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17화 : 어둠 속으로
7. 어둠 속으로
테네시의 저택에 도착했던 정체불명 남녀는 결코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 차분하게 우리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그 중 여자 쪽의 섬뜩한 웃음이 먼저 내 피부에 소름이 돋게 했지만, 아무래도 남자 쪽 역시 결코 평범한(?) 테러범이나 암살자 같지가 않아 보였다.
여자와 달리 저 남자. 분명 동양인이다. 극단적인 백인 우월주의자가 저런 동양인 킬러를 고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만큼 보장된 실력자라는 반 증……?
확실히 매우 안정된 걸음걸이에서부터 고수라는 느낌이 아! 사라졌다?
나의 시선이 빠르게 남자의 종적을 따라붙었지만, 왼쪽 숲으로 뛰어드는 남자의 검은 형상만을 겨우 잡았을 뿐이었다.
이 내가 눈으로 쫓는 것조차 힘들 정도라니………! 젠장! 저런 동양인 초고수가 왜 KKK단 같은 놈들에게 고용된 거지? 아, 아니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라 이런!
내가 적에 신경을 쏟고 있는 사이, 우리 쪽의 흑주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도 모르게 돌아본 방향의 숲 속으로 흑주의 뒷모습이 스윽 묻혀가는 게 보였다.
흑주 녀석, 같은 부류라는 걸 느끼고 반응한 건가? 그렇다면 저 백인 여자는 우리 몫… 윽! 또?
“쨩!”
불쑥 욕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하나같이 내 눈앞에서 멋대로 사라질 수 있는 자들이 많다는 사실 자체에 짜증이 나버린 것이다.
다행히(?) ・・・ 이번에도 곧바로 문제의 백인 여자를 발견하기는 했는데… 빌어먹을!
한순간 내 시야에서 사라졌었던 여자는 어느 사이 나와 대교로부터 2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나무의 꼭대기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검은 털의 전신 코트와 긴 흑발의 머리결 때문에 여자의 음산한 얼굴만이 밤하늘의 달처럼 창백하게 떠 있는 것 같았다.
유령 같은…………? 아니, 저 여자… 진짜 인간이 아닌 거다.
내 머리 속으로 자연스럽게… 얼마 전 만났던 에레보스의 ‘인간이 아닌 커플’이 떠올랐다.
“뱀파이어 (Vampire)…? 그것도 마스터급?”
어둠 속에 떠 있는 여자의 얼굴에서 붉은 입술이 다시 한 번 새애- 선혈의 미소를 떠올렸다.
“한 눈에 저의 정체를 알아보다니………….”
윽.
“당신도 평범하게 달빛을 즐기지 못하는 분이로군요. 게다가……….”
제…기. 이 여자의 음성은 대체 뭐야…?어떻게… 어떻게 이토록 달콤할 수가 있는 거지…………..? 으익! 진유준! 정신 챙겨!
“흐응. 그 옆의 새벽이슬처럼 투명한 자태의 숙녀 분은…………….”
“…대교. 이분의 다정한 음성으로 불릴 때만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이름이지요.”
・어째 대교의 반응도 좀………….
“당신의 그 요사한 입으로 불리는 건 달갑지 않지만… 이분의 관대함을 따르기 위해서는 허락할 수밖에 없군요.”
“오~ 대교……! 왠지 저와는 통할 것 같은 분이네요. 저의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저는 카라, ‘카라 오브라이언……! 당신과 마찬가지로……
카라…라는 여자 뱀파이어의 요염한 시선이 잠깐 돌려진 곳은 ‘정체불명의 동양 남자와 흑주가 한 판 뜨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의 숲이었 다.
“저의 영원한 동반자가 불러줄 때만이 고요한 달빛을 흐릴 수 있는 이름이지요.”
“카라 오브라이언∙∙∙∙∙∙! 당신께 요사하다 무례한 첫인사를 건넨 저의 당돌함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어 감사해요.”
“먼저 무례했던 건 이 몸이니 개의치 말아요. 오늘 밤 대교… 라는 이 사랑스런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 저 달의 여신 루나에게 감사의 키스를 보내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오늘 귀인의 고아한 자태를 접하게 된 것은 천지신명의 각별한 배려라고 생각………….”
“그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정글도를 꺼내 들었다.
“이 가스나들이, 시방 계속 뭐라카노?”
