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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1화 : 침몰


1 침몰

“오호~”

엘은 먼 하늘 위의 존재처럼 여유롭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자네도 대교 양처럼 미지의 인체에너지. 즉, 근원진기(根源珍氣)라는 걸 쓰려는 모양이군. 하긴, 그저 어린 소녀에 불과한 줄 알았던 대교 양도 날 꽤 놀라게 해주었었으니 진유준이란 남자의 근원진기는 대체 어느 정도인지 기대가 되는 걸?”

엘의 음성에 묻어 있는 웃음기.

“…사실 우린 보통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지던 소위 기(氣)의 정체를 과학적으로 측정하고 분석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이미 완성했다네. 개발진의 핵 심인 닥터 제이가 특히 흥미를 보였던 건 인간의 뇌파 방사 패턴, 예를 들어 지금의 자네처럼 인간이 극도로 분노했을 때의 뇌파와 에너지 질량 변화 의 물리학적 예외성의………….”

엘이 말을 멈춘 것은 스피커에 찌칙하고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벌써 이 기지의 유선망에까지 영향을…….?”

-췩! 취익!

“뭐야? 이렇게 급속도로 증가하는 에너지는, 이건 오차 범위를 벗어나는…………….”

엘은 비로소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웃음소리를 먼저 앞세웠다.

“하핫! 이거, 이거 – 과연 진유준! 닥터 제이와 하운 군이 반한 것도 이해가 되는 걸? 하하하~ 아… 그런데 말이지.”

문득 정색을 하는 엘.

“나는 그 친구들과 달리 불확실성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놈이 있는 방향의 공간 너머에서 무언가 거대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 막 감지되기 시작했음에도 너무나 확연한 건, 이미 천 년 전 소 림(小林)의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陳)조차 가볍게 능가하는 거대 에너지의 장벽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떤가? 기계로 만드는 ‘인공의 기라서 인간이 발산하는 기에 비해 파장이 단순한 것 같지? 하지만 그 대신 인간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규모의 출력이 가능하다네. 자네가 아무리 더 애써 잠재능력을 끄집어낸다 해도 소용없다는 얘기야.”

…놈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 뭔가 더 끄집어 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지파멸식(天地破滅式)…제1식, 답지(踏地).

“땅을 딛고 서서…………….”

“…뭐?”

내 발이 딛고 있는 지면 아래로부터 쿠오오- 하는 울림이 음침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제2식, 식천(天).

“하늘을 먹어 치운다.”

그래. 난 오히려 억눌러 참고 있었다.

“…외부 유입? 대체 무슨 소리야?”

엘은 내가 아닌 자신의 수하들에게 묻기 시작한 것 같았다.

“뭐야? 진유준으로부터 파생되는 에너지가 아니란 말야?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이런・・・ 응? 자, 잠깐! 3만? 이 화면・・・ 고장인가?”

엘의 음성에서 내려다보는 자의 여유가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4, 4만? 증가 속도 75BP……? 이, 무슨! 뭐 하는 거냐! 출처가 대체 어디인 거야?”

엘의 고함 소리는 다시 그의 수하들에게 향한 것이겠지만, 누구도 대답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몽몽이었다면… 아마도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 주었겠지만 말이다.

「…이 천지파멸식이라 칭해진 무공 심법의 구성 목적을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에너지의 무제한 흡수입니다. 해당 에너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 즉 지구단위의 행성 에너지를 의미 하며 이론상 대상 에너지의 출처는 지구 외의 공간까지 확대될 수 있습니다.」

“핫~! 이 무능한 놈들 같으니!그럼 이거라도 대답해 주겠나? 지금 실체화 되고 있는 저 에너지………! 진유준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불꽃? 아, 아니 드래곤………? 너희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나…………?”

찌-이-익~!

지하기지의 스피커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면서 엘의 음성까지 묻혀 버렸다.

제3식・・・ 멸(減).

“모든 것을 큭!”

나는 열던 입을 닫으며 간신히 선혈 한 모금을 삼켜야 했다.

이, 이제 겨우 시작인데… 이게.. 이런 게 싫어서… 크, 훗! 큭! 큭!

아니, 그게 아니지, 진유준!

이제 와서! 아직까지도 내게 그런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 있을 리가 없잖은가…………!

