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48화 : 광염(狂炎)속에서.
8. 광염(狂炎)속에서.
난 당장 중요한 사항들은 체크가 끝났다는 판단과 함께 대장간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나와 닥터 제이의 대화가 그리 짧지 않았었는데도 대장 간 안의 상황은 특별한 변화가 없어 보였다. 광염 어르신은 여전히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무릎 위의 정글이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간간이 새어나오던 광염 어르신의 혼잣말(?)이 지금은 들리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다정한 대화가 오고가는 듯한 분위기지…? 나에겐 정글이 녀석의 감정이 계속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는데… 음… 구체적으로는 모르겠네. 그냥 기뻐하고 있다는 것만 알겠어. 역시 정글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저 어르신밖에 없을 것 같… 아, 가만?
“전에 우리가 정글도를 처음 발견했을 때, 손잡이에 ‘광협객’이라는 글귀만 새겨져 있었어요. 보통의 경우는 만든 사람이 자기 이름이나 칼의 이 름, 혹은 좋아하는 글귀를 새겨 넣지 않나요?”
나는 닥터 제이를 돌아보며 진짜 궁금한 것을 물었다.
“강호에서는 풍운진패도(風雲震霸刀)… 난 그냥 정글도…라고 막 불러오긴 했는데, 녀석의 진짜 이름은 뭐죠?”
“자네 칼의 진짜 이름……?”
닥터 제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피식 웃었다.
“애초에 그런 건 없다네. 광염, 저 양반은 자기 자신의 이름에도 관심이 없어서 잊고 사는데 자신의 분신이라고 다를까. 다만 자신처럼 뭔가에 미 쳐서 재미있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곤 했지.”
으으음. 알면 알수록 정말 정글이를 친자식처럼 생각한다는 느낌이 드는군.
“그거 아는가? 패도광협이 스스로 미칠 광자를 자신에게 부여한 이유가 바로 저 양반의 영향이라는 걸 말야.”
“에? 진짜요?”
“후후~ 그래. 광염은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조차 극도로 싫어해서 패도와 연옥서생은 그에 관한 일을 입 밖에 내지도,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 았지. 하지만 그들은 연옥도에서 분명 함께 지냈었다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 형제가 오기 전에 이미 광염이 먼저 연옥도에 ‘표류’해 왔었다고 하 더군.”
아… 그랬었던 건가? 각각의 유물과 터를 분석한 몽몽도 비슷한 시기일 거라고 하긴 했었지만, 만났다는 기록이 없어서 광염 어르신이 조금 먼저 돌아가시며 정글이만 남겼나 했더니…
“애초에 패도광협도 열정적인 성향이 있기는 했지. 하지만 저 광염을 만나 진짜 제대로 뭔가에 미친 인간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자신이 가야 할 길에 확신을 더 했던 거야. 자신도 무공에, 중원의 백성들을 구하는 일에 미쳐 보자. 그렇게 결심하게 된 거지. 아, 물론 광염에게 당시의 상황 을 들은… 나의 추측, 찍기라네.”
…훗. 이 양반, 이제 대놓고 자신의 추측을 ‘사실’처럼 얘기하시는군. 하긴 나도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네. 패도광협 선배의 일화와 언행을 가 만 살펴보면… 정파나 사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미쳤다’고 할 만큼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 타고나길 광염 어르신과 닮은꼴은 연옥서생 사부 쪽이랄까・・・・・・?
그랬다. 연옥서생 사부가 만든 생사금마도결(生死金魔刀訣)만 봐도, 지금 그걸 쓰고 있는 내가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곤 한다. 얼마나 무공에 미치 고, 미칠 듯 즐기는 사람이 만든 칼질 법(?)인지를 말이다.
“아, 그러니까 말이야. 자네의 칼은 이제 주인인 자네, 유준 군이 부르는 이름이 곧 진짜 이름인 거야.”
닥터 제이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날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아직 칼에 이름을 붙이지 않은 모양이더군.”
