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27화 : 최강의 파티?
7 최강의 파티?
원판…………..!
그 배라머글 놈 때문에 별 꼴을 다 당하게 생겼어!
새삼 원판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 순간, 머리 위의 천장 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끼끽!
구조물의 틈이 벌어지는 소리? 으익!
본능적으로 몇 걸음을 물러서자마자, 내가 서 있던 자리로 투두두둑~ 벌레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쒸! 죽어! 죽어!
활시위처럼 팽팽한 도기의 실선들이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벌레들을 토막내 주었다. 그러나 벌레들은 토막이 나 진득한 체액을 흘리면서도 얼마간 꿈틀대는 저력을 발휘하며 한충 혐오감을 부채질한다.
환풍기를 타고 온 벌레 군단의 선발대(?)……? 쳇, 한 마리를 놓쳤 으윽! 젠장! 큰일 날 뻔했다!
“야 인마, 라프!”
뒤쪽에 있던 라프가 뜬금없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녀석에게 심도를 적중시킬 뻔했던 것이다.
“끄응?”
주인은 식겁했건만 슬쩍 돌아보는 라프의 표정은 평소처럼 ‘난 암 것도 몰라요’였다. 녀석은 아직 살아 있는 한 마리의 벌레에게 고개를 돌린다. 저 녀석, 날 따라다니는 일 외에는 다른 일에 거의 관심이 없더니. 하필 저렇게 징그러운 벌레에게 호기심이 발동한 건가………? 진짜 늑대 새깽이 마냥 깐족대고 벌레 주위를 돌기 시작 하면서 킁킁 냄새도 맡고 그러네? 간만에 지보다 약간이라도 작은 걸 만나서 그런가?
「…주인님. 스캔 결과, 해당 고대 곤충의 체내에는 인체에 유해한 세균이 최소 100종 이상 존재함이 확인되었습니다.」
우쒸! 가지가지한다.
“야! 라프! 이리 와! 더러워!”
내가 부르자 돌아보기는 하는데, 또 고개를 갸웃할 뿐이고 벌레로부터 멀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벌레도 라프에게 특별히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 이지는 않고 있었다.
“라프! 이리 오라니까! 빨리!”
다시 손짓하고 박수까지 치며 부르자 그제야 겨우 돌아오기는 했지만, 어째 자꾸 벌레 쪽을 흘끔거리는 폼이 꽤나 아쉬워하는 것 갈았다.
요 녀석, 벌레들이 마계의 생물이 아닌 이상 아무 도움도 못될 녀석이면서 왜 신경 쓰이게 하고 그래?
「주인님!」
웃! 드디어!
서걱! 우직! 우직! 우직! 우직!
선발대(?)에 이어서 벌레 군단의 본진이 도착한 것 같았다. 굳게 닫혀 있는 금속 엘리베이터 문이 거대한 무언가에 밀리듯 흔들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얼마나 엄청난 숫자가 몰려왔기에 저런 현상이… 으~.
“베이비 존! 뒤로 빠져서 소냐를 보호해! 빅 존은 선두로 나와!”
군소리 없이 내 명령에 따르기 시작하는 BB형제. 아무래도 이 무뚝뚝 헐크 형제는 ‘소냐와 은사마군을 제외한 인간 여자’만 무서울 뿐, 그 외의 모 든 생물체에 대해서는 거리낌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세균덩어리 벌레들과 뒹굴라고 할 수 는 없었다.
“빅 존! 가급적 벌레들과 직접 접촉하지 말고 해치워.”
불가능한 요구? 그렇지 않다.
빅 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팔을 좌우로 벌리며 과 악 주먹을 쥐었다. 전신에 힘이 들어가며 불끈불끈 강철 실타래 같은 근육의 솟구침 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특히 두 팔에 더 많은 힘이 집중되는 것 같지……………? 예전에 은사마군과 싸울 때 선보였던 로켓 주먹(?)이랄지, 하여간 그 공격의 파괴력이면 충격파 만으로도 벌레들을 없앨 수 있을 거야.
우직, 우직! 빠직! 우직! 빠직! 빠직! 빠직!
문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벌어지기 시작한 틈으로 보이는 시커멓고 번들거리는 것들이 우글우글… 으으
「주인님! 방충 대책이 수립된 장소는……………」
“빅 존! 목적지는 지하 3층 4호실이다! 니가 길을 뚫는 거야! 부탁해!”
“우워어~.”
빅 존이 포효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꽈직! 꾸둑!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앞으로 꺾여 쓰러지며 안쪽에서 콰르르르- 벌레 대군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멀리서는 검은 액체가 쏟아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그야말로 벌레들의 파도이며 해일이었다.
“우웍?”
빅 존의 포효 소리가 어째…………? 윽! 라프!
어느 틈에 라프가 빅 존의 다리 사이를 통과해서 앞으로 뛰쳐나갔던 것이다. 어이없게도 라프는 조금 전에 집적거렸었던 벌레 한 마리에게 다시 다 가가며 꼬리까지 흔들고 있었다.
“라프!”
늦었다!
“캐앵?!”
라프 앞의 벌레가 느닷없이 라프에게 달려들었다. 이어 라프의 작은 몸과 비명까지도 순식간에 다른 벌레들의 파도에 삼켜지고 있었다. “우와아~.”
빅 존의 두 주먹이 다시 들어 올려지며 강력한 기운이 집중되었고. 나 역시 반사적으로 몸이 앞으로 쏠리고 있었다.
“잠깐・・・ 아, 아니! 그냥 공격!”
내 명령 직후, 빅 존의 초강력 펀치가 밀려드는 벌레 떼를 향해 내리 꽂혔다.
쿠우우욱-
소리가 달라? 오히려 튕겨나온… 윽?
빅 존의 육중한 몸이 둥실 떠오르는 순간, 나는 황급하게 몸을 납작 엎드렸다.
후웅~~ 쿠당탕!
