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9-2화 : 만남.(2)
얼마 간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무대를 지켜보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공연이 전부 끝났을 때였다. 관중들은 무대 뒤로 물러난 대교를 연호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고 나 역시 좀 더 그런 기분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바램과 달리 빠르게 이성이란 놈을 되찾아야만 했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며 몽몽에게 확인했다.
<…하은이가 자리를 비웠다고?>
[그렇습니다. 조금 전 반대 편 출구로 나가셨습니다. 또한……]
<…도홍? 그 자가 나타난 것 같다고?>
[하은님이 나간 출구 너머로 뒷모습의 일부가 잡혔습니다. 분석 결과 해당 인물일 가능성이 80% 이상입니다.]
<젠장! 하은이 이 자식, 기어이……>
하은이 녀석에게는 대교가 라이벌처럼 느껴지고, 오늘처럼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좀 오버인가?) 사로잡고 있는 현장의 분위기가 오히려 더 분하고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각 상대를 해코지 할 정도로, 그 정도로 철이 없는 녀석은 아니라고 봤는데… 설마……
하은이 녀석은 우려했던 데로 무대 뒤쪽, 대교를 비롯해서 무대 위에 오르는 이들의 대기실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둘러 뒤를 쫓아가 보니 하은이 녀석은 이미 대기실 입구의 경호원들을 통과하고 있었다. 난 다급하게 녀석을 불렀지만 녀석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결국 대기실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녀석의 손에 들려있던 꽃다발… 그리고 함께 있던 문제의 도홍이 함께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다소는 안심이 되었지만… 아니, 잠깐. 꽃다발…?
하은이는 밖에 나가서 꽃다발 같은 걸 사 가지고 돌아올 틈이 없었다. 그렇다면……
“크라우드 가(家)의 아가씨를 일반 관객 중에서 본 것 같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는 설마 했는데……”
내 기색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뒤를 따라왔던 오삼숙이 믿기 어렵다는 듯 하는 말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내가 데려왔소.”
“뭐? 그럼 자네도 크라우드 가의……”
“아니, 난 그들과는 별 관계없소. 하은이… 그레이스 크라우드를 따로 알뿐이지.”
“자넨 정말… 정체가 무언가. 처음엔 단지 미쳤거나 여옥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젠 도무지……”
“그보다, 하은이 정도 신분이 되면 아무 때나 중요한 장소까지 무사 통과인 거요?”
내 지적에 오삼숙이 문득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DP가 아무리 우리의 가장 큰 스폰서라 해도 그런 예외는 있을 수 없지.”
쳇…! 역시 그런 건가? 몽몽은 아직 공식적인 문서상으로는 나오지 않았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전개일 거라는 예상을 했었다. 음… 그런데, 오삼숙도 왜인지 DP가 스폰서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입구를 지키던 수하들에게 ‘왜 같은 식구도 아니며 공연과 무관한 인물을 통과 시켰느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DP의 사람인 도홍에게 들으라는 듯 노골적인 목소리였지만, 정작 도홍은 별 관심 없다는 듯 그 쪽의 반응을 무시하며 내 앞으로 나섰다.
“생각보다 빨리 다시 뵙게 되었군요.”
“…그렇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아가씨는 단지 마스터의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서 들어 가셨을 뿐입니다.”
젠장…! 어떤 면에서는 그게 더 신경 쓰이는 상황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겨우 두 번째 만났을 뿐인 이자가 나와 대교의 관계, 내가 왜 이 곳에 있는 지까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불쾌했다. 나는 DP와 그에 관련된 자들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은데 말이다.
“…론이란 자는 어디에 있지?”
“론은 잠시 근신하도록 했습니다. 진유준님께 무례했던 일에는 마스터께서도 무척 화를 내셨습니다. 마스터께서는 조만간 직접 찾아 뵙고 사과를 드리겠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론이 내게 시비조로 나왔던 건 사실이지만, 그만한 일로 마스터가 직접 사과를 하시겠다…? 젠장, DP의 마스터란 대체 어떤 놈이야? 한 번 본적도 없는 놈이 왜 이렇게 친한 척을 하는 거지? 내가 단지 하은이의 친척 오빠라서…라고 하는 건 근거가 너무 약하다. 그리고 나는… 나는 또 왜… 나와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왕족 같은 자가 먼저 저 자세로 나와 주는데… 그게 또 왜 이렇게 불쾌한 걸까……?
“그 사과… 지금 당장 하는 건 어떤가,라고 전해줘.”
