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74-2화 : 악마의 바다.(2)
< 훗~! 나야 누가 막아도 무조건 갈 생각이지만 자네가 협조를…… >
아, 잠깐. 그게 아니로구나.
“아니, 아니… 자네는 날 막지 못해. 내게도 다카시란 놈의 위치를 알아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고 말야.”
나는 챈의 말과 다소 어긋나는 얘기를 일부러 보통 음성으로 말했다. 챈은 내가 그의 책임을 덜어주기 위해 이런다는 것을 알아채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 배려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
“그렇겠지요. 그래도 너무 서둘러서 함부로 행동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께서 우리와 대치되는 행동을 할 경우, 다카시에게 유리한 결과만을 낳게 될 테니 말입니다.”
“글쎄… 난 성격이 그렇게 느긋한 편이 못되어서 말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짐짓 챈을 외면했다.
< 아마… 정말 서두르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다카시는 지금 한창 골든 차일드와 소교 아가씨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 중인 것 같으니 말입니다. >
< 그건 또 무슨…… >
< 골든 차일드는 저희 GM의 상징이자 다크 스카이 마스터… 즉, 암천주의 진정한 계승자를 가리키는 열쇠입니다. 더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그 때문에 다카시의 인내가 바닥나기 전까지는 골든 차일드와 소교 아가씨 모두 안전할 것입니다. >
“…어쨌든, 저희들의 일에 방해는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쪽이야말로 날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나는 그렇게 대꾸하며 챈으로부터 몸을 돌려 대교와 수하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다카시가 짱 박힌 섬의 위치를 알려주는 챈의 전음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뭐… 사실, 정보 전문가인 GM들을 상대로 이런 식의 어설픈 연기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한 편이 되어서 작전회의를 해 버리는 건 또 곤란하지. 특히 이 친구… 챈의 수하이기는 해도 나중에 상부에 나와 챈의 대화를 보고할 의무가 있을 인물 앞에서는 말이야.
이곳까지 챈이 탄 차를 몰고 왔던 GM의 운전기사가 차 옆에 서서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쳐갔다. 한동안 우리 집에서 자취하다가 택시 기사로 변장하여 날 태워 준 적도 있었던 ‘인표’라는 청년 GM. 그는 그래도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진유준님과 챈님의 대화 및 전체적인 상황 흐름도 제가 알아서 좋게, 좋게 편집해서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라는 뜻이라고… 음. 저 친구의 호의적인 태도를 그렇게 내 입맛대로 해석해도 되려나……?
“…자룡대주. 일본 내 지하무림인들도 부근에 대기 중이라고 했지?”
“예, 천주.”
“집합시켜. GM와의 협조는 없으니, 우리끼리 부대 편성하고 준비한다.”
“복명!”
< 대교…! 실은 챈과 협조하기로 했어. 그리고 소교는 당분간 안전할 것 같다고 그러는군. >
“아…..!.”
약간이나마 안도하는 대교를 보며 나 역시 그만큼만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바다 쪽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던 내가 흠칫한 것은, 몽몽이 문제의 섬이 위치한 장소를 영상지도로 보여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지도의 중심부에는 작지만 분명하게 ‘악마의 바다’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입조차 열기 어려운 거친 바람 속에서 몽몽에게 물었다.
< 악마의 바다…! 그건 버뮤다 삼각지대를 부르는 별칭 아니냐, 몽몽? >
[ 일반적으로 말씀하신 해역을 대상으로 하는 별칭으로 인식되어 있으며, 현재 접근 중인 해역에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문 때문에 그와 같이 불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 소문…? 그냥 그 정도라는 거야? >
[ 그렇습니다. 저희들의 조사로는,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버뮤다 삼각지대의 수수께끼부터가 대부분 과장되고 왜곡된 정보의 조합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접근 중인 해역에 대해 알려진 사항 또한 대부분 부정확한 비공식 정보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버뮤다 삼각지대가 개뻥이었다고…? 그건 웬지 좀 섭하군. 어린 시절에 꽤 흥미롭게 보았던 얘기였는데… 으음. 암튼, 당장 내게 중요한 건……
< …이 해역에 있는 섬에 짱 박혀있는 적들이(다카시 + CIA가 관여된 미군) 관여되었을 가능성은? 그러니까… 놈들이 비밀기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 실수로 들어온 배들을 침몰시켜 버리거나 선원들만 납치해서 처리했다거나 하는… 그런 경우도 있지 않을까? >
[ 현재까지 확인된 정보만으로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CIA와 일본의 ‘내각정보조사실’ 시스템에서 일부 의심되는 데이터가 발견되었으며, 현재 확인 중입니다. ]
일본의 내각정보조사실…? 그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섬과 주변의 해역은 미국, 중국, 일본이 합작으로 만든 인위적 악마의 바다라는 얘긴가…? 우리 나라만 빼고 이 것들이 감히… 음. 이딴 일에는 빠지는 것이 더 나은 거…려나?
