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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44화 : 행복한 귀가.


4. 행복한 귀가.

“가만있자. 난 어디 딴 데 갈 것도 없이, 여기 24층에서 기다리는 게 가장 무난할 것 같은데 이곳은 공간이 넓어서 에스의 기습을 알아채기 좋 을 것 같고 말요.”

미스 카이는 내가 갑자기 적극적이고 호의적으로 나오는 이유를 알지 못해서 그런지, 오히려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만 그 전에 결계부터 제거해야겠지만요.”

하긴, 우린 그의 방문을 원천 봉쇄하려는 건 아니니… 음, 근데 그러고 보니… 미스 카이가 마물들의 처리를 서두른 것도 그 때문이었겠군. 에스와 마물들이 맞닥트렸을 경우에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을 테니 말야.

미스 카이가 결계를 없애기 위해 향한 곳은 계단 출입구와 정반대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작은 거울의 테두 리를 어찌어찌 만지는 것 같더니 슬쩍 떼어냈다. 거울 뒤의 벽에는 내 엄지손톱만한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비공인 행성 에너지 활용 시스템의 구성체 중 하나로서, 통칭 결계옥(結界鈺)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몽몽이 간단하게 설명해 주는 결계옥인지 뭔지를 미스 카이가 빼내는 순간, 24층 전체 공간을 감싸고 있던 어떤 기운… 거대한 장막의 느낌이 삽 시간에 사라져 버린다.

거참. 내가 딴 건 다 거부감을 느껴도 이 결계나 진법 같은 건 볼 때마다 탐난단 말야…? 언젠가 시간 되면 공부를 해보고 싶기도… 응?

무심코 올려다 본 엘리베이터 버튼 위의 숫자가 39, 38. 천천히 감소하고 있었다.

[40층에서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인물의 코드명은 ‘데릭 허버트’. 그는 현 지점인 24층의 버튼을 눌렀습니다.]

뭐? 데릭 허버트가 이곳으로 온다고? 그가 왜 뜬금없이……………

“미스 카이. 당신이 데릭을 불렀소?”

“예? 아뇨. 그가 오고 있나요?”

“어.. 엘리베이터 CCTV를 본 수하가 알려주는군. 그가 여기로 내려오는 중이라고 말야.”

“이상하네요. 그는 지금 식당에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인데…………….”

사실 별 거 아닌 일일 수도 있고, 평소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와 미스 카이는 왠지 불안한 시선을 교환할 수밖에 없 었다.

“벌써…? 에이~ 설마…….”

“그, 그러게요. 해가 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린 어색하게 마주 웃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스캔 범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몽몽이 외쳤다.

[주인님 주의하십시오! 데릭 허버트의 상태는……….]

이런 제기! 진짜 벌써? 그리고 이런 식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리며 백짓장처럼 창백한 안색의 데릭 허버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데…릭?”

미스 카이가 약간 긴장한 음성으로 부르자, 데릭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며 두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엔 작은 접시가 들려 있 었고 접시 위엔 예쁘장한 케익 조각이 놓여 있었다.

“카이님…! 새로 만든 별식이라, 먼저 시식을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아…….”

창백한 안색이라고는 하지만, 데릭은 본래 백인이라 크게 티가 안 나고 말투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몽몽의 경고를 듣지 못한 미스 카이가 무심결 에 접시를 받아들며 데릭의 접근을 허용하고 있었다. 데릭이 한 쪽 입가를 올려 씨익- 미소 짓는 순간, 그 입 속의 송곳니가 번득였다.

젠장! 어쩐다? 어쨌든 우리 편인데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할지……

“카이니임~!”

불현듯 표정이 급변한 데릭이 쩌억- 입을 벌려 육식동물처럼 살벌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스 카이가 비로소 데릭의 정체를 깨달은 듯 공포 에 질리는 것 같았다.

에이~ 몰라, 이번엔!

나는 대처하길 그만두며 오히려 한 발 뒤로 물러나버렸다.

“크와악!”

데릭의 송곳니가 미스 카이의 새하얀 목을 물어 뜯기 직전!

“큭?”

당혹성을 울린 건 데릭 쪽이었다. 바로 코앞이었던 미스 카이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짐과 동시에 턱 밑으로 뭔가가 엄습해 온 것이다.

쩌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데릭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오호~ 순간적인 회피 동작+팔꿈치 올려치기! 멋진데? 습관적으로(?) 약한 척하지만 역시나 일급 킬러!

데릭은 뜻밖의 반격에 놀라긴 했어도 결코 큰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목에는 이미 보일 듯 말 듯 가늘지만 치명적인 피아노선이 감겨 있었다.

“크으…으?”

“움직이지 마, 데릭!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

미스 카이의 차가운 경고와 살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데릭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엉거주춤 행동을 멈추는 것으로 보아 상황을 인식할 정도 의 이성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짝! 짝! 짝!

난 가볍게 박수를 쳐주었고, 미스 카이는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뭐예요.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체 한 거죠?”

“후후. 그냥 모른 체 했다기보다, 당신이 에스 이외의 남자에게 당하는 장면은 어쩐지 상상이 잘 안 돼서… 음. 그보다!”

데릭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살펴보니 옷깃 안쪽의 목덜미에 선명한 이빨 자국 두 개가 찍혀 있었다.

