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4화 : 아빠가 되다
4 아빠가 되다
비화곡.
천하마도인들의 성지이며 본산. 그러나 내게는 단지 어쩔 수 없이 머물어야 했던 낯선 정거장과 같았던 곳. 한때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집을 그리 워해야 하는 감옥이었으나 그녀를 만남으로 인해서 꽃잎이 날리고 향기가 가득한 낙원이 되었던 이곳 비화곡.
하아아~
그래. 다시 오게 되고, 다시 걷게 되었구나. 그때처럼 대교와 함께… 함께 웃으며……………
“대교야.”
“예.”
나는 대교와 함께 머물던 창천각의 옛터, 지금은 옛터라는 말도 무색할 정도로 야트막한 동산이 되어 있는 곳에 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너 이제 나한테 뭐라고 부를래?”
“…글쎄요.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에이. 네 생각이 있을거 아냐.”
“후후. 아직은… 곡주님?”
“어, 야아!”
“반쯤은 진심이에요. 다른 호칭은 아직 이른 것 같고… 그래도 가장 친숙한 호칭이니까요.”
“에이. 이르긴 뭐가 이르다는 거야? 우린 당장…….”
아. 아니지. 아무리 급해도 ‘청혼(婚)’을 이렇게 멋대가리 없이 하는 건 곤란하지.
“당, 장… 음. 큼. 일단 조금 더 돌아보자.”
대교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다시 천천히 비화곡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묶인 시간 속에 있었던 대교는 지금도 그 당시 복장 그 대로였기에 더더욱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어디를 가든 당연히 남아 있을 리가 없는 풍경이 우리 눈에는 보였고, 시간 속에 묻혀져간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음성들이 들려왔다.
“흣~ 새삼 폭풍당(暴風堂) 당주 상관마의 걸걸한 음성이 생각나는군. 그 친구, 보기보다 순진했는데… 미염당(美艶黨)의 고리라 당주하고는 잘 됐 으려나?”
“음- 제가 와룡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비교적 사이가 좋아 보였어요. 비록 항상 상당주가 고당주에게 당하고 사는 것 같기는 했지만요.”
대교가 와룡전에 초장기 은거에 들어간 것은 내가 떠난 다음 3년 정도 후라고 했다.
“…현 시대에서는 천음마군이 된, 야후 노친네는?”
“그때까지는 호랑이처럼 정정하셨죠. 사부, 총관 부부도 여전히 금실이 좋았고…?
대교는 나와 다른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그때 일이 마치 바로 며칠 전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많지 않았으니까요. 당신 꿈을 꾸는 와중에 아주 잠깐씩이라도 다른 추억에 잠기게 되었을 때… 가지고 있던 추억이… 고작 십 수년에 불과 했으니까요.”
젠장.
나도 모르게 대교의 손을 잡은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음~ 실수. 그런 얘기는 이제 하지 않을게요. 전 정말 그 세월이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아니야, 대교. 해도 돼. 너의 얘기… 난 평생을 들어도 돼. 넌 그럴 권리가 있잖아.”
“싫어요. 무슨 권리니 하는 말.”
“…그래. 미안타. 지금까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제부터는 그냥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나도 너도… 그렇게 서로를 대하고 생각하자.”
“후후. 그래야 당신이죠. 당신 진유준… 대교의 남자.”
내 기억 속의 대교보다 한층 성숙해진 대교의 얼굴이 그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ᅳ 여긴.”
우리는 어느 사이 성지였던 자리.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하성지의 위에 도착해 있었다. 이미 대교에게도 영상출력이 가능할 정도의 하위체가 전해 져 있었기에, 몽몽은 우리에게 동시에 당시의 전경을 펼쳐 보여 주었다. 수많은 사연이 숨겨진 곳이었기에 우린 잠시 말없이 서서 당시를 회상하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아.”
문득 뭔가 생각난 듯한 대교.
“흐으응. 여기, 여기쯤이었었죠?”
“응? 뭐가?”
“당신께서 제게……”
대교는 짐짓 당시의 내 포즈를 흉내내며 말을 이었다.
“굳이 날 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느껴 봐…….”
