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32화 : 원판과 프리메이슨의 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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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32화 : 원판과 프리메이슨의 진의


2 원판과 프리메이슨의 진의

「에? 이게 대체 뭐예요?」

윈드에게 갔다가 돌아온 요몽이 대뜸 실망스런 표정이 되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옷이 하나 가득한 백화점에서, 몇 시간 동안 고르고 고르신 것이 결국..

“어. 그게 말야, 요몽.”

나는 다소 멋쩍게 웃으며 잠시 옆에 놓고 있던 정글도를 잡았다.

“이것저것 입어보긴 했지만… 난 역시 군복이 가장 편하더라구.”

아무리 군복에 익숙해도 항상 편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쌈박질 라이프가 계속되는 상황이니까 그렇다는 거지만.. 암튼, 난 지금 얼굴무늬 군복 바지에 국방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게다가 이 백화점의 밀리터리 코너에는 국방색 양말과 전투화, 심지어 군복 바지 끝에 채우는 고무링까지 있었 다.

「에혀~ 솔직히 저도 주인님께는 군복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그치만, 그래도 그렇지, 나름 세련되게 멋을 낸 밀리터리룩도 많잖아요! 굳이 그렇게 고지식한 스타일의 어머? 그러고 보니 원산지가 ‘KOREA’ 라고 찍혀 있네요?」

“어, 맞아. 짬뽕 문화의 나라 백화점답다고 할까? 우리 국산・・・ 아니,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게 그래도 ‘본고장 직수입 명품 군복인 거라구. 내가 봐 도 이 원단의 삼빡하게 거친 감촉과 오묘하게 단순한 색감, 계절 변화를 과감하게 무시한 두께며. 하여간 모든 면에서 진품명품이 맞는 것 같아.”

「으응. 국산 군복 칭찬치고는 왠지 이상해요.」

“대충 넘어가. 그보다…………….”

나는 조금 멀찍이 떨어진 코너 앞에 서 있는 천음마군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훗. 저기 나 같은 사람, 또 있네.”

사실 천음마군도 나처럼 꽤나 다양한 옷과 액세서리를 걸쳐 보는 것 같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에는 평소처럼 간편한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 넉넉한 치수의 재킷이라는 그 나름의 군복차림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천음마군의 평소 옷차림을 언뜻 보면, 그냥 별다른 특징이 없는 것 같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처럼 활동성 좋게 입거나, 드물게 정장을 쫙 빼 입을 때나… 그 어떤 복장을 한다고 해도, 천음마군은 거기에 항상 넉넉한 크기의 재킷을 추가해서 입지.”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아, 혹시 저것 때문에?」

요몽은 이제야 천음마군의 재킷 뒤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솟아 있는 이유를 주목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항상 뒤춤에 꽂고 다니는 견신(犬神. 일명 정육점 칼)을 가리려고…………! 나참. 누가주인님 수하 아니랄까봐…………!」

“후후. 근데, 요몽. 생각해보니까…….”

나는 새삼 요몽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이렇게 정장을 차려 입은걸 보는 건 꽤 오랜만이네.”

「헤헤~ 그쵸?」

요몽이 이렇게 차려 입었던 건 강호에 있을 무렵, 반 장난으로 오피스걸 흉내를 내며 보고를 하느라 그랬을 때뿐이었다. 그 후로 는 거의 그림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들처럼 풀잎 디자인의 짧은 원피스 차림이었었다.

하지만… 요몽은 이번에 TV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지. 그래서 등에 달린 날개는 당연히 숨기고, 옷차림도 시청자들에 게 신뢰감을 줄 수 있도록 9시 뉴스 아나운서 스타일을 택했던 거야.

「어때요, 주인님? 잘 어울리나요? 어때요? 네?」

훗. 이 녀석, 사실은 계속 묻고 싶은 걸 참고 있었나 보군.

“뭐… 전보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는 하다. 우리 요몽이도 이젠 꽤 숙녀 티가 나는걸?”

「우히힛! 그쵸? 그쵸?」

그냥 해준 소리에 디게 좋아하네. 하지만 좋아하는 태도부터가 아직 애로구먼.

몽몽과 요몽의 ‘외모 성장 시스템’은 분명히 있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인간과는 다른 체계일 수밖에 없을 테고, 아직까지는 눈곱만치의 변화도 없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말이다.

「으응~ 실은 우리 패티가 가장 많이 변했는데… 보여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응? 이런, 이런… 그 녀석을 잊고 있었구나. 존재 자체를 잊었다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잊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아직도 내가 무섭다니?”

