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77화 : 소교는 착한 아이
9. 소교는 착한 아이
하나 둘 일일이 세기가 힘들 정도로 많다.
그런 숫자의 무서운 병기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어도 우리는 전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솔직히 지금 우리 상태가 약간 오버하고 있다는 건 안다. 당연히 지금은 냉정하게 적의 다음 공격을 예측하고 대응에 전력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군.”
상대에게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냥 흘러나온 말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소위 비행접시들도 이미 멈춰 있었다.
“역시 이 정도의 물건으로는 어쩔 수 없군. 화이트가 하도 극찬한 남자라서 기대를 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뭐………….”
상대의 상황분석 분위기가 이러면 맥이 빠져버린다.
“음. 일단400억 달러는 허공에 날려버린 거로 쳐야겠군.”
“에이쒸~ 이 자식! 400억 달러가 뉘 집 애 이름이냐?”
“핫핫! 화이트와 닥터 제이는 정말 멋져! 이 정도까지 예언 하다니!”
“뭐?”
“그야 그 아이들은 이런 상황하에서의 방금 당신이 한 대사까지 정확히 예언했었거든.”
…이 자식. 눈치로 보아 화이트 즉, 원판과 닥터 제이 둘과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다. 그래서 나의 평소 성격과 말투까지 알고 있다. 그것도 물론 씨 바지만!
더 문제는 이 자식이… 그 원판과 닥터 제이를 ‘아이들’로 칭했다는 데 있다. 다른 웬만한(?) 인물 도 아닌 원판과 닥터 제이를 애들 취급………? 그건…….
“아, 실언했군.”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대의 ‘피식’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렇기는 한데, 그건 뭐, 그렇고………….”
아아~ 빌어먹을!
이 새뀌 말하는 거 보니까 원하지 않았던… 정말이지 당장은 원하지 않았던 상황 전개가 현실이라는 걸 알겠다. 이 녀석은 CIA의 보스 정도가 아 니라 원판이 말했던 ‘아주 특별한 어둠’ …아니, 더 상위의 프리메이슨이다.
“어쨌든 솔직히 놀라긴 했어. 화이트가 말했던 세상이 정말 실존했다고는… 더구나 그런 세계에서도 최강………! 그것도 개인의 무력만으로…! 그 런 인물이 내 세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거.. 난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진짜 있어서 기쁘기는 한데… 좀 곤란하게 되었네?”
쿡! 하고 높은 웃었다.
저놈이 말하는 믿지 못했었다는 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저 놈은 그런 얘길 하면서도 웃을 수 있다. 그건 내가 아무리 그렇게 믿지 못할 능력을 가진 자라도 자신에게는 별 거 아니라 는… 그런 뜻인 것이다.
“신들의 유회’가 엉망이 되어 가고 있거든. 신들의 유회 멤버들 모두 자신들의 배팅을 정정하겠다고 난리야. 내가 미리 보내 줬던 자네의 전투 장 면들을 믿지 못했던 건・・・ 뭐. 이해는 가.”
그래. 결국 그 정도가 놈이 생각하는 ‘곤란함’ 이겠지.
“음. 미안해. 사실 난 자네와 대교 양을 곧바로 초대하고 싶어. 하지만 비즈니스도 중요한 관계로 조금은 더 장난감들과 놀아줘야겠어.”
놈은 진심으로 자신은 원하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나의 고객 ‘신들의 유회’ 는 내가 약속했던 ‘믿을 수 없는 전투의 연장 상영을 간절히 원하기 시작했거든. 아, 물론, 지금은 자네에 대한 배팅이 상 당히 올라갔어.”
보통 악의 보스들이 최후에 패하는 건 주인공 앞에서 쓸데없는 시간 끌기를 하기 때문이지만.. 이놈은 나름 이유가 있는 입장이로군. 노름판 운영 자로서 여러 가지 조정을 해야 하니 말이다.
“아아- 그러셔? 그럼 기꺼이 더 놀아주지.”
대교가 살짝 고개를 저었지만 난 안심하라는 의미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지금 발끈한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이런 취급에 화를 낼 때가 아니니 말이다.
“후후- 그럼 건투를…….”
“잠깐! 조건이 있어.”
“…조건?”
“그래. 안 들어주면, 나 이제부터 존내 잼없는 게임 할 거야. 무조건 튀거나 숨기만 할거라구.”
“……”
“반응이 좀 늦군. 원판이나 닥터 제이가 이런 내 성격까지는 말 안 해줬나?”
“…크흣!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글쎄 이런 게 악당 보스들의 필패 패턴이라니까? 자신보다 낮은 급의 상대가 보이는 특별한 행동, 예측을 벗어난 상황을 단지 ‘재밌다’로 의식한 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은 절대로 당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에 따른 여유 때문에 말이다.
“”당연히 그런 짓을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음에도… 결국 그 비합리적인 요구에 귀기울이게 되고… 동조하게 만드는 능력’ …………! 그래. 정말 탐나는 재능이야.”
