포함된 만와침수법(慢寢睡法)은 보통 구식대법(龜息大法, 호흡을 하지 않고 버티는 비법)으로 분류되는 호흡법이었다. 그래서 그 분야만은 과거의 대교에게 미치지 못할 정도였는데, 마군황 등극 과정 이후 계속 엄청 빡시게 다양한 장소에서의 전투를 거듭한 탓인지 그것도 저절로 수련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금 40분이 넘는 시간을 호흡도 거의 하지 않고, 더구나 가로막는 흙벽이며 바위를 깨며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능숙해 졌다는 건 물론 기쁜 노릇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신선한 공기’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몽몽. 현재 위치는? >
[ 주인님께서 임시 코드명 조담놈과의 대전을 위해 움직이셨던 위치로부터 4, 50미터 정도는 더 지하로 추정됩니다. ]
< 으음. 계속 어느 정도 지상 쪽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지하 비화곡이 깊기는 깊은 곳에 자리 잡긴 한 모양이군. >
너무나 엄청난 규모와 장소에 만들어진 지하 비화곡. 그런 공사가 가능했던 건 ’12인의 원로’라고 불리기도 하는 프리메이슨의 수뇌부 중에서 절반이나 다른 원로들과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복제인간을 이용한 방식으로 ‘불로장생’의 꿈을 선택한 원로들과 달리 그들 6명은 정상적인 인간의 생애를 더 중요시 여겼고, 그 때문에 복제인간 제조를 중심으로 한… 지나치게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생체공학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같은 뜻을 가진 닥터 제이와 원판에게 힘을 빌려 줘서 다른 원로들이 모르게, 그 원로들에게 저항할 수 있을 정도의 기반… 지하 비화곡 건설이 가능토록 도왔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 지하 비화곡 건설을 도왔던 원로들이 지금은 이미 6년 전 쯤까지 차례로 죽었고… >
결국 그들의 사인은 전부 ‘노환’. 즉 자신들이 원한바대로… 정상적으로 늙어 죽었다는 거다.
< …그들의 유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원로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 후계자가 되었다고 하니… 음… 어쨌든 일단 ’12인’ 중에도 ‘젊은 층’이 생겼다고 봐야겠지? >
[ 그러한 기준을 ’12인’의 정체 추적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
12인의 사도인지, 원로인지… 하여간 그 인간들은 닥터 제이도 아직 전부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리고 그 기간 내내 너무나 뛰어난 조직원이었던 닥터 제이에게조차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그들 12인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닥터 제이가 날 상대로 전투와 공작을 벌인 것처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모두가 영상채널을 열고 서로 보고 듣기도 하지만 그런 때도 입과 턱 아래부터 가슴까지의 상체부분만 카메라에 잡히도록 한다나?
[ 모니터 상으로 일부나마 드러난 12인의 기본 체형과 ‘반지’의 정보도 계속 분석과 추적 중입니다. ]
반지…! 무슨 반지의 제왕도 아닌데, 그들 얼굴 없는(?) 12인은 모두 왼손에 같은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그 문양, 프리메이슨을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인 ‘제 3의 눈’은 어차피 상당히 유명한 거라 단서가 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몽몽은 닥터 제이가 제공한 자료에서 반지의 세밀한 모양과 규격까지 기억해 두었으니 만약 12인의 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느 정도 그 진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으음… 그나저나, 몽몽. 여기부터 지상… 그러니까 나의 수하들에게 돌아가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냐? >
나는 너무나 어둡고 습한 지하 동굴을 얼마 걷지도 않고서 물었다. 아예 공기조차 없던 코스보다야 천국이고 몽몽이 박쥐처럼(?) 초음파로 측정한 주변의 지형지물을 알려줘서 이동하는데도 별로 지장이 없지만 그래도 역시 지상에 비해서는 그리 유쾌한 환경이 못 될 수밖에 없다.