두 여인네들은 나의 반발을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
“그, 거시기 뭐시냐, 댁들은 지금 현재의 상황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그제야 둘은 합창하듯, 어머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제가 그만 잠시 자신을 잊고 말았었네요. 아마도… 오늘따라 유난히 애처로운 달빛이 대교 양의 자태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무척이나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어요. 카라 씨처럼 아름다운 심성의 귀부인과 적으로써 만나게 되다니……….”
“아아~ 저의 내면까지 보아주는 소녀의 사랑스런 눈동자는 대체 몇 백년만인지…….”
“이, 쫌!”
아무래도 자기들끼리는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왼손으로 대교의 손을 잡으며 오른손의 정글도로 뱀파이어 카라를 겨누었다.
“당신! 뱀파이어씩이나 되는 여자가, 테네시에게 고용된 건가? 아니면 본래 갈은 조직의……….”
웃!
별안간 분위기가 싹- 바뀌어 버렸다.
“그 무가치하고 해로운 인간이나 조직과 연관되는 건 농담으로 라도 불쾌하군요.”
…어?
“그럼・・・ 왜 이곳에 온 거지? 테네시에게 초대된 것이 아니었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그냥 말장난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떤 의미인 거지? …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당신과 그・・・ 당신의 동반자라는 남자가 우리를 막아서는 형세라 는 거야. 그렇지?”
“안타깝게도 그렇게 된 것 같네요.”
“오해라는 건가?”
“아니요. 분명히 저는 저의 영원한 시간의 동반자로부터… 오늘밤 저 집에 접근하는 모든 존재를 저지하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결국, 그런 거면서… 뭐가 그리 말이 많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의 정글도가 먼저 삼시전결(三失電狀)을 날렸다.
맹렬한 기세로 쏘아진 세 줄기의 삼시전결이 여자 뱀파이어의 몸을 정확하게 꿰뚫어 버렸다.
어? 이렇게 쉽게. 아, 아닌가? 그냥 통과했다?
“조금 아프네요. 역시 대교 양의 연인답게 대단한 고수로군요.”
말과 달리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약간의 표정 변화조차 없는 여자 뱀파이어 마스터 카라…………! 나는 비로소 내가 본 공포영화들 속의 뱀파이어가 ‘안개’로 변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12인의 사도 직속 암살단 에레보스의 넘버2… 뱀파이어 마스터 시그마. 그 녀석도 자기 몸의 안개화는 못하는 것 같았어. 그럼 저 여자는 대 체………….
“어느 정도 저와 같은 밤의 권족을 알고 있는 분인 듯하니… 이 ‘영역’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시그마 녀석이 공간을 잘라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버렸을 때처럼, 거대하고도 기묘한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같았다. 하지만 왠지 그때와 달리 주변의 풍경이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잠깐 없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혹시……………
나는 시험 삼아 가볍게 정글도를 휘둘러보았다. 가볍게라고는 해도 웬만한 굵기의 나무는 쉽게 잘라버릴 수 있을 정도의 도기가 테네시의 저택 쪽 으로 날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도기가 허공의 어느 한 지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 했다. 시그마의 공간 절단처럼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비현실 적인 어떤 공간에 가둬 버린 건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 가지 묻지. 당신의 동반자. 그자도 뱀파이어 마스터인가?”
“아쉽게도 그 사람의 기원은 저도 잘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적어도 저와 같은 밤의 권족이 아님은 분명하답니다.”
…정체가 무엇이든, 이 여자 뱀파이어보다도 상위의 존재라는 건 확실한 모양이군.
“한 가지만 더, 당신들 에레보스인가?”
“혹시 특정 조직을 얘기하는 거라면 그렇지 않아요. 순수한 의미의 ‘어둠’이라면 또 몰라도…….”
에테보스가아니라고…………?
“그럼 대체 왜 우릴 막는 거지? 더구나 테네시란 자와 관련되기도 싫다면서?”
“당신과 사랑스런 대교 양에게는 특히 미안하지만… 더 이상 말해 줄 수가 없어요.”
에레보스가 아니라면 그나마 다행인 것 같기는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우리를 가로막고 선 자들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흑주가 위험하다. 아무리 흑주가 신비로운 힘의 눈동자를 기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진짜 괴물들을 상대로는……………
「대교!」
「아, 죄송해요. 너무 예의바른 분이라 조금 전에는 저도 모르게…………」
「쯧. 여하튼 적이라는 걸 잊지 말고 방심하지 마. 아니, 미안하지만 평소보다 나에게 내력을 지원해 주는데 더 집중해 주겠어?」
「물론,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나는 새삼 대교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다.
“솔직히, 난 여자와 싸우는 거 자체가 싫어. 하지만… 오늘은 금기를 깨고 못된 짓을 좀 해야겠어.”
