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72-1화 : 세 번째 용(龍), 뇌룡대주(雷龍隊主).(1)
8-4. 세 번째 용(龍), 뇌룡대주(雷龍隊主).(1)
솔직히… 과거의 비밀에 대한 대교의 생각이나 그것을 부추긴 나의 행동이 옳았던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 자신부터 하은이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되어 버리는데 당사자인 대교가 과연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니 아예 받아들일 수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아니야. 진유준. 정신차려…! 네가 먼저 흔들리면 어쩌자는 거냐. 꼭 닥터 제이의 말과 같은 식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경우라도 대교는 대교야. 지금의 대교가 바로 나의 대교야. 어설프게 흔들리지 말자.
나는 그렇게 새삼 마음을 다잡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까지 내려왔다. 내가 사영과 닥터 제이에 게 과거 얘기를 듣는 동안에도 대교가 돌아오지 않아 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1층에도 자룡대주와 은사 마군 뿐이고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 자룡대주. 대교는? >
< 소교 아가씨와 함께 나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
< 뭐? 함께 갔다고? 어디까지? >
< …전황마군의 보고로는 이 거리의 초입, 아까 차를 세웠던 곳의 부근에서 소교님을 위로하고 계시다 합니다. >
자룡대주는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소교 아가씨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부터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
그렇…군. 사영 앞에서만 애써 태연한 척을 했던 거야. 하아아~ 역시 아직은 너무 여리고, 어린 소녀로군.
< 자룡대주. 아까 차안에서 내가 보낸 명령을 기억하나? >
< 소교 아가씨에게 아홉 마리의 용 중 한 명을 보낸다는 명령이시라면… 현재 진행 중입니다. >
< 진행 중……? >
<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 적임자가 있으며, 어제 연락이 되었으나 홍콩에는 내일 아침에나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혹시, 실연자였나? >
< 반쯤은 그렇습니다. >
< 반쯤? >
< 그의 소재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폐관수련 중에는 누구도 접근을 할 수가 없어서 복귀가 늦어졌던 것입니다. >
호오. 상당히 현대화 된 현재의 지하무림인들 중에서는 드물게 ‘순수 무인’ 스타일이라는 얘긴가?
< 몇 번째 용이지? >
< 세 번째 뇌룡(雷龍)입니다. >
응? 삼룡이? 그 거대한 도끼……
< 파산부(破山斧)를 쓰는 자로서, 무공만으로는 구룡 중에서 최강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
으음. 확실히 삼룡대를 이끌던 ‘적호’는 상당히 강했었다. 나와의 대결에서는 내가 1합에 파산부를 깨버렸고, 그는 곧바로 패배를 시인하고 물러섰었다. 하지만 그건 적호가 ‘1대 다수’의 싸움이라는 점이 싫었는지 시큰둥하게 대결에 임해서 그랬던 거고,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 하지만 보천구룡대에는 구양대주나 승룡(乘龍)대주도 있는데… 그들보다도 강하다는 건가? >
< 그 점은 구양대주나 승룡대주도 오래 전에 인정한 바입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사업’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상황인데 비해 뇌룡대주는 무공에만 집중한 탓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그의 재능도 놀랍습니다. >
< 훗~! 궁금해지는 군. 과연 천년 전의 적호와 비교하면 어떨지 말이야. >
< 일단… 이름은 같습니다. >
< 어? 그래? >
< 예. 실은… 몇십 년 전부터 지하무림에서는 천년 전의 선조들 이름을 그대로 후계자에게 부여하는 것이 유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특히 현대 문명보다 옛 무공에 더 치중하는 성향을 가진 이들을 중심으로 성행되었던 것으로…… >
…대략 이맘때쯤 내가 돌아올 거라는 예상 때문에 그랬다 이거로군. 언제 한 번 그런 사람들만 모아서 ‘과거 추억회(?)’같은 거라도… 음. 아니지, 괜히 특정 파벌(?) 편애한다고 할라.