“예? 어, 그, 그게…………”
“정글도라는 건 비슷한 형태의 칼을 지칭하는 단어이니… 음. 따로 생각해둔 이름은 있겠지?”
에구구. 따로 생각해두기는커녕, 이젠 그냥 정글도가 이름처럼 입에 배어버렸는데 어쩐다? 어쩌냐, 정글아… 미안!
“아니, 아니 유준 군의 작명 센스는 아무리 내가 자네 편이라도 봐주기 어려울 때가 많기는 해.”
윽! 이 양반이, 그 무슨.. 으~ 하지만 솔직히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하지만, 대교 양이라면 좀 다르겠지?”
닥터제이가 자신을 돌아보자 대교는 흠칫 놀라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자네가 생각한 이름이라면 유준 군도 군말이 있을 수 없을 거야. 자네의 월명검과 짝인 도이니 뭔가 생각해본 적이 있겠지? 응?”
“아… 전 그냥, 오라버니 뜻에…..”
“어허~ 뭐 이런 일에까지 그리 순정적인가. 그냥 자네의 의견을 말해보는 건데 뭐.”
“으, 음… 전 다만, 예전에… 유준 오라버니께서 정파를 비롯한 강호를 평정하시라는 의미로… 정굴도(正屈刀)라고만…
“…됐네. 자네도 별 수 없군.”
나름 모욕을 당했음에도,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포옥 숙이는 대교.
닥터 제이, 이 양반…! 어째 알면서도 일부로 이러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섣불리 반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후후~ 사실, 이름이야 뭐 그리 중요하겠나. 유준 군이 정글이를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이 중요한 거지.”
…젠장. 역시 전부 눈치까고 있었어. 빨리 정글이에게 멋진 이름을 붙여 주던가 해야지, 원.
“…어쨌든, 고맙네.”
“예?”
“내 오랜 친구의 분신이… 결국 고유의 영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주인인 유준 군이 그만큼 그 아이를 단순한 칼로만 대하지 않았다는 증 거이지. 광염과 함께 나도 자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네.”
“어・・・ 그게, 아니, 뭐………….”
물론 내가 정글이를 나름 아끼긴 아꼈지만… 에고오- 이거, 괜히 더 민망하고… 정글이에게 왕창 미안하고 그러네.
난 지난 세월 정글도로 행한 수많은 만행(?)을 떠올리며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담부터 고기는 그냥 다른 걸로 구워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광염도 참, 어지간하군.”
닥터 제이는 새삼 대장간 안의 광염, 정글도 부자를 향해 웃었다.
“의학적으로는 꽤 오래 전에 천수를 다했다고 할 수도 있거늘… 오늘까지 버티고 기다려 기어이 자신의 자식과 재회하다니 말야.”
아…! 역시…………!
난 문득 광염 어르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정글도를 보수, 아니 치료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닥 터 제이는 광염 어르신과의 기억을 추억하는지 아련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으으음~ 어쩐다…? 난 지금의 시간을 당연히, 결코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냥 계속 기다려주고 싶어. 그렇지만 마냥 그러기에는 아무래도 상황 이 그리 편치 않으니…………
지금 이 산 아래에는 12인의 사도가 둘이나 버티고 있으며 그 호위병력들이 맑은 날의 별무리처럼 숲에 깔려 있는 중이다. 이제 나와 대교가 올라 온 후 꽤 시간이 지났고, 디와 필립이 더 언제까지 기다려줄지 알 수가 없었다.
현재까지의 분위기로는 사도들도 시비 걸 생각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과연 아무 소득도 없이 얌전하게 물러가 줄지는……………
“…음. 아무래도… 내가 움직일 시간이 된 것 같군.”
“예?”
“사도들은 대부분 징그러울 정도로 참을성이 많지. 하지만 오랜 기다림은 곧 고집을 낳기도 하니 더 늦기 전에 내가 그들을 만나서 돌려보내야 겠다는 얘기라네.”
