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37화 : 그녀와의 첫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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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37화 : 그녀와의 첫 키스


7 그녀와의 첫 키스

내가 기습을 선택하자, 모니터 속의 케인이 갑자기 당황하는 것 같았다. 「케인 쪽으로 전송되는 주인님의 영상 데이터만 차단했습니다.」 그렇군.

「또한, 우리 측 병력들은 모두 필요한 위치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나도………………

난 재빨리 뒤를 돌아서 올라왔던 출입구 밖으로 다시 나갔다.

「케인의 시선이 주인님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습니다.」

역시! ‘직접 볼 수 있다 이거지?

“몽몽!”

「12초 안에 지정된 장소까지 이동해주십시오.」

“OK!”

12.11.10…

카운터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날다시피 아래 충으로 뛰고 있었다.

“BB형제! 거기! 그 벽을 부숴! 빨리!”

나는 목표지점으로 달려가며 급하게 외쳤고, BB형제 중의 베이비 존이 주먹을 들었다.

쿠훙!

베이비 존의 로켓 펀치가 외벽에 구멍을 뚫어 주었을 때, 몽몽의 카운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3.2.1……………..

“에랏!”

몽몽의 계산만을 믿고 구멍에 뛰어든 직후, 나는 당연히 17층 밖의 하늘을 날았다. 그러나 그건 극히 짧은 한순간의 일일뿐이었다.

“어풋! 푸푸~.”

내가 진짜 별 짓을 다하고 다녔었어도, 17층 높이의 하늘에서 물에 빠지는 경험은 처음일세! 이렇게 하늘에서 수영(?)을 하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 게 될 줄은.. 하핫! 이거, 이거 정말 기분 묘한데?

건물 아래에서 아쿠아린 형제와 세이렌 남매가 힘을 합쳐 보내준 물줄기에 몸을 맡기게 되었으니, 세상에서 제일 높게 솟구치는 분수에 올라탄 셈 이었다. 그리고 이 초대형 안락형(?) 분수의 비상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쿠르르르~

재차 발동을 거는 것 같은 진동이 느껴진다 싶었다.

콰우우우우우~

묵직한 물살이 살짝 겁이 날 정도의 스피드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고장난 엘리베이터처럼 거침없이 상승하는 물줄기 속에서 간신히 몸을 가누어 바로 서는데 성공했을 때, 난 이미 43층의 창문 밖에 도착해 있었다. 예상대로 마법사 케인은 창문 안쪽에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안녕하슈?”

내가 인사를 건네며 정글도를 치켜들자 케인은 그제야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찌이이이익~!

난 유리창을 크게 원형으로 잘라낸 다음에 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날 단숨에 43층까지 올려준 물줄기가 다시 살아 있는 것처럼 자신의 제 자리인 대운하로 돌아가는 모습도 상당한 장관이었다.

“대 마법사 케인…………! 자아 이제 어쩌실 건가? 어디, 계속 협박 해보시지 그래? 텔레파시로 누군가를 조정해서 쌍둥이 소녀를 해치겠다고 말야.” 정글도를 겨누며 다그치자, 케인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마법사 복장의 분위기 때문에 마지막 반격의 마법을 시전하려는 몸짓처럼 보이기도 했지 만………….

“항복.”

으음. 역시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었군. 최대한 서두르는 기습을 선택한 건 ‘인질이 안전하다’는 판단이 틀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다는 의미도 있 었던 거지만… 역시 인질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아… 예상 밖의 기습에 놀라서 이걸 깜박했네요.”

배도며 말투까지 달라진 케인은 회색의 망토 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모양인 ‘백기를 꺼내서 흔들기 시작했다.

“다시 정식으로 항복! 위대한 로드 오브 헬~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오~!”

“에이 쒸. 그런 모습과 목소리로 그딴 행동을 하니까, 그냥 확 죽여 버리고 싶어지네.”

“어멋? 무슨 그런 과격한 말씀을… 음. 어쨌든 깜박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요.”

음침한 남자 마법사, 아니 그런 척을 하고 있던 여자가 자신의 목에 두르고 있던 장치(아마도 음성 변조 장치)를 떼어내자, 본래의 사근사근한 톤의 미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끔찍했던 마법사 변장도 어느 사이에 익숙해졌던 모양이에요.”

목소리를 먼저 되돌린 그녀는 후드를 올려 남자 마법사의 얼굴을 드러내더니 턱 아래의 어딘가를 잡아서 쭈욱-당기며 가면을 벗었다. 어두운 안 색의 각진 남자 얼굴이 벗겨지며 아름다운 여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광경은, 예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묘한 감동 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어서 후드 안으로 모아서 숨기고 있던 머리채를 한꺼번에 펼쳐 눈부시게 휘날리며 우아함을 뽐내는 건 이런 장면의 정석이랄까…? 어쨌든 저 여자를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후후~ 역시 별로 놀라지 않는군요. 언제부터 제 정체를 눈치 채신 거죠?”

“그을쎄? 그건 당장 중요한 얘기는 아닌 것 같소만, 미스 카이.”

그렇다. 이 아름다운 은발 아가씨의 이름은 카이…………! 얼마 전, KKK단의 테네시가 고용했던 킬러로서 우리 편인 ‘사신(死神에스’와 싸울 뻔했던 여자 킬러이며, 에스와의 격돌 직전에 슬쩍 빠져 나와서 눈부신 줄행랑 실력으로 사라졌었던, 그 나름 호감녀…………!