내 머리와 등을 스치고 지나간 빅 존이 내 뒤의 복도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빅 존이 간단하게 던져져? 벌레 떼에게…………? 그럴 리가 없지! 몸을 일으키며 고개도 들어보니 빅 존의 등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던 상황을 좀 더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우선 분명한 것은, 빅 존의 초강력 펀치와 함께 빅 존의 몸까지 날려버린 ‘어떤 힘’이 벌레들의 집합체 안쪽에서 터져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폭탄이… 섬광탄의 광채가 암흑을 뚫고 나오다가 끝내 모든 어둠을 지워버린 것처럼 그렇게 깔끔할 정도로 벌레들이 사라져버리다니!
“라프.”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지금의 라프 귀에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벌레들의 잔해조차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복도 한 가운데 에 버티고 선 라프는 계속 씩씩- 콧소리를 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에고. 저 녀석, 만화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눈동자가 불타고 있어.
‘방금 나 깨문 놈들, 다 어디 갔어? 빨리 다나와!’
어쩐지 이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누가 마계 늑대 아니랄까 봐………
「…강력한 마력의 순간적인 방출 현상이었습니다. 해당 현상을 정면으로 받은 코드명 ‘빅 존’의 신체 손상은 5분내에 회복 가능합니다.」
“끄으음.”
라프의 마력 발산에 밀려 날아갔었던 빅 존이 묵직한 신음성과 함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전에 나의 정글도 일격을 맞고도 멀쩡했었던 녀석답게 이번에도 큰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날아간 빅 존보다는 그런 빅 존의 팔과 다리에 깔린 세이버 삼총사들이 더 아프다고 캉캉거리고 난리로군.
「…지금까지 코드명 라프는 마력의 현 세계 구현・・・ 즉, 구체적 물리 현상을 동반한 마력의 자발적 응용 징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상황은 돌발적인 감정 변화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며, 차후의 라프 관리 방침에 변화가 필요할 것으로……………」
간단히 말해서, 마력으로 뭘 어쩌기는커녕 그냥 암 생각 없이 지내기만 하던 라프가 방금 완전 스팀 받아서 폭발해 버렸다는 거다.
조금 전 나는 빅 존에게 벌레 떼와 라프를 동시에 공격해 버리라고 했었는데, 그건 그 와중에도 ‘명색이 마계 늑대씩이나 되는 녀석이야!’라고 믿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설마 이 정도 상황으로 이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냥 자기 방어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도였는데… 으음. 라프 녀석, 방금 지가 다 날려버린 것도 모르고 여전히 열 받아서 두리번두리번 벌레들을 찾고 있어. 일단 녀석을 좀 진정 시키는 건 조금 미루자.
어느 사이 라프는 20여 미터 정도. 즉, 지금까지 중에서 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 있었다. 녀석의 불타는 눈동자가 향한 곳은 벌레 대 군이 쏟아져 나왔었던 엘리베이터 문 쪽이었고, 그 안에서는 다시 스멀스멀 몇 마리의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본 라프의 작은 입이 쩌어 억- 있는 힘껏 벌어졌다.
혹시, 라후의 혈족 본체와 같은……?
“전원, 충격파 대비!”
나는 다급하게 외치며 나부터 귀를 막고 비루한 내공 모두를 방어에 집중했다.
캬아아아아아아앙~!
라프의 입에서 예상했던 충격파가 터져나오며 녀석 앞의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라프도 진짜 저 공격을… 내가 내공을 잃지 않았을 때도 방어하다가 피를 토했었던 추억의(?) 충격파 공격을………!
우우우우우우~.
어느덧 짧게 충격파 공격이 끝났는지, 의외로 작고 어딘가 귀엽기까지 한 소리가 여운처럼 울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지 않은 시간의 공격 결 과는 매우 확실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던 자리에는 아예 뻥 뚫린 구멍만이 남았고 벌레들도 당연히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파괴력이 라후의 혈족 본체의 수준은 아니었고… 충격파의 방향도 목표에만 집중되어서 우리 쪽에는 큰 파장이 없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이거, 이거 참…….
나는 아직도 약간 울림이 느껴지는 귀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저었다.
처음의 마력 폭발은 빅 존이 거의 다 몸빵으로 막아줘서 그 뒤의 나나 일행 모두가 무사했지. 게다가 어떤 원리인지 벌레들 말고는 복도의 구조물 에 거의 손상이 없어.
마력 폭발은 비록 엄청 나기는 했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이랄지… 환상에 속하는 에너지가 반쯤 섞인 느낌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방금의 충격파는 완전히 이쪽 세계의 파괴 에너지였어.
작지만 무지하게 위험한 폭탄(?) 라프는 지가 뚫어버린 구멍으로부터 무심히 몸을 돌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쪽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조쬐깐한 녀석이 마계 늑대라는 실감이… 아, 잠깐. 혹시 그래서 그런가?
나나 심지어 몽몽도 라프의 고향인 마계(魔界)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인 악마나 요물들의 이미지를 생각해봤을 때, 마계 생물들의 평 균적인 외모는 말 그대로 ‘괴물’이라고 봐 도 될 것이다.
원시 벌레가 고향의 생물과 비슷한 느낌인데다 자기와 크기까지 비슷하니까 친근함을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구나. 라프로서는 간만에 만난 친구감 (?)에게 같이 놀자고 접근했던 건데 이것들은 개떼 러시로 달려들어 먹잇감 취급을 했으니… 그래, 그렇게 열 받을 만도 했군. 더구나 라프는 마계에 서도 명문 귀족 가문의 후손(?)인데 말이지.
“꺄앙! 꺄옹! 꺄옹!”
세이버 삼총사들의 울음소리였다. 돌아온 라프는 이미 평소의 ‘난 암것두 몰러유’ 분위기였으나, 세이버 삼총사들이 괴수 체면도 잊고 비명을 질러 댔다. 대충 해석(?)하면…………….
“저리 가! 오지 마! 무서워! 오지 마! 무서워!”