지금 내 마음을 읽은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모든 것은 계산대로’인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닥터 제이는 천천히 대장간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네.”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하며 망설임 없이 산 아래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목숨을 걸고 프리메이슨의 최고위 보스들을 설득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동네 친구들을 만나 잡담이나 하러 가는 정도로 보일 지경이었다.
나름 믿음직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혼자 보내기는 좀…………
난 대교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고, 대교는 곧 고개를 끄덕이고 닥터 제이를 따라 붙었다.
“허허~ 굳이 대교 양이 함께 가주지는 않아도 되는데…….”
말이 그렇지, 이 또한 예상하고 있었던 눈치인데, 뭐.
“이렇게… 달빛에 베인 듯 시린 밤에… 달빛의 이름을 가진 검과 소녀의 호위라… 제법 운치가 있구먼”
닥터 제이의 싯구를 읊조리는 듯한 음성과 함께 그의 흰 가운이 펄럭이며 휘적휘적 걷는 뒷모습도 어쩐지 옛 선비를 보는 것 같았다.
…쯧. 저 양반은 지난번에 한 번 죽었다가 스페어 육체로 되살아나면서, 이제 나와 몇 살 차이가 나지도 않아 보일 만큼 젊어진 용모인데… 속은 노땅 그대로이니 원.
꽃청년(?) 버전이지만 실상 노땅과 진짜 순수 꽃소녀 대교의 뒷모습이 점차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리로…………….”
에?
“이 안으로 들어오겠나, 젊은 친구.”
어… 광염 어른신이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조금 놀랬네.
난 곧바로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고, 광염 어르신은 어느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처럼 쇠약해진 모습과 달리 두 눈의 형형한 안광만은 화로의 불길 못지않았다.
이거 내가 혼자 남기를 기다렸다가 불러들인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은 오버…겠지?
“우선은…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군.”
“아니 뭐, 전 딱히 그럴 만한 일은…….”
“아니야. 이 아이에게 많은 일들을 전해 받았네. 운일・・・ 그 친구도 이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즐거움을 주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아이는 자네와 함께했던 최근 몇 년의 시간이 더 재미있었던 모양이야.”
오~ 정글이가 정말 그런 평가를…? 땡쓰~ 베리 마취! 마이 청클~! 음? 발음이 좀… 암튼.
“운일에겐 미안한 얘기라도 어쩔 수 없구먼. 이런 건 서로의 궁합 취향의 문제니까 말이야.”
이거,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정글이로 고기를 구워 먹어도 된다는… 으음. 나란 놈은 왜 자꾸 그런 생각을 먼저 하는 건지……………
“젊은 친구. 아니, 유준. 진유준.”
“아, 예, 어르신.”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자네는 이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자신이 단지 적을 베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겠는가?” “그야~ 뭐, 그래야…겠죠?”
나의 시원찮은(?) 대답에도 광염 어르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늙은이의 부탁 한 가지 들어줄 수 있겠는가?”
“……뭐든 말씀하십시오. 하지만 마지막이란 말은 좀…………….”
“아니, 내 수명은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 전에, 꼭 다시 한 번 이 아이를 만나… 예전… 뜨거운 불길 속에서 하나 하나 헤아 리듯… 나누고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 다시 한 번 그 속에서 함께 노닐고 싶었을 뿐…!”
…으으음. 난 뭔 얘긴지 잘 모르겠다. 대장간에서 쇠를 다루는 과정에… 쇠를 헤아려 칼을 만드는 그렇게 묘사될 만한 과정이 있는 건가? 아, 암튼. 이건 역시 마지막으로 정글이를 보수하고 싶다는 말씀인 것 같지…? 저 몸으로도 굳이 그러고 싶으시다면 나도 최대한 협조를 할 수밖에…………
“진유준…! 우릴 도와주겠나?”
“아… 예. 그러겠다고 방금……….”
응?