좋아. 그렇게 생각해줘.
“어쨌든 말해봐. 들어보고 결정하지.”
쯧. 상당한 수준의 반격이군. 하지만 지금 급한 건………….
“소교! 소교는 무사하지?”
“아, 당연하지. 소중한 인질인데.”
“그 애를 납치한 건 당신 의지였나?”
“…어, 포함이 되는군.”
핵심적인 질문을 약간 교묘모호하게 넘어가네?
“포함? 다카시와 넌………….”
“잠깐. 그렇게 복잡하게 떠볼 거 없어. 난 그리 숨길 생각도 없으니 말야.”
에? 설마……
“그냥 얘기해주지. 여기 이 다카시 군은………….”
다카시 놈이 계속 바로 옆에 있었던 거야? 아니, 사실은 그게 당연한 건데 지금까지 왠지 생각도 못했다. 그만큼 놈이 존재감이 없었던 건가? “이런. 이런 왜 그렇게 놀라며 뒷걸음질을 하지? 지금 진유준에게는 자네의 모습도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말야. 자네는 진유준이란 남자를 증 오하는 거 아니었나?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서 당한 일에 대한 수모를 갚아주리라 벼르고 있었다고… 아 아 그래. 이해는 가. 사실 그때 본 모습만 으로는 저렇게 자네의 상식을 너무나 벗어난 상대일 줄은 몰랐겠지.”
…한 쪽의 소리만 들리는데도 왠지 놈들의 상황실(?) 안의 풍경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말야. 너무 날 실망하게 하지 말아줘. 차기 GM의 총수가 되고 싶으면 말야.” 이건…………
“아. 잠깐 실례. 말을 계속하지. 다카시 군과 나는 일종의 전략적 제휴를 맺은 거야.”
제휴 다카시 놈이 그냥 네 밑으로 기어 들어간 거 같은데?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는데다 마침 진유준, 자네의 약점을 포획할 수 있다고… 아, 정확히 말하면 자네가 접촉하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자네 가 특히 ‘진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찾아 올 인질’ 이라는 걸 다카시 군이 보증한다고 해서 말야.”
그야 소교는 당연히 그럴만한 아이지만………………
“그래서 이 섬의 준비는 내가, 소교 양 납치 실행은 다카시 군이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지. 자. 또 궁금한 점은?”
“…어. 그쪽의 약도.”
“…뭐?”
“여기서부터 당신이 있는 곳까지 가는 지도… 지름길 좀 알려 달라구.”
정말 알려줄라나?
“음・・・ 그럴까, 그럼.” 알려주는군.
놈의 말이 끝나고 1, 2초 정도 지났을까? 약 4미터 정도 떨어진 바위 뒤의 허공에 지잉- 영상이 떠올랐다. 이 섬의 전체적 지도와 자신이 있는 바 위산 중턱의 출입구. 심지어 거기서부터 지하의 자기 사무실(?)까지 오는 방법이 펼쳐지는 너무나 친절한 안내도.
“다음 조건은?”
“……거기까지 가장 편하게 갈 수 있는 방법.”
“농담이겠지?”
“…응.”
“그럼 진짜 마지막 조건은?”
“내 수하들이 현재 뭐 하고 있는지 보여줘.”
“흐음… 좋아. 그러지.”
아무래도 몽몽이 만드는 망막 스크린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뿐더러, 잘해야 구형 TV수준의 영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운드만큼은 스피커가 하도 사방에 있다 보니 상당히 실감났다.
“야! 아처!”
전황마군이었다. 그가 위기에 처한 수하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아처라는 수하가 몸을 날려 뒤쪽에서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엄청나게 빗발치는 총탄과 폭발로 얼룩진 전황이었다.
물론 소리야 내력을 집중한 나 자신의 청력과 몽몽을 이용해도 알 수는 있는 거지만 영상까지는… 음, 암튼. 전체적인 상황은 아마도 전황마군과 그의 전마부대가 비슷한(?) 급의 특수 부대와 전투 중인 것 같았다.
「상대하는 적들의 장비와 행동패턴을 분석한 결과, 델타포스(Delta Force) 오메가(omega)! 미 특수부대 최강이라는 델타포스 중에서도 엄선된 오메가 팀과 전투 중인 것으로 추정됨 니다.」
그렇군. 그래도 전황마군과 그의 전마부대가 질리는. 설마 없겠지? 솔직히 조금 힘겨워 보이기도 하지만 뭐 그래도 큼. 암튼.
다음 장면은 뇌룡대주가 이끄는 뇌룡대 상황이긴 한 거 같은데, 근데 좀 이상하군. ‘정면 돌파’를 선호하는 성향의 뇌룡대가 극도로 긴장한 모습 으로 숲에 모습을 감춘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어? 방금 화면 한쪽에서 뭔가 뭔가 싸움이 벌어진 듯한데.. 다른 녀석들은 모른다?