[ 주인님. 약 6분 22초 후에 제 1포인트, 1차 목적지점에 도착하게 됩니다. ]
1차 목적지점이란, 예의 악마의 바닷가 시작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을 말한다.
< …좋아. 필수 장비 점검 좀 부탁해. >
[ 알겠습니다. ]
현재, 내가 탄 헬기는 바다의 수면 위를 아슬아슬할 정도로 낮게 날아가고 있는 중이다. 거세게 부딪쳐 오는 바다바람에는 파도의 짭짤한 파편이 섞여 있기도 했지만, 난 개의치 않고 열려진 헬기의 문가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헬기가 이렇게 낮은 저공비행을 하는 이유는 당연히 적의 레이더를 피하기 위함…! 여차하면 파도에 휩쓸릴 수도 있는 위험한 비행이지만… 저 남자에게 운전대를 맡긴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 거대한 사막과 협곡, 그리고 이번에는 바다 위라…! 뭐, 어디서든 당신의 솜씨는 변함이 없는 것 같군, 그래. >
내가 웃으며 전음을 건네자 헬기를 몰고 있는 조종사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핫~ 저와 저의 소대원들도 대부분 해군 출신입니다, 보스! 이런 ‘수상스키’는 기본이죠!”
수상스키…? 이렇게 수면 가까이 나는 초저공 비행을 용병들은 그렇게 부르는 건가…? 으음. 그거야 어쨌든… 여전히 헬기의 소음마저 무시할 정도로 크고 유쾌하군, 저 남자의 목소리는.
< 터너 대장…! 아니, 이젠 달리 불러야 하나? 이틀 전부터 ‘HT항공 용역사’에서 우리 보천구룡대의 자룡대로 소속이 바뀌었다니 말이야. >
나도 이 남자와 부하들이 탐나기는 했지만, 함께 전투를 치렀던 페트라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랜드 캐년 전투가 끝난 직후부터 끈질기게 스카웃을 제의했다고 한다.
“아아~ 그건 오해입니다, 보스! 저와 제 부하들은 여전히 ‘블랙 스마이커 소대’입니다! 하핫~! 미스 페트라가 그 어떤 조건을 제시한다 해도 결국 우린 어디까지나 용병이란 말입니다!”
뭐야…? 분명 스카웃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오늘 이렇게 헬기 운짱을 해줘서 그런 줄 알았건만… 그게 완전히는 아니었나…? 나중에 계약사항을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받아야겠군.
“그나저나, 보스야말로 정말 못 말릴 분입니다! 사막과 대 협곡, 그 지하까지 종횡무진하고도 모자라서 이젠 바다 속까지 누비실 겁니까?”
훗…! 그러고 보니, 다양한 배경으로 사건의 연속인 건 피차일반인가……?
“하지만! 이번에는 인어공주 같은 소녀와 함께라니! 지난번과는 달리 즐거운 작전이 되시겠습니다!”
터너는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치였고, 사실 누구라도 표면적인 상황만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 …대교. 이제라도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겠니? >
나는 헬기 안쪽에 앉아있는 대교를 돌아보며 새삼 그렇게 물었다. 일단 동행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생각할수록 불안한 부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교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계속 당신과 함께 있겠다고 했잖아요. 음… 방해되지 않도록 노력할 게요.”
말은 쉽지만, 현재 대교는 과거의 내력은 고사하고 무공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상태이다. 그걸 대교 자신이 너무나 잘 알기에 지금까지는 전투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알아서 뒤로 빠져 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고집스럽게 따라 나서고 있는 것이다. 곤란…하군. 난 물론 닥터 제이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대교와 동행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건 막연한 위기 의식을 기준으로 한 거고, 이렇게 구체적이며 확실하게 적진에 침투해야 할 상황까지를 포함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 대교. 나도 물론 어디나 너와 함께 가고 싶어. 하지만 이번 일은… 그러니까, 우선은 계속 이렇게 헬기로 갈 수도 없다는 점부터가 문제라구. 아무리 터너의 비행실력이 뛰어나도 결국에는 맨몸으로…… >
내 말을 듣고 있던 대교는 슬쩍 점퍼 앞자락을 들어 그 안의 잠수복을 드러내 보였다.