이쯤 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진유준 팀 소속 괴수들 간의 서열은 자동 결정된 듯싶었다. 문득, 현재 출타 중인 백수지왕(百獸) 금모신원(金 毛神猿) 금동 옹이 떠올랐다.
스펙 상으론, 금단의 마공지맥을 타고나 혜성처럼 괴수무림계에 등장하여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 시작한 후기지수 무념동자 라프의 잠재력이 우세할 것 같군.
하지만 전설의 영약 고려산삼을 껌처럼 씹으며 대성하여 천년 동안 최강을 자랑해 온 전대 고수 짝퉁신원 금동 옹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나는 약간의 엄한 상상을 하며 라프를 들어올려 어깨 위에 앉혔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이 착용감(?)은 라프만의 장점이었다.
뭐… 어찌 되었든, 우리 애들끼리 다툴 일은 없겠지. 뭣보다 금동이가 이런 새내기 늑대와 서열 다툼을 할 정도로 철없는 녀석이 아니니까 말야.
“저어…….”
벌레들이 없어지고서야 겨우 정신을 챙긴 소냐가 이번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라프를 가리킨다. 왠지 뭘 묻고 싶은지를 알 것 같았다.
“이 녀석도 혹시 너희들과 같은 계열이냐고?”
고개를 끄덕이는 소냐의 표정에는 처음 라프를 보았을 때보다 짙은 호감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글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사실 라후의 혈족 3형제의 마력 실험으로 만들어진 돌연변이 실험체일 가능성도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아직은 나도 잘 몰라. 그냥 너희들처럼 다소 특이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뭐.”
난 그렇게 말하며 라프를 소냐에게 건네주었고, 소냐도 주저 없이 라프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추운 북방계 소녀와 새끼 늑대의 조합이 꽤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영부영 15분쯤 후.
우리 ‘지하 공룡 테마 파크'(?)의 손님들은 설렁설렁한 분위기로 중앙 시스템실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벌레 떼의 습격을 받을 때까지도 그리 크게 고생한 건 없었지. 헌데… 그 이후로는 더 편해져 버렸어. 이거, 원판에게 미리 화를 냈던 것이 약간 미안해질 정도니 ……….
“어, 한 마리 또 나왔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턱짓한 건, 용도를 알 수 없는 방의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랩터였다. 소냐가 재빨리 라프를 그쪽으로 내밀자 라프가 처 억 입을 벌린다.
캬웅!
라프의 짧은 충격파 한방이 쏘아져 랩터의 머리에 적중…………! 그대로 맥없이 쓰러지는 랩터를 보고 있자니까, 이제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재밌냐?”
내가 묻자 소냐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소냐에게 라프를 건네준 것에 특별한 뜻은 없었다. 그런데 5분쯤 전, 라프를 안고 오 던 소냐가 우연히 저 ‘살아 있는 충격파 발사 장치’의 사용법을 알아냈던 것이다.
사실은 얼결에 자신의 능력을 깨달은 라프가 그걸 남발하게 된 것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지………? 잘도 소냐가 겨냥한 목표물에만 총구(?)를 열고 있으니 말이야.
「그동안 코드명 라프의 지능은 정상 생물보다 빠르게 성장해 오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상태라면 코드명 금동의 초기 교육에 사용된 프로그램을 적용시켜도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몽몽. 네가 나 대신 이래저래 신경 쓰느라 고생이로구나.”
「별 말씀을…………! 요몽을 상대하는 고충에 비하면……………」
훗. 우리 몽몽 선생의 천적은 역시 그 말괄량이 여동생뿐인 모양이군.
「헌데, 주인님」
“음. 왜?”
「이 지하 기지에 도착한 이후, 저는 지속적으로 해킹을 시도하여 3분 21초 전, 거의 모든 가용 시스템의 데이터를 확보했습니다.」
오오~ 과연 우리의 몽몽 선생!
「그러나 확보된 데이터에서는 현재의 전황, 즉 프리메이슨과의 싸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정보를 발견하지 못했습니 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거의 모든 데이터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물리적으로 분리된 시스템의 데이터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확보된 중앙 시스템의 데이터 분석 결과, 일부 보조 시스템에 특별한 추가 데이터가 존재할 가능성은 0.2%이하로 낮습니다.」
천하의 몽몽조차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꼭꼭 숨겨진 비밀이란 얘긴가? 아니면 기계 속의 데이터가 아니라 다른 어떤 형태의 비밀이…………
“뭔지 궁금하시겠죠?”
너무나 자연스러운 타이밍으로 들려온 원판의 음성 때문에 고개를 들어보니, 복도의 천장 쪽에 설치된 모니터가 켜지며 징글맞은 원판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의문이 더욱 커질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던진 말인데… 틀렸나요?”
나는 대꾸 없이 조용히 품안을 뒤져 어머니께서 억지로 넣어 주셨던 부적을 꺼냈다. 그리고 원판의 얼굴이 나오는 모니터 위에 턱, 붙였다. 어머니 께서 단골로 가시는 점집에서 나에게 삼재가 지독하게 들었다며 팔아먹은 부적이었다.
꽤 비싸게 사 오신 부적인 모양이지만, 먼 곳에 퍼질러 있으면서도 몽몽의 거대 기지 시스템 해킹 시간과 나의 생각 흐름까지 가늠해내는 저 ‘초강 력 귀신(!)’ 놈에게 통할………….
“훗. 타이밍이 대충 맞은 모양이군요.”
…리가 없지. 그치만 뭐, 저놈의 뺀질한 낯짝을 어느 정도 가려주는 것만으로도 나름 쓸모가 있는 셈이야.
“헌데, 자기 자신이 초현상의 지존이며 마계에서 온 애완동물까지 기르는 분께서 조잡한 싸구려 부적을 쓴다는 건….”
“됐어. 울 엄니 취미야. 그건 상관 말고… 음.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갈 거면 그냥 꺼져 줘.”