광염 어르신이 불현듯 정글도를 내밀어서 나도 모르게 받아 들고 말았다.
뭐…야…? 난 장작이든 숯이든 열심히 날라서 화로에 불때고… 뭐 그런 막노동 도와달라는 걸로 알았는데 설마 직접 망치질하는… 전문 분야까 지 나에게 맡기겠다는 정말 그런 거면 말도 안・・・ 어?
“고맙네.”
짧은 한 마디를 남긴 광염 어르신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있었다.
에, 에이~ 설마 설마… 진짜…? 멀쩡히 서서 얘기하던 분이… 어떻게 이런…………
난 지금 내가 광염 어르신의 ‘임종의 순간’을 보았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어르신의 몸이 뒤로 쓰러지고 있었기에, 다급하게 잡아 서 눕힐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이렇게 갑자기… 어이없이 가실 줄은… 어? 이, 이건………
바닥에 눕혀진 어르신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무언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시작되고 있을 뿐인 것 같은 느낌의, 분명히 화로 안의 그것과 같 은 색채와 느낌의 무언가였다.
자체 발화 현상…? 아, 아니야!
[주인님!]
몽몽의 다급한 경고와 함께, 나 역시 광염 어르신의 몸에서 화악-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불? 아니, 영혼? 아니, 불?!
알 수 없는 불길은(?) 맹렬하게 날 덮쳐오고 있었다.
윽! 이, 이 어르신 이제 보니!
내 전신은 삽시간에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분명히 엄청난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으며 그 열기에 눈앞의 모든 것이 흐릿하게 일렁였다. 그러 나 한편으로는 그 열기에 거부감이 생기지가 않았다.
불길에 타는 것이 아닌… 마치 내가 불길 자체가 되는 것 같은・・・ 그런 감각・・・・・・?
[주인님! 영체 침식에 대한 방어는 저보다 주인님 자신의 정신 에너지가 효과적……….]
“…됐어, 몽몽! 너의 방어도 풀어!”
[주인님?]
몽몽의 방어가 풀림과 동시에 광염 어르신의 불길은 본격적으로 나의 육체와 정신까지 불타오르게 하기 시작했다.
큭! 이, 이런… 거, 나, 무지 싫어. 하지만… 쳇! 노인네 마지막 소원이라니………
나는 차츰 더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젊은 시절의 어르신이 힘차게 망치질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미친 듯, 즐거운 듯, 격렬하게 춤추는 불길이 어르신과 어르신이 쥐고 있는 정글도를 함께 휘감아 돌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의식도 그 광염 속에서 서서히 녹아 들어가듯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아? 어…………?
문득, 그리고 서서히 정신이 들고 있었다.
대체… 내가 얼마나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 아, 아니, 지금도 아직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태로군.
내 눈앞에는 지금 건장한 체구의 젊은 남자가 보이고 있었다. 젊은 날의 광염 어르신이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낸 채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따앙~ 따앙- 땅- 땅-
경쾌한 소리…면서, 비교적 작고 짧은 패턴의 울림…! 그리고 저 만족스런 표정…! 이제 많이 사그러든 불길도 그렇고… 거의 마무리 단계 분위 기…? 그래서 불길에 삼켜졌었던 내 의식도 조금 돌아온 건가・・・・・・?
어쨌든, 아무래도 지난번에 정글도의 꿈(?) 속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난 이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함께 있으면서도, 제3자의 입장 에서 광염 어르신의 꿈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문득 마무리 망치질 장면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영화의 장면이 바뀌듯 시간을 건너뛴 상황이 보여지고 있었다.
저건・・・ 저 소년은…………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광염 어르신의 앞에 작은 소년이 서 있었다. 탄생 시켜준 사람과 똑같이 낡고 오래된 한복(?) 바지만을 입고 그 바지의 허리 아래까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소년이었다.