“아, 마스터께서는 지금……”
“여기 와 있을 거라는 거 알아.”
꽃다발 같은 거야 이 도홍이나 누구에게라도 준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조금 전 나도 모르게 그 얼굴도 모르는 녀석이 직접 대교에게 줄 꽃을 고르는 장면이 떠올랐었다. 아니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그리고… 난 그를 모르지만, 웬일인지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군.”
“과연… 두 분은 역시 서로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군요.”
이것 봐라…? 생각보다 순순히 두 가지를 다 인정하는군.
“오늘 일정에는 없었습니다만… 일단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도홍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나는… DP의 마스터가 날 아는 자라는 느낌이 들었을 때부터 두 가지로 생각해 보고 있었다.
첫 번째는 무림에서 날 만났던 인물 중의 한 명이 그때의 기억을 함께 지닌 채 환생했다는 가정. 이럴 경우… 원판이 아닌 날 알고 또 친했었던 천우신, 그 친구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되었다.
두 번째 역시 천우신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친구가 어떻게 든 나의 시간여행에 대해 알아내어 기록을 남겼고 그걸 본 누군가가 나나 몽몽의 힘이 필요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가정. 음… 두 번째 가정일 경우에는 아무래도 천이단… 현 G.M.의 간부일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소령이와 미령이 경우를 봤을 때, 추정 가능한 인물이 너무나 많다.
<몽몽. 전파 추적하고 있겠지?>
[…죄송합니다, 주인님. 통신의 암호체계와 중계 방식이 현존하는 그 어떤 기술과도 달라 분석에 시간이 걸립니다. 통화시간이 1분 이내일 경우 추적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
내가 놀랄 틈도 없이 도홍이 휴대폰을 끄고 고개를 저었다.
“으음- 죄송합니다. 마스터께서 오늘은 역시 곤란하다고 하십니다.”
이건 또 뭐야…! 하은이의 가방을 스캔할 수 없다고 했을 때까지는 단지 우연이라고 넘겼었지만 이젠 저런 핸드폰에까지 몽몽 수준의 추적을 막는 기술이 쓰였다는 거야?
<몽몽… 지금까지 네가 DP와 마스터에 관련된 정보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 것도 그렇고… 설마, DP라는 기업의 기술력이 널 능가한다는 거냐……?>
[…종합적으로 그런 결론을 도출할 정도의 기술력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DP가 최근까지 개발하여 발표한 기술들을 살펴보면 그중 몇몇이 분명 기초 과학 단계에서부터 시대별 과학 발달사에서 벗어난 것만은 사실로 추정됩니다. 또한… 본래 이 시대에서도 저의 일부 기능, 스캔 및 분석 같은 파트에 대처하기 위한 기술 구현은 가능합니다. 단, 이는 저의 기능들에 대한 원리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이며 알려진 과학기술 발달사에서 자연적으로 개발될 수 없는 기술입니다.]
이건… 최소한 DP에서 몽몽의 기능을 미리 알고 대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얘기잖아? 게다가 그게 가능하다는 건 DP의 마스터나 누군가가 시대를 초월한 과학지식의 보유자일지 모른다는 결론! 설마… 설마… 몽몽의 전 사용자였던 미래 여자 ‘진’, 당신… 또 뭔가 일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내가 모르는 사이 이 시대에 미래의 동료 과학자를 데려왔다가 떨구고 갔다거나… 혹은 그녀 본인이……
[주인님. 다행히 화이트 크라우드의 위치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그으-래?>
몽몽도 당장의 전파 추적은 힘들다 해도,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확대 도청할 수는 있다. 그리고 마스터 쪽의 송화음에서 미약하나마 하은이의 음성이 섞여 있는 걸 분리해 냈다는 것이다. 즉, 하은이를 통한 꽃다발부터가 페인트였던 거고 화이트 크라우드 녀석은 처음부터 대교와 함께 대기실에 있다는 얘기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곧 마스터께서 먼저……”
“됐어. 내가 직접 찾아가지.”
나는 도홍의 말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조심하십시오, 주인님!]
몽몽의 경고와 함께 나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도홍이 약간의 살기를 띤 채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자는… 신해식 콤비와는 다르다. 그 자들처럼 외공 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의 남자가 아니며, 어쩌면 내가 제 컨디션일 때도 상대하기 어려운 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왜’, ‘설마’, ‘혹시’ 같은 말과 생각만을 반복하고 싶지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으시죠. 마스터도 진유준님을 오랫동안 기다려 오셨습니다. 다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날 오랫동안 기다려…? 그리고 때는 또 뭔 때? 썅~! 이젠 뭐든 일일이 묻고 싶지도 않다.