[ 현재 주인님의 컨디션과 이동 능력으로 약 47분 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
어렸을 때, 그때는 깊은 동굴 탐사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어둡고 복잡한 동굴을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다 보면 결국 한 구석에 금은보화가 가득한 장소가 있는… 그런 환상과 모험의 세계 말이다.
하지만 물론 그건 초딩 시절 얘기고, 조금 크면서는 동물의 왕국 특집편 같은 것만 봐도 깊은 지하가 얼마나 광활하며 위험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그 안에 엄청 해괴한(?) 것들이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얕은 물가에서 눈도 없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는 모습과 알 수 없는 벌레 같은 것들이 희미한 광채를 내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섬뜩하군. 하지만… 뭐,
비록 패했다고는 해도 식귀인지 뭔지 하는 ‘퓨전 도깨비(?)’
에다 마계의 귀족들과도 한 판 뜬 경험이 생겨서 그런지…
이젠 뭘 만나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넘길 수 있을 것 같군. 아, 그러고 보니…
< …몽몽. 내 몸에 정말 별다른 이상이 없는 거 맞지? 늑대인간화 하는 징조 같은 게 전혀 없냐 말이야. >
[ 그렇습니다. 현재까지는 아무런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닥터 제이가 전달해 준 마신일의 말로는 인간을 늑대인간화 되도록 하는 ‘영체(靈體)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건 라후의 혈족과 계약을 맺고 융합되었던 과거의 늑대인간들뿐이라고 한다. 대체 왜 그런 바이러스가 생겼는가 하는 점은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순수한 라후의 혈족들에게는 분명히 그런 변종 바이러스가 없다고 한다.
<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계속 체크해 줘. >
[ 알겠습니다. 또한, 늑대인간 및 라후의 혈족들에 대한 정보도 다각적이며 지속적으로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
< …그렇군. 좋아. 부탁해. >
라후의 혈족에 대한 자료가 꼭 마신일과 세계정화재단에만 있는 건 아닐 테니, 다른 곳이나 사람을 통해서 그 부분만 확인하면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늑대인간이 될 일말의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일단은 털어 버린 채, 지하세계 산책을(?) 계속했다. 그리고… 결국 눈부신 태양의 빛이 비추이는 지상까지 나올 수가 있었다. 닥터 제이와 몽몽이 계산한 것처럼 폭파한 연구소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의 계곡 밑이었기 때문에 미군 조사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잠시 여유 있게 그랜드 캐년의 장엄한 일몰을 올려다보며 감상에 젖었다.
아침 무렵에 지하로 들어갔다가 한나절이 거의 다 지나서야 겨우 살아 돌아 올 수 있게 되었군. 물론… 그 한나절 동안 지하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제라도… 아니, 겨우 한나절 만에 저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게 된 걸 오히려 행운으로 여겨야겠지…? 으음… 어쨌든 역시 지상의 인간은 지상에서 살아야지. 암. 이렇게 밝은 곳에서… 대교의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에서…
[ …주인님! ]
< …응? >
나는 몽몽이 날 부른 까닭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 이… 소리는 혹시… >
[ ‘전투’로 추정되는 소음입니다. ]
나는 몽몽의 보고를 듣자마자, 나 역시 확인한 방향을 향해 경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부근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어사조 멤버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 …다행히 주인님께서 우려하시는 상황은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
< 그런 거… 같지? >
전투의 소음이 가까워질수록 수하들이 위기에 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일
단은 현장 가까이 달려가 보았다. 나는 미군 조사대로 보이는 자들이 시선에 들어오는 순간 재빨리 몸을 숨기고 좀 더 자세히 상황을 살펴보았다.
차츰 더 많은 수의 미군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별 수 없겠군. 상대가 나와 거의 대등한 고수… 조담놈인 이상 말이야. …근데, 어째서 싸우고 있는 거지…?