「그게…요. 이젠 패티도 아주 겁보가 아니긴 하거든요? 하지만 어떻게 된 게. 부끄러움을 타는 건 더 심해졌어요.」

「사실입니다, 주인님. 얼마 전부터 코드명 패티는 저와의 접촉에도 제한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몽몽. 너한테도?”

「예. 그러면서도 ‘두려움’, ‘거부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 신호는 측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 신호 패턴은 전보다 늘었습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자기 방에서 문 닫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으면서도, 가끔 얼굴 마주치면 공연히 배시시 쪼개는 그런 상황이라는 건

가? 으으음. 친오빠인(?) 몽몽에게도 그럴 정도면, 그 녀석은 대체 얼마나 새침데기에 부끄럼쟁이라는 건지 원.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 가지고 업무(?)는 제대로 볼 수 있겠냐? 뭐, 물론 요즘 아주 잘해주고 있는 건 알지만……….”

「아. 그건 말이죠, 주인님. 우리 패티도 나름의 필살기를 개발 했거든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필살기・・・・・・? 인공위성 장악할 때도 그런 게 있냐?”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하여간 패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주세요오!」

“아니, 꼭 못 믿어서 그런다기보다……….”

하긴. 표현이야 어쨌든, 패티가 계속 요즘처럼 잘만 해준다면 나야 더 참견할 이유가 없긴 하지.

“그래, 뭐. 그건 무래도 좋으니까, 이제 웬만하면 얼굴 좀 보자고 해. 명색이 주인인데 얼굴도 모르니까 좀 그러네.”

「후후. 제가 다시 잘 얘기해볼……………」

「주인님!패티로부터의 연락입니다!」

엥? 패티가 알고 보니 쇠뿔도 단숨에 빼는 타입?

「코드명 원판의 정식 대화 요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쳇. 그게 아니었나? 이 비싸게 구는 패티 녀석의 얼굴은 언제나 보게 되는 건지는 그렇다 치고!

“원판의… ‘정식’ 대화요청?”

「그렇습니다. 개인 자격이 아닌, 프리메이슨의 대변인으로서 보낸 대화 요청입니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좋아. 수락할 테니까 잠시 만기다리라고 해.”

「어? 주인님께선 벌써 이럴 줄 알고 있으셨나봐요?」

“뭐, 대충은.”

나는 모처럼 ‘두뇌파’ 비스므리한 인물이 된 듯한 기분을 즐기며 천음마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음마군! 은사마군은?”

“예, 예? 아, 어, 그, 그녀는………….”

그녀가 어딨냐고 물은 것뿐인데 왜 이리 버벅대? 뭐, 암튼.

“당장 전원 중앙 로비로 집합시켜!”

“아, 그럼・・・・・・ “

“간단히 말해서, 비상!”

“예, 천주! 비상!”

천음마군이 비로소 ‘비상’을 외치며 달려갔고. 나는 한 층 위의 전자제품 매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나는 대형 TV가 잔득 진열된 매장 앞에 섰다. 원판의 얼굴을 풀 HD화면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야 쥐꼬리만큼도 없지만, 이번 대화는 아무래도 나 혼자 몰래 진행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내 옆에 서 있게 된 3명의 인물들 중 천음마군이 입을 열었다.

“흐음~ 그러니까, 그 기생오래비 같은 DP의 마스터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는 말씀이로군요.”

“본색을 드러냈다는 말은 좀 아니지만, 여하간 내 최대 적의 대변인으로서 연락해 온 건 맞아.”

‘그XX! 내 그럴 줄 알았어.’ 라는 표정인 천음마군과 달리 은사마군은 비교적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적이라는 건, 당연히 ‘어둠의 세계 정부 프리메이슨’ 이겠군요.”

“그치 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나나, 그걸 ‘옆집 강아지가 가출했대’ 정 도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수하들이나…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로 보일지도 모른다.

“프, 프리메이슨…………? 그런 조직이 정말 존재한단 말인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건 소년 윈드였다.

“응. 있더라구.”

“맙소사……! 바깥세상에 대한 소문 중에서도 그건 정말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프리메이슨뿐 아니라 그에 대적하는… 아, 유준 형님은 그럼 어떤 조직에 속한 분이죠?”

“지하무림.”

나대신 은사마군이 먼저 대답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존재를 숨겨 온 것으로는, 프리메이슨보다도 앞서기 때문에 당연히 들어 본 적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분명히 존재하고 있답니 다, 윈드 군.”

“지하무림………! ・・・ 정말이지, 바깥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무언가 가 너무나 많은 것 같아요.”