KKK단에 고용된 적이 있던 여자킬러로 기억되어 있었을 뿐인 여자가, 사실은 그 KKK단의 비밀 보스였다는 진실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당 연히 그간의 숨겨진 모든 사연이 무지하게 궁금할 수밖에 없지만……………,

“그보다, 혹시나 해서 먼저 묻는 건데… 데릭 허버트는 지금… ‘정확히 어떤 상태인 거요?”

“그야, 아까 제가 말한 것처럼 ‘8미터 크기 백상어의 수족관’에 던져 넣어질 예정이죠. 한 시간 후에 자동으로 빠지게 되는 장치로… 어멋? 지금 벌 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미스 카이는 자기 손목시계를 보며 짐짓 큰일났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라고 했잖소.”

“흐응. 역시 만만찮은 분이네요. 음… 그래요. 전 ‘백상어의 수족관’이라고만 했지, 거기에 아직도 백상어가 살아 있다고 하지는 않았지요.” “그렇다면……….”

“예. 백상어들은 본래 ‘코블’의 애완동물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코볼’은 아까 나와 싸웠었던 짝뽀의 본명이다.

“코불은 신의 사도가 지목해준 악마처럼 강한 남자. 그러니까, 당신 진유준 씨와 싸우기 전에 투지를 불태우겠다면서 아끼던 애완 상어를 자기 손으로…….”

미스 카이는 손을 들어 상어의 목을 치는 시늉을 해보이더니, 문득 포옥 한숨을 내쉰다.

“전 정말 남자 복이 없나봐요. 만나는 남자마다 왜 다들 평범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이 여자의 전 애인(?)은 ‘살인마 킬러’였군. 이름이 헤롤… 뭐였더라? 어쨌든 그때의 그 살인마 킬러는 자기가 미스 카이에게 버려 진 것도 모르고 여자의 복수를 하겠다고 광분하여 에스에게 덤벼들었다가… 에스에게 목이 쓱싹- 세상을 하직했지. 그리고 이번 애인(?) 짝뽀는 아 까나하고 싸우다가 분해되어 인생 종 쳤고… 으음. 이런 사례들을 과연 미스카이에게 남자 복이 없다고만 할 수 있는 건진………….

“어쨌든, 그래서 우리의 불쌍한 데릭 허버트 씨는 수족관에서 직접 상어를 건져… 요리를 하는 신세가 될 거예요.”

에?

“요리?”

“예. 데릭 씨의 요리 솜씨는 일류예요. 아직 대접받아 보신 적 없나요?”

“아직 그럴 틈이… 음.”

쯧. 무심결에 상대의 대화패턴에 말려들 뻔했다. 안되지, 안돼.

“뭐, 그 얘긴 이제 됐고. 난 먼저 기본적인 상황정리를 좀 해야 하니까, 조금 있다가 당신 얘기를 찬찬히 들어보도록 하지.”

내가 여전히 정글도를 어깨에 걸친 채 말하자, 미스 카이는 창가 쪽의 긴 소파에 앉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너무나 무서운 그 남자, ‘마스터 크라우드’ 씨조차 경외하는 분에게 심문받을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사춘기 소녀처럼 가슴이 떨리는걸 요?”

하여간 이 여자, 참 묘해. 오늘 내가 겪은 상황 전부를 이 여자가 주도한 것이며, 난 그 과정에서 열도 꽤 받았었어.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스타일 도 썩 맘에 드는 건 아니고 말야.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미워하기가 어려워진단 말야…………? 으으으음… 그러고 보니……………

난 문득 ‘천년 전’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비화곡의 그 누구보다도 상냥하며 부드러운 마인・・・ 이었다고 할까? 다른 살벌무쌍 마인들을 어린 아이처럼 다루며 암중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비화곡의 숨은2인자… ‘비취각주(翡翠閣) 취음란.’

원판의 비서인 ‘란’은 사실 외모만 취음란을 닮았을 뿐이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 여자 미스 카이는 백인으로서, 취음란과는 인종부터 다른 데도 뭔가 근본적인 면에서 취음란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내가 취음란을 보면서 종종 떠올렸던 이미지는…………….

‘음탕한 분위기와 다소곳한 분위기가 혼재하고, 왠지 흐트러진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빈틈이 없어 보이는 여자’

…그래. 대충 그랬어. 그런데 미스 카이가 바로 그런 타입인 듯 한・・・ 음? 혹시 그런 느낌 때문에 내가 처음부터 이 아가씨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 던 걸까……………?

나는 새삼 그런 점을 깨달았지만, 굳이 척척박사 몽몽에게 물어 보지는 않기로 했다. 몽몽이 먼저 알려주지 않는 이상. 더 이상 누가 누구의 ‘환생 자인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만약의 경우에는 현재 원판의 옆에 있는 여자 란에게 미안해서…라는 마음도 있고… 으음. 어찌 되었든 지금은 우리 모두의 현생에서 급한 일부터 챙길 때지.

“몽몽. 24 층의 상황은?”

「…아직 큰 문제는 없습니다. 마계의 생명체들은 코드명 라프의 그 세계 ‘지위’를 인정, 예의 ‘함께 놀아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홋. 그 많은 괴물들이 라프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임시 보모 노릇을 하고 있는 건가? 아무래도 그 친구들 처리 문제는 약간 천천히 생각해봐도 될 것 같군.

“우리의 본래 목표인… ‘대규모 백신 제작이 가능한 장소는?”