“…나는 더 못 참아. 힘으로… 막아 볼 텐가?”
“이거 참…! 나답지 않게 이런 실수를……”
도홍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전화를 해서 마스터의 위치가 노출된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부디 그만둬 주십시오. 저도 론처럼… 마스터께서 항상 칭찬하시던 진유준님의 힘을 확인해 보고 싶은 호승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곳에서는 좀……”
도홍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대교의 경호원들과 정복 경찰들까지 우리 쪽을 힐끔거리는 것이 신경 쓰이긴 했다. 하지만 DP의 마스터인지 뭔지가 정말 날 속이고 저 안에서 대교를 만나고 있는 거라면……
<몽몽. 금동이는 확실하게 불렀지.>
[예. 11초 후에 주인님의 정글도를 가지고 도착 예정입니다.]
나는 슬며시 보법을 밟아 도홍과의 거리 및 각도를 조절했고, 도홍도 그에 대응하여 조금 위치를 변경한다.
11초라… 그때까지는 어찌 버틸 수 있으려나? 아니면 또 적당히 말로 시간을 끌어 봐…? 아니… 아니다. 나는 지금보다 더 극한 상황에서 지하무림의 개떼 러시에도 버틴 몸이다. 정글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고 어차피 현 시대에서는 지금처럼 정글도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장소가 많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눈앞의 적을 회피할 수는… 응…? 뭐, 뭐야! 마군황 시험 때도 아닌데 웬 개떼 러시가 또…
쳇~! 대교의 팬들일 텐데 개떼라고 표현하는 건 미안하고… 하여간 무지하게 많은 인간들이 조금 전 내가 지나왔던 복도 저편에서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대교의 경호원들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대치 상태인 나와 도홍을 보며 어찌할까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곧 우리를 통과해 지나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의 몸에 시야가 가려지는 순간, 도홍의 손이 경호원의 목 뒤를 통과해 내 쪽으로 독사처럼 뻗어왔다.
나 역시 반사적으로 마주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1초? 아니, 영점 몇 초…? 나는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 세 번의 공격을 받고 한 번의 반격을 했다. 우리 사이를 통과해 갔던 경호원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어쩐지 섬뜩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매만져 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공방이 자신의 몸 바로 몇 밀리 옆을 몇 번이나 지나쳐 갔는지,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의아해하면서도 결국 다시 걸음을 옮겨 다른 동료들처럼 우리로부터 몇 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의 복도에서 몸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팬들을 막기 시작했다.
대교의 팬들처럼 이쪽을 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도 조금 전 나와 도홍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제대로 목격한 자는 없는 것 같았다. 혹은… 대교가 아닌 우리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려나?
나와 도홍 역시 바로 옆의 소란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얼마간 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홍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를 매만져 약간 스친 상처를 매만져 보았다.
“놀랍군요. 진유준님이 본래의 컨디션이 아니신 것 같아 다소 방심했다고는 해도… 설마 저의 스피드를 능가할 줄이야…”
나는 도홍처럼 눈으로 확인되는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날을 막아냈던 양손의 손목과 수도 부위가 불에 대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거렸다.
“…칭찬은 고맙지만 스피드는 그 쪽이 한 수위였어. 난 그저 어디로 들어올지 미리 알았을 뿐.”
“과연…! 그것이 무술의 오의(奧義)를 깨달은 이의 진정한 능력인 거로군요.”
“그런 거창한 게 아니야. 음… 그보다, 당신 쪽의 비인간적인 움직임은 대체 뭐지? 그 론이란 자의 괴력이나 스피드도 그렇고, 대체 어떻게 단련하면 당신들처럼 될 수가 있는 거지?”
“후후… 떠보시는 건가요? 하지만 어차피 당신께는 특별히 숨길 생각도 없었습니다.”
도홍은 지금까지도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더욱 목소리를 죽여 입 모양만으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생체… 강화… 전사…?
