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15화 : 심무도의 후계자
5. 심무도의 후계자
흑주와 정체불명 아저씨의 전음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조금 전 흑주가 흥분했을 때의 살기에 놀라 울음보를 터트렸던 아이들이 손을 들어 흑주 를 가리켰다.
그러나 아이들을 달래던 부모들이 고개를 돌려 보았을 때는 이미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흑주 녀석…………!
나도 자칫 방심했으면 놓쳤을지도 모를 정도로 교묘한 움직임이었어. 분명 나나 대교의 경공만큼 빠른 건 아닌데도 마치 바람에 날리는 풀잎을 보 고 있는 것처럼 특별히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슬며시 사라지는… 음. 저 녀석의 자연체 은신술(隱身術)은 나도 좀 배워 보고 싶은데 말야.
초고난이도 은신술을 선보인 흑주의 뒷모습은 실상 이제 막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중간쯤에 있을 뿐이었다.
「따라와.」
「어, 땡쓰」
흑주를 따라가며 더더욱 에스 아저씨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었다. 흑주의 내공은 내가 보기에 아직 혼자 전음을 익혔을 정도가 못된 다. 그러니까 흑주에게 ‘전음의 길을 열어준’ 사부의 내공은 최소한 우리 지하무림 일백마군(一百魔君) 중에서도 수장 격인 ‘구양대주’ 수준은 된다 는 얘기다.
거기에 흑주가 선보인 은신술, 각종 사격술 같은 것까지 가르친 거라면 이건 사영에 버금갈 정도의 살수 출신이라는 얘기……………! 으음… 우리나라 에도 일본의 닌자(忍)처럼 전문 살수가 있었던가…………?
…훗! 그러고 보니까 내 머리 속에서는 일찌감치 에스 아저씨를 우리나라 사람, 즉 천년 전의 ‘고려무사 신정안’이 환생한 사람으로 결정(?)해 버린 것 같군. 여러 가지 정황상 당연한 추측이기는 한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흑주의 뒤를 따라 병실로 들어섰다.
1인 독실…이나마나, 환자가 없다?
-주인님!
짧은 상황 파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줄기로 차가운 한기가 달렸다.
피잇~!
익!
본능적으로 상체를 틀며 젖히는 동작이 영점 몇 초만 늦었다면, 내 목의 급소에 치명적인 칼집이 났을 터였다. 나와 대교는 즉각적인 공공보법으로 신형을 날려 기습자로부터 거리를 벌려야했다.
팟!
그 와중에 쏘아진 대교의 섬광분소지(問光分小)가 환자복을 입고 있는 기습자 손에 들린 작은칼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당신!”
나도 이미 정글도를 잡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더 이상의 싸움이 이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환자복의 남자는 대교의 섬광분소지에 적중되어 날이 사 라진 칼의 손잡이를 한 번 힐끔 보더니 다시 우리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흠. 과연 우리 흑주가 놀라 도망쳐 올 정도로 엄청난 고수였군.”
“아냐, 흑주, 아냐.”
‘놀라 도망쳐 온것이 아니라고 항의하는 흑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저 모습은.. 으으음~ 모르겠다. 일단 용모는 천년 전과 전혀 달 라.
“몽몽.”
-죄송합니다, 주인님. 코드명 ‘고려무사 신정안’은 접촉 당시의 특수 위기 상황 때문에 영체 데이터를 수집해 놓지 못했습니다.
“에? 그랬냐?”
그러고 보니 그 당시 낙룡파落龍技)에서 신정안을 만났을 때는 내가 사갈서생 새끼한테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저 새끼 죽이고 나도 죽자’로 막가 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몽몽을 칼 모양으로 변화시켜서 사갈을 찔러 버리기까지 했으니 몽몽도 데이터 수집할 경황이 없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환자복의 남자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조차 흑주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건만. 당신들은 첫 만남에서 흑주와 긴 대화까지 나눌 수 있었다는 점이야.”
‘긴 대화’라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저 남자의 ‘진심으로 심각한 표정을 보니, 흑주 녀석은 이 시대에서도 끔찍하게 말을 아끼는 스타일인 모 양이다.
“이제 당신들의 정체에 대해서 물어도 될까?”
…쳇. 내게 기습을 해올 때도 그랬듯, 여전히 한 점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군.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섬뜩해.
나는 상대가 흑주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과 정말 중환자일지 모른다는 사실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우리의 정체에 대해서는 자세히 얘기하려면 상당히 길어집니다.”