“야, 야! 그런 건 좀 잊어! 잊어달라구!”
“후후후ᅳ 안 돼요. 제게는 너무나 생생한 걸요?”
으… 응?
그, 그런데… 그러고 보니 나 저런 왕 유치, 존나 느글거리는 대사를, 어째 최근엔 주저 없이 상당히 많이 쓴 것 같은데…………? 끄으음. 반성을, 반 성을 해야 하나?
하지만 그 짓도 자꾸 하다 보니까 가락이 붙어서 상황하고 타이밍 잘 맞으면 뽀대나게 잘 빠진 대사가 될 때도 있긴 있는 거 같기도……
“오ᅳ 나왔다. 그 버릇.”
“응?”
“가끔씩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거요. 여기 이렇게 제가 있는데도요.”
“아차차! 미안. 미안. 고친다고 하면서도 자꾸…”
“아네요. 그것도 당신다운 모습인 걸요.”
…여기서 ‘나다운 게 뭔데’ …라고 하면 진짜 썰렁하겠지?
“…이곳 비화곡의 성지에서 저는 처음으로 이 비화곡의 주인께서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곡주님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이란 것을…………! 그리고 맹세했어요. 꼭 제가 그 누군가가 되겠다고요.”
대교는 당시의 심정을 고백하며 비로소 빨갛게 볼을 물들였다.
제, 젠장! 미치겠네! 꼭 안아주고 깨물어 주고 싶어서 미치겠네.
“그때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소녀의 한낱 꿈에 불과했었는데… 헤에~ 드디어 성공!”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 대교를,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고, 주님?”
예전처럼 반사적으로 곡주님을 찾는 대교. 그래, 난 비화곡의 곡주이며 이 소녀의 주인이었………….
콰직!
윽! 뭐, 뭐야?
놀라서 돌아보니. 삼십여 미터쯤 떨어진 나무 아래에 덕방 녀석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다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으이구~ 이 바보!”
미령이가 그 뒤의 풀숲에서 나타났고, 이어 소령이까지 모습을 드러내더니 양쪽에서 덕방을 잡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사실, 저 아이들뿐이 아니에요.”
“뭐?”
그 사이 내 품에서 벗어난 대교는 스윽 한 손을 들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다음 순간, 대교의 손끝에서 파팟! 지력이 쏘아지기 시작했 다.
오~ 간만에 보는 섬광분소지(問光分小指)! 사마외를 통틀어 가장 빠르다는 총관의 독문절기!
대교의 섬광분소지는 기관총처럼 연속으로 우리 주위의 여기 저기 나무며 바위에 빡! 빡! 소리를 내며 꽂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직후, 뒤에 숨어있다가 화들짝 놀라는 인형들이 보였다.
“은사도객들은 내 호위니까 그렇다 치고… 천음마군도 그렇다 치겠는데… 은사마군, 자룡대주까지….?”
나아 참!
“이봐! 호위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아무도 따라오지 말랬잖아! 전부 100미터, 아니 1킬로 밖으로 철수! 명령이다!”
“복명.”
내 수하들은 비록 시큰둥한 대답 소리였지만, 어쨌든 재빨리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수하가 아닌 소소미령 자매들과 덕방은 느물거리는 태도 로 어슬렁어슬렁 가는 척만 하고 있었다.
“이런・・・ 소교까지? 대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커플들 방해하는 걸 좋아하는 거야?”
너도 그랬어 인마..라고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 왔지만 대충 무시.
…염장질도 계속하다보니까 이력이 났는지, 예전에 비하면 상당히 조금만 민망한 기분이로군. 어쨌거나……………
문득 돌아보니 눈앞으로 비화곡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고, 겨울답게 차갑지만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대교는 내 옆에서 고운 눈을 감고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머리 결을 날리며 그 바람을 음미하고 있었다.
“…대교야.”
“예, 곡주니……..”
또 곡주라고 부르다가 문득 웃는다. 나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나, 여기 비화곡을 되살릴 거야.”
“아.”
“그때와 똑같이 말이야.”
