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73-2화 : 어둠이 기다리는 땅.(2)
< 에레보스……? >
“그렇다네. 전산 상에는 물론이고 일반적인 문서에조차 단 한 줄의 묘사도 용납된 적이 없다니 자네의 몽몽군도 아직 모르고 있을 거야. 실은… 하운군이나 나 역시 에레보스의 실체는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네. 물론 앞으로 뭔가 더 알아내는 데로 알려 주도록 하겠지만, 일단 각별히 조심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 …놈들이 언제쯤 제 앞에 나타날 지도 모르십니까? >
“글세… 에레보스 투입 결정이 불과 몇 시간 전에 났다는 건 알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빨리 움직일지 가늠하기는 어렵군. 미안하네.”
닥터 제이도 제대로 모를 정도로 베일에 쌓인 비밀 암살조직이라……
“그리고 한 가지 더, 자네 지금 대교양과 동행중이지? 음…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듣게. 난 아직 자네가 계속 그녀와 함께 다니는 건 이르다고 생각하네.”
< …제가 아직 미숙해서 대교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거라는 말씀입니까? >
“그보다는, 확률적으로 대교양이 자네와 따로 있을 경우가 더 안전할 거라는 얘기야. 12인의 사도는 아직도 자네를 얕보고 있거든. 무슨… 뜻인지 알겠지?”
쳇…! 나로서는 상당히 뺑이치며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그랜드 캐년에서의 전투가 프리메이슨의 보스들 눈에는 애들 장난으로 보일 뿐이었다는 건가…? 그래서 굳이 대교를 인질로 삼는다던가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거라는 거고 말이다.
“대교양이 어렸을 때 정체를 알았다면, 흥미로운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라도 이용하려 들었겠지.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의 대교양은 그들에게 별 흥미를 주지 못해. 오히려 자네의 싸움에 직접 휩쓸리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말일세.”
< 무슨 얘긴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교를 혼자 두는 것은 좀…… >
“…어제 일 때문인 모양이군. 난 대교양이 그렇게 약한 심성을 지녔다고 보지는 않네만… 음. 어쨌든 판단은 자네의 몫일세. 난 그저 충고를 해 줄 수 있을 뿐이지.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되든… 계속 건투를 비네.”
닥터 제이의 얘기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닥터 제이의 충고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잠시 운기조식에도 집중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번에 대교가 날 따라온 것은 그녀 자신이 결정한 거다. 난 나의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그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줘야할 의무가 있는 거… 아닐까?
< 천주. 속하 은사마군입니다. >
< …알아. 무슨 일이지? >
< 어제 대교님과의 조우 이후 사라졌던 주술사를 추적하던 은사도객들이 그를 발견하여 본격적인 미행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
아… 대교교 신도 덕방. 그 녀석을 잠시 잊었었다.
< 그 역시 밤사이 밀항하여 일본에 도착, 한 시간 전의 도착지는 현재 우리 일행의 목적지와 같은 도쿄의 하네다(Haneda) 공항이었다고 합니다. >
< 뭐? 그럼 설마 그 녀석도 이번 일에 관련이 있는 건가? >
<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은사도객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가 먼저 도착한 곳은 대만이었습니다. 그 이후 재차 중화항공(中華航空, china Airlines. 대만 항공사.)의 항공기를 무단으로 이용, 하네다 공항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또한 하네다 공항에서 그가 보인 행동으로 보아… 그는 단지 실수를 했을 뿐인 것 같다고 합니다. >
< 그러니까… 진짜 목적지가 어딘지는 몰라도, 비행기 잘못 타가지고 대만이며 일본이며 헤매고 있다는 얘기로군. >
< 그렇게 보는 편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
역시나 못 말리게 정신없는 녀석이로군. 물론 오랜 세월 산 속에만 있다가 내려와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 어쨌든 그래서 지금은 제대로 가고 있는 거 같대? >
< 하네다 공항에서 경비 요원들과 충돌하는 것을 은사도객 중 7호가 나서서 무마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밀항을 암중에 도왔으니 조금 전에 탔다는 본토행 항공기는 옳게 탄 것이라 생각됩니다. >
쯧, 미행 대상자의 행동에 일관성이라곤 없으니 은사도객들도 고생이 많겠군.
