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47화 : 그들의 옛 친구.
7. 그들의 옛 친구.
그때… 난 천지파멸식의 폭주로 반 이상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상대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누구라는 건 분명하 게 알고 공격했었다. 그렇게 모순적인 상황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일까? 지금의 정상적인(?) 대면까지 뭔가 이상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여하간. 어차피 찾아내야 할 자였으니, 어떤 형태로든 만나게 된 거 자체는 반가운 노릇이지…! 다만.. 대체 이 빌어먹을 자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건지. 그게 문제란 말야? 정글도 개인(?) 일을 프리메이슨이 어떻게 알고… 아, 아니. 지금 이렇게 혼자 궁금해 할 이유가 없지? 직접 물어 보
“대체 무슨 배짱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거죠?”
음. 뜸들이다 대교에게 대사를 뺏겼군(?). 하긴, 12인의 사도에게 유감이 많은 건 대교도 나 못지않지. 음… 역시 대교가 나보다 더 살벌한 살기를 발산하고 있어.
“허어~ 이거, 첫 만남부터 너무 무섭게 반응을 하는군. 두 사람, 내가 그렇게 싫은가?”
쯧. 누가 12인의 사도 아니랄까봐, 우리 살벌 커플 앞에서 잘도 여유를 부리고 있군 그래. “내가…….”
대교는 지극히 냉랭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과 이 정도 거리에 이를 때까지, 총 스물네 번의 살수를 참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글쎄. 자네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치명적인 살기를 느끼긴 했으나, 일일이 세어 보진 않았네.”
살벌한 질문에 만만치 않은 대응이로군. 이제 대교는 과연…………
“…당신의 이름은?”
“일단 ‘디’, 알파펫 디(D)로 불러주게, 대교 양. 아, 혹시 본명을 알고 싶은…….”
“아니, 필요 없어요.”
대교는 상대의 말을 끊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청명검을 살짝 밀어 올렸다. 살짝 드러난 날이 서늘한 빛을 발했다.
“디…! 당신은 오늘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나타난 거죠? 대답 여하에 따라, 12인의 사도는 공석을 하나 더 늘이게 될 거예요.”
“후후~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되네, 대교 양. 아까 여기 이 ‘필립’이 먼저 밝혔듯………….”
디는 여전히 침착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자신의 옆에 말없이 서 있는 소년을 돌아보았고, 새삼 어린 소년의 존재를 인식한 대교의 살기가 조금 주춤했다.
“우린 자네들을 해친 다거나 여하간의 나쁜 뜻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야. 솔직히, 주변에 이 정도 병력을 숨겨 두기는 했네만…..”
응?
디가 살짝 오른 손을 들어올리자, 사방의 어둠 속에서 일제히 작은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들과 같은 스텔스 장비를 갖춘 채 더욱 먼 거리에 숨어 있던 자들이 동시에 손전등 같은 걸 켜 보인 모양이었다.
쯧. 상황에 맞지 않게 마치 땅에 별무리가 내려앉은 듯한 제법 아름다운 풍경이로군.
“저들은 평소에도 항상 우리의 경호를 맡고 있는 자들이야.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이번에 자네, 진유준 군의 고향 나라에까지 온 건 그 누구라도 해치기 위함이 아니라네. 사실은… 자네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리라는 것조차 기대하지 않았었어. 한 시간 정도 전에 자네들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 를 받기 전까지는 말일세.”
흐으음… 지금 이자가 생판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 듯도 한데…………
“목적…? 후후. 우린 단지 순수하게 ‘옛 친구’를 만나러 왔을 뿐이라네. 아 물론, 여기서 친구는 그야말로 단어 그대로의 의미이지.”
이것봐라? 우리가 찾아가던 분은… 전생에서 정글이를 만든 최고의 명인이었기는 했어도, 이번 생에서는 장인으로서 거의 무명에 가까운 분이 라고 했어. 적어도 몽몽이 조사한 공식 자료상으로는 말이야. 그런데 사실은… 12인의 사도와 ‘친구’씩이나 되는… 숨은 거물이었다는 건가…………?
나라 한국의 무명 노인을 옛 친구라고 부른다는 건 확실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 가만? 조담놈… 조담놈의 가짜 정글도…! 그건 물론 우리 정글이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그래도 나름 상당한 명검에 속한다고 했어. 혹시 그 칼도 이 시대의 그 분이 만든 걸까?
“음… 이제 어쩔 텐가?”
디의 간단한 질문에 대교는 자신이 대답하지 않고 날 돌아보았다.
“우리야 함께 가도 상관없겠지만 자네들은 아무래도 ‘그’를 따로 보고 싶겠지?”
“그…야, 뭐…..”
“마음대로 하게. 난 상관없고…….”
디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다시 자신 옆의 소년, 필립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는 태도를 취했다. “나도 상관없어요. 진유준 씨가 이곳으로 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나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소년 필립도 고개를 끄덕이자, 디는 정말이지 사람 좋게 보이는 미소와 함께 몸을 돌려 비켜섰다.
“본래 우리가 가려던 길을 가는 거니, 댁에게 딱히 고마워 할 건 없다고 생각해.”
“아아~ 물론 자네들 입장에선 그렇지. 우리도 굳이 생색을 내려던 건 아니었다네.”
“다만… 그러니까, 내가 지금 좀 미적대는 건 말이지. 음………….”
