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33화 : 대청소 작전
3 대청소 작전
원판을 매개로 한 프리메이슨과의 정상회담(?)이 끝난 후, 나는 수하들과 윈드를 먼저 아래층으로 보냈다. “몽몽.”
「예. 주인님.」
“생각해보니까 말야. 니가 백신을 개발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사방에 환자샘플(좀비)이 즐비하잖아.”
「이미 발병한 인체보다, 프리온을 섭취했음에도 발병하지 않은 인체를 찾아 ‘예방 백신을 조제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미 발병한 환자들 의 변질된 세포를 복원하기 위한 백신을 조제하기 위해서는 변종 프리온의 원형 데이터와 다양한 임상실험 환경이 필요 합니다.」
변종 프리온의 원형은 이 백화점 안에서 팔던 ‘프리메이슨산 소고기’만 조사해도 나올 것 같지만… ‘다양한 임상실험 환경’에서 막히네.
“알긋다. 하지만… 놈들이 시간 약속을 정확하게 지킨다는 보장은 없는 거니까, 넌 너대로 만약을 대비해서 백신 만드는데 신경 좀 써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글고, 요몽. 넌 음. 아무래도 당분간 윈드를 집중 체크해야겠어.”
「으응~ 그 말씀은 윈드 군이 곧 화려한 변신을 할 거 같다는 뜻인 가요?」
“말장난할 일이 아냐, 인마.”
「…넵. 하긴 저도 윈드 군이 원판 씨의 말을 들은 후의 분위기가 좀.. 음. 윈드 군이 가엽기도 했지만, 솔직히 조금 무서웠어요.」
조금 전에 나와 프리메이슨의 회담이 끝난 후, 원판은 윈드에게 이 섬에 관한 몇 마디의 ‘진실’을 더 알려주었었다.
“그 섬에 대한 나의 관리 방침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앞으로도 ‘자율’이란다, 윈드.”
언뜻 듣기에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어. 우리나라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매트릭스급 섬을 만들어 놓고는 자율이란 표현 을 썼으니 말야.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는 건가요? 스스로 이런 껍데기뿐인 나라를…….”
나와 달리 윈드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었어. 원판은 그렇게 묻는 윈드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면서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너희들만 그런 건 아니야, 윈드. ‘대중’이라 불리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대개 ‘사육 당하기’를 선호한단다. 그렇게 만드는 건 아주 쉬워. 너라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
“닥쳐, 새꺄! 애한테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급히 막기는 했지만, 윈드의 방향을 알 수 없는 분노에 발동이 걸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같았지…………? 제기.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해 죽 갔는데, 리틀 원판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나는 곧 시작해야 할 대규모 작전을 머릿속에서 굴리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문제의 윈드는 천음마군과 은사마군을 따라갔지만, 다른 켄터키 할배 가족은 2층의 매장에 앉아 있었다. 켄터키 할배와 미나가 마주 앉아 총을 손질하고 있는 폼이 서부시대의 개척민을 연상케 했다.
패닉 상태였던 쌍둥이 자매도 이제는 많이 안정되고 밝아진 분위기… 인 건, 아무래도 막시무스의 덕분인 모양이군. 막시무스 녀석. 싸움 노예 출 신이며 길거리 노예들의 보스라는 체면도 접어두고 겁먹은 소녀들을 달래주느라 애께나 쓰는구먼.
나는 쌍둥이 소녀들 앞에서 카포에라 특유의 리듬으로 춤을 추고 있는 막시무스의 공연(?)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한 칸 아래 1층 중앙의 공간을 보았다. 거기엔 옹기종기 모여 대기중인 CR들이 보였다.
겉으로야 저렇게… 대열을 맞추는 건 고사하고 대충 어영부영 모여 앉아 주전부리나 먹고 있는 녀석들이지만, 저 녀석들이 바로 원판의 비밀 병기 군단이며 현재는 나에게 고용된 (사탕과 아이스크림으로?) 최강의 용병들…………! 헌데…………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저들을 상당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흘끔거리고 보면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새벽에 우리보다 먼저 백 화점으로 피난해왔던, 이 나라의 명색이 ‘주인’인 이들이었다.
“어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내가 소리쳐 부르자, 피난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모여들었다.
“댁들도 웬만하면 이리 합류하쇼. 당신들도 함께 바깥의 좀비들을 해결해야지!”
흐음. 잠깐 웅성대는 것 같더니만 슬며시 생까는군. 내가 싸가지 경비원들을 처리할 때 그랬듯, 우리가 계속 멋대로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며 노 는 것도 맥없이 지켜보고 있더니만……”
“뭐, 댁들 눈에는 우리들이 혼란을 틈타 등장한 ‘노예 출신의 도적패’ 쯤으로 보인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겉 으로만 멀쩡하지 당신들도 속은 좀비인 거 아냐? 왜 이리 멍청하게만 있는 거야?”
비웃어줬더니 발끈하는 기색의 남자들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내가 들고 있는 정글도와 산적패 두목스러운(?) 분위기를 감당하지 못하 고 다시 눈을 깔았다.
“내참…….”