부적에 어느 정도 가려져 있음에도 녀석이 슬며시 미소 짓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네, 뭐. 그럼 계속 수고하시길……….”
“야, 야!”
“그냥 꺼지라면서요.”
“쳇. 어물쩍이라도 좋으니까 힌트 좀 줘 봐.”
그래, 까짓 거. 이왕 참기로 한 거, 다소 굴욕적이면 또 어떠리. 나중에 몰아서 쥐기뿔면 되지! 암!
“흐음. 이제 저를 좀더 이해해주시게 된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살기는 더욱 짙어진 듯도 합니다만…….”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훗. 어쨌든, 그렇게까지 나오시니 저도 어쩔 수 없군요. 현재 가장 중요한 비밀을… 어물쩍이 아니라 아주 확실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과연 어떤 비밀이 아, 잠깐. 저 녀석 방금 ‘현재’라고 했지? 현재 가장 중요한 비밀?
“실은… 이미 끝났습니다.”
“…뭐?”
“이 섬, 에볼루션 필드 9호를 찾아온 저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유준 형님은 현재 헛·수·고를 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냐?”
“예.”
“…그 목적이 뭐였는지는…………….”
“당근, 안 갈켜 드립니다.”
“…글쿤.”
“글쵸.”
나는 조용히 정글도를 들어 모니터에 붙은 부적을 떼어 냈다. 가려져 있던 원판의 얼굴은 해맑고 환하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먼저 입을 연건 원판이었다.
“후훗. 장난이 너무 심했던 것 같군요. 설마 정말 화가 나신 건 아니겠죠? 나중에 모든 비밀을 알게 되면 절 이해하실 수 있…………”
“원! 판!”
“예, 유준 형님.”
나는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고 히죽 웃었다.
“널 죽이러 가겠다.”
“아, 잠깐 진정하시고 대화로……..”
“지금!”
“곧!”
“란! 짐 싸! 서둘러!”
모니터는 급히 꺼졌고 나는 지금까지 왔었던 방향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난 분명 웃고 있는데도 소냐와 세이버 삼총사, BB형제까지 모두 한 쪽 벽에 찰싹 붙어서 앞길을 터주고 있었다.
「주인님. 코드명 원판과 란은 CR의 구성원 중 ‘비비안’을 미리 호출해 두었습니다.」
BB형제의 소녀 버젼 비비안!
「코드명 비비안의 기동력을 주인님의 현재 경공 수위로 따라잡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역시, 그 뺀질이 시키는 첨부터 마지막엔 튈 생각이었어. 하지만……
“야! 니들!”
난 잠깐 걸음을 멈추며 세이버 삼총사를 돌아보았다.
“세이버 원, 투, 쓰리! 빨리 일루와!”
녀석들은 눈치 빠르게 나의 고함 소리와 손짓을 이해하고 후다닥 달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를 등에 태운 세이버 1호(?)는 쏜살같이 지하기지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날렵함의 대명사 고양이과 괴수다운 스피드여서 맞바람에 얼굴이 따가 울 정도였다.
「이제 원판 측 기동력을 상회합니다. 그의 현재 도주 루트는……………」
“좋아! 이대로 가는 거야! 뺀질이 잡으러, GO! GO~!”
나의 격려(?)에 신이 난 세이버들이 더욱 스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저만치 앞의 숲에 서 있던 호리호리 소녀들, 고슴도치와 독극물 자매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꺅!”
“어맛!”
CR의 소녀들이 비명과 함께 좌우로 피한 것이 괴수 세이버들 때문인지, 아니면 그 위에 정글도를 치켜들고 핏발선 광분모드의 군발이가 타고 있 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 왕대장님… 어?”
“응?”
“어?”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던 몇몇 CR들의 옆을 그냥 휘익-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다. CR들의 아무것도 모르는 태도와 표정을 보니, 원판은 비비안을 뺀 다른 CR들에게는 날 막으라던가 그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있⋯을 리가 없어, 저놈은!
30여 미터 앞으로 거대한 소녀 비비안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팔에 원판과 란을 각각 안고 있는데도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양쪽에 기껏해야 인형 하나씩을 들고 있는 것처럼 가뿐해 보이기는 했지만, 나의 새로운 괴수 자가용(?) 세이버들의 스피드에 비해서는 한 수 아래 인 것 같았다.
“원판! 너 이 쉑!”
고함쳐 부르자, 란이 먼저 화들짝 놀라더니 공포에 질린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원판은 여전히 얄미운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이렇게 빨리 쫓아올 수 있을 줄이야! 그 괴수 고양이를 거둔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핫! 역시 대단한 형님이셔!”
“닥쳐! 넌 이제 주거써!”
“아하하하핫~!”
원판의 행복한(?) 웃음소리와 나를 향해 두 팔을 내민 듯한 모습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죽! 어……?”
굳게 움켜 쥔 정글도를 통해 사정없이 발산…되려던 나의 도기가 어느 순간 흐트러지고 말았다.
이 쒸! 뭐야, 이거! 저 빌어먹을 뺀질이의 모습이 하필 이런 때 그 사랑스럽고도 안쓰러운 아이와 겹쳐 보이다니..
“너, 너, 이 씨키! 비겁하게 하연이, 아니 하은이를 흉내내기냐!”
나의 질타에 원판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것 같았다.
“…훗.”
놈은 애써 빠르게 표정을 회복했다.
“흉내라니… 그 아이와 난 쌍둥이거늘… 흉내낸다 욕하신들, 난들 어찌하오리까.”
젠장.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방금 네놈은 분명, 예전의 진하연이 나와 처음 만났을 때의 분위기를 자아냈단 말이다! 벌써 언제 적인지. 만약 내가 지난 얘기를 책으로써 놓았다 해도 10권 넘게 전에나 나올 법할 만큼, 꽤나 지난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난 소위 늑대가 지키는 성(城), 약산성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하연이 내게 달려들어 안겨오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뭐, 사실 그때 그건 순수하게 나의 감정이 아니긴 했지. 당시 내가 몸 담, 아니 영혼 담고 있던 원판의 육체 때문에 원판의 쌍둥이 동생에 대한 감정에 동화되었던 거긴 하지만 그래도 진하연이 환생한 하은인 결국 진짜 내 동생이 되었.. 아니, 이 시대 기준으로는 이미 되어 있었는데 몰랐었던 것뿐이니 처음의 감정도 나의 감정…이 맞나………? 으~ 순서가 헷갈리~.