< …뭐, 어쨌든 좋아. 자룡대주 추천대로 세 번째, 뇌룡대주로 정하지. 도착하는 데로 소교에게 가도록 해. 나와의 인사는… 내가 곧 직접 가겠다고 하고 말야. >
< 복명. >
소교를 보호하기 위한 인사명령을 일단락 지은 나는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걸음은 출구를 벗어나기 전에 멈춰져야 했다. 나는 경비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런 나의 시선을 따라오던 자룡대주와 은사마군이 흠칫 긴장했다.
“자리에 안 계시다고 해서 그냥 가려 했더니……”
나는 경비실 앞에서 조용히 웃으며 서 있는 백발 노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허헛~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을 뿐인데… 누가 들으면 이 퇴물이 게으름까지 피운다고 하겠습니다, 그려”
“게으름은커녕… 오히려 굉장히 바쁘셨던 것 아닙니까?”
슬쩍 떠봤지만, 백발의 오씨 노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약간… 나는군요, 피 냄새가.”
직접적으로 찔렀더니 비로소 얼굴의 웃음기가 아주 조금 사라지고 있군. 사실 난 지금 나 자신의 피 냄새 때문에 남의 피 냄새까지 신경 못쓴다. 몽몽이 노인을 스캔해서 미세한 혈흔을 찾아냈을 뿐인 거다.
“…실례했습니다. ‘남의 집안일’에 너무 참견을 한 모양입니다.”
나는 짐짓 가볍게 포권을 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같은 식구’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오늘처럼 길에서 습격을 해오거나 철없는 어린애들을 동원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러자 뒤에서 노인이 말했다.
“다음에는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저희야말로 오늘 너무 큰 무례를 범했었습니다만… 이제 모두 정리했으니까요.”
내가 고개만을 돌려 다시 자신을 보자 노인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 마땅한 후사가 없다하여… 주제넘게 후계자 되는 놈들이 생기더군요. 그 중에서 회장님과 제 미거한 자식놈의 통화를 일부 엿듣고는… ‘회장의 사위감’이 온다는 사실에 위협을 느낀 자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웃기는 노릇이지 뭡니까, 상대가 어떤 인물인 지도 모르고 말이죠.”
사위감 테스트치고는 조금 과격하다 싶긴 했지만… 그게 그랬던 건가?
“그럼… 다시 아가씨와 함께 뵐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모양인 살벌무쌍 오씨 노인의 인사를 받으며 건물을 나섰다.
“두 사람, 어떻게 된 건지 알겠지?”
내가 묻자 은사마군가 먼저 대답했다.
“예, 천주. 이 곳까지 오는 동안 있었던 습격은 사영회의 회주와는 무관하게 내부의 불순한 자들에 의한 짓이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자룡대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주모자들을… 저 노인이 처리하고 온 모양이군요. 너무나 짧은 시간, 저희들이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은사마군. 같은 계열로서의 감상은?”
“…소름이 끼쳤습니다. 속하는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 우리 모두 조심하자구. 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괴물들이 숨어있는 모양이니 말이야.”
…공감하는 듯 하면서도 표정들이 어딘가 이상하군. ‘그래도 댁이 제일 괴물이잖아’라는 의미인가…? 어느 정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세상은 참으로 넓은 건지 난 벌써 몇 명의 나 못지 않은 괴물들을 만났었다. 정체 불명의 주술사 ‘마신일’은 주술이 아니더라도 장난 아니게 셀 것 같았고, 나와 맞먹는 무공의 ‘조담놈’도 있고… 아참…! 깜박하고 있었군.
< 두 사람… 잘 들어. 언젠가는 나를 굉장히 닮은 얼굴을 한 자를 만나게 될 지도 몰라. >
< 닮은 얼굴…이라 하셨습니까? >
< 그래. 얼굴이나 체형까지 나와 구분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뭐… 어렸을 때부터 정교한 전신 정형수술을 받았다고 하더군. >
< 그런 무례한 자라면 제가 반드시 제거하겠습니다. >
은사마군은 그렇게 장담했지만, 나는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그 반대야, 은사마군. 자룡대주도 잘 들어. 그 자의 중요한 특징은 나와 닮은 그 얼굴에 X자로 큰 칼자국이 나있다는 점이야. 그 자를 만나게 되면 절대로 싸우지마. >
양쪽에서 걷던 두 아가씨의 얼굴이 동시에 내게로 모여들고 있었다.