그게, 사실 우리는 그 바깥세상 사람들도 거의 모르는 존재들이지만 암튼, 윈드 이 녀석. 한층 더 바깥세상에 대한동경의 마음이 커지는 모양이 로군. 하지만 이 아이가 마냥 동경만 하기에는…. 바깥세상이 너무나 험하지.

“윈드. 내가 널 여기에 부른 이유는… 네가 꼭 보고 알아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야. 물론 넌 내가 아는 어떤 놈만큼이나 똑똑하니까, 이미 어느 정도 선까지는 짐작하고 있을 거야. 그래도 막상 모든 진실을 확인하게 되면…….”

윈드의 표정이 잠깐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곧 단호해지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떠한 일이라도 전 받아들일 수 있어요. 설사 그것이 아무리 충격적이고 끔직한 진실일지라도…………….”

“그래. 아무리 기분 더러워진다 해도, 알건 알아야겠지. 요몽!”

“넵!”

요몽은 부르자마자 TV화면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웬일인지 정장이 아닌 발랄한 느낌의 캐주얼 차림이었다.

“자아 그럼 지금부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사차원 우주 안드로메다 원조 꽃돌이 원판 씨와 비록 지금 지상에 있기는 하나 장래가 매우 기대되는 신진 꽃돌이 윈드 군의 역사적 조인식을………….”

“야 인마. 분위기 깨지 말고 그냥 연결이나 해.”

“히히~ 실은 계속 기상 상태가 좋지 못해서 조금 더 딜레이가… 아, 원판 씨 쪽에서 다른 루트로 접속해오네요?”

뭐?

“오~ 꼭꼭 숨겨왔던 중앙의 비밀 시스템을 통해서 오고 있어 요. 저희들 예상대로, 그게 프리메이슨과의 핫라인을 담당하는 거였나 봐요.”

물리적으로 선을 끊어 놓아서 몽몽도 들어갈 수 없었다는 시스템을 지금 연결했다 이거지…………? 잠시도 못 기다릴 만큼 급하게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는 걸까? 아니면.

“여어~”

으음. 드디어 원판의 절대로 반갑지 않은 얼굴이 TV에 떠오르는군.

“잘 있었나, 윈드.”

이런, 제기. 이 자식이 날 생까고 윈드에게 먼저…………!

“어? 어… 당・・・ 신은……?”

윈드의 얼굴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히 커다란 놀라움이었다.

그래서 말까지 더듬을 정도면서도 놀라움이란 감정을 ‘역시 그랬었어’ 라는 깨달음이 빠르게 대신하는 것 같더니만, 이어서 기타 등등(?) 이것저 것 나름 많은 것을 빨리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그런 표정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 하여간, 이번에도 지나치게 똘똘한 놈답게 나오는 군.

“…벌써 5년이란 세월이 지났구나.”

원판 녀석이 피식 웃으며 덧붙이자 윈드도 살며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당신은… 그때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요.”

“후후. 5년은 소년이 사내가 되기에 충분한 세월이었지만, 어른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란다.”

원판의 ‘소년이 사내가 되었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건지. 윈드의 볼에 보일 듯 말 듯한 홍조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뭐냐, 얘들? 듣자니까, 5년 전… 그러니까, 윈드가 초딩 초반(?)이었을 무렵에 만난 후로는 지금까지 다시 만난 적이 없었던 모양인 데… 근데 뭐 이리 화기애애한 분위기? 잘난 천재들이라서 5년 전의 일쯤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는 건가? 아니면……….

“니들, 계속 펜팔이라도 해왔었던 거냐?”

내가 불쑥 끼어들자 원판과 윈드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향했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럼 5년 전까지는 자주 만났었던………….”

“아니요, 유준 형님. 저와 윈드는 5년 전 이 섬의 남쪽 해변가에서 단 한 번 만났었을 뿐입니다.”

“예, 맞아요. 크라우드 씨와는 그때 처음 만나서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에요.”

이것들 봐라? 그럼 서로 첫눈에 반・・・ 아니, 하여간 그런 짧은 만남을 둘 다 지금까지 애틋하게(?)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지? 둘이 어떻게 만나서 뭔 대화가 오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혹시 네 놈이 얠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키운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건가?”

“진정한 천재에게는 스승이 따로 필요 없지요. 아, 물론 어렸을 때 약간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정도의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으음. 말로는 ‘사제 관계’를 부정하면서도 윈드를 바라보는 시선에 녀석답지 않은 ‘따스함’, ‘대견해함’ 같은 감정이 묻어나는군, 그래. 과정이야 어 쨌든 꽤나 아끼는 수제자급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는 해.

