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67-2화 : 봉인(封印) 깨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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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67-2화 : 봉인(封印) 깨기.(2)


  • 3부 – 7-9. 봉인(封印) 깨기.(2)

< 어? 안돼! >

이미 조금 늦었다. 뒤따라오던 은사마군이 날 공격한 BB형제를 적으로 판단, 형제의 사이를 날아가듯 통과해 버린 것이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그녀의 두 자루 단검이 그린 검광이 BB형제의 목을 그었고 말이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버린 은사마군이 내 앞에서 날 등지고 선 자세로 물었다.

< 천주! 괜찮으십니까? >

< …괜찮아. 근데 이제부터 안 괜찮아질 듯도 한데… >

“쿠워어어어억~!”

짐승을 넘어 마수와도 같은 울부짖음 소리였다. 본래도 헐크 비슷한 얼굴이었던 BB형제의 얼굴도 분노로 일그러져 인간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 맙소사. 저건 대체… >

은사마군은 적을 베기는커녕 오히려 날이 깨져버린 자신의 단검을 땅바닥에 버리고는 다시 새로운 단검을 빼들었다. 은사마군은 평소 허벅지며 발목이며 여기저기에서 6개에서 10개 정도의 단검을 가지고 다닌다.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 그런 걸로는 안돼. 일단 피해. >

< 예, 천주. 어서. >

쯧. 으르렁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한 BB형제의 엄청난 압박에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나면서도 잘도 날 챙기려 드는군. 하는 수 없지.

< 뭐해. 너도 빨리 피해. >

은사마군이 고개를 돌려 내가 먼저 멀찍이 튄 걸 확인하고 다시 앞을 보았을 때는 이미 BB형제들의 거대한 육체가 은사마군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아-“

너무나 포악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약한 신음성을 토한 은사마군이 다급하게 신형을 날려 피했다. 그 직후, BB형제의 주먹이 은사마군이 있던 지면과 부근까지 뭉개버리며 커다란 구멍 네 개를 만들어냈다. 마치 주먹 한 발 한 발이 소형 미사일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아무리 힘이 세고 주먹이 다른 사람들보다 커도 그냥 맨주먹으로는 저렇게 안될 텐데… 저 녀석들, 분명 무공이 아닌 다른 뭔가가 있어.

BB형제의 수상한 힘도 힘이지만, 오늘은 CR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 무작정 놈을 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은사마군은 질린 얼굴로 ‘피하라’는 내 말을 따를… 듯하는 것 같더니, 웬 고집인지 달아나지 않고 다시 싸울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에구, 저 아가씨 왜 저래? 평소에는 무조건적으로 명령에 따르던 녀석이 왜… 쯧, 천음마군을 선도(?)하기는커녕 되려 물든 거 아냐, 이거?

< …어쨌든 은사마군의 스피드라면 저 헐크 형제를 쓰러트리는 건 둘째치고라도, 간단히 당하지도 않겠지? …몽몽. 분석 끝났냐? >

[ …우선, 수치상의 피부 경질도는 이미 주인님께서도 부상 악화를 각오해야 벨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게다가 문제는… ]

거기서 더 문제? 잠깐, ‘이미’라고?

[ 점점 수치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

뭐야, 저거. 싸우면 싸울수록 더 단단해지는 거야?

< 아직 해당 인체의 외피 경질화 체계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감정의 변화에 따른 TEU계열 호르몬 분비가 해당 신체의 돌연변이체 세포를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

몽몽 선생의 ‘의도적 돌연변이체(CR에 대한 몽몽의 표현)’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는 사이, 정말이지 요란뻑적지근한 소음과 함께 숲과 바위며 땅이 계속해서 로켓포 폭격을 당하듯 박살나고 있었다. 저런 엄청난 포격과도 같은 공격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내며 틈을 노리고 있는 은사마군이 기특하기도 했지만…

“어쩔 거야. 빨리 멈추지 않으면 일껏 비밀스런 장소에서 만나는 의미도 없잖아.”

내 말은 그 사이 기척을 죽이고 내 뒤로 다가와 있던 야황에게 한 말이다.

“아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지만 저런 상태가 되어버린 BB형제는 저도 말리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조금 손을 빌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보고 도와달라고?”

“뭐, 저 형제의 주의를 잠시 끌어 주시는 정도면 됩니다.”

이 자식, 아무래도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근데 그렇다고 안 도와줄 수도 없게 되어가네. 은사마군… 저 녀석, 내 예상보다 빨리 보법이며 모든 것이 무뎌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의 공공보법을 따라붙느라 무리를 했나 봐.