“소용없어요.”
윈드였다. 친음마군, 은사마군과 함께 날 기다리고 있던 윈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무슨 일에든 앞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무조건 ‘질서와 평화를 어지럽히는 사회의 악’이라고 인식하는 교 육에 세뇌되어 있어요.”
윈드는 날 올려다보며 쓰디쓰게 웃었다.
“세뇌라는 건 참 무서워요. 예를 들어, 어제까지 ‘노예들은 짐승이라서 협동과 질서라는 걸 모른다’고 떠들던 신문과 방송들이 오늘은 ‘노예들이 집 단으로 몰려다니는 걸 보니 역시 짐승답다.’ 라고 말을 바꿔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예들은 역시 짐승’이라고 하죠.”
“윈드. 너………….”
“각각 개인을 보면… 분명 바깥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선량하고 똑똑한 사람들이건만… 대체 언제부터 스스로 ‘평화롭고 풍족한 가축’이 되는 길을 택한 걸까요? 사람들을 자기들 입맛대로 현혹하고 세뇌시킨 이주민들…………! 그들에게 모든 잘못이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들이 오기 전부터 이 미 바깥 세상과의 단절을 결정했던 이 섬의 지도자들…………! ‘다스리기 편하다’는 이유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은 그들에게 그들에게만 이 모든 책 임을 물어야 할까요?”
윈드는 내가 아니라 이 섬의 국민들을 향해 묻고 있는 거지만, 누구도 이 어린 소년의 의문에 대답을 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준 형님의 말이 맞아요. 정말 잘 보신 거예요. 우리 섬의 사람들은 프리온에 감염되기 전부터 좀비였어요. 동양에는 조삼모사 (朝三暮四)라는 말 이 있다죠? 우리 국민들은 또한 그렇게 아둔한 원숭이들이기도 해요. 어제 천 개를 빼앗아간 자들이 오늘 고작 열 개를 베풀어도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죠. 누가 그걸 깨우쳐주려 하면 또 어떤 줄 아세요? 기존의 몫 열 개마저 못 받게 될까 봐, 욕을 하고 물어뜯었죠. 아, 물론 그걸 깨우쳐 준다고 설치던 사람들도 결국엔 추해졌어요. 자신들이 조금 더 알고 있다고 해서… 거들먹거리며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다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자 들로 전락했죠.”
“야, 야! 윈드!”
어린 꼬마가 자신의 조국과 국민들을 모두 싸잡아 비하하는 걸 듣고 있기가 거북해서 막은 건・・・ 젠장. 나, 나뿐인 거야?
“그만해, 인마. 그거… 결국 누워서 침 뱉기다.”
아 글쎄, 내가 왜 대신 궁색한 변명을 해줘야 하냐고오~! 이봐 요, 이 섬의 어른들! 당신들 대체 왜 이래? 애가 이러면 누구라도 나서서…………… “윈드!
맥스였다. 유일하게 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던 청년 맥스가 지하로 연결된 통로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윈드. 우리도 이제 저 좀비들이 왜 발생했는지를 아. 그리고 우리들의 섬이 이 꼴이 되어버린 데는 우리 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거. 그런 것도 깨달았어. 하지만… 이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행동에 나서기까지에는 시 간이 필요해. 너도… 음. 지금은 좀 진정하는 게 어떻겠니? 니 나이 때에는 어른들의 사고방식이 갑갑하다고 느끼겠지만, 어른들은 결코 바보가 아 니야.”
맥스의 말에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지만… 역부족. 비드는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
“상식적인,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이네요. 하지만・・・ 진작에 그랬어야 했어요. 비상식을 천천히 상식으로 바꿀 수 있었던 시간을 당신들 스스로 저 버렸어요.”
지금 윈드가・・・ ‘우리’라고 하던 표현을 ‘당신들’로 바꿨지…………?
“난 이미 결심했거든요.”
윈드는 사람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모두의 앞에 섰다.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랑스럽기만 했던 소년의 미소가 사람들을 얼어붙게 했다.
“당신들은 증인이자, 목격자…………! 당신들은 지금 가까운 미래의 독재자를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이런 우려했던 상황이 기어이…………!
“이 섬, 이 나라 제가 가지겠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지금보다 몇 배로 평화로운 삶을 풍요롭게 누리며… 사육될 것입니다. 선택하는 자유를 누 릴 자격조차 없는 당신들이지만… 나, 윈드 S 샌더스는 당신들을 너무나 사랑하니까요.”
조국과 어른들에게 철저하게 실망한 어린아이의 황당한 외침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의 누구라도… 특히 나는 저것이 단순한 감 정의 표현에서 그치지 않을, ‘예언’에 가깝다는 걸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저 작고 어린 소년이 뿜어내고 있는 한없이 어둡고 거대한 기운 은 모두에게 한 가지 확신을 더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런, 젠장. 저 녀석은 앞으로 자기가 원하는 이상국가를 ‘강제로’ 만들겠다는 거야. 비화곡의 마인들이라면 몰라도 평범한 사람들이 원판 스타 일의 통치를 받게 된다면… 아니, 아니… 그보다 내가 당장 열 받는 건………….
