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68화 : 수라혈불(修羅血佛)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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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68화 : 수라혈불(修羅血佛)의 후예.


  • 3부 – 7-10. 수라혈불(修羅血佛)의 후예.

레인의 외모나 지금까지의 행동거지와 사고패턴… 무얼 봐도 원판과의 직접적 관련성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살기를 품기 시작한 레인에게서는 어딘가 원판의 향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에 무조건 불쾌감부터 느꼈겠지만…

“보기 좋다, 차라리.”

나는 새삼 처음 만났을 때의 레인과 지금의 레인을 비교해 보며 말을 이었다.

“전에 만났을 때의 너는,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마지못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자의 허무함만이 느껴졌었는데…”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이런 거. 상대에 대한 형식적 예의보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는 이 간단한 반응조차 난 왠지 반갑다.

“…혹시, 프리메이슨이란 조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있나?”

나의 반문에 레인은 잠시 사이를 둔 다음에 대답했다.

“최근… 서점에서 사서 읽었던 책에도 비교적 상세히 나오는 세계적인 비밀 결사의 명칭이로군요.”

“그래. 서점이나 도서관, 그리고 잠깐만 인터넷을 뒤져봐도 관련자료가 수없이 쏟아지는 조직이지. 그런 만큼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벼운 흥미거리 정도로만 인식하고 넘어가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모두 진실이었던 거야.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라고 봐야겠지.”

나의 간단한 설명에도 레인은 빠르게 대부분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녀석은 잠시 더 생각을 정리해 보는 듯한 기색을 보였을 뿐,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내가 그랬듯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도 한 가지만을 먼저 물었다.

“…진유준님. 당신은 왜 마스터를 도와 그들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까?”

왜 싸우느냐고…?

그야 당연히 ‘대교와 몽몽을 지키기 위해서’지만, 결국 근본적인 건…

“난 원판… 너희들의 마스터를 별로 도울 생각은 없어. 난 다만 나 역시 그 녀석처럼 되기 싫을 뿐이야.”

“그렇…군요.”

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형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만약 저희들이 모두 함께 싸우고 싶다고 하면, 진유준님께서 받아들여 주시겠습니까?”

“…그래. 너희들이 원한다면.”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레인은 즉시 몸을 돌려 자신의 형제들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모든 CR들도 우리의 대화를 들었고 대부분 상황을 알게 된 눈치였지만 역시 실제의 낮은 정신 연령 때문에 이해가 느린 녀석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레인은 그런 형제들을 위해 알기 쉽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는 동의를 얻는 것 같았다.

< 천주. 저들도 이제 우리의 아군이 되는 것입니까? >

< 그래, 은사마군. 뭔가… 불만인가? >

<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

은사마군의 시선은 역시 BB형제를 향해 있었다.

< 저 녀석들과 다시 승부를 내고 싶은 건가? 그렇다 해도 당분간 참아 줘. 적어도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말야. >

< 아닙니다. 그보다 전… 물론 분한 마음도 있긴 하지만… >

응…? 은사마군 이 녀석, 뭔가 다른 것이 마음에 걸리는 건가?

그러고 보니 BB형제를 보는 시선에 적의가 거의 사라진 것 같기도 한데?

“진유준님.”

형제들과 자신의 생사가 걸린 일에 대한 상의를 참 짧게도 끝낸 레인이 다시 내게 돌아오고 있었다.

“오늘 이 곳에 모인 형제들 모두의 생사를 진유준님께 맡기겠습니다. 다만 마스터를 되찾는 날까지만… 이라고 하면 너무 뻔뻔할까요?”

“상관없어. 그런데 너는?”

“다른 형제들을 더 찾아내겠습니다. 그들에게도 진실을 알려 주고 선택권을 주고 싶습니다.”

“자유냐, 싸움이냐?”

“아니죠. 도망치는 자유냐, 싸우는 자유냐의 선택이죠. 저희가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예전부터 자유로웠던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레인의 뒤를 따라 다른 CR들이 일제히 모여들고 있었다.

하나 같이 조금 전까지의 눈물을 거둔 대신 살기와 투지를 뿜어내고 있었으며, 그것은 레인의 암시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에서 나온 감정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의 모처럼의 강한 기세도 내 앞에 오면서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부분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말입니다.”

레인은 내 앞에서 쭈뼛거리며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는 형제 CR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사실은 오늘 이들이 모였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진유준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다들 그 ‘저주받을 연구소를 없애준’ 사람이 어떤 분인지를 궁금해 했죠.”

아하- 그러고 보니 그 일 때문에 레인이 더 쉽게 날 믿고 협조해 줬던 거였군.

