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45화 : 정글도의 비애(悲哀).
5. 정글도의 비애(悲哀).
기나긴 겨울이 지났음을 강조하듯, 먼동이 터오는 동쪽 수평선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지극히 싱그러웠다. 그 싱그럽고 따듯한 바람은… 이 섬, 화이트 판타지아 단 하나의 항구에도 불고 있었다.
음.. 현재 이 항구에 있는 배라고는 이거 내가 올 때 타고 왔던 한 척뿐이니.. 그림(?)만 보면 올 때처럼 썰렁~하군. 물론 처음과는 기분이 전혀 다르지만 말야.
현재 우리 배의 모든 선실과 창고를 가릴 것 없이 모든 구석구석에는 밤샘 영웅놀이를 한 CR애들이 짱박혀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녀석들과 달 리 밤새 탱자탱자 운기조식이나 하고 있던 나와 몇 명만이 뱃전에 나와 새벽바람을 음미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간밤의 수많은 사람들의 뺑이 치기가 헛되지 않았고… 결국 이 섬의 좀비 사태는 끝났다. 그리고 모든 상황의 배후에서 이런저 런 행패를(?) 부리던 진유준과 그 일당은 섬의 주민들이 그들의 존재를 좀더 구체적으로 감 잡기 전에 일찌감치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뭐, 앞으로는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노릇이니… 우리가 더 머물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 뿐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슬며시 떠나는 거 자체를 사 람들이 거의 모르고 있다는 점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말야.
“…천주. 뜻은 알겠지만 그래도 다들 많이 섭섭해하는 것 같더군요.”
내 뒤의 천음마군이 입을 열자, 그 옆의 은사마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천주. 특히 윈드 군의 가족들은 꼭 다시 천주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며 나오려는 걸 겨우 말렸습니다.”
“잘했어. 아직도 다들 바쁜데 시간 빼앗아서 뭐해.”
난 문득 내 옆에 서 있는 소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다만 우리의 윈드 군이 가족과의 이별이 서러워서 눈물 콧물 짜는 모습을 직접 못 본 건 좀 아쉽군.”
“무, 무슨! 제가 울었다고 누가 그래요?”
발끈한 윈드가 항의했다. 그러나 윈드와 가족들의 작별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는 천음마군은 즉시 히죽거리며 놀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게 다가 윈드의 옆에서 편을 들어주어야 할 녀석, ‘카포에라의 막시무스’까지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다.
“윈드. 울었다. 많이, 많이. 그래서 나도 슬펐다.”
“으~ 막시무스! 너까지 왜 그래!”
…훗. 윈드 녀석, 나름 원판 주니어 포스를 풍겼지만, 아직은 어림없는 모양이군. 저 녀석 나이 때 이미 심각한 감정 결핍에 싸가지 밥 말아먹은 행 태를 보였던 원판에 비해서는 아직 희망이 있는 셈이려나…………?
저 천재 꼬마 윈드, 그리고 윈드의 친구이자 도둑 노예들의 보스인 카포에라의 막시무스, 이 두 녀석은 어쨌든… 이 섬 최초의 ‘해외 유학생’인 셈 이었다. 하필 진유준 일당을 따라 나섰으니 대체 어떻게 타락해서(?) 이 섬으로 돌아오게 될지가 심히 걱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으음. 그리고…. 짝퉁 뽀글이 주석, 코블의 경호대였던… ‘리철민’과 ‘리순희’, 그 두 남녀는 결국 이 섬에 남아서 자신들의 본부에서 어떤 명령이 내 려올지 기다린다고 했는데…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원판 말에 의하면, 프리메이슨은 이제 저 섬에서 손을 뗄 예정이라는데… 그럼 그 들도 원대 복귀되려나…………?
웬만하면 내가 그냥 데려오고도 싶었었다. 하지만 나도 아직 프리메이슨과 결판이 나지 않은 상태라 함부로 빼내오기는 좀 그랬다. 그들 역시 아직 은 조직을 배반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말이다.
뭐, 어차피 내가 프리메이슨을 전부 쓰러트리면 그들도 자연스럽게 자유를 찾을 수 있겠지…? 그때까진 가급적 다시 적으로 만나지 않기를 바라 는 수밖에 없겠군.
난 탈북 동포 남녀에 대한 우려를 애써 접으며 입을 열었다.
“…은사마군. 우리 이제 그만 가지, 뭐.”
나의 싱거운 출항 명령과 함께 배가 출발하자 윈드와 막시무스가 새삼 아련한 표정이 되어 섬 쪽의 뱃전으로 다가붙었다. 녀석들은 생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감상에 빠질 수밖에 없겠지만, 나도 사실 나름 묘하게 아쉬운 기분이 들기는 했다.
하긴, 섬의 주민들은 비열한 지도층과 언론에 길들여져서 전체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감히 날 애완동물 취급하기는 했지만… 개개인의 선량하고 따스한 마음씨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일도 많았으니…………
쾅~! 콰앙~! 쾅~!
응? 뭐야, 이거! 섬 안쪽에서 나는 소리? 대포나. 여하간의 폭음? 설마?