< …뭐, 일단 좋아. 그 녀석 계속 미행하면서 뭔가 새로운 걸 알게 되면 무조건 보고하라고 해둬. >
< 복명! >
어쨌든 일단 꼬리를 잡았다니 다행이다. 먼저 소교와 금동이 일을 해결하고, 그 다음에는… 물론 에레보스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어찌 나오는지에 따라 일정을 조절해야겠지만, 가급적 빨리 덕방 녀석을 먼저 찾아가야겠어. 아무래도 그녀석이 대교에 관한 뭔가 중요한 걸 알고 있는 듯 하니……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일의 순서가 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왠지 무조건적으로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랜드 캐년 전투이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간다 싶었던 상황이 다시 꼬이기 시작한다는 느낌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뭐… 일단 부딪쳐서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어떻게든 풀리겠지…? …그래, 난 앞으로도 계속 더럽게 거대한 조직이 수십 년 동안 준비해 온 것들을 깨나가야 한다. 이번처럼 일이 겹쳤다고 해서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되지. 암.
나는 자꾸 껄적지근해지는 감정을 다스리고자, 본격적으로 운기조식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기 전에 확인한 대교와 소령이 미령이의 하나 같은 미소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일본……!
드디어 우리와는 흔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표현이 쓰여지곤 하는 섬나라에 내가 탄 비행기가 착륙했다. 난 최근 두 번 오키나와를 거쳐 홍콩이며 미국으로 가기는 했었지만, 그 때는 자룡대주의 항공사 건물과 사원들만을 접해서 그런지 일본 땅을 밟았다는 기분이 들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제대로 일본에 온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뭐, 지금은 오래된 거부감이든 암 생각없는 여행기분이든 특정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군.
< 천주, 이 쪽으로…… >
특별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일행은 내가 전에 그랬듯, 자룡대주의 안내를 받아 항공사 직원들의 출입구로 향할 수 있었다.
[ 주인님. 발신자 및 발신지 불명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
줄여서 정체불명의 전화라는 얘기군. 혹시 그 놈이……
우선적으로 떠오른 인물은 다카시였다. 그러나 몽드폰을 통해 들려온 건 전혀 낯선 여자의 음성이었다.
“진유준씨, 맞습니까?”
“…그런데, 누구신지……”
“전화로 첫인사를 드리는 무례를 용서하시길……”
뭐야… 이 여자. 어느 정도 미성에 속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웬지 내가 싫어하는 톤이 섞인 듯한 음성인 걸?
“저와 저의 형제들은 이단자를 심판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주님 앞에 맹세한 자들입니다.”
아, 맞다. 프리메이슨 중에서 요크파 같은 경우, 겉으로는 기독교를 표방한다고 했었지? 그럼 에레보스…? 벌써 그자들이 온 건가? 근데… 여자?
“이단자들은 때로 자신의 죄악조차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나, 불교 신자요. 전화 잘 못 거셨소.”
쯧…! 좀 더 대화를 통해 적의 정체를 가늠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특정 종교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종교적으로 주절주절 길어지는 말을 듣는 건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무서운 암살단인지는 몰라도… 이런 접근 방식 자체가 벌써 껄쩍지근하군 그래. 다소 난감한 기분을 느끼는 사이 자룡대주가 출입구의 문을 열어 주고 있었다. 그 문 너머로 길게 뻗은 복도의 끝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고, 그는 단정한 검은 신부 복장에 두꺼운 성경을 들고 있었다.
언뜻 30대 정도로 젊어 보이는 신부가 핸드폰을 귀에 대고 통화를 하고 있는 건 그리 특별하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쓴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끊더니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불교 신자라고요…? 제가 알기로는 불교에서도 당신과 같은 마귀의 하수인에게는 자비롭지 않을 텐데요?”
조금 전 통화한 여자가 즉시 저 신부에게 꼰지른 모양이군.
