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9-1화 : 만남.(1)
1-9. 만남.(1)
나는 분근착골을 맛보느라 맛이 가고 있는 신해식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몽몽에게 말했다.
<몽몽. 앞으로는 아무래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녀야 할 것 같지? 너, 우리 어머니의 음식은 대부분 먹어도 큰 지장이 없다고 했었지?>
[일부 식수의 채취장소와 쌀의 공급자를 바꿀 것을 권고합니다. 그 외에도 주의 품목이 더 존재하나, 전체적으로 상업용 식당에 비해 현격히 낮은 수치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흐음~ 식수의 채취장소, 즉 약수터라면 바꾸는 것이 용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쌀의 공급자… 시골의 친척 댁에서 쌀 가져오는 걸 바꾸는 일은 그리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유기농업을 하는 곳이 한둘이 아닌데도 어머니께서 그 댁에서 쌀을 사는 건 형제를 돕는다는, 혹은 상부상조한다는 의미가 크니 말이다.
<쌀 같은 경우도… 다른 곳에서 생산된 것보다 많은 유해물질이 들어 있지는 않다고 하지 않았냐? 그분들이 우리 식구들을 속일 분들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검출된 양과 종류로 보아 유기농법으로 바꾸기 전까지 땅에 누적된 농약 등의 성분이 잔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쯧~!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우리 나라 공해문제도 참 심각한 모양이군. 나도 그린피스…인가? 하여간 그런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새삼 음식물과 환경의 중요성을 따져 보는 건, 당연히 현재의 내 몸의 상태 때문이다. 지금 내 눈앞에 누워있는 신해식과 그 똘마니는 외공 만으로도 별 어려움 없이 제압할 수가 있었지만, 그 이상의 상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강에서 만난 론과 도홍 정도 수준의 적을 만날 경우에는 과연 어떨지 자신이 없었다. 앞으로 그나마 다행인 건… 몽몽의 까다로운 검역에도 거의 통과할 정도로 우리 집에서만큼은 안심 식사 전선에 큰 지장이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물론 세상 어떤 부인, 어머니라도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좋고 깨끗한 음식을 해주고 싶지 않고 싶겠냐마는… 우리 어머니께서는 남다른 면이 많은데… 그건 무뚝뚝한 우리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까마득히(?) 머언 옛날, 신혼 시절의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앞에 온갖 정성과 솜씨를 발휘하여 밥상을 차리시고는 새신부답게 애교를 담뿍 섞어 ‘맛있죠? 맛있죠?’를 연발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무뚝뚝함이라면 청년 시절부터 남에 뒤질세라 갈고 닦은 우리 아버지의 대답은… ‘조미료 맛이지 뭐.’였다고 한다. 또… 시장에서 싱싱하고 신선한 야채를 사왔다고 자랑하며 입에 넣어주시려 하면 고개를 저으며 하시는 말씀이 ‘요즘 농약 얼마나 많이 치는지 몰라?’였다던가?
나중 세월이 흐른 후 아버지께서는 ‘쑥쓰러워서 그랬다.’라고 고백하셨다지만… 어쨌든 그때의 상황이 신혼 초의 어머니를 자극하여 특유의 승부욕에(?) 불이 붙게 한 탓에 우리 형제들, 특히 큰형은 남들보다 일찌감치(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요즘 유행하는 웰빙 중 식생활만은 확실하게 겪으며 자랐다고 한다. 둘째 민이 형과 나까지도 한때는 그 맛난 라면을 어머니 몰래 끓여 먹어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는데… 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하군. 우리 형제들 전부 어머니의 손맛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대부분의 인스턴트 식품이나 화학 조미료가 든 음식을 싫어하면서도 왜… 라면과 햄버거, 특히 라면은 처음부터 좋았고 지금도 환장하는 걸까?
<몽몽… 혹시 말야. 우리 나라 라면에는 무슨 마약 같은 게 들어 있지 않냐?>
[지금까지 드신 라면류 식품에서 해당 성분이 감지된 일이 없습니다. 의심되는 제품이 있으시면 정밀 검사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그냥 한 소리야. 안 먹겠다고 생각하니까 어쩐지 더 땡기는 거 같아서…>
확실히 또 벌써 먹고 싶어지네 그려. 음… 문득 어렸을 때 부르던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말머리로 붙여 만든 10행시(?)도 생각나는 군.