“이거 참.”
원판이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상 밖의 이유와 타이밍으로… 도주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군요.”
“…쳇. 인정. 기분 팍 다운됐다.”
나와 원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탈것(?)을 멈추게 했다.
쿠쿠쿡~.
비비안의 묵직한 브레이크음(?)과 달리 나의 세이버들은 고양이과 괴수들답게 주르르-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정지하고 있었다.
엔진의 힘이 우세한데다 승차감과 정숙성에서까지 나의 자가용 괴수들 Win! …쳇. 이 섬에 와서 내가 뺀질이 놈에게 이긴 건 고작 이 정도인가? 나는 매우 껄쩍지근한 결과를 자인하며 세이버 1호의 등에서 내려야 했다. 우리의 약간 긴박해지려다 만 추격전이 끝난 곳은 섬의 최북단에 위치 한 공터였고, 지금 원판 녀석의 등 뒤로 보이는 저 비행기가 바로 오늘 사냥꾼 놈들을 데려온 비행기였다.
당연히 원판은 저걸 타고 튈 생각이었던 건데. 으음, 이제 어쩐다? 이 자식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든, 나는 나대로 막가는 분위기에서 꼭 확인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건만, 이렇게 어영부영 분위기가 식어버렸으니……………
“…너, 위험해지면 진짜로 저걸 쓸 생각이었냐?”
내가 비비안 쪽을 턱짓하며 묻자, 원판은 피식 웃으며 비비안을 돌아보았다. 지금 비비안의 허리춤에는 수류탄 몇 개가 매달려 있다.
“예. 저의 행동철학에 반하는 물건이긴 하지만… 저도 일단 살고 봐야지요.”
“너의 행동철학・・・・・・? 끝까지 품생폼사, 쿨하고 우아한 자태의 두뇌파 악당… 뭐. 그런 거?”
“후후. 너무 비꼬지 말아주십시오. 그래도 이번엔 유준 형님께 맞출 수 있도록 나름 애를 썼습니다.”
“쫓아오는 나에게 수류탄을 던져가며 도주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힘만 짱 쎈 단순무식 진유준’에게 어울리는 대응이라 이거지?”
“훗. 유준 형님도 참. 형님도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신 건 아니면서……….”
쳇, 다시 시비를 걸어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살려볼까 했더니… 역시 힘들겠어. 조금 전까지가 적당하게(?) 열받고 좋았는데,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서 하은이를 떠올려 가지고…………….
“으음. 이미 눈치 채고 계셨듯, 계획대로라면 조금 전의 상황에서 그대로 달아나야 했겠지만……….”
어느 사이 원판의 잔잔한 미소에 가벼움이 사라지고 있었다.
“기왕 이리 되었으니, 미룰 것 없이 지금 한 가지 일에 대해 물어 보고 싶군요.”
지는 전부 감춘 채 깐족깐족 약만 올리던 놈이 이제 오히려 나한테 뭔가 묻겠다는, 이 뻔뻔한 싸가지를 당장 능지처참…하고 싶은 분노가 되살아나 긴 하지만… 쯧.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아 주자.
“뭔데. 지끄려 봐.”
“… 얼마 전, 형님께서 대교 양을 잃었다는 생각에 그 금단의 마공을 발동했을 때 말입니다. 그 당시의 일을 얼마나 기억하고 계십니까?” 에? 이건 또 웬 뜬금없는 얘기?
“어, 뭐, 전부 대충은…….”
“대충이라……! 닥터 제이는 형님이 분명 시공간을 넘어 사도들을 직접 공격했음에도 그들의 면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게. 그랬어. 하지만 뭐랄까, 나중에 잊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잘 안 보였던 것 같아.”
생각해보면, 아니 가끔 다시 생각해볼 때마다 더 아득하고 실감이 나지 않는 경험이었다. 난 그때까지 12인의 사도들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고, 지 금 역시 그들의 얼굴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때는 무조건・・・・・・
“그들이 누구란 사실만은 확실하게 느꼈었던 겁니까?”
“그야 당연히…………! 그러니까 칼부림했지.”
아무리 꼭지가 돈 상태였어도 그렇지, 지구 반대편에 숨어 있는 원수들이 갑자기 손에 잡힐 듯 보이고, 거기다 직접 공격까지나 할 수 있었다는 건・・・ 으음. 역시 난 그때 인간이 아니었어.
“역시, 지나치게 착한 청년이로군요, 당신이란 남자는.”
“에? 뭐?”
“그런 상황에서조차 ‘나이 먹은 노인을 해치고 싶지는 않다’는 심리가 작용하여 상대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으니 말 입니다.”
“어, 그게 그랬으…려나? …훗. 난 역시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모범 청년인가 봐.”
난 새삼 나의 모범성(?)을 깨닫고 쬐금 뿌듯한 기분까지 들었지만, 원판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원판은 진짜 중요한 일이 뭔지 말하려 했고, 나는 놈에게 정글도를 그었다.
시이이익.
깔끔하게 허공에 그려진 정글도의 궤적을 타고 원판의 검은 머리카락이 선혈처럼 날렸다.
…굿! 원판은 물론이고 나 자신까지 속인, 그야말로 완벽하게 뜬금없는 타이밍에 뜬금없는 한 칼… 성공!
지금 원판이 짓고 있는 표정, ‘상황이 지나고 나서야 급하게 앞뒤를 생각하는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비로소 씨익 웃으며 정글도를 거 두어 다시 어깨에 걸쳤다.