쯧…! 역시 뱀파이어의 등장은 맞는 것 같은데 말야. 근데 문제는 어떻게 벌써 올 수가 있는 거지? 해가 진 다음에 이제 겨우 한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어. 초음속 항공기 화이어 드래곤(FIRE DRAGON)도 보스턴에서 이 섬까지 한 시간에는 못 와. 그렇다면 이거, 이거………… “후후~”

응? 저 아가씨, 뜬금없이 왜 웃는 거지?

“데릭을 물어서 지배력을 얻긴 했는데 현재 상태는 약하게 최면에 걸린 정도에 불과한 것 같아요. 이런 일은 굳이 물지 않고 마안(魔眼)만을 써도 충분하거든요? 아무래도 에스 님은 아직 자신의 뱀파이어로서의 능력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아요.”

…흐음. 그러고 보니 에스의 사부님인 ‘불사인간 루드’와 ‘뱀파이어 귀부인 카라’도 에스에게 그리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고 떠났다고 했던 것 같군. 불사인간 루드… 그 양반은 본래 교육법이 좀 지나치게 자율적이라고 하던가……………?

“아마도 테스트로 한 번 살짝 깨물어 본… 후훗~ 에스님도 참, 그냥 저에게 직접 오셨으면 좋았을 것을…….”

미스 카이는 초짜 뱀파이어 에스의 행동을 상상하니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히죽히죽 쪼개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아가씨. 본래는 상당히 용의주도한 성격인데, 지금은 약간 정신줄 놨군. 현재 상황의 가장 큰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어.

에스가 벌써 도착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히 심각하다.

뱀파이어 에스의 비행능력이 거의 슈퍼맨 급이거나, 미리 일찌감치 출발했거나… 으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첫 번째는 말도 안 돼. 정말로 초짜 뱀 파이어가 그 정도면 온 세상 퇴마사들은 일찌감치 전멸 당했을 걸…? 어… 물론 두 번째 가정도 뱀파이어에 대한 일반적 상식을 깨는 거긴 한데… “미스 카이. 뱀파이어에 대해서 꽤 많이 연구했을 거 같은데… 뱀파이어가 대낮에도 야외 활동을 할 수가 있는 건가?”

“…진조(眞祖)에 가까운 혈통의 강력한 마스터 뱀파이어라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해요. 물론 쇠약해져서 많은 초능력을 쓰진 못한다고 하며, 무 엇보다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고 해요. 그야말로 불길에 전신에 타는 듯한・・・ ・・・ 어머?”

미스 카이도 비로소 뭔가 깨닫는 것 같았다.

“……다른 뱀파이어들은 모르겠지만, 에스는 철저한 성격의 특급 킬러 출신…! 아무리 엄청난 고통이라도 참고. 목표물이 방심하고 있을 시간대에 도착하는 걸 선택했을만해. 이거, 더 어렵게 된 것 같은데?”

나는 새삼 미스 카이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온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어떤 누구 때문에… 으음. 혹시 ‘빡 돈다’는 말, 아쇼?”

“아… 알아요.”

“내가 에스라면, 당신이 그 어떤 변명을 하고, 제아무리 좋은 선물을 준비해 놓았다고 해도… 그냥 확~”

나는 한 손을 들어 목을 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그러게요?”

지금 미스 카이의 표정을 만화식으로 표현하면, 애써 웃고 있는 얼굴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크으… 흐… 흐흐~”

응? 데릭의 상태가 어째. 약간 몽롱해 보였던 눈이 더 흐릿해지는 것 같은데?

“흐… 그렇…군.”

데릭의 음성이 문득 또릿해지고 있었다.

“거두어들인 자와의 소통… 이제 감이 잡히는군.”

데릭의 음성이… 아니야. 그렇다고 확실하게 에스의 음성도 아니고… 둘이 섞인 듯 묘한 느낌인 걸?

“진유…준.”

“아, 예. 당신인가요, 에스?”

“그래, 날세.”

“어… 이거 일종의 단방향 화상 통화라고 해야 하나? 나, 잘 보여요?”

나는 데릭의 흐릿한 눈동자 앞에서 알짱거리며 손으로 V자도 그려 보였다.

“…장난치지 말게. 그럴 기분이 아니야.”

으음. 역시.

“아, 예… 그럴 것 같기는 했어요.”

슬쩍 미스 카이 쪽을 살피니 그녀는 데릭의 아니, 에스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이 남자를 거두어 그쪽에 보낸 것은 테스트 따위가 아니었어, 미스 카이!”

“에, 예? 아.. 그, 그 얘기 들으셨어요? 그건 저, 당신을 모욕하려던 게 아니라………….”

“닥쳐.”

찔끔 입을 다무는 미스 카이. 어떤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의 여유가 느껴지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 내 눈과 입을 대신하고 있는 이자를 통해서 이 섬의 상황과 진유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이미 30분쯤 전… 당신의 그 가냘픈 목 이… 어린아이 손아귀의 벌레처럼 잘리고… 당신의 애처로운 육체가 어두운 늪에 떨어진 꽃잎처럼… 자신이 흘린 붉은 선혈 속에 잠기게 되었 겠지.”

꼴깍 마른침을 삼키는 미스 카이의 전신이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테네시의 저택에서 처음 사신을 만났을 때의 그녀처럼.

