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7-2화 : DP의 공주님.(2)
“어디 누가 멍청인지 보겠……”
다카시는 말을 맺지 못하고 안색을 굳혔다. 드디어 녀석도 알아챘나 했더니만, 시선 방향을 보니 자기가 아니라 송수의 뒤에 나타난 또 다른 양복 남자를 발견했을 뿐인 것 같았다. 녀석도 긴장하며 총구의 방향 결정에 갈등하는 것 같은 순간, 그 뒤의 백인 남자가 굵직한 입술을 열어 낮은 저음을 울렸다.
“Hey~! Boy!”
다카시의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 역시 G.M의 간부급답게 상황 대처가 빨랐다.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즉각 몸을 낮추는가 싶더니 소퇴(掃腿) 기법으로 뒤쪽을 쓸어 찼고, 적어도 챈의 수준이라는 내력이 담겼을 공격은 정확히 뒤쪽 백인 남자의 무릎 관절에 적중했다.
“What?”
백인 남자의 목소리에 장난기와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마치 굳건한 건물의 기둥에 파리채 따위를 휘두른 형국…? 다카시는 소퇴가 허무하게 막힌, 아니 그저 가만히 서서 공격을 맞아주었으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은 상대에 질린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저앉아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2미터 정도의 키에 압도적인 체구로 다카시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백인 괴물(?)은 한 손의 검지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까닥까닥, 소위 ‘넌 안 돼!’라는 제스처를 했다. 다카시는 굴욕적인 표정으로 이를 악물며 총구를 치켜들었다.
“안돼!”
송수의 안타까운 외침이었다. 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려 하는 그의 어깨를 등 뒤의 두 번째 양복 남자가 잡았다. 그 순간, 팡! 탄력적인 소리와 함께 두 번째 남자의 손이 송수의 어깨에서 퉁겨졌다. 순간적인 견격(肩擊)으로 상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송수는 그대로 다카시 쪽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보다 한 발 앞서 다카시 쪽에서 쿠웅~! 묵직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뒤로 누운 상태의 다카시와 그 옆에서 한쪽 무릎만을 땅에 댄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는 백인 남자…! 나와 싸웠던 다른 G.M들도 뒤늦게 우르르 몰려들어 그 주위를 포위하고는 있었지만, 지휘관들을 잃자마자 오합지졸로 변해 버린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송수만이 절망적인 비명처럼 다카시를 소리쳐 부르며 달려갔다.
“도련님-!”
도련님? 어쨌든!
“멈춰! 송수!”
이번에 버럭 소리친 것은 나였다. 송수가 멈춰선 것은 내 고함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도 늦게나마 백인 남자가 다카시를 죽이지 않은 걸 확인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결국 어중간하게 멈춰 서서 바라보는 송수의 눈앞에서 백인 남자가 스윽- 마치 거대한 북극곰처럼 몸을 일으켰다.
다카시는 별다른 외상을 입지 않았는데도 넋이 나간 녀석처럼 눈에 초점이 흐려져 있었고, 그 얼굴 바로 옆의 땅바닥이 백인 남자의 주먹 모양 그대로 깊숙이 패여 있었다. 삽을 박아 넣기도 힘들 만큼 얼어붙은 겨울의 땅이다.
“나는 DP의 ‘론’이다. 이제 두려움이란 걸 좀 알겠는가?”
다카시에게 조롱 섞인 말을 남긴 백인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넥타이를 바로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송수의 옆을 스쳐 지나… 수십 명의 G.M들을 비웃듯 천천히 통과해 내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송수가 그 전에 수하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과연 저들 중에 저 괴물 같은 남자를 막아설 용기를 낼 자가 있었을까?
[ …주인님? DP라면 하은님 쪽의 인물입니다. ]
< 나도 알아. >
[ 그런데 왜…… ]
< 나도 몰라. >
몽몽이 의문을 표할 정도의 내 ‘전투 태세’를 백인 남자도 이미 눈치챘는지, 그는 내 앞 2미터 정도에서 걸음을 멈추고 씨익- 예의 굵은 미소를 지었다.
“철부지 애송이는 그렇다 치고, 저 콧수염 남자는 제대로 상대해 줄 생각이었는데… 그걸 알고 막은 건가, 당신?”
“…그래.”
“흐음~ 당신은 역시……”
“그만 둬, 론!”
하은이였다. 녀석이 다른 남자를 대동하고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내 오빠야.”
“아, 그렇습니까?”