“저어. 그럼 역시 크라우드 씨가 이분께 저와 가족들을 좀비들로부터 보호해주도록 부탁을…………….”

“부탁은 개뿔이.”

나는 원판을 손가락질하며 인상을 긁었다.

“윈드! 넌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저 인간이 누구에게 ‘부탁 같은 걸 하는 놈인 줄 아니? 저 녀석은 뒷공작을 펴서 니 누나 미나를 항구의 검역소 에 배치시키고, 내가 검역소를 탈출할 무렵에는 니 할아버지의 트럭만 출입구 근처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하고… 뭐, 그런 식으로 나와 널 만나게 했 어. 사실 그냥 첨부터 나한테 사정을 얘기하고 부탁을 해도 됐었는데 말야. 뭐든 굳이 음모를 꾸며서 일을 진행하는 게 이주 그냥 습관이야, 습관. 삶 이 음모인 놈이라구.”

“…유준 형님.”

“왜? 아니냐?”

“물론 부정하긴 어렵겠지만…………..?”

“저 봐, 윈드. 들었지? 넌 아무리 똑똑해도 저렇게 되지 말라고 얘기해주는 거야. 넌 아무리 천재라도 저렇게 삐뚤어지지 말고, 착하고 명랑한 어린 이가 되어야 해. 알겠지?”

“아, 저, 전…….”

“알겠지?”

“예, 예에.”

훗, 역시 아직은 순진한 어린이로군. 잘만 가르치면 원판처럼 문제아가 되지 않을 수도·

“칼을 들고 살기를 뿜으며 하는 도덕 교육이라니, 극히 전근대적이로군요.”

“됐네. 이 사람아. 변태살인마 곡주로 유명했던 녀석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거든?”

“…안녕하십니까, 유준 형님. 헤어진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 무고하셨는지요.”

“응?”

“어쩐지 윈드보다 먼저 인사를 못 받아 삐치신 듯해서……………”

“…음. 이제야 눈치챘군. 담부터 조심해.”

“호오. 받아넘기는 패턴에 변화가……………”

“난 본래 비슷한 패턴 반복을 싫어하잖냐.”

“그런 것치고는 신선함이 떨어지는 멘트였습니다만…………….”

“뭐, 그게 내 한계니 할 수 없고… 그보다, 오늘은 이런 만담(?) 이나 하려고 대화를 요청한 게 아니었을 텐데?”

흐~ 최근 원판과의 말장난 싸움에서 연전연패였었는데 오늘 약간의 설욕을 한 것 같군.

“잠시 망각하고 있었군요. 오늘은 제가 우리 프리메이슨의 대표로 나섰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프리메이슨’ 이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새삼 기분이 거시기 해지네.

“어쨌든. 이제 공식적인 대화를 시작해볼까요?”

“그러든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말해도 되겠습니까?”

“거, 좋지.”

원판은 새삼스럽게 꾸민 듯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정식으로 알려드리지요. 우리 프리메이슨은 당신, 진유준이란 이름의 놀라운 남자를 프리메이슨의 회원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존재… 즉, ‘수뇌부’에 오를 만한 인재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날 스카우트 하겠다는 얘기는 전부터 언급되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수뇌부’ 라고……? 어느 정도 선까지를 말하는 걸까………?

“12인의 사도 중에서 한 분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고계시겠지요?”

“그야, 내가 바로 그 한 명을…………….”

…에? 뭐야. 설마 다짜고짜(?) 12인의 사도 후보라는 거야?

“신세계의 영도자, 12인의 사도 중의 한 분을 해친 것은 당연히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이자 죄악이었지만. 12인의 사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 다 관대한 분들입니다.”

으으음. 완벽한 미래 로봇 몽몽이 너무나 탐나고 그 몽몽의 주인이자 자신들에게 졸라 위험한 인물인 나를 어떻게든 관리 (?)하고 싶어하는 심정이 야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자신들과 동급인 자리까지 내주겠다는 건…….

“파격적이죠?”

“어… 뭐, 조금 그런 것 같기는 하네.”

“조금 그런 것 같다…라고 하셨습니까? 후후~ 이 지구라는 행성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I2인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제안에 대한 반응치곤 참…….”

“어쩌라고. 내가 화들짝 놀라서 황송해하고 뭐, 그런 반응을 바란 거였어?”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음. 하긴, 당신은 본래 이런 남자였죠.”

원판이 말하는 ‘이런 남자’ 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알았다, 알았어. 예의상 생각은 좀 해볼게. 뭐… 일단 10분 정도만 기다려.”