「어머? 이상도 해라. 윈드 군은 지금 좋은 얘길 한 것 같은데, 분위기가 왜 이래요?」
“야 인마, 요몽. 니 귀엔 그게 좋은 얘기로 들리디?”
「예. 윈드 군이 나중에 보스가 되면 나쁜 사람들을 싹 몰아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거 아닌가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런 거긴 해. 하지만 그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야.”
「어… 저도 독재라는 것이 썩 좋은 게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치만・・・ 솔직히 주인님이야말로 확실한 독재자시잖아요. 근데 다들 좋아하는걸요?」
“그건 인마. 우리 지하무림은 국가가 아니잖아. 물론 비슷한 구석이 있기도 하지만, 지하무림이나 보통 회사들이나…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한 조 직’과 ‘국가’는 엄연히 다른거라구!”
「우웅~ 전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는데………… J
“됐다! 나중에 설명해줄게.”
난 명색이 지하무림의 지배자…………! 다른 일은 몰라도 나와 지하무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요몽에게도 차이 점을 알아듣게 교육시켜 줄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난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야…………!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답지 못하면 당연히 그렇게 만든 어른들부터 족쳐야겠으나, 이번 경우에는 아 이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있으므로………….
따악-!”욱!”
불시에 뒤통수를 맞은 윈드가 울상이 되어 날 돌아보았다.
“아~ 대체 왜…”
항의하려던 윈드가 찔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스팀 받은 얼굴을 녀석에게 바싹 들이대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노무 자숙이! 벌써부터 뭐가 어쩌고 어째? 어른들보고 당신들, 당신들 해싸면서 독재가 어떻고 사육이 저떻고. 시건방 진 소리를 쳐 씨부려 싸? 싸가지가 바가지인 놈이 미래의 지도자는 개뿔이!”
“그렇지만 저 무기력한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지도자가…………….”
꼬옹~!
윈드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귀여운 소리에 비해 뼈 속까지 아리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너어~ 정권 잡기도 전에 꿀밤 맞고 죽어볼 텨?”
나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마른침을 꼴깍 삼킨 윈드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윈드의 시선은 나의 주먹으로 향해 있었고, 내 주먹은 가운데 손가락의 관절만 살짝 세워져 있다.
짜식…………! 이제야 ‘제트(Z) 펀치 꿀밤’의 위력을 깨달았군. 최홍만에게 핵꿀밤이 있다면, 이 몸 진유준에게는 이 제트 꿀밤이 있다. 버릇없는 꼬맹 이를 다스리는 데는 이게 최고지, 암!
“애가 애 같아야 애지. 애가 애 같지 않은 꼴, 난 못 본다. 알간?”
“이렇게 야만적인 방식으론…………..”
“쯔으~!”
“아, 알겠습니다!”
세 번째 제트 꿀밤이 작렬하기 직전에 윈드는 결국 항복 선언을 한 셈이었다.
“…녀석. 착하게 굴면 이렇게 귀여운 놈이 말야.”
난 제트 꿀밤 대신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다음, 은근하게 말 했다.
“윈드 S 샌더스…………..! 넌 아무래도 당분간 내가 데리고 다녀야 할 것 같아.”
화들짝 놀란 윈드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녀석의 머리 위에 있던 나의 손아귀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너도 날 따라가고 싶지, 윈드?”
윈드는 타발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2층의 자기 가족들 방향으로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켄터키 할배 패밀리는 아직도 이쪽의 소란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 나선 건 엉뚱하게도 요몽이었다.
「전 반대예욧! 아무리 장래성 있는 새싹 마인이라도, 주인님께 교육받으면 원판 씨처럼 샤프하고 명품스런 악당은 결코 될 수가 없다고욧!」“몽 몽.”
윈드의 마지막 희망(?) 요몽마저 몽몽에게 체포되어 끌려가고 난 후. 나는 비로소 다시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며 수하들 쪽으로 돌아섰다.
“사소한 말썽은 이제 대충 정리된 것 같고… 자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 섬의 ‘대청소 작전’을 시작해볼까?”
살짝 몇분쯤 지난 후.
“…대충 그래.”
상황을 설명해주는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다들 잘 알아듣는 눈치였다.
“16시간 안에 16만 명의 좀비놈들을… 윽.”
천음마군은 은사마군의 팔꿈치에 찔린 옆구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 많은 좀비 분들의 치료제를 확보해야 한다는 거로군요. 그냥 전부 쓸어버리는 거라면 몰라도 아무래도 손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그치? 그래서 지금 몽몽과 요몽이 협력자들을 찾고 있는 중이야. 다행히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니까. 우리들 중 한 팀은 그 들을 규합하는 일을 맡아야 해.”
“그 일에는!”
음. 슬그머니 우리 쪽에 합류한 모범청년 맥스가 나서는군.
“내가 지원할게! 아, 아니… 부탁합니다, 보스.”
지금은 비록 천음마군의 험악한 기운에 압박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맥스 자신이 우리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눈치였다.
“좋아. 당신도 천음마군 팀에 합류.”