“그랬건만, 막상 대면을 하게 되니 이렇게 다들 수줍음만 타는군요. 대신 제가 대표로 감사의 인사를…”

“됐다. 너희들에게 감사받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산발적으로 눈치껏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CR들의 시선에는 확실히 감사와 동경의 빛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혼자 한 일도 아니지. 내 수하들… 특히 이 은사마군이 결정적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러니 굳이 감사를 하고 싶으면 그녀에게 하도록 해.”

은사마군은 즉시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모든 CR들의 시선이 은사마군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레인은 그들의 대표로서 은사마군 앞으로 나서더니 정중하게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분인 줄도 모르고 공격해서 상처까지 입혔다니…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레인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 다른 CR들도 모두 그녀를 향해(나는 옆으로 슬쩍 비켜 주었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 아뇨. 전 그때 그다지 큰 일을 한 것이 아니었어요. 모두 천주께서…”

은사마군은 무엇보다 내가 옆에 있는데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싸움도 당신들이 용서를 빌거나 할 일이 아니었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용서해 주신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 알았어요. 용서든 뭐든 할 테니 어서 일어나기나 하세요.”

은사마군은 당혹하고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지만 레인과 그의 형제들은 기어이 한 번 더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의 뜻을 표한 후에야 일어서기 시작했다.

흐음. 그런데 고개를 들지 못했던 내 앞에서와 달리 은사마군에게는 다들 계속 시선을 뗄 줄을 모르는군. 지네 마스터와 동격으로 노는 나보다 은사마군이 덜 어렵게 느껴져서인가…? 아니면 단지 외모 디자인(?) 차이 때문에… 음, 어찌 되었든 예외도 있긴 하군.

내가 눈치챈 점을 은사마군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녀는 유일하게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아까보다 더 멀찍이 동료들 뒤에 숨어 있는(?) BB형제를 주목하며 레인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 BB형제라고 했죠?”

은사마군의 말에 BB형제는 화들짝 놀라는 기색과 함께 더욱 몸을 움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큰 몸을 가려 줄 수 있는 형제들은 없었다.

“저 사람들, 왜 저렇게 날 두려워하는 거죠? 나보다… 강하면서.”

“그건… 말입니다.”

레인은 BB형제를 돌아보며 쓴웃음부터 지었다.

“저 친구들이 두려워하는 건 은사마군님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입니다.”

“모든 여자…라고요?”

“그렇습니다. 그건 저 BB형제들의 성장 환경 때문이었죠. 저를 비롯하여 마스터를 통해 본사에서 나온 형제들은 그래도 나았습니다. 하지만 DP상부의, 아니 이제 보니 프리메이슨의 끄나풀인 것 같지만… 어쨌든 당시에 저희들의 관리를 맡고 있던 자들에 의해 팔려나가거나 선물로 제공된 형제들은 더욱 암담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야 본래 용병으로 쓰여질… 아, 아니, BB형제는 서커스단에 있었다고 했지?

“대부분 특이한 용모를 가진 형제들로서… 부자들의 애완동물이 되거나 저 형제처럼 돈벌이 수단이 되거나… 뭐, 그런 식의 용도로 제공된 거죠. BB형제를 데려간 여자는 DP의 주요 거래처 중의 하나인 독일 기업 회장의 애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지독한 세디스트였던 것이 BB형제의 불행이었습니다.”

세디스트…? 제기…! 단순히 군기 잡는 수준이 아니었단 말이로구나.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 채찍질을 하는 정도는 처음부터 일상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BB형제의 경이로운 회복력이 더욱 그녀의 더러운 욕망을 자극했던 건지… 결국에는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형제들을 학대하고 고문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더군요. 일단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짓을… 5년이 넘게 해왔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제가 찾아가자 그런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면서, 또 이러더군요.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기특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이젠 지겨워졌으니 마음대로 데려가라’고… 말입니다.”

레인의 말을 들으며 당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BB형제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돼지 목의 진주라고 할까요…? 본래 BB형제는 저희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신체와 다양한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학대만을 받으면서 저항할 수 없는 세월 속에서는 피부를 단단하게 만드는 능력밖에 강해지지 못했던 겁니다. 그리고 머리 속에는 그 여자, 아니 여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만이 남았죠.”

레인의 얘기가 끝나자, 은사마군이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 여자… 이름은?”

은사마군은 임무를 수행할 때 외에는 비교적 순진하고 얌전한 성향을 보이는 여자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임무 외의 일로 살수 명부화 모드가 되어 있었다.

“…형제들을 위해 분노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녀는 이미 제가 처리했습니다.”

레인은 다시 BB형제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겁니다. 제가 그 여자를 사자 우리에 던져 넣는 걸 보여주고… 그녀의 나약한 비명 소리, 사자 입에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를 들려주었거든요.”