내가 그렇게 말하며 조금 물러서자, 원판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이거야 원. 누가 보면 당신에게 제의된 자리가 ‘시골 동네 이장 정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난 원판의 투정(?)을 슬쩍 무시하고 가까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서 생각하는 군바리 자세를 취했다.

12인의 사도가 되게 해주겠다는 제안 자체부터 100퍼센트 믿을 수는 없겠지만, 설사 그게 놈들의 진심이라 할지라도… 내 대답은 당연히 ‘NO’야. 팔자에 없던 마군황 자리도 부담스런 판국에 여기서 더 귀찮게 세계 지배씩이나 할 마음은 절대로 없지. 난 그딴 거 필요 없고, 그저 대교와 알콩달 콩 살기만 하면 된다구.

난 이런 공처・・・ 아니, 그냥 권력 욕심 같은 게 별로 없는 남자다. 진짜다. 으음… 게다가 그동안 놈들에게 쌓인 것이 많다보니, 원래대로 했으면 대 뜸…

“까고 있네. 이제 와서 개솔 말고, 갈 때까지 가보자구.”

…이런 식으로 나갔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중간에 저 원판 놈이 있기에 공연히 뜸을 들이게 된 것이다.

예의 쥬라기공원이 있던 섬에서 뭔가 필요한 걸 찾았듯이, 원판은 이 섬에서도 나를 이용해서 뭔가 진행하고 있는 건 분명해. 하지만 공룡 섬과 달 리 이 섬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원판 녀석도 관여해 온 모양이야. 이런 상황에서 새삼 내가 필요한 이유가 뭘까………? 내가 혼란을 일으키는 사이에 또 뭔가 숨겨져 있는 걸 찾으려고・・・・・・? 아니, 아니 그건 너무 뻔한 얘기야. 프리메이슨의 감시망이 그렇게 허술하다면 원판 정도 되는 놈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잡혀 있을 리가 없지. 뭔가 좀 더… 좀 더 은밀하게 감추어진 원판의 진의…………! 어쩌면 이곳에 프리메이슨을 엎어버릴 수도 있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고, …쯧. 또 쓸데없이 머리 아플 뻔했군. 아직 별다른 힌트도 없는데 공연히 신경 써봐야 그야말 로 에너지 낭비…………! 예정대로 당분간은 참고 가급적 원판 놈에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하자.

나는 슬쩍 인상을 구기며 TV쪽을 야렸고, 그 속의 원판은 해맑고 재수 없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간단히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 그리고 그 전에………….”

“그 전에?”

“사실… 나와 대교가 원하는 건 싸움이 아니라 ‘자유’ 야. 누구 말처럼(닥터 제이) 나 자신이 프리메이슨의 정점에 서는 것이 자유를 얻는 가장 좋 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

“현명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간단히 같은 편이 되기에는, 그동안 우리 사이에 쌓인 게 좀 많지?”

나의 인생을 스토킹 해온 건 참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놈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의 이모님을 해쳤으며, 주가혜였던 때의 대교를 해쳤다.

“그러니까…….”

화해 같은 건 없어. 12인의 사도, 어둠의 세계 정부 따위, 반드시 말살시켜 주겠어.

“니들이 성의를 좀 더 보여야지.”

나는 속마음을 씨익 웃는 것으로 감추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 섬의 좀비들을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백신부터 보내.”

“그건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럴 예정입니다. 이번 ‘에볼루션 필드 28호’, 즉 그 섬 ‘화이트 판타지아’에 당신을 초대한 건 우리가 앞으로 이룰 ‘신세 계’의 견본 중 하나를 소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그럼으로써 당신께서 우리에 관해 가지고 있는 오해가 조금이나마 풀어지기를 바랐고 말입니 “다.”

프리메이슨이 이룰 신세계의 견본……? 이 우물 안 개구락지들 의 나라가…………?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좀비 사태를 만나게 되신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변종 프리온의 그런 부작용은 우리 연구진들도 예 상하지 못했던 사고였습니다.”

“뭐… 그럼 그 얘긴 됐고, 다음요구는 I2인의 사도 직속 암살단이라는 ‘에레보스’ 애들의 철수.”

“그건 좀…….”

“뭐야. 암살자들에게 날 노리게 해놓고 화해하자는 게 말이 돼?”

“그냥 방치해두기에는 당신이 너무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에… 음?”

원판은 문득 말을 멈추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아. 지금 막 과반수로 당신의 요구가 승인되었습니다. 당신 의 향후 행동에 따라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이제 에레보스는 ‘임무 수행 유보’ 상태 로 들어갈 것입니다.”