길기도 긴 얘기고, 전생 환생 얘기를 납득시키는 건 더 힘들 테지.
“일단, 나 진유준이 현재 캔들 리의 최고 참모격인 천・・・ 더블엠 천의 절친한 친구라는 것과, 여기 이 대교의 여동생이 곧 더블엠 천과 맺어질 사이 라는 것 정도..? 음. 좀 약한가?”
“믿기도, 믿지 않기도 어려운 미묘한 설명이로군. 하지만 역시 당신 말대로 조금 약하군.”
“그럼 뭐… 나와 흑주가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라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흑주는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요. 이것도 약하다면.. 딱히 더 설명하기도 애매한데… 에이, 그냥 저질러 버리자.
“내가 현재 캔들 리의 신병을 완전히 확보하고 있다는 건 어떨까요? 즉, 현재 그의 생명이 내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면?”
…끔.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을 걸 각오했는데 아니네?! 흑주 녀석만 또 비죽비죽 살기를 돋우고 있고…………
“…언제든 그분을 해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역설적으로 ‘적의가 없다’ 를 말하고 싶은 건가?”
오우- 땡쓰. 곧바로 내 말의 요점을 이해해주시는구려.
“…그 길다는 얘기를 듣는 건 조금 미뤄야 할 것 같군.”
“그럼. 저야 고맙죠.”
“…앉겠나?”
“그러죠, 뭐.”
나와 대교는 주저 없이 흑주의 에스 아저씨가 가리킨 의자를 침대 쪽으로 끌어왔고, 그는 흑주와 함께 침대에 앉았다.
“후우~ 나도 이제 다 됐군. 잠시 허세를 부리는 것도 힘겨울 정도니 말야.”
분명 안색도 안 좋고, 병원 데이터에는 ‘중환자’로 되어 있지만 그래도 아주 안심할 수는 없었다.
쯧. 본래 이런 사영 스타일의 살수를 상대하는 건, 훨씬 더 고강한 무공을 가진 조담놈 스타일을 상대할 때보다도 피곤한 법이지. 하지만, 뭐.
“좀 전에 내 목을 따려고 했던 그 칼, 과일 깎는 칼이었죠?”
나는 침대 옆의 과일 바구니로부터 사과 하나를 집어들고 등에서는 정글도를 꺼냈다.
정글도로 싹싹 사과를 깎고 있자니까 에스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다소 엉뚱해 보이는 행동으로 오히려 분위기를 수습하고…………….”
“난 분석 잘하는 사람이 싫더라.”
“훗~ 그런가?”
“후훗 사실은 나도 그게 취민데 그걸 일일이 말하면 인기가 떨어지더라고요.”
“하긴. 내가 인기가 좀 없지.”
표면적으로는 확실하게 부드러워지기 시작한 분위기 속에서 난 물었다.
“혹시, 한국 이름이 ‘신’으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성씨가 뭐냐는 말을 좀 이상하게 했나?
“나의 이니셜 에스(S)가 ‘신’을 뜻하는 것은 맞지만, 그건 그대로 이름이지. 또한 나도 그게 본명인지조차 몰라.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 된 기억 속에서부터 난 단지 그렇게 ‘신’이라고만 불리웠지.”
으음. 이 아저씨도 꽤나 굴곡 많은 인생이었나 보군. 어쨌든 나로서는 굳이 이 신의・・・ 음 신(神)하고 헷갈린다. 그냥 흑주처럼 에스라고 해야겠다. 암튼, 에스의 전생이 천년 전의 신정안인지를 확인할 필요는 없으니까, 일단 그쪽 얘기는 생략하기로 하자.
“내가 정말 궁금한, 그러니까 당신과 흑주에게 확인하고 싶은 건 저 흑주가 캔들 리의 딸, ‘펄리’인가 하는 겁니다.”
반응이… 에… 좀… 예상보다 밋밋하네?
“이미 알고 온 것이 아니었나?”
너무 쉽게 확인되니까, 다소 허무하기도 하군.
“그게…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확실한 건 아니어서… 음. 그럼 혹시 지금 다른 킬러가 캔들 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에스는 새삼스런 눈으로 날 응시하며 말했다.
“난 당신이 이미 모든 상황을 알게 되어 우릴 찾아온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던 건가?”
“예, 뭐… 내 친구와 오늘 일을 상의해보다 보니까, ‘저격 사건 발생 시기가 너무 빠르다’고 해서 한 번 추측해봤던 거죠. 캔들 리의 경호야 혹시 모 르니까 강화한 거고.”