통제할 수 있는 힘…………?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그녀를… 대교를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나는 천천히 정글도를 위로 치켜들었다.

제3식을 시전하기 위해서 …? 아니, 천지파멸식에는 본래 초식이란 게 없다. 연옥서생 사부가 간단하게나마 칭해 놓은 건 단지 ‘밀어날 현상을 추 측하여 나열’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엘.”

나는 놈을 부르며 정글도를 내리쳤고, 그와 함께 검은 용이 포효했다.

2오-

내 앞의 벽과 함께 적의 에너지 장벽・・・ 아니, 모든 것이 상하로 잘려 갈라졌다. 마치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을 종이와 함께 면도날로 그어 버린 듯 이.

나는 중앙이 소멸되어 커튼처럼 벌어진 공간의 저 너머를 향해 물었다.

“네놈, 거기 있는 거… 맞지?”

“이, 이런……”

엘은 대답 대신 혼자 중일거리고 있었다.

“내가, 진유준을… 아니 뭔가 말도 안되는 걸 깨워 버린 것인가?”

나는 엘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반으로 잘라 전시한 건물 모형처럼 단면을 드러낸 지하기지의 곳곳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지진? 이건 마치 칼로 자른 것 같잖아!”

“잘랐다고? 이 지하 전체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엘님의 대피 루트를 확보해!”

“엘님이 대피?”

“엘님의 대피 시간을 확보하라!”

“자신의 기지에서 대피해야 한다고? 엘님이?”

“닥쳐! 적을! 진유준을 막아라!”

나는 다시 정글도를 들어 스윽 옆으로 그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나의 정글도가 이번엔 조금 좁은, 1미터 정도 넓이의 수평 공간을 지워 버렸다.

콰륵! 꽝! 콰직!

사라진 공간 위쪽의 흙과 바위가, 섬 전체가 내려앉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안개 같은 흙먼지 속에서 인간들의 비명소리도 아름답게 피어오 르고 있었다.

“마, 막아!”

“크아악!”

…알게 뭐냐. 가로막는 것들이 사람인지 기계인지 알게 뭐냐.

나는 계속 아무렇지도 않게 정글도를 휘둘러 눈앞의 인간들을 학살하고 지하공간을 파괴하며 나아갔다.

“이게・・・ 진・・・유…준? 아, 악마!”

아직 채 숨이 끊기지 않은 누군가가 그렇게 탄식했다.

역시 이랬어야 했던 걸까? 진작에 악마가 되었다면, 진작에 신을 물어뜯는 악마가 되었다면… 그랬다면 대교를 잃지 않아도 되었을까………? “큽.”

나는 주춤, 걸음을 멈추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갑자기 몸속의 내장이 동시에 뒤집히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왔기 때문이었다.

“곡!”

내 몸은 고압전선을 맨 손으로 만진 것처럼 제멋대로 퉁겨지고 활처럼 뒤로 휘었다.

이, 이건… 신의, 타임 씨의 대답인가…………? 이런 힘은 나 갈은 놈에게 당치도 않은 것이라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주인님!」

몽몽이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말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해당 심법의 발동으로 주인님의 의도에 부합하는 규모의 에너지 획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주인님께서 그런 초고용량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 아니, 감히 장담합니다.」

아아- 그래. 그랬었지. 몽몽도 녀석답지 않게 인간적인 감정을 담은 말투로 ‘장담’ 했었지.

「불가능합니다.」

“끄윽! 꼭! 끄으으으

혈관 줄기 줄기마다 시퍼런 불길이 달리며 세포 하나하나가 지글지글 태워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만… 몽몽! 대교는… 더 뜨거웠을 거야. 이보다… 몇 배는 더…………!

내 몸은 그녀가 겪었을 고통이 내게도 옴에 환회한다. 내 영혼은 그녀를 앗아간 하늘을 저주한다. 신에 대한 분노를 태운다. 증오를 씹는다. 나는, 나의 정글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

나는 고개를 세우고 입을 열어 놈을 불렀다. 그러나 신을 자처, 하는 자로부터의 대답은 궁색했다.

…빛! 신처럼 눈부시고 지옥처럼 강렬한 광선!

나는 압도적으로 가득 나를 덥쳐오는 빛을 향해 정글도를 내리쳤다.

쩌억!