어쨌든 처음 보는 신부가 대뜸 날 마귀 운운하며 씹어대자 당연히 내 뒤에 있는 수하들이 발끈, 살기를 뿜기 시작했다.
“저기, 대체 뉘신데 초면에 그렇게 싸가지 없는 말씀을 하시나요?”
내가 웃으며 점잖게(?) 묻자 정체불명의 신부도 조용히 신자 특유의 사랑에 충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르네 수녀님’께서도 말씀하셨겠지만, 저희는 당신과 같은 이단자… 마계의 더러운 귀족과 결탁한 자를 주님의 땅에서 숙청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아무래도 앞으로는 내 목에 감겨있는 라혈꼬(라후의 혈족 꼬리)를 공격의 빌미로 삼을 작정인 모양이군. 내가 자신들의 정체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걸 알고 있음을 드러내기 전에는 저들도 먼저 정체를 밝히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물론, 당신이 지금이라도 그 추악한 마계 짐승과의 결탁을 배제한다면 저희 교단에서도 자비를……”
“교회나 성당이 아니라 어디 동물보호협회에서 나오셨소? 남이사 늑대 목도리를 하고 다니든, 개고기 라면을 먹고 십자가로 이빨을 쑤시든, 그쪽에서 참견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오.”
으음. 난 사실 개고기 냄새도 싫어하고 십자가를 어떻게 이쑤시개로 삼겠냐 마는… 암튼, 도발이 약간 효과가 있는 것 같군. 신부의 얼굴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지만 슬슬 살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걸 보니 말이다.
“과연 무도한 마귀의 하수인다운……”
신부의 얼굴이 일순 굳어진 것은 내가 다짜고짜, 별다른 사전동작도 없이 정글도를 휘둘러 검기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부의 굳어진 얼굴은 그만큼 빠르게 다시 본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신부의 양옆에서 튀어나온 두 명의 또 다른 신부가 내 검기를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퍼억-!
내 검기가 그대로 박혀드는 소리…! 선빵 날린 보람을… 제기, 느낄 수 없겠군. 새로 등장한 신부들은 아무런 방어자세도 없이 그냥 몸으로 나의 검기를 받았다. 당연히 둘 다 가슴팍의 옷과 함께 육체까지 깊숙하게 잘려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 급속도로 상처의 지혈 및 조직 세포의 복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확인 된 CR들의 평균 회복력을 상회합니다. ]
그러면서도 노화현상은 없는 것 같은 데…? 쳇…! 그동안 쌓인 노하우로 드디어 부작용 없는 불사인간을 완성한 건가?
“복음을 전하는 상대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무도하고 오만한 공격을 해오다니… 그래도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죄 사함을 위해 눈물 흘리실 겁니다만……”
신부님께서는 사랑과 믿음이 충만한 말씀을 하시고, 나는 혈압이 충만하고 있었다. 내 뒤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당장 뛰쳐나갈 기세였지만, 나는 전음으로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에게 계속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떻습니까. 그 오만한 마계 군황의 이름을 버리고 회개할 마음은…..”
신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후웅-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일며 내 옆으로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검은 양복에 검은 바바리 코트를 걸친 뇌룡대주가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걸어 나가자 상대편의 검은 사제복 신부들 두 명도 주저 없이 이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윽-
신부들의 사제복 소매에서 단도 같은 흉기가 뽑혀 나왔다. 뇌룡대주의 넓은 코트자락이 더욱 펄럭이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뭔가가 반짝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카라라랑~
기묘한 금속음과 함께 뇌룡대주의 양손에 짧은 봉 같은 것이 들려져 있었다. 단봉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다단 봉… 8… 아니 9단 봉…? 저런 걸 코트 안의 허리에 감고 다녔었나?
< 전대 뇌룡대주의 독문병기 파산부를 다시 보지 못하는 건 좀 섭섭하지만… 저 다단 봉도 괜찮은 것 같군. 휴대성도 좋은 것 같고 말야. >
< 그렇지 않습니다, 천주. >
자룡대주였다. 돌아보니, 그녀는 뇌룡대주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 저 무기가 바로 당대 뇌룡대주의 파산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