난 새삼 디와 필립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시선을 필립에게 고정시켰다. 이마와 턱이 좀 긴 편이고 전체적으로 약간 균형이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목구비의 개성 있는 얼굴이었으나, 아직 어린 나이라 그런지 귀염성도 꽤 있어 보였다.
문제는 이 소년의 외모가 아니라… 아니, 외모부터 문제는 문제인가?
“디도 뭔가 이상하지만… 너도 좀… 왠지 처음 만난 것 같지가 않아서 말야.”
음…? 지금 내 말에 표정이 약간 변하는 것 같은데?
“잘못 보신 거 아닐까요, 진유준 씨. 난 보시다시피 특이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쉽게 잊지 못한답니다.”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해. 하지만 그보다………
“…글쎄? 뭣보다, 어른한테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는 걸 보니 아닌 것도 같군.”
요런 꼬마가 나에게 계속 무슨무슨 씨라고 하는 걸 내가 용납했을 리도 없고, 그걸 기억 못할 리도 없어. 분명히 처음 보는 꼬마라는 얘긴데… 으으 음~ 그래도 왠지 낯설지가 않은 건 왜일까? 다른 건 몰라도, 저 눈… 어린아이답지 않게 음울하고 세상 다 산 것 같은 저 눈빛…! 저게 낯이 익단 말야…………..?
“일단, 둘이 부자지간은 아니지?”
내 질문에 둘 다 쿡 웃으며 어이없다는 기색을 보였다.
“뭐, 네가 누구든 이런 초대형 악당과 함께 다니는 걸 보면, 평범한 꼬마는 아닐 테지? 하지만… 내 말 잘 들어라. 네가 어떤 신분과 특수 능력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일찌감치 어른들일에서는 발을 빼는 게 좋아. 안 그랬다간, 언젠가는……………”
“당신, 진유준 씨에게 혼난다…! 그건가요?”
“당근이지.”
“…훗. 고마운 충고로군요. 한 번 생각해보긴 할게요.”
“짜식이, 그렇게 웃으니까 훨 귀엽구만.”
“에? 뭐…요?”
“그치, 대교?”
“예. 제가 보기에도 귀여운 표정이었어요.”
“거봐! 저 예쁜 누나도 그러잖아? 앞으로도 웬만하면 그렇게 웃거나, 하여간 좀 표정 좀 풀고 다녀 인마. 쬐그만 게 괜히 분위기 잡고 다녀봐야 여 자 애들한테 인기 없다, 너.”
“어…….”
필립은 뭔가 생전 처음으로 듣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차분하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긴 했지 만, 더 이상 딱히 더 할 말도 없고 해서 그냥 출발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 분 친구라는데, 그냥 믿고 함께 갈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역시 12인의 사도에게 들은 말을 간단히 믿어주기는 싫었다.
“이따 봐서… 우리 면회(?) 끝나면 알려 줄 테니까, 그때나 올라오던지 말던지 하슈.”
“…흣. 고맙군, 그래.”
아무리 적이지만, 12인의 사도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인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자들 중 한 명이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의 무명 노인을 옛 친구라고 부른다는 건 확실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 가만? 조담놈… 조담놈의 가짜 정글도…! 그건 물론 우리 정글이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그래도 나름 상당한 명검에 속한다고 했어. 혹시 그 칼도 이 시대의 그 분이 만든 걸까?
“음… 이제 어쩔 텐가?”
디의 간단한 질문에 대교는 자신이 대답하지 않고 날 돌아보았다.
“우리야 함께 가도 상관없겠지만 자네들은 아무래도 ‘그’를 따로 보고 싶겠지?”
“그…야, 뭐…..”
“마음대로 하게. 난 상관없고…….”
디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다시 자신 옆의 소년, 필립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는 태도를 취했다. “나도 상관없어요. 진유준 씨가 이곳으로 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나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소년 필립도 고개를 끄덕이자, 디는 정말이지 사람 좋게 보이는 미소와 함께 몸을 돌려 비켜섰다.
“본래 우리가 가려던 길을 가는 거니, 댁에게 딱히 고마워 할 건 없다고 생각해.”
“아아~ 물론 자네들 입장에선 그렇지. 우리도 굳이 생색을 내려던 건 아니었다네.”
“다만… 그러니까, 내가 지금 좀 미적대는 건 말이지. 음………….”
난 새삼 디와 필립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시선을 필립에게 고정시켰다. 이마와 턱이 좀 긴 편이고 전체적으로 약간 균형이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목구비의 개성 있는 얼굴이었으나, 아직 어린 나이라 그런지 귀염성도 꽤 있어 보였다.
문제는 이 소년의 외모가 아니라… 아니, 외모부터 문제는 문제인가?
“디도 뭔가 이상하지만… 너도 좀… 왠지 처음 만난 것 같지가 않아서 말야.”
음…? 지금 내 말에 표정이 약간 변하는 것 같은데?
“잘못 보신 거 아닐까요, 진유준 씨. 난 보시다시피 특이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쉽게 잊지 못한답니다.”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해. 하지만 그보다………
“…글쎄? 뭣보다, 어른한테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는 걸 보니 아닌 것도 같군.”