당시의 권력이 그리운 것이 아니다. 그건 지금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대교가 부르는 곡주님 소리가 너무나 친숙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 막상 이곳에 와 보니, 왠지 이곳에는 대교와 그리고 또 나의 것이었던 무언가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화곡만의… 비화곡과 나만의 무 언가가 말이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지.
미안하다. 원판! 난・・・ 너에게 비화곡을 돌려주지 않겠어.
원판은 자신이 이 시대의 비화곡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곳은 결국 닥터 제이의 연구소 및 비밀 기지이었을 뿐 비화곡이 아니다. 나와 대교처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시대의 비화곡 온 이 내가 만드는 거다. 그리고 그건 또한 대교에 대한………………
“…고마워요. 이 비화곡은 제 고향이니. 저에게 이만큼 큰 선물은 없을 거예요.”
훗. 역시 눈치 빠른 우리 대교.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구나.
“어머?”
문득 놀라는 대교.
그녀의 눈동자가 재빨리 움직이며 무언가를 쫓기 시작했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와 우리 주위로 살금살금 내려오다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환상 같은 그것은…….
“눈! 눈이 오고 있어요!”
과연 환상처럼 사라진 녀석들을 대신하여 더 무수히 많은 환상의 눈꽃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겨울이 마지막으로 우리 두 사람에게 선사하는 선물인 것만 같았다.
“정말! 정말 눈이에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보는 강아지처럼 대교는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두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며 고개를 한껏 치켜들어 눈송이 를 얼굴로 느끼며 행복해 하고 있었다.
친년 전의 복장이며 일상복이 아니라 치렁한 백의 정장이었기에 어찌 보면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며 날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어쩌면 이렇게! 아아-”
아까부터 사소한 모든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동하던 대교였지만, 이제는 그저 탄성만을 지르며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난 그런 대교가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우면서 한 편으로는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저 녀석. 나에게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너무나 긴 세월이었어. 대교도 실은 이런 소소한 일 하나 하나가 너무나 사무치게 그리웠던 거 야. 그런데도 녀석은…………….
나는 새삼 이를 지긋이 악물어야 했다.
진유준! 진유준아… 앞으로 일평생 네가 할 일이 너무나 많아. 저 녀석에게 해줘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구.
그저 마음가는 데로…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내 마음이다. 저 녀석은 나의 모든 시간을 차지할⋯ 당당한 권리가 있다.
“아하?”
대교 나비(?)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내게 날아들더니 내 손을 잡았다.
“우리, 거기에도 가봐요!”
“응? 어디를… 웃!”
대교는 대답 대신 엄청난 내력을 내게 보내오기 시작했다. 본래도 나와 대등한 수준의 내력을 가지고 있던 대교이다. 그런데 나와 헤어진 후 어떤 수련을 했는지 이젠 더 막강해졌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과연 마중제일녀(魔中第一女)…라고 할까?
“가요!”
“응? 응!”
조금 당황한 가운데에서도 대교와 보조를 맞춰 경공을 발동했고, 우리는 쏜살같이 어딘가를 향해 날았다.
오우! 이런, 이런…………!
이제는 쓸 수 없을 거라고 포기했던 공공보법(空空步法)을 대교 덕분에 다시 쓸 수 있게 되다니…………!
전 같으면 무조건 ‘심 상하는구만!’ 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내가 대교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듯, 대교가 내게 주고 싶어 하는 것 에 자존심이나 그 어떤 감정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앞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쯧. 말이 그렇지, 그래도 솔직히… 역시 좀 찜찜하긴 한데 음. 그보다 대교는 대체 어디로 가려 하는 거지?
비화곡에서 아직 못 돌아본 곳은 대교와 자매들의 집이 있던 마을 쪽인데, 아무래도 그 방향은 아닌.. 어? 이, 이… 숲은?
나는 우리 앞에 끝도 없이 펼쳐지는 숲을 보고서야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때 그대로…………? 아니 더 넓어진 것 같기도… 아, 암튼! 내가 여길 왜 잊고 있었지?
특별한 명칭은 없었다. 그저 비화곡 본단으로부터 10km정도 떨어진 이름 없는 숲………….! 대교가 장청란과의 비무를 위해 나와 둘이서 마지막 특훈 을 쌓던 바로 그 숲이었다. 본래 특징이 없는 숲이었기 때문일까? 오히려 비화곡과 달리 옛 모습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이곳이었어요!”