이, 이거・・・ 장난이 아닌데..? 나나 미스 카이는 결코 만만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야. 평소라면 목을 자르네 마네 하는 소리를 들어봤자 코웃 음을 쳤을 거야. 하지만… 지금 저 음성에 담긴 어떤 기운은… 듣는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실제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 더구 나, 지금 저 음성은 데릭의 입을 통해서 나왔어. 에스가 직접 가까이에서 저런 마성(魔聲)을 쓰면 대체 어느 정도일지…………

“미스 카이. 한 번 내 용서를 받았던 여인이여. 이번 일을 변명해 보라.”

여전히 사신의 절대적 위압감이 담긴 음성이었다. 미스 카이는 처음 사신을 대면했을 때보다도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어. 그, 캔들 리와 에메랄드 킬러가 감염되었다는 바이러스… ‘L&M’라는 세균무기는 ‘가짜’예요.”

“그러니… 그 백신이 제 피 속에 있다는 말도 거짓이죠. 아, 당연히 백신 적용 한계 시한이 내일 새벽까지라는 말도………….”

“…저기, 듣고 있는 건가요?”

“물론.”

나름 쿨 하신 우리 에스 행님.

“음・・・ 기본 사항은 그게 다예요. 그밖에 여러 루트의 정보 조작이라던가, 당신을 속이기 위한 보조 수단이 동원되었지만 사실 한계가 있었어요.”

말을 계속하면서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은 건지, 어느 사이에 미스 카이의 평소 표정이 많이 돌아와 있었다.

“훗. 사실은 에스님도 뭔가 이상한 구석이 많다는 건 느끼고 계셨죠? 그럼에도…….”

“왔지. 이곳에.”

미스 카이의 말을 끊은 에스가 데릭의 얼굴을 빌어 음침하게 웃었다.

“나의 형님과 흑주. 그 아이에게 어떤 위험이 생길지도 모를… 티끌처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나를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거 겠지, 미스 카이.”

“아…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난 그보다 당신이 날… 아, 아니에요. 그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래요. 난 당신께서 이곳에 와주기를 바 랐을 뿐이에요. 그건, 그 이유는…….”

“테네시 저택에서의 일을 복수하겠다! 그것이겠지!”

“아, 아니에요! 전, 전 다만! 다만 당신이… 전 당신, 당신을…….”

오~ 드디어 고백 타임인가? 저렇게 애잔하면서도 정열적인 특급 미녀의 대시에 에스는 과연………

“당신・・・ 당신이란… 초월적인 존재의………….”

응? 미스 카이의 표정이 어째 좀… 문득 뭔가 다른 결심을 한 것처럼………

“그 힘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으잉? 저 아가씨, 지금 뭐래는겨?

“…그래요. 난 당신의 인간을 초월한 힘이 필요했어요, 바로 오늘 밤.”

미스 카이는 여전히 가늘게 떨고 있으면서도 애써 입술을 앙 다물고 자신을 다잡고 있는 것 같았다.

“전・・・ 오늘에야 중요한 임무를 끝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정해진 시간 안으로 반드시 가야 할 장소로… 갈 수 있는 수단이 이 섬에는 없어요. 이 섬 의 특이한 상황 때문에 장거리 이동 수단은 느린 배밖에 없고…………….”

그건 사실이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저 아가씨, 이 판국에 자존심이 되살아 난 거야 뭐야? 먼저 사랑을 갈구해 본 적이 없었던 여자로서 의・・・ 뭐, 그런 거?

“호홋~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오늘 안으로 저를 원하는 장소에 데려다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남자는 당신뿐이더군요. 아, 물론 공짜는 아 니에요. 그만한 대가를 준비해 두었으니까 당신도 만족할 거라고 생각해요.”

아놔. 이제 난 몰라. 그냥 ‘난 당신한테 삘 꽂혔으니까 한 번 사겨 보자.’고 솔직히 말할 것이지, 어쩌자고 저러는 거야? 자존심 세우는 것도 상대를 봐서 해야…………

“…좋아. 데려다주지. 지옥으로.”

거봐.

“자, 잠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끼 들었다.

“이봐요, 에스! 잠깐 내 말 좀 들어봐요!”

“실망이군.”

“예?”

“자네가 여자에게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런 여자의 감언이설에 넘어갈 줄은 몰랐네.”

“에? 누가 뭘 넘어가요? 그게 아니라 저 아가씬 진짜……”

“목적이 무엇이든, 그녀는 형님과 흑주의 안전을 담보로 날 협박했어.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 그야…….”

“만약 날 방해한다면 아무리 자네라도 용서하지 않겠네.”

“아, 거! 그렇다고 해칠 것까지는 없잖아요! 사실 미스 카이가 이런 짓을 한 건 당신을 좋… 윽?” 피윳-!

‘절실’? 미스 카이의?

예상 밖의 공격을 간신히 피하고 나니, 그 사이에 에스는 데릭과의 연결(?)을 끊은 것 같았다.

“어…? 어? 내가 왜 이런 곳에………….”

어리둥절해 하는 데릭은 일단 그렇다 치고!

“미스 카이! 무슨 짓이야? 왜 날 공격한 거요!”

“몰라서 물어요?”

엥? 웬 적반하장?