“이해해 드리겠어요.”
“그거, 고맙군. 그럼- 월광절화결(月光切花訣)……….”
나는 신형을 날려 허공을 밟고 순식간에 적의 정면으로 엄습해 들어갔다. 그러나 여자 뱀파이어 카라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웃고 있을 뿐 이었다.
“참화지수(之首)!”
부우우우―.
나의 정글도가 좌우로 길게 허공을 가로질러 푸른 실선을 자아냈을 때에야 그녀 카라의 얼굴도 일변했다.
“칼로・・・ 달빛을?”
비로소 황급히 물러서려던 기색의 그녀를 달빛의 정화가 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둡고 진한 그림자 같았던 카라의 몸이 검은 연기처럼 흐트러 지고 있었다.
또 그냥 통과…..? 아니, 이번엔 달라!
난 카라의 얼굴에 스치는 ‘고통’을 놓치지 않고, 연이어 2초식을 더 펼쳤다.
“흣-!”
낮은 신음성과 함께 카라의 전신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져 갔다. 나는 눈앞의 적당한 나뭇가지에 착지하며 새삼 모든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 었다.
・없어? 멀리 달아났・・・ 아, 아냐!
물속에 잠겨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떠오르는 것처럼 다시 카라의 존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조금 전보다 훨씬 먼 지점의 어둠 속 이었다.
쳇. 이젠 몸통 없이 머리와 상체의 일부만이 실체화 되어서… 더 귀신같네. 근데 저 모습은 그만큼 타격을 입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떤 공격 이라도 좀 더 쉽게 피할 수 있도록 반 이상 다른 공간과 겹쳐 있는 것일까?
“하아~ 무섭군요. 근래 들어 이렇게 강한 남자는 처음 만나 봐요.”
“여자는 어떠신가요?”
파츳-!
대교의 섬광분소지가 말 그대로 섬광처럼 쏘아져 카라의 목과 가슴을 동시에 관통해 버렸다. 그러나 대교에게 공격당한 카라의 감상(?)은 우리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아아ᅳ 그 가냘픈 손길에서 이렇게나 치명적인 공격이라니………….”
치이~ 치명적은 개뿔이 무슨 치명적.
나는 여전히 상반신뿐이면서도 건재해 보이는 카라를 노려보며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대교의 섬광분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난 나름대로 영력을 담은 공격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정타가 되지 못했어. 저 안개화라는 건 혹시 다른 차원의 공간과 자신을 겹치는 수법이 아닐까……? 그렇다면 공간을 함께 베는 수밖에 없는 건가…………?하지만.. 어떻게?
문득, 점퍼 안의 품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새깽이 늑대에게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이 녀석을 이용해서 공격하는 방법 또한 없다고 봐야 해. 라프가 내 말을 알아듣고 뜻대로 움직여주는 녀석도 아니고… 치이- 어쩔 수 없지!
나는 다시 대교로부터 전해지는 내력을 정글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그… 달빛이 아니면서 달빛인 것에 한 떨기 꽃처럼 스러지는 거라면 분명 아름답고 낭만적인 최후가 되겠지만……………. 내가 외쳤던 무공과 초식명을 알아듣고 하는 말장난? 아니면…
“…청섬백(靑纖魄).”
나의 정글도가 그린 궤적이 푸른 반원의 살인 초승달을 탄생시키자 카라는 탄성을 지르며 피할 생각도 잊는 것 같았다.
밤의 마물이라 본능적으로 달빛에 매혹되는 걸까?
나는 그런 근거 불명의 생각을 떠올리며 연달아 두 개의 청섬백을 더 날린 직후, 재빨리 신형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카라는 자신의 얼굴보다도 창백한 달빛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리게 날아드는 청섬백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기분은 거시기 하지만, 당장 저 난감한 여자 뱀파이어를 확실하게 처리할 방법이 없는 이상, 일단 이 빌어먹을 공간을 탈출하자! 흑주 쪽의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야!
나는 자존심을 일단 접으면서 전력으로 공공보법을 전개했다.
아까 대충 가늠해 놓았던 공간의 경계선쯤에 도달했을 때였다. -주인님!
윽!
순간적으로 눈앞의 시야가 흔들린다 싶었고, 다음 순간.
씨앙~! 이거 뭐야?
내가 신형을 멈추며 발을 디딘 곳은 어이없게도… 아까 내가 대교, 흑주와 함께 매복하고 있었던 바로 그 나무의 가지 위였다.
“아……! 이건 대체…………!”