「분석결과, 암습 기술로 특화된 적들을 상대하는 것으로 추정 됩니다.」
그 정도야 나도 보기만 해도 알겠다. 하지만 뭐가 어찌되었든…………
—에이- 썅! 뇌룡대주, 너. 또 이럴래?
나도 모르게 방향도 없이 중얼거린 게 뇌룡대주에게 전해질 리는 없겠건만… 뇌룡대주가 스윽- 풀숲에서 일어나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와라, 닌자(忍)들!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그대들의 방식에 무심결에 동조한 것은 나의 나쁜 습관. 나도 인술(忍術)을 수련한 바가 있기에 그랬지만… 역시 상대의 최고 절기에 답하는 건 나 자신의 최대 절기여야 예의겠지.”
그리 말하며 뇌룡대주는 자신의 9단 봉을 척척 조립해 그냥 하나의 봉으로 만든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걸 돌려 회전시키기 시작한다. 그의 봉 끝이 후우우-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의 가느다란 봉이 도끼가 되는 순간에 생길 일은……
치직!
구형 TV의 화면이 잘못 될 때의 전형적인 소리와 함께 화면이 꺼졌다. 불만은 없었다. 지금까지 수하들 모두 무사하다는 걸 안 것만으로 충분했다. 물론, 전체적인 상황은 굉장히 불쾌하다.
…대교. 역시 내 작전이 틀렸나 봐. 작전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만… 암튼 난 각자 알아서 행동하라고 해도 결국 내 수하들은 내가 행동하기 수 월한 환경을 그런 상황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게… 물론 막연하고 말도 안 되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대교는 살포시 웃고 있었다.
「당신의 수하들도 지금은 확실히 우리처럼 저들의 도박판 말 이 된 것 같네요. 같은 계열의 최강자⋯ 다들 그런 적들과 싸우고 있으니 말예요. 아 마도 저 신들의 유회에서는 그쪽에도 돈을 걸고 있겠죠.」
대교의 미소는 결코 미소라고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그게 마군황의 수하된 자들의 의무이자 자격.」
대교는 마주 잡고 있던 내 손을 더욱 굳게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의 의무이기도 하죠. 전 보다 조촐한 당신의 발목을 잡지 않는다⋯ 정도겠지만요.」
아니, 대교. 네 역할은 그 정도가 아니야.
“다음 조건은?”
쯧, 아무리 나라도 더 이상의 정보를 요구할 염치(?)는 없다.
“당신 이름이나 듣고 싶군.”
침묵이… 왜 이렇게 길어? 난 단지 싸우기 전에 상대방 이름 정도는 알고 싶다는 뜻으로 말한 건데?
“L 크래프ᄐ..”
“잠깐!”
대교였다.
“듣지 않겠어요.”
“…훗. 역시 현명한 파트너로군.”
아, 이런 제기. 그걸 생각 못 했다. 철저하게 암흑 속에 사는 놈에게 이름이라니. 그런 걸 밝히면 ‘증거 인멸’ 차원에서라도 그걸 들은 인간들 전부 를 죽여버릴 것이다. 물론 내가 이기면 상관없겠지만 만약에라도… 아, 잠깐. 그렇다는 건 지금 저 녀석이 진짜 자신의 ‘본명’ 을 얘기하려고 했다는 얘긴가?
“이제 시작종을 울려도 될까?”
“오- 케이.”
나의 대답 직후, 우웅- 살인 비행접시들이 기동을 시작했다.
「주인님! UFO들의 방어형태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제가 현재 분석 가능한 기체는 총 3기로 다른 기체의 분석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죄송 합니……………」
-됐어, 몽몽!
나는 몽몽을 위로(?)하며 발을 박차고 날았다. 물론 대교와 함께.
우우웅~
역시 그 정도…..?
웅- 쒸씽!
소리가 바뀌었다?
나는 눈앞의 나무 중턱을 차며 급격히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씽
돌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우릴 제외한 모든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는 그 스피드!
「…모든 에너지를 한 가지 용도로 집중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저 살인 비행접시의 유일 약점은 ‘느리다’ 뿐이었는데 그걸 보완하려고 다른 기능은 포기했단 말이군. 사실 꼭 초 진동병기가 아니라도 저런 쇳덩어리에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웬만하면 사망……………
「…저도 좀 뭔가 해도 될까요?」
-응?
「좀 쓸게요.」
뭘? 아, 내공?
의식함과 동시에 나의 내력이 썰물처럼 쏟아져 나갔다. 손을 맞잡고 있는 대교에게로.
-어, 야!
당황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니 살인 비행접시 두 대가 쿠콰콰- 엄청난 소리를 내며 땅에 쳐박히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대교가 곧은 나뭇가지 하 나를 골라 손에 드는 것은 보았지만 그건 그냥 위로용(?) 정도로… 아니, 근데! 그걸로… 삼시전결을 펼쳐?
-야! 너!
「죄송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요.」
-여, 역시?