백인 남자 론은 느물대는 기색으로 이제야 알았다는 듯 말했지만, 앞서의 상황을 지켜 본 녀석이 내가 누군지 모를 리가 없다. 론은 다가오는 하은이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린 채, 가스 불처럼 파랗게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새삼 날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 정말 강한 것 같더군. 그렇지만……”
“론!”
다시 하은이가 놈을 불렀고, 녀석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다시 하은이에게 몸을 돌렸다. 하은이의 팔이 춤추듯 우아하게 휘둘러지며 론의 뺨에 짝-!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이거……”
어색한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하은이를 내려다보던 론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다.
“그만 두라는 내 말, 못 들었나?”
하은이, 이 녀석… 지금 묘랑 모드다. 론의 격정이 하은이가 발산하는 냉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랄까…? 급격히 기가 죽은 론은 그 큰 상체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죄한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공주님…? 나나 G.M 같은 외부인들이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주라 칭한다고…? 하은이 이 녀석, 그리고 DP는 대체 어떤 곳이야?
“…도홍!”
“예. 말씀하십시오.”
‘도홍’이라 불린 사람은 송수의 뒤에 나타났던 남자로, 론과 달리 동양인이었다. 론보다 10센티 이상 작아서 나와 비슷한 키에 날렵한 체형인데… 양복 안의 몸은 어떤지 몰라도 얼굴에는 더욱 살집이 없어서 광대뼈가 유독 두드러졌고 그 너머의 작은 세모꼴(?) 두 눈이 독사처럼 차가운 느낌을 준다. 굳이 근접 이미지를 대자면 북한군 대테러 교관…? 음, 좀 편견인가?
“론과 함께 이만 돌아가요.”
“…아가씨야말로 이제 DP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스터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은 또 아가씨라네? 대체……
“…거짓말 마. 오빠는 이제 내가 무얼 하든 상관하지 않아.”
응? 오빠…? 이모님 자식은 하은이 한 명뿐이라고 들었는데, 이게 뭔 소리람?
“오해십니다. 마스터께서는… 음, 요즘 좀 바쁘셨을 뿐. 결코 다른 뜻은……”
“흥! 그럼 계속 바쁘라고 해. 나도 나대로 바쁜 일들이 많으니까, 당분간 만날 일도 없을 거야.”
“하지만……”
“그만해. 돌아가라고 했잖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앞으로는 더 G.M과 충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G.M은 오늘 보신 정도가 다인 단순한 조직이 아닙니다.”
“알아, 나도.”
“그럼에도 그 굳이 원숭이를 데리고 떠나신 건… 저희와 G.M 간에 이런 일이 생기도록 유도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에? 그게 그런 거야? 하은이 저 녀석!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내가 마이클, 아니 이 금동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야. 난 결코 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오빠에게 전해.”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도홍은 비로소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실례했습니다. 특히… 론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중국어로 말하며 포권으로 인사해 와서 나도 모르게 같이 답례를… 음, 이 사람도 중국인인가? 근데… 그동안 내 쪽으로는 슬쩍 한 번 쳐다보지도 않더니 새삼 왜 이렇게 찬찬히… 그리고 그윽하게(?) 바라보는 거지?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유준님!”
응? 갑자기 한국어로 말하네? 게다가 뭐 영광씩이나… 아니, 그보다 G.M이라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은 자가 왜 내게 이런 표현을 쓰는 거지? 이 사람 설마……
“…당신,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DP의 공주님과 친족이시니 그만한 예우는 당연한 일.”
아니, 아니다. 하은이와의 대화 중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던 인간이 지금 살짝 띄운 저 미소는……
“뭐지? 당신 아무래도 날 알고 있는 것 같아. 최근 미행하며 알게 된… 그런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다시 캐물었지만, 도홍은 빙긋이 한 번 웃으며 내게서 몸을 돌렸다.
“언젠가 다시 인사드릴 때는 말씀드릴 수 있을지도……”
“이봐! 당신 대체 뭐야?”
젠장! 그냥 씹고 가기 시작하네? 일단 잡아서 힘으로라도 추궁해봐…? 하지만… 저 론이란 백인 괴물만 해도 내력이 바닥을 치고 있는 지금의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다 도홍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내 본능적인 위기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지금의 두 사람에게서는 별다른 내력이 감지되지 않고 있습니다. ]
몽몽의 스캔 결과는 더욱 혼란과 불안감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내력도 없고, 내가 보기에 발걸음에서도 오랜 수련에 따른 보법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강하다.