레인은 그때를 생각하며 잠깐 ‘원판을 닮은 미소’를 떠올렸지만, 곧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바뀌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직은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군요. 인생의 절반 정도를 학대받고 자라온 마음의 상처는 그 학대의 원흉이 사라졌다고 해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저의 암시에 걸려 정신의 억압이 풀리게 되면 반대로 여자에 대한 증오심이 폭발하면서 저조차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폭해지는 부작용도 있고 말입니다.”

레인이 BB형제의 암시를 풀 때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었던 것도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재로서는 저 ‘소냐’만을 유일하게 BB형제에게…”

울고 있는 BB형제의 옆에서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의 이름이 소냐인 모양이었다. 그녀에 대해서 언급하려던 레인이 문득 말끝을 흐린 것은 어느 틈에 은사마군이 직접 BB형제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은사마군이 부상당한 발목 때문에 약간 절뚝이면서도 곧바로 BB형제를 향하자, 그 사이에 있던 CR들은 일제히 좌우로 물러나 길을 트고 있었다.

“…천주. 죄송합니다. 저는 천주의 호위자로서 자격이 없는 모양입니다.”

“괜찮아. 현재 상황은 호위 해제도 무방하잖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구.”

은사마군이 나의 격려(?)를 받으며 당당하게 BB형제 앞까지 가자 그들은 더욱 두려움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제발 더 가까이 오지 말아 주세요. 얘들은 지금…”

소냐라는 소녀가 형제들의 옆에서 외치자 은사마군의 걸음이 잠깐 멈칫했다. 그녀는 소냐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사람들… 아니 이 아이들은 중국어나 한국어, 혹은 영어… 그 중 어떤 말을 쓰지?”

“아, 그건… 얘들은 오랫동안 말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서인지 지금은 자신의 입으로 어떤 말도 하지 못해요. 하지만 그 전에 마스터께 배운 말… 그러니까 말씀하신 언어들 모두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해요.”

대답해 준 소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은사마군은 다시 걸음을 떼어 BB형제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는 BB형제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난 지금 다쳐서 저 분… 천주의 걸음을 따라잡지 못해. 그러니 너희들이 날 도와서 천주의 뒤를 놓치지 않게 해주겠어?”

얼마 후.

나는 더 형제들을 모으러 가겠다는 레인과 헤어져 대교에게 돌아가기 위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당연히 그런 내 뒤로는 이제 아군, 아니 프리메이슨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내 수하 부대나 마찬가지가 된 CR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모두가 내 경공에 뒤처지지 않고 있지만, 다른 녀석들은 그렇다 치고 내 뒤로 가장 가깝게 따라붙고 있는 BB형제는 정말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군. 일반적으로 저런 거구들의 약점은 스피드이기 마련인데, 이 녀석들은 그런 약점도 없는 모양이지? 더구나… 은사마군의 부탁을 받은 BB형제 중 형, ‘빅 존’은 지금 은사마군을 어깨에 태운 채 달리고 있는 것이다.

“놀랍군요. 가장 적은 거부감을 드러내는 동료 소냐에게조차 아직 몸이 접촉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아까 빅 존 스스로 몸을 낮게 숙여 은사마군이 그 어깨에 앉는 것을 지켜보던 레인이 한 말이었다.

[흐음~ 왠지 저 괴수 형제는 물론이고 다른 자들도 모두 주인님보다 은사마군을 더 따르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어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요몽. 아니, 오히려 그걸 바라고 은사마군의 존재를 더 강조한 거였어.>

[어…? 왜요?]

<마군황은 본래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자, 저들은 저들대로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고 체계를 잡을 필요가 있어. 어설프게 합류시켰다가는 기존의 지하무림 부대들에게 왕따당할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만약 저들이 은사마군을 진심으로 따르고 다른 마군들… 특히 연구소 폭파에 참여했던 마군들에게 만이라도 같은 태도를 보인다면… 그럴 경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다들 CR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어? 내가 일일이 참견하지 않더라도 말야.>

[헤에- 역시 우리 주인님! 그런 일까지 생각하신 거예요?]

<후후~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잖냐. 나도 마군황 짬밥 늘면서 쬐금은 발전하고 있다구.>

[쬐금이 아니라 엄청인 것 같은 걸요? 솔직히 주인님은 그 동안 혼자 하는 일은 그렇다 쳐도, 최고 대빵 보스로서는 좀… 음, 무지 깐깐한 시어머니 같았다고 할까?]

<…몽몽. 얘 왜 이렇게 빨리 풀어 준 거냐?>

[주인님께서 감금 시간을 지정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감금하도록…]

[에엑~! 제가 또 뭘 어쨌다고요?]