호오~ 12인, 아니 이제 11인의 사도들이 즉석에서 표결로 내 요구를 받아들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글고, 전에 우리나라가 IMF 맞은 것도 니들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말야. 이제 우리나라에 그런 장난을 치지 않는 건 물론이고, 당연히 그때의 보상도 해야겠지?”

“그때의 일은 한국 정부의 안일함과 무능력이 더 큰 원인이었습니다, 국가 단위의 일은 당신께서 사도가 되심 후 직접 관장하는 것이… 아. 우선 승 인되었습니다. 음… 구체적인 보상 방식은 곧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진짜 해줄라는 모양이네?

“저기, 월드컵을 다시 우리나라에서 아니, 그 전에 히딩크 감독 좀 다시 보내주면 안 될까?”

“…승인되었습니다. 러시아에 적잖은 대가를 지불해줘야 할 것 같군요.”

“짜장면 값 좀 내려줘. 요즘 곱빼기 시키기가 무서워.”

“승인되었습니다.”

으음… 정말 제대로 성의를 보여주는군. 나, 방금 약간 흔들릴 뻔했다.

“기왕이면 라면하고 쐬주 값도 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지금 그런 시시콜콜한 요구를 계속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가증스런 놈. 하필 라면하고 쐬주에서 끊다니………

“당신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 자신의 손으로 거머쥘 수가 있는 분이니까요. 예를 들어 현재 남북으로 분단된 당신의 조국이 통 일을 이루고, 결국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 된다거나 하는 꿈… 말입니다.”

이런, 이런・・・ 모범청년이자 애국청년이기도 한 나에게는 진짜 엄청 솔깃한 얘기이기는 한데………….

“내가 ‘나 12인의 사도할래!’ 라고 하게 되면… 말이지?”

“물론입니다.”

…훗. 여기서 저 대단하신 프리메이슨도 한계를 드러내는군.

닥터 제이의 말에 의하면, 그리고 여러 가지 정황 증거를 보아도, 프리메이슨이 확보한 미래 데이터는 분명히 ‘불완전하다. 특히… ‘역사’가 빠져 있는 것이다.

사실 몽몽에게도 그리 많은 역사 정보가 있는 건 아니고, 현시점에서 가까운 근 미래의 정보는 아예 없다고 했어. 하지만 그래도 난 이미 내가 무지 궁금해 하는 미래 한가지만은 알고 있지. 우리 몽몽이가 바로 ‘통일 한국 로봇 제작 규정’에 의해 제작되고 운용되는 녀석이니까 말야.

“내가 굳이 반칙을 쓰지 않아도… 우리나라, 우리 국민들은 언젠가 반드시 스스로 빛나는 미래를 차지할 테니까, 니들은 신경 꺼주셔.”

나는 그런 대꾸를 하고 싶은 걸 참으며, 새삼 찬찬히 원판의 표정과 눈동자를 응시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직은 나의 ‘감’ 보다 원판의 음흉함이 앞서는 것 같았다.

쳇. 16년 동안(?) 객관식, 주관식을 가리지 않고 모든 문제를 찍어서 해결해 온 찍기의 달인 통박 진유준 선생’도 이번에는 찍기가 어렵군. 원판이 지금 내가 프리메이슨의 제안에 단호히 거절 하는 걸 원하는 건지, 아니면 유혹에 넘어가는 척이라도 해주길 바라고 있는 건지를 알아야 장단을 맞 춰도 맞출 텐데 말이야.

“뭐…….”

할 수 없지. 일단은 두루뭉실 얼렁뚱땅 넘어가기로 하자.

“물어 보긴 할게.”

“예?”

원판은 처음으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되었고, 난 공연히 놈의 시선을 피하며 덧붙여 말했다.

“어… 우리 대교한테 물어본 다음에 결정하겠다구.”

잠시 나와 원판 사이에… 아니, 보이지도 않는 I2인의 사도와 나의 수하들까지도 무거운(?) 침묵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뭐? 왜?”

내가 당당하게(?) 주변을 돌아보며 묻자, 천음마군과 은사마군은 슬며시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당신께 대교 양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원판이 드물게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우린 당신을 꽤 보수적인 한국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나, 보수적인 남자 맞아. 소위 전통적이라고 표현되는 남성상과 여성상을 좋아하지. 남자는 무조건 강하고 리더십이 있어야 하고, 여자는 조신하 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던가 하는… 뭐 그런 이미지들 말야. 하지만… 음… 크흠! 우리나라에는 엄연히,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에 대고 절을 한다’라는 아름다운 전통 문화도 있다구!”