뭔가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지는 거 아닌가하여 놀랐으나, 몽몽이 재빨리 의미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모르스 신호입니다, 주인님. 의미는…………….]
…잘 가시오… 다른 세계의 친구들… 결코 잊지 않겠소…………
훗. 케빈 장군, 이 양반…! 한참 자기 국민들 건사하기도 바쁜 와중에 뭘 굳이 이런 인사를 다…………
천음마군은 다른 이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케빈 장군의 인사를 알아들었는지, 피식 웃으며 섬을(케빈 장군을) 향해 가벼운 경례를 보내고 있었다. 우린 환송을 거부하고 서둘러 떠나는 입장이었지만 막상 상대가 악착같이(?) 환송을 해주니까, 공연히 가슴 어딘가가 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헌 데, 그뿐이 아니었다. 좀 전에 항해실로 들어갔던 은사마군이 스피커로 뭔가 알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천주. 섬으로부터의 무선 메시지입니다. 항구의・・・ 아니, 다양한 곳으로부터의………….”
은사마군은 곧 배 안의 모든 스피커를 켰는지, 섬으로부터 보내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배의 안팎에 울리기 시작했다.
“아아~ 난 미나, 미나 H 샌더스, 들립니까? 잘 가세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들…! 꼭 다시 돌아와줘요! 새로운 판타지아로!”
“…아아! 들리나요? 우린 WF국립 고등학교. 라디오 동아리…! 어… 교실에서 우릴 구해줬던 예쁜 노예 누나…! 정말 고마웠어요!”
“……들립니까? 항구의 검역소입니다! 다음에도 우리가 검역을 열렬히 환영할 게요. 꼭 다시 들러주시길..”
“…어? 지금 되는 거야? 이 주파수 맞아? 지금 말하면 정말 듣는 거야? 아이 참… 하여간 고마워요! 우리 반 전부 무사해요! 엄청 큰 형들! 듣고 있 죠?”
“…어… 무서운 노예 아저씨! 듣고 있나요? 아저씨 때문에 우리 병원 다 부서졌어요! 하지만… 고마워요! 환자들 모두 인사하고 싶다고…….” 누가 우리 배의 주파수를 사방에 알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별의별 장소와 장비가 총동원되어 무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얼핏 들어서는 누굴 지칭하는 건지 모를 소리도 많지만… 훗.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거, 사람들 참…………
배는 점점 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지만 섬의 주민들이 진심으로 보내오는 목소리는 언제까지고 끊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잠들어 있던 CR애들 도 하나 둘 선실에서 고개를 내밀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한 녀석이 대표로 뽑혔는지 선실 밖으로 나왔다. CR 애들 중 가장 큰 목 소리’를 가진 녀석이었다.
“다들~ 잘 살아요~! 꼭 다시 놀러 올게요~!”
지극히 단순하고 진심 어린 인사는 배가 통째로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고함소리에 실려 섬 전체에 울려 퍼졌다. 섬 주민들에게는, 정말 끝까지 자 신들을 놀라게 하는 녀석들로 기억될 것 같았다.
판타지아 섬으로부터 생각보다 푸근한 이별을 고하고 떠난 후, 약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섬을 떠난 후 다시 취침 및 게으름 피우기 상태로 들어간 CR애들은 여전히 배 위로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천음마군과 은사마군은 갑판 위에 있었지만 그들 역시 각자 운기조식을 하며 잘 쉬고 있었다.
윈드와 막시무스만 생전 처음으로 나선 장거리 여행이 즐거운 듯 계속 배 안 여기저기 오가며 지들끼리 희희덕거리고 있지만, 그건 지금의 나와 별 상관없는 일이지. 배는 계속 아무런 거침없이 출발지였던 마이애미로 복귀하는 중이며, 거기엔 한국 행 특별기가 대기하고 있으므로 나의 귀가 길 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나안~!”
혼자 뱃전에 앉아 있을 뿐이고! 대교가 오지 않고 있을 뿐이고! 대교가 보고 싶을 뿐이고! 슬플 뿐이고! 대교! 대교오~!
[주인님?]
응?
[지금 혹시….]
요몽 이 녀석, 싱글거리며 나오는 걸 보니, 뭔가 눈치깐 모양이군. 그럴까봐 ‘나안~다음에는 속으로 했는데 말이야.
[헤헤~ 하여간 주인님도 참. 나름 참을성 대장인 분이 이럴 때는 유독 못 견뎌 하신다니까? 사실은 그래서 섬에서도 일찌감치 출발하신 거죠? 대 교님 빨리 보고 싶어서! 그쵸?]
“그…게 아니고, 인마! 내가 뭐라고 했다고 그래? 난 암말도 안 했다?”
[흐응~ 다 아는데 빼시기는…….]
“…요몽. 너, 이눔시키! 자꾸 까불래?”
[죄송! 죄송! 흐웅~ 실은 대교님께서 얘기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뭐? 뭘?”
[그냥… 도착하시기 직전까지 아무 보고도 하지 말라고만 하셨어요. 주인님, 놀래 켜드리고 싶으시다고요.]