<됐다, 몽몽. 훗~ 이번엔 요몽 말이 맞아. 표현은 좀 거시기 했지만… 사실 내가 좀 그랬지.>

나는 순순히 인정하며 웃었다. 앞으로도 혼자 모든 일을 하려 들고 사방팔방 참견하는 걸 좋아하는 버릇을 고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계속 뭔가 바뀌도록 노력은 할 것이다. 난 이제 너무나 많은 이들을 거느린 자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공공보법을 약 5성에서 6성 정도로 일정하게 펼쳤음에도 계속 잘도 따라붙는 CR들을 이끌고 대교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에 도착한 건, 출발한 후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쳇! 부상 중인 몸으로 조금 무리했다. 다행히 녀석들도 꽤 지친 기색이라 호흡조절만 티내지 않고 하면 품위(?) 유지에 지장은 없을 것 같지만… 에고고- 역시 당당한 보스 노릇도 쉬운 게 아니라니까.

나는 남몰래 호흡과 진기를 조절하며 천천히 숲길을 벗어나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마녀의 집에 동행했었던 삼합회 관련 마군들이 타고 갔던 차는 소교가 있다는 집으로부터 상당히 먼 곳에서 대기 중인지 보이지 않았고, 집 앞에서 약간 떨어진 골목의 그늘에는 대교를 태워 보냈던 차 한 대만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은사마군과 CR 일행을 적당한 곳에 대기시키고 나 먼저 그 쪽으로 향했다.

<대교.>

자룡대주 등과 함께 차 밖에 나와 있던 대교를 불렀는데, 날 돌아보는 그녀 옆에는 우리 쪽이 아닌 인물이 한 명 더 서 있었다. 그는 바로 대교의 매니저이자 보디가드인 백발남자 오삼숙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오삼숙.”

나는 다가가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그는 내 손을 힐끔 한 번 내려다보았을 뿐 마주 잡아 오지는 않았다.

쯧…! 지난번 장가계 공연 때 대교를 납치해 갔던 일 때문에 화가 나 있는 건가…? 아니면…

“나는 아직 당신을 인정할 수가 없어.”

“오삼숙.”

대교가 옆에서 부르며 팔을 잡아 왔지만 오삼숙은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가 지하무림의 3대 마군황이며 2대의 환생이라는 얘기, 그리고 대교 너 역시 천년 전에 살았던 2대 마군황의 정인이 환생한 거라는… 이런 얘기를 누가 그리 쉽게 믿을 수가 있겠니?”

하긴, 그런 얘기는 지하무림인들이나 곧바로 믿어주는 거지 다른 웬만한 사람들이야… 음, 어쨌든 사적인 자리라서 그런가? 전처럼 ‘가혜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고 반말로 아명을 부르고 있군.

“저 역시 처음에는 그랬어요, 오삼숙. 하지만… 저, 차츰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요. 아깐 천년 전의… 그 때의 제 동생들 얼굴까지 떠올렸고 말예요.”

“동생…들?”

오삼숙도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많은 얘기를 듣지는 못한 모양이군.

“예. 그리고… 과거에도 소교, 그 아이는 제 동생이었어요.”

대교의 말에 오삼숙의 안색이 흠칫 굳어지고 있었다. 환생 얘기 자체는 이미 들었음에도 새삼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그런 것과 별개로, 현재의 제가 얼마나 소교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 사실만으로도 전 소교를 만나고 싶어요. 만나서 함께 아버지께…”

“안돼!”

오삼숙은 거의 반사적으로 대교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그는 의아해하는 대교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고뇌하는 것 같은 오삼숙에게 물었다.

“당신도 알고 있군요. 과거에 여옥과 대교의 부모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입니다. …아니, 당신 역시 뭔가 함께 관련이 있는 거 아닙니까?”

정곡을 찌른 건가…? 오삼숙의 표정 변화가 심상치 않은 걸?

“오늘 밤 여옥과 그녀의 살막파를 재기불능으로 괴멸시켰다고 하던데… 그건 우선 감사해야겠군. 대교를 위해서라도 그녀와는 언제고 내가 끝을 볼 생각이었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지.”

오삼숙은 그답지 않게 하아- 긴 한숨을 토해내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대교는 어렸을 때부터 한 번 결심하고 입 밖에 낸 일은 기어이 하고 말았지. 또한 내게는 지하무림의 마군황을 막을 힘도 없고… 그러니 부탁하겠네. 두 사람… 부디 이쯤에서 그만둬 주게. 더 이상 과거를 파고들게 되면… 그렇게 되면 상처받는 건 대교와 소교일 뿐이야.”

“그럴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모르죠.”

거의 동시에 입을 열어 같은 말을 한 나와 대교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교는 눈빛으로 ‘자신이 말하게 해달라’고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죄송해요, 오삼숙. 전 지금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오면서… 그러면서도 오삼숙의 말처럼, 알게 되면 불행해 질까 봐… 더 아프게 될까봐… 그래서 외면하고 살아왔어요. 하지만 오늘에야 전 깨달았어요. 과거를 두려워하며 도망만 치고 살아서는 결코 진정으로 원하는 미래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러니… 오삼숙, 저와 함께 가주세요.”