빛의 장벽이 단숨에 좌우로 갈라지며 덧없는 비명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사라진 빛 너머의 어두운 지하통로에 처음 보는 거대 기계장치가 치직 불 꽃을 일으키며 위태하게 서 있었다.

“지, 지져스~!”

기계장치 옆에 서 있는 누군가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일억 CW 출력의 SP광선을 카, 칼로, 자, 잘라…………? 나, 나, 나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따닥따닥 위아래 이를 부딪치기 시작한 낯선 사내 따위 알게 뭐냐. 그의 등 뒤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신을 자처하는 자, 엘이 달아나며 내는 소리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

나는 다시 엘을 향해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서서히 고통이 멀어지며 뜨거움만이 더해지고 있었다.

“…엘. 세제의 지배자. 12인의 사도께서 도망치는 거냐? 자신의 발로… 그렇게 헐떡이며 꼴사납게!”

나의 비웃음에도 엘온 고개조차 돌려보지 못했다.

“뭐, 뭐하는 거냐?”

고함을 지르는 엘의 음성에 언제부터인가 비현실적인 울림이 섞이고 있었다.

ᅳ당장 발사해 ! 뭐든 전부! 당장!

마치 전음(傳). 아니, 깊은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소리뿐 아니라 보이는 것까지 TV화면처럼 현실감이 사라져간다.

-・・・ 내 안전? 이게 내 안전을 위한 거다!

다시 뭔가, 로켓포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내가 정글도를 휘두르기도 전에 파괴되거 나 소멸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땅을 발로 딛고 있지 않았다.

…빨리 그걸 준비하란 말야! …승인? 닥쳐! 나 엘 크래프트의 명령이란 말이다!

엘은 손에 들고 있던 무선장비 같은 걸 땅바닥에 팽개쳤다. 놈이 용케 도착한 지점에는 소형 헬기가 이미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 위로 열려진 출입구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멍청한놈들! 아, 아니 믿을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 인가?

다급하게 떠오르는 헬기 난간을 쥐고 선 엘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미 당당함도 고고함도 사라진 그의 눈동자가 비로소 나를 향해 왔 다.

-이, 이젠 아예 보이지도 않는군. 진유준…………! 먹혀버린 거냐? 너 자신이 부른 어떤 에너지! 지옥에서 소환한 악마의 힘에?

어느 사이 놈의 눈에는 내가 아닌 무언가만 보이는 모양이다.

“…아니.”

나는 서서히 놈의 헬기를 쫓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먹어치운 거야.”

사실이다. 결국에는 내가 오히려 잡아먹힐지라도 아직은 아니다.

놈이 탄 헬기는 순식간에 지하를 탈출해 뛰쳐나갔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놈의 헬기는 드넓게 펼쳐진 하늘 어디로도 달아나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키잉 키잉 울부짖을 수 있을 뿐이었다.

-인간이 만든 초라한 금속 날개를 붙잡은 건・・・ 검은 불꽃의 용・・・ 아니, 위대한 정령 크투가…인가?

엘은 헬기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허공을 걸어 놈의 앞에 섰다.

-그리고… 얼어붙은 대기의 이타쿠아를 밟고 내게 다가온 그대는……………

처음으로 가까이, 그리고 같은 선상에 서서 내려다본 엘은 그저 창백하고 초췌해진 몰골의 한 남자일 뿐이었다.

-그 불경하고 무한한 혼돈의 힘을 부를 수 있는 자였던 건가? 무리 절망의 밑바닥에서 중오를 불태운다 해도 애초에 자격이 없는 자였다면 불 가능한… 그러니까 그대는……………

이 자는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아니!아니지!

엘은 미구 고개를 저으며 뭔가를 부정하더니 곧바로 비죽이 광기 어린 미소를 떠올렸다.

-진유준! 자네가 위대한 존재의 종자라고 판단하는 건 아직 일러! 이제 곧 내가 그걸 확인해 주겠어!

“…됐어. 그냥 죽어.”

놈의 헛소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기에. 나는 정글도를 들어올렸다.

-날 죽이겠다고? 영혼을 팔아 완벽한 미래를 획득한 나를? 이런 힘을 부릴 수 있는 지금의 나를?

놈이 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빛? 아까와 같은 단파장 플라즈마라는 광선의 아니, 다르다!