“뭐?”
「…주인님과 대교님이 머물던 숙소, 통나무집이 있던 장소입니다.」
몽몽의 안내도 없이 정확하게 찾아냈다고…………? 이렇게 거기가 거기 같은 숲에서 천년 전의 장소를?
조금 놀라는 나를 이끌며 대교는 가볍게 착지했다.
“후후 실은 표시를 해두었거든요.”
표시? …이런. 대교는 정말 대단한… 상당히 큰 표시를 해두었었군.
나는 대교가 서서 웃고 있는 뒤쪽의 커다란 나무를 올려다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측백(側相)나무과 측백나무입니다. 수령 1000년 가량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이 근방에 없었던 나무를 생각하다가… 전에 곡주님이 이 나무의 향기가 참 좋다고 하셨던 것이 생각나서 선택했답니다.”
내가 측백나무 향기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세상이 다 알다시피 난 관상목 키우기 같은 고상한 취미를 가질 남자가 못된다. 군대에서 산악 훈 련 뛰다 우연히 몇 번 측백나무 아래에서 쉬게 되었을 때 잠시 ‘좋군’ 하는 정도를 느꼈었을 뿐이다.
그래서 대교에게 그런 에기를 한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인데… 대교는 그렇게 스쳐가는 내 말도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여자들은 모두 이런 걸까…? 아니면 대교만 특별히 작은 것도 소중히 간직할 줄 아는 여자인 걸까…?
“옮겨 심은 데다, 토질도 최적이 아니어서 걱정했는데… 고마워요. 제 부탁대로 이곳을 지키고 있어줘서.”
어느 사이 눈이 그쳤지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있는 대교의 머리 위로 길고 우아하게 뻗어 있는 측백나무의 가지에는 계속 새하얀 눈꽃이 피어 있었다.
살며시 불어 온 바람이 아깝다는 듯 조심스럽게 눈꽃을 흐트러트리자, 다시 한 번 대교의 주위로 흰 눈가루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흰 눈 속의 나 의 요정이며 천사………….
“대교.”
“예, 곡주님.”
뭔가 더 특별한 특별하고 멋진 청혼을 하고 싶었는데……………
머릿속의 이성적인 생각과 달리 내 입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결…….”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대교가 어느 틈에 달려와 한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가져다댔기 때문이었다.
“대, 교……?”
“죄송해요.”
죄송하다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죄송하다고?
“우린 아직 맺어질 수 없어요.”
나는 대교가 슬픈 얼굴로 고개 젓는 모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 째서?”
내가 다시 어렵게 입을 열어 묻자 대교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표정이 아주 감추어질 정도는 아니어서, 나는 그녀의 씁쓸한 미소 를 볼 수 있었다.
“미안…해서요.”
“뭐?”
“전 이 세상 모든 생명에 살아갈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야 당연한 얘긴데………
“이를 테면, 영혼을 제외한 육체만의 생명까지도요.”
대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처음 그 아이의 육체를… 빼앗아야만 했을 때, 그리고 그 육체를… 제 행복을 위해 희생시킬 생각을 했을 때부터 결심했었어요.”
육체………? 용암에 빠져 사라진…..? 그런데 ‘그 아이’로부터 빼앗았다………? 그 아이?
“사죄의 의미로. 저도 최소한 1년은 제 행복을 유보하겠다고요.”
1년……? 아, 아니! 지금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네가 주가혜로서 살아왔던 그 육체… 그 생명을 자신의 ‘자살’로서 끊은 그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대교. 그런 대교의 심정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도 몇 년 동안이나 얼음 속에 묻혀져 잠들어 있어야 했 던 내 육체를 그리워한 일이 있었고, 그 동안에 사용한 원판의 육체를 버리게 되었을 때는 녀석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해가, 얼추, 조금 가긴 하는데 말야. 그래도… 그렇다 고… 굳이………….”