“…대단하군. 어느 것 하나 확실히 알고 있지 못했으면서도 전체적인 그림을 완벽하게 그려내고 대비해 주었어.”
지금까지 ‘애매모호’ 하다는 이유로 주인인 나에게 늘 타박을 받던 나의 직관력이여. 그동안 미안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당신들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걸?”
“그 얘긴 좀 참아주시죠. 뭐, 물론 계속 그쪽만 내 질문에 대답하려면 억울한 생각이 들기는 하겠지만요.”
내가 뻔뻔스럽게 씨익- 웃어 보이자, 에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캔들 리의 안전’ 이라는 우리의 최대 급소를 선점 당했으니 어쩔 수가 없겠지. 하지만 역시 한 가지는 좀 대답해 줘야겠어.”
“말해보시죠.”
“캔들 리. 그분은 흑주의 존재를, 자신의 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그건 아직 직접 만나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사람에 대한 자료를 봐서는 흑주에 대해서 알게 되면 이렇게 아무 움직임도 없을 그 런 사람은 아닌 것 같더군요.”
“……그렇군. 내가… 이 내가 그런 당연한 사실을 남에게 묻고 말았어.”
에스의 얼굴에 떠오르고 있는 표정은, 어찌 보면 처연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말할 수 없이 그리운 추억에 잠긴 사람의 표정 같기도 했다. 그런 그의 팔을 흑주가 말없이 잡아주고 있었다.
“흑주. 이 바보 같은 녀석. 어찌 친부에 대한 정마저 참으며 내 곁에 남아주려… 이렇게 안쓰럽게 애를 쓰는 게냐. 어쩌면… 내가 바로 너와 너의 부 모님을 덮쳤었던 비극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에스의 작게 떨리는 음성을 들으며 흑주는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냐. 아저씨, 아냐. 아냐, 흑주, 알아.”
제기… 역시 이 사람 에스는 천 년 전의 신정안이 맞는 건가……………?
나도 천 년 전의 해동선생 부부와 신정안이 어떤 운명으로 얽혀 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당시의 신정안도 자신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흑주의 인생까지 망쳤다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었던 것이다.
타임 씨……………!
당신이 만약 정말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輪廻)까지 관장하는 존재라면………! 그렇다면 대체 왜 이렇게 사람들을 반복해서 비슷한 운명으로 얽어 넣는 거지…?
“……나름대로 만회할 기회를 주는 건지 아니면 계속 엿먹어 보라는 건지………….”
「유준, 오라버니?」
대교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아왔다.
「아, 그냥 좀………… …훗! 역시 난 천성이 못됐나보다. 솔직히 비슷한 운명의 반복에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역시 성질부 터 나니 말야.」
「하아~ 스스로 못된 건 아시네요.」
「우쒸. 배신 때리기냐?」
「후후 그럴 리가요.」
대교 녀석, 그러고 보면 은근히 타임 씨 편인 것 같단 말야…………?
이거, 이거 혹시 대교가 나 몰래 타임 씨하고 무슨 밀약이라도 맺고 있는 거 아냐? 날 살살 구슬려서 개종(?)시키기로 하고 천국행 티켓을 예약 해 놨다거나………….
“당신, 진유준이라고 했나?”
응?
아, 너무 끔찍한(?) 상상이어서 잠깐 현실을 놓치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당신에 대한 수많은 의문점에 해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게 닫혀 얼어붙어 있던 흑주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믿어보 기로 했네. 자네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행글라이더를 뛰어서 (?) 쫓아다녀야 했질 않나, 화살 세례에 총알 세례… 하여간 결코 어렵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서도…………….
“나란 인간이 언제 한국에서 태어나고 버려져, 이 땅으로 입양되었고… 어떻게 양부모를 잃었는지. 또, 어떻게 뒷골목을 전전하며 들짐승처럼 살아왔는지 시시콜콜 늘어놓을 필요는 없겠지. 다만 그런 세월 속에서 내가 가장 증오하고 역겨워하게 되었던 자들이 바로 같은 동족이었다 는 사실만은 말해 두고 싶군.”
같은… 동족? 한국 교포들을 말하는 건가?
“…백인 양부모에게 당했던 오랜 세월의 학대 때문이었을 거야. 나도 같은 동족, 동포의 어른들을 믿고 의지했던 때가 있었지. 그리고… 그들에게 배신당하고 뜯어 먹혀 차가운 도시의 시궁창에 처박혀야 했어. 당시의 내 나이… 16세. 배신감과 소름끼치는 증오심, 아득한 절망 속에서 그저 죽어갈 뿐인 소년이었지.”