ᅳ비공인 에너지의 개입에 의한 공간왜곡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교의 탄식도 몽몽의 애매한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야이~ 늑대 새깽이야! 너 왜 그래?”
나는 점퍼의 지퍼를 조금 내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라프 녀석은 귀가 아프다는 듯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댈 뿐이었다. “대교. 너 그때 이 녀석을 어떻게 해서 그 공간을 통과했던 거지?”
“그냥 별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어요. 전 그저 라프를 안고 당신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을 뿐인데…
칫. 꼭 말로 부탁을 해야 했던 거야?
“라프! 부탁이다!”
나는 다시 경공을 발동하며 외쳤다.
“여길 빠져나가서 흑주에게 가자!”
그러나… 잠시 후. 나와 대교는 또 다시 처음의 나무 위로 컴백 홈, 아니 ‘컴백 트리'(?)했을 뿐이었다.
“저어 제가 해볼게요.”
대교가 라프를 받아들고 다정하게 부탁하면서 재시도…………! 그러나 마찬가지로 컴백 트리였다.
“에이 쒸~ 진짜! 너 정말 이럴래?”
내가 씩씩대도 ‘난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표정으로 혀를 내밀고 꼬리까지 흔들고 있는 라프 녀석의 모습이 전에 없이 얄밉기 만했다. ・코드명 시그마의 영역과 달리, 현재의 영역은 라프에게 ‘불안정한 느낌을 주지 않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으으~
미치겠네! 왜 내 능력이나 내 편인 녀석의 능력까지도 이렇게 제멋대로인 거야?
“호오~ 겉보기엔 작고 귀여울 뿐이지만, 분명 훌륭한 혈통의 마랑(魔狼)인 것 같군요.”
예상대로 청섬백에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조용히 우리의 썰렁한 탈출시도와 실패의 반복을 구경하고 있던 카라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정도 마랑의 힘으로 저의 영역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빌…어, 먹을! 이 라프 녀석의 힘이 약해서 이러는 게 아니란 말야! 제엔장! 여하간, 적으로부터 차분한 충고(?)를 들으니까 더 스팀 받는다! “짱! 진짜 해버리겠어! 여자고 뭐고 진짜…….”
으르렁거리는 나에게, 대교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뭐?”
“아무리 분노하셨다 해도… 당신께선 역시 여자와 어린아이에게만은 진심으로 살수를 쓸 수 없는 분이에요.”
“그, 그건・・・ 에이 씨.”
“그러니・・・・・・ “
키이잉.
대교의 청명검이 뽑히며 그녀의 평소모드도 사라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교님.
응? 몽몽이 지금 대교를 막고 나선 건가?
-그리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인님.
뭐야…………? 어째 몽몽도 평소의 녀석이 아닌 것 같은데?
-그동안의 오랜 분석 및 연구 결과, 제가 통합하여 ‘비공인 에너지’라 칭했던 다수 에너지들의 패턴과 원류의 일부를 해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오오-! 나와 달리 결코 불안정하지 않은 몽몽 선생’이 드디어.. 어, 근데 가만?
「아직 일부⋯뿐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는 데에는 충분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시, 오오오오~! 몽몽 선생 만세!
-지금부터 코드명 라프의 마력과 코드명 카라 오브라이언의 마력에 의한 공간을 동조시키겠습니다.
비이이이.
몽몽으로부터 드물게 작동음, 아니 작동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라프가 움찔 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이내 별다른 기색 없이 얌전해졌다. -안심하십시오, 주인님. 코드명 라프로부터는 자연발생적인 마력을 이용할 뿐이니 라프의 구성체에 유해할 가능성은 1% 미만입니다.
친절한 몽몽 씨의 멘트가 이어질 때, 나와 대교는 다시 신형을 날려 경계선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자, 잠깐!”
뭔가 이상 징후를 느꼈는지 카라의 형체가 다급하게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치켜든 한 쪽 손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야 수의 앞발과도 같은 손이 대각선으로 그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와 거의 동시에 나의 정글도 역시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아?”
카라의 입에서 당혹스런 신음성이 흘러나오며 거의 완전히 드러난 전신이 스르르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슴에 선혈의 꽃을 피우며 쓰러지고 있는 카라의 옆을 스쳐지나 그대로 전진해 갔다. 내 상의 점퍼도 그녀의 칼날 같은 손톱에 케이크처럼 잘려져 있었지만 피부에까지 닿은 건 아니었다.
「몽몽. 방금 네가 뭔가 한 거냐?