사실… 원판이 방금 하려고 했던 말에 대한 궁금증 왕창,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는 마음 쬐끔, 뒷일에 대한 우려… 기타등등 이런저 런 잡념이 적지 않았었지.
하지만 난 그 모든 것을 ‘이 싸가지 깐족 천재의 시껍한 표정을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생깠단 말씀…………! 그게… 뭐, 시껍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지 만, 그래도 어느 정도 꾸밈없는 표정을 본 것 같기는 하지…………?
내가 나름 만족해하는 동안, 원판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 볼 듯하다가는 결국 그냥 손을 내렸다. 방금 내 정글도는 예전의 언 젠가처럼 원판의 소위 엘라X틴 머릿결을, 이번에는 아주 왕창 잘라낸 참이다.
“사실 아까 열 받은 김에 겸사겸사 확인하려고 했던 건데 말야. …훗. 넌 역시 머릿빨이었어.”
고전 미녀화의 주인공처럼 우아하고 단아하면서 섹시함까지. 사내놈이(!) 발산하던 재수결핍의 원천인 머릿결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놈의 헤어 스타일도 당분간은 아무리 신의 손을 가진 미용사가 다듬어도 기존 컨셉 유지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아아~ 저도 아직 멀었군요.”
“짜식. 그렇다고 뭔 한숨까지 그렇게 쉬고 그래?”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원판의 표정이 어느 사이 평소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만은 그야말로 전혀 예상 못했으니까요. 형님의 일도가 무심의 경지라는 건 새삼 놀랄 일이 못되지만, 예상밖의 방향에서에서 파고드는 돌 발성과 집요함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군요.”
“훗. 맘대로 해라. 대신, 담에 또 어설프게 날 다루려고 했다가는 아예 영구나 맹구 머리가 될지도 몰라.”
“만약 그랬다가는 저보다 란이 기절할… 아, 이미………….”
원판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우릴 지켜보고 있던 란을 돌아보다가 말끝을 흐렸다. 원판의 엘라틴 머리카락을 원판 자신보다 사랑하고 집착하는 듯한 여자 란은 벌써 졸도한 상태였다.
비비안의 팔에 들려 늘어져 있는 란의 얼굴에는 핏기가 거의 없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심한 것 같은데?”
“아뇨. 실은…….”
원판은 졸도한 란의 부근에서 알짱대고 있는 내 자가용 세이버 삼총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란은 ‘고양이 공포증이 있습니다. 그래서 충격이 배가 되었던 것 같군요.”
에…………? 그러고 보니, 아까 쫓아온 나를 봤을 때의 표정이 지나치게 공포에 질려 있다 했더니 그게 날 보고 그런 것이 아니었나 보네?
고양이 공포증을 겨우 겨우 견디고 있다가 원판의 머리가 이발되는 걸 목격하고 끝내 정신줄 놔버린 여자 란. 그녀가 깨어났을 때, 나 진유준… ‘고 양이 타고 출몰하여 사랑하는 님의 머리카락)를 앗아간 남자’를…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약간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유준 형님께는 죄송하지만…….”
・…응? 이 녀석까지 왜 새삼 드물게 심각한 표정이 되는 거야?
“더 이상의 돌발 상황은 허용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란을 위해서라도.”
“야, 야! 하필 그런 대사를 당사자가 기절했을 때 하냐?”
“후후. 전 형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수줍음이 많은 남잡니다.”
“…퍽이나.”
“어쨌든, 일단…….”
원판은 비비안에게 뭐라 낮게 명령했고, 비비안은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비행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 면허가 없으니, 란이 깨어날 때까지 좀 더 머무를 수밖에 없겠군요.”
원판은 아까의 대화를 계속해야겠다는 어조로 말했고, 나 역시 12인의 사도에 대한 얘기가 궁금했지만 그래도 난 그 전에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었다.
“그, 뭐냐… 내키는 대로 지르기는 했는데, 여기서 비비안이나 란 앞에서 들킨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새삼 원판을 응시하며 마저 물었다.
“너의 그… 나와 거의 동급의 ‘무공’을 말야.”
그래. 조금 아까, 원판은 분명 나의 일도를 피했었다. 본래는 머리카락 따위가 아니라 놈의 목을 정확히 노렸었던 나의 정글도를.
“훗.”
원판은 거의 반사적으로 웃었다.
“형님과 동급이라니요. 지나친 과찬입니다.”
…물론, 단 일도를 피해냈다는 것으로 나와 동급이라고 판단한 건 아니고 일단 운을 띄워 본 거기는 했다. 하지만 거의 사정을 두지 않았던 나의 공 격을 전혀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하기엔 충분했다.
다만 한 가지, 아직도 의문인 건⋯ 조금 전 내 공격을 피하는 순간에도 평소처럼 ‘내공 운용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인데…………
“기껏해야 3분… 아니 그보다도 짧을지 모를 시간 동안 얄팍한 재주를 부릴 수 있을 정도일 뿐입니다.”
정말 얄팍한 재주에 불과한 수준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3분? 달랑?”
“예. 이 저주받은 몸으로는 잘해야 그 정도가 한계입니다.”
이것 봐라? 이거, 거짓말 아닌 것 같지?
몽몽은 전부터 원판의 육체 상태를 스캔해서 변화가 없음을 체크해 두었었다. 하지만 그건 원판이 몽몽 전용 스텔스 장비를 갖추기 전까지의 얘기 다. 프리메이슨은 고등 생물을 똑같이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조직인 것이다.
지금의 프리메이슨이라면… 버그와 오류투성이의 이 녀석 육체를 언제든 병약 버그 패치하고 무공 가능 업그레이드가 적용된 서비스 팩까지 깔아 주거나, 아예 그런 완성형 육체로 교체해주는 것도 가능할 거야.
근데 설마 달랑 기본 버그 패치만… 즉, 천년 전처럼 항상 골골하고 감기만 들어도 사경을 헤매는 수준만 면하게 해주었다는 건가?