요런 꼬마가 나에게 계속 무슨무슨 씨라고 하는 걸 내가 용납했을 리도 없고, 그걸 기억 못할 리도 없어. 분명히 처음 보는 꼬마라는 얘긴데… 으으 음~ 그래도 왠지 낯설지가 않은 건 왜일까? 다른 건 몰라도, 저 눈… 어린아이답지 않게 음울하고 세상 다 산 것 같은 저 눈빛…! 저게 낯이 익단 말야…………..?
“일단, 둘이 부자지간은 아니지?”
내 질문에 둘 다 쿡 웃으며 어이없다는 기색을 보였다.
“뭐, 네가 누구든 이런 초대형 악당과 함께 다니는 걸 보면, 평범한 꼬마는 아닐 테지? 하지만… 내 말 잘 들어라. 네가 어떤 신분과 특수 능력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일찌감치 어른들일에서는 발을 빼는 게 좋아. 안 그랬다간, 언젠가는……………”
“당신, 진유준 씨에게 혼난다…! 그건가요?”
“당근이지.”
“…훗. 고마운 충고로군요. 한 번 생각해보긴 할게요.”
“짜식이, 그렇게 웃으니까 훨 귀엽구만.”
“에? 뭐…요?”
“그치, 대교?”
“예. 제가 보기에도 귀여운 표정이었어요.”
“거봐! 저 예쁜 누나도 그러잖아? 앞으로도 웬만하면 그렇게 웃거나, 하여간 좀 표정 좀 풀고 다녀 인마. 쬐그만 게 괜히 분위기 잡고 다녀봐야 여 자 애들한테 인기 없다, 너.”
“어…….”
필립은 뭔가 생전 처음으로 듣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차분하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긴 했지 만, 더 이상 딱히 더 할 말도 없고 해서 그냥 출발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 분 친구라는데, 그냥 믿고 함께 갈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역시 12인의 사도에게 들은 말을 간단히 믿어주기는 싫었다.
“이따 봐서… 우리 면회(?) 끝나면 알려 줄 테니까, 그때나 올라오던지 말던지 하슈.”
“…흣. 고맙군, 그래.”
비로소 디의 얼굴에 약간의 씁쓸함이 스치는 것 같았다.
아무리 표정 관리에 뛰어난 자라고 해도, 티끌처럼 하찮은 장난감 정도로 생각했던 우리에게 계속 저자세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 속이 편할 리가 없 겠지…? 하지만, 알게 뭐냐. 우리가 댁들에게 당해온 걸 생각하면 지금 당장 칼부림 안 난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암.
우린 당당히 디와 필립의 앞을 지나쳐 산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정글도・・・ 정글아, 미안! 이제 정말 빨리 가줄게!>
내 말을 이해하거나 말거나 일단 그리 외치며, 공공보법 발동…! 나와 대교의 신형은 길도 무시하고 숲을 곧장 뚫고 날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산길에 익숙한 사람의 걸음으로도 두세 시간은 걸릴 법한 거리였다. 그러나 나와 대교는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 둠에 쌓인 산의 어느 구석에 천년 전의 어느 시점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대장간의 불빛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오~ 어~! 오! 우워! >
웃! 정글이의 반응이 격렬해지는 걸? 여전히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대장간 입구 부근에 착지했고, 대장간 안쪽에선 생각보다 매우 환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몽몽!”
[실내에서 감지된 인체는 목표 인물로 확인되었습니다. 1차 스캔 결과, 인체 기능의 정지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행이다. 워낙 상태가 안 좋은 노인이라고 해서 우리가 아래에서 미적대는 사이에 쓰러지시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러나, 주인님! 실내 진입은 아직 이릅니다!]
젠장! 이번엔 또 뭐야?
[실내에서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 왜곡 현상이 감지되었습니다. 코드명 디와 필립의 장비보다 발전된 형태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에? 뭐시라고라? 프리메이슨 최고 대빵인 12인의 사도가 쓰는 장비보다도 최신형? 대체 누가 그런 걸 쓸 수가 있…………
의문을 품기가 무섭게 대장간 안으로부터 해답(?)이 스윽 얼굴을 내밀었다.
이, 이… 이거 야, 원! 이걸 반전의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저 양반은 또, 왜 여기서 출몰(?)하는 거야?
“하이~ 유준 군, 대교 양. 반가워.”
“예, 뭐… 딱히 반갑다고 하긴 좀 그렇지만… 하여간 오랜만이네요, 닥터 제이.”
닥터 제이…! 지금쯤 그랜드캐넌 지하의 깊숙한 곳에 짱박혀 있어야 할 저 양반이 어떻게 여기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어쨌든 그러면… 사 도 디가 말한 ‘옛 친구’란 대장간의 명인이 아니라 바로 저 양반..? 으으음. 모르겠다, 모르겠어!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는……………
“닥터 제이. 지금 바로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실 건가요?”
“어, 그거야 뭐….”
“만약 아니라면 일단 비켜주실랍니까? 급한 일부터 진행해야겠어요.”
“음… 내 생각에도 ‘부자상봉’이 더 급한 것 같군.”
닥터 제이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입구 옆으로 물러났다. 난 대교의 손을 놓고 곧바로, 그러나 약간은 조심스럽게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잔 득 지펴져 있는 화덕의 불길 때문에 실내는 후끈한 열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짧은 백발의 작고 깡마른 노인 한 분이 서 있었다.