…빌어먹을…………!
난 별 것도 아닌 손해를 좀 입었다고 무조건 ‘외국에서 같은 한국인을 믿지 말라’는 말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짜증난다고 생각했는 데… 정말…이었던 거야? 정말 같은 동족의 등을 치고 잡아먹는 짐승들이 그렇게 많다는 거야?
“그때,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끝없는 증오심 때문이었어. 모두에게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분노와 오기로 피투성이 몸을 일으켜 다시 사람들 앞에 섰지. 그래. 한동안은 즐거웠어. 진심으로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지. 배신자들을 내 방식대로 처단하고, 길거리 양아치들을 도 살하고 마피아에게도 이빨을 드러냈으며 경찰차도 부숴 버렸지. 어느 사이.. 사람들은 내게 멸시에 앞서 두려움에 찬 시선을 보내며 ‘크레이지 신’이라 부르기 시작했지. 그리고… 그때쯤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한 명의 남자를 만나게 되었어. 내게 새로운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준 그분 을.”
막나가는 시절에 캔들 리를 만나 감화되었다는……
“사부님의 이름은 밝힐 수 없으니, 이니셜 제이(J)라고만 해두지.”
엥? 캔들 리가 아닌 거야? 게다가 뭐? 제이?
“자, 잠깐만요! 그 제이, 제이라는 사람 혹시… 닥터 제이?”
나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지만, 에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이 사부님은 한 번도 자신에게 그런 호칭을 볼이지 않았었네.”
으음. 괜히 놀랐나? 하지만…………….
나는 그래도 혹시나 하여 닥터 제이의 용모와 특징을 설명해 보았지만 에스는 다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용모도 용모지만, 그 사람이 초고수로서 당신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해 준 거라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네요. 내가 아는 사람은 무공에 대한 지식 과 분석력이 놀라워서 굉장한 고수를 키워 낸 적도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직접 구사하지는 못하니까요.”
쯧.
근데 내 주위로 왜 이렇게 ‘이니셜 J’가 많이 나타나는 거야? 우선 나부터 J, 미래여자 싸가지도 J. 원판도 J, 닥터 제이도 J, 하은이도 닥터 제이 딸 이니까 당연히 J, …어? 그러고 보니 자룡대주 본명도 제니퍼 뭐라고 해서 ]잖아? … 얼씨구, 적들 중에서 검은 예수회의 ‘Jesuit’도 J일세? 아주 그냥 J 사태로구만. 타임 씨는 대체 왜 이렇게 J를 선호하는 거야?
“당신이 말하는 닥터 제이라는 사람도 굉장한 인물인가 보군. 무공이란 머리 속의 지식만으로 진수를 알아내기 어려운 법이니 말야. 하지만… 제이 사부님은 또 차원이 달라. 사부님과 헤어진 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수련에 힘써온 나도 아직 그분에게는 비교조차 되지 못할 정도라네.”
닥터 제이는 그렇다 치고… 이제 정체불명의 ‘제이 사부’라는 인물도 꽤나 호기심을 자극하는군. 사영의 부인 괴물 노인 ‘오씨 할아버지’도 그렇 고… 21세기에 이리 숨은 고수들이 많다는 건, 평범했던 시절의 나는 전혀 생각도 못했었는데… 으음~ 암튼.
“그럼 그 사부에게 무공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킬러 일을 시작한 건가요? 그 사람 역시 그 계통의………….”
에? 또 고개를 젓네?
“아니. 제이 사부님의 과거까지는 모르지만, 나와 지낼 때는 그런 일을 하는 것 같지 않았고, 내게 권하지도 않았다네. 내가 사부님에게 전수 받은 것은 정통 무공의 심법(心法)과 어둠의 인법 (忍), 과거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병기의 사격술.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어. 하지만 기본 은 역시 심무도(心武道)라고 해야겠지.”
심무…라, 언젠가 신문에서도 본 것 같은 우리나라 전통무예의 명칭이군. 그럼 제이 사부라는 사람도 한국계인 걸까?
“제이 사부님은 아무 때고 돌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내 안의 증오심을 어느 정도 잠재워 준 분이라네. 그렇다고 그분이 특별히 동포에 대한 긍정 적 사고를 내게 가르친 건 아니었어. 오히려 항상 ‘네 마음대로 살아라’며 나의 분노가 폭발하는 걸 허용하고 방조하는 분이었거든.”