젠장. 지금 저 대교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전에 원판의 육체를 떠나며 육체 녀석에게 가벼운 경례 한 번과 함께 ‘땡쓰 수고했어.’ 정도의 인사 뿐이었던 내가 엄청 나쁜 놈이었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이,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그 아이’란 대체 누구지? 설마…………….”
“지금 생각하시는 대로, 주가혜가 탄생했을 때. 그때 이미 그 육체에는 주가혜의 ‘영혼’이 머물고 있었어요.”
맙소사!
“비록 한 점 자아조차 없는 씨앗에 불과한상태였지만…….”
“씨앗?”
“예. 아마도 인간이 탄생할 때 육체와 영혼이 결합하는 형태는 두 가지인 것 같아요. 하나는 환생으로서 예전의 영혼이 머무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의 경우는… 육체와 함께 그 어떤 생명의 기운이 함께 탄생하여 점차 인간의 영혼으로 성장하는…”
대교는 문득 한숨을 몰아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새삼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보는 것 같았다.
“…전 제 이기심으로 환생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으로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싶다는 욕심으로 그 육체를 차지했던 거예요. 그건 어떤 말로도 변명될 수 없을 거예요.”
….젠장. 내 입장에서 이런 경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어? 그런데 그 육체를 빼앗긴 영혼의 씨앗, 영혼의 아이는? 그 아이는 어찌된 거지?
“아무리・・・ 그 아이가 먼저 저에게 왔다고는 해도……”
“뭐?”
대교의 얼굴에 불연 듯 행복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체내가 아닌, 닥터 제이의 실험실에서 탄생해서였을까요? 그 아이는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처럼 제게, 살피러 다가간 제 영혼 에 안겨왔어요.”
“그, 그럼 지금도……?”
대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안 듯 두 팔을 자신의 가슴에 모으고 있었다.
“아직도 아무런 인간으로서의 의식도 없으면서… 그래도 저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아요.”
이, 이거 하,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그, 뭐시냐. 어… 그게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긴 알겠는데 그게, 그 아이는 그럼…………..
“약속했어요.”
대교는 비로소 내 눈치를 살피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이었다.
“언젠가 제… 아이로 태어나게 해주겠다고요.”
…혼란스럽다.
“반드시 행복하게 제 아이로서, 인간으로써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주겠다고…”
이건, 이건 대체
하아아아아이아-
길고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 인간 진유준. 지금까지의 해괴망측 복잡난감한 청춘 역정도 모자라서… 이제 2세까지도 비현실의 세계에서 예약된 거냐?
나는 나도 모르게 대교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대교에게 부탁 받고(?) 천년의 세월 동안 이 장소를 지켜 준 측백나무에게 갔다.
・형씨. 댁은 어떻게 생각하슈? 이 난감미묘한 시츄에이션에 대해… 뭐 의견 없수?
그렇게 물었지만, 당근 대답이 들려올 리가 없었다. ‘쯧쯧. 젊은 친구가 안됐군.’ 이라며 혀차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는 건 아무래도 기분탓이겠지 만… 어쨌든 나는 매우, 엄청, 살벌하게 썰렁한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대교가 청혼을 듣기도 전에 거절해서…………? …거기에다 결코 평범하지 못한 상황으로 예비 아빠가 되어버려서…………? …아니다. 그것만이 아니다. 대교가 지금 내게 고백한 말들은 분명 진심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 이유들뿐일까……?
조금 냉정함이 돌아오면서, 나는 다른 이유를 떠올리며 오히려 더 감정이 격앙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또 같은 이유인 거야. 대교가 스스로를 죽여서 나의 천지파멸식을 격발 시켰어야 했던… 그 상황이 지금도 바뀌지를 않은 거야!
프리메이슨의 지배자 12인의 사도들이 이번에 나에게 아무리 크게 대어서 겁을 먹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게 과연 언제까지 갈까………? 그리고 난 이미 또 다른 세계, ‘주술과 마물(魔物)’의 세계에까지 한 발을 들여 놓은 상태다.