열기와… 후둑거리는 소리… 시시각각 변하고 춤추는 불빛에 쌓여 있기 때문일까? 아직도 환자복 차림인… 저 작고 왜소한 노인이 마치 이 대 장간의 일부. 아니, 대장간 자체처럼 보이기까지. 으음. 어쨌든………!
“저기, 어르신. 이 아이… 기다리셨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정글도를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 흥분해서 난리가 아니던 정글도의 염이 이제 도리어 잠잠해져서 소리 죽여 울먹거리는 듯한 느낌만이 전해져 올 뿐이었다.
“그래. 고맙네, 젊은 친구.”
노 명인은 나에게 감사를 표하며 손을 내밀었다. 얼굴과 마찬가지로 그 손의 빈약함과 건조함은 그야말로 말기 환자처럼 힘겨워 보였다. 그러나 정 글도를 받아드는 순간, 어르신의 안쓰러운 얼굴에 태양처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얘야, 얘야… 정말 오랜만이로구나. 그렇지…? 응?”
작게 떨리는 음성과 손길로 정글도를 어루만지는 모습이 진짜 자신의 피붙이를 만난 듯한… 그런…
“좋은 주인들을 만나서 이렇듯 훌륭하게 자라주었구나. 어디 어디, 어디… 허허~ 그래,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단다.”
나는 왠지 코끝이 시큰해짐을 느끼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노 명인은 천년만에 다시 만난 아들을 손에 쥔 채 대장간 바닥에 앉았고, 그들 부자의 감 격에 겨운 대화(?)는 계속 이어질 듯 보였다.
으음. 아무래도.
난 더 이상 함께 있을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밖으로 나와야 했다. 밖에서는 닥터 제이와 대교가 조용히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음. 이산가족 찾기 모드의 실내보단 못해도, 이쪽 분위기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군. 대교와 닥터 제이는 대교가 영혼 상태에서 몇 번이고 만났 고 긴밀하게 앞일을 상의했다는 사이였으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말야.
“…그래, 그래. 유준 군은 대교 양에게 그럴 줄 알았어. 저 친구, 보기엔 저래도 꽤……….”
“큼. 흠!”
“아… 벌써 나왔는가?”
닥터 제이는 날 돌아보더니 빙글거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후훗~ 우리 유준군은 정말이지 공사가 다망한 인생이로군. 이젠 자신의 칼을 위해서 이런 곳까지 왕림하고 말이야.”
훗.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저야 뭐, 원래 팔자가 그렇다 치고… 그러시는 분은 또 이런 곳에 웬일이신 거죠?”
“흐후. 몰랐겠지만, 저 양반이 바로 나의 오랜 옛친구라네.”
으음. 정글이 아버님은 대체.
“아, 자네가 조담놈이라고 부르는 13호. 그 아이의 칼도 저 양반이 만들어 준 거야. 내가 얼마간 졸랐더니 짜증내면서 대충 만들어 던져준 거지 만・・・ 그래도 자네의 정글도 말고는 상대할 만한 칼을 찾기 어려울 걸?”
역시 그랬군. 하여간, 칼 만들기의 그야말로 신의 손이란 얘기네.
“어쨌든, 그 옛친구라는 말은 다른 자도 하던데요?”
“음… 산 아래에서 만난 사도 디가 그렇게 말하던가? 그럼 그건 날 말하는 거야. 디는 항상 나를 동등한 존재로 대접해주곤 했지. 다른 시건방지 고 개념 없는 사도들과 달리 말야.”
원판은 자신과 닥터 제이가 각각 한 명씩의 사도를 직접 접한 적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게 오늘 우리도 만난 디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간단히 정리하지. 난 옛 친구의 임종을 보기 위해 그랜드캐넌의 지하에서 기어나왔고 그걸 눈치챈 디가 날 찾아온 거야. 디도 나의 진짜 오랜 친 구 ‘광염’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지.”
저 무명이지만 놀라운 명장의 천년 전 이름(혹은 호?)이 ‘광염’인 건가..? 음, 그건 일단 어쨌든…. 전후 사정은, 대충 그런 거였군. 그래서 디가 ‘옛 친구 닥터 제이’와의 재회를 나에게 양보했던 거였어. 자신들이 닥터 제이의 생존을 안다고 해도 해치지 않겠다는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야. “유준… 자네는 ‘환생’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지?”
“뭐… 어느 정도 그렇기는 한데, 그건 환생이 같은 인생의 반복이라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 때문에 그런 거죠. 그동안 실감하지 못해서 그렇지, 환생 자체야 흔한(?) 우주의 섭리인 모양이고… 새로 태어나 새롭게 잘 사는 거라면 딱히 싫을 이유가 있나요.”
“그건 나도 동감일세. 하지만 광염⋯ 저 양반은 말이야. 새로운 인생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끝내 거부했어.”
으음… 광염 어르신은 일찌감치 전생의 기억을 되살렸다는 얘긴 거 같군. 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 얘기는 그저 가십이든 진실이든 종종 신문에까지 나오긴 하지.
“난 사실 저 양반이 그… 홍씨 집안의 아가씨와 맺어졌을 때… 그녀와의 만남으로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 있길 바랐어. 하지만… 그 아리따운 홍씨 아가씨의 사랑도 결국 저 양반의 불과 쇠에 대한 집착을 막을 수는 없더군. 하긴・・・ 그러니 ‘광염’이겠지만 말이야.”