오삼숙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더니 얼마간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삼숙…!”

“…형님께 안부나 전해다오.”

결국 그렇게 말한 오삼숙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삼숙!”

대교는 다시 오삼숙을 불렀지만 그는 그대로 조용히 멀어지고 있었다.

“오삼숙은… 아버지께 절 세계적인 인물로 키우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왔다고 해요. 물론 오늘은 그 약속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아니겠지만요.”

대교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오삼숙에게서 좀처럼 안타까워하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삼숙이 떠난 후, 나는 먼저 모두에게 새로운 지원 병력인 CR들을 불러 소개시켜 주었다.

으음… 천음마군은 예상대로 신참들의 군기부터 잡으려고 위압적인 분위기로 나가다가 신참들의 수호천사 은사마군의 일침에 곧바로 찌그러지는 군. 그에 비해 자룡대주는… 과연 관리감독의 대가답다고 할까…?

즉시 CR들의 성별, 나이별(이건 의미가 없겠지만) 인원구성을 체크하여 자신의 PDA에 기록하더니 지금은 시간이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일단 PDA에 내장된 카메라로 모두의 면면을 찍어 두는 것 같군.

< …자룡대주. 그 친구들 파악은 나중에 하도록 해. 그들에 대해서 알아야 할 특이 사항도 있으니 말야. >

< 예, 천주. 그럼 이제 소교 아가씨께 가시겠습니까? >

< 물론. >

소교가 있는 집은 일견 평범한 가정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소교 역시 이 집을 평범한 학교친구 집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친구는 살막파 중간 보스의 양녀로서 반쯤은 조직원이라고 할 만큼 한 칼 하는 소녀라고 한다. 당연히 부모와 삼촌, 오빠 모두가 살막파의 정예 멤버로서 소교 보호를 맡고 있는 것이다.

< 실내는… 정리되었겠지? >

< 예, 천주. 소교 아가씨가 2층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이 모두 제압하였습니다. 다만 아가씨의 학교친구를 가장한 소녀만은 계속 아가씨와 함께 있어서 아직… >

나는 자룡대주의 보고를 받으며 대교와 함께 실내로 들어섰다. 우리가 2층 계단 앞에서 잠깐 멈춘 것은 낯익은 소녀의 맑은 웃음소리 때문에였다.

“그 녀석 정말 귀엽다, 얘!”

때마침 소교의 학교친구 소녀가 즐거운 목소리와 함께 2층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그 녀석’이라고 한 건 보나 마나 금동이 일 것이다. 우리가 마녀를 처리하는 동안 혹시라도 소교가 알게 될까 봐 소교의 주의를 돌릴 겸해서 미리 보내 두었던 것이다. 어쨌든, 방안의 소교에게 금동이 간식을 챙겨오겠다고 말하며 문을 닫은 소녀는 그 직후 계단 아래의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

누구냐는 말을 맺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 위에서 불쑥 내려온 손에 의해 입이 막히고 있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몇 개(?) 더 내려온 손들은 그녀의 완맥을 잡아 제압했고, 이어서 그녀의 몸 전체가 스윽 위쪽으로 끌어 올려지더니 천장을 통해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한 칼 하는 소녀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문가의 천장에 매달려 기다리던 은사도객들의 일사불란한 기습 및 포획 작전에는 저항의 몸짓 한 번 못해 본 것이다.

“조금… 무섭네요.”

“나도 그래. 무슨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다야.”

나의 맞장구에 대교도 표정을 풀고 살짝 웃었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는 사이 대교의 표정은 다시 약간의 긴장과 벅찬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소교가 있는 방의 문 앞에 이르자 잠시 숨을 고른 후에야 천천히 노크를 했다.

“소교…! 나야, 대교 언니!”

금동이 때문에 웃고 있던 소교의 기척이 일순 멈추고 있었다. 대교는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잠시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문 앞에서 더 들어가지 않았다.

“언니…? 정말 언니야? 꾸, 꿈… 아니지?”

대교에게 가려져 내게는 소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소교가 어떤 기분으로 어떤 표정이 되어 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래… 나야. 진짜… 니 언니 대교야.”

대교의 대답 소리에 벌써부터 물기가 어려있었다. 소교는 대교가 어떻게 이런 장소에 갑자기 나타났는지를 물을 정신도 없는 모양이었고, 대교 역시 앞으로 소교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줘야 하는지도 잊은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며 손을 맞잡고 있는 대교와 소교를 보며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 몽몽. 이번엔 안의 상황을 중계하지마. >

나는 그렇게 지시하며 계단에 앉았다.