「현 건물의 45층에서 47층에 걸쳐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주인님께서 현재의 장소에 돌입하시는 사이, 요몽은 BB형제와 소냐를 이끌 어 이 건물의 물리적 폐쇄 라인을 다시 복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연구실의 중요 시스템에서도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최초 좀비 환자 발생 시기의 진압 작전 과정에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며, 시스템 복구에 CR들의 협조가 있을 경우, 모든 복구 작업에 3시간 26분가량이 소요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흐음. 그 정도 시간이면 별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군. 그리고… 역시 몽몽! 알아서 전체적인지휘까지 잘해주고 있어.

「그런데 주인님.」

응? 왜 갑자기 몽몽의 음성에 힘이 없어지지?

「…먼저 복구된 시스템의 데이터 확인 결과, 이 건물의 재난대비 매뉴얼에는 ‘대규모 재난 시, 전문 연구 인력을 ‘국회 건물’로 피신시킨다’는 조 항이 있었습니다.」

“에? 진짜야? 이 건물 안에 그 사람들이 없어?”

「죄송합니다. 주석궁과 국회, 양쪽 시스템 모두에 저희들도 체크할 수 없는 구역이 있어서 사전 확인이 어려웠습니다.

“아니, 뭐. 그건 너희들도 어쩔 수 없었던 문제고.. 음. 여하간, 그럼 지금 그 국회 건물 상황은 어때?”

「아시다시피, 그곳은 코드명 은사마군이 이끄는 팀이 공략 중입니다. 그러나 이 섬의 거의 모든 병력이 집중 배치되어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기 때 문에, 은사마군 일행도 단시간의 점령은 힘들 것으로 판단됩니다. 방어군은 현재까지도 외부와의 모든 채널을 차단하고 있어서 이곳이 주인님께 점 령된 상황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원래 우리 작전은 내가 여기 주석궁을 치는 동안, 은사마군으로 하여금 국회도 동사에 치게 해서 그쪽의 구조병력이 이쪽으로 오지 못하 게 한다는 양동 작전이었어. 근데 이제 보니… 그럴 필요도 없었던 거군. 국회에 짱 박힌 인간들은 자기들만 꼭꼭 숨어 있으면 그만이고, 다른 사람 을 구해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는 거야.

“…은사마군에게 전해. ‘전투중지. 감시 위주 체제로 변경’.”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래. 그런 놈들 처리 때문에 혹시라도 우리 애들이 상하기라도 하면, 명품 신상 옷으로 변기 청소하는 꼴이지. 그쪽은… 모든 병력이 다시 모였을 때, 나까지 합세하여 일거에 쓸어버려 주겠어.

“…천음마군 쪽은?”

「약 1시간 10분 전, 목표인 전차부대와 조우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큰 전투나 적극적인 설득 시도가 없는 소강상태입니다.」

에……………? 이건 상당히 뜻밖인 소식일세? 천하의 열혈맨 천음마군이 미적지근한 태도로 시간을 끌고 있단 말야?

「전차부대의 지휘관은 이 섬 전체에 소문난 소위 ‘고집불통’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보수 성향의 인물로서………………」

“아니, 잠깐. 미안하지만 그 얘긴 좀 있다. 그래. 천음마군에게 직접 듣기로 할께.”

사실은 ‘좀 있다’가 아니라, 당장 듣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 미스 카이 대체 뭔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저 아가씨의 문제가 먼저인 듯싶었다.

저 여자가. 조금 전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마법사 망토를 벗어서 그 안에 레이스 달린 공주풍(?)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까지는. 그 런가 보다 했어. 근데 왜… 이제는 그 원피스의 끈마저 풀어서…점점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걸까?

“저기, 뭐하슈?”

내가 묻자, 비스듬히 대각선으로 서서 몸매를 자랑하고(?) 있던 미스 카이가 투명한 피부의 어깨 너머로 날 돌아보며 배시시 쪼겠다.

“보시다시피 무장해제 중이에요.”

“무장해제?”

누구라도 야릇한 상상을 하기 충분한 상황과 분위기에 대사까지 어우러진 셈인데…..

「표현 그대로 ‘무장해제 행위’ 입니다. 해당 여성, 코드명 카이의 전신 의류 및 부착물에는 다양한 형태의 살상 및 방어용 장비가 존재합니다.」

고지식한 몽몽 선생께서 재빨리 끼어드는군. 어차피 나 진유준은 모범 일편단심 청년이라서 결코 딴 생각 품을 일은 없는데 말이지.

“뭐.. 항복했다고 해서 꼭 그럴 필요는 없소. 난 당신이 아무리 많은 암기를 숨기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으니까.”

내 반응에 미스 카이는 살짝 입술을 삐죽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나 크게 실망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는 김에 당신이란 남자도 한 번 떠보려는 의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 제가 오래도록 갈구해 온 시간이에요.”

오래도록 갈구해 온 시간……? 외간 남자 앞에서 옷 벗는 게?

“물론 저의 장난감들은…………….”

미스 카이는 이미 벗어서 들고 있던 원피스 상의를 옆의 소파위로 던졌고, 충실한 몽몽이 그 옷에 숨겨진 ‘독극물이 보관된 장식’, ‘피아노선으로 바느질된 레이스’ 같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허술하게 관리되는 건 아니지만…….”

아래 스커트도 주저 없이 벗어서 던지자 곧바로 입은 건지 만 건지 모를, 얄딱꾸리한 디자인의 속옷 차림이 되었다.