“지금 그 말, 그 육체가 전혀 강화처리 되지 않았다는 얘기지?”
“그렇습니다. 유준 형님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 병약한 육체 그대로입니다.”
“에? 강화는 고사하고 버그 패치도 안 했다고?”
“전 분명 ‘그냥 그대로’라고 말했습니다.”
“잠깐. 그럼 혹시………….”
나는 대교가 주가혜의 육체로 근원진기(根源珍氣)를 끌어내어 썼던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대교야 어차피 자살할 생각이었으니 팍팍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근원진기, 혹은 비력(秘刀)이라고 칭해지는 그 생명을 깎아 쓰는 힘을 생각하시는 거겠죠?”
원판은 앞서 말을 꺼냈지만,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니라 말하고 싶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군요.”
…하긴. 나도 지금까지 몇 번 근원진기를 썼었다고는 해도, ‘그게 정말 100% 확실하게 근원진기였다’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 심증은 있지만 물증 이 없는 경우라고 할까…………?
뭐, 나나 대교 급의 기질을 가진 고수들이 많아서 자주 임상실험(?)을 하면 나름 과학적인 증명 데이터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누구든 일부로 그 딴 실험을 할 리가 없지.
“일단, 저주받은 자의 발악이라고 해두죠. 이 저주받은 육신이 라도 근육 한 가닥, 기운 한줌. 심지어 심장이 뛰는 것조차 멈출 정도로 모든 힘을 한순간에 한 가지 용도로만 쓸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 그러한 미친 생각을 거의 실현 한……”
・나 참. 실제 구사할 무공이 뭔지는 몰라도, 기본은 진신지체(眞身之體)를 말하는 거잖아……? 그게 말이 쉽지, 나 같은 몸빵 전문도 죽기 반보 직 전에서야 얼결에 해냈었고 지금은 또 재현하지 못하고 있는 초특급 경지…………!
아무리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무공을 연구해 온 녀석이라지만… 우쒸! 이거 나도 더 분발해야지, 까딱하다가는 이 뺀질이 두뇌파에게 칼부림에서마저 밀리는 수가 있겠는 걸?
“으으음. 그럼 배터리… 아니 하여간, 재충전 시간은?”
“재충전……? 그런 건 없습니다.”
“뭐?”
“물론 죽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르는 만큼 회복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저의 이 육신은 근본적으로 유준 형님처럼 한계까지 힘을 쓰고도 간단히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하긴. 손에 자기만 무기가 있어서 맨손의 적을 치다가도 먼저 지쳐 죽기 십상이지, 저 겉만 번지르르한 몸은 말야. …으음.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나도 포기했었던 저 허깨비 육체를 일회용이나마 쓸 수 있는 무기로 만든 셈이니……………
“일단, 좀 전엔 좀 미안했다. 내 칼 피하느라 수명이 한 달은 줄었겠네.”
“후후. 설마 유준 형님에게 사과의 말을 듣게 될 날이 있을 줄은……”
“그리고, 그동안.”
나는 한 걸음 원판에게 다가가며 손을 들어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욕봤다.”
원판의 얼굴이 굳더니 뭐라 입을 열지 않았고. 나도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의 짧은 침묵 후.
나는 어쩌다보니 사과에 격려까지 해준 나 자신이 싫어져서 먼저 몸을 돌렸다.
“오해하지 마라. 난 뭐든 아득바득 노력해서 이루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너는 빼고야. 여전히 너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 “어.”
“말씀은 알겠지만…….”
“됐어. 오늘은 이만 찢어지자. 난 우선 KKK단 놈들부터…
“12인의 사도.”
…?
“정작 본래의 대화는 하다가 만 것 같습니다만…….”
“그랬나, 참?”
어색하게 다시 돌아서는 내 앞에서 원판은 키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이지 귀여운 형님이시………….”
“죽을래?”
빌어먹을. 역시 이놈하곤 그냥 적군이었을 때가 편했는데………
“…쳇. 그럼 언능 말해. 대체 그때 일 중에서 뭐가 중요했다는 거야? 12인의 사도들 얼굴이 아니면 뭐, 다른 걸로 놈들의 정체를 알 수도 있는 거 “야?”
“으음. 그건…….”
원판의 표정이 다시 약간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 멤버들 중 한 명인 ‘엘’, ‘혼돈의 사도 엘은 유준 형님에 의해 제거되었고, 아직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이제 11인의 사도라고 해야겠군 요.”
엘이 혼돈의 사도…………? 사도들마다 별명이 있는 모양이군. 그러고 보니 그 작자는 그때 나에게 혼돈의 무슨 존재 어쩌고 했었지, 아마?
“남은 11인 중 한 명은 우선 제가 알고 있습니다. 닥터 제이도 다른 한 명을 직접 만난 일이 있다고 했으나, 우린 아직도 9명의 늙은이들이 누구이 며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쯧. 확실히 껄쩍지근한 상황이기는 해. 자기 수하들 중 거물에 속하는 닥터 제이와 원판조차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라 면, 당장 때려잡기 는커녕 찾아내는 거 자체가 힘들다는 얘기니 말야.
이럴 때는 당연히 놈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유인하는 작전으로 가야겠지만, 이 거대하다 못해 끝이 보이지 않는 조직의 어딜 대체 얼마나 찌르고 때려야 머리까지 나서게 될지……………
“11명이 맞습니까?”
응?
“그때 분명 11명 모두를 친 것이 맞습니까?”
“어? 그야 당연히……………”
“일일이 세어 보았단 말입니까?”
“딱히 그러진 않았지만, 하여간……”
“도중에 그들이 아니라 ‘신(神)’! 당신께서 ‘타임 씨’라 부르는 존재를 공격했다면서요?”
“그거야 뭐……………”
“어째서 원수들을 두고 엉뚱한 짓을………….”
“우쒸! 뭐가 엉뚱하냐? 모든 원흉은 타임 씨가 맞잖아! 글고, 내가 바보냐? 적어도 한 번씩은 다 칼부림 했으니까 다음으로 넘어간 거지!”