“고마워요.”
“예? 그걸 제가 하는 겁니까?”
기뻐하는 맥스와 달리 천음마군은 어린애처럼 입부터 나왔다.
“그래. 천음마군이 아직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서 백신의 빠른 전파를 대비하는 팀을 맡아 글고 그 팀에는….”
나는 윈드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덧붙였다.
“요 녀석도 포함이야.”
분명 앞으로 당분간 내가 데리고 다닐 생각인 건 맞다. 하지만 그 전에 천음마군의 교육(?)부터 거치는 편이…………….
“이런! 그 시건방진 꼬맹이까지 저에게 떠맡기실… 욱!”
괜히 토 달다가 다시 옆구리를 찔린 천음마군이 가해자 은사마군을 돌아봤지만, 은사마군과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눈을 깔았다.
흐음. 언젠가 은사마군에게 천음마군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기는 해도… 솔직히 별로 기대한 적은 없었는데 말야. 오늘 우째 좀 다 른 분위기인 걸 보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뭔 일이 있었나 보군. 천음마군이 엄청 아끼는 술단지를 은사마군이 인질로(?) 잡았다던가… 뭐, 암튼.
“은사마군은 이 섬의 알량한 지도층들이 짱 박혀 있다는 국회 공격을 말아. 뭐 꼭 빨리 점령할 필요는 없고, 내가 그 부근의 진짜 목적지를 치는 동 안 지원하지 못하도록 묶어두기만 해도 돼.”
누가 봐도 천음마군과 은사마군의 역할이 바뀐 배정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지. 천음마군은 저 포악한 성품에도 불구하 고 의외로 인복이 많은 편이거든. 그리고 자기 국민을 버린 정치인들 따위가 만나야 할 건 깡패(?) 정도가 아니라 ‘킬러’여야 하는 거고 말이지.
“CR들 중에서 소냐와 BB형제, 아쿠아린 형제, 세이렌 자매. 이렇게만 나와 함께 간다. 다른 대원들은 천음마군과 은사마군이 알아서 적당히 데 려가. 기본 사항은 이런데… 뭐, 더 의견 있으면 얘기해.”
“없습니다, 천주.”
“없죠, 뭐.”
산뜻하게 대답하는 은사마군과 달리 천음마군은 다소(?) 불만이 있어 보였다. 저런 상태의 천음마군에게 맡겨지는 윈드의 안위가 약간 걱정되기도 했지만…….”
“좋아. 편성 즉시 출발한다. 특히 천음마군 팀은 더 서둘러 줘.”
“복명!”
“복명!”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천음마군과 은사마군이 ‘나랑 갈 사람 여기 붙어라~를 하고 있는 사이, 난 먼저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왜, 윈드.”
“모두 이곳을 떠나는 건가요? 그럼 저희 가족들은요?”
“글쎄?”
잠깐 걸음을 멈추고 2층을 올려다보니 켄터기 할배와 미나가 난간에 서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자기 앞가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 왜? 넌 니 가족들도 무기력하게만 보이냐?”
“그, 그게 아니라 상황이 워낙…”
“걱정 마라, 윈드!”
소리쳐 대답한 것은 켄터키 할배였다.
“이 할아버진 네 생각보다 정정하단다! 좀비 따위는 겁나지 않아!”
“그래, 윈드! 이 누나가 골목대장이었던 거 잊었니? 동네 녀석들이 널 울리면 항상 내가 구해줬었잖아!”
미나까지 총을 치켜들며 큰 소리를 탕탕 쳤고, 윈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나에게 외쳤다.
“그 아일 잘 부탁하네, 노예 친구!”
“나도 부탁해요, 진유준 씨! 그리고 이 섬을 엉망으로 만든 놈들 전부 박살내줘요! 우리 대신!”
흐음. 앞으로 나서진 않았어도, 역시 모든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군. 정상적인 국민들의 요청도 받았겠다. 더 안심하고 꼬맹이 교육과 대청소 에 매진해 볼까나?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 백화점 밖의 전장을 향하기 시작했다. 소냐가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붙었고, 뒤에서 쿵~ 쿵~ BB형제의 묵직한 걸음 소리 가 들렸다.
쿠와아악~
뜬금없이 거센 파도가(?) 해일처럼 백화점 앞의 좀비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먼저 밖으로 나갔던 아쿠아린 형제들과 세이렌 자매가 거대한 분수 대의 물을 일거에 쏟아 부어 문 앞을 정리한 것이다.
“이 섬엔 왠지 사방으로 운하가 뚫려 있는 모양이니, 너희들 온 그걸 이용하면 되겠지?”
물 전문 남매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BB형제 중 형인 빅 존의 어깨 위로 올랐다.
“목표는…………….”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눈에 확 띄는 건물이었다.
“이 섬의 중앙관청이 거의 다 모여 있다는, 저… 이 섬 최대 규모의 건물… 일명 ‘주석궁’!”
세계에서 그런 명칭을 쓰는 곳이 한 군데만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역시 나에게는 상당히 남다른 느낌을 주는군. 현역 군발 때는 북쪽의 거길 쳐들 어가서 깽판놓고 태극기 휘날리는 꿈을 꾼 적도 있었는데 말야.