「일단 무공뿐인……
나의 기쁨이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그대로,
-하핫! 아무렴 어때!
진심이었다. 무공이 먼저인 건 위기상황이라서 그렇겠지만, 앞으로도 빠르게 대교의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다. 우리가 함께 있으면! ᅳ어쨌든 이번엔 내 차례!
나는 대교와 함께 공공보법을 펼치며 연이어 세 번의 검기를 날렸다. 그 결과는……
칵! 카칵!칵!
세 번의 적중 소리. 그리고 직후로 이어지는 비행접시들의 거친 추락소리!
「후후~ 그럼 저도……………..」
굳이 대교보다 한 대 많은 숫자를 공격해서 성공시킨 나와 달리 대교는 겸손하게(?) 두 대 격추를 추가했다. 무공에 대한 기억을 되찾은 그녀라면 얼마든지 대수 경쟁(?)을 할 수도 있을 텐데도 말이다.
-에이. 민망하게스리………………
「아니에요. 남자는 그 정도 자존심이 있어야죠. 하지만 이런 작은 여자의 배려를 알고… 또 그걸 웃으며 받아들이는 그런 남자는 드물죠.」 ᅳ어야. 그건….
「후후- 역시 당신은 너무 귀여워요. 몽몽보다.」
야! 너 진짜 왜 그래?
아, 미치겠다. 사나이 진유준이 언제부터 이런 취급을 받게 된 거지? 이것도 나름, 그러니까 나의 내면에서 바라는… 윽! 아냐! 이게 아냐! 「아!」
-응? 왜?
대교의 경공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다가 적당한 바위를 찾아 그 위에 착지했다. 비록 염장전투(?)였어도, 나 름 위험한 전투를 하면서 어느 사이 나와 대교는 열대 우림 지역을 지나서 가파른 절벽지대의 초입까지 온 상태이다.
가파른 절벽의 중턱쯤에 안착한 우리의 시선에는 아래쪽 숲의 전체적 상황이 환하게 보이고 있었다.
「저 아이들……………」
대교는 낮게 중얼거리며 흐뭇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ᅳ…음.
확실히 내 예상도・・・ 넘네?
-우리가 많이 해치우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은 놈들이 더 많은데 왜 더 오지 않는가 했더니…
전마대와 뇌룡대의 전투로 판단되는 지역의 양상이 더욱 치열해지는 것으로 보이는 건・・・ 일단 그렇다 치자. 적들의 주공격 목표는 본래 우리 전체 고, 그들은 그들에게 할당된(?) 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조금 전까지 나와 대교를 공격하던 비행 접시들을 막아 우릴 한가하게 (?) 만들고 있는 건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소령이와 미령이 저 애들은 숨어서 우릴 따라오기만 할 줄 알았는데……………」
-나도 그래. 거기다 은사마군도 내 숨은 뜻을 알아서 나 대신 저 녀석들을 호위하는데 전력을 다할 줄 알았는데 말야.
사실 저 녀석들이 지금 모두 살아 있다는 거 자체가 대단한 거다. 아무리 어쩌니 해도 우리와 비교하면 인간 쪽에 가까우니 말이다. 하지만…
-…어째 그 정도가 아닌 것 같군.
‘비전투 요원’인 소미령이와 역시 대놓고 전투가 전문은 아닌 은사마군. 세 미소처녀(은사마군은 이미 소녀가 아니므로)가 완벽한 연합 전선을 펼쳐 전투력의 열세를 메우고 있었다.
우선,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은사마군이 유인책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비행접시들의 표적을 자처하여 몸을 드러낸 채 달린다. 그러 는 와중에 나도 힘들겠다 싶은 타이밍으로 절묘하게 비행접시들을 피하고 있었다.
「적의 움직임을 사전 분석, 회피 공간과 각도, 타이밍… 모든 정보가 은사마군에게 제공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포트 인물의 앞선 정보 분석력과 제공 능력도 뛰어나지만 실전 활용 인물의 정보 이해도와 적용 타이밍 또한 99.5%의 적중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쒸잉~!
나도 좀 전에 간신히 피했을 정도인 스피드의 공격마저도 은사마군은 여유 있게 피한다.
그리고 그녀를 스쳐 지나간 비행접시가 마치 내 삼시전결을 맞은 것처럼 제 기능을 잃고 꾸콰콱- 땅을 굴렀다. 몸을 피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저 기체의 약점에 칼을 찔러 넣은 것이다.
보자보자- 은사마군도 물론 대단하지만, 저런 일이 가능하게 하는 정보의 원천은…
미령이…………? 녀석은 분명 자신의 경공을 최대한 써서 바쁘게 움직이며 은사마군에게 소리를 친다거나 수신호,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서포트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령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미령이에게 그런 모든 정보의 입출력이 무엇보다 ‘실시간’ 가능한 일일까?
-아하하하~!
소령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였다. 녀석 또한 달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가능한 최대의 경공을 쓰는 듯 금동이처럼 날렵하게 나무 사이를 통통 튀 듯 달리고 있었다.