흐음. 뭔가 좀 일반적인 ‘모범 사부’와 다른 사고방식의 사부님인 모양이군. 나로서는 일단 호감형인 걸?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과도한 폭력성은 점차 수그러들게 되었다네. 난 어느 사이 애써 이빨을 보이고 으르렁거려서 상대를 쫓아내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져 버렸으니까.”
에스, 이 아저씨도 그런 사부를 만날 자격이 애초에 있었군. 약할 때 쌓인 한을 주체하지 못해서 강해질수록 하는 짓은 더 진상이 되는 놈들도 많 은데 말이지.
“그런데… 말이지. 나의 증오심과는 또 별개로 ‘동포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쉽게 바뀌지 않았어, 아니, 바뀔 수가 없었지. 여전히 어리숙한 동포에 게 접근해 등쳐먹고 사는 쓰레기들이 많았거든. 나는 그들에게 오히려 돈을 뜯고 괴롭혔어. 문제는… 내가 거기서 멈추지를 못했다는 거야. 그때의 나는…………….”
에스는 회한에 잠긴 표정으로 얼마간 말을 잇지 못했다.
“…나 자신이 처음 미국 땅을 밟은 동포들을 골라 사기를 치고 협박해서 돈을 뜯었지. 난 유치하게도 그걸 ‘세례’ 라고 불렀었다네. 한국식으로 ‘신 고식’을 치르게 한 셈이랄까? 그렇게 스스로 쓰레기처럼 살아가던 어느 날 그분들을 만났지. 캔들 리와 부인 ‘이자벨 안(Isabelle Ahn)’. 나의 비 루한 인생에 있어 두 번째 만난 귀중한 기회였으며 너무나 눈부신 빛이었어.”
비로소 부모님 성함이 나오자 흑주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살짝 동요의 기색이 스쳐 가는 것 같았다.
“당시 내 나이… 21세. 제이 사부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사라져 버린 후, 나는 다시 혼자 반년 정도를 제이 사부를 만나기 전처럼 지냈지. 범죄를 저지를 경우 소년원에 갈 나이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지만, 어린 시절부터의 경험에 따른 요령과 제이 사부의 가르침 덕에 한 번도 감옥에 들어간 적 온 없었지. 하지만 언제고 감옥에 들어가 전과자가 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는 철부지였지. 그래서 그날 밤, 어리석 게도 LA 뒷골목에서 약간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볼’ 이라는 양아치 놈에게 속아서 ‘누명’을 썼을 때에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어. 배신과 누명, 그 에 따른 억울함도 내겐 흔한 일상이었으니까. 그저, 볼의 부하 녀석 하나에게 ‘나중을 기대하라’는 메시지를 웃으며 전했을 뿐이었지. 헌데… 사건 은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더군. ‘볼’ 녀석이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 어느 틈에 ‘상해사건’은 치사. 즉, ‘살인사건’으로 바뀌어 있었어. 게다 가 내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에는 분명 살아 있던 백인 남자와 난 본 적도 없는 그의 어린 딸까지 내 손에 살해되었다고… 그렇게 파렴치한 살인마 의 낙인이 찍혀버리더군. 예상밖의 일이었어. 무엇보다 볼이라는 놈은 그런 일을 벌일 정도로 배짱이 있는 놈이 못되었거든.”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면 좀 그렇지만… 조금 전 에스가 배신자에게 ‘나중을 기대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할 때의 표정을 보면… 볼인지 뭔 지하는 양아치가 쬐금 이해가 되기도 한다.
볼이란 놈 입장에서는 자신이 누명을 씌운 자가 단순 난폭자에서 사신으로 진화 중이라는 걸 깨닫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시는 에스를 보고 싶 지 않았을 것 같았다.
“어쨌든, 사형이 거의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난 그리 초조해하지 않았어. 비록 제이 사부에게 전수 받은 것 중 어떤 분야도 완전하게 마스터하지 못한 시기였지만, 그래도 나 한 몸 탈옥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자신감 때문이었어. 밖에 나가 볼 녀석을 해치우고 나면 어떤 나 라로 달아나는 것이 좋을 고민하는 것으로 시간을 때울 정도였지. 하지만… 그때 내가 아주 잠깐 떠올렸었다가 지웠던… ‘가고 싶은 나라’ 한국에서 온 그 사람들이 먼저 날 찾아왔지.”