“진심의 고백을 남에게 맡기는 여자가 세상에 어딨겠어욧! 더구나 그런 식으로는… 으~ 진유준 씨는 정말 무신경한 남자로군요!”

“아놔~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요? 아니, 그보다! 그럼 댁이 그냥 하던가! 지금이 자존심 따지고 분위기 따질 상황이요?” “그, 그래도요!”

미스 카이는 계속 고집스럽게 마주 외치더니, 아예 피익- 돌아서버린다.

나 원. 왜 지가 삐치고 그래? 갑갑한 건 난데 말야.

“제기… 에스가 먼저 말을 걸어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더니, 이젠 기습을 받는 것보다 더 상황이 이상해졌잖소.”

나는 하는 수 없이 새삼 전투태세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하여튼, 내가 최대한 막아주긴 할 테니까. 그 사이에 고백을 하든지 말든지 당신 맘대로 하쇼!”

에스는 필승, 필살의 각오로 싸워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야. 하지만 어차피 그럴 수도 없는 거니 더더욱 언제까지 막아줄 수 있을지 아, 그리고 만약 미스 카이가 사랑의 고백을 한다고 해도… 에스가 그걸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없는 거잖아? 그렇다면 그때는… 으~ 몰라! 나도 참, 왜 이런 일에 끼어들어 가지고……………

[주인님!]

몽몽의 경고 직후, 나 자신도 직접 섬뜩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엘리베이터? 데릭이 타고 왔던 엘리베이터의 박스는 여기 24층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까 직접 날아서 내려오고 있는 모양이군. 이 엄청나게 불길한 기운은 뱀파이어 귀부인 카라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응? 그러고 보니 나에겐 그때처럼 몽몽도 있고 라프도 있네?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상기하게 된 건, 나도 모르게 계속 ‘정당한 승부만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 나도 실은… 내심 그 양반하고 제대로 한 판 뜨는 걸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건가..?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

“몽몽. 카라 때처럼 마력 간섭으로 보조를………….”

[주인님!]

응?

“크와악!”

데릭

갑자기 뒤쪽에서 데릭이 달려드는 바람에 황급히 보법을 펼쳐 뒤로 피해야 했다.

“크으으~ 후우~”

데릭은 기습에 실패한 것이 분하다는 듯 거친 숨을 토해냈다.

젠장! 데릭이 에스에게 물렸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다시 흡혈귀화가 아니, 아까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아. 방금 날 공격했을 때의 스피드와 저 붉은 눈동자로 보아… 이제 거의 반 뱀파이어가 된 것 같기도. 아! 에스는?

[주인님! 제가 에스의 ‘안개화’를 막았………….]

꽝!

굉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금속 문이 반쯤 좌우로 벌어져 버렸다. 안개화 능력에 문제가 생겼음을 깨닫자마자 망설임 없이 다음 방법, 괴력 발휘를 택한 것이다.

끼익-끽 꾸국-

에스는 금속 문을 종잇장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구겨서 더욱 벌리더니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외견상 괴물이 아닌, 남자임에도 우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멋진 양복의 신사가 하는 짓이라 그런지 더 이채롭게 보였다.

분노와 살기를 담은 에스의 시선이 잠시 미스 카이를 향했다가 천천히 나에게 돌려지더니, 그대로 고정된다.

며칠 전 봤을 때보다도 훨씬 안정감 있는 그야말로 귀족의 풍모이긴 한데, 저 살벌무쌍한 핏빛 눈동자는 가급적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군, 그 래.

“아, 저기… 우리 웬만하면 말로 합시다, 말로.”

“문답무용.”

쳇. 까칠하시기는… 음? 젠장.

한층 전투력이 높아져 버린 듯한 데릭의 기색도 심상치 않았다. 처음 수준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데릭도 주의해야 했다. 더구나 데릭은 어느 정도 나 불사의 상태가 된 건지 모르니 어느 선까지 공격을 해도 되는 건지가 불확실하다는 점도 문제였다.

다시 인간으로 되돌릴 일도 걱정이지만… 그건 나중 문제… 웃?

데릭을 신경 썼다고는 해도 에스에 대한 경계를 늦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에스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비해 너무나 차분한 태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치이… 이러니까 더 공격 타이밍 잡기가……………

다소의 난감함을 느끼는 사이에 에스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흑주의 작은 아빠, 내게도 행님 뻘인 분께. 감히 칼질 좀 해도 될갑쇼?”

흑주를 언급해서일까? 살기등등 문답무용이라고 선언했던 에스가 결국 피식 웃었다.

“얼마든지.”

허락(?)과 동시에 발도(拔刀)!

쉬익!

비교적 깔끔했으나 허무하게 허공만이 베어졌고, 에스는 마치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안개화? 아니, 그냥 초고속으로 피한 후 제자리로 돌아왔을 뿐이야!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의 정글도는 쉬지 않았다.

쉭! 쉭! 쉭!

짧게 끊어 날린 칼질에도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으면서 에스의 신형이 좌우로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공간왜곡을 통한 안개화와 달리, 육체에 직접 작용하는 마력의 간섭에는 한계가………….]

그건 할 수 없는 거고… 음? 무슨 의미지?

에스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손바닥을 위로하고… 마치 뭘 달라고 하는 듯한..이 아니라, 달라는 거 맞군.