“그・・・냐? 그럼 혹시………….”
[네엡! 실은 바로 저기에 이미………….]
요몽이 두 팔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의 하늘을 보니, 하얀 뭉게구름이 한가롭게 떠도는 정경 사이로 점처럼 작은 비행체 하나가 눈에 뜨였다.
…쯧. 대교 이 녀석, 그냥 빨리 오면 되는 거지, 뭐 그리 애를 태우고 그래. …으음. 물론 떨어져 지낸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리 조바심을 내는 나도 문제는 문제지만서도…………
나름 반성을 하며 피식거리고 있는 사이, 대교가 타고 오는 모양인 비행체가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음・・・ 저 초고속 전투기 F-35는 대교님께서 첫 번째로 응징했던 신들의 유희 멤버 소유였어요. 성(城)을 점령할 때 함께 접수해서 요긴하게 쓰고 계시는 중이죠.]
으음~ 놈들을 사냥하면서 거대한 동화속 성에 최신예 전투기까지 챙겼다니. 그야말로 일타삼피였군. 역시 울 대교는 손이 큰 살림꾼이라니까? …어, 다만 저런 자가용은(?) 연료비가 좀 문제가 될지도…
내가 다소 좀스런(?) 걱정을 하고 있자니까, 머리 위의 까마득한 하늘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선회하던 F-35 전투기 위로 투웅- 뭔가 튀어 올랐다.
에? 대교? 이, 이런… 아직 저렇게 높은데… 어, 어…? 설마, 낙하산도 없이?
대교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른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대, 대교의 맨몸 스카이다이빙은 언젠가의 나와 달리 지극히 우아하고 세련된 자태와 괘적이 그야말로 예술……
팔불출스런 감상을 길게 할 틈도 없이, 대교는 배 부근의 바다 위로 다이빙해 들어갔다. 처음 쏘옥 들어갔던 지점에서 약간 떨어진 바다위로 다시 대교의 인형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곧 날치처럼 바다 위를 날다시피 빠르게 내게로 오고 있었다.
“오~ 과연, 우리들의 천모(天母)! 성격 급하신 건 천주 못지 않… 윽!”
나름 감탄하던 천음마군이 은사마군에 옆구리를 찔렸는지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촤아악~
내 눈앞의 수면 위로 돌고래처럼 탄력 있고 인어처럼 우아하며 싱그러운 소녀의 자태가 솟구쳤다.
“어…….”
애매한 감탄사를 흘리는 내 앞에 드디어 착지하는 대교…! 근데 이건 좀 뜻밖이네? 설마 대교도 나처럼 얼룩무늬 군복 스타일을 하고 있을 줄은… 어, 물론 울 대교는 소위 밀리터리 룩도 무지막지 잘 어울리… 어, 음. 큼! 암튼!
“와, 왔어?”
에고. 결국 이런 멋대가리 없는 대사를 치다니.
“예에. 소녀… 이제야 님께 돌아왔습니다.”
대교는 가슴 벅찬 표정으로 미소 지었고, 나 역시 더 이상은 암말도 못하고 피실피실(?)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이로 심술궂은(?) 목소리 가 끼어들기 전까지 말이다.
“…윈드! 네가 보기엔 지금 최소한 몇 년은 헤어져 있던 커플 같지? 하지만 저 분들은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 윽! 은사마군! 거, 쫌!”
대교가 비로소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윈드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대교를 보고 있다가 흠칫 놀라며 눈을 깐다. “아, 이 귀여운 소년이 바로 윈드?”
대교가 아는 척을 하며 다가서자 윈드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음・・・ 반가워요. 우리 요몽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 아인・・・ 무척 총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를 발견했다고 기뻐하더군요.”
“아~요, 요몽 씨께서 제 얘기를.. 그, 그렇게…….”
윈드는 잔뜩 얼굴을 붉히며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걸 놓칠 천음마군이 아니었다.
“오호라~ 이제 보니 윈드 넌, 천주의 직속 해커 소녀를 짝사랑하고 있었구나!”
“무, 무슨 소립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어-그렇게 펄쩍 뛰고 부인하면, 요몽 양이 섭섭해 할 걸?”
“에? 그, 그게 아니라………….”
“오~ 역시?”
“아니! 그것도 아니라요!”
“흐흐~ 사내놈이 이랬다 저랬다 하기는…………….”
천음마군과 윈드가 정겹게 노는 사이, 대교의 시선은 막시무스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막시무스 씨인가요? 고향 섬에서 도둑 노예들의 보스라는…………….”
훗. 요몽 녀석이 시시콜콜 다 보고해 놓은 모양이군.
“어, 맞다! 내가 막시무스다! 하지만 이제 나의 보스는 진유준이다! 와~ 보스는 애인도 엄청나게 예쁘다! 난 정말 놀랬다!”
막시무스는 숨김없이 직설적인 표현에 대교도 풀썩 웃고 말았다. 새 멤버들 모두 대교에게 합격점을 받은 셈이었다.