캔들 리 부부를 회상하는 에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흑주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뉴욕의 한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가 되기 위해 노력중이라는, 대범한 듯하면서도 멋지고 당당한 남자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 마치… 나와 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 같았지.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나의 구명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기 시작했던 거야. 알 고 보니… 내가 누명을 쓰던 날,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범죄 현장인 집에서 뛰쳐나왔을 때 부딪친 적이 있는 젊은 부부였어. LA에 잠시 불 일이 있어 왔다가 수상한 기색의 동양인 불량배와 마주쳤을 뿐인 그들은 당연히 별다른 생각 없이 뉴욕으로 돌아갔다고 해.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우연히 언론을 통해 사건 보도를 접한 그들은 그날 밤 자신들이 목격했던 나와 주변 상황에 대한 사소한 일들까지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고는… 나의 범행 사실에 의문을 느꼈다고 하더군.”
무엇보다 그때… ‘신’, 당신은 나의 아내가 당신 옷에 묻은 피를 보고 놀랐을 때, 무심결에 ‘미안해요’고 했어. 난 그것을 분명히 기억해.
캔들 리는 첫 면회 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 그런 이유만으로 그들은 애써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을 포기하고 뉴욕에서 LA까지 날아왔으며, 오래도록 내 무죄를 입증해주기 위해 노력 했어. 수많은 사람들의 ‘살인마를 옹호한다’는 비난과 볼 일당의 위협까지 견뎌야 했음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나도… 나 진유준도, 같은 동포가 억울한 처지임을 알게 되었다 해도 과연 그들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의 인생이 걸린 시간을 포기하 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면서…? 모르겠다. 지금은 나도 모르겠다.
“길고 지루한 싸움 끝에 그들은 결국 나의 무죄를 입증해냈지. 난・・・ 7개월만에 세상의 빛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던 거야. 그 사이에 세 명의 가족이 된 그들의 환영이 날 기다 리고 있었지.”
이미 흑주를 잉태하고 있던 몸임에도 남편을 도와 에스의 구명 활동을 함께했던 ‘이자벨 안’이란 분은 에스에게 자신의 어린 딸을 안게 하고 그 손 을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 순간이었어. 나는 그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내 누명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써온 그들을 보면서도 진정 으로 감사의 마음을 느끼지 못했던 나 야. 아무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세월을 살아왔던 나로서는 저들에게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어떤 형태로든 자신들의 이익이 있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 거겠지라며 그들을 부정했었어. 하지만… 하지만… 그 어린 아기를…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런 생명을 안고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어. 그 순간만큼은… 나도 돌아가는 것 같았어. 어머니로부터… 태어났 을 때의 순수한 나로…………….”
에스는 그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났는지 더 말을 잇지 못했고 흑주도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는… 몽몽을 불렀다.
「몽몽! 캔들 리 경호는? 변동사항 없어? 괜찮은 거지?」
…사영님과 패티, 어느 쪽으로부터도 아직 특별한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 거, 다행이네. 안 그래, 대교?」
「아, 예. 여전하시네요.」
「응? 누구?」
「본래는 너무나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가진 분이면서, 그걸 들키기 싫어하시니.」
「크흠. 거 무슨 엄한 소리냐. 내가 섬세한 남자면 금동이는 킹콩이다.」
…에고. 내가 지금 뭔 비유를 한 거지?
「전 이럴 때가 참 좋아요. 비화곡주님도 아니고 마군황님도 아닌・・・ 당신 진유준을 나만이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어, 야아~ 애써 감정 수습 좀 하려는데 니가 이러면 곤란하지이.」
「후후 죄송해요.」
의도했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결국 독에는 독이라고(?)…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였던 감정이입을 염장포스로 벗어난 셈이었다. 나는 어느 정도 평 소의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뭐시냐. 그렇게 새 생활을 시작했으면… 당신에게 누명을 씌웠었던 놈은 오히려 구사일생. 아, 감옥에는 갔으려나?”
에스는 비교적 빠르게 감정을 추스리며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되고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개과천선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에?
“난 물론 더 이상 그 전과 같은 삶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천성이 그리 착하지는 못하다네. 그래서………….”
으음. 그 볼이라는 양아치를 감옥에 몰래 침투해서까지 쓱싹 해버렸다니, 이 양반도 참 어지간하네. 그래도 그 칭찬받을(?) 복수는 들키지 않 았다니 됐고, 더 이상 다른 범죄를 저 지르지 않기 시작했다니. 여하간 개과천선했다고 쳐도 되겠네, 뭐. …음. 역시 나도 사상이 좀 위험한 녀석인 건가?