< 닥터 제이 말로는 DP에서도 원판과 닥터 제이 정도의 간부가 아니라면 DP를 프리메이슨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래도 저 조사대가 순수한 미군이 아니라 DP의 영향력에 속한 조사대라는 거 정도는 알 텐데… 그런데도 ‘아군’과 저런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건…
저 녀석 혹시… 혼자 나와 승부를 내려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는걸? >
[ 지금 그 말씀은… 코드명 조담놈이 지금, 조직으로부터 아예 빠져나오려고 한다는 의미입니까? ]
<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몽몽. >
물론 내가 조담놈의 생각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역시 죽은(?) 닥터 제이와 조직 자체로부터 벗어나서 단독으로 승부를 내려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 …주인님. 닥터 제이의 연락입니다. ]
…응? 나중에 연락해서 한 번 물어보려고 했더니만…
< 어, 지상 회선의 방화벽 점검이 벌써 다 끝났나요? >
“아니, 원거리는 아직이야. 하지만 이 부근까지는 괜찮을 것 같아서 연락해 봤네. 만약을 위해서 조사대 가까이 정찰 로봇을 보내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아, 자네도 혹시 아직 그 부근에 있는가?”
“예. 그리고 조담놈이 조사대와 싸우고 있는 걸 보고 있지요. 뭐… 아직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어쨌든 분명히 아군에 가까운 자들을 치고 있네요.”
“…그래. 역시 그렇게 나왔군.”
“예상했던 겁니까? 아니… 그렇게 유도했던 거군요. 그에게 굳이 출생의 비밀을 알려 줘서 당신에 대한 정을 끊는 식으로… 하은이 때처럼 말입니다.”
“확실히 그런 의도였기는 해. 그러나 그 친구는 하은이와 달리 이렇게 빨리 행동을 결정할지는 몰랐어. 아무래도 내 계산보다 빨리 자네 앞에 나설지도 모르겠군.”
나는 슬며시 자리에서 벗어나 물러나기 시작했고, 닥터 제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자네 수하들은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소식을 알려 주려고 연락했던 거야.”
< 음, 어디로요? >
“아직 그리 멀어진 것은 아니야. 미군 수색대가 도착하기 시작하니까 그들의 시선을 피할 정도로만 이동하려는 것 같아.”
< 일단, 그거 알려 주시는 건 고맙습니다. 그런데… 조담놈이 저런 행동을 택하게 한 건 제가 앞으로도 싸우면서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섭니까? 아니면 조담놈의 자유를 위해서 입니까? >
“둘 다이지. 난 자네를 누구보다 아끼지만 13호도 20년 동안이나 제자처럼 여기고 가르쳐 왔으니 그 역시 더 강해져서 자신의 인생을 찾길 바래.”
< 참 힘든 방식으로 주변 상황들을 챙기는 타입이네요. 자칫하면 모두에게 증오만 산 채 끝날 수도 있을 텐데… >
“훗~ 그게 나의 운명인 걸 어쩌겠나. 하지만… 역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지. 그러니 자네는 그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편이 좋을 거야.”
< 그 말씀은… >
“…자네가 수하들과 합류하는 건 아마도 20~30분 정도 후에나 가능하겠군. 그 사이 옛날 얘기나 조금 더 해 주지. 음… 하운 군이 선천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
그건 알고 있지만, 뜬금없이 원판의 체질 얘기를 꺼내는 건 뭐야?
“아니, 그보다… 하운 군은 평생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지 자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지도 않았어. 그 대신 또 다른 형태의 자기 분신… 쌍둥이 여동생 진하연만은 되찾고 싶어 했다네. 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원판, 그 자식은…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그렇게 여동생 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던 건가…? 그렇다면, 끝내 그 녀석의 사랑을 얻지 못했던 수많은 여자들… 이 시대의 란도 불쌍하지만… 원판 그 녀석 자신도 참으로 불행한 놈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네. 우리 부부 역시, 두 사람 다 2세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어. 게다가…
날 만났을 때, 시스는 이미 불치의 병에 걸려 있어서 불과 2년도 넘기지 못할 정도의 상태였지.”