< …몽몽. 소령이와 미령이… 그 녀석들 행방을 알아내는 건 너도 무리겠지? >

[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또한 GM에 일을 의뢰하며 두 분을 지목해도 ‘선행 임무 수행 중’이라는 이유로 거부되고 있습니다. ]

쯧, 말 나온 김에 그 두 녀석까지 재회시키고 싶었는데… 녀석들은 하필 이때 무슨 임무를 맡은 거야? 챈과 함께 나의 그랜드 캐년 전투를 지켜보고 오자마자 또 무슨 임무를… 아, 잠깐. 혹시…

< 날 관찰하는, 바로 그 일이 아직 끝나기 않은 거 아냐? 그러면 계속 우리 주위에 있었던 거지. >

[ 지금까지 GM이 보인 은밀한 추적 및 감시능력을 감안하면 높은 가능성의 추정입니다. ]

으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녀석들에게 연락을 취하지…? 내 주위 어딘가에 있는 거라면… 그냥 단순무식하게… 모든 내력을 써서 사방으로 전음을 날려 버릴까? 아니면…

[ …주인님. 약 32초 전부터 집 바깥에서 수상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

< 뭐…? 살막파의 잔당이라도 나타난 거야? >

[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타난 인물은 한 명, 그리고… ]

몽몽이 더 상황 설명을 해 주기도 전에 바깥의 소란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귀를 기울여 보니, 낯선 음성의 젊은 남자가 어사조 멤버들과 싸움… 아니 아직은 말로 티격태격하는 정도 수준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극적으로 싸움을 거는 것도 아니면서, 날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모양인데… 어쨌든 일단 나가봐야겠군.

<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천주. 곧 제압하도록 하겠습니다. >

밖으로 나가자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자룡대주가 그렇게 말했다.

< 아니, 안에서 듣자니까 싸우러 온 자 같지는 않던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천음마군! 당신도 멈춰! >

내가 나오는 사이 불청객과 잠깐 손속을 교환했던 모양인 천음마군이 재차 공격해 나가려던 태세를 거두고 있었다.

[ 천음마군의 공격을 상대는 여유있게 회피했고, 현재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

천음마군은 DP의 ‘론’중령에게 당한 부상 때문에 본래의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래도 그의 공격을 ‘여유있게’ 피했다면 상당한 고수라는 의미였다. 나는 몽몽의 보고대로 천음마군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나무 위에 앉아있는 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낯선… 처음 보는 인물인 건 분명한 것 같군. 근데 저 자… 행색이 뭐 저래? 천년 전이라면 몰라도, 요즘에도 저런 차림새로 다니는 사람이 있나?

다가가고 있는 나를 마주 응시하고 있는 낯선 얼굴의 청년은 홍콩판 청학동이라도 있어서 그 곳의 주민이 아닌가 싶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곳에서도 주민이라기 보다는 사냥꾼이나 산적 같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언제 감았는지 알 수도 없게 떡진 산발 머리…는 그렇다 치자. 고대 중국인들의 평상복에 짐승의 털가죽을 직접 벗겨 만든 모양인 외투(?), 역시 가죽으로 만들어 상체에 십자형으로 감겨있는 띠에 촘촘하게 꽂혀 있는 표창…! 양쪽 허리춤에는 중간 크기의 투박한 박도(朴刀)… 그리고 무엇보다 저 야성적인 눈빛이 이 시대 사람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이거, 이거… 설마 미래 여자 싸가지 진이 또 천년 전으로 갔다와서 애먼 인물 하나 흘리고 간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나로서도 당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튀며 사고를 치고 다니는 여자이니…

“…날 만나러 온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내려오지 그래?”

일단 부근에서 멈추고 말을 건네 보았지만, 놈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도 상당히 지저분해서 몰라 봤었는데 가만 보니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런 어린 녀석이 조금 더 말없이 나를 살펴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진유준?”

“그래. 내 얼굴도 모르고 만나러 온 건가?”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진유준?”

뭐야, 이 녀석.

“그래. 그렇다고 했잖아.”

“그럴…리가, 내가 아는 진유준은 지하무림을 지배하는 자…인데?”

“좀 전에 싸운 남자가 바로 지하무림 일백마군 중의 한 명이야.”

“어… 그렇다고 해도 난 그를 모르고… 그러니까 그건 증거가 될 수 없고… 뭔가 다른 증거를 보여 줘.”

웬지… 조금 짜증나려고 한다.

“…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건지 몰라도, 여기까지 날 찾아 온 녀석이 지하무림이나 나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는 거냐?”

“없어.”

이 쒸~ 이 자식 진짜 뭐야?

“어… 물론 지하무림은 알지만 만나 본 적은 없어서… 그게 그러니까 난 여옥인지 뭔지 하는 여자의 집을 지하무림이 습격했다고 해서 거기서부터 추적해 온 것 뿐이야. 근데~ 이상하네? 어디서 잘못된 거지? 아니, 아니… 다시 생각해 보자. 추적 중간에 실수했을 가능성이… 어… 음, 없는데… 이상하네? 그럼 맞나?”