-그렇습니다, 주인님. 코드명 카라의 안개화를 일시 정체시켰습니다.
와우. 그런 것까지 가능하단 말이지?
감탄하는 내 눈앞의 공간이 아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좌악- 투명 커튼이 걷히듯 흔들림이 사라지며 본래의 자연 스러운 풍경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들린다. 언제부터인가 들리지 않았었던 바람 소리며 모든 자연의 소리가 이제는 들려. 완벽하게 카라의 영역에서 빠져나온 거야. 그리고… 저 긴・・・가?
나와 대교는, 희미하지만 분명 자연의 소리가 아닌 소음을 놓치지 않고 방향을 잡았다.
단숨에 어두운 숲을 뚫고 달려가는 우리의 귀에 좀더 확실하게 무언가 부서지거나 묵직하게 쓰러지는 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 왔다.
그러나 소리의 진원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기분 나쁜 정적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치이. 분명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벌써 어디론가 튀어 짱 박힌 건지 우리의 이목과 몽몽의 스캔에도 걸리지 않다니… 으음. 그나저나 이거 어 째…………
「…아무래도 흑주님이 불리한 것 같아요.」
「내 생각에도 좀……………」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니 숲 속 여기저기에 꽂혀있는 화살. 날카로운 칼에 잘려 쓰러진 나무토막들, 그리고 총격에 깨진 바위들이 발견되었던 것이 다.
몽몽의 분석 화면에도 나오고 있지만… 거의 다 흑주의 공격 혼적이야. 분명 흑주의 일방적인 공격이 상대를 몰아 붙였던 것 같긴 한데.. 일단 먼 저 공격을 시작한 살수, 그것도 암흑 속의 적조차 대낮처럼 꿰뚫어 볼 수 있는 에메랄드 눈동자의 흑주가 이렇게까지 상대를 압박하고도 끝내 제압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상대의 기본 기량이 한수 위라는 반증…………! 게다가……………
「여기 이곳의 흔적을 흑주님이 남긴 것이 맞다면 ・・・ 부상을 입은 사람은 흑주님 쪽인지도.
대교가 가리킨 한 쪽 눈밭 위의 흐트러진 발자국이 흑주의 것임은 몽몽이 곧바로 확인해 주었고, 이어서 조금 더 떨어진 눈 속에서 흑주의 소음기 달린 권총이 발견되었다.
제기…………!
흑주와 정체불명의 괴인이 몸을 숨긴 방향은 뻔했다. 몽몽에게 정밀 분석을 요구할 것도 없이, 이런 눈밭 위의 혼적이라면 나도 어렵지 않게 추적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참 격렬한 전투 중이라면 몰라도, 철저하게 짱 박혀서 서로 일격필살을 노리고 있는 상황일 경우… 우리가 갑자기 끼어드는 것이 어떤 변수를 가져올지 알 수가 없으니… 으~ 그렇다고 계속 막연히 승부가 나길 기다릴 수도 없는데… 어쩐… 다?
ᅳ주인님!
웃!
흠칫 놀라 몸을 돌린 우리의 시선 속으로 뱀파이어 카라가 들어서고 있었다. 내 정글도에 당한 상처는 이미 말끔하게 회복되었는지 아무렇지도 않 은 걸음으로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치 능공허도(凌空虛道)을 쓰기라도 하듯, 그녀가 걸어온 눈 밭 위에 단 희미한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신, 정말 너무했어요. 숙녀의 가슴에 이렇듯 깊고 아련한 상처를 남기고 말다니……….”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끔찍할 정도로 요염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속삭이는 듯한 음성에 담 긴 달콤함도 몇 배 더 끈적 했다.
사내라면 누구라도 저 자태를 보거나 음성을 듣는 둘 중의 하나만이라도 접하자마자 미쳐 버릴 것 같은 악마적 매력이었다.
-코드명 카라에게 특화된 마력의 한 패턴으로… 주인님?
“유준 오라버니………?”
넋을 잃은 것처럼 카라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몽몽과 대교가 걱정스럽게 불렀지만, 나는 이미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솔직한 본심을 중얼거리고 있 었다.
“…빙고!”
나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대교나 카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나는 자칫 찬스를 놓칠까 싶어서 즉시 대교에게 전음으로 뭔가를 지시 하며 공공보법을 전개했다.
눈 위를 질풍처럼 달리며 목표물을 챙기는 순간, 카라도 뭔가 깨닫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우리는 허공에 수많은 잔영을 뿌리며 순식간에 뱀파이어 카라의 후위를 점해버렸다.