데릭이 다가와서 에스에게 건네준 건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내 주위에 워낙 괴인들이 많아서 존재감 없는 약자로 취급받기는 해도, 사실 데릭 역 시 항상 저런 칼을 차고 다니는 전직 특수부대원이다.

“처음엔… 이 남자를 미끼로 자네의 신경을 돌린 후, 내가 직접 미스 카이를 처리할 생각이었네. 하지만 이런 기회에 자네와 칼을 섞어 보지 않으 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군.”

훗. 이 양반도 어쩔 수 없는 쌈꾼이로군. …으음, 근데………

칼 한 자루를 에스에게 바친 데릭, 뜬금없이 뱀파이어 서브가 된 전직 특수부대원은 또 다른 칼 한 자루를 들고 미스 카이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미스 카이. 데릭이 조금 전과는 다를 테니 조심해요. 보다시피 난 지원해 줄 여유가 없소!”

“…걱정 말아요, 진유준 씨. 이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보다, 이제라도 빨리 고백이나…………….”

“싫어욧!”

쳇. 대체 왜 계속 쓸데없는 고집을… 웃!

피!

빛처럼 날아든 칼날이 목 줄기를 스쳤다. 상체를 뒤로 빼는 것이 영점 몇 초만 늦었어도 목의 동맥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제기…! 누가 전직 킬러 아니랄까 봐 얄짤없이 급소부터 노려오는군.

몸, 아니 손목 풀기로 슬쩍 한 칼 날려 봤을 뿐인 듯, 에스의 손에 들린 칼이 본격적으로 춤추기 시작했다.

핏! 핏! 피싯!

귓전을 울리는 소리가 작고 가냘픈 것이 더 소름끼쳤다. 팽팽하게 긴장한 채 겨우겨우 몇 번을 피하는 사이에 등줄기로 한기가 흘렀다.

그, 그래도 조금 전의 에스처럼… 나도 결국 다 피했…어. 솔직히, 그냥 반격도 할 걸 괜히 폼잡고 피하기만 했나 싶기도………… “크악!”

“야앗!”

저쪽도 시작했는지 데릭의 괴성과 미스 카이의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가 얽히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 단 한 순간도 그 쪽에 돌릴 신경은 없었다.

피잇-

시익-

에스의 칼과 내 정글도가 거의 동시에 날았다. 내 뺨의 피부가 베이는 순간, 에스의 가슴도 무사하지 못했다.

피익-

조금도 동요 없이 재차 날아든 칼날이 반대편 뺨을 스치는 순간, 내 정글도가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려졌다.

시이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의 결과는 기대하지도 않고 상체를 비튼 직후, 심장 위치의 가슴 위로 섬뜩한 냉기가 지나갔다. 그 냉기가 사라지기 전에 나의 정글도도 에스의 목을 그었다. 작은 성과에 기뻐할 틈도 없이 오른쪽 허벅지에 선뜻한 느낌이 엄습했다.

이~ 쒸!

이를 악물고 스피드를 올리는 순간, 에스의 붉은 눈동자도 번뜩 광채를 발했다.

핏! 쉭! 깡! 까칵!

정글도와 그의 칼이 본격적으로 충돌하며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어떻게 막고 어떻게 반격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수십 초가 오갔다. 칼 은 내 쪽이 훨씬 크지만 사정거리와 파워의 차이는 느낄 수가 없었다.

카각!칵!칵!

연속되는 금속 파찰음 속에서도 틈을 찾아 피잉 날아드는 칼끝이 순간순간 반가운 건 왜일까?

온다! 피하고! 간다! 다시 오고! 다시 간다!

차츰 공수 리듬에 패턴이 생기고… 그 패턴이 누구의 것인지를 인식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깼다.

킥! 파츳!

약간의 엇박자가 터져 나온 후,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퉁겨나오듯 뒤로 신형을 날렸다.

하아아~

길지도 않은 시간동안의 공방이었음에도 긴 심호흡이 필요했고, 전신에 식은땀이 배어나 있었다. 어디에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었는지는 따질 생 각도 나지 않았다. 체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뱀파이어 에스도 어딘가 지친 듯한 기색이 느껴진다고 하면 그저 나의 자기만족일까?

“…놀랍군. 자넨 내공을 거의 잃었다고 들었고, 난 암흑의 힘을 얻었는데… 그럼에도 거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니 말야.”

“그야. 우린 원래 타입이 다르잖아요. 난 이런 맞짱 전문이고, 당신은 암살 전문.! 그러니까, 어차피 이런 식으로 우열을 따지기는 좀 그렇죠.” “하긴. 흐음~ 그렇다면……….”

“다른 방법 있나요. 그냥 각자 풀 파워로 이종 격투기 하는 거죠, 뭐. 하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아득바득 싸울 사이는 아니잖아요? 흑주가 알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그렇기는 하네만………….”

후후~ 역시나 잘 먹히는 흑주 카드! 게다가…………

아무래도 에스 역시 지금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생사결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와 부담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나 저 양반이나 상대가 강적이라는 이유로 ‘한판 뜨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건 분명했다. 하지만 막상 붙어보니 뭔가 문제가 있었다. 사실 나름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그러면서도 뭔가 어색했다고 할까…? 방금 얘기했듯, 우린 아무래도 전공이 너무 다른 것이다.