쿠!!
엄청난 발사음(?)과 함께 BB형제가 뛰어올랐고, 삽시간에 주변의 풍경이 멀어졌다.
우웃! 이거 이거……………
굉장한 맞바람의 압박과 급격한 고도의 변화…………! 내가 전력으로 경공을 필칠 때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차이점이라면 이렇게……………
크웅~! 크웅~!
금방 떨어졌다가,
콰악! 콰악!
다시 뛰어오르기를 일정하게 반복한다는 거………! 으음. 조금 걱정했는데. 리듬이 비교적 단순해서 적응하기가 쉽구먼.
슬쩍 옆을 돌아보니, 함께 점프 중인 베이비 존의 어깨에 앉아 있는 소냐가 여유 있게 한 손을 흔들어 보이기까지 한다. 투명화 능력 말고는 평범해 보였던 소냐가 운동신경도 보통은 아니지 싶었다.
어쨌거나 내 경공에 비해서는 조금 비능률적으로 보였던 이 헐크식 장거리 점프가 사실은 더 합리적일지도 모르겠군. 적어도 이렇게 복잡한 도 심지역에서는 작은 건물 몇 개씩을 단숨에 뛰어넘는… 이 대형 스카이 콩콩(?) 방식이 유리……….
쿠웅! 쿠웅!
BB형제가 어떤 거리에 일시적으로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캬아악!”
찢어지는 괴성과 함께 사방에서 덮쳐오는 그림자들! MB좀비?!
반사적으로 정글도를 휘두르기 직전.
콰악! 콰악!
BB형제가 다시 뛰어올랐고, 기습을 시도했던 좀비들은 우리 발 빌에서 지들끼리 부딪쳐 나뒹굴었다. 당장의 꼴은 우습게 되었지만…………
우리가 떨어져 내리는 순간을 노렸어? 좀비가? 아무리 다른 좀비와 틀린 MB 좀비라고 해도… 웃!
더 생각을 이을 틈도 없이, 우릴 태운 BB형제는 또 다른 거리 한복판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좀비들의 숫자가 적어서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곳이 었으나, 그 좀비들의 종류가 문제였다.
쿠웅! 쿠웅!
「주인님!」
“꺅!”
“멈춰! BB형제!”
몽몽의 경고와 소냐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BB형제가 다시 뛰어오르지 못하게 했다.
시아아악-!
나의 정글도가 크게 원형의 궤적을 그린 직후, 퍽! 퍽! 퍼억! 세 마리의 MB좀비가 빅 존의 발치에 널부러졌다. 그리고 다른 MB 좀비 두 마리 는…………….
“크으?”
약간의 감정이 느껴지는 소리와 함께 엉거주춤 서 있었다. 덤벼들려던 목표물이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참…………! 소냐, 저 녀석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와 접촉하고 있는 사람까지 투명화 시킬 수 있다고 했었지…………?
꽉! 퍽!
보이지 않는 베이비 존에게 얻어맞은 좀비들이 헝겊 쪼가리처럼 날아가버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까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흣. 유령 아가씨와 헐크 콤비 앞에서는 변종 좀비들이 오히려 평범하고 초라해 보이는군.”
내가 한 소리 하자, 소냐는 허공에 머리만 드러내고 입술을 삐죽였다.
“피이 유준 아저씨야말로 진짜 무서운 분이면서………….”
“쓰으~! 너 또!”
“아, 죄송해요. 천…주.”
“내 호칭을 빨리 고치는 것도 그렇고… 그 머리만 보이는 것도 좀 그만두면 안 되겠니?”
“아…….”
다시 소냐의 전신과 베이비 존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만 허 공에 떠 있는 게 거슬려서 일단 본래대로 돌아오라고 하긴 했지만…..
“소냐. 넌 전에 자룡대주에게 제출한 ‘자기 소개서’에서 ‘다른 사람 한두 명까지 가능’이라고 썼었지?”
“예. 하지만 조금 무리하면… 현재의 일행 전부에게 능력을 거는 것도 가능해요.
그거 마침 잘 됐.. 아니, 잠깐?
“무리하면…………? 그럼 무슨 부작용이라도 있는 거니?”
“예. 능력 범위를 확장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서………”
소냐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말했다.
“쉽게 배가 고파져요.”
・・・훗. 대체 여자들은 왜 이렇게 먹는 문제에 민감해하는 건지 모르겠네.
“좋아. 그럼 이제부터는 목적지까지 그렇게 가자. 음… 도착하면 내가 한턱 쏠 테니까, 양껏 먹으면 되지, 뭐.”
“아이~ 그렇다고 그렇게 많이 먹는 건 아닌데…”
소냐는 공연히 자신의 ‘커다란 비밀'(?)을 털어놨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하루아침에 좀비들의 천국이 되어버린 화이트 판타지아 섬에는 더욱 해괴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크웅~! 크웅~!