“이형환위(異形換位)………!”
뭐, 실전에서 공공보법의 질주에 이형환위의 급가속을 더하는 건 나도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성공한 것 같군.
이렇게 내 정글도의 날이 카라의 목을 가볍게 누르고, 대교가 좀 전에 눈밭에서 챙긴 나뭇가지 (흑주에게 잘린 나뭇가지들 중 하나)의 뾰족한 끝을 등의 한 점에 대는 동안에도 카라는 전혀 움직일 생각조차 못한 것 같으니 말이야.
“…본래는 수십 개의 환영을 보이게 할 정도로 빠르면서도 변화무쌍한 경신법인데 뱀파이어 귀부인의 눈에는 어찌 보였을지 모르겠군.”
“어떤 수법이었든 분명 저를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어요. 헌데….”
카라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말을 이었다.
“이제 어쩌실 건가요?”
“그야, 뭐・・・ 이럴 생각이지.”
나는 큼. 괜스레 목청을 한 번 다듬은 다음에 전방의 숲을 향해 무작위 전음을 날리기 시작했다.
「아~ 아- 전음테스트, 전음테스트~ 하나 둘 셋. 하나 둘……………」
에고, 진지해야 할 상황인데 나도 모르게 그만………
「음. 전방의 숲에 암약 중인 남자에게 알린다! 귀하의 영원한 동반자, 뱀파이어 카라는 지금 막 우리의 인질이 되었다!」
그래. 악당만 인질 잡으란 법 있나? 없지, 암.
「참고로, 우리 측 마물의 힘에 의해 카라의 안개화 능력은 봉쇄 중이다.」
몽몽선생. 미안.
「뱀파이어의 약점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린 언제든지 카라의 목을 치고 나무말뚝으로 심장을 꿰뚫는 것이 가능하다.」
‘세계정화재단의 공개 자료실’에 따르면, 쇠말뚝이나 여하간의 긴 거면 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중 나무 말뚝이 가장 효과가 높다고도 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싸움을 중단하고 나올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쯧. 나 아무래도 너무 가볍고 약한 분위기로 나간 것 같은데……………? 으음. 그래서 바로 반응이 오질 않는 건가…………?
쳇. 역발상 아이디어를 실천해서 적의 여자를 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역시 여자를 잡고 인질극을 벌이는 건 진짜 못할 짓이라 좀처럼 인질범 모 드가 되기 어려워……………! …제기, 하지만 기왕 망가진 거 좀더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루드.”
응?
내가 다시 애써 무게감 있고 살벌하며 끔찍한 협박 문구를 떠올리려고 하는 사이, 카라가 먼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영원한 시간의 감촉을 함께 공유해 온 나의 친애하는 동반자 루드…………!”
루드……? 그것이 정체불명 남자의 이름인가? 어쨌든 나보다 인질이 직접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더 효과가 좋을…………. “저, 무시당했어요.”
에?
“마안이 통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시. 알겠어요? 당장 이리 나와욧!”
도움 요청이 맞긴 한 거 같은데 말투가 어째………….
“루드. 어서 나와서 여자를 인질로 잡는, 이 파렴치한 남자를 징계해 주세요.”
으흑! 찔린다.
“당장 이 독사보다 사악하고 지네보다 징그러운…….”
“에이 쒸!”
나는 나도 모르게 정글도를 거두며 물러서고 말았다.
“안 하면 될 거 아냐, 안 하면! 나도 뭐 이딴 짓 좋아서 한 줄… 에이 씨파!”
“유준 오라버니…………..!”
함께 몸을 뺀 대교가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건 그렇다 치고 노골적으로 배시시 쪼개는 카라의 얼굴을 보니 내가 당했다…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 다. 하지만 역시 체질에 맞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게 더 싫었다.
“이봐! 루드인지 뭔지 하는 양반! 좀 전엔 미안했어. 하지만 당신이야말로 지금 어린 소녀하고 싸우고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우리 이러지 말고, 그 냥 남자끼리 맞짱 함 뜨자.”
-주인님.
「저어 당신께선 현재…………」
아, 아차!
“어. 아니면 커플로, 그래. 자기 파트너하고 조를 짜서 태그 매치… 어때?”
으~빨리 내공을 되찾아야지, 이거 불편해서 진짜 못해 먹겠… 어? 나온다?
이쪽의 일관성 없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흑주와의 팽팽한 대치는 또 어떻게 중지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루드라는 이름의 남자가 천천히 숲의 어둠 속으로부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균형 잡히고 탄력 있어 보이는 체형에 올 블랙 차림이 흑주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맨손………? 싸운 혼적을 분석하며 혹시나 했는데 정말 아무런 무기도 없이 흑주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건가? 아무래도 저 남자는…………….