ㅇㅇㅇㅇㅇ ~

내 머리 속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괴음과 함께 하늘로부터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태양처럼 압도적인 빛의 강습이었다.

콰아아아아악-!

빛의, 태양의 직격!

ᅳ…중상…입자…빔…………!

엘의 음성과 함께 놈의 모습까지도 순식간에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떨어진다? 힘에 밀렸다?

꽈아앙-!

나는 날아올랐었던 지하로 다시 추락했고 그대로 깊숙이 처박혀 버렸다. 그토록 절대적인 것만 같았던 천지파멸식의 기운도 이 빌어먹을 빛의 힘 에 간신히 견디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끓어오른다? 진동하며… 파괴 된다…………? 내 몸이…………? 내 피부가…………? 내 뼈가? 내 세포가? 끄, 끝. ..? 이, 이렇게… 끝…………? 끝? 끝이라 고?…핫!

나는 웃었다.

웃・기 • 지 • 마…………!

제멋대로 시작한 자들이… 제멋대로 끝을 내겠다고…………? 누구마음대로·

응?

‘누구 마음대로 끝을 내겠다는 거냐!’

나는 울부짖었다. 짐승처럼.

‘잘들어! 엘! 12인의 사도! 너희들 전부! 잘 들으란 말이다! 끝은 내가 결정한다! 너희들, 더러운 늙은이들이 아니라! 이 내가!’

연옥서생 사부도 정의하지 못했으며 몽몽조차 계산할 수 없었던 암혹이 다시금 내게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미 터질 듯이 가득했던 단전 에서 그 위로, 또 더 위로 넘쳐 올라 기어이 내 머리까지 충만했을 때,

촤아악-

커튼이 걷히듯 눈앞의 공간이 열리고 있었다.

보인다! 저 까마득한 하늘 너머・・・ 이 짜증나는 빛을 내게 쏘아대고 있는 놈들의 기계 인공위성이!

‘월광절화결(月光切花決)… 청섬백(靑纖魄)!’

스윽-

검은 청섬백이 날았다.

본래 천지파멸식은 무공이 아니다.

술(術)도, 도(道)도 아니다. 단지 파괴하기 위한, 절망하기 위한.. 말도 안 되는 혈도를 개통하고 그 고통에 몸부림쳐도 아무런 자긍심을 가질 수 없 는… 그저 힘을 갈망하는 광기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나의 월광절화결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파렴치하다.

암담하게 짓누르고 있던 장막을 흑섬백(黑纖魄)은 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가르고 날았다.

스걱.

그런 소리가 들렸다.

츠칵! 꽝!꽈앙!

잘려진 인공위성이 허무한 굉음과 함께 불꽃에 휩싸였다가 먼지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저 먼 지구 밖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게 들리고 보이 고 있는 것이다.

…뭐? 설마저 입자빔에도…………

이미 수십 키로 밖으로 멀어졌던 헬기 속의 엘이 입을 벌려 흘리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나는 지금 놈의 앞에 있다.

ᅳ워, 워프? 넌 진짜 그……………

쿠욱.

조잘조잘 시끄러운 엘의 입에 정글도를 박아 넣었다. 이미 칼이되 칼이 아닌 내 정글도에 엘은 추한 비명과 함께 사라져 갔다.

“이제 한 놈!”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 사이 주변의 풍경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투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어떤 색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속에 나 혼자 서 있는 것이다.

드디어… 내가 끌어들인 힘에 내가 먹혀 버린 것인가…………? 하지만, 알게 뭐냐!

“다음은 누구냐! 응?”

나는 다시 정글도를 들어 아무렇게나 그었다.

추왁-

무한 공간의 한켠이 잘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잘려진 틈바구니로 현실의 공간이 보였다. 극히 일부였지만 낯선 얼굴의 한 늙은이가 앉아 있는… 어떤 건물 속 같았다.

“너냐?”

다시 정글도를 그었고, 또 다른 늙은이가 놀라는 모습을 보았다.

“너냐?”

아무렇게나 마구 정글도를 그을 때마다 그만큼 드러난 공간 속에 더 많은 자들이 있었다.

“응? 누구냐! 다음은?”

나는 다시 정글도를 머리위로 치켜올렸다. 억지로 잘려 벌어졌던 공간이 순식간에 복원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나는 웃는다.