…훗! 이제 정말로 행복한 귀가만이 남은 것 같군. …그래… 이번에 돌아가면 정말 당분간 푸욱~ 맘 편히 좀 쉬자. 당분간만이라도 대교와… 아무 것도 신경 쓰지 말고… 둘 만의 시간을……………
내 생각이 그대로 전달된 것인지, 문득 날 돌아보는 대교의 표정도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행복해 보였다.
대교와의 재회(얼마만인지는 중요치 않아!) 이후로는 시간이 시나브로 잘도 흘러갔다. 처음 출발했던 플로리다 해변으로 돌아와서는 수하들의 재 배치 및 복귀를 지휘해야 했는데, 그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먼저, CR애들은 다시 천음마군과 함께 홍콩으로 돌아가서 대기…! 본래는 윈드와 막시무스도 천음마군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나, 그 두 녀석들에게 필요한 건 아무래도 폭 넓은 세계 견학이므로 당분간은 자룡대주와 페트라 부대주 미녀 콤비에게 낙찰…! 훗~ 윈드 녀석은 천음마군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무지 좋아하는 눈치였었지, 아마?
대교가 이끌던 ‘신들의 유희 담당 특수 팀’은 일단 각자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긴 하는데, 그 중에서 특히 핵심 병력들은 대교가 호출하면 어느 때 라도 재빨리 집결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임무에서 제외시켜 놓도록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번에 대교 전용 어사조(御使組)로 임명이 된 셈이었다. 천우신과 흑주는… 이제 언제고 다시 만나러 갈 수 있으니까 됐고, 천우신과 함께 있을 모양인 소미령이들도 마찬가지인데다, 걔들 행동이야 본래 내 관할이 아니지? 으음.. 뭐, 대교의 아바마마 사영(死) 어르신네가 굳이 계속 캔들 리 호위를 맡아주겠다고 한 건………
“…대교.”
난 귀국행 특별기 계단을 오르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KKK단도 사라졌겠다, 굳이 그 어르신네까지 캔들 리 호위로 수고해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야.”
“예. 저도 그리 말씀 드렸지만, 그냥 지금 그리 하고 싶다고만 하시네요. 아무래도 새로 얻은 딸들… 소령이와 미령이 곁에 있고 싶으신 마음이 가 장 크겠지요. 하지만 에스 씨에게도 꽤 호감을 가지고 도움을 주고 싶으신 것 같아요. 당사자 앞에서는 표현을 안 하셨지만, 제게는… 그렇게 일편 단심으로 의리를 지키는 사내가 진짜 사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흐음~ 그런 심리는 이해가 되긴 하는데…………
“…지금 자신에게 경호임무를 맡기고 땡땡이 중인 에스가 실은 어떤 미녀와 함께 언더 월드로 놀러간 거라고… 그런 얘긴 아직 안 했지?”
“아, 예. 굳이 미리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흠. 쬐금 불안하긴 하군. 에스가 돌아왔을 때, 상황을 알게 된 사영 어르신은 과연…………
난 가까운 미래의 불상사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며 잊기로 했다. 애들도 아니고, 나보다 나이 지긋한 분들의 사소한(?) 문제까지 내가 일일이 참견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으음~ 그럼 이제 대체로… 큰 건은 다 마무리 된 것 같군.”
난 좌석에 앉으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옆자리에 앉는 대교도 별다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사실 뱀파이어화가 진행 중인 듯한 데릭 허버트 문제 나, 섬에서 죽이지 않고 포획해 온 MB좀비의 보스 놈 처리 같은 일들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우린 이제 이쯤에서 공적인 일로부터 신경 끄는 것으로 말없이 동의한 것이다.
“가만있자. 우리가 집을 떠난 지 어영부영 일주일쯤 된 건가….?”
나는 천천히 뒤로 움직이기 시작한 활주로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거참. 정확히 며칠이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군.”
“후후~ 저도 그래요. 우린 한 번 집을 나서면 너무 많은 일들을 겪는 편이니………….”
“그치..? 음, 미안. 나처럼 파란만장한 팔자를 타고난 남자를 만나서 대교 너까지 고생인 것 같아.”
“아이~ 그런 말씀은 마세요. 솔직히 그런 운명은 저도 만만치 않은 걸요.”
“…하긴. 울 대교도 그리 무난한 인생 역정은 아니었지. 남들이 보면 우리가 꽤나 박복하고 기구하며 스펙터클 한 팔자 커플이라고 할지도 모르 지.”
“후후~ 이런 것이 박복한 거라면………….”
대교는 살며시 내 가슴에 얼굴을 기대오며 말을 이었다.
“전 앞으로 다시 천년동안 박복하다해도… 도리어 너무나 행복할 거예요.”
“그, 그・・・야, 나도 뭐………….”
단 며칠이 아니라, 몇 년 혹은 몇 백년 만에 겨우 되찾은 것 같은 대교의 체온과 향기가 너무나 달콤했기에 나는 그만큼 간절히 기원할 수밖에 없었 다.