하긴, 만약 DP에 몽몽 수준의 미래 과학지식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런 SF적인 일도 우습게… 아, 잠깐. SF…? 전에 하은이가 이들을 SF 뭐라고 불렀었다. SF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니셜이 더 붙는 것 같았는데…
“SF…”
나는 또 역시 ‘떠보기’ 위해 작게 중얼거려 보았다. 도홍은 조금 놀라는 것도 같았으나 이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그레이스 아가씨와 함께 계셨었다는 걸 깜박했습니다. 아가씨께선 본래 입이 무거운 분이건만…”
“…솔직히 끝까지 못 들었어. 그런데… 아니, 아니. 또 변죽만 울리는 얘기로 빠지려고 하는 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궁금증이 모두 풀리려면 결국 DP의 마스터… 화이트 크라우드를 직접 만나는 게 가장 빠를 것 같아.”
도홍은 주변의 상황, 대교의 팬들이 우리들 너머의 출구가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사인지를 흔들어 대고 있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새삼 살피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하는 수 없군요. 더 이상 했다가는 사람들 앞에서 험한 장면을 연출하게 될 테고… 오늘 이곳에서 성공적인 한국 데뷔 무대를 가진 주가혜님께 누가 될 테니 말입니다.”
윽-! 흥분해서 그만 그걸 잊고 있었다. 맙소사…! 대교의 일을 내 손으로 망치려 들었다니… 내가 잠시 미쳤었나 보다. 대교가 정체불명의 DP 마스터, 화이트 크라우드 녀석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경 쓰여서 그만…
“나, 나도 그런 건 원치 않아.”
나는 결국 무지하게 민망한 기분이 되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민망한 건 민망한 거고, 이미 막 나가던 발길을 멈출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도홍을 뒤로하고 대기실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이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 순간 그쪽에서 먼저 벌컥 문이 열리더니만 대교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밖으로 나왔다.
아- 하고, 날 발견하는 순간 그녀가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 곧 내게서 시선을 거둔 대교는 옆으로 비켜 길을 터준 날 지나쳐 팬들 앞으로 나섰다.
“죄송해요! 사인이나… 다른 시간은 두 번째 날인 내일 가지도록 해요!”
약간의 이국적인 발음이 섞이긴 했지만, 다른 외국 스타들에 비해 너무나 또렷하고 자연스러운 한국어였다. 게다가 통역 없이도 한국어로 소리치는 누군가의 말을 알아들어 간단하게 답변을 해주고… 그런 모습이 더욱 좋은 어필로 작용했는지, 몇 번이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는 대교에게 무대에서만큼이나 커다란 환호가 뒤따랐다.
복도 옆으로 난 비상구로 사라지기 직전, 대교는 다시 한 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내게만은 뭔가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과 눈빛이라고 느끼는 건… 단지 나만의 착각일까?
“흐음-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군. 그녀의 시선이 현재 누굴 쫓고 있는 것인지……”
나는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때문에 재빨리 몸을 돌려보았다.
거울…? 문에 거울이 있었나?
순간적으로 비화곡에서 거울을 보던 때로 돌아간 듯 한 착각에 빠져야 했다. 그러나 내 뒤에 서 있는 자는 비화곡 시절의 내가 아니라, 백색의 차이나 풍 정장을 입고 있는 하은이 녀석이었다.
이 녀석, 사람 놀라게 왜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난… 어…? 아니…야? 하은이도 아니야? 키도 느낌도 틀려…! 그럼 내가 방금 착각했던 건 착각이 아니라……
몽몽이 다급하게 뭐라 보고를 하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건 없었다. 내 머리 속은 그 동안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던 퍼즐의 조각들이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 끼워 맞춰지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이트… 유난히 새하얀 백색을 아끼고 좋아하던 아이… 그림처럼 빼어난 용모에도 불구하고 고향 땅에서는 백마동(白魔童)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소년… 성장해서 역시 남자이면서도 아름답다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는… 그러나 천하마인들의 종주 비화곡의 주인이며 강호에 이는 혈풍의 근원… 화산파의 화산일검(華山一劍)을 비롯하여 무수한 강호인들이 저주와 함께 토해내던 이름… 진·하·운·. 그 마지막 자 운(雲)… 크라우드… 그랬던 거냐, 화이트 W 크라우드…!
네가 바로 비화곡의 주인 독각와룡…! 극악서생… 진하운… 너였던 거냐?
“저, 정말… 너…냐, 원판……?”
나는 어쩔 수 없이 떨리는 음성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런 내게 녀석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쳐 특유의 섬뜩한 미소가 떠오른 입가를 가려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부채에 그려진 선혈처럼 붉은 부처상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최악 중의 최악… 내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녀석이 내가 가장 바라지 않은 형태로 나타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