「스커트와 내의에 세팅된 장비는 모두……………」

“됐다, 몽몽.”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어쩌고 할 상황은 본인 스스로 버린 것 같긴 하지만…뭐. 암튼.

미스 카이는 늘씬한 허벅지에 차고 있던 초소형 권총과 나이프, 가냘픈 팔목의 손목시계와 반지, 팔찌, 작은 귀걸이까지도 풀어서 소파 옆의 소형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급기야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엑! 저건 말려야… 아, 아닌가?

난 미스 카이가 속옷까지 홀랑 벗어버리는 줄 알고 식겁한 거였으나,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브래지어에서 탄력 있고 가는 철사 형태의 암기를 꺼내 놓는 것을 끝으로 손을 털었다.

“흐우움~ 아직도 몇 가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더 있다고? 대체 뭐가 어디에?

“뭐 이 정도만 몸에서 풀어놔도 훨씬 낫군요.”

“…그 정도 무장해제는 평소에 쉬거나 잠잘 때도 늘 하는 거 아뇨? 설마 항상 다 차려 입고 자는 건 아닐 텐데?”

“후후. 당연히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중에서 몇 가지는 항상 잠자리 주변의 어딘가로 옮겨 놓아야 조금이라도 안심을 할 수가 있죠. 저처럼 연약한 여자 혼자 험난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조심에 또 조심을 거듭하는 것이 최고의 생존술이거든요.”

흐음. ‘연약한 여자’라고? 확실히 겉으로는 ‘연약한 청순가련형 미녀’가 맞기는 하지만……………

“말하자면, 결국 ‘정신적인 피로’ 문제인거죠.”

미스 카이는 소파에 길게 눕더니 진심으로 느긋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은색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소위 말하는 ‘주말 저녁에 TV 보는 아저씨 포즈’와 크게 틀린 자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렇게 특별한 느낌의 그림이 되는 게 미녀들만의 특혜지 싶었다.

하지만… 우리 대교는 울 엄니 몸빼 바지를 입고 뒹굴거려도 저보다 만 배쯤 더 이쁘… 큼. 흠. 내가 지금 팔불출 모드가 될 때가 아니지…………….?

“저기. 모처럼 쉰다는데 방해하긴 싫지만, 중요한 얘기는 아직 시작도 안했……….”

“후후. 바로 이런 남자이기 때문이죠.”

“에? 뭐가…말요?”

“본의는 아니었지만, 전 분명히 KKK단의 정신병자들과 괴물들까지 동원해서 당신을 괴롭혔어요. 그런데도 제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함부 로 대하지 못하는… 이런 성격. 크라우드 씨의 말대로 ‘여자와 아이는 절대로 해치지 못하는 남자’라는… 희귀종.”

뭐냐. 칭찬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어차피 내 수준으로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해칠 수 없는 강자………! 그러니까… 결국 나를 해칠 걱정도, 내가 해칠 수 있을지 고 민할 필요도 없는 완벽한 남자……!”

…뭔가 이해가 되면서도 인정하긴 거시기한 논리로군.

“이런 남자의 품을 차지할 수 있다면…….”

“꿈도 꾸지 마쇼.”

“내참. 이렇게 재미없는 남자라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훗. 어쨌든 걱정하지 말아요. 저의 하트는 이미 다른 분이 전부 앗아간 상태랍니다.”

날 집적거리지(?) 않겠다면 다행이지만…그 ‘다른 분’이란 게 만약 원판이기라도 할 경우에는 좀………….

난 새삼 미스 카이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느긋하게 고개를 젖히며 나름의 평화를 즐기는 표정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아~ 이렇게… 이렇게 아무런 위기의식 없이 쉴 수 있는 시간은 ‘아프리카의 별’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달콤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아몬드의 별명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 됩니다.」

이런, 이런 여자가 다이아몬드를 마다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하다니, 지금 정말 엄청나게 기분이 좋긴 좋은 모양이네?…그…런데………! 이거 우째 ‘심문’이나 ‘추궁’을 하는 분위기에서는 한참 더 멀어져버린 것 같은데…? 젠장………..! 자꾸 이렇게 저 여자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 돼!

“내가 분명히 여자를 해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말 그대로 폭력을 휘두르지 못한다는 거요. 그 대신……! 당신이 이번 일로 어떤 대가를 받기로 했는지 몰라도, 그 ‘보수’를 못 받게 한다던가 하는 식의 ‘심술을 부리는 거야 얼마든지…………..”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미스 카이는 눈부신 속도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척, 책상다리를 하고 앉더니, 베개로 썼던 큼지막한 쿠션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자백 준비 완료. 무엇이든 물어만 봐주세요.”

“…당신이 원판 …아, 난 크라우드를 그렇게 부르지. 암튼, 당신이 원판에게 받기로 한 보수는……..”

“그야 아프리카의 별 같은 건 수백 개라도 살 수 있는 ‘돈’이죠.”

…내참. 너무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산뜻하기까지 하네. 어쨌든 이제야 겨우 그 동안의 사연을 들을 수 있게 된 것 같군, 그래.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하나 물읍시다!”

내가 문득 인상을 긁으며 입을 열 수밖에 없는 건………….

“당신이 당신의 정체에 대해서… ‘아주 쉽고 결정적인 힌트를 줬다’고 했던 거 말인데, 그거 설마… ‘케인’과 ‘카이’ 라는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다… 는, 그런 얘긴・・・ 아니겠지?”

차라리 아니라고, 더 고급스런(?) 힌트가 있었노라고 하면 좋겠건만……………

“훗, 왜 아니겠어요.”