1 – 1반 시민 여러분!
2 – 2제부터라도!
3 – 3#(특정 라면 광고 자제.)라면을!
4 – 4세요!
5 – 5그라진 냄비에!
6 – 육수한 스프를 넣고!
7 – 77끓이지 말고!
8 – 88끓여서!
9 – 9수하게 드세요!
10 – 10원 짜리 동전 *개 면 됩니다.
음… 모든 구절의 내 기억이 정확한 건지 모르겠지만, 대충 맞는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7행에서는 붙일 말이 없을 것 같았는데 억지로, 혹은 교묘하게 붙인 사람이 누구인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쨌든… 정말 그 말처럼 노란 양은 냄비에 팔팔 끓인 면을 넣고 계란 하나 탁 깨서 넣은 다음 옵션으로 파에 고춧가루까지 솔솔 뿌려서… 에효~! 괜한 생각했나보다. 이쒸- 그나저나, 굳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그런데도 저 놈 신해식은 아직도 버티고 있네? 저 지경이면서도 의식을 잃지 않고 있을 정도라니… 정말 독종은 독종인 모양이다.
우리 러브리큐티하니엔젤 대교의 첫 번째 한국 실황 콘서트! 그 역사에 길이 남을, 아니 내가 남길! 하여간 그런 무대의 오프닝을 제대로 못 봤다는… 그런 절대적인 원한에 의해 시작된 분근착골 쇼… 그 자체는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좀 초조해지고 있었다. 신해식이 오리지널 전설의 고문 3단계를 받고 있는 짬짬이 1단계를 겪으며 다시 의식을 잃었다 찾았다를 반복하던 똘마니의 눈물 어린 호소가… 사실은 내 심정도 대변한다.
“이, 이럴 시간에… 공연을… 마저… 보시는 편이…”
그래… 현재의 상황이 악순환이란 건 나도 안다. 사실 난 지옥전주나 극악서생도 아닌데, 아무리 놈들에게 빡 돌았어도 그렇지… 저렇게 무간지옥을 넘나들며 눈이 뒤집힌 녀석들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울 리가 없잖은가. 그래서 어머니 생각하며 딴청을 피운 것이기도 하고… 으음…
지옥전주 말로는 제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3단계를 견디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고, 드물게 4단계까지 버티는 자는 그의 찬란한(?) 고문 인생에서 단 세 번 목격했다고 하던가? 그리고 그 세 명 역시 5단계에서 두 명은 사명하고 한 명은 5초 만에 항복하여 자신이 소속된 파의 비밀을 낱낱이 불어버렸다고 했었다.
신해식, 이놈. 이렇게 되면 다른 건 몰라도 독종 기질만은 인정해 주고 풀어줄까…? 그렇지만 독종을 설건드리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인데… 그럼 화끈하게 5단계를 선사해 버려…? 그러나 고대 무림의 상위 고수들도 사망률 50%가 넘는 5단계를 쓰는 것도 좀… 응…? 가, 가만? 아차차-! 3단계부터는 본래 ‘의식을 잃게 못하게 않는 혈’이 포함되어 있었지? 으- 깜박했다. 나는 실수를
뒤늦게 깨닫고 당장 2단계로 변경시켰고, 그러자 신해식은 기다렸다는 듯 편안하게(?) 졸도를 해버린다.
에구구… 이젠 조금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본의 아니게 정말 지옥전 급으로 고문을 한 셈이니…
나는 결국 예정보다 조금 늦게나마 자리를 떠날 수가 있었다. 그 전에 그냥 가버리는 척을 했지만 실은 계속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아주고 있던 오삼숙은 내가 녀석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끝내자 부하들을 불러서 두 놈을 챙기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는 다소 질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대신 놈을 때려 준 건 고맙지만, 그 후에 분근착골이라니……”
“그야 뭐……”
“…어쨌든 앞으로 조심하게. 해식은 칼 솜씨보다도 한 번 맺은 원한을 결코 잊지 않고 몇 배로 잔인하게 보복하는 성격 때문에 유명해진 놈이니까.”