…입 다물고 있을 때는 야성미 넘치는 원시 청년 내지는 소년이었는데 막상 입을 여니까 상당히 거슬리는 스타일로 변해 버렸다.

“…야. 계속 혼자 중얼대고 있으면 나 그냥 간다?”

“어, 아니, 아냐! 아냐! 진유준 맞는 거 같아. 내 추적용 식귀가 실수 할 리가 없으니까!”

뭐? 식…귀? 마신일이 부적으로 만들었던 괴물들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은데?

“너… 주술사 같은 거였냐?”

“응. 비슷한 거지. 하지만 당신이 그렇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봐서 헷갈리는 중이야.”

“나? 나야 당연히… 아, 그렇군. 넌 이게 보이는 모양이구나.”

난 무심결에 내 어깨 위로 시선을 던져 보았지만, 내 눈에는 뭔가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몽몽의 스캔에는 확실하게 나타나는… 분명히 존재하며 내 목에 목도리처럼 감겨있는 미지의 에너지체…! 그건 라후의 혈족들이 남긴 그들 중 하나의 꼬리였다.

“아, 그렇구나! 당신이 부른 게 아니라, 누군지 다른 고위 술사가 불러서 당신에게 씌워 버린 거야!”

빨리도 깨닫는다. 그 계통 전문가라면 그걸 먼저 알아봐야 하는 거 아냐?

“하하핫! 아무리 당신이 무공의 고수라도 그런 고위 영체를 떼어 낼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 난 그런 게 전문이니까 말야!”

절대 믿음이 안가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봐! 이건 날 해치려고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 처음엔 그런 줄 알지! 하지만 마물들은 결국 인간을 해친다구!”

갑자기 기세가 오른 주술사 소년은 두 손을 모아 손가락으로 기묘한 모양을 만들더니, 뭐라고 빠르고 심상찮은 느낌의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야, 야! 사람 말을 좀 들어. 이건 니가 생각하는 그런 게…”

혹시, 맞을지도 모르려나…? 난 사실 라후의 혈족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음, 닥터 제이는 분명 마신일이 허튼 짓을 할 자가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 주인님. 저 인간의 손으로 기존 데이터로는 분류가 어려운 에너지, 마신일이란 인간이 이용하던 에너지와 유사한 패턴의 에너지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

쳇. 저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을 어떻게 멈추지? 아무래도 적은 아닌 것 같은데 너무 거칠게 대응하는 것도 좀 그렇고… 어…? 뭔가… 내 주위로도 이상한 느낌이 커져 가는 것 같은 걸?

[ 주인님. 라후의 혈족이 남긴 에너지 체도 반응하여 방어 형태의 배리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

흐음. 꼬리에 불과한 데도 자체 방어시스템 같은 게 있는 건가?

“…파(破)!”

주술사 소년의 입에서 외마디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며 굉장한 기세의 섬광이 발산되고 있었다.

< 천주! >

지켜보던 수하들이 당황하여 날 부른 건, 내가 가만히 서서 나를 향해 날아드는 섬광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주술사 소년이 퍼부은 섬광은 나의 바로 앞에서 배리어에 걸려 사방으로 흩어졌을 뿐이었다.

“뭐, 뭐야? 나의 파마(破魔) 주술이 통하지 않아?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있건 없건, 그만 하고 대화 좀 해 보자. 우선 넌 대체 누구…”

“걱정하지마! 이건 맛뵈기였을 뿐, 우리 문파의 주술은 깊고 심오해. 그런 마물 찌꺼기쯤은 단숨에 날려 주지!”

정체불명의 말귀가 어두운 제멋대로 주술사 소년은 품에 손을 넣어 부적 같은 걸 한 웅큼 꺼내더니 허공에 뿌렸다. 부적들은 허공에 잠깐 나풀대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스슥 형체가 사라지며 검은 연기 같은 것으로 변해갔다.

[ 부정형이나, 강력한 물리력이 있는 에너지 체입니다. ]

연기같이 보이지만 실체가 확실한 에너지 체, 다시 말해 그건…

“명부금쇄진(冥府禁鎖陳)!”

정체불명의 말귀가 어둡고 제멋대로 면서 나름대로 힘은 있는 듯한 주술사 소년 녀석이 그렇게 외치자, 검은 연기들이 일제히 내 주위를 포위하고 정신없이 빠르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명부의 상급 귀(鬼)들을 이용한 포박진이야. 웬만한 마계의 마물들도 빠져나갈 수 없지. 그러니 이제 차분하게 주술력을 모아 없애주겠어!”

역시 이 많은 시커먼 연기(?)들이 그런 특별한 목적의 영체… 귀신이라는 얘기였군.

“어쨌건, 지금 니 기세로 보면… 나까지 함께 날려버릴 것 같군.”