아까 만났던 옥환이란 사내는 분명 나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힘으로 그 난리를 쳤는지 얼추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도 말이다. 세계정화재단이란 곳은 일단 적대세력이 아니라 친다 해도… 블랙 제수이트(Black Jesuit)’, 즉 ‘검은 예수회’………! 그런 위험한 광신도들도 날 노 리고 있다. 라후의 혈족, 마계(魔界)의 괴물들 중에서도, ‘귀족’이라 불리는 늑대 마신! 그들과는 재대결을 예약해 놓았다.
그런데도… 난 너무 안이했던 건가? 대교는 다른 이유들만을 말했지만, 만약 지금 나와 대교가 정식으로 맺어져… 2세까지 생긴다 해도 과연 그 아 이는 행복・・・ 아니, 무엇보다 ‘안전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이를 지그시 악물며 등 뒤의 정글도에 손을 가져갔다.
“대교・・・………!”
대답이 없었다. 나는 정글도의 손잡이를 굳게 잡은 채 말을 이었다.
“1년이라고 했지? …좋아. 약속하지. 그때까지는 반드시 내공을 되찾겠어. 아니, 더 강해지겠어. 천지파멸식 같은 걸 쓰지 않고도… 그 어떤 놈들 도… 감히 우리에게 얼씬도 못할 정도로!”
나는 그렇게 대교에게 약속했고, 속으로 천년 측백나무에게 증인(중목?)이 되어달라 부탁하기까지 했다.
…으음. 측백나무 형씨를 증목으로 한다는 건 좀 오번가?
하지만 오늘 처음 본 나무인데도 왠지 친근감이 든단 말야…………? 게다가 연세가 천 살이 넘은 분께 대뜸 ‘형씨’라는 호칭이 먼저 떠오르고… 아, 대 교가 이걸 ‘옮겨 심었다’고 했지? 그럼 내가 비화곡에서 보았던 그 나무 본인 아니 본목? 흐음.. 이런 만남도 꽤 반갑네?
나는 다른 이야기들 때문에 무심히 넘어갔던 이 측백나무의 출신을 깨닫고 새삼 가벼운 경례로 인사를 했다. 그런 다음 돌아서…………
으잉? 얘 또 왜이래?
내가 꽤나 비장한 각오로 뽀대나는 약속을 해줬음에도, 대교의 받아들이는 자세는 영 아니었다.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세운 두 무릎을 두 팔로 안고.. 무릎 사이로 얼굴을 반쯤 묻은 채 빠꼼이 나를 올려다보는… 나름 귀여워 보이는 모습이 긴 한데.
“뭐시여, 왜 그러는 건데?”
내가 짐짓 장난기를 섞어 물었음에도 대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조금 더 감췄을 뿐이었다.
“에이- 진짜 왜에?”
다시 묻자 그제야 조금 고개를 드는 대교.
“화・・・ 내시는 거잖아요. 제가 혼자 멋대로… 그런 중요한 일들을 결정했다고…….”
“나아참!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대교의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정말?’ 이라고 묻고 있었다.
“…거참. 이거, 이거 우리 대교가 왜 더 어린애가 된 거야?” “아, 아니에요, 그런 거. 하지만… 왠지 당신 앞에 있으면………….”
나는 ‘절대 이길 수 없다’를 되뇌며 대교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이건… 너도 너지만… ‘우리들의 아이를 위한 거야.”
나는 두 팔로 대교와 아기를 함께 감싸 안았다. 솔직히 아기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교의 영혼 속에 우리들의 아이가 될 작은 영혼 의 아기가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찡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노력…할게. 우리들의 아이가 안심하고 태어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할게. 이아 •빠 •가.”
헛! 해버렸다!
“아아-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 그런 말・・・ 하지 마. 당연한 걸 고맙다고 하는 거… 으윽!”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감격의 눈물을 홀리고 있는 대교를 두고 일어나서 미친 듯이 어딘가로 달렸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서 정글도까지 뽑아 들고 마구 휘두르면서 달리던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향해 자랑(?)했다.
“아빠…랬어요!”
무슨 CF의 ‘아빠래요’도 아닌… 매우 썰렁한 감동을 혼자 만끽하고 돌아오자 대교는 그 사이 평정을 되찾은 모습으로 측백나무 형씨의 중턱에 앉 아 있었다.