에고. 나 지금 제대로 예를 들은 거 맞나 모르겠네.

“비유가 적절치 못하고, 애초에 지하무림의 정복자이며 폭군인 남자의 이미지와 상당히 동떨어진 발언이긴 했으나… 여하간, 진심이신 것 같군 요.”

“그야 뭐……”

“알겠습니다. 우리도 당장 긍정적인 대답이 나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흠. 놈들도 조건을 내걸려는 건가?

“앞으로 몇 번 더 ‘초대’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처럼 제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이가 안내할 수도 있겠지만… 그 초대에 응해 주신다면 우리에 대 한 선입견을 버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 합니다.”

우리 회사 사무실과 기숙사 등등 훌륭한 근무환경을 견학시켜 줄 테니 잘 보고 부디 입사해주십시오…라는 얘기군. 명색이 세계 최대 최강의 조직 이 성질 더러운 놈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 욕본다, 참.

“공짜구경을 마다할 내가 아니지. 맘대로 해.”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판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고, 그런 후에 천천히 자신의 좌우를 돌아보았다. 여기서는 원판밖에 보이지 않지만, 원 판 주위에 모니터가 잔뜩 있어서 거기에 떠 있던 12인의 사도들 영상이 차례로 꺼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싶었다.

“원로들께선 지금 막 접속을 끊으셨고…….”

오~ 내가 방금 연상한 장면이 맞는 모양이네? 나도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그 섬의 뒤처리는 저에게 일임하였습니다.”

“뒤처리…………?”

윈드였다. 이제까지 나와 프리메이슨의 화기애애한(?) 회담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윈드가 비로소 입을 연 것이다.

“우리 섬을, 우리들을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흐음… 아까 원판과 처음 재회했을 때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표정이 되어 있군.

“우리들의 나라가 당신들의 ‘견본’ …………? 아니, 그런 과거보다! 앞으로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죠?”

윈드, 이 녀석………! 자신과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 전체가 ‘실험용 견본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것이 자신의 ‘정신적 사부’ (아마도)에 의해 이루 어진 일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한 직후, ‘그런 과거보다. 앞으로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물론 그게 냉정하고 현명한 판단이라는 건 알지 만, 어린 소년의 사고 패턴치고는 좀 거시기 하네.

윈드의 반응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끼는 수제자급 소년의 분노에 찬 얼굴을 마주하게 된 원판 또한 만만치 않・・・ 아니. 어째 한술 더 뜰 것 같은 기색이다.

“윈드.”

원판은 윈드의 분노와 적개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단 얼굴로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아직 형님과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

저 짧은 말에… ‘넌 아직 함부로 끼어들 짬밥이 못 돼’라는 의미에 ‘귀여워해준다고 기어오르다간 죽는 수가 있어’ 라는 경고까지 압축되어 있다고 하면… 너무 오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원판의 눈빛에서 전해지는 냉랭함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

윈드는 뭐라고 더 따지고 싶은 듯 달싹이던 입술을 결국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오~ 역시 원조 천재 악당 원판 씨! 관록의 한판 승! 하지만 윈드 군도 너무 기죽지 말아요. 언젠가는 윈드 군도 어엿한 사악남으로 성장할 수 있 을…….”

“요몽. 너야말로 분위기 깨지 말고 찌그러져 있어.”

“우에. 같은 표현을 우리 주인님은 너무 야만스럽게 하시네.”

“쓰읍~.”

“헤헤. 그럼 전 이만!”

요몽의 난입(?)으로 분위기가 약간 흐트러졌음에도 원판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우리의 특수 질병 관리센터에서 변종 프리온에 의한 인체의 좀비화가 확인된 것은 불과 39시간 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가용 자원을 동원 해서 백신을 준비 중이나, 앞으로도 11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11시간…………? 뭐, 이미 좀비가 될 사람은 다 된 모양이니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해서 별일이야 있겠

“그리고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39시간 전에 좀비화가 된 실험체들이 약 10시간 전에 일제히 ‘붕괴’ 현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뭐? 뭐가 어찌돼?”

“인체의 봉괴………! 아직 정식 표기로 결정된 용어는 아닙니다만, 변종 프리온에 의한 세포 변질과 인체 복구력의 균형이 무너지며 모든 세포가 급 격히 소멸되는 현상이라고 하는군요.”

이건 또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 좀비면 좀비답게 죽여도 안 죽어야지, 왜 제풀에 맥없이 죽는다는 거야?

내가 겉으로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우리 몽몽 선생의 설명이 먼저 들려왔다.