“혹시 누가 당신에게 나의 제거를 의뢰해서 그 임무의 성공 여부로 승부를 가리면 모를까…………….”

내 말에 에스는 조용한 미소로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웃음기를 지우며 힐끔 ‘그래도 멈추기 어려운 이유’, 즉 미스 카이 쪽을 노려보았 다. 나 역시 그 쪽을 바라보니 그 쪽도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데릭…! 쯧. 그 사이 미스 카이의 절단 실에 칭칭 감겨져…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간신히 버둥거리고만 있는 처지가 되었군. 결국 어쩔 수 없는 조연(?) 신세를 면치 못한 셈인가?

하지만… 이번엔 미스 카이도 그리 쉽게 이기진 못했군.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지만 몰골이 좀… 으으음~ 이거, 이거………

“큼. 크흠.”

난 미스 카이로부터 슬며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데릭과 티격태격(?) 하는 동안에 여기저기 옷이 찢겨져 그 사이로 드러난 맨살의 비율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 아가씨, 흐트러진 머리와 땀에 젖은 얼굴로 씩씩대고 있는 모습이 평소와 전혀 다른 느낌의 야성적인 섹시미가…………

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에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눈곱만치도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유준. 계속 날 막겠는가?”

“…아뇨. 이제 그만 두겠습니다.”

내가 의외로 선선하게 물러설 뜻을 밝히자, 에스는 오히려 믿기 어려웠는지 잠시 날 응시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더 이상 에스를 막지 않기로 한 건 진심이었고, 그건 에스 때문이 아니라 미스 카이의 달라진 분위기 때문이었다.

엄청 섹시… 아, 아니, 그런 비쥬얼 변화는 그렇다 치고, 중요한 건… 저 눈빛…! 아까와 달리 지금은 에스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어. 에스의 명령을 받은 데릭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때까지 싸우며 뭔가 심경의 변화가…………

“흥! 새삼 뭘 망설이고 있죠? 지금 진유준 씨가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에?

“어서 와서 날 죽여 보시죠, 느끼한 뱀파이어 아저씨!”

에구야. 뭔가 결심을 하긴 했는데 그게 그냥 막나가자는 거였나?

“난 당신 같은 박쥐 사촌 따위, 조금도 두렵지 않…….”

미스 카이의 망발(?)이 멈춰진 것은, 에스가 순식간에 그녀의 앞까지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에스의 몸이 스멀스멀 부풀어 오르듯 커지더니 조금 전의 두 배 가까운 높이에서 미스 카이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뭐…야. 뱀파이어가 흥분하면 저렇게 되는 건가…? 목 아래의 몸이 커지며… 어둡고 거대한 망토를 두른 듯한 그런 형태의… 마치… 날개…? 박 쥐…의?

몸의 변화 뿐 아니라, 에스의 눈동자는 한층 더 붉어졌고 좌우로 찢어진 입술 사이에서 송곳니가 몇 배나 길어지며 비집고 나와 하얗게 번득였다. 그야말로 사악한 기운이 피처럼 뚝뚝 흐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그래 봐야 무섭지 않아요.”

내참. 지금 용감한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 모르겠네. 이거 정말 어쩌지? 관둔다고 해놓고 다시 나서기도 뭐하고… 으- 이거, 이거……………

‘괴수 1단 변신(?)’ 중인 에스의 한 손이 천천히 미스 카이의 얼굴로 향하고 있었다. 그 손 또한 거대 육식 동물처럼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갈퀴처럼 달려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것만으로도 미스 카이의 가느다란 목은 반쯤 베어질 것 같았다. 강한 척하던 미스 카이도 찔끔 눈을 감았다. 젠장! 안되겠다!

비루 경공이라도 펼쳐 달려가려는 순간, 에스의 입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지? 이것은…………….”

응? 에스의 손이 아래로… 미스 카이의 가슴 쪽으로 내려가네? 하긴, 위에서 내려다보는 가슴은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더… 아니, 그게 아니고! 미스 카이의 가슴 사이에는 뭔가가 살짝 삐져나와 있었고, 에스는 손톱 끝으로 그걸 집어 빼내었다. 그것은 두 장의 종이였으며, 테두리에 오래 된 색채의 고풍스런 물결무늬가 인쇄된 상당히 특별한 장소의 ‘티켓’이었다.

저건 분명 에스가 좋아할 만한 거라서, 만약 둘이 잘 얘기가 되었다면 데이트 코스로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야 어디……

“이… 이건….”

응? 에스의 표정이 어째 심상치가 않은데? 저 양반이 ‘이종 격투기 대회’를 무지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스 카이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에스의 얼굴이 스르륵 빠르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평소와도 상당히 틀린 매우 인간적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네?

“언더 월드(Under World)의 그… 제 14차… 대회…? 그럴리가?”

에스의 변신모드 풀기와 태도 변화가 너무 극단적이어서 미스 카이도 다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새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전혀 모르고 계셨나요? 하긴 정보통인 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요. 10년 전의 13차 대회가 끝난 후에 일어난 그 ‘사건’ 때문에, 다들 14차 대회는 잘해야 90년 후에나 열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벌써・・・ 열린다고?”

“그래요. 얼마 전 … 지난 번 우승자이자 불미스런 사건의 주역인 스카페이스(Scarface)가 왕좌의 상징을 버리겠다고 선언했거든요.”