“맞짱…이라. 오랜만에 들은 용어라서 반가웠어.”
음… 어쩐지 비웃는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그런 미소인걸? 게다가 한국말을 좀 하는 정도가 아니야.
“카라가 이미 밝혔듯, 나의 이름은 ‘루드’. 그리고… 한국명은 ‘정현욱’ 이라고 하지.”
한국…명! 백인 뱀파이어 여자와 커플을 이룬 한국남자…………?
아니 그보다!
“난・・・ 진유준. 우리 흑주는?”
“그 아이도 곧 나올 테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보다…..”
이미 십여 미터 앞까지 가까워진, 루드라는 남자가 새삼 내 눈을 지그시 응시하기 시작했다.
“꽤 감이 빠른 친구인 것 같군. 언제부터 눈치를 챈 거지?”
“뭘・・・ 말이지?”
“카라와 내가 ‘적이 아니다’라는 사실 말일세.” “이제 와서 적이 아니라고 자처하는 건가?”
남자는 공연히 모른 체 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후후- 아무리 카라가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웬만한 자들은 카라의 강력한 마력 뒤에 감추어진 진의를 읽지 못하기 마련이 야. 아끼는 소녀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자네는 계속 진심으로 싸움에 임하지 않고 있었어.”
“나름 진지했는데………….”
쯧. 더 이상 무리해서(?) 적대시하는 건 의미가 없으려나…………?
“그야 뭐, 꼭 알고 그랬다기보다. 왠지 흥이 별로 안 나서 말요.”
‘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진작부터 있었다고 해도 100% 확실한 게 아닌지라, 나름 애써 투지를 일으키려 애써 왔었다. 하지만 우리와 싸 우는 것보다 대교와의 고상한(?) 대화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한 카라, 게다가 이어서 등장한 이 남자는…………….
“당신이 엄청 강한 초고수라는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흑주를 맨손으로 쉽게 다룰 수는 없었을 거야. 흑주의 무공을 낱낱이 말고 있는 사 부의 사부쯤 되지 않는 이상.”
남자, 루드가 잔잔하게 웃었다.
“신, 그 아이에게 들은 모양이군.”
“…그래요. 하지만 이렇게………….”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일 만큼 엄청난 동안…이란 건 말도 안 되고!
“…뱀파이어 같은 존재가 아니면서도 ‘늙지 않는 남자’ 라는 사실은 듣지 못했죠. 물론 저 숙녀 분, 뱀파이어 귀부인에 대해서도요.”
말하면서 카라를 돌아보니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만큼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문득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더구나 그 사람 에스는 애써 비밀을 지키느라 사부의 이니셜만을 언급했었는데, 정작 당사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태연히 본명을 밝힐 줄은… 아마 그도 몰랐을 걸요?”
“후후~ 그 아이가 보기보다 좀 고지식한 편이기는 했지.”
슬쩍 떠보느라 굳이 ‘본명’을 운운한 거였는데… 반응들을 보면 정말 본명이었나 보다.
“제이, 아니 루드… 혹은 정현욱…………? 어떤 이름으로 불러드릴까요?”
“글쎄…….”
그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밖에도 날 칭하는 이름이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어렵군. 그 냥 내키는 대로 부르게나.”
“저야 당연히 한국 이름이 땡기지만… 아무래도 본명이 나을 것 같네요. 그걸로 하죠, 루드 옹.”
나의 탁월한(?) 선택에, 연세만큼 이름도 많으신 모양인 루드 옹께서는 얼마간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 소리로 웃었다.
“카라. 내가 이렇게 진심으로 즐겁게 웃는 것이 얼마만이지?”
“아아~ 최소한 60년 안 쪽에선 처음인 것 같아요.”
으음. 역시나 ‘옹’자를 붙일 만한 사람(?) 이었군.
-주인님.
「어, 몽몽」
-코드명 에스가 목표 저택으로부터 1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아, 잠깐. 조담놈은?」
-코드명 조담놈의 현재 위치는 10.3km 바깥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쯧, 그 녀석, 끝내 추적에 실패한 건가? 흐흐. 차라리 잘됐군. 녀석이 당분간 건방 떨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야.
“흐음. 이제 슬슬 올 시간이 된 것 같군. 신은 이때쯤의 달빛을 가장 좋아했지.”