< 나와 같은 생사금마도결을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쓸 수 있는 자…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나? >
아- 하고 은사마군이 먼저 탄성소리를 냈다.
< DP 연구소의 그 자로군요! >
< 그래. 결국 내가 이겼고 얼굴에 표시(?)도 해놓기는 했지만… 끝내 죽이지는 못했어.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테니 모두에게도 전해 둬. 내가 없을 때 그자를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거나… 하여간 싸우지 말라고 말야. >
자룡대주는 그 때의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었고, 그래서 그런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군황인 나와 동급의 무위(武威)를 지닌 자가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실감 안 나는 고수 조담놈…! 그 녀석은 언제쯤 내 앞에 다시 나타나려나? 아무래도 다음에는 더 강해져 있겠지…? 아무튼- 나는 여러모로 당분간은(?) 한가하게 지낼 틈이 없는 팔자로구나. 가벼운 신세한탄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 사이 황금사자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도착해가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차량 두 대 중에서 한 대만이 남아있었고 그 옆에 대교가 서있었다. 그녀는 바로 조금 전에 떠난… 소교가 탄 차가 멀어지는 모습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니…? 너 그리고 소교 둘 다 말야.”
내가 다가가며 묻자 대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소교는 제가 말해 주기 전에 이미 눈치채고 있었어요.”
대교는 내게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자신을 찾았을 때… 그 때 이미 당신이 여옥 이모를 어떻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데요.”
그 일에 대해서 소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건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저 아이는… 언젠가 여옥 이모를 이끌어… 저희에게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으음- 이제 저도 더 힘내야겠어요. 소교에게 지지 않으려면, 저도 용감하게 저의 과거와 현실을 받아들여야겠죠?”
대교는 불연 듯 환하게 웃어 보이며 사영회 건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우리도 그냥 가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하셨어.”
“그럴 리가 없어요. 오삼숙은 분명 저와 소교…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했잖아요. 저기… 괜찮아요. 저도 저에 관한 어떤 진실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고, 대교는 그제야 깨닫고 웃음기를 거두기 시작했다.
“당신이… 들었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래, 전부.”
날 올려다보는 대교의 시선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대교의 거처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나는 대교에게 그녀의 출생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려 주었다. 대교는 줄곧 아무 말도 없이 내 전음을 듣고만 있었으며 모든 얘기가 끝난 후에도 조용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나도 얘기가 끝난 후에는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가 않아서 입을 다물고 그녀의 손을 잡은 손아귀에 조금 더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아아~ 오늘도 춥다, 추워!”
차에서 내리면서 대교는 밝은 음성으로 엄살을 부렸다. 대교의 거처는 바닷가 근처의 맨션이라서 확실히 찬바람이 심한 게 사실이긴 했다. 그 매서운 바닷바람이 대교의 긴 머리채를 춤추게 하는 가운데,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외쳤다.
“다행이지 뭐예요! 저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어머니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대교.”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걱정말아요! 소교와 달리 전 제가 알고있는 부모님이 바뀐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제 영혼은 당신이 보증해 주고 있잖아요!”
“…그래, 대교. 바뀐 것도, 바뀔 것도 없어.”
“맞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밝고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선 대교가 회색의 철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나는 얼마간 문 앞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밤새 운기조식을 했다.
문득, 희미한 빛을 느끼고 눈을 떠보니 눈앞에서 먼 동이 터 오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동안 정신없이 다니느라 느끼지 못했던… 동양의 진주라는 홍콩의 아름다움을 이제야 한 자락 보게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 …주인님. 대교님으로부터의 연락입니다. ]
대교를 동양의 진주에서 그 보다도 더 빛나는 보석…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하은이였던가……?