「주인님. 광우병의 원인 물질 프리온은 분명 감염성을 가진 병원체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단백질 입자’일 뿐,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병균은 자신이 기생한 생물의 죽음이 자신의 생존에도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여 함께 공존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경우도 보고된 바 있으나, 물질인 프리온에게는 그런 생물적 유연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제기. 나도 광우병의 개념은 얼추 알고 있었지만,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에이 쒸! 니들 실험체가 10시간 전에 그렇게 됐다면, 그게, 그러니까………….”

“좀비가 된 자들이 버틸 수 있는 건 29시간 정도가 한계라는 얘기입니다. 그 섬에서 본격적으로 좀비화 현상이 퍼지기 시작한 것 온 13시간 전이 니, 앞으로 16시간 정도가 남은 셈이군요.”

“그 16시간이지나면………….”

“먼저 좀비가 되었던 자부터 차례차례… 태양빛에 노출된 흡혈귀처럼 공허하게 소멸되겠지요.”

“…백신이 완성되는 건 분명히 그보다 먼저라고 했지만… 너, 지금 말하는 꼬라지가 어째………….”

“백신이 완성된다 해도 말입니다. 자그마치 16만 명의 좀비들에게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시간, 그 섬까지 운송하는데 걸리는 시간…….”

이 섬의 인구는 대략 16만 명………! 우쒸! 막상 숫자를 구체적으로 들으니까 장난이 아니다!

“음. 아무리 숫자에 약한 형님이라도 ‘시간이 모자라다는 것 정도는 아시겠죠?”

“그래, 니 잘났다 시키야!”

정말이지, 가까이 있었으면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놈이지만……….

“그래서 어쩔 건데? 뭔가 대책이 있을 거 아냐”

“저로서도 대책이 전혀 없다고 하면… 아무래도 다혈질 형님께 칼부림을 당하겠지요?”

“당근, 말밥.”

“다행히도 그 섬에는 자체적으로 백신 양산이 가능한 시설이 있습니다.”

그런 시설이 있는데도 몽몽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잘도 아직까지 몽몽과 요몽의 해킹을 견디고 있는 중앙 관청 건물 안이란 얘기겠군.

“우리 쪽에서는 백신이 완성되는 대로 조제 데이터를 보낼 겁니다. 그곳에서 백신을 양산하여 사용하는 일은… 아무래도 형님께서 수고를 좀 해주 셔야 할 것 같군요.”

“지금 그 시설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 특히 KKK단은?”

“그자들과 기타 이주민들을 유인하여 그 섬에 모아 놓기는 했습니다만, 그들이 우리의 정식 하부조직인 건 아닙니다.”

“역시 날 해치우려고 고용한 용병이었군.”

대뜸 단정적으로 말해봤으나, 원판은 지극히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혐오하는 타입의 인간들을 애써 모아 놓은 건, 오히려 그들과 우리의 코드가 다르다는 점을 당신께 알리고 싶었 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제라도 압력을 넣어서 철수를 종용할 수는 있…………….”

“됐다. 예정대로 내가 직접 처리하지.”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애써 준비한 ‘선물’ 을 받아주신다니 기쁘군요.”

…쳇. 너무 자연스럽게 프리메이슨의 대변인 노릇을 하니까. 저 녀석이 정말 프리메이슨의 반역자이며 내편이 맞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네.

“그나저나 너 인마. 니가 뒤처리를 전부 맡았다고 하더니 이게 뭐야.”

“훗. 저도 공연히 성격 나쁜 형님을 부려먹고 후환을 걱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우리 쪽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서 그 섬을 장악하고 ‘쓰레 기 처리하듯’ 정리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정작 형님께서 원치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건 그려.”

하는 수 없이 ‘덤테기 쓰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난 이 백화점에서 얼마간 더 탱자탱자 놀다가 천천히 KKK단만 정리하고 떠나면 되는 거고, 백신이야 여기 사람들이 알아서 챙기라고 하면 그만이 라고 생각했었는데… 엠병. 이렇게 되면 졸라 바쁘게 생겼다. 16시간 안에 자그마치 16만 명의 시한부 생명을 구하려면 시간당 만 명…………! 으~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의 진행을 떠올리다보니. 절로 한숨이 먼저 나왔다.

하아아아아~ 나란 놈은 대체 왜 이리 오지랖이 넓은 건지……………

“이건 말야, 윈드.”

나는 문득 손을 들어 옆에 있는 윈드의 어깨 위에 얹었다.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 같은 그런 류의 인간이라서가 아니야. 난 단지……”

아니라고 하는데도 윈드가 날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소위 ‘영웅을 바라보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윈드에게 서글픈(?)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어째,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아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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