난 물론 광염 어르신의 이 시대 이름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 ‘그 분’ 정도로만 칭해 온 건 어쩐지 몽몽이 알려준 공식적인(?) 이름으로 어르신 을 칭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들인 홍정훈 명인이 집안의 호적에 잘 올라 있는 것과 달리, 본인의 이름은 이미 오래 전에 지워져 있다는 것부터… 평생 철저히 사람들의 이목 을 피해 야인으로 지냈다는 얘기… 전생에 만들었던 정글이에 대한 놀라운 애착도 그렇고. 왠지 광염 어르신은 본인 스스로 이 시대의 자신을 부 정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거군. 아, 근데 참.
“그럼… 닥터 제이, 당신은 저 어른신을 어떻게 처음 알게 된 거죠?”
“그건 그냥 우연이었어. 허약한 나대신 칼질 좀 해줄… 나름 제자에게 선물할 칼이 필요하긴 했지만… 설마 저런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물론 그 인연이 이렇게 질기게 길어질 거라는 것도 처음엔 알 수 없었지.”
우연… 우연이라…! 흐으으음. 나와 정글도, 나와 닥터 제이, 닥터 제이와 광염 어르신 모두의 인연은 어떻게든 얽히게 설계(?)되어 있었던 걸 까…? 타임 씨인지 뭔지 모를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
“음… 이 정도면 대충 상황 설명은 된 것 같군.”
“…네, 뭐. 말 그대로 대충은요.”
“내가 어떻게 그 깊은 지하에서 나올 수 있었는가는 궁금하지 않은가? 프리메이슨조차 몇 년 동안 힘겹게 파헤쳐야 할 곳에서 말이지.”
“그야, 뭐. 미리 알아서 어딘가에 비밀 통로를 뚫어 놓으셨었겠죠. 진짜 아무 대책 없이 자신을 가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후후. 과연… 학습의 효과가 좋은 것 같군. 아니 그 정도는 원래 쉬운 문제였으려나?”
“당근이죠.”
“음・・・ 그럼 말이야. 지금 12인의 디가 왜 날 추적해왔는지도 짐작할 수 있겠는가? 물론, 자네라면 벌써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
이 양반, 또 선생님 투로 나오시는군.
“음… 일단, 오늘 일만 봐도 한 가지는 알 수 있겠네요. 몽몽 말로는, 프리메이슨의 최고 대빵이 쓸 정도로… 거기 연구진 떼거지가 노력해서 만들 어냈을 신형 장비보다도, 지금 닥터 제이가 쓰고 있는 장비가 더 낫다고 하더군요. 내가 프리메이슨 대빵이었다고 해도 이런 인재는 어떻게든 다시 확보하고 싶었겠죠. 성격은.. 뭐, 일단 그렇다 치고요.”
새삼 성격을 짚고 넘어가자 닥터 제이는 잠시 큭큭 대고 웃었다.
“…맞아. 내가 좀 삐딱한 구석이 있긴 하지. 후후. 그거야 어쨌든 일단 70점 정도… 후한 점수를 주지.”
“쳇. 나머지 30점은요?”
…쯧. 무심결에 학생모드로(?) 동조하고 말았다.
“그건… 아, 그 전에 디는 혼자 왔던가? 일행이 있진 않고?”
이 양반, 자신을 추적해 온 상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적도 없는 건가? 아, 암튼.
“웬 소년. 필립이라는 아이와 함께 있던데요?”
“소년・・・ 필립?”
닥터 제이의 안색이 아주 미미하게 굳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곧 도리어 씨이익- 흡족한 미소를 띄웠다.
“그렇게 나왔다 이거군. 벌써부터 히든카드를 꺼내 드는 걸 보면 역시 자네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야. 아하핫핫~!”
닥터 제이는 디와 필립이 면회(?)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산 아래를 보며 즐겁게 웃어댔다.
“…잠깐만. 나름 칭찬은 고마운데요. 그 필립이란 아이가 12인의 사도가 ‘히든카드’로 쓸 정도라고요? 그럼 대체 어떤 능력을 가진 아이인 거죠?” 닥터 제이는 문득 웃음을 멈추더니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흐음. 전혀 감을 잡지 못하겠던가? 어, 그래. 대교 양도 마찬가지였고?”
닥터 제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천하의 대교가 드물게 기가 죽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다.
“유준 오라버니께서 모르시는데, 저야 뭐…………….”
“하핫. 그토록 아득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대교 양은 여전하군. 뭐, 그래도 조금은 변한 것 같고, 호칭도 발전했네. 전에는 유준 군의 이름을 입에 담 는 것조차 어려워………….”
“그, 그게 어때서요!”
“아니 뭐,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고… 훗. 유준 군도 계속 분발해야겠어. 이렇게 세상 누구보다 자신을 경외하는 짝지와 함께하려면.. 음?”
닥터 제이가 말을 멈춘 것은 어느 결에 청명검이 뽑혀져 그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발…이라니요? 그 말씀은 현재의 오라버니가 부족하단 뜻?”
“아, 아니, 꼭 그런 뜻이라기보다…………..”
닥터 제이는 결국 나에게 고개를 돌려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나도 꽤 민망한 상태라 끼어들기가 멋쩍었다.
“저기. 대교, 좀 진정하는 게 어떨까?”
“아, 제가 그만…….”
대교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청명검을 물리자, 닥터 제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자. 다시 묻지.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나, 그 필립에게서?”