“걱정마시오. 나도 그리 좋은 성격은 못되니까.”
“하긴, 분근착골처럼 잔악한 수법을 사람에게 장시간 태연히 실행하는 걸 보면……”
쯧-! 내 능력이나 적이 아니라는 건 이제 어느 정도 인정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어쨌든 위험인물’이라는 경계심도 지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너무 그러지 마시오. 생명에는 지장이 없도록 체크하면서 시전 한 거니까.”
역시 분근착골때문인가 싶어 설명을 덧붙였지만, 어째 별로 공감하지 않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내 말은 ‘죽지도 못하게 하면서 계속 고통을 주는’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구나? 젠장-! 졸지에 고문 기술자 취급을 받게 생겼다. 다소(?) 심했던 건 어디까지나 본의가 아니었고, 그런 과정 중에 놈들에게 여옥이란 여자에 대한 걸 묻지 못했던 건 바로 당신때문이었는데……
“…놈과 옛 식구였다는 건 사실이요?”
아무래도 좀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짐짓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지만, 오삼숙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때는. 하지만 지금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지.”
“그럼, 여옥이란 여자와는 대체 어떤 관계였던 거요? 아니, 지금 어떤 관계요?”
두 번째 추궁에서야 비로소 그의 얼굴에 지극히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알 거 없네. 과거나 지금이나, 난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상관이 없는데 왜 돌아오라는 말을……”
음, 아직 그리 친하지도 않은데 너무 개인적인 것까지 물었나보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듯 입을 다물더니 몸을 돌려 콘서트 홀로 돌아갔고, 난 그 뒤를 따랐다. 그는 돌아가자마자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아가씨께는 해식이 찾아 온 사실을 알리지 말아주게. 특히 예향원 얘기가 나오면 공연에 지장이 있을지도……”
“…알겠소.”
무심코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난 사실 순간적으로 오삼숙이 뭘 부탁했는지도 정확히 못 알아들었다. 돌아 온 장내를 가득 메우고있는 사람들의 열기와 환호 탓이기도 했고, 그 많은 관중들의 열광을 불러 온 원인… 이제 겨우 열 일곱의 소녀가 무대 위에서 발산하는 ‘그 무언가’때문이었다.
“가혜 아가씨는… 진짜야. 요즘의 가수 흉내만 낼뿐인 자들과 달리 진짜 재능을 가지고 있지. 난 반드시 내 손으로 아가씨의 재능을 세계에……”
대교를 늘 가까이 지켜보았을 오삼숙도 새삼스럽게 떨림이 있는 음성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가수로서의 재능을 본 것이 아니었다.
“거짓말이었어.”
“뭐?”
그녀가 나와 우리 시대로 함께 올 것을 확답한 이후의 어느 날… 나는 ‘너라면 많은 사람들을 열광케 하는 인기 가수나 연예인이 될 수 있을 거다’라고 하며 오늘과 비슷한 모습을 설명해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반 이상 농담이 섞인 말이었을 뿐… 난 실제로 대교의 노래 소리를 만인과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대교 또한 분명히 고개를 저으며… ‘다른 모든 것처럼 저의 악기, 노래 소리도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 부르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저 녀석… 나한테 거짓말했었던 거야.”
나는… 노래라는 걸, 음악이라는 걸 잘 모른다. 난 단지 대교여서… 그래서 그녀의 모든 것에 경탄할 뿐… 오삼숙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그녀의 노래에 빠져드는 지… 어떤 걸 재능이라 부르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오늘 내가 좀더 확실히 알게 된 건… 대교가 정말로 행복해하면서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 비화곡 시절에도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생생하게 살아 약동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이라는 거……!
“거짓말이었던 게… 다행이야.”
그래.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고… 그리고 고마웠다. 대교가… 이 시대에서라도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세계 속에 있어서… 나와 헤어진 후에도… 슬퍼하며 눈물 흘리고만 있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