우린 어디까지나 박복한(?) 커플…! 그러니까. 부디 세상의 솔로들이여 우릴 투기하거나 저주하지 말 것이며… ‘타임 씨’인지 여하간의 절 대적 존재여… 당신도 이제 제발 우리 그냥 사랑하게⋯ 제발 좀 내비둬 주시길………!
나의 기원을 들어줄 존재들이 제대로 이해해주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이 작지 않은 특별기 속의 좌석은 분명히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점차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서로를 마주보는 나와 대교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 우주의 은총이 가득한 시간과 공간은…………
[・・・주인님.]
・에이 쒸, 진짜!
[코드명 ‘조담놈’입니다.]
엥? 그놈이 또 불순(?) 솔로들의 대표로 뜬 거야?
우리가 탄 비행기는 이미 활주로 끝에 다다라 마악 떠오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창 밖을 보니, 웬 오토바이가 무서운 속도로 비행기를 따라 잡고 있 었으며 거기에 탄 놈은 분명 조담놈이었다.
비행기에서 비행기로 뛰어서 탈 수도 있는 놈이니, 이런 식으로 탄다고 해도 위험하진 않겠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저 놈을 뭐 하러 걱정해? 우쒸! 저 빌어먹을 놈은 어디에 짱 박혀 있다가 이제 나타나서 분위기를 깨는 거야?
<진~유~준!>
나름 비장한 전음을 보내 온 조담놈이 오토바이로부터 훌쩍 신형을 날렸다. 내 좌석의 창문으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벽호공(壁虎功)으로 비행기 어딘가에 달라붙었을 것이라는 건 뻔한 일이었다.
<날 떼어놓고 갈 생각이냐! 어림도 없지!〉
악을 쓰는 전음이 계속 이어졌다.
<진유준~! 네 놈이 내공을 되찾을 때까지! 그래서 내 손에 쓰러질 때까지! 난 네놈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아!>
・・・옘병! 자룡대주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기가 죽어서 요 며칠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이 이제와 무슨…………
난 대교의 손을 잡고 그녀의 내공으로 전음을 날렸다.
<야 인마! 여기 자룡대주 안 탔어!>
〈…어? 그, 그럴 리가? 거짓말하는… 아,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됐어, 인마! 방해하지 말고 꺼져!〉
<그, 그럴 수는 없・・・ 이미・・・・・・ >
그 사이에 비행기는 당연히 이륙해서 점점 더 속도를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젠장! 들어가겠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지난번처럼 그냥 부수고 들어가겠어!〉
<누구 맘대로!〉
나와 대교는 재빨리 공공보법(空空步法)을 발동하여 놈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어? 자, 잠깐!〉
비행기 벽 너머에 달라 붙어 있는 조담놈의 당황해하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넌 천천히 와!〉
나와 대교는 동시에 벽에 손바닥을 짚었다.
격산타우隔山打牛)…………!
산너머의 소를 친다는, 말 그대로의 발경 공격이 벽 너머로 작렬했다.
<으왓! 이 빌어먹을 커플! 우어어어어어~ >
…훗. 그 녀석, 진짜 소 같은 비명과 함께 떨어지는구먼.
이륙했던 곳이 본래 바닷가 부근의 활주로였기에 우리가 조담놈을 떨군 건 바다 위였다. 설사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쉽게 죽을 녀석이 아니니 걱 정 같은 건 전혀 해 줄 마음이 없었다.
“음뿌왓하하핫!”
난 마음껏 웃었고, 대교는 조담놈에 대한 미안함을 약간이나마 담은 미소를 지었다. 나와 대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보며 손바닥을 마주쳐 하이파이브를 했다. 간만에 제대로 훼방꾼을 격퇴한 우리의 앞길에 서광이 비추는 기분이었다.
조담놈 격퇴 이후, 우린 당연히 알콩달콩 흐ant한 시간을 보내며 한국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약간 아쉬운 점이라면, 아무리 우리들이 눈먼(?) 커플 이라고 해도 기내에 있는 수하들의 눈치를 완전히 무시할 순 없었다는 것 정도였다.
뭐 이렇게… 음, 음・・・ 대교가 입에 넣어주는 주전부리를… 음, 쩝! 받아먹고 있는 것도 그리 체통 있는 모습은 못될 것 같기도 하지만… 음, 음. 우물~ 쩝!
“오라버니, 이것도 드셔보세요. 앙~”
“앙~”
이거 참. 우째 대교보다 내 쪽이 아기가 된 듯한 기분이 드네 그려.
“…아참. 전부터 말씀 드리려고 했던 일을 깜박 잊고 있었네요.”
“응? 뭔데?”
“이번에 집을 나서기 전에요, 오라버니의 부모님들께서 비화곡에 가시고 싶다는 뜻을 보이셨잖아요.”
“어, 그랬지. 뭐. 당장은 어렵겠지만 나중에 비화곡이 재건되면… 아, 그건 좀 너무 기약 없으려나?”
“예. 그래서 제가, 두 분이 좋아하실 만한 곳으로 몇 군데 알아봤거든요? 오라버니께서 허락하신다면 곧 떠나실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 어떨 지………….”