“후후ᅳ 봤지, 아가야? 저렇게 귀여운 분이란다.”
“야, 야!”
민망함에 소리를 질렀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대교에 게 처음으로 들었던 ‘나에 대한 그녀의 평가’도 바로 ‘귀엽다’ 였던 것 같다.
…대체 여자들은, 아니 대교는 어떤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걸까……? 우리 부모님조차 나에게 종종 ‘이 징글맞은 놈’이라고 하시는 판국에 말 이다. 으음. 그거야 어쨌든……………
“대교.”
“예, 나의 공주님.”
“크흠. 이제 그런 애교도…………….”
솔직히 너무 잘 통하지만, 참자. 이제 참고 표정 관리 좀 하자, 진유준!
“음. 하여간, 나도 좀 더 현재의 기분을 유지하고 싶지만 그래도 대교. 우리 다른 얘기… 그러니까 기분 좋지만은 않을 그런 얘기도 할 게 많 ……?”
“…예. 그렇네요.”
조금 섭섭해 하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행복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다.
“일단… 지난 일들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음. 청문회가 시작되는 건가요?”
역시, ‘청문회’ 라는 말이 현재의 우리나라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아주 잘 아는군.
“대교 넌 주가혜로서 이 시대를 살아온 세월의 기억도 모두 가지고 있는 거지?”
“예. 하지만 뭐랄지… 처음에는 기억이 섞이며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점차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시대의 기억을 잃고 있다는 거야?”
“아. 그건 아니에요. 분명히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지켜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요?”
본래의 인격이 주가혜로서의 인격을 흡수해 버렸다…………? 아니면 대등한 수준으로 융합되었는데 본인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던가… 흐으음. 이것도 꽤 흥미로운 걸?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너의 본래 기억을 봉인했었던 건 원판이 맞아?”
“예. 계속 제 기억과 인격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언제인가 실수를 해서 프리메이슨에게 들킬 것 갈아서요.”
“원판 말대로 우연한 만남? 아니면………….”
“후후 이미 다 짐작하고 계셨군요.”
“역시 네가 먼저 불렀구나?”
“예. 봉인되기 전까지는 제 뜻대로 영혼 상태가 되어 육체를 떠나는 것이 가능했거든요. 그래서 그 아이들을 찾아내는 일까지도………….”
“응? 또 무슨 아이들?”
“제 동생들이요. 소교는 놀랍게도 또 제 동생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었지만… 전 소령이와 미령이도 항상 그리웠었어요.”
아하~ 어쩐지!다른 환생자들과 달리 소령이와 미령이만 천 년 전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자매가 되어 있나 했더니, 타임 씨뿐 아리라 대교도 관여 했었던 거로구나.
“…그 아이들은 본래 자매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각자 다른 곳에서 버려져 고아가 되었지요.”
최근의 중국에선 한 가정 한 자녀를 법으로 지정해 버려서 여자애가 태어나면 죽여 버리는 경우까지 있다더니 소령이와 미령이 부모들은 그나마 양심이(?) 있었던 제기! 그건 아니지! 대체 자기자식을 버리는 자들은 뭔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거야?
영혼 상태의 대교에게는 다른 사람의 영혼도 알아볼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사랑하는 동생들이어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대교는 두 동생들을 찾아내어 현재의 상황이 되도록 유도했었다고 한다.
“…우선 몇 몇 사람들의 꿈에 현몽(現夢)해서 그 아이들을 같은 고아원에 입양하여 함께 자라도록 했죠. 그리고 제가 없을 때 어떻게 지낼지 걱정되 어서… 마침 발견한 강하면서도 거칠지 않은 GM사람들 눈에 띄게 만들어… 음… 그 아이들의 이름까지 예전과 같게 한 건.. 좀 오버였을까요?” 대교는 내 말투를 흉내내며 곱게 웃었다. 하지만 역시 그 당시의 일들은 그리 좋다고 하기는 어려운 지라, 대교의 표정은 바로 어두워졌다. “소교의 일도 어쩌면 막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하필 제가 당신과 관계된 일로 나가 있을 때 일어난 일 이었거든요.” “…나와 관계된 일?”