“여보세요?”
< 그래. 나다, 유준. >
“제가 너무 일찍 전화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 아냐. 상관없어. 막 운기조식을 끝낸 참이야. >
“후후- 역시 무도가들은 부지런하고 새벽잠이 없군요.”
여전히 밝은 음성이군. 지나치게.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아침 같이 하실 래요?”
< …그래. 그러지. >
나는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살짝 몸을 띄웠다.
“오삼숙과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 아!”
거실에서 전화기를 들고 서성이며 통화를 하던 대교는 짧게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하늘(?)로부터 거실 베란다에 내려서는 나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대교는 베란다의 유리문을 열며 나의 위아래를 살피고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돌아가셨던 거 아니었어요? 밤새 어디 계셨던 거예요?”
“병원이나 호텔에 돌아가기도 귀찮아서… 뭐. 경치 좋더군.”
나는 지붕 쪽을 턱짓하며 말했고, 무슨 일이 났는가 싶어 뛰쳐나왔던 여자 보천구룡대 대원들이 날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잠시만요. 곧 차를……”
거실 소파에 앉아 있자니 대교가 서둘러 찻물을 올려놓고 찻잎을 찾기 위해 허둥지둥 부엌을 뒤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가 돕… 읍!”
눈치 없이 방에서 나와 돕겠다고 나서던 구룡대 대원이 다른 동료에게 잡혀(?) 다시 질질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대교는 처음엔 당황해서 버벅댔지만 곧 안정을 찾는 것 같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은한 찻잎의 향기가 실내를 맴돌기 시작했다.
“집을 자주 비우다 보니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고 말았어요.”
대교는 다소 머쓱한 태도로 말하며 차를 들고 왔지만 향기만큼은 완벽했다. 대교는 내가 찻잔을 들자 나와 테이블 옆의 바닥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입술을 삐죽여 보였다.
“하지만 당신도 너무 하셨어요. 걱정하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굳이… 음. 덕분에 잠이 다 깨긴 했어요.”
“…불은 밤새 켜져 있더군.”
“후후- 조금 늦게 잤어요. 신세대들은 본래 다 야행성이라구요. 게임도 하고, 팬들과 채팅도 하고 또 음……”
게임? 채팅…? 쯧…! 차라리 정말 네가 그런 걸 할 여유가 있었다면 다행이겠지. 분명 대교 너는 지금 밤새 잠 한숨 못 잔 얼굴이지만……
“…있잖아요. 요즘 새로 생긴 저의 팬 사이트가 있는데요. 거기 운영자가 정말 특이해요. 저보다도 어린 소녀이고 어딘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을 정도로 귀여우면서도 신비스런 느낌의……”
“대교야.”
“예?”
“억지로… 무리해서 밝은 척 하지 않아도 돼. 내 앞에서는.”
“억지로, 아닌데……”
“오삼숙과 내게 할 말이란 뭐지?”
“아, 그건요. 제가 당분간 모든 연예 활동을 중지하겠다는 말이에요.”
“활동 중지?”
“예. 그리고 당신을 따라 다닐 거예요. 그래야 한시라도 빨리 당신과의 기억을 되찾죠.”
빨리 대교의 기억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은 내가 더 간절했다. 하지만 딱히 정해진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의 대교는……
“뭐예요. 설마 데리고 다니기 귀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무공도 못하고 총도 쏠 줄 모르니까 당신 일에 방해된다고……”
“대교야.”
“……”
“넌 내게 나타난 것만으로… 이 시대의 날 찾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해. 더 이상 무리해서 뭔가 하려고 들지 않아도 돼. 그러면… 내가 더 미안해져. 널 그 곳에 두고 왔던 내가… 말이야.”
“…찾아 왔다고 다 끝난 건 아니잖아요.”
대교는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의 꾸민 웃음이 아니었다.
“만들…어진 아이인 걸요.”
“대교야.”
“전 당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걸요.”