이런 된장 맞을! 내가 그 말 때문에 얼마나 맷돌을 굴려댔었는데……! 그게 정말 그런 유치찬란하고 요몽틱한 발상의 힌트… 아, 아니! 그게 힌트 는 뭔 힌트야!

“인터넷의 한국 사이트에서 많이 유행하는 게 있던데…….”

“뭐요?”

“‘낚시’라고말예요.”

으~ 이 여자, 정말 아무리 여자라도 한 대콱 쥐어박고 싶다.

“흠. 근데 케인, 카이, 케인, 카인, 카이 정말 자연스럽게 연상되지 않던가요?”

“왜? 케인, 케익은 아니고? 케익..하니까, 진짜 케익처럼 썰어버리고 싶어지는………….”

“왓! 미안! 미안해요!”

으음. 내가 말 뿐 아니라, 무심결에 정말 정글도를 치켜들고 있었군. 이 아가씨가 지금 이렇게 두 손 모아 비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어도, 설마 내가 진짜 여자에게 칼부림을 했겠냐마는………………

“에효. 이제 보니 당신도 발끈하면 위험한 남자였네요. 하지만 결국 전부 알아챘으면서. 이렇게까지 화를 낼 건 뭐예요?”

“…쳇. 우리가 당신 정체를 감 잡기 시작한건, 백화점 안의 인질 운운하던 말 때문이었어. 당신의 그 말도 안 되는 힌트는 오히려 판단에 혼선만 줬 었단 말야.”

“백화점의 상황을 이용하려고 했을 때부터요………? 칫. 결국 제 능력으로는 당신을 완전히 속이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거네요.”

응? 이 얘긴………,

“제가 그 남자, 크라우드 씨에 의해 마법사 케인이 되어야 했던 건・・・ 3년 전의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 이후로 오늘까지 마법사 케인은 다른 세계에 서 온 괴물들까지 부리는 제국의 위대한 마법사로서 KKK단을 지배해왔지만 실제로는 모든 일이 마스터 크라우드, 그 무서운 사람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었던 거죠. 뭐…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항상 세세한 일까지 지시했던 건 아니었어요. 심지어 모든 계약이 끝나는 오늘의 임무까지도 기본 적인 목적만 얘기해주고는, ‘잘 부탁해’ 라고 하더라고요, 글쎄.”

그건 짝퉁 비화곡주까지 해봤던 내가 더 잘 알지만, 원판 스타일 이 본래 그렇다. 독보적인 두뇌파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실수, ‘일일이 참견하기’를 최대한 배제하여 수하들을 믿고 일을 맡기는 것아 다. 물론 그 전에 그만큼 믿을 만한 인재를 알아보고 등용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만 말이다.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세월이긴 했어도, 계약은 계약이고 전 명색이 프로…………! 그래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당신을 상대해본 건데… 역시 그 사람처럼은 안 되나 봐요.”

흐음… 결국 백화점 상황을 섣불리 끌어들였던… 거기부터 미스 카이 자신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허점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자책성’ 고백이로군. 하지만… 뭐랄까, 어쩐지 ‘엄살’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뭐, 지금은 암튼.

“그게. 당신은 쌍둥이 소녀들을 끌어들이면 내가 더 전투적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모양인데, 사실 발상은 나쁘지 않았어. 하지만 당신은 그러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텔레파시 능력을 입증해야 했지. 물론 당신에게는 텔레파시 못지않게 뛰어난 능력………….’

난 손을 들어 미스 카이의 은빛 머리카락 아래의 투명한 두 눈을 가리켰다.

“동양에선 ‘천리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장거리 투시 능력’ 맞지?”

미스 카이는 예의 천리안을 가늘게 하며 천진한 소녀처럼 웃었다.

“아핫. 맞아요. 저의 가장 유용한 장사 수단이죠. 물론 그 유명한 ‘에메랄드 킬러’의 신비로운 눈동자에는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꽤 쓸만해 요.”

에메랄드 킬러는 우리 ‘흑주’. …하긴, 그 녀석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더 장난이 아니긴 하지.

“…음, 어쨌든 당신은 그 투시 능력으로 백화점 안의 상황을 지켜 본 후에 그걸 백화점 안의 누군가가 당신에게 전달해준 것처럼 얘기 했어. 하지만 영상을 분석해 보니까, 백화점 안의 누구도 당신이 말했던 상황을 전부 알 수는 없겠더군. 그래서 투시 능력자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거야.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만난 투시 능력자나 그럴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세 명밖에 안 돼. 방금당신이 언급한 에메랄드 킬러, 그리고 당신 자신, 또 한 명은 프리메이슨의 암살단중의 한명이라서 일단제외.”

“어머? 당신은 지금 프리메이슨과 싸우고 있는 건데, 프리메이슨 의 암살자를 먼저 제외했다고요?”

“그건 원판 녀석이 오늘, 에레보스 멤버들의 활동을 중지시킨 다고 했거든. 지금은 놈들이 나와의 약속을 깰 수 있을 때가 아니고 말야.”

“그런 얘긴 듣지 못했어요. 크라우드 씨는 어제 부로 연락을 끊었거든요.”

원판과의 연락이 끊긴 걸 섭섭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한 명을 먼저 빼고, 에메랄드 킬러도 당신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소녀니까 또 당연히 제외. 흐으음. 그런 소거법으로 절 지목하게 되었다 이거네요?”