“12인의 사도 너희들도 웃을 수 있냐? 응? 내 앞에서 웃을 수 있냐고!”

나는 닥치는 대로 정글도를 그었다. 다시 여기저기의 공간이 잘려 갈라지며 저 아득한 거리의 사도들이 경악하고 탄식하는 모습이, 저마다의 소굴 에서 달아나려고 발버둥치는 추태가 잡힐 듯이 보인다.

“이런 걸 바랬나? 응? 내가 미쳐 버리는 꼴 보고 싶었냐고!”

공간이 잘리고 그 너머가 잘린다. 파괴된다.

“죽인다! 전부! 죽어 버려! 전부!”

죽인다! 파괴한다! 멸한다!

그런 생각만이 절대적으로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인다………….? 아니, 느껴졌다. 어딘가 있다는 분명한 존재감. 그… 타임 씨가! 신?

시간?

뭐라도 좋다! 나는 당신까지 물어뜯을 테니까! 당신까지 죽여 버리고 말 테니까! 이 모든 일들이 당신 때문이니까! 죽여 버리겠어! 반드시 죽여 버 리겠어! 신을 죽여 버리겠어!

나는 원초적 증오와 함께 더더욱 미쳐가고 있었다.

죽어라! 전부! 12인의 사도! 시간! 신! 전부 죽이겠어! 전부 죽인다! 전부 죽인다! 멸망하는 거다! 다 같이!

‘…그만.’

뭐?

‘그만 진정하세요.’

· · · 대 · · ·교1 · · · · · · ?

‘제 목소리가 들릴 거라는 거 알아요.’

‘환・・・청?’

‘이렇게 무서운 혼돈의 공간 속에서도 당신이니까. 대교가 당신에게 말하는 거니까.’

‘환청이… 아니야?’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일그러져 소용돌이치고 있는 이 멸망의 공간…………! 그 너머로… 분명히 대교가 느껴지고 있었다. ‘저, 정말… 너냐, 대교?’

이제 거의 남지 않은 나 자신의 의지로 간신히 이 절망의 공간 너머를 보았을 때, 거기에는 분명히 대교가 있었다. 분명한 현실의… 대교의… 영혼 이.

‘화나신 거 알아요. 하지만……..

‘아아- 대교. 대교야.’

‘부탁드렸잖아요. 이번에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주시기를..

‘하.지.만……’

‘알아요. 너무나 힘들고 너무나 아프시다는 거. 알아요. 너무나 외롭다는 거. 너무나 잘 알아요.’

‘그래 대교야 힘들다. 네가 없어서. 힘들다. 널 만질 수가 없어서. 힘들다. 네 체온을 느낄 수가 없어서.’

‘그렇지만… 모두 없애버리면 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곳도 없어요.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당신 자신도.’

…그래. 그렇, 군. 하지만・・・ 대교야. 이미 늦은 거 같아.’

나는 이미 정글도를 멈춘 상태였다. 그러나 이미 이 공간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 때문에 잘려졌던 부분을 스스로 메우며 복구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파괴한다고 했던 건 이 공간 밖의 세계다.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이 공간자체…………! 즉, 나는 내가 부른 에너지에 먹힌 채… 그래도 지배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네가 내 곁을 떠나고 내가 천지파멸식을 발동했을 때. 이미 파멸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었어. 다만, 나는 끝까지 내 의지로 하고 싶었을 뿐.’

그러나 대교의 영혼을 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지배의 끈을 놓았다. 그러자 곧바로 이 공간, 끝을 알 수 없는 힘의 집합체가 스스로 움직이 기 시작했다. 스스로 더 많은 에너지를 끌어 모으고 있는 것이다.

…느껴져. 이 녀석들은 의지도 뭔가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야. 그냥 흘러 들어오고 있는 거지. 물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것처럼… 나라는 구멍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는 거지. 그리고… 탱크가 차고 넘쳤을 때는… 그때야말로 ‘천지파멸’이겠지.’

몽몽이었다면 좀 더 확실하게 설명해 줄 수 있었겠지만… 나로서는 그 정도로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하아-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고… 이어 피식 웃고 말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의 미칠 듯한 증오와 광기가 이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허무하기까지 했다. 단지 저 녀석을 다시 봤다는 것만으로 말이다.

‘…대교.’