-저 녀석, 저거………….
소령이 녀석은 지금 손바닥보다 조금 큰 초소형 노트북이 담긴 가방을 허벅지에 차고, 또 뭔지 모를 잡다한 장비들이 꽂힌 벨트(?)를 허리에 두르 고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녀석이 경공을 펼쳐 비행접시들로부터 달아나면서도 한 쪽 손은 계속 허벅지에 찬 소형 노트북 키보드 위를 오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공격중인 적에 관한 유동적 데이터를 특정인, 미령님에게 전송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동시에 현재의 육체적 유용행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하 는……………」
평소의 녀석을 생각하면 저렇게 완벽한 멀티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거 자체가 신기하기까지 하다.
“아!”
대교가 놀라 호흡을 멈추었다. 소령이가 뭔가 발에 걸린 듯, 악- 소리를 냄과 동시에 넘어지며 뒹굴었기 때문이었다.
「저!」
잠깐!
나는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대교를 막았다. 대교는 날 돌아보고는 곧 바로 천천히 소령이 쪽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녀의 시선 속 소령이는 쑥스러 운 듯 뒷머리를 극적이며 일어나고 있었다.
“우쒸! 뭔가 계산을 하면 꼭・・・ 아! 니들, 이제 괜찮니?”
반색을 하는 소령이 앞에 있는 건・・・ 세상의 모든 것을 자를 수 있는 초진동 병기를 갖춘 비행접시 두 대였다.
“에헤ᅳ 그래. 이제 화가 좀 풀렸니?”
그러며 소령이는 저 끔직한 비행접시의 한 면에 쪽, 하고 입을 맞춘다.
잠든 듯 조용히 멈춰 있는 비행접시 두 대 모두 소위 ‘약점’에 각각 작은 드라이버가 꽂힌 채 치직- 치직 소리를 내고 있었다.
ᅳ흐음. 역시 대교의 동생들이로군.
-당신의 직속 비연대 출신들이기도 하구요.
응?
-당신의 내공으로 당신께 전음을 쓰니까 왠지 묘하네요.
ᅳ훗- 이제껏 마음껏 나의 내공을 썼으면서 새삼스럽기는.
-마음………….
대교가 뭐라 한 것 같았지만 나는 순간 놓치고 말았다. 갑자가 쿵! 쿵! 묵직한 땅울림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서 있는 바위산의 한 쪽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킹콩 같은 괴물이 걸어오고 있는 듯한 소리………? 에이 설마..에?
정말 킹콩이 나타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 못지않게 유명한 형태의 괴물(?)들이 몇 대인가 연이어 등장하며 쿵! 쿵! 지축을 울리고 있었다. 십 미터가 넘는 길이의 기계 다 리 두 개가 반원형의 돔 같은 몸체를 받히고 있는 로봇 아닌 로봇들. 저건 분명히……………
-스타워즈,
– 그래, 대교. 그 영화에서 그 뭐냐, 제국군이 몰고 다니는 2족 보행 병기를 닮았다, 야.
-…형태로 보아 비행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육지에서의 기동력은 의외로 빠를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원거리 공격용 화력이 비행접시보다 높 을 것 같아요.
스캔 방지 장치로 집중 마크 당하고 있는 몽몽이 썩죽어 있으니까 대교가 대신 나서는군.
-그래. 나도 대충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뭐 저건 어째 비행접시보다도 쉬워 보이는 걸?
겉으로 뼈대며 관절(?)이 드러난, 노골적으로 기계구조를 드러낸 형태여서일까? 틀로 쿡 찍어낸 듯 단순한 형태의 비행접시보다 소위 ‘약점’을 찾 기가 쉬울 것 같았다.
-뭐, 물론 그렇게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은 아니겠지? 사실 비행접시의 약점들도 놈들이 일부로 만들어 놓은 것 같고 말야.
내 말에 대교도 작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우리는 그렇다 치고, 은사마군의 칼이며 소령이의 드라이버 같은 것에 당할 정도의 약점이 표면에 있다는 건 좀 납득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놈들이 일부로… ‘게임의 재미’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포인트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았다.
ᅳ물론 몽몽도 아닌 소령이가 그런 걸 찾아낸 거 자체가 대단한 거지만 말야.
쿵!
쿵!
우직!
쿵!
상황 분석하는 사이, 나무며 바위며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2족 보행 제국군(?). 그리고 그를 호위하듯 따라붙고 있는 비행접시 잔당(?)들………….
-쯧. 가까워질수록 생각보다 크고 기괴한 느낌이네.
나는 새삼 전투태세를 갖추며 대교에게 물었다.
_아참. 아까 뭐라고 했었지?
ᅳ…마음껏은 아니었다고 했어요.
응? 뭐가? …아. 나의 내공을 쓰는 거?’