육중한 무언가가 내는 소리와 함께 도로의 일부가 내려앉는 현상이 수십 미터 간격으로 계속 되면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이다. 적들의 눈에 는… 마치 투명하고 거대한 괴물이 다가오고 있는 듯이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그건 평범한 자들 눈에 그럴 거라는 거고, KKK단의 대마법사쯤 되는 놈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BB형제! 저기 저 건물위에서 일단정지.”
쿠웅! 쿵!
드디어 주석궁 외곽의 작은 건물의 옥상에 거대한 발자국(?)이 찍혔다. 나는 잠시 시간을 가늠해 본 다음에 말했다.
“소냐. 아래층에 편의점 있더라.”
“아… 하지만 벌써 시장하진 않은데…………….”
“웬만하면 시간 날 때 먹어둬. 은사마군 팀이 그들 목표에 도착 하면, 우리도 시작해야 해.”
“…예. 그럼 전 잠시….”
하여간 얘도 참. 아침 챙겨 먹는 게 뭐 그리 남부끄러운 일이라고 계속 저렇게 수줍어하는 건지 모르겠네.
사르릉~
소냐가 능력을 끄는 순간, 아주 잠깐 흔들렸던 눈앞이 곧바로 정상화된다. 투명화 되어 있는 도중에도 시야는 전혀 지장이 없었으니, ‘투명인간은 자신역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약점까지 보완한 완벽 투명화인 셈이다.
물론 소냐의 능력은 본래 빛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라니까 투명화라고 하는 건 틀린 말일지도 모르지만. 뭐, 그거야 어쨌든.
소냐는 슬그머니 아래층으로 향했고, 나는 문제의 주석궁을 올려다보았다.
명칭은 촌스러워도 실상은 40층이 넘는 초현대식 건물…………! 저 안에 거의 모든 관청과 의료지원 시설까지 집중되어 있다 이거지?
“몽몽.”
「예, 주인님, 주인님과의 회담을 위해 오픈 되었던 라인을 통해 목표 건물의 시스템을 일부 해킹했습니다. 물리적으로 단절 보호 된 서버가 많아 서 모든 데이터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주석궁 건물 위로 스옥- 몽몽 제공의 3D 그래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1층부터 30층까지의 대략적인 구조도입니다. 건물 방어는 통상적으로, 2년 전 국가주석의 친위대로 격상된 ‘제2호위부’에 의해 이루어지며, 2호 위부는 총 5과로 나뉘어………………」
세부 부대 명칭까지 그쪽 냄새가 나네. 이쯤 되면 아무래도………….
「원판 씨도 차암.」
몽몽의 보고가 끝나갈 즈춈, 요몽이 끼어들었다.
「주석궁에 관한 데이터 사이에요, ‘암호화된 메시지’가 끼어 있네요? 내용은……
…유준 형님. 이것이 이번에 준비한 저의 마지막 선물입니다. 당신의 성격상, 언제고 직접 쳐들어가고 싶어 할 장소의 분위기와 중요 방어 시스템 을 미리 경험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해서 말입니다. 단, 평범한 인간으로 구성된 부대들은 생략합니다. KKK단의 마법사가 쓸 수법도 제 영역은 아 니고요. 아무쪼록 건투를.
「이상인데… 3년쯤 전에 넣어 놓은 거네요.」
3년 전…………..? …쯧. 이젠 놀라거나 불쾌해 하기도 귀찮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자. 뭐, 이번엔 약간 눈곱만큼은 고맙기도… 음. 그것도 됐고.
“은사마군은?”
은사마군 팀이 치기로 한 국회 건물은 이곳으로부터 2~3km정도 떨어진 곳이라서 전경의 일부가 보이고 있었다.
「코드명 은사마군이 이끄는 팀은 현재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접근 중입니다. 예상 도착 시간은 17분 41초 후.」
이런 예상보다 빠른 걸? 소냐를 빨리 내려보내길 잘했네. 은사마군 팀이 BB형제를 타고 이동한 나와 큰 시간차가 없게 가고 있다는 건, 팀 구성 을 재빨리 끝내고 전력질주로. 음?
허공에 새로운 화면이 뜨더니 은사마군 팀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고 있는 은사마군과 그녀를 호위하며 따르는 CR들의 ‘진격’ 모습이었다. 패티의 인공위성 카메라로는 도저히 찍을 수 없는 각도로 근접 촬영되는 영상이기도 했다.
이 섬에는 은근 독재 국가답게 엄청나게 많은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덕분에 내가 수하들의 움직임을 체크하고 지휘하기 좋게 된 셈이군. 어쨌거나……….
「오~ 삼빡한데요?」
“…그러게.”
요몽의 버릇없는(?) 감탄에 일단은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좀비들은 덤벼들 타이밍을 잡지 못할 스피드…………! 간간이 습격해오는 MB좀비들은 CR들에 의해 차단 및 클린…………! 은사마군을 따르는 CR 들은 주로 ‘스피드’와 ‘절단 능력이 뛰어난 녀석들인 모양인데 으음. 사탄의 인형 처키는 왜 하필 저 팀에 붙어 서 짧은 다리로 간신히 쫓아가고 있는 건지…….