“…한 명도 놓치지 않은 건 확실한 모양이군요.”
이 시키. 내가 무의식중에 답변하도록 추궁조로 나온 거였군, 또 심히 기분 나빠지려고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그… 뭐냐, 거물들 중에서 최근 칼부림 당한 자들을 찾는 음. 그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기는 한데………….”
“물론 인위적인 영생을 추구할 정도의 자들이니, 상처쯤이야 감쪽같이 없앨 수도 있겠지요.”
“…만약에 그렇다고 해도, 원판 너나 닥터 제이라면 그 기록을 찾아낼 수도 있단 얘기?”
원판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수긍이 가기 시작했다. 특히 프리메이슨의 과학자 집단 중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였던 닥터 제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12인의 사도 멤버였던 엘은 닥터 제이를… ‘나의 긴 인생 속에서 처음으로 만난 진짜 천재’ 라고, 대충 그렇게 표현했었지. 그 말을 들을 때는 내가 광분하기 전이라서 기억이 나는구먼.
“닥터 제이 그 양반, 요즘 연락이 좀 뜸하다 했더니 그걸 찾기 시작한 거였나?”
“아뇨. 그는 지금 다른 일로 바빠서… 음. 하지만 곧 다시 2인의 사도 일에 매진할 겁니다.”
닥터 제이에게, 필생의 원수들을 찾는 일보다 우선할 정도의 다른 일이……………?
“그거 혹시………….”
“안 갈켜드리…”
“나, 원, 더러워서 이거 진짜!”
“후후. 지금은 답답해도 참아주십시오. 조만간 닥터 제이와 저의 모든 계획을 알게 되실 겁니다.”
쳇. 그러고 보니 닥터 제이도 원판과 비슷한 타입이며 어떤 면에서는 더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은 양반이지.
“댁들 음흉콤비의 작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행동하는 진유준이 필요하다 이건데… 과연 그렇게 잘 될까나?”
내가 다소(?) 삐딱한 표정이 되었음에도 원판은 비죽이 만족스런 미소를 띄운다.
“솔직히 프리메이슨보다도, 잔머리 마왕 형님과의 신경전이 더 힘들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그만큼 더 재미가 있군요.” “조심해라. 재미 좋아하다 코피 터지는 수가 있다.”
“예.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죠.”
조심하겠다고…? 닥터 제이나 이 녀석도 나 진유준의 깽판 정신을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구.
“아, 그런데 한 가지.”
“또 뭐.”
“제가 무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눈치채신 겁니까? 아무리 안목이 높은 고수라도 알 수 없을 거라고 자부했었는데 음. 헛점이 있다면 보완해두고 싶군요.”
“어, 그건… 그냥, 언제부턴지 네가 호위병도 없이 란과 둘이서만 다니는 것 같아서 말야. 물론 너야 말빨로 다 해결하는 스타일이지만, 세상에는 말이 안 통하는 또라이도 많고… 하여간 넌 ‘비장의 한 수’도 없이 나다닐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응? 원판 이 녀석, 나의 멋진 추리(?)를 듣고 표정이 왜 이렇게 거시기 해지는 거야?
“무공을 숨긴 것이 아니라, 호신용 강력 특수 무기를 란이나 제가 가지고 다닌다거나 할 가능성은?”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냥 왠지 무공 쪽이……”
“그냥… 왠지?”
“응.”
“아까 형님이 저에게 날린 일도는, 피하지 못했다면 분명히 저의 목을 땅바닥에 떨구었을 정도였습니다.”
“어, 그랬을 겨, 아마.”
““그냥 왠지’를 믿고 그런 짓을?”
“응.”
짜식. 날 잘 안다면서 새삼 표정이 왜 이래?
“하아아아~ 정말이지, 저처럼 섬세한 두뇌파가 신뢰하기에는 너무 거칠고 비이성적인 파트너로군요.”
“꼬우면 무르든가.”
어이없어하는 녀석을 보니까 꼬였던 심사가 쬐끔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음. 근데, 이거 지금 아니, 조금 전부터 들려오기 시작해서 점차 가 까워져 오는 것 같은.. 이 소리는 대체 뭐지?
쿵!
쿵!
BB형제가 널뛰기식으로 이동할 때 땅이 울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보다도 육중한 느낌을 주는 땅울림이었다. 나는 문득 영화 속의 한 장면이 떠올라서 허리춤의 군용수통을 꺼냈다.
어디…….
수통의 물을 조금 패인 땅바닥에 부어 놓고 가만히 보니까, 쿵! 쿵! 소리에 맞춰 물결이 일었다.
컵의 물, 아니 땅바닥에 고인 물의 파장이 점차 커지며 그럴수록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거대하고도 불길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의 중 폭에 전율할 수밖에 없는…………….
“그게 재밌나요?”
“냅둬! 그냥 내 취미야.”
쳇. 원판 놈 때문에 분위기 깨졌네.
나는 결국 쥬라기 공원, 원어로(?) ‘쥐라직 팍 놀이’를 그만두고 고개를 들었다. 아까 내가 세이버를 타고 나왔던 지하 연구실 방향으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스터! 유준 아저・・・ 아니, 천주!”
거대한 티라노사우루스의 등에 타고 있는 소냐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어댔다.
“흐음. 저 티렉스(T-REX)도 세이버들처럼 ‘미치지 않은 상태’였군요. 소냐가 용케 길들인 모양인데… 축하합니다.”
“축하……? 뭘?”
“형님의 수하로 용맹한 원시시대 최강의 공룡이 추가 되었잖습니까. 유준 형님과… 아주~ 잘 어울리는.”
이 자식, 말에 가시가 있군. 내가 별 근거 없이 자길 죽일 뻔했다고 해서 삐친 모양이지? …뭐,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거 참 난감하네. 왜 나에게는 갈수록 더 이렇게 얼토당토않게 종이 다른 녀석들이 꼬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