“그건 곧……”
“언제요? 언제가… 될까요?”
제기… 난 대체 언제까지 이 아이의 눈물을 봐야 하는 걸까?
“대교.”
“죄송해요. 전… 아닐지도 몰라요. 당신의… 천년 전의 그녀가… 아닌가봐요.”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이렇게… 이렇게 약할 리가… 없잖아요.”
“대교야. 넌 결코 약하지 않아.”
“아니요!”
대교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전 두려워요…! 제가 누군지 몰라서 두려워요.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가 아무 것도… 아니게 될까 봐……”
나는 무릎을 꿇고 대교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대교는 밤새, 아니 그 보다 오랜 시간 참아왔던 모든 것을 토해 내듯 오래도록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로부터 약 2시간 후.
나와 대교는 착잡한 얼굴로 앉아있는 오삼숙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서고 있었다.
“잠깐만요!”
대문을 나서자마자 대교는 내 팔을 잡아 멈추게 했다. 나는 대교가 입술을 앙 다물고 날 지긋이 노려(?) 보는 바람에 조금 쫄아서 물었다.
“왜, 왜에?”
“전… 이제 다시는 울지 않을 거예요.”
“응? 그거야 난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어쨌든, 그럴 거예요. 그러니… 아까 일은 잊어 주시기 바래요.”
으음. 마녀 여옥의 굴레에서 벗어난 반작용인 걸까…? 이젠 오히려 자신의 약한 모습에 대한 거부감이 지나치게 강해진 것 같기도 하군.
“뭐… 그래도 약한 것보다는 낫겠지.”
“예?”
“아냐. 네 말대로 하도록 노력해 볼게. 하지만 장담은 못해.”
나는 슬며시 대교의 손에서 팔을 빼내며 말을 이었다.
“넌, 울먹일 때의 얼굴도 꽤 귀엽거든. 꼭 사탕 빼앗긴 아이 같기도 하고……”
“뭐예욧?”
예상대로 달려드는 대교를 피해, 나는 무심결에 공공보법(空空步法)을 써서 재빨리 물러섰다. 그리고… 잡혔다.
“또 그렇게 놀리면… 음……”
대교는 막상 날 잡아 놓고도 자신이 딱히 날 징계(?)할 방법이 없어서 난감해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놀라고 있었다.
“대교야… 너 방금 공공보법 썼어.”
“예? 제가 무슨……”
“공공보법. 그건 본래 네 거였어. 그걸 썼다구, 방금!”
대교는 내가 알려주는 대로 다시 자신이 조금 전에 밟은 방위대로 걸음을 옮겨 보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지극히 어색하고 보법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대교의 가출(?) 첫 스타트부터 기억이 돌아오는 징조라는 생각에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 자룡대주. 대교도 나름대로 짐을 챙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것이 있을 거야. 호텔에 도착하는 대로 좀 도와주기 바래. 아, 그리고 ‘변장’ 도구도 좀 준비해 주고. >
< 복명. >
나와 대교는 어제처럼 은사마군이 모는 차에 올라 대교의 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딱히 생각나는 방법 같은 건 없어. 하지만……”
“함께 지내다 보면 조금 전처럼 뭔가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거죠?”
“그래. 음… 물론 난 이제 주가혜 양의 팬클럽으로부터 그들의 공주님을 납치한 천하의 악당으로 욕을 먹게 되겠지만 말야.”
“후후~ 전에는 무대 위에 있는 사람도 납치해 갔으면서 뭘 그래요.”
훗! 그러고 보니, 불과 얼마 전에 그런 일도 있었군. 그때는 설마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공주의 동의 하에 함께 야반도주, 아니 아침도주를 하게 될 줄은……
< 천주! 긴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
…쳇! 하여간 이 노무 세상이 남 좋은 꼴은 그냥 못 보는 군, 그래.
< 댁으로 복귀하셨던 소교 아가씨가 조금 전 납치되신 것 같다고 합니다. 범인들의 정체는 아직 불명인 듯 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