허어~ 얘 좀 봐라? 무공에 대한 기억을 되찾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 아니 오히려 그래서 그런가? 누구라도 자신의 힘이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 었다가 그걸 되찾게 되면 당장 마음껏 써보고 싶을 테니 말이다.
-이번엔 당신의 내공… 좀 더 제 마음대로 해봐도 될까요?
대교는 예의 제국군이 다가오며 쿵쿵 지축을 울리는 느낌이 싫은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테스트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테스트?
-예. 안 될까요?
슬며시 고개를 비스듬히 하며 눈빛 공격을 해오는 대교.
-우쒸- 너 계속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음. 뭐가요?
ᅳ어차피 내가 네 말을 거부 못한다는 거 알면서 공연히………
ᅳ제게 화내시는 데도 왠지 기쁘네요.
-야 야!
ᅳ죄송.
대교는 끝내 귀엽게 혀를 한 번 빼 물어 보이고서야 말을 이었다.
-그럼 정말 한 번 제 마음대로 해볼게요.
-그러시죠, 공주마마.
-후후— 그럼, 실례.
대교는 즉시 몸을 날려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속절없이 질질..은 아니고, 하여간 완전히 입장이 역전되어 대교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신세 가 되었다.
언젠가 그러니까 비화곡의 성지 연못에서 대교에게 안겨들려) 나왔을 때가 생각나기도 하는 걸? 물론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달리 내 의지로 협조 하는………….
어?
대교는 정말 마음껏 나의 내공을 끌어다 쓰며 완벽한 초고수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 이것 봐라? 이형환위+잠행보……?
이렇게 스피드와 잠행 효과를 겸비한 퓨전 경공이 자연스럽게…………? 대교 얘 이거, 이거… 아! 요하만검(曜?慢劍)! 간만에 보는 대교의 독문무공 요 하검결(曜夏劍缺)이다. 이어지는 공공보법의 질주에 에그머니! 월광절화결?
나는 대교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가 자아낸 달빛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해야 할지 어이없어 해야 할지를 망설여야 했다. 결국 더 따지기도 전에 두 가지를 다 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에구구ᅳ 또 월광절화결?
월광절화결 연사는 나도 엄두를 내기 어려운 거다. 맘대로 쓰라고 큰소리를 치기는 했었지만 나의 알량한 현재 내공으로는 얼마 못 가 부도가 나겠 다.
…어? 잠깐? 그 ‘얼마 못 가’의 ‘얼마’는 벌써 지난 거 아닌가? 그런데도 여유가 있네? 설마 이 섬에 흐르는 기의 흐름이 천 년 전 수준…..? …아 닌데?
대교의 이해할 수 없는 괴력(?)은 전투를 너무나 일방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비행접시들은 이제 대교에게 ‘아웃오브안중’. 제국군의 엄청난 발칸 포와 레이저(?) 사격도 그녀가(나는 덤) 경공을 펼친 후의 그림자 쫓기에도 바빴다.
대, 대교가 강해지는 건 좋지만… 이건 좀 너무… 너무 지나친 거 아냐?
나의 우려 아닌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교는 계속 거침이 없었다. 그녀가 스쳐지난 제국군의 다리 관절 부위가 즉시 불꽃을 튀기며 힘없이 분쇄되기 바빴고. 몇십 톤 무게일 몸체가 땅바닥에 쓰러지는 굉음이 짧은 사이를 두고 계속 이어져 갔다.
-아아아- 왠지이~ 너무나 기분이 좋아요!
대교는 마치 벼르고 벼르던 별미를 기어이 먹고야 만 소녀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적당한 바위 위에 착지했다.
전투 도중에는 숲 쪽으로 내려갔던 적도 있지만 결국 다시 바위산 중턱으로 복귀한 것이다. 물론 아까보다 훨씬 적의 비밀기지 입구에 가까워진 지 점이다.
「으음… 저 아이들도 계속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대교는 느긋한 태도로 숲에서 소미령이들과 은사마군 연합군이 남은 몇 대의 비행접시들과 싸우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교의 ‘여유’는 우리 쪽을 공격하던 비행접시 군단과 제국군까지 이미 싸그리 전별하여 우리들 발밑의 숲 여기저기에 진열되어 (?)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몽!
「…대교님의 현 시대 육체는 천년 전의 본신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무공에 적합한 체질입니다. 또한, 핵심이 빠진 이 시대의 기공법이나 마 꾸준히 시행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 얘긴 이미 들었잖아.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닌가? 아무리 상승무공을 기억해냈다 해도 몸이 이렇게 곧바로 따 라갈 수가 있는 건가? 아니, 아니 그건 뭐………….
‘우리 대교는 역시 천재’라는 팔불출 판정만으로도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조금 전 전투는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대교님께서 소모한 내공이 실제적으로 그리 크지 않은 이유를 물으시는 거라면……….