수십 년 전의 기억을 정확히… 아니, 혹시 그게 아니라……………
“에스는 당신과 한 번 헤어진 후에는 다시 못 본 것처럼 말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요?”
“신의 입장에서는 그게 마지막이었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자주 제자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거든. 근래 백년 안으로 유일한 제자의 근황이 가끔 궁금해지더군.”
“무슨 입양시킨 자식도 아닌데, 굳이 몰래 보고만 갈 필요가⋯ 아니, 그보다…………! 알고 있는 거죠? 그 사람의 몸 상태를.”
수수께끼의 장수인간(?) 루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걸음을 떼어 테네시의 저택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우릴 막으려 했던 거죠? 그 사람의 상태를 안다면 무리하지 않도록, 당신이 먼저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함께 걸으며 묻자 루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에겐 신의 몸을 치유할 방법이 있는가?”
“그건 아직 아니지만………….”
나에겐 물론 거의 만능 의사까지 겸업하고 있는 몽몽이 있다. 하지만 동동의 1차 검사만으로도 그의 상태는 너무 심각한 것으로 나왔었다. 만약 몽 몽이 직접 암세포를 제거해준다 해도 이미 치명적으로 손상된 장기까지 되살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시간만 벌어 놓으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정상적인 현시대 의학이라면 볼가능하겠지만, 원판의 DP를 포함한 프리메이슨에는 장기이식쯤이야 우습게 여길 정도의 의학기술이 있다.
그리고 그 기술의 정점에 선 자로 평가받는다는 닥터 제이………! 그 양반이 우리 편인 것이다.
“그러니… 음.”
루드의 걸음이 멈춰 있었다.
“살리고 싶다는, 그런 감정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로군.”
“예. 그러니 일단 그가 무리해서 병을 진행시키는 걸 막고 나서……….”
뭐야. 왜 고개를 젓는 거야?
“나도 신의 수명이 오늘까지인 건 안타깝지만… 역시 그건 자네나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뭐? 오늘? 그리고 또 뭐라고?
“당신도 그냥 막연히 얘기하는 건 아닌 것 같군요.”
“그래.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쓸데없는 능력이 생겨버렸어. 언제부터인가 인간이 타고난 수명이란 것이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하더군. 개중에 는… 자네나 저 아가씨처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제자는 그렇지 못하다네.”
“쳇! 그딴 정해진 수명이니, 운명 따위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나와 관련된 사람의 생사는 그렇게 간단히 그렇구나, 하고 두고 보지는 않겠 단 말입니다!”
제기, 이 남자… 왜 이렇게 기분 나쁜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 같은 표정으로 날 보는 거야?
“자네에게 인과율(因果律)의 절대성에 대해 굳이 늘어 놓을 생각은 없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세계의 흐름을 깼을 때의 엄청난 부작용, 아니 정해진 인과율을 깨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아마 자네도 곧 깨닫게 될 거야.”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안다. 나도 한때는 나 때문에 역사가 바뀔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내 생존에 관한 준비조차도 조심에 조심 을 거듭했었고, 끝내 타임 씨의 방해로 대교를 데리고 오지 못했던 일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훗. 그렇지만 당신이야말로 이미 그 인과율인지 뭔지에서 벗어난 존재 아닌가요?”
난 아까 카라가 했던 ‘그 사람의 기원은 저도 잘 모르고 있어요’ 라는 얘기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영원한 생명을 가진 뱀파이어보다도 오래 사신 모양인데요. 그러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설득력이 없……”
아니, 잠깐!
나는 문득 뭔가를 깨닫고 말을 맺지 못한 채 카라에게 고개를 둘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온화하고 품위 있는 귀부인의 분위기였지만, 그 너머 로 여전히 비인간적인 요염함을 향기처럼 은은하게 풍기고 있는 여자 뱀파이어 카라는 나를 향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 붉은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가 날카롭게 달빛을 반사했다.
“당신・・・ 혹시?”
“그래. 우린 인과율 바깥의 인과율. 나의 제자가 자신의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 밖에 없는 거지.”
이 세계의 인과율 바깥의 남자, 루드는 테네시의 저택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도착해 버린 에스가 저택의 대문 바로 앞에 서서 조용히 저 택 안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떤 길을 택할지는 나의 제자 자신에게 달려 있어. 그가 정해진 운명에 순응한다면, 오늘 밤 다음 생을 위한⋯ 짧고 평화로운 여행을 떠나게 되 겠지. 하지만 만약 그걸 거부한다면… 우리와 함께 밤을 걷게 되겠지. 끝내는 후회할⋯ 영원한 어둠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