< 그야… 뭐. 넌 운동신경이 좋으니까 수영이나 잠수도 잘하겠지. 하지만 바다라는 건 니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험난한…… >
[ 주인님! ]
응? 몽몽이 내 말을 끊어?
웬일인가 했더니, 몽몽은 대교에 관한 몇 군데 매스컴의 보도자료를 영상으로 띄워주기 시작했다. 대부분 ‘바다의 요정 주가혜.’라는 식의 타이틀의 기사였으며, 거기엔 잠수복을 입은 대교가 바다 속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뭐…시여. 대교는 기본적으로 어드밴스트 스쿠버 다이버(Advanced Scuba Diver)인가 하는 등급의 자격증이 있다고…? 게다가 대교를 지도한 자들은 하나같이 대교가 다이브 마스터(Dive Master) 이상의 자격증을 받지 못한 건 단지 나이 제한에 걸렸기 때문일 뿐이라고 증언(?)한다고……?
< 아니, 저기… 그러니까, 니가 내 생각보다 바다에 익숙한…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게…… >
“훗~! 이제야 아셨나 보군요.”
이런 눈치쟁이 같으니…! 몽몽이 지금 막 내게 자신에 관한 사항을 알려 줬음을 잘도 알아채는 군.
“하지만… 전 사실 저 자신의 알량한 잠수실력을 믿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소교를 구하기 위해서는 더 위험하고 끔찍한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전 분명히 지극히 현실적이고 약삭빠른 선택을 했을 뿐인 걸요.”
대교는 자신의 말과 달리 전혀 계산적이지 않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장소에서 수백, 수천의 호위병에 둘러싸여 있는 것보다도 당신 한 분의 곁이 더 안전하다는 저의 판단… 틀렸나요?”
으~ 세상에 어떤 남자가 이런 말을 듣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 …쳇. 대교 너야말로 수백, 수천의 적이 겨누는 총칼보다도 날 꼼짝 못하게 하는 구나. >
“후후- 그런 줄 아셨으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기
없기예요? 아셨죠?”
< …그래, 알았다. 내가 졌다. >
나는 결국 예정된(?) 패배를 인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출입구 난간 손잡이를 잡고 헬기 뒤쪽을 돌아보니, 터너 못지 않은 솜씨를 가진 블랙스마이커 항공 용병부대원들이 모는 다른 헬기들 역시 잘 따라붙어 오고 있었다. 나는 헬기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느끼며 모두에게 전음을 보냈다.
< 모두 잘 들어! 이제 곧 1차 포인트에 도착한다. 입수 후 2차 포인트까지 가급적 대열을 유지한다. 전음을 쓸 수 없는 자들은 무선연락에 유의하고, 상황코드 3이상에는 지침B를 기준으로 행동한다. 2차 포인트 이후로는…… >
이번 작전의 특수성(바다에서의 상호 통신 및 위치 파악 난감)때문에 상황코드며 상황별 지침에 대한 암호표(?)가 필요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 그럴듯한 형식으로 ‘각자 알아서 가다가 심각한 위기상황을 만나면, 역시 니가 알아서 하세요.’라는 뜻의 명령을 내리자니 기분이 좀 거시기 하군.
< 대교. 준비는 다 됐…… >
대교를 돌아보던 나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말았다. 점퍼를 벗고 잠수복 위에 잠수장비를 챙긴 채 일어서고 있는 그녀의 모습때문이었다.
오, 오랜만에 보는 대교의 착한… 몸매…! 에… 그러니까, 비화곡의 성지에서 이후로는 보지 못했었던… 으음. 잠수복 만세!
“아!”
대교가 왜 당혹한 표정을… 어랏? 나는 무심코 잠시 떼었다가 다시 잡으려던 난간 손잡이가 행방불명(?) 되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대한민국 모범청년으로서의 이성은? 고수로서의 균형감각은? 으- 나 왜 이러니?
순간적으로 별의별 생각이 떠오르는 가운데, 나는 허전한 손짓과 함께 훌쩍 헬기 밖으로 날려지고 있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