“그런 거지. 근데 왜?”

“왜…라뇨?”

“아니. 그냥 당신 지금 표정이 왠지 뭔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인 거 같아서 말요.”

“No…….”

미스 카이는 예의 바르게(?) 약간 망설인 다음에야 말을 이었다.

“추리의 근거가 너무 약한 거 같아서요. 제가 한 말과 백화점 안의 상황에 모순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걸 꼭 투시 능력으로만 연관시킬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음・・・ 낚시 힌트까지 던져서 혼란스럽게 했던 제가 이런 말을 하기는 미안하지만, 결국 논리적인 추리였다기보다는 ‘감’으로……………

“아니. 판단의 근거는 또 있었어.”

가만있자, 몽몽이 나올 부분은 편집을 좀 거쳐서…………….

“내가 17층의 좀비들을 완전히 해치운 직후,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나이스 샷!’이라고 외쳤었지? 아니면 속으로라도 외쳤었던가.”

지금까지 미스카이는 비교적 차분한 가운데 ‘영화 얘기를 듣는 소녀’ 정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17층에서 겪은 얘기를 꺼 내자, 비로소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걸 어떻게 알았죠? 설마 당신의 귀가 그렇게 밝다는 건…………….”

“에이. 그건 아니지. 당신은 그때 외침과 동시에 같은 내용의 ‘텔레파시’를 보냈었던 거야.”

“예? 텔레파시? 저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건 당신이 먼저 전재로 말하지 않았나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내가 예전에 주술 전문가들에게 들었던 얘기로는. 텔레파시 능력이 없는 사람도 마법이나 주술로 연결된 존재와는 정신만 으로 소통할 수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당신도 좀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거고 말야.”

“예. 계약된 존재들과는 당연히 가능해요. 하지만 당신은 계약된 자가 아니잖아요.”

“뭐, 한 쪽 상대가 소멸하는 순간의 혼선 같은 거였는지… 그만큼 그때의 당신 감정이 강해서 그랬던 건지… 원인은 나도 알 수 없지만… 암튼, 그 때 난 얼핏 당신의 목소리를 감지했었어.”

사실 다른 이유들보다 내 안테나(?)가 좋아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나 자신은 결코 원하지 않는 일임에도, 난 이미 영적인 세계에까지 한 발을 깊숙 이 담그고 있는 다용도 버라이어티 비현실 인간-! 새삼 젠장.

“뭐…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나 미약해서 처음엔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어. 백화점 상황에서 투시 능력자와 당신까지 떠올리기 전 까지는 말야.”

으음. 근데 이거………………

“쯧. 막상 말하다 보니까, 결국 논리보단 감이었던 것 같네. 인정.”

“당신이 두뇌파인지 감각파인지를 따지기 전에 전 역시 역부족. 저야말로 인정!”

미스 카이는 다시 번쩍 두 손을 들어 ‘항복’ 포즈를 취해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당신의 정체까지는 감을 잡았는데, 당신이 보인 그 결정적인 반응이 또 문제더군. 마법사가 애써 뭔가를 소환해서 부하로 삼고, 적을 공격하게 해놓고는… 결국 자기 부하가 박살이 났는데 나이스 샷……….? 이건 상식적으론 말이 안 되는 얘기잖아….

“흐응. 그걸 바탕으로 다른 사실들까지 간파하게 된 거로군요. 텔레파시 혼선을 수신해서 이용하는 남자라니…….”

쳇. 굳이 그런 걸 강조하고 그러냐.

“하아아~ 그래요. 실은… 당신이 KKK단을 섬멸하기 위해서 이 섬에까지 도착한 시점에서, 저의 마법사 케인으로서의 임무는 다 끝난 거나 다름 이 없었어요. 이렇게 당신을 만나서 크라우드 씨의 메시지를 전해주기만 하면 모든 계약이 마무리되는 거였지요.”

에…………? 뭐시라? 나와 싸울 필요조차 없었다고?

“그러~나! 계약이 끝나서 자유를 되찾기만 하면 뭐해요? 골치 아픈 혹들이 그대로 붙어 있게 생겼는데!”

난 이 아가씨가 나와 싸우고 싶지 않은데도 원판의 명령 때문에 억지로 싸워야 했던 거라고. 그렇게 추측했던 건데 우째 얘기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제가 오래 전에 우연히 만났었던 동양의 주술사… 아, 그러고 보니까 그 실력 좋은 남자도 한국인이었네요. 음… 어쨌든 전 그 남자에게 몇 가지 주술을 배워서 지금도 쓸 수 있기는 해요. 그렇지만, 그건 사실 그리 대단한 건 못돼요. 당신이 오늘 목격한 괴물들은 전부 크라우드 씨가 거금을 들 여서 고용한 마도사(魔道士)들이 소환해서 저에게 ‘계약 승계’를 한 거였어요. 제국의 마법사 행세를 하려면 그 정도 괴물들은 부릴 수 있어야 한다 는 거였죠.”

‘계약 승계’……? 마법이나 주술에는 그런 것도 있는 건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한심한 마도사들이 글쎄, 초가 계약 기간을 2년으로 정해 놨더라구요? 그래서 작년에 어쩔 수 없이 연장을 해야 했 단 말예요.”

나참. 그게 무슨 전셋집 계약도 아니고……………

“다시 말해, 저는 어쩔 수 없이 끔찍한 괴물들과 1년을 더 함께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된 건데 그건 정말이지 싫었어요. 믿었던 크라우드 씨조차 ‘고맙게 잘 쓰라’고 하기만 하고…….”