정글이…? 저 녀석, 이제 훨씬 더 많이 구체화 된 건가..? 아직은 얼굴 이목구비까지 뚜렷하게 보이는 건 아니지만… 으음. 저 녀석… 지금 또 울고 있군.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이 안쓰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정글이를 바라보는 광염 어르신의 표정에는 작별의 슬픔보다 더 큰 감정이 가득한 것 같았다.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자신의 분신, 자신의 아이에 대한 한없는 애정…! 그런 감정들이 이렇게 나에게까지 절절이 전해지는 건… 나도 아직은 저 어 르신의 불길 속이기 때문일까…?
“잘・・・ 있거라.”
광염 어르신이 건네는 인사에 정글이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팔뚝으로 자신의 눈가를 스윽 슥 문질러 닦아내는 건, 아버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소년의 태도였다. 짧은 시간에 부쩍 성장한 듯한 정글이의 모습에 왠지 나까지 뿌듯했다.
“또 언젠가 다시 보자구나.”
아….?
인사를 마친 어르신의 모습이 흐려지며 정글이 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사방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영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000
약간 당황하면서도 영상 중의 상당수에 보이는 아름다운 여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닥터 제이가 말했던 ‘아리따운 홍씨 아가씨’…? 어르신의 아내. 그리고 현재 은장도 명인의 어머니이신 건가? 아, 닥터 제이의 모습도 몇 군데 보이… 윽! 너무 정신없잖아, 이거!
엄청난 수의 영상들이 거의 동시에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올랐다 터지듯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으며, 그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 이거… 광염 어르신 생전의 … 모든 기억………….?
분명 그런 것 같기는 했으나, 너무나 많은 영상의 엄습 때문에 제대로 뭘 알아볼 정신이 없었다.
으~ 몇 가지 영상만 겨우… 으으으~
어지러운 영상의 홍수 속에 나의 의식도 빠르게 휩쓸려가고 있었다.
“끄으응~”
내 입에서 나오는 신음을 내 귀가 들었다.
그렇…다는 건, 정신이・・・ 이제야 제대로 드는… 윽! 젠장!
엄청난 중노동 알바를 뛴 다음 날 아침처럼 온몸의 묵직한 뻐근함이 쉽사리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조금 움직여 본 상체의 맨살에 닿은 거 친 느낌 때문에 더욱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쳇…! 나, 지금… 대자로 쓰러져 있는 상태・・・ 맞지? 게다가 어르신처럼 윗통까지 벗은.. 아니, 옷은 불에 타버린 건지도…………
광염 어르신과 정글도를 위해서 육체를 빌려 준 것은 당연히 나 자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졸지에 박수무당이 되어버린 것 같은 불쾌감도 상당했 다.
대장간 광염 귀신에 씌어 망치 들고 작두… 아니 불길을 탄 셈인가…? 에효오~ 이제 하다하다 별짓을 다해 보는구나.
[주인・・・님?]
“어, 그려 몽몽.”
[약 1분 25초 전, 코드명 광염의 영체 이탈이 확인되었습니다. 주인님의 신체 이상 징후는 아직 탐지되고 있지 않으며, 정신적 충격에 대한…………….] “됐어, 몽몽. 정신적 충격은 무슨…! 음. 난 진짜 까딱없으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대교.”
난 내 옆에 앉아 있는 대교를 돌아보며 안심하라는 의미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교는 몽몽의 점검이 끝나길 기다렸는지 조용히 내려다보고만 있 다가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지금 내 몸 위에 목까지 덮여 있는 담요는 울 대교가 덮어준 모양이었다.
솔직히 아직 쬐금 어지럽기는 하고, 몸도 아직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굳이 시시콜콜 얘기해서 대교가 걱정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암.
“걱정 하진 않았어요. 네… 다름 아닌 당신… 진유준이니까. 하지만………….”