“핫. 그런 일에 허락이고 뭐고가 어딨어? 당연히 나도 찬성이지!”
하여간 요 이쁜 것은 어쩌자고 이리도 사랑스러운 짓만 골라서 하는지……
“후후~ 그럼 돌아가는 대로………….”
대교가 말끝을 흐린 건 새삼 뜨끈뜨끈 아궁이 속 같은 내 눈빛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흐~ 수하들이 보거나 말거나…..
나는 결국 정신줄을 살짝 놓으며 대교를 끌어 당겼다.
“어멋~? 여기선 좀………….”
대교의 가냘픈 거부는 나의 광분(?)을 더욱 자극하는 촉매제에 불과했기에, 나는 주저 없이 그녀를…………
<우~ >
으응?
<우우~ 우우우~ >
…뭐, 뭐시여? 이.. 이 묘한… 귀신(?) 울음소리・・・ 아, 아니, 이건 소리라기보다…………
<우우우우우~〉
…소리… 맞나..? 하지만 구체적인 소리라고 하기엔 뭔가 좀..
“오라버니…?”
바로 코앞에서 가쁜 숨을 토하던 대교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뜨고 있었다.
“못들은・・・ 거야?”
“예?”
나는 잠시 미동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니, 다른 모든 오감까지 동원하여 조금 전의 무언가를 다시 잡아보려 했다. 하지만 나의 본능적 인 행동마저 멈추게 했을 정도로 분명했던 정체불명의 소리인지 기운인지 뭔지는 다시 감지되지가 않고 있었다.
“…에, 에이~ 오라버니도 참. 역시 여기선 민망하신 거죠? 괜히 딴청을………….”
음? 대교는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건가? 대교가 아무리 나에게만 집중한 상태였었다고 해도 그렇지…………
“몽몽! 너도…냐?”
[…저의 기본 방어형 스캔 시스템에서는 이상 징후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천하의 마중제일녀(魔仲第一女)대교와 울트라슈퍼 미래 로봇 몽몽도 모른다…? 그렇…다는 건………
“내가, 환청을 들었나? 허허~”
결국 그렇게 중얼거리며 싱겁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교는 내가 끈금 없이 장난을 친 줄 알았는지 가볍게 툭, 내 가슴을 쳤다.
“음. 그럼 다시…..”
“됐네요!”
대교는 귀여운 투정과 함께 몸을 뺐고, 난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거, 이상하네..? 최근의 싸움에서 좀 무리를 하긴 했지만… 설마 뜬금없이 이상한 환청을 들을 정도로. 그렇게 기가 허한 상태일 리가 있을 수 도 있으려나? 단전이 파괴된 이후로 이렇게 혈도를 쥐어짜며(?) 싸움을 계속한 건 처음이었으니… 으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대 교를 걱정시킬 수는 없지. 암!
나는 뭔가 살짝 눈치를 채려는 기색의 대교를 의식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 사실 난 어디까지나 모범 청년인데, 좀 오버했던 것 같아. 음… 역시 그렇고 그런 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해야… 어, 가만? 대교 너, 혹시 그 래서 우리 부모님들이 집을 비우시게끔 여행 계획을 세운 거 아냐?”
“어멋? 절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금방 새초롬해지는 모습조차 너무나 이쁜 울 대교 때문에 환청인지 뭔지는 순식간에 내 의식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중간에 약간의 잡음이(?) 있기는 했으나, 그 외에는 더 이상의 별다른 문제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대한민국, 서울. 그 중간의 약간 하단쯤 되는 동 네의 한 쪽 귀퉁이에 자리한, 지극히 평범하고 낡은 원룸 건물…! 우린 그곳, 마이 홈으로 무사히 복귀했다. 그리고… 행복한 시간은 계속 되었다. “후후 이게 다 니 덕분이야, 대교.”
난 내 방의 책상 의자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고, 대교는 약간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흐응~ 칭찬은 감사하지만… 제가 무얼 잘 했는지 모르겠어요.”
“니 존재 자체를 칭찬한 거야. 너와 함께였으니까. 그러니까 부모님도 별 말 없으신 거라구.”
사실이었다. 내가 전처럼 혼자 집을 떠나서 며칠씩 싸돌아다니다 왔다면, 귀가하자마자 부모님께 온갖 취조(?)와 타박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 만 이번에는 대교와 함께 그녀의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명분으로 나갔었기에 아무런 눈총조차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처음엔 두 분 다 대교에게만 ‘잘 다녀왔냐’, ‘그쪽 어르신은 건강은 어떠시냐’는 등 안부와 소식을 묻기에 바쁘셔서… 난 잠시 왕따를 당 해야 했지. 물론 곧 나만 따로 부르셔서 대교 아부지의 반응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는 하셨지만. 뭐, 그거야 무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대화였었고…..
“으음. 게다가…! 설마 두 분이 이렇게 금방 오케이 하시고 득달같이(?) 출발하신다고 하실 줄은….”