힘의 흐름을 억지로 통제하려는 뜻을 버리자 오히려 대교에게 말을(혹은 의식?) 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래 봐야 불과 몇십 초 정도가 한계겠 지만 말이다.

‘고맙다. 날 멈춰줘서.’

간절히 바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다.

「…고밀도화 된 대량의 에너지는 소형 블랙할(Black Hole)을 형성할 가능성도 있으며…그 단계에까지 이르기 전에 ‘집합지’이자 ‘통로’인 인체 가 견대지 못하고 붕괴할 경우에도 블랙홀 화의 지속적인 진행 가능성도 50%이상입니다.

몽몽이 이렇게 말했을 때도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진짜 멸망할지 모른다. 대교가 말한대로 우리 집, 우리 동네, 우리나라까지 삼켜져 버릴지 모른다.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진짜로. 그것도 나 때문에…………? 그럴 순

없지!

…대교. 미안하다. 조금 더 기다려 줄 수 있겠지? 그 어디에서든 네게 돌아올게. 반드시!’

이미 내 능력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통로를 닫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붕괴. 즉, 죽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몽몽이 말한 ‘지속적인 진행’을 막 기 위해서는 내 영혼이 모든 영력을 동원해서 이 끔찍한 에너지의 집합체를 다른 차원이든 어디로든 이끌어야 한다.

이런 방법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다니. 이 힘에 의해 눈뜬, 소위 ‘만개한 챠크라(chakra)’ 때문인 걸까…………?

최후의 방법을 실행할 결심을 하면서도 나는 대교에게 웃어보일 수 있었다. 난 기어이 다시 이 세계와 대교에게 돌아올 테니까. 난, 그녀의 진유준 이니까.

‘안 돼요! 그 방법으론!’

내 뜻을 알아챈 대교가 다급하게 외쳤다.

‘당신은 이미 다른 방법을 알고 있어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올바른 방법을!’

‘무슨・・・ 소리지? 방법? 막역한 정신력 같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 게다가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제가… 도울게요.

대교로부터 뭔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무공구결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엄숙한 노래와도 같은…무공 아닌 무공이며 불 경(佛經)이 아니며 불경이었다.

아아- 그랬었구나! 그 사람은… 알고 있었구나. 나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었구나!

저 소림사의 최고 고승이면서 스스로를 금역에 가둔 묘선(善)대사. 그는 나를 ‘재앙’이라고 말했었다. 해탈한 고승다운 예지력이 발휘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지금 대교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역근경의 구결은……………

뒷부분이 더 있었어? 그래서 몽몽도 이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의 비밀을 풀지 못했었던 건가…………?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인데도 이런… 이렇게 완벽한… 천지파멸식만을 위한 구결이 된다…………….?

소위 챠크라가 만개한 상태여서인지, 내 머리 속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새로운 구결이 완성되고 있었다. 그리 고・・・ 실행했다.

“커헉!”

쉽지는 않았다. 당연히.

“끄으으으~”

지금까지 모여진 거대한 기운, 초고밀도화 된 에너지가 모일 때보다도 빠르게 폭풍처럼 하단전을 밀어붙이며 중단전을 뚫고 상단전의 문을 날리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본래 왔던 곳으로,

“커어어어어어-.”

새로운 구결의 오묘한 작용으로 이 어마어마한 기의 폭풍이 내 몸을 빠져나가는 것까지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어어어어어어어-.”

이제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처음 천지파멸식을 발동하고 받아들일 때의 고통과도 차원이 달랐다. 고통을 환희로 느끼게 만들었던 분노 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몰랐다. 순식간에 고통이 내 인식의 영역을 넘어 아예 느끼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점점 멀어져 가는 의식.

…대교. 대교야. 곧・・・ 곧 갈게. 조금만… 잠시만 기다려 줘. 곧 가서… 너를 만나고… 너를 안고… 너와 함께 걷고… 이제 다시는 다시는 네 손을 놓지 않을게. 그러니까 대교. 잠시만..잠시만 더 기다려 줘.

잠시만을 몇 번이나 되뇌었을까.

흐려진 눈동자 속으로도 서서히 무채색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썰물이 빠르게 물러나는 고속 필름을 보는 것처럼 본래의 하늘이 자 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영롱한 보석을 흩뿌린 것 같은 별들이 빛나는…너무나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이제 갈 수 있겠구나.

나는 안도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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