초승달처럼 가늘어진 대교의 눈이 단지 웃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대교는 부끄러운 걸 감추듯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시 ‘다행이에요. 다행이에 요.’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날 믿는다고 하면서도 걱정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을 만도 했을 것 같군. 이건 적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혼자 귀신 들려서 넋 나간 모습을 보였던 거니 말야. 뭐, 이렇게… 나름 보람이 있는 일이긴 했지만……………
난 누운 채 고개만을 돌려, 아직도 약간의 불길이 후둑거리고 있는 화로 앞의 정글도를 보았다. 손잡이를 뺀 건지 타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순수한 쇠의 몸체만이 누워 있었다. 그 때문인지 더욱 처음 탄생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정글도의 금속 몸체가 깨끗한 본래의 상태가 된 것도 기쁘지만… 저 녀석의 영혼.. 우리 정글이의 영혼은… 훗. 녀석, 진짜 늠름하고 근사한 소년 으로 거듭났는걸?
“대교. 저 녀석.. 보여?”
대교가 고개를 들고 내 시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산발이라 얼굴은 다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꽤 샤프하고 생긴 녀석이란 건 알 수 있지? 지 아빠처럼 윗통을 벗고 바지만 걸친 모습 이 좀… 아니, 저것도 나름 잘 어울리기도.. 음. 근데 저 옛날(아마도 천년 전?)바지는 대체 어느 나라 건지 모르겠네. 디자인이 한국식인지 중국식 인지 애매…………
“저어 오라버니.”
“응?”
“죄송하지만, 제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요.”
어? 대교에게도 정글이의 영혼까지는 보이지 않는 건가?
[주인님. 정글도의 현재 염체는 저의 스캔에도 뚜렷한 형체로 구성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염의 소통’으로 연결된 주인님께만 인식되는 것으로 추 정됩니다.]
이런… 아직도 소위 ‘암호화된 신호만 발산하고 있는 거란 말이군.
“훗. 조금 아쉽네요. 저도 오라버니 말씀처럼 샤프하고 잘생긴 정글도 소년을 보고 싶었는데 말예요.”
“음… 당장은 하는 수 없지. 하지만 뭐, 대교가 나와 남도 아니고. 언젠가 너에게만은 녀석도 보이겠지, 뭐.”
한 손을 들어 대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어째 대교가 진심으로 많이 아쉬워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라도 당신과 같은 것을 볼 수 없는 건 싫지만………….”
응…? 이런, 이런 이 아가씬 그게 맘에 들지 않았던 거군.
“뭐어, 저도 언젠가 볼 수 있겠지요. 오라버니만큼 저도 정글도를 아끼고 진심으로 대한다면…………….”
“훗. 그러다가 너의 청명검이 질투하면?”
“후후~ 그럴 리가요. 이 검… 이 소녀도 틀림없이 정글도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어? 소녀? 청명검도 그럼……….”
그러나 대교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오라버니를 본받아 제 검을 ‘친구’로 대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아요. 하지만 언젠가는 이 소녀, 청명도 정글도처럼 성장하여 아름다운 소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흐으음~ 정말 그렇게 되면 칼 커플 탄생인가? 훗! 들었냐, 정글아? 곧 네 짝지도 생길 것 같다.”
약간 짓궂은 투로 물어 봤지만, 정글이 녀석은 암 생각 없다는 듯 뒷머리를 극적일 뿐이었다. 분명 업그레이드되어서 자아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의 ‘지능’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느껴졌으나, 아직은 ‘학습’이 되지 않아서 거의 백지 상태지 싶었다.
“음… 저 녀석, 자신의 몸(?)이 구체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이상한지… 손가락 하나 하나・・・ 팔다리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 주변도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난 정글이의 행동을 중계 방송해 주었고 대교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귀기울이고 있었다.
[…주인님. 대교님. 환담 중에 죄송합니다만………….]
응?
[화로의 화력에 의해 충전되어 있던 바닥의 열에너지가 80% 이상 소실되었습니다. 현재의 상태로는 주인님의 체온 유지가 어렵습니다. 빠른 의복 착용을 권고합니다.]