“…그로부터 몇 년 동안은 내 생애에 다시없을 행복 그 자체였지. 귀찮은 매스컴들의 관심도 그리 길지 않았고, 사실상 주변 여건에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이 변해 있었으니까.”
에스는 문득 웃었다.
“캔들 리와 이자벨 안은… 언뜻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인 것 같았지. 하지만.. 함께 지내며 점점 더 깊이 알게 된 그분들은 사 실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현명했으며 강한 사람들이었어. 난 그분들보다 몇 수십 배로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분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 아가는 자신을 납득할 수 있었지.”
…으음. 이 사람, 처음에는 좀 구체적인 듯했는데 갈수록 상당히 막연하고 감상적인 표현만으로 나가기 시작하네? ‘일일이 예를 들기 어려울 정도 로 모든 면에서 그들 부부를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거 같기는 한데…………
“저기, 당신은 그렇게 강했는데 그런데도 그날, 그 일을 막지는 못했군요.”
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자, 에스의 표정이 일시에 어두워지고 있었다. 좀 참고 들어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에스는 결국 그날, 전세계적으로 이슈 가 되기도 했던 예의 ‘LA 폭동’의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 때문이었어. 내가 내 손으로 모두의 행복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셈이었지. 내가 그날… 일하던 가게에서 흑인들과 시비를 벌이지 않았다 면・・・ 그랬다면 그분들은…….”
…다르다. 역시 천년 전과는 다른 전개다.
“내가 본성을 누르지 못하여 쓸데없는 싸움을 벌여 그 소식이 전해지게 하지 않았다면 오렌지카운티의 자택에서 어린 흑주와 함께 내 생일 파 티 준비에 바빴을 뿐이었을 그들이 그 비참한 폭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에스는 우는 것처럼 보이는 미소와 함께 입술을 깨물었다.
“수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난 또 치명적인 실수를 했어. 그때까지도 LA의 모든 흑인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나 는 가게를 지키겠다고… 그분들과 함께 나서지 않았던 거야. 나중…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세워진 낯익은 차를 발견 했을때… 이미 총격으로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그분들을 목격했을 때… 나는 미쳐 버릴 수밖에 없었지. 만약 그 자리에 흑주가 없었다면, 어린 흑주 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역사는 그날의 사망자 숫자에 더 많은 자릿수를 더해야 했을 거야.”
이 사람의 성향과 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의 한심한 실수는 또 있었지. 다행히 무사해 보이는 어린 흑주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고는 해도… 당시 캔들 리가 절명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하지 못한 채 흑주를 안고 피해 버렸던 거야. 가로막는 몇몇 흑인들을 참살하는 것으로 분노를 달래며 말이지. 그 후………….”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 나중 발표된 사망자 명단에 캔들 리 부부가 모두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서둘러 흑주와 함께 미국을 떠나게 되 었는데, 그건 흑주를 넘겨주며 남긴 어머니 이자벨 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자신들의 복수를 하지 말라는, 증오심을 버리라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지. 더 이상 흑인들을 마주했다가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이 나라를 떠나 고향으로………..”
-어? 뭐라고?
“고향? 한국? 우리나라로 왔었다고요?”
핫. 이거 참! 내가 모르는 사이에 흑주가 그동안 같은 나라 안에 살고 있었던 말인가?
“어디, 어느 곳에서 살았던 거죠?”
“…일일이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네. 그리 안정적으로 한 군데 머물 형편이 못되었으니까. 음… 그래도 처음에 시작한 서울의 역촌동이란 곳에서 가 장 오래 살았었던 것 같군.”
에헤라
“나도… 살았었던 동넨데요? 혹시 거북탕이란 목욕탕 알아요?”
난 옛 동네에서 왠지 그 목욕탕이 유독 기억이 난다.
“… 언뜻 본 것도 같군.”
따져보면, 내가 그 동네에 살았던 때와 에스를 따라온 흑주가 살았을 시기는 살짝 겹치는 정도였다.
현실적으로 마주치기까지 했을 가능성 자체는 매우 희박하지만… 그래도 이거, 이거, 이 정도만 해도 정말 기분 희한하네. 인연이란 게 이렇게도 질기고 오묘한 것인가…………? ……어랏? 대교의 기색이 조금 이상한 걸? 혹시… 질투모드? 으음. 근데 왠지 에스의 표정도 좀 이상한 걸?
“당신은 대체 흑주와…………..”
“그건!”
일단 끊고.
“나와 흑주가 과거에 어떤 인연으로 묶이게 된 건지… 그 얘기를 내가 밝히지 않으려는 이유는 단 하나. 당신이 믿지 못할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 만, 그러니까….”