“…그을쎄요? 사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전투력에 관련된 특수능력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애가 인상이 너무 어 둡고 그런 거 같아서…………….”
난 나와 필립 사이에서 오갔던 대화를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닥터 제이는 참을 수 없이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큭큭거리고 웃었다.
“…뭡니까! 그 녀석도 표정이 좀 이상한 거 같더니………….”
“크핫핫~! 그럴 만도 하지! 핫핫! 귀엽다고? 그 녀석에게 그렇게 말해줬단 말이지? 아하핫핫~!”
원판처럼 음흉 계열의 남자답게 어느 때고 기분 나쁜 쪼갬만 있을 뿐, 통쾌하게 웃는 모습은 보인 일이 없던 닥터 제이였다. 그런 남자가 모처럼 보 이는 모습이라 난 잠시 말없이 기다려주며 관람(?) 했다.
…음. 얼마 가지 않아 알아서 멈추는군. 그리고 약간 겸연쩍어 하는 듯하다가 헛기침. “크흠! ・・・미안. 요즘 웃을 만한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약간 오버한 거 같군.”
“뭐, 그건 됐고요. 아무래도 그 녀석이 제 생각보다 대단한 거물인가 보네요?”
“그래. 그 귀여운 꼬마 역시 12인의 사도 중 1인이야.”
…에?
“프리메이슨 최고위 서열 33도의 사도이자, 가장 호전적이면서도 음울하고 괴팍한 성향으로 유명하지. 자네에게 야단을 맞은 꼬마가 말이야. 핫! 핫!”
“자, 잠깐만요! 그 녀석은 ‘제3의 눈’ 인가 하는 장식의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는데요?”
물론 그게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반지 따위야 얼마든지 감출 수 있을테니 말이다.
“어.. 어쨌든, 이건 좀……………”
“대체할 육체 따윈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들이야. 왜 어린아이의 육체만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이런 가능성은 또 어떤가, 처음부터 12인의 사도가 될 능력과 자격을 갖춘 채 태어난 아이..! 그런 생각들은 전혀 안 해봤던 건가?”
…쳇!
“거, 뭐, 그런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죠!”
좀 애매하게 고집을 부리는 듯도 했지만, 그렇다고 막연하게 반발한 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딱 보니까 어린 애 같은데 어쩝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해야죠, 뭐.”
나의 항변에 닥터 제이는 문득 웃음기를 지우고 있었다.
“…그런가? 직접 대면한 자네가 그렇게 느꼈단 말이지?”
이 양반, 이번엔 또 왜 갑자기 묵직한 기색을 보이고 그래?
“직관력… 소위 찍기의 귀재인 자네의 찍기라면, 일단 믿어도 되겠지.”
묵직하단 표현, 취소.
“훗. 그래. 자네와의 만남은 아무래도 그 필립 소년의 마음을 한층 더 굳힐 가능성이 높겠어. 아직 대세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도… 이런 요 소 하나 하나가 모여 판도에 영향을…………….”
“…대교!”
역시 이심전심..! 그냥 부르기만 했음에도 대교는 즉각 청명검을 뽑아 닥터 제이를 겨누었다.
“혼잣말은 그만! 오라버니께 제대로 설명해주세요!”
“알기 쉽게 요점정리!”
대교와 난 연이어 협박(?)했고, 닥터 제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극적이기 시작했다.
“어~ 사실은 프리메이슨에서 날 찾는 건 말이지, 단순히 다시 돌아와서 예전 일을 해달라는 게 아니야.”
닥터 제이는 다시 산아래 쪽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나에게… 사도의 자리를 주겠다는 거지.”
에…? 이건 또 웬 돌발 상황? 조직을 배신하고 짱박혀서 뒤통수치기를 노리고 있는 사람에게 조직의 최고 자리를 주겠다고…? 프리메이슨이 정말 그렇게 나왔다는 거야? 그게… 물론 닥터 제이에게선 항상 원판처럼 음흉한 악당 보스의 포스가 풍기기는 했지만……………
“진짜…요?”
결국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 내가 직접 디나 필립에게 물어 본 건 아니라네.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는 거지.”
닥터 제이는 얄미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양반의 ‘아마’는 ‘정답’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이 양반과 원판 같은 스타일들은 ‘계산 완료’가 되어야 말을 꺼내. 말은 저래도 결국 확실하다는 건데…
“그리고 필립 말인데, 사실은 자네가 본 모습이야말로 그 꼬마의 진면목이 맞을 거라네.”
응…? 어린 육체로 바꾼 게 아니라 본래 어린아이라고?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아, 그리고 그럼… 진짜 그 나이에 사도가 된 원판 급, 혹은 그 이상의 천재라는 얘기?
“세계정화재단’이라는 곳은 기억하지?”
“예? 아, 예… 당연히.”
뭐야. 원판이 아니라 그 쪽 계열이었어?
“그곳의 한국 지부장에게 듣기로는… 마계(魔界)의 깊은 하층부, 혹은 또 다른 어떤 미지의 차원일 수도 있는 곳의 고대 악마와도 소통이 가능한… 전무후무한 특이 영매체질이라고 하더군. 프리메이슨 내부에서도 녀석의 천재적인 두뇌와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는 고대의 악마에게서 얻 어낸 것이라는 소문이 있기도 하고 말야.”