이번엔 ‘부모님의 해외여행’ 얘기였다. 본래 우리 부모님은 장거리 여행 결정에 있어서 상당히 신중하신 편인데 이번만은 바로 내일 모레 출발하는 일정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야… 이렇게 든든한 아드님이 언제든 가게를 봐주신다고 하니까 그렇겠죠.”
“글쎄…? 그보다는 귀여운 예비 며느리가 준비해 준 여행이라 더 고맙고 기쁘신 거 아닐까?”
‘며느리’란 말이 나오자 또 대뜸 얼굴을 붉히는 대교.
훗~ 어쨌든, 수속이야 자룡대주가 알아서 해줄 것이니 우리가 신경 쓸 일은 별로 없을 것 같…………..
“아가~! 대교야!”
“아… 예! 어머님!”
거실에서 들려온 어머니의 부름에 대교가 잽싸게 나가고 난 후, 난 혼자 히죽히죽 행복한 팔불출이 되었다. 그러나…………
<우~>
-우쒸! 설마, 또………
<우우우우~>
젠장…! 이거 정말 뭐야..? 이렇게 흐뭇 상황에서 웬 청승 곡소리가 나오냐고오~!
<욱우!~ 우우우~ >
“몽몽! 너 진짜 지금도 전혀 감지 안 되냐? 이 곡소리 같기도 한 소리 말야!”
[・・・죄송합니다, 주인님. 일시적으로 스캔 레벨을 올렸으나 여전히………….]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귀신의 장난 같은 걸 의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몽몽은 영체까지도 완벽하게 잡아내는 만능 스캔 기능을 가지고 있으 니 뭔가의 출몰을 모를 리가 없다.
아니, 그 전에… 현재의 나 진유준에게 어떤 간 큰 귀신 따위가 집적댈 수 있겠어…………?
(……)
예의 곡소리는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지만, 내 불쾌함과 불안감은 오히려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으~ 이거 설마… 우리 집안에 내 나이 때쯤에 발동하는 정신병이 유전되어 오다가 이번에 갑자기 · 옘병! 별 생각이 다 드네 그려.
[…주인님의 뇌파 및 전체적인 신체 상태 점검에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제기, 그 소리는 아무래도 나의 내부에서 들렸던 것 같은 기분이………
[이제 남은 가능성은………….]
응?
[‘염(念)에 의한 소통’입니다.]
“에…? 염? 그게 텔레파시 같은 것과 다른 거야?”
[텔레파시와 달리 공식 확정 용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마계, 마력 등의 용어보다는 분류 레벨이 공인에 가까운 ‘미확인 통신 시스템’의 하나입니 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우선, 판타지아 섬에서 주인님도 목격하셨던 MB좀비들 간의 소통, 코드명 에스와 뱀파이어 증후군 환자인 데릭 허버트와 소통 등을 예로 들겠 습니다.]
음. 그러고 보니…………
[저희 시대에선 자아를 갖춘 고위 생명체 간의 뇌파 동조… 즉, 텔레파시의 기본 알고리즘이 거의 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체 간의 동조에는 항시 USC라 칭해진 고도의 암호 체계가 포함되며, 이에 관한 연구는………….]
어머, 쓰바. 간만의 학술적 분위기라 적응이 쉽지가 않네 그려.
난 잠시 몽몽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당연히(?) 뭔 소린지 모를 얘기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아무리 어렵고 난감한 문제도 얼추 요점은 꿰어 맞추는… 찍기의 달인… 재수, 진유준 선생 아닌가!
[이상의 이유로, 현재 수준의 ‘염의 소통’을 시도한 존재의 추적은 저의 기능으로도 어렵습니다.]
“…으음. 그게…”
이런 빌어먹을! 이번에는 나도 어렵잖아, 이거! 으~ 하지만 어떻게든 꿰어 맞춰보자.
“어… 아무리 너라도 텔레파시의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던 이유가… 어떤 생명체라도 그런 능력을 쓸 때는 내용을 자기 고유의 암호로 구성한다 이 거지?”
[그렇습니다. 해당 내용의 기본 개념은 제가 전음을 도청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드릴 때, 이미 알려드린 바 있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그리고 그 암호라는 건… 능력을 쓰는 당사자가 의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생명체라면 누구나 자동으로 그리 되는 거고… 니네 미래에서도 밝혀내지 못한⋯ 굳이 표현하자면 ‘생명의 신비’ 같은 거라고 했던 거 같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염인지 뭔지 하는 건 텔레파시보다도 원시적이랄지 난해하달지 말 그대로 ‘생각’… 그 자체! 당사자들 말고는 특정 신호라는 걸 알 수도 없는……..”
아놔, 이거.
“…제기, 그러니까! 염의 소통이란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둘째 치고…! 하여간 미리 서로 코드를 맞춘 상대하고만 의사전달이 되는 거란 얘기잖 아. 흔한 예로, 이심전심!”
[학술적인 분석과는 거리가 있으나, 현 상황 파악에 유용한 이해 방식임은 인정합니다.]
그… 뭐. 그럼 된 거지? 내가 뭔 과학자도 아니고… 아, 암튼! 그럼 당장 중요한 건…………!