나는 하는 수 없이 노구, 아니… 부상 중인 몸을 끌고 BB형제와 은사마군이 리턴 매치(마녀의 저택에서 있었던 걸 대결로 칠 수 있다면)를 벌이는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 아, 천주! 천주께선 지금 중상… >

은사마군은 지친 몸으로 BB형제의 맹폭격을 피하는 와중에도 계속 날 걱정씩이나 해주고 있었다.

< 됐네, 이 사람아. 자네나 어서… >

내가 재차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전황이 급변하고 말았다. BB형제 중 하나의 주먹이 내리쳐진 바위의 파편이 은사마군의 오른 발목에 적중해 버렸던 것이다. 은사마군도 어쩔 수 없이 비틀대는 순간, 또 한 명의 BB형제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연히… 나는 그 사이로 뛰어들어, 현재로서 가능한 전력으로 검기를 날렸다.

쿠콱

거의 동시에 검기에 적중된 두 형제가 크악 하는 비명과 함께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그래도… 그렇지, 조금도 잘리지는 않고 밀리기만…?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네?

“감사합니다, 진유준님!”

야황의 외침이었다. 그는 BB형제가 내 검기로 인해 주춤한 틈에 BB형제 중 한 명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교묘한 몸놀림으로 등 뒤에 달라붙었다.

그는 자신이 목을 잡고 매달린 형제의 귀에 뭐라고 지껄여 대더니 곧바로 몸을 날려 다른 형제의 무서운 공격을 손쉽게 회피하며 그의 등 뒤로 돌아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형제의 귀에 대고도 또 같은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저 자식… 역시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공연히 나에게 내력을 쓰게 했군. …하긴, 처음 BB형제에게 암시를 걸어서 공격하게 한 것부터가 녀석이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는 의미였겠지만…

나와 야황은 사전에 미리 만나서 마녀를 없애는데 합의하고 계획을 짰다거나 그랬을 만큼 가까운 관계가 아니다. 당연히 그럴 시간도, 그럴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아까… 그러니까 내가 마녀 여옥의 저택에 처 들어갔을 때, 나는 곧바로 원판이 마녀를 부추겼다는 걸 깨달았었다. 그리고 그 직후 몽몽도 저택 안에서 대기 중인 야황과 CR들을 스캔해 냈었다.

“나는 더 따져 볼 것도 없이, 마녀가 내 수하들과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닥터 제이에게 연락했었지. 닥터 제이는 몽몽을 중계국으로 삼아 야황에게 전화를 걸어서 ‘원판의 본심’을 알렸고, 그로서 야황은 나에게 협조하게 되었던 거였어. 그런데… 아무래도 자신들의 ‘기술적인 창조주’ 닥터 제이의 말로도 완전히 모든 걸 믿기는 어려웠던 모양이군. ‘진실한 창조주’로 믿고 있는 원판과 직접 얘기라도 하기 전에는 말이야.”

“하하~ 죄송합니다. 장난 좀 치려고 했던 건데, 설마 BB형제가 이렇게까지 흥분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장난이라기보다 의도된… ‘우릴 속일 생각 마라’는 경고였던 것 같은데? 내 몸 상태를 알면서도 날 굳이 움직이게 한 것도 그렇고 말야.”

“후후- 오해십니다, 오해. 닥터 제이의 말만 듣고도 즉석에서 현재 모시던 분을 배신하고 진유준님을 도운 제가 아닙니까. 전 진유준님이 꼭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긴, 우릴 믿지 않았으면 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믿으면서도 결코 방심은 안 하는… 이런 성격, 나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다소 섭하긴 하다. 난 전에 날 죽이려 했던 이 녀석을 제압하고도 결국 죽이지 않고 살려 준 적도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이거, 이거… 아가씨께도 본의 아니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야황은 은사마군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그의 손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나의 공공보법을 따라 오느라 무리를 한 상태에서의 대결, 게다가 운도 따르지 않았다.

‘그런저런 요인을 생각한다 해도 역시 오늘 나는 실패했어. 천주를 공격한 적과의 대결에서 패했다는 것은 경호원으로서의 자격미달, 혀를 깨물고 죽어야 마땅하리라.’

뒤의 혀를 깨물고 어쩌고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은사마군의 지금 표정을 봐서는 대충 그런 식의 생각으로 빡 돌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BB형제들은 야황에 의해 암시가 풀리자 그 동안의 일은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언뜻 은사마군의 차가운 살기를 깨닫자 이유도 모르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저 자존심 강한 아가씨께는 죄송하지만, 사실 BB 형제는 결코 느리지도 않습니다. 단지 오늘 건 암시가…”

“‘느림보 괴수’였기 때문이겠지.”