그래. 요점은 바로 그거다. 대교가 그렇게 마구 내공을 소모했음에도 녀석에게로 향했던 나의 내공은 거의 손실 없이 되돌아 왔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도 아직 분석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현재로서는 주인님과 대교님이 헤어지신 후 대교님께서 새로운 내공 심법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아…………! 그걸 잊고 있었구나. 난 아직 남겨졌던 대교의 여생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한 상태인데… 맙소사…! 천년 전 의 대교는 대체 어디까지, 어느 정도의 경지까지 올랐었던 거지?
「대교님의 체내에서 상승된 주인님의 내공은 현재까지 약 83.5%로 측정되었습니다. 같은 현천기공을 쓰는 인체간의 내공 교류만을 기본으로 이 정도의 증폭효과를 도출할 수 있는 운기법의 조합은 저도 단기간에 분석이 어렵습니다.」
같은 현천기공을 쓰는 자와의…………? 그러니까 일반적인 무공 수련이 아니라… 나와 함께 쓸 무공연구를… 그런 걸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는 건가? ᅳ가칭, 원앙해비(鴛鴦偕飛).
돌아보는 나를 향해 대교가 곱게 웃어 보였다.
ᅳ아무래도 지금 몽몽에게 그걸 묻고 계신 것 같아서요.
-…그거야 뭐…………
나는 새삼 한켠이 찡해오는 가슴을 진정하며 마주 웃었다.
-원앙해비. ‘일단은 이렇게 칭하자’…라고 생각했던 당시의 제가 기억이 나네요.
‘원앙이 함께 날다’는 의미 때문일까? 대교는 왠지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애써 새침한 표정으로 흥- 소리를 냈다.
-역시 천년 전의 저는 어지간히 남성 의존적인 성격이었던 모양이에요. 자신이 만든 무공심법의 명칭조차 당신의 허락을 받으려 했으니 말예요. ᅳ…허락이 아니라 ‘상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 그건 말장난일 뿐이에요. 21세기 여성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구요.
…이 녀석, 감동을 준 당사자가 분위기 깨기냐?
-크흠. 말이 그렇지 지금 너도 그리 독립적이지는………….
내가 슬며시 대교의 손을 놓자 대교는 얼른 자기 쪽에서 다시 잡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렇다고 이럴 거예요? 치사하게!”
-흐흐ᅳ 아무래도 이제 넌 얼마 안 가 예전의 내공까지 되찾게 될 것 같으니 유세를 부려도 그 전에 해야지.
“흥! 사내가 대범하지 못하네요. 좋아요.”
대교는 선뜻 내 손을 놓아버리더니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아 팔짱을 끼어버린다.
“제 쪽에서 거부하겠어요. 이제 뭐든 당신 혼자 다 하세요.”
-어, 야아~.
너무나 간단히 무너져버린 나는 비굴한 태도로 대교의 손을 다시 잡으려 했지만 대교는 얄미울 정도로 상큼한 보법으로 피하며 몸을 사렸다.
거참. 내공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보법을 기본으로 하는데도 되게 교묘하네. 기억을 되찾은 이상 나보다 무공 짬밥이 엄청나게 많으니 당연한 건 가?
내가 다시 약간 신경 써서 금나 비슷하게 써봤지만 역시 사삭- 잘도 피한다. 물론 나도 내공을 쓰지는 않기로 했지만, 그래도 별로 넓지도 않은 바위 위에서 도망을 치면 또 얼마나 치겠는가.
어랏? 코너에 몰리니까 이제 손을 뒤로 감추네? 이거 무슨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나는 어이없어 웃으면서도 한 손을 뻗어 다시 대교의 손을 잡으려 했고 대교도 최대한 팔을 뒤로 빼서 요리조리 피한다.
젠장! 그렇다면!
잽싸게 다른 손을 노리려 했으나 이미 눈치깐 대교가 그 손도 살짝 피해버린다.
“후후-.”
다시 몇 번의 접전이 이어졌으나 계속되는 실패! 살짝 열이 올라서 자존심이고 뭐고 내공을 사용한 초식을 써버릴까. 라는 생각까지 드는 순간이었 다.
“어맛!”
어?
한순간 중심을 잃은 대교가 휘청하며 뒤쪽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고 하는 바람에 난 재빨리 대교의 허리와 손을 잡고 끌어 당겼다. 천하의 대교도 방심하다가 놀랐는지 가늘게 떨고 있었다.
– ….잡았다.
-그러…네요.
어쩌다보니… 우리는 마주 안은 자세였고 대교의 가쁜 숨결이 하아- 하아- 내 목과 가슴께로 뿜어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고 그녀는 고개 를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깊고 깊은 눈동자 속에 빠져들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거 다보고 있겠지?
-그, 그렇겠네요.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떨어져서 둥을 돌렸고, 나는 흠흠- 대교는 큼큼(?).
에구구.나(이번엔 우리?) 진짜 왜 이러니? 지금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전세계로 생중계 되고 있다는걸 잠시 잊고 말다니……………
“쯧쯧쯧! 이거 어이가 없군.”
윽! 하필 다카시 녀석 목소리다.