“잠깐.”

…쯧. 뭐가 어찌 되었든. 아까 이 아가씨가 ‘난 능력 부족’ 어쩌고 했던 건, 역시 전부 엄살이고 연약한 척이었어. 그러니까, 이 만만찮은 아가씨는 결국 귀찮은 괴물들을 없애고 싶어서 날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건데 그렇다면 나도 쉽게 협조해줄 수는 없지. 암.

“난 원래 원판이 하는 말은 다 싫어하지만… 그 ‘고맙게 잘 쓰라’는 의견에는 찬성할 수밖에 없겠어. 솔직히 당신도 보통 여자가 아니면서 뭘 그러 는 거야? 굳이 나 같은 남자를 찾을 것도 없이, 그놈들을 호위로 세워두면 아무 걱정 없이 푸욱 쉴 수도 있을 테고. 이건 정말 고마워해야 할 보너 스 아닌가? 때론 늑대 인간이나 오우거와의 데이트… 좋잖아~?”

“…진유준 씨! 자기 일 아니라고,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웃……………! 어떤 대화가 오가도 시종일관 사근사근한 분위기는 기분으로 유지하던 여자가 갑자기 살벌하게 돌변했다.

“그 괴물들이 얼마나 제 말을 안 듣고 능글맞은 놈들인 줄 아세요? 제가 초보라는 걸 알자마자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고, 느슨한 계약 조항을 요리 조리 꿰어 맞춰서 툭하면 지들 멋대로 나오고 싶을 때 나와서 사고를 치고 다니질 않나! 으~ 제가 그런 사고들을 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 세요? 게다가 그놈들도 수컷이라고 추근대긴 또 얼마나 추근대는지 아주 징글징글해옷!”

“저기, 잠깐 진정을 왜 나한테 화를………….”

“그 뿐인 줄 아세욧! 늑대 인간인지 뭔지는, 꼴에 질투심은 가장 심해서 좀 괜찮은 남자가 저에게 접근한다 싶으면 당장 습격해서 갈갈이 찢어 놓 는 게 아주 생활이에요! 아~ 글쎄. 이 미스 카이가 왜 배불뚝이 코블 같은 남자하고나 저녁식사를 하는 신세여야 하냐구옷!”

짝뽀, 코블… 그 남자만 늑대 인간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인 건인 거고. 대체 내가 왜 갑자기 이 아가씨의 히스테리를 받는 신세가………………

“아, 글쎄. 제 말 좀 더 들어보세요!”

에?

“세상에~ 3년 전, 처음에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헛~! 3년 전 일부터 녹화 방송을 틀기 시작하겠다는 거야?

“자, 잠깐! 잠까안!”

다급하게 외치며 두 팔 벌려 막았다. 그러나 미스 카이의 입은 일시적으로 멈췄을 뿐, 달싹달싹 다시 열리고 싶어 안달이 난 기색이 역력했다.

“처・・・ 처리해줄게. 내가 전부 처리해줄게! 그럼 되잖아!”

“…정말요?”

“그런 상습 성추행, 스토커 괴물들은 나도 싫어.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고 전부 돌려보내던가, 정 안 가면 전부 때려 죽여버리던가 할 테니까. 이 쯤에서 그만 좀 하쇼.”

“고마워요….홋.”

곧바로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와 살짝 쪼개기까지 하는걸 보면, 내가 당했다 싶기는 한데… 그래도 이건 남자라면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여자 전용 무적의 스킬…………! 아아~ 대교・・・ 나의 대교! 너도 여자라고 이런 스킬을 내장하고 있는 건… 설마, 아니… 겠지? 응?

“아아, 이제야 진짜 홀가분하게 마무리되었네.”

말 그대로 ‘아이 좋아라~’ 표정이로군. 솔직히, 상대가 아무리 마계의 괴물들이라고 해도 이 만만찮은 아가씨가 쉽게 휘둘리며 지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뭐, 어차피 마계놈들을 그냥 방치해둘 수 는 없는 노릇. 인건인거고! 어디… 두고 보자. 나 진유준은 결코 대인배가 아니야. 언제고 이 여자를 제대로 한 번 골탕 먹여주고 말겠쓰~.

나는 소인배스러운 복수심을 감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아_이제 당신과 나 사이의 일은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은데?”

“음~ 그런 거 같네요. 그럼 이제………….”

“원판이 나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들을 차례지.”

“그래요. 전 메시지의 진짜 의미까지는 잘 모르지만 충실하게 전달을 해볼게요. 아…! 그 전에 먼저 당신의 수하.. 아니. 크라우드 씨의 아이를 한 명불러주시겠어요?”

흠. 적어도 CR 애들의 본질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군.

“CR들 중에서 한명만?”

“그래요. 당신과 함께 비밀을 공유할 아이는 한 명이면 족하다고 했어요. 누가 되든지 그건 상관이 없다고 했지만..

한 아이면 되는데 딱히 누굴 지목하지는 않았다고? 그럼 누굴.. 응? 미스 카이가 왜 복도 쪽의 벽을 보고 있는 거지?

「주인님. 코드명 소냐에게 들어오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뭐? 어, 응.”

철컥-복도 쪽의 문이 열리더니 보일 듯 말 듯 유리 동상 같은 소녀가 들어왔다.

“소냐?”

“죄, 죄송해요.”

“응? 뭐가?”