“와우. 어학에도 정통하신 모양입니다.”

내가 ‘독일어’를 알 리가 없지. 당연히도 몽몽이 해석해 준 건데… 야황이 말한 ‘암시해제어’(?)의 전문은 ‘느림보 괴수의 흥겨운 놀이, 공연은 끝났다.’였다.

“‘공연’이라… 연극 무대나 뭐, 그런 건가?”

빈곤한 문화 생활을 해 온 나로서는 그런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야황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서커스…! 서커스의 무대에도 엄연히 시나리오가 있는 공연이 많죠.”

그런…가? 난 사실 서커스는 별로 흥미가 없어서 명절 때 TV에서 해주는 것도 거의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가 몇 년 전 찾아냈을 때의 BB형제는 독일인 여자가 단장인 서커스 단의 일원이었죠. 괴수 형제로서 다양한 설정의 공연으로 인기도 제법 많았다고 하더군요.”

여자 단장 아래에서 키워졌다…? BB형제에게 ‘여자 공포증(?)’이 생긴 걸 보니 어지간히 꽉 잡혀서 키워진 모양이군. 대체 어쨌기에 애들이 저렇게…

[ …주인님. 닥터 제이로부터의 연락입니다. ]

“어, 아무래도…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내가 그렇게 운을 떼었는데도 야황은 아직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뭐, 올 사람들도 다 온 것 같고 말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의 숲을 살펴보았다. BB형제가 날뛰는 사이에 몰려든 CR들이 사방의 나무 사이며 나무 가지 위 여기저기에 서거나 앉아서 나와 야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근데, 어째… 인원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예. 제 설득에 응하지 않았던 녀석들까지 결국에는 온 겁니다.”

“…모두 좀 더 가까이 오라고 하지 그래? 어차피 다들…”

“아뇨. 더 이상은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마스터에 대한 견디기 어려운 증오와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이 자리에까지 오기는 했지만… 그걸 인정하기는 싫은 거죠. 저야 뭐, 이제는 둘 다 잊어버렸지만 말입니다.”

훗~! 그런 녀석이 원판의 비서인 ‘란’의 전화 한 통화에 따라 충실하게 동료들을 끌어 모아 마녀의 저택에서 날 도왔던 거냐? 또 이렇게… 원판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장소와 시간에 악착같이 나와있는 거고?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일찌감치 휴대폰을 꺼내어 뒤로 감춘 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 또 뭐냐?

“에… 그러니까, 조금 지루해 지려고 해서 말입니다. 대체 언제…”

“올 거야, 곧. 적의 감시를 피한 전화는 녀석도 극히 한정된 장소와 시간에만 가능하다고 했잖아.”

[ …주인님. 코드 명 원판과 보안회선이 연결되었습니다. 바로 야황의 휴대폰에 중계해 주겠습니다. ]

휴대폰의 벨이 울리는 순간, 야황의 여유롭던 표정이 일시에 사라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주변의 모든 CR들에게서 느껴지던 기척까지 동시에 멈춰버렸다.

야황은 천천히… 자신이 손을 떨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는 듯 얼굴은 여전히 태연을 가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휴대폰을 들었다.

“…레인(Rain)인가?”

원판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야황은 선뜻 입을 열어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년 동안 야황이라 불리는 살수로서 살아오며 잊고 있던 자신의 본명(?)을 원판으로부터 듣게 된 것만으로도 그의 평소 모습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답해라, 레인. 거기에 많은 친구들이 함께 있지? 릭스, 한영, 모나…”

원판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 이름들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닥터 제이 같은 사람은 자신의 수제자 격인 조담놈에게조차 ‘13호’라는 숫자로 밖에 부르지 않았지만, 원판은 다르다고 한다. 이들 수많은 CR들 모두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후퍼, 토디, 제니스, 위버…”

“그들은!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마스터. 역시 보고조차 되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본래 예정되어 있던 시기에… 어김없이.”

원판은 안부인사로 이 자리에 있을 법한 이들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이다.

“…역시 재미없군. 예외 없는 과학이란.”

“재미…뿐이겠습니까.”

“…레인. 난 말야…”

“마스터! 한 가지를 먼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말해 봐.”

“마스터께서…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버렸던… 그런 당신도 결국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 설마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나 역시 너희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처지이지. 너희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 그 정도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

원판의 고백을 들은 야황, 아니 레인의 얼굴 근육이 미묘하게 움찔대며 떨기 시작했다.