< 예…? 이모님이요? 그런 얘기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
“못 들었겠지. 그녀는 그런 사실을 철저하게 가족들에게 숨기고… 그리고 나와의 미국 도피를 강행했어. 그래… 그녀는 부모에게 자식이 일찍 죽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그냥 평생 욕을 먹는 길을 택했던 거였어.”
< 그, 그건… >
이모님의 선택이… 옳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또 그분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내가 어떻게든 병을 고쳐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약간의 희망에 기댈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그 땐 아직 나도… 미래 과학으로도 그녀를 치유할 수는 없었어.”
< 잠깐! 어째서요! 천 년 전과 달리 이 시대는… 그러니까, 설사 몇 십 년쯤 전이라고 해도, 그 때도 약이나 설비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거 아닙니까! 당신의 지하기지처럼! >
“미래 로봇에 남겨진 데이터가 완전했다면… 말이지.”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아, 맞다. 미래 로봇이 발견되었을 때, 그건 일부가 부서져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복구 가능했던 데이터는 절반을 넘지 못했어. 특히 의학 부분은 처음부터 손상이 심했고… 지금까지도 모든 미래 과학의 데이터가 복구된 건 아니야.”
그랬구나. 그래서 프리메이슨이 그토록 몽몽을 탐내고 있는 거구나. 그들은 몽몽의 기능뿐 아니라 완전한 데이터를 원하고 있는 거였어.
“시스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고… 마침 하운 군도 자신의 분신을 원했어. 프리메이슨의 인간들 역시 하운 군 옆에 진하연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그런 얘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모두의 합의에 의해 하은이의 탄생이 결정되었어.”
그랬던 건가…? 난 이모님이나 이 양반이나 프리메이슨에 의해 억지로 하은이를 맡게 되었고, 부모로서의 정은 키우면서 생긴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하은이는 너무나 이모님께서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하은이가 탄생할 당시에는 복제 인간 기술 역시 미비해서 시험관이 아닌, 인간 여자의 모체를 통해 성장시키는 방식밖에 성공하지 못할 때였지.”
“그렇다면 하은이도…”
“그래. 하은이는 비록 하운 군의 복제라고는 하지만, 시험관이 아니라 분명히 시스가 체내에서 품고 키운 아이야.”
하은이가 그걸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금이라도 녀석을 달래고 설득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지도…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지. 시스가… 나의 아내가 스스로 병마와 싸우기 시작한 거야. 하은이를… 자신의 딸을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어서… 그녀는 몇 년이고, 버티고 또 버텨냈어. 하은이조차 모르게 비밀을 지켜가며… 수많은 고통이 수반되는 치료를 10년이 넘게 감내해 가면서…”
나는 이제야 이모님께서 왜 그렇게도 하은이를 한국인으로 키워왔는지… 왜 항상 ‘돌아가야 한다’고 했는지… 이모님께서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오셨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도 15년 전에 잠깐 귀국했을 때는 가족들에게 배척만 받고…
“나, 나 역시… 연구에만 몰두했지. 하은이에게 아비로서의 정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없을 정도로…”
…문득, 왜 닥터 제이가 이 이야기를 굳이 날 밖으로 내보내고 시작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듯, 잠시 이를 악물고 격정을 참아내는 것 같았다.
“저, 저기…”
나중에 다시 듣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지만, 닥터 제이로부터는 다시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공했어. 나는 그녀의 몸을 갉아먹던 저주스런 병마의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어. 그 것이… 5년 전의 화창한 초여름… 그리고…
나와 하은이가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었던 건 불과 2개월…! 10년이 넘는 고통의 세월 끝에 되찾은 행복을 그녀는 단 2개월 밖에…”
닥터 제이는 다시 말을 잇지 못했고, 나 역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확실한 어조로 선언했다.
“유준 군. 나는 프리메이슨을 없애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이 세계 전체라도 멸망시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