“예. 영혼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면 육체에도 무리가 가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나가 있을 수는 없었지만…….”
…틈나는 대로 열심히 프리메이슨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닥터 제이와 원판과도 만나 앞일을 상의하기도 하고 말 이다.
…으음. 이거, 이거… 대교가 이 시대로 오기 위해 택한 방법을 깨달았을 때부터 짐작은 했었지만 왠지 기분이 좀……………
“…결국. 대교님! 대교님께서 모든 흑막(?)의 주인공이셨구려.”
대교는 나름 열심히 앞일을 대비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좀섭하려나?
“치이 그렇게 표현하심, 싫어요.”
“훗. 하지만 사실이잖아. 나도 처음부터 닥터 제이와 원판의 말을 모두 철썩 같이 믿은 건 아니었어. 하지만 솔직히 네가 모든 음모의 주모자라는 건 상상도 못해봤지.”
내가 짐짓 ‘음모의 주모자’ 라는 말까지 쓰자 대교는 입을 다물고 삐죽이기 시작했다.
“아~ 미안, 미안! 농담이야, 농담.”
“흥-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요.”
“어. 야아~ 내가 잘못했대두?”
“흥~”
완전 삐짐 모드로 들어가는 대교.
으음. 이걸 어떻게 달랜다? 심각한 얘기하는데 괜한 농담을 해 가지고… 응? 대교의표정이 왠지 뭔가 일관성이 없는걸?
짐작컨데, 지금 대교는 당시의 상황 중에서 조금 전에 얘기했던, 닥터 제이나 원판을 만나던 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금방 표정이 풀리는 것 같더니만, 곧 꿈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설마 원판을 생각하며… 윽! 유준아! 진유준아~ 이 못난 놈 아! 아직도 그런 뻘 생각, 뻘 질투를 하는 거냐?
내가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즉시 지우며 반성을 하고 있을 때, 대교로부터 낮은 중얼거림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년의 세월 동안… 전 거의 움직이지 않았어요. 시간을 멈추는 주술도 영혼까지 구속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전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저 꿈 꾸고 기원하며… 수많은 날들을 보내는 동안… 어느 사이에 시간의 흐름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이, 이런 갑자기 안 하겠다던 얘기를………………
“주술과 별개로 스스로를 봉인한 셈이었죠.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잠들었던 제가 눈을 떴어요. 마치 누군가가 친절하게 알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가야 할 곳을, 가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던 거예요.”
설마…………
“그래요. 그건 당신께서…….”
대교는 그때처럼 꿈꾸듯 현재의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시나요? 당신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던 그 축복의 날에… 저도 그 자리에 있었답니다.”
그랬었나? 내가 태어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건・・・ 프리메이슨의 더러운 시선과 손길뿐이 아니었던 건가…………? 부모님과 주변인들의 축복과 함께 저 대교가………………
“기뻤어요. 이제야 당신과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 속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저를 행복하게 했어요. 이제 당신께서 과거의 저를 만나고 돌아오 실 때를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교의 행복해 하던 얼굴에 씁쓸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날 거기서 닥터 제이를 알게 되고. 프리메이슨이라는 너무도 거대하고 무서운 자들이 당신을 노리고 있다는 그런 사실까지 알게 되었지 요.”
“…미안해 대교야.”
나는 다시 사과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대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삐진 척을 한 건, 그냥 맞장구를 쳤을 뿐인 걸요. 전 당신께서 한 가지 감정에 깊숙이 빠지는 걸 싫어하는 그런 점도 좋아요.”
“…쳇. 정말이지, 결국에는 내가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녀석이로군. 여전히, 아니 더해진 것 같은데?”
“후후- 천년을 별러왔는걸요?”
하긴. 천년 동안이나 나와 만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생각 하고 작전을(?) 짜왔다면… 나로서는 역부족. 얌전히 항복하고 애처가+공처가가 되 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어쩌면 천 년 전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살짝 외면하면서,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천년 측백나무 의 고아한 자태 너머의 하늘, 그 아득한 어딘가로부터 다시 풍요로운 눈송이들이 축복처럼 내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