“오~ 스카페이스, 그가 결국?”

“그래요. 그래서 언더 월드의 원로들이 서둘러서… 아, 어쨌든 오늘, 오늘밤에 시작되는 거예요.”

미스 카이는 도도한 태도로 에스의 손에서 티켓을 뺏어 들었다.

“아시죠? 이 티켓 없이는 누구도 경기장에 들어갈 수 없고, 또한 경기가 시작되면 티켓을 가진 사람도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에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뭔가. 아마도 언더 월드까지의 거리와 자신의 비행속도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미스 카이. 내가 널 거기에 데려다주지.”

“지옥이 아니고요?”

“…그곳이 지옥이야.”

“음… 그러고 보니 경기장 이름에 지옥이 포함되어 있긴 하군요.”

“…말해 두지만, 내가 꼭 가고 싶어서가 아니야.”

“네. 알아요. 저도 꼭 에스님과 함께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에스와 미스 카이는 그렇게 뻔뻔한(?) 대사를 나누더니, 에스가 먼저 날 돌아보았다.

“아, 오늘 실례가 많았네.”

“예? 아, 예에.”

나 참. 정말 이걸로 얘기 끝난 거야? 격투기 대회 티켓 때문에?

에스는 자기가 바로 조금 전까지 잔인하게 죽여서 잡아먹어 버릴 것처럼 굴던 미스 카이를 날개인지 망토인지로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애써 새초 롬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스 카이가 망토 사이로 손가락을 내밀어 V자를 그려 보였다.

저 인간들(?) 어째….

난 어이없는 가운데에서도 손을 흔들어 주었고, ‘미스 카이 전용 여객기 에스 1호'(?)는 후우웅~ 바람을 일으키며 발진했다.


5분쯤 후.

“나 원, 별………….”

그때까지도 다소 멍하니 서있던 나로서는 결국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잘 어울리는(?) 커플의 생쇼에 공연히 들러리를 선 기분이 들었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잘못도(?) 좀 있기는 한 것 같군. 진작에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말야.

에스가 이곳까지 무리해서 날아온 이유는, 자기 말처럼 캔들 리와 흑주의 안전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가만히 다시 되짚어보면 그뿐이 아니 라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 쿨한 양반의 지나친 과잉 살기 자체가 이상한 거였어.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단숨에 해치울 수 있는 순간에도 교묘하게 넘어갔고 말 야. 아무리 중간에 내가 있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도, 데릭을 통해서 그녀가 실질적으로 나와 같은 편이 아니란 것 역시 간파했었을 텐데 말이지. 결국 공연히 이런저런 뽀대 살리기 용 대사나 날리며 뜸을 들였고, 핑계 김에 나와 칼부림 장난도(?) 좀 치고 그랬던 걸 보면, 에스도 진작에 그녀 에게 딴 맘 품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저 언더 월드의 격투 대회 티켓은 뜬금없이 행동을 바꿀 핑계 내지는 명분에 불과했고 말이다.

하여간. 뭐 이런 민폐 커플이 다 있담? 서로 필 꽂혔으면 그냥 좋게 좋게 둘이 알아서 합의(?)보고 짝짜꿍해서 얼레리 꼴레리를 하던지 말던지 할 것이지 말야. 괜히 지들 자존심 내세우고 쿨한 척 하느라 중간의 나만 뺑이 치게 하고, 엄한 데릭까지 저 꼴을 만들어 놓… 응?

“끄으~! 끄으어어~”

아, 이런, 이런………!

“미안, 미안!”

남 탓 할 것도 없는 셈이었다. 아까부터 미스 카이의 절단실에 칭칭 감겨서 버둥대고 있는 데릭을 나도 계속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근데… 계속 미안해야겠네?”

난 결국 데릭을 풀어주지 못하고 난감해 할 수밖에 없었다. 데릭이 여전히 흡혈귀 상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젠장. 데릭이 어떻게 되는 건지를 안 물어 봤네.


얼마 후.

불쌍한 데릭은 적당히(?) 다시 묶여서 적당한 장소로 감금되었고, 무심한 나는 다시 옥상의 송신탑으로 향했다.

그게 내가 진짜 무심해서 조연을 박대하는 건 아니지. 데릭을 문 에스는 휴대폰을 꺼놓은 모양이고, 몽몽도 예의 ‘뱀파이어 증후군'(?) 치료를 시 도할 정도의 분석에는 시간이 걸린다니. 쯧. 결국 당장은 데릭에게 뭐든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어.

달리 생각하면 데릭 본인에게 있어서는 꽤 흥미로운 경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매우 특이하고 비현실적인 걸 좋아하 는 사람인 것 같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막상 미스 카이 건도 마무리하고 나니… 내가 딱히 열심히 할 것도 없네. 그 사이에 백신 제작이 많이 진행되어서 좀비들 치료 작업 도 병행되는 등 다들 바쁘고. 나도 굳이 할 일을 찾자면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런지 별로 의욕도 안 나고… 사실 좀 많이 피곤하기도 하고…………

난 아까처럼 송신탑 위로 올라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결국 수하들만 뺑이 치게 하고 지는 뺀질대는(?) ・・・ 바람직하지 못한 두목이 되기로 한 것 이다.