…천재적인 두뇌는 그렇다 치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아까 그 순박한(?) 꼬마가?
“그런데, 그렇게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세계를 혼자 보고 있어서일까? 모든 일에 부정적인 염세 성향이 너무 강한 게 탈이라고 하지. 난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네만.. 워낙 세상의 모든 존재와 자기 자신마저 사랑할 줄 모르는 녀석이다보니… 앞으로 영원에 가깝게 살아 갈 예정인 12인의 사도로 서의 인생을 오히려 거부하게 된 것 같더군.”
…거참. 분명 무지하게 특이하고 기구한 운명을 가진 녀석인 건 알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세상 살 재미가 없다’고 하는 건 좀…………
“그리고・・・ 12인의 사도는 일단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본인조차 마음대로 자리를 떠나지 못해. 놈들은 12라는 숫자에 큰 의미를 두고 집착하기 때 문에 공석이 있는 걸 용납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오늘 필립이 온 건 닥터 제이께 자신의 자리를 이어 받아달라는… 그런 요청을 하기 위해서라는 거군요.”
“훗~ 나의 ‘찍기’도 유준군의 찍기처럼 적중률이 높다면… 그럴 거라는 거라네.”
찍기…? 이 양반은 오늘 프리메이슨의 사도 두 명의 추적을 받으면서도 단신으로 여기까지 왔어. 육체적인 능력은 일반인 수준에 불과한 양반이 니, 어디까지나 저 음흉무쌍한 머리로 추적자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예측하여 그 허를 찌르는 것만으로 그런 행적이 가능했다는 거야. 그런 양반이 불확실한 짐작뿐의 얘기를 할 리가 없지. 그렇다면 이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작전에 이용할지.. 어? 잠깐?
“프리메이슨은 사도들의 자리에 공석이 있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죠? 근데 지금 12인의 사도에는 공석이 하나 더 있잖아요. 내가 해치운 ‘엘’의 자리 말이에요. 그건 어떻게 된 거죠? 설마 그 자리도 이미 채워져 있는 거예요?”
“후후훗~ 아직도 모르겠나?”
“예?”
“필립스L 크래프트! 그게 그 꼬마의 풀 네임이라네.”
응?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 아니라! 엘! 엘이라고? 내가 죽인 엘이 그 꼬마라고? 뭐야 이거!
난 놀라서 잠시 멍할 정도였지만, 곧 무심결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기억하는 엘과 오늘 만난 꼬마 필립은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금발 미남 배우가 연상될 정도의 용모를 가진 30대 남자와 일견 특이하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의 꼬마 아이라는 그런 외모의 차 이점 때문만이 아니야. 엘과 필립은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느낌이었어. 게다가……………
사도들에게 스페어 육체가 있을 가능성은, 닥터 제이의 경우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육체의 성장속도나 여하간의 변형 또한 너무나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영혼의 이전’이 전재가 되었을 경우이다.
그래… 그 당시 내 정글도는 분명히 엘을 찔렀고… 천지파멸식의 치명적인 파괴적 에너지는… 분명 엘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 ‘영혼’까지도 말살했 어…! 난 그걸 너무나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 그러니까. 엘의 영혼과 지금 필립의 영혼이 동일 할 수는 없는 거야!
“…쳇. 또 공연히 헷갈리게 말하깁니까?”
나의 항의에 닥터 제이는 얄밉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때 내가 해치운 엘은 꼬마 엘의 꼭두각시, 가짜, 혹은 짝퉁・・・ 그런 거였다는 얘기죠?”
“후후. 맞아. 그런 거지. 뭐… 그렇다고 그때 자네가 적을 착각 한 것도 아니라네. 엄밀히 말하면 그저 대리인에 불과한 자였던 거지만… 진짜 엘이 전권을 넘기고 은둔해 있는 사이, 그 가짜 엘이 독단적으로 자네들을 괴롭혔던 것이 사실이니까 말야. 또한, 자네가 그 가짜만을 ‘진짜 적’으로 인식 했다는 건… 진짜 꼬마 엘은 오히려 그만큼 자네에게 적대감이 없다는 반증일 것이고………….”
닥터 제이는 다시 산 아래의 필립 쪽으로 보며 쿡, 웃었다.
“하여간 재미있는 꼬마일세. 자네들을 괴롭혔던 가짜의 인성도 분명 꼬마의 인성이 반영된 것일텐데 그게 사도 꼬마의 장래 희망이었다니 말 야.”
웬 장래 희망…? 필립이 어른이 되었을 때의 자기 모습을 예상해 본 다음 가짜를 그에 맞게 세뇌시켜 놓았을 거라는 얘긴가?
“…글쎄요. 그 부분은 별로 공감이 안 되지만.. 암튼! 그래서, 그럼 이제 어쩌실 거죠? 진짜 엘의 자리를 넘겨받으실 건가요?”
“…앞으로 내가 어째야 할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에이. 이 양반, 자꾸 왜 나한테 묻고 그래? 자기 계획은 이미 다 수립되어 있을 거면서 괜히…………
“난, 이제부터 자네의 뜻에 전적으로 따를 생각이네.”
에?
“나도 물론 처음엔 쉽게 끝날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오랜 준비 끝에 그 깊은 지하에 들어가는 길을 택했었던 거고 말이야. 하지만… 지난번에 여기 대교양의 계획이 멋지게 맞아떨어지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지 않은가.”