“어…? 어랏? 그러고 보니 이건 너무 강력해서 정말 그럴지도…”

놈은 꺼내들고 사용하려던 부적을 도로 집어넣더니 다시 다른 부적을 여러 장 꺼내서 들여다보며 뭘 쓸까 망설이기 시작했다. 저 정체불명의 말귀가 어둡고 제멋대로인 데다 절대 믿음이 안 가는 초짜 삘이 나는…

[ 저 사람 바보 아니에요? ]

< …그래. 그냥 그런 거 같다, 요몽. >

나는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쉰 다음에 다시 외쳤다.

“야! 너 대체 누구냐니까?”

“아… 내가 아직 말 안 했던가?”

“그래, 임마!”

“으음. 이 몸은 말이야. 수많은 귀도(鬼道)의 도사 (道士)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대(大) 수라문(修羅門)의 12대 장문인이 시지!”

“…몰라, 그딴 문파.”

“에~? 몰라? 그럴 리가? 당신 정말 우리 문파의 선조인 수라 혈불(修羅血佛)님을 몰라?”

“에이 쒸~ 니가 언제 말해 주기나 했냐?”

이 연기 귀신들보다도 정신없는 녀석 같으니라구. 진작에 그 사람의 후예라고… 후예… 에…? 누구의 후예?

“뭐야! 너 정말 수라혈불, 그 사람의 후예인 거야?”

“물론이지!”

“그… 뭐냐, 정말 그렇다면 나름대로 반갑기는 한데…”

나참…! 수라혈불은 임꺽정 스타일의 외모와 달리 상당히 침착한 성품이었는데 그 후예라는 놈은 완전히 정반대로군.

“음. 근데 그런 네가 무슨 일로 날 찾아 온 거지?”

“정확히 말하면 당신때문이 아니라 대교님…! 그 분에 관한 일 때문이야.”

저 자식, 나한테는 반말 찍찍하면서 대교에게는 존칭을 붙이는 군.

“알겠어. 그럼 일단 이 정신없는 녀석들 먼저 치워. 다시 말하는데, 이 라후의 혈족이 남긴 꼬리는 날 해치지 않아. 이 건 나와 라후의 혈족이 나중에 재대결을 할 때를 위한 증표 일 뿐이니까 말야.”

“라, 라후의 혈족? 맙소사! 그런 고위 마족의 꼬리였다고? 그리고 재대결? 당신 정말 라후의 혈족과 싸우고도 죽지 않은 거야?”

“그래. 전부 얘기해 줄 테니, 우선 이 연기 귀신들부터 치우라니까, 좀.”

“어… 그게, 명부금쇄진은 한 번 발동하면 적의 소멸 전에는 거두어들이기가 어려운데… 미안하지만 조금 참아 줘. 강제해제 주술을 준비하려면 15분 정도 걸릴 거야.”

“에효. 알겠다, 알겠어. 기다려 주마. 어쨌든… 내가 천년 전에 사라진 이후로 당시의 대교는 니네 선조 수라혈불과 좀 친해졌던 모양이구나?”

“그 정도가 아니야. 대교님은 우리 수라문을 믿고 모든 것을 의지해 주셨어. 대교님은 우리 수라문의 여신(女神)…! 그 분을 수호하는 건 우리 수라문의 후예들에게 대대로 주어진 최고의 영광이지.”

뭐…야, 이 얘긴. 대교를 비정상적으로 숭배하는 듯한… 그런 건 일단 그렇다 치고, 대대로…라고? 그렇다면 대교는 천년 전에서 현재로 한 번에 환생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저 녀석이 12대라면 적어도 그 정도의 횟수로 환생을 거듭해 왔고… 그러면서도 정확히 날 찾아 온 건가…?

“하지만… 난 운이 좋지 못한 것 같아. 어렸을 때 한번 대교님을 뵈었을 뿐, 줄 곧 산 속에서 수련만 강요받다가 이제야 하산했으니…”

어떻게 수라혈불의 후예들이 대교의 수호를 맡게 된 건지, 구체적인 사연은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모르는 세월 동안 대교를 지켜준 너무나 고마운 자들이 있었다는 건가…? 난 대체 그들에게, 저 녀석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게다가 기껏 하산해보니 대교님은 가짜인 것 같고…”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지?”

“당신이 지금 대교님이라고 믿고 있는 여자가 TV에 나와서 노래 부르는 주가혜인지 하는 소녀를 말하는 거라면 틀렸어! 그 소녀가 대교님일 리가 없어!”

이 자식,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지?”

“헛소리가 아냐! 조금만 기다려. 우선 명부금쇄진을 해제하고 같이 주가혜의 정체를…”

“닥…쳐!”

더 기다려 줄 마음 같은 건 사라져 버렸고, 내 손은 이미 정글도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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