“내가 들은 소리가 정말 그 ‘염의 소통’에 의한 거라면… 그럼 나와 그게 가능한 건 ‘라후의 혈족’들밖에 없는 거 아냐? 나와 코드를 맞춘… 즉, ‘계 약’을 한 건 그들뿐이잖아. …어, 물론 이심전심이라면야 나와 대교겠지만, 대교가 지금 속으로 울고 있는 거라던가 하는 얘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거고…….”
[······.]
뭐야, 이거…? 라후의 혈족 삼형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야? 그래서 그들의 슬픔이 저절로 나에게 전달된 이 아닐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잖아…? 대체 어떤 일이 그렇게 짱짱하게 잘 나가는 마계 귀족들에게도 나쁜 일이 없을 거라고 누가 보장한 것도 아니⋯인 건 아니라도…?! 그 래도 그들과 그 곡소리는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야!
‘어울리지 않는다’는 근거 불명의 생각 때문에 혐의를(?) 거두기는 좀 거시기 했지만, 난 일단 다른 가능성을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선… 침대에 좀 눕고… 음… 그래. 쉬면서 생각을 다시 그러니까. 나에게 생각이 전달될 만큼 찌인한 인연을 가진 이가 또 누가 있을지…으 으으음~ 문득 하나 더 떠오르긴 했는데… ‘그 아이’도 역시 아니겠지? 대교가 품고 있는 우리들의 2세…! 그 영혼의 아기가 만의 하나라도 슬퍼할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나보다 대교가 더 잘 감지할 테니 말야. 그렇다면⋯ 으음~ 또 누가… 대체 나에게… 누가 그런… 대체…………
누적된 피로때문에 살며시 찾아든 졸음으로 생각의 사슬이 얼핏 끊어진다 싶었을 때.
<우~ 우우~ >
…쯧. 또 시작인가? 짜식…! 대체 뭐가 그리 서럽다고………음..? 어… 나 지금 잠이 든・・・ 그런・・・ 건가……………?
꿈속에서 꿈을 의식하는 건, 나로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와 뭔가 달랐다.
이… 묘한・・・ 이상한 기분은 마치 내 꿈이 아닌 것 같은… 뭐지?
아무것도 없는, 말 그대로 빈 공간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간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아무튼 그렇게 허무한 어딘가가 보였다.
…그래. 평소의 꿈처럼…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난 지금… 보고 있어. 어디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막연하게… 내가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음?
<우~ 우~ 우우~ >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뭔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안개 덩어리가 피어오르는 모습 같던 무언가가 차츰 형체를 갖추기 시작 하더니, 이윽고 난 그것이 길고 검은 머리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 아래에서 작게 들썩이고 있는 건…………
슬피 우는… 소년…? 어… 그게 사실. 소년인 건 고사하고. 아직 그냥… 그림자 형태만이 보일 뿐이지만 왠지 왠지 그냥⋯ 얼굴을 묻고 슬 퍼하는 소년을 보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
난 나도 모르게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마음뿐이었다. 손을 뻗는 건 불가능했고, 입을 열어서 부를 수도 없었 다. 난 그저 계속 정체불명의 그림자 소년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건 내 꿈이 아닌 거야..! 하지만… 그럼 대체.. 대체 저 녀석은 누구지? 대체 누구기에… 날 자신의 꿈속으로 끌어들여서… 아니, 그 전에… 대체 왜 울고 있는 걸까? 왜 저렇게 서럽게…………
안쓰러움과 답답한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난 불현듯 깨달았다.
이런…! 아는 녀석이었잖아! 그래. 처음 보지만.. 그래도 분명히 알아…! 난 저 녀석이 누군지를 너무나 잘.. 젠장. 왜 진작에 깨닫지 못했 던 거야…? 이 녀석만큼 나와 가까운 존재도 없는 것을…………
난 결국 픽싱겁게 웃고 말았다. 녀석을 알아보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고, 그만큼 녀석에게 미안했다.
<・・・야, 인마.>
응? 지금 얼결에 말을… 녀석에게 들릴 정도의 소리를 낸 것 같은 기분이…………
기분만이 아니었다. 문득 울음을 그친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여전히 그림자 형체뿐인 존재여서 표정이란 것도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느껴졌다.
<짜식이… 지가 불러 놓고, 놀래기는?〉
훗. 녀석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 치곤 너무 썰렁했군.
<어쨌든, 반갑다! 설마 널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난 널 항상… 응?>
엑? 어, 어? 어랏~?
선뜻 눈을 떴다. 눈을 뜬 게 먼저인지 잠을 깬 것이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얼결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이 녀석…! 놀라서 날 쫓아낸(?) 거군. 자신의 꿈(?) 속에서 말야.
난 정신없이 침대에서 구르다시피 내려와, 곧바로 침대 밑에 손을 넣었다. 내 손에 들려 나온 건, 귀가하자마자 침대 밑에 넣어두었던 나의 오랜 친 7……
“정글도…! 너였냐?”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난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혼자 슬픔에 잠겨 있던 건 분명히 이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