그야… 12인의 사도 놈들이 우릴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 화해 요청과 아부(?)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긴 한데……
“이제 멀지 않은 시기에 이루어 질 거야. 우리와 프리메이슨과의 최후의 승부가………!”
으음. 원판도 분명 그런 눈치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
“다시 말해, 이제 슬슬 지휘부의 통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거라네. 난 물론 우리 유준 군 지휘 아래 들어갈 생각인 거고.”
“유준 군. 우리 반 프리메이슨 연합’의 ‘두목’으로서… 나에게 명령을 내려주게. 난 그에 충실히 따르겠네.”
…쯧. 원판과 함께 나만 모르는 온갖 음모를 꾸미는 사람 같아서 불쾌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나오시니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하네…………?
닥터 제이는 이미 적들에게 ‘생존’이 알려진 것 같으니, 원판과 나의 중간 역할도 어려워 질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직접 사도의 신분이 되어 내부 에서부터 조직을 무너트리는 역할을 맡아주는 게 훨씬 유용해 보인다.
하지만 그럴 경우, 이 양반의 안전은..? 전과 달리, 지금은 놈들도 닥터 제이가 배신자이며 우리 편이라는 사실을 뻔히 안다고 봐야 해. 놈들이 지금 닥터 제이를 영입하려는 것도 결국은 닥터 제이를 인질화 하려는 건지도 모르는데 공연히 아,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일단 사도가 되기만 하 면, 닥터 제이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자기 세력을 키울 수도 있지 않으려나…? 본래 사도들은 각각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다가, 진짜 엘… 필립이가 닥터 제이를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이라는 보장을 누가 해? 그게… 난 물론 꼬마 필립이 나름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달랑 한 번 본 녀석을 믿고 함부로 일을 진행할 수는… 젠장! 역시 두목질도 쉬운 게 아니야! 게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친척 어른이시기까지 한 사람에게 위험한 명령을 내린다는 건… 으~ 몰라! 나 안 해! 안 하는 건, 안 하는 건데… 음…? 그래도 이런 기회에 실속(?)은 좀 챙기는 게 좋으 려나…………?
“그, 뭐시냐. 그럼 이제 뭐든 다 내가 묻는 대로 숨김없이 대답해주는 것도 포함되는 거겠죠?”
“물론이지. 아, 그래도 원판… 하운 군의 독자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건 미리 밝혀 두어야겠군.”
“뭡니까? 가장 궁금한 건 그거였는데!”
“뭐, 당연히 나의 추측은 말해 줄 수가 있긴 하네만.. 그건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군. 나도 하운 군의 진의를 읽는 건 별로 자신이 없어서 말야.” 이런, 이런… 결국 실속 챙기기도 실패인가? 그렇다면……………
“에이~ 그럼 뭐, 별로 쓸모도 없네. 그렇다고 쌈을 쓸 만하게 하시는 것도 아니고………….”
난 약간 툴툴거리며 대교를 돌아보았고, 대교도 짐짓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 너무 그러지들 말게나. 나도 알고 보면 꽤 쓸 데가 많은 남자라구.”
“그을쎄요?”
“어허~ 한 번 써보고 얘기하게. 아니, 당장 몽몽 군도 놀랄 만한 장비를 선보여 줘볼까?”
“됐구요. 그리고 지금은 아무래도 일이 더 복잡해지는 것도 싫고 하니까, 그냥 프리메이슨으로 돌아가지만 마시라는 거, 이게 나의 첫 번째 ‘명 령’입니다. 음… 뭐, 그래도 당분간 밥은 먹여 드릴게요. 됐죠?”
“내참. 이거 정말 너무 하는구먼. 이래뵈도 옛 조직도 잊지 못해 다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는 사람에게…………”
“훗. 그러게 누가 제 명령에 따르는 처지를 자처하시랍니까? 아… 그리고, 그 흰 가운은 무슨 유니폼이에요? 만화 같은 데서나 그런 가운을 입고 ‘난 박사 캐릭터다’ 하고 광고하는 거지, 현실에서 누가 항상 그러고 다닙니까?”
“아니, 난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이게 가장 편해서………….”
“그래도 그렇지, 빨아 입고는 다니시던가. 그거 설마 지난번에 나 만났을 때 이후로 계속 같은 가운인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 오늘로 겨우 나흘째………….”
“아~ 그럴 줄 알았어. 이따 집에 가면 바로 벗어 주세요. 가다가 딴 옷도 좀 사시고요.”
“저기, 난 다른 옷은 잘 적응이….”
“다른 이유보다, 그 복장으로 가게 보면 사람들이 슈퍼가 아니라 보건소인 줄 알 거 같아서 그래요.”
“…가게?”
“예. 계속 봐주시라는 건 아니고, 며칠만 나하고 교대로 하시면 되요. 우리 부모님 두 분 다, 지금 여행 중이시거든요.”
천하의 닥터 제이도 결국 공연히 땅바닥의 돌멩이를 툭툭 차며 ‘아놔~ 젠장. 이렇게 조카에게 괄시받을 줄 알았으면… 그냥 계속 지하기지에서 플
로라(이모님 미국 이름이자, 지하기지 메인 컴퓨터 이름)와 놀고 있을 걸 그랬네’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리 가게는… 비록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슈퍼지만, 그 카운터의 멤버는 갈수록 화려해지겠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