“그런, 그런 식의 변명… 버린 것이 아니라 자유를 준 것이란 말… 제가, 우리가… 믿을 것 같습니까?”

“…넌 항상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아이였지, 레인. 이번에도 그리 해라. 넌 항상 틀리지 않았어.”

잠시, 아주 짧은 듯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길게도 느껴지는 시간 동안 레인은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견디기 어려운 격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계속 눈을 감고 있었지만, 결국 그 눈이 뜨여졌다.

“제가… 항상 틀리지 않았다고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떨까요?”

레인의 한 쪽 입가가 살짝 올라가며 어딘지 낯익은 느낌의… 섬뜩한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 항상 마스터를 그리워해 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직접 목소리를 듣고 궁색한 변명을 듣고 있자니… 역시 지금까지의 제 생각이, 그러니까 당신의 말처럼 ‘항상 옳았던’ 생각이 이번에도 맞았던 것 같군요.”

레인 저 녀석, 설마…

“당신은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꿈이며, 고향이었고, 아버지…였어. 하지만…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당신은 그저 ‘환상’이었어. 막상 가까이 다가가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현실의 남자 중 하나였을 뿐인 거야.”

레인… 레인, 저 녀석은 정말 원판을 그렇게까지 따르고 그렇게 사랑했었구나. 그래서 저렇게…

“자아- 이제 제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원판으로부터는 대답이 없었다.

“훗~ 제 입으로 묻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앞으로의 일을 미리 계획하고 살았던 적은 없군요. 뭐,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레인 녀석, 조금 전의 미소 이후로는 음성이 평소로 돌아와 있다.

“음. 동료들을 좀 더 모으겠습니다. 당신에게 버려진 자들로… 뭐, 우리들의 왕국이랄까? 그런 것도 좋겠군요. 하지만 당신과 DP, 혹은 그 위의 어떤 조직에 대한 복수 같은 건 꿈도 안 꿀 겁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 바라는 바일 테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아시다시피, 저희들의 생애는 즐기며 살기에도 부족하지요.”

레인을 비롯한 저들 CR의 치명적인 약점, 그것은 ‘수명이 짧다’라는 것이다. 심한 부상을 당한 후 회복될 때 한꺼번에 늙어버리는 것 말고도… 본래의 수명 자체가 짧은 것이다.

“하아아~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나름대로 후련하군요. 물론 지금까지의 얘기는 결국 우리가 당신을…”

“레인.”

“…말씀하십시오.”

레인은 지금 바로 옆에 있는 나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평소와 똑같은 레인으로서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판은 어떻게 알았는지 이렇게 말했다.

“…울지 마라.”

그렇다. 레인은 원판을 환상이라고 말하면서부터 줄곧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지 말고… 당당하게 너희들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자유를 찾고 즐겨라. 너희들에게는… 날 버릴 자격이 있다.”

눈만이 울고 있던 레인의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정말… 정말 그래도 된다고 하는 겁니까?”

어느 사이 주변의 모든 CR들이 가까이 모여들어 있었다. 각자의 뛰어난 청각으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건지, 모두들 레인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가 당신을 버려도 된다고요…? 그래도 된다고요…?”

자신들이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 또 원판에게 버려지는 거라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레인… 그리고 나의 아이들아. 미안…하다. 내가 너희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겨우 그 정도로구나.”

“그만! 그만둬요! 왜! 왜 닥치고 돌아오라고 하지 않아! 왜 당신을 떠나면 죽인다고 하지 않아! 왜, 당신을 위해 죽으라고 하지 않아! 왜! 왜에!”

이제는 완전히 본래의 어린 소년으로 돌아온 레인의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원판은 여전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나는 너희들에게 그러지 않겠다. 너희들은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아라. 그것이… 너희들에게 내리는 나의 마지막 명령이다.”

“안돼! 그딴 명령은… 끊지 마! 끊지 마요! 제발…! 제발…!”

레인은 털썩 무릎을 꿇고 땅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어엿한 성인의 몸, 혹은 남들의 배나 되는 거구, 성숙한 여자까지… 모두가 울고 있었다. 목놓아 통곡하고 있었다.

< 천…주. >

< …왜, 은사마군. >

< 이 사람들… 뭔가 이상합니다. >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럴 것이다. 지하무림인들이 마군황을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단지 어리석을 뿐인 사이비 종교단체의 맹종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 마치 부모에게 버려진 어린아이들 같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이 아니라 어딘가 느낌이 뭔가 좀… >

…그래도 은사마군은 보는 눈이 있군.