“이렇게 경박한 자들이 그토록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뭐라 맞받아치고 싶은데 지은 죄가(?) 있으니..”,
“특히 당신・・・ 주가혜. 아가씨에게는 더 실망이야. 나도 실은 당신 노래의 팬이었는데 말이지.”
이쒸- 대교의 노래와 조금 전 상황이 뭔 관계야? 스타는 사생활도 없냐?
“아니, 대교라고 했지? 그리고 여기 이 아가씨는 소교…….”
대교가 흠칫 굳어졌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소교 양을 데려오자마자 그런 장면을 선보일 줄은… 어쨌든, 자아- 소교 양 저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겠죠? 당신을 구출한답시고 와서는 뻔뻔한 애정행각만 보여주고 있는 저 사람들에게 말예요.”
다카시 녀석의 음성에는 분명 소교가 우릴 성토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침묵이 흘렀을 뿐 우리 주변에 숨겨진 스피커들 중 어느 곳에서도 소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괜찮니?”
먼저 입을 연 것은 오히려 대교였다.
대교는 조금 전의 굳은 표정을 풀며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다치거나… 아픈 곳은 없고?”
다정한 음성으로 재차 묻자, 비로소 천천히 소교의 대답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응, 언니. 난 괜찮아. 아프지 않아.”
생각보다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금동이는?”
“이 아이도 괜찮아. 우린 잘 있어, 언니.”
몇 마디 말만 듣고 있음에도 소교가 금동이를 소중하게 안고 있고 모습이 새삼 생생하게 떠올랐다.
“조금만 기다려줄래? 이제 금방 구해줄게.”
“아니야 언니. 이젠 그럴 필요 없어.”
“…보기 싫었니, 조금 전?”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언니. 정말… 정말보기 좋았어. 사이 좋은 두 사람을 보면 나까지 행복해지는 느낌인 걸?”
진심 ・・・ 일까?
“게다가・・・ 나도 이제 좋은 사람이 생겼어. 여기⋯ 이분, 다카시 씨.”
진심이 아니군.
“……그 자에게 나쁜 짓 당했니?”
대교의 살기로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이 분은.. 이 분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대교의 살기는 오히려 더 상승.
“그게 많은 부분에서 오해가 있었던 거 같아. 실은 여기 이 금동이가 GM의 차기 암천주를 선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할 수 있 데. 그래서 다들 그렇게 집요하게 이 아이를 노렸던 거고 말야. 하지만 이 분은 달라. 이분은 나와 금동이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거였 어. 그러니까 언니와 유준 오빠가 오해한 거야.”
계속 ‘이 분’ ……?
나는 왠지 소교가 말하는 내용보다, 놈을 부르는 호칭이 먼저 거슬렸다.
“비록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 이분과 난 공통점이 참 많아. 너무나 외롭게 자라온 환경이나 그게 여전 한 처지나… 아, 그래도 염려하지 마, 언니. 내 성격 알잖아? 이분과도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교제해 볼 거야.”
소교의 음성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고 대교의 살기는 짙어져만 갔다.
“하핫- 소교 양의 이런 신중함도그녀만의 매력이지. 아이-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는 내가 너무 무례했군. 곧 가족이 될 분들에게………….”
“넌 닥치고 있어!”
“넌 닥치고 있어!”
나와 대교는 거의 동시에 다카시의 말을 끊었다. 난 이 시대의 대교가 누구에게든 존댓말을 생략하는 건 처음 보았다.
“…소교. 너무나 착한 나의 동생.”
대교는 잔잔하고 슬픈 듯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착한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더구나 이 언니에게는 그렇지?”
“…아니야. 정말 아니래도, 언니. 날 데려오는 과정은 오해를 살만도 했지만 그건 이 사람도 서두르느라 그런 거야. 그러니 제발. 언니. 이대로… 이 대로 돌아가 줘.”
“…소교. 우리 소교는 착한 아이지?”
“그만! 그만 좀 해!”
별안간 소교가 빼액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래 거짓말이야! 내 진심을 듣고 싶어? 당신들 두 사람을 보면 행복하다고? 아니야! 난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 꼴도 보기 싫어 !그러니까 가! 돌아가란 말야!”
소교의 새된 고함소리가 너무나 아프게 우리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나와 대교는 무심결에 미소 짓고 말았다.
지금의 말이 진심이라면 더더욱.. 미운 언니에게도 ‘꼴도 보기 싫어’ 정도의 욕(?)을 하는 것조차 망설이는 소교가 너무나 안쓰럽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소교야. 우리가 정말 그냥 돌아가는 걸 원하니?”
“……”
“미울 거야, 이 언니가. 걱정될 거야, 이 언니가. 그래도 얘기해주렴.”
“……4?”
“그래.”
“날・・・ 우릴 구해줘.”
칙 스피커가 꺼지는 기척이 있었고, 더는 소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교는 내 시선을 피해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흘러나오는 얼음장 같은 냉기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