“조, 조금 전에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왔다가 그, 어떤 분… 그러니까, 대화・・・ 중이신 것 같아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몽몽 녀석, 대화에 집중하라고 알려주지 않았었군.

“그, 근데… 급한 거 아니니까, 마, 많이… 바쁘시면 다음에……….”

소심한 목소리만큼이나 애매하게 반투명의 형상만 보이고 있음에도. 소냐 녀석이 지금 잔뜩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흐으응~ 순진한 투명 소녀라….”

청순가면의 미스 카이는 소냐가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반 누드 행색에는 여전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야, 야! 오해하지 마! 저 아가씬 그냥 지가 멋대로 저런 차림이 된 거야. 그리고 저 아가씬 너희들의 마스터가 보낸 사람이란 말야.”

“예?”

놀라면서 샥-확실하게 투명화가 풀린다.

“마스터께서요? 정말요?”

“맞아요, 소냐 양. 안녀엉~?”

미스 카이는 한 손을 들어 여유있게 흔들어 보였고, 소냐는 얌전하게 고개를 포옥 숙여 인사한다.

“음…이제 조건이 모두 갖추어졌군요. 아. 그런데 어쩌죠? 크라우드 씨는 먼저 당신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라고 했어요. 그 대답에 따라 다른 메 시지를 전달하라고 했죠.”

이런~ 제기! 그 자식은 하여간 뭔 일을 항상 심플하게 하지를 않아. 지 성격마냥 비비꼬고 숨기고… 그러면 뭐, 좀 있어 보이나?

“쳇. 뭔지 한번 물어보슈.”

“그럼…시작할게요.”

…음? 미스 카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는군.

“당신은・・・ 오늘 아주 많은 선물을 받았어요. 당신 일생일대의 거대한 적들에게 말이에요. 하지만 직접 그 선물들을 선택하고 준비해 온 건 그들의 대리인 화이트 W 크라우드………! 자~ 당신은 당신이 받은 선물 중에서 크라우드 씨의 진심이 담긴 선물이 과연 어떤 것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좀비.”

“…예?”

정색을 하고 분위기를 잡던 미스 카이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왜? 틀렸소?”

“아, 아뇨. 이건 본래 한 가지가 정답인 건 아닐 거예요. 하지만 정말 그렇게 쉽게 선택을 해도 되겠어요?”

“좀비.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광우병! 선택 끝.”

내가 다시 한 번 대답하자, 미스 카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크라우드 씨나 당신이나 자신들의 인생이 통째로 걸린 일을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처리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네요. 아무리 쿨한 사람이라도 이런 일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따지고 고민해 보게 될 텐데 말이에요.”

그야 뭐, 나도 평소엔 그런 편이지만, 원판 놈하고 얽힌 일에는 그럴수록 내 손해인 것 같아서. 음. 어쨌든, 계속 생각해봐야 선택에는 변함이 없 을 거야. ‘어릴 때부터 별러오던 KKK단 섬멸’, ‘기타 인간쓰레기들까지 몰아서 청소’…그런 스트레스 해소성 이벤트보다는 새삼 ‘프리온’의 심각성 을 알게 된 것이 내게는 가장 큰 선물이었으니까! 그게… 난 요즘 엄청 바쁘다보니 우리나라의 시사뉴스에 무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섬의 상황 을 겪는 도중에 몽몽 이 이런 보고를 해주었었지.

「주인님, 주인님 고국의 국민들도 이제 곧 수많은 사고 가능성에 ‘로또 당첨되어 기뻐하다 번개 맞을 가능성’을 추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 이번 일로 몽몽에게 ‘백신데이터’가 확보될 테니, 만약의 경우 우리나라 사람들도 ‘로또 당첨되어 기뻐하다 번개 맞기’에 걸리기라도 하 면・・・ 음. 이건 정말 진심으로 원판에게 감사를… 쳇, 해야겠지?

“어쨌든……”

음?

“이제 당신의 선택에 맞는 메시지.. 아니, ‘상’을 드려야겠군요.”

미스 카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상? 이건 또 뭔 소리?

“선택에 정답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당신은 그 중에서 가장 크라우드 씨가 바라던 선택을 했어요. 후후후~ 이럴 경우에는 당신에게 이 미스 카이의 뜨거운 포상을………….”

뭐, 뭐야! 이 여자, 왜 그렇게 끈적한 음성과 눈빛에 몸짓까지… 어? 정말 다가오기 시작하네? 원판 그 쉑! 대체 이게 뭔 메시지야! 우리 인생이 걸 린・・・ 장난해~?

“머, 멈춰!”

난 반사적으로 정글도를 들어 미스 카이를 겨누었다.

“더 다가오면… 하여간 오지 맛!”

“쿡! 설마 이런 반응까지 아하핫! 당신 정말 귀여워!”

이런 빌어 처먹을 상황이 엇?

순식간의 일이었다. 배를 잡고 웃는 척을 하던 미스 카이가 어느 틈에 돌변하여 소냐를 기습(?!)한 것이다.

“읍? 읍?”

방심하고 있다가 입술을 빼앗긴 소냐가 뒤늦게 투명화 되었지만, 미스 카이는 쉽게 소냐를 놓아주지 않았다.

반라의 미녀가 허공에 키스 판토마임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은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론 더 에로틱해 보이기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뭐야! 이 게 진짜 원판의 메시지였던 거야? 청순가면 악녀와 투명 소녀의 키스가………? 으으~ 몰라! 몰라! 나 이제 그 난해한 새뀌하고 동업 안 해!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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