< 은사마군. 저 녀석들은… 사실 진짜 어린아이들이야. 전화를 받던 녀석이 저 중 가장 나이 많은 형이나 오빠로서… 열 셋, 그리고 나머지 녀석들은 전부 10살 안팎이라고 해. >

< 아… 그렇다면, 그렇다면 혹시… >

< 그래. 이번에 우리가 없앤 그 연구소… 거기서 주로 만들어진 거야. >

내가 놈들의 시설을 아예 없애 버릴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저 레인을 만난 후부터였다. 과학의 발달이고 나발이고… 이딴 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저 녀석들은…

< 은사마군, 저 녀석들은… 말야. 그것뿐이 아니야. 저들을 만들어 낸 자들도… 그 많은 실험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 저 녀석들… 저 어린것들이… 한 가지 중요한 실험에 쓰인 후에도 살아 남았기 때문에 또 다른 실험으로 저렇게… >

[ 주인님! 원판의 통화 요청입니다. ]

< …은사마군. 오늘은 이 정도만 알아 둬. >

나는 은사마군에게 하던 말을 끊고 원판의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군.”

< 정말 오랜만…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나도 기분은 그렇군. >

“음. 닥터 제이에게 모든 얘기를 들었다니 그 얘긴 특별히 더 할 것이 없겠고… 앞으로도 당신에게 많은 신세를 져야 할 것 같군.”

< 뭐 맡겨 놓은 거도 아니면서, 꽤 뻔뻔하네. >

“…여전히 나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 못한 모양이군. 오늘은… 저 아이들 때문인가?”

< …그래. 아무리 나나 네가 원해서 만들어진 아이들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저 아이들을 이용하는 건… 제기! 그래도 할 수 없다는 건 알아! 저 아이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고… >

“…다행이군.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어.”

< 다행은 개뿔이! 쓰바… 난 어찌되었든, 너 싫다. 그러니까 되도록 빨리 찢어지자. 프리메이슨인지 뭔지 하는 개새끼들 박살내는 데로. >

“프리메이슨이 개새끼들이란 건 나도 동감이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 그야 당연히 너처럼… 쳇, 잘나빠진 놈도 당하는 걸 보니 그럴 거라고 생각해. >

“웬일로 칭찬을다… 기쁘군.”

< 우쒸- 그보다 너 뭔가 할 말이 있어서 통화하자고 한 거 아니었어? >

“그렇지는 않아. 그냥… 당신과 단 한 번도 감시 받지 않는 상황에서 얘기해 본 적이 없어서, 그냥.”

말 그대로 그냥,이었는 말이군.

“오늘은 아무래도 더 한담을 나누기는 어려울 것 같고…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물론 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 …그래, 잘 자라. >

“당신도…”

원판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요몽 녀석이 튀어 나왔다.

[ 치이- 몽몽 오빠가 막아서 원판씨하고 인사도 못했네. ]

< 몽몽. 잘했다. >

[ 음… 하지만, 이제 주인님도 원판씨와 사이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기뻐요. 특히 서로 칼을 겨누어야 하는… 그러나 실은 뜨거운 우정으로 맺어진 두 남자의 간결하면서도 애틋한 마지막 인사는… ]

< 몽몽. 감금해. >

[ 어? 어… 몽몽 오빠! 정말 이러기야? 히잉~ 주인님. 제가 뭘 어쨌다고… ]

‘확실한 명령’으로 인해 간만에 오빠로서의 권위를 세우게 된 몽몽이 요몽을 체포해 간 후, 나는 잠시 더 가만히 서서 CR들이 진정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녀석들이 원판의 마지막 명령대로 각자의 인생을 찾기 위해 흩어진다면 기다리고 있을 필요도 없겠지만, 아무래도 녀석들에게 그건 무리일 것 같았다.

역시, 예상대로 가장 먼저 레인이 눈물을 그치고 냉정을 되찾는 것 같군. 근데 저 녀석 어째 뭔가 좀…

레인은 눈물을 닦고 일어서더니 자기보다 훨씬 큰 동생들 사이를 뚫고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자신의 평소 모습, 아니 그 이상으로 확실하게 ‘부모에게 버림받고 울부짖는 소년’이 사라져 있었다. 레인은 아까 원판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기 전에 지었던 미소… 내가 ‘섬뜩하다’고 느꼈던 미소를 더욱 짙게 지으며 물었다.

“누구…입니까, 나의 마스터를 저렇게 만든 건?”

이 느낌…! 그래, 이 녀석은 역시… 원판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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