「···코드명 천음마군의 팀은 섬의 남쪽 외곽지역 좌표 23, 31을 목표로 이동 중입니다.」
천음마군 팀도 그리 느리진 않군. 허약체질의 두뇌파 윈드 녀석을 비비안이 애기처럼 안아 들고 가는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고.
“저 좌표에 ‘협력할 만한 주민들이 있는 거냐?”
「일반 주민이 아니라, ‘군인’들입니다. 이 섬에서는 도시 밖의 불모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미치광이 게릴라 집단’으로 분류. ‘전차 부대’를 상시 주둔하여 경계해왔습니다.」
반대파 떨거지들을 고의로 키워서 국민들에게 약간의 위기감을 갖게 하고, 그걸 통치에 이용한다…………? 뭐, 역시 전형적인 방식이로군. 어찌되었 든, 그런 임무를 맡을 정도로 충성심이 강한 군인들을 과연 천음마군이 잘 설득할 수가 있을지, 그게 중요한 문제겠지 만서도………….
“…요몽. 소냐에겐 천천히 먹고, 천천히 뒤따라오라고 전해.”
「넵.」
“가자. BB형제.”
그래. 수하들 일은 수하들을 믿고, 난 내일에 충실해야지.
후우우웅~ 쿠아앙!
위압감 넘치는 기세로 공중을 날아 주석궁의 앞에 착지! 한 BB형제의 어깨에서, 나야 가볍게 웃차 하고 내려섰다. 무게감은 그렇다 치고. “어이~ 나왔다. …청소하러.”
…쯧. 그래도 애써 개폼 한번 잡아봤거늘, 호응이 너무 없지는 않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어느 사이에 조금 열려 있었다. 거대한 문이 빠끔히 열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시라요.”
너무나 확실한 한국말 겸(?) 북쪽 지방 말투였다. 요즘 유행어로 ‘뭥미’쯤 되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자니까, 너무나 조신하고 고운 자태의 한복까지 입은 여성동무(?)께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진유준 선생이시지요? 죠는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래 보좌하는 ‘리순희’ 이라고 합네다.”
“…저기, 약간 동양적이기는 해도, 댁은 분명 백인 여잔데?”
어이없어하며 물었더니, 짝퉁 북녀께선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호호호- 노무 놀래지 마시라요. 죠희 5과 소속, ‘기쁨조’는 세계 각국의 언어를 가열차게 익혀서리, 진유준 선생의 고향 말씨도 잘합네다.”
“난 경기도 안성 출신이고, 지금은 서울 살아.”
“…겨, 경기…도요? 고거이 오데 말씀하시는 곤지………….”
어학 공부는 꽤 했는지 몰라도, 그 밖의 공부는 개판이로군.
“아, 어쨌든 날래 들어오시라요. 지도자 동무께서 기다리고 계십네다.”
원판이 짝퉁 주석인지 지도자동무인지에게 어떤 정보를 어떻게 흘렸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아쉽기도 하군. 평소라면 이런 상황을 나름대로 재미 있게 즐길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의 나에게는 그럴 정신적 여유가 별로 없으니 말야.
난 일단 얌전히 기쁨조를 자처하는 여자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아니, 그걸 조금 오버한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진짜 왕궁 의 내부 같은 공간이 날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회 기쁨조가 요렇게 떼지어 손님을 접대하는 건 처음입네다.” 안내하는 여자의 말처럼 정말 ‘떼지어’ 서 있었다. 안내원처럼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초특급 미녀들이었고, 안내원이 백인인 것과 달리 다른 미녀들은 나와 같은 동양계로 보였다.
“진유준 선생께선 공화국에 만연한 돌림병이래, 낫게 해주실 분 이니끼니… 모든 기쁨조가 온 마음, 온 몸으로 가열차게 접대하라고……….”
안내원 여자의 음성이 은근해지며 표정과 눈빛까지 게슴츠레하게(?) 변하고 있었다.
“…거 좋지.”
나는 갑자기 색기를 발산하기 시작한 안내원 여자를 마주보며 씨익-웃어 주었다.
“근데 말이야. 내가 아는 어떤 녀석이… ‘평범한 인간으로 구성 된 부대들은 생략’이라고 하더라구.”
“고거이… 무슨 말씀이신지…………….”
“너희들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란 얘기지. 게다가・・・ 당신 빼고는 전부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는 것 같고 말야.”
“…조는 아직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곤지……….”
“당신은 그래도 여자는 여자인 것 같으니까, 기회는 준다. 비킬래, 죽을래.”
비로소 스윽- 소리가 들렸다고 착각할 만큼 명확하게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안내원 여자는 물론이고 떼지어 서 있는 놈들 모두가 일시에 미소 를 지우고 싸늘한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진유준 선생께선, 어리석습네다. 순순히 지도자 동지의 뜻을 받을었으면 천국이래 안겨 드렸을 곳을…….”
말끝을 흐리는 여자의 입이 조그맣게 오므라지고 있었다. 휘익 –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리는 순간,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바 늘 같은 암기가 귓가를 스쳐간 직후, 여자의 손이 날카롭게 휘둘러지며 뭔가가 반짝 빛을 발했다.