하지만… 정말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그것도 근육이나 관절 같은 곳이 아니라 좀더 깊숙하고 원초적인(?) 곳의 뻐근함, 나름 색다른 피곤함…이랄 까? 계속 깡으로 버티면서 아무에게도 티를 내지 않았지만… 하아~ 역시 그동안 전신의 혈도를 너무 혹사한 것 같아.

내 몸은 현재 내공의 집약은 물론이고 다양한 패턴의 방출을 담당하는 부분, 즉 단전이 파괴된 상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나마 몸 속을 맴도 는 비루 내공조차 제대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계속 비루 한 내공이나마 한 부분으로 집중한다거나, 내공이 담긴 초식을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펼칠 수 있는 건… 나름 열심히 수련한 ‘편법’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현천기공(玄天氣功)을 제대로 수련하게 되면… 전신의 혈도를 세세하게 통제하는 것도 가능하지. 물론, 원래는 전신의 혈도 하나 하나를 그렇 게까지 신경 써서 운용할 필요는 없는 건데 그건 펌프(단전)만 작동시키면 물이(내공이) 콸콸 나올 때는, 호스의 끝만 방향에 맞게 겨냥하면 원하 는 곳으로 물을 쏘아댈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할까…? 하지만 지금의 내가 호스에 고여 있는 물을 그나마 어딘가로 쏘려면… 고무 호스 중간쯤을 손 으로 잡아 주욱 훑어서 물을 밀어내는… 그런 짓이 필요한… 대충 그런 개념이랄까…?

방법 자체의 숙달은 그리 어렵지 않았었다. 난 이미 현천기공이 거의 생활화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혈도의 피로도는 자연스럽 게 단전의 힘을 이용할 때보다 몇 배로 심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빨리 단전을 회복 시켜야 하는데 말이야. 아직까진 방향조차 잘 보이지 않으니.. 으~ 젠장! 피곤할 때는 골치 아픈 생각을 좀 접어두자. 그 래… 진유준. 지금은 좀 긍정적인 생각이나 하자.

나는 문득 다시 조금 전의 에스와 미스 카이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에스, 그 행님도 그동안 흑주 키우며 혼자 사느라 고생께나 했으니까, 이제 연애질도 좀하며 즐거운 뱀프 인생을 즐길 때도 됐지. 그러니 난 오늘 꽤 보람 있는 일을 한 셈…이긴 인 것 같은데, ・・・쳇. 그래도 그렇지. 꼭 그렇게 생쇼를 해서 쓸데없는 뻥이를 치게 할 것까진 제기! 이 생각 도 일단 중지. 패스~

난 다시 다른 생각, 이 섬의 미래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래. 이 섬과 윈드 패밀리.! 그들은 이제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눈부신 광복과 미래를 얻게 되는 거야. 내가 부러워해야 할 정도로… 나라를 망 친 잡것들을 싸그리 쓸어버린 새 출발이니 만큼, 이 섬의 미래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라고 할 수가 있으려나..? 아무리 잡것들이 사라졌다 해 도… 무정부 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는 게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닐 테고, 갑자기 세상이 뒤집힌 걸 알게 된 군중들이 패닉상태에서 벗어나기까지의 혼 란이라던가… 에이쒸. 몰라! 내가 그런 거까지 걱정해 줄 수는 없잖아. 이 생각도 패스~

난 애써 생각을 ‘집으로 가기’로 맞추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요 몇 년 동안 늘 그랬듯, 이번에도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을 실감한 나날이었어. 내일까지 이 섬의 일을 모두 마무리 짓고, 내일은 무조건 집으로 고고씽~ 하는 거야. 흑주와 그 가족 문제도 대충 정리된 셈이고, 프리메이슨과 에레보스 놈들도 당분간은 집적대지 못할 것이며, 천 우신과 소령이도 재회 시켰고… 그래…! 기분 좋은 귀가길이야. 암! 집에 가서 당분간 대교와 푸욱 쉬… 응? 대교…는 참, 지금 좀 바쁘…지? 게다 가… 대교도 없는 집에 원판 시키와 조담놈만 먼저 복귀하면… 아~ 쓰파! 집에 가도 좀 그러네?

“옘병!”

결국 기분 전환 실패.

썅! 기본적으론 큰 사건들을 전부 잘 해결한 것 같은데…! 근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꿀꿀하고 머릿속이 복잡한 거야? 내가 왜 남들의 별 시시콜콜 한 것까지 신경 쓰며 이렇게 쓰잘때기 없이 스트레스를…………

[저어~ 주인님.]

“요몽? 너, 이 노무 자쉭! 아깐 사고 치고 그냥 토꼈지! 오냐오냐 하니까 이게 아주 그냥……….”

[아이 참. 대교님께서………….]

“뭐? 대교가 뭐!”

[대교님 오신다고요.]

…?

[다음 신들의 유희 멤버의 종적이 아직 밝혀지지 않아서 일단 주인님과 합류하시겠다는 연락이………….]

“그, 그래?”

[・・・주인님. 저기, 아깐 제가 그만…………….]

“어, 뭐? 어… 그거? 음. 앞으로 그러지마.”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혼내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엄. 뭐 대단한 잘못이라고… 가서 쉬어. 팍팍 쉬어.”

너그럽게 웃어주며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의 달이 휘엉청 밝은 것이, 내일은 날씨도 맑고… 무지 행복한 귀가 길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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