나는 대교를 한 번 돌아본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평생, 아니 그 이상을 같이 할 이 대교를 두고 장담합니다. 우린 결코 흑주에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으으음. 막상 하고 보니 뭔가 애매한…………….
“…계속 묘하게 자신을 주장하는군. 그런데도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더 묘하지만……”
오~ 그리 받아주면 고맙지요.
“그 당시 흑주는…….”
에스가 다시 시작한 얘기에 의하면, 흑주는 ‘천성적으로 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당시 부모님들이 살해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충격으로 심한 우울증과 실어증에 빠져 버렸으며, 그 때 한 번 닫힌 입은 그 후로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많은 병원을 찾아다녀봤어도 소용없었는데… 그런 이 아이가 언제 처음 다시 말문을 열었는지 아는가?”
나는 당연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흑주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거의 어울릴 수가 없었어. 말을 하지 않는 무표정한 여자아이, 게다가 특이한 한 쪽 눈동자 때문에 항상 경계와 놀림 의 대상이었거든. 흑주 또한 친구를 찾는 건 고사하고 평범한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인형이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나에게 뭔 가 배우는 것에만 지나칠 정도로 흥미를 보일 뿐이었지. 결국 내가 제이 사부에게 전수 받은 모든 것을 흑주가 소화해낸 건 물론이고, 날 능가해 버 린 것이, 불과 만 15세 때였어.”
…내가 마군황이 되어 돌아오기 훨씬 전, 서울에는 이미 세계적인 특급 소녀 킬러 한 명이 탄생해 있었단 얘기로군.
“그리고 흑주가 처음 한말은… ‘이제, 내가 할게’ 였어.”
에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애써 숨겨왔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우리의 생계와… 그리고 나 자신의 병원비를 위해 ‘킬러’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지.”
이 사람. 환자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로 추정해보면. 이 사람 에스의 현재 나이는 잘해야 40대 초반이다. 그런데도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건 그만큼 힘든 투병 생활을 해왔다는 뜻인가?
-1차 스캔 결과로도, 현재 코드명 에스의 암세포에 침식된 췌장은 한계 상태입니다. 원하신다면 해당 신체의 정밀 스캔을 실시하겠습니다. …젠장. 이 사람도 참 더럽게 꼬인 인생이구나. 게다가……………
“운명의 장난이란… 끝까지 참으로 가혹하더군. 흑주가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킬러가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계통에서도 ‘에메랄드 킬러’라 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을 때 그제야 우린 캔들 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거야. 그 폭동 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캔들 리가 사실은 구사 일생으로 생명을 건졌었고, 오랜 재활의 시간까지 이겨내어 이제는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만 했다. 이미 킬러가 되어버린 흑주는 정치계로 뛰어들어 예의 ‘그레이 홀’을 피해야 할 캔들 리의 앞에 나서지 못하게 된 것이다.
흑주는 아버지 캔들 리가 또 다시 자신들의 가족에게 닥친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올바른 지도자’가 되려는 것을 알고… 결국 암흑 속에서 아버지를 지키는 역할을 자처한 제기랄! 타임 씨 당신 진짜 뭐야?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다들 고통 받고 있다는 건 똑같잖아! 당 신 정말 이럴 거야?
ᅳ주인님.
“뭐냐.”
—사영님으로부터, 캔들 리 주변에서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삐― 이! 삐— 이!
몽몽의 보고 직후에 울리기 시작한 것은 병실 안에 있는 전화기의 소리였다.
재빨리 수화기를 든 흑주에게 전해지는 메시지도 몽몽의 보고와 내용이 같았다. 에스의 수하거나 고용된 정보원으로부터의 연락인 모양이었다. “오늘 흑주가 일을 벌였으니 어느 정도 공백이 있을 줄 알았는데 놈들이 나름대로 허를 찔러오는군.”
흑주가 먼저 쏜살같이 뛰쳐나갔고, 나와 대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걱정 말고 몸조리나 잘하고 있어요. 흑주를 위해서라도.”
뭔가 더 할 말이 많았지만 결국 그렇게 일상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병실에서 나와야 했다. 난 결코 정의의 사도도 뭣도 아니며, 함부로 다른 사람 의 인생과 수명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얄미운 타임 씨에게 저항하는 마음 때문에라도… 저 심무도라는 우리 고대 무예의 후예이며 인법의 달인, 흑주의 사부이며 아버지와 같 았을 사람을 반드시 살려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