상당한 무술 실력에 총까지 든 다카시를 간단히 제압한 론의 움직임과 파워. 그에 비해 도홍은 비록 송수의 어깨를 잡았다 놓치기는 했지만, 송수의 견격에 대응하지 못했다기보다 하은이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놔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 도홍이 후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송수가 다카시의 치명적인 위험을 목격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못한 것만 봐도, 아니 처음 이 상황에 뛰어들 때 그들의 움직임부터가……
< 몽몽… 난 내가 대단한 안목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누구나 직접 보면 느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굶주린 야생 불곰이나… 머리를 치켜 든 코브라가 위·험·하·다·라는 거 정도는 말야. >
[ 상대의 적대성 판단 여부는 주인님의 영역입니다. ]
…응? 은발 소년 버전의 몽몽이 나타나 보고하는 거야 특별한 게 아니지만… 녀석의 머리카락 아래의 표정이 평소와 다른 것 같은데?
[ 단편적이긴 했지만, 그들의 신체능력은 주인님의 행성 에너지를 이용한 최적의 움직임에 근접할 정도였습니다. 행성 에너지 없이 그러한 운동능력이 가능한 이유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근거리에 머문 시간이 짧아 모든 방식의 스캔을 할 수는 없었지만, 결과가 분석되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
몽몽이 자존심에 상처받고 특유의 학구열(?)에 불이 붙은 듯하다…라는 정도로 구체적인 표정까지 읽을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 …젠장! 송수가 이형환위를 쓸 정도의 고수 얘기를 했을 때까지는 좋았는데…… >
표면적으로는 같은 편이 도와 여동생을 무사히 구하고 해피엔딩이 된 것 같지만 그 같은 편이 너무나 수상한지라, 나는 결국 처음 이 곳으로 올 때 이상으로 기분이 나빠져 버렸다.
“하아- 미안해, 오빠. 나 때문에 공연히……”
하은이가 비로소 미안한 척(?)을 하며 슬며시 내 팔을 잡아 왔다.
“…나야 뭐, 아무렇지도 않다.”
대답을 하면서도 도홍을 향한 내 관심의 시선은 계속 되었다. 론이란 놈에 비해 위험도는 둘째치고 내게 깍듯해서(?) 아직 적대감이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도홍은 우리 곁을 떠나 G.M 일행 쪽으로 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비교적 예의바르게 이번 일을 사과하고 있었다. 문제의 금동이에 대해서는… 당분간 자기들 공주님을 봐주면 마스터와 상의하여 가급적 빨리 돌려주도록 하겠다… 정도로 말했고 송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동의했다.
“유준 오빠……”
“응?”
“저 두 명, 가버리라고 했는데… 대신 오빠가 계속 우릴 보호해 줄 거지?”
이런 상황에서 참 얄미운 말을… 무지하게 호소력 있는 분위기로 말한다. 사내라면 누구라도 껌뻑 넘어갈 정도로 애잔한 표정과 음성… 물기 먹은 시선처리까지!
“그야, 어쨌든 여동생인 관계로… 그리 할까 하는 생각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상태…라고 할 만 하기가… 음……”
“훗~! 뭐야, 그게.”
“어쨌든, 임마. 우리 이제 서로에게 해 줘야 할 말이 너무나 많은 것 같지 않냐?”
“…그래, 그게 우선이겠지.”
하은이는 내 정글도를 새삼 관심 있게 들여다보더니, 이어 그걸 들고 있는 내 팔을 살짝 매만져 보며 말을 이었다.
“놀랬어, 정말. 설마 오빠가 론이 흥분할 정도의 전투력을 가진 남자일 줄이야.”
그러면서 만족스럽게 웃는 표정에는… 내 숨겨진 모습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마침 땡잡았다’라는 뜻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이제는 차라리 1000년 전의 극악녀 하연이가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하연이는 배경이라도 단순했지만 이 녀석은 지가 무슨 양파도 아닌 것이 한 꺼풀 비밀이 벗겨질 때마다 새로운 속껍질을 자랑하는지 모르겠다. 뭐, 물론 비밀 많은 거야 나 역시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우리 양파남매(?)는 적어도 겉으로는 사이 좋게 서서 G.M 병력들이 힘없이 철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첫 출연(?) 임에도 불구하고 금동이의 업어치기에 목이 꺾이질 않나 온갖 추한 꼴 다 보인 다카시… 그 녀석은 떠나면서도 우리 쪽으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증오와 저주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젠 안쓰럽기까지 했지만… 저 놈도 G.M의 간부급인 이상 환상의 섬… 부활한 연옥도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