실? 금속성의?
암기의 명확한 정체도 모른 채, 일단 움직이지 않고 있어 봤다.
흐음. 역시 실은 실이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실이 나의 목과 오른팔에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실은 어느 사이 몇 미터 밖으로 물러서 있는 여자의 손가락에 연결되어 있 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 사이에 다른 놈들 몇 명이 재빨리 BB형제를 포위하고 있었으며, BB형제는 나보다 몇 배 많은 수의 거미줄에 전신이 감겨 져 있었다.
“나, 리순희…….”
에? 설마 그게 본명이었나?
“함께 자라고 훈련받은 온니는 진짜 공화국에 가고… 나만 요런 곳에서 심심했었시요. 고러다 동무래, 온단 소식 듣고 기뻤었는데………
백인 북녀(?) 리순희는 씁쓸하게 웃더니 살짝 손가락을 움직였다.
패액-
리순희의 손가락 움직임에 비해 실이 당겨지는 힘은 터무니없이 빠르고 강력했다.
“진유준 동무래, 소문과 달리 노무 약한 거 같……”
리순희의 말이 멈춘 것은, 목과 팔이 동시에 잘려져야 했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 오또케, 아무 느낌도 없이……”
“그건 말이지.”
쉬익-
나의 정글도가 리순희를 포함한 공간을 그었다. 분명 당황했음에도 그녀는 눈부신 스피드로 몸을 날려 피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
약한 신음성과 함께 비틀, 균형을 잃은 리순희가 힘없이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인체 절단용 실이 도리어 잘리는 데도 실을 쥔 사람이 모를 정도로… 내 정글도는 꽤 날카롭거든. 아, 물론 가끔 자신의 몸이 베이는 것조차 모르 는 적들도 있더라고. 방금 전의 너처럼.”
“요, 요건 소문이상・・・・・・? 고럴리가? 동무래, 분명…………..”
“지금은 내공을 거의 못써. 사실이야. 하지만 그래도 너희들 정도로는 안 될 걸?”
“맙, 소…사. 그러니끼니… 동무래 몰쩡할 때는 올매나 강하다는 얘긴지… 으, 욱!”
리순희는 새삼 가슴과 목 사이의 상처를 움켜쥐며 몸을 숙였고, 나는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다. 다른 기쁨조, 아니 ‘여장 남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쥐고 달려들고 있었다.
“마침 잘됐군.”
쉬식!
선두의 두 놈이 먼저 똑같은 부위의 경동맥이 잘리며 좌우로 쓰러졌다.
“지금의 내가….”
쉬쉭!
“생체강화전사들에게…………”
쉬쉭!
“얼마나 통할지…..”
쉭!
“궁금했거든.”
…쯧. 몇 마디 하면서 몇 번 칼질을 했을 뿐인데, 벌써 다들 뒤로 물러서면 어쩌자는 거야?
“뭐 하는 거야? 자랑스런 프리메이슨의 용병들답게 좀더 적극적으로…………….”
“으아아아~.”
이번엔 BB형제들 쪽에서 들려온 비명이었다. 녀석들의 몸에 감겨 있던 실과 연결된 자들 모두 공중을 연처럼 날고 있었다. BB형제가 모든 실을 모 아 잡고 횡횡-돌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BB형제는 나의 상당한 내공이 담긴 정글도에도 끄떡없는 녀석들………! 당연히 저런 실로는 피부에 흠집조차 낼 수 없지. “얘들아!”
“우어어?”
가볍게(?) 힘을 쓰고 있던 BB형제가 돌리고 있던 놈들을 나에게 집어던졌다.
・일곱 명? 과연?
쉬이이이이-
놈들의 실력만큼이나 가는 궤적이 허공에 그려지며… 일곱 명의 여장 남자(!) 용병들이 동시에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그리고 남아 있는 생존자 들은 이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너희들은 아무래도・・・ 빅 고램 ‘론’ 중령과 ‘도흥’ 대령, 그런 자들은 고사하고 그들이 이끄는 블러디 울프(bloody wolf)의 평균 수준도 못되는 것 같군.”
“고, 고렇지 않아!”
음. 백인 북녀 리순희 양이로군. 자신 역시 겁에 질린 표정이면서도 용케 반발하는군.
“당신・・・ 당신이래, 고져, 노무… 강한 고야. 요거이 정보의 부재. 본부 아새끼들…………! 우리래, 요런 솜에 쵸박아 놓고서리……….”
・나참.
결국 풀썩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아, 진짜 감정 잡기 힘들게 만드는 아가씨구만.”
난 그녀에게 다가가 꾹꾹, 두 군데의 혈도를 잡아 지혈을 해주었다.
“무, 무슨 짓을…….”
“니들, 생체 강화 전사들의 생명력은 잘 알지만…….”
“고러니끼니! 요거이 무슨 꿍꿍이냐고 하잖소!”
“…신사놀이.”
나는 다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얘들아, 가자.”
나와 BB형제가 위층으로 향하기 시작했음에도 더 이상 가로막는 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