“어멋? 제가 깜박 오라버니의 상태를 잊고 그만!”
몽몽의 경고에 대교가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몽몽도 참, 아무리 아직 쌀쌀한 계절이고 윗통 좀 벗고 있기로서니, 대교와의 알콩달콩 시간을 방해할 것까지야………
난 가슴에서 멀어진 대교의 체온을 아쉬워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랏? 어째 상체 말고 아래까지 썰렁한 느낌이 으윽?!
몸에 덮여 있던 담요가 거침없이 미끄러져 내리면서 대교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저, 전, 모, 못, 못, 봤, 봤………….”
우쒸! 옷이 홀랑 다 탔으면 말을 해줄 것이지!
얼마 후.
“그러니까………….”
나는 새 전투화의 끈을 묶으며 물었다.
“내가 이 대장간으로 들어 온지, 벌써 하루… 정확히는 25시간 정도나 지났다 이거지?”
[예, 주인님.]
내참. 대장간 안은 물론이고 바깥도 어두워서 아직 날이 새지 않았나 했더니, 아예 한 바퀴 돌아서 다시 밤이 되었던 거였다니…………..
“그 사이 닥터 제이는 사도 디와 필립을… 별 문제없이 말빨 만으로 돌려보냈고 말이지?”
[그렇습니다. 산 아래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제하면, 30분 이내의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역시 닥터 제이..! 단편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12인의 사도들과 동급으로 놀 만한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한 셈이군.
[또한, 현재 바깥에서 대기 중인 병력은……….]
방금 신은 전투화는 물론이고, 평소와 똑같은 군복 바지를 포함한 옷까지 전부 구해다준 건 자룡대주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사도들과 만났을 때, 몽몽은 즉시 어사조를 호출했었다. 아마 어제 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 있었던 자룡대주와 은사마군이 먼저 도착했고, 그 다음으로 천음마군도 홍콩 에서 날아왔다고 한다.
다들 이미 사도들이 떠난 후에 도착했다지만, 그건 내가 오늘 수하들에게도 목적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왔었기 때문이지. 으음. 그보다……… “그럼. 다들 전부・・・ 봤겠네?”
내가 화로 앞에서 알몸으로 망치질하는 모습을… 으~ 젠장!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대장간에 도착한 대교님께서 재빨리 문을 막았기 때문에 목격자는 대교님뿐입니다.]
“그, 그래?”
에효~ 그나마 다행이었군. 그치만 결국 대교에게는 고스란히… 으흑~ 순결(?) 순박(?)한 나의 이미지에 너무나 치명적인 사건이었어.
[・・・주인님께선 계속 문 쪽으로부터 등을 돌린 자세였으며, 대교님 또한 애써 시선을 돌렸으므로 제대로 목격한 부분은 거의 없을 것으로 추
“돼, 됐어, 인마. 이제 그 얘긴 그만 하자.”
난 몽몽의 위로(?)를 끊고도 잠시 더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대장간을 나설 수 있었다. 출구에 문처럼 친(아마도 대교가) 담요를 걷으며 밖으로 나 가보니 자룡대주와 은사마군, 천음마군이 대장간 앞마당에 나란히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천주! 애병기의 재탄생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자룡대주가 대표로 포권하며 몸을 숙이자 마군들도 함께 인사하며 축하해주고 있었다.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음. 암튼, 땡쓰~ 땡쓰!”
내가 답례하며 가볍게 정글도를 들어 보이자 다들 숨김없는 감탄의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 하루 밤사이에 진짜 완전히 다른 칼이 된 것 같습니다! 전 천주께서 대장장이의 재능까지 가지신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정글도의 외형은 사실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거짓을 모르는 천음마군의 말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정글도가 단지 흠집만 제거된 것이 아닌, ‘변신’했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글도가 뿜어내는 기운의 규모가 달라진 것이다.
뭐, 정글이의 소년 모드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음. 근데, 정글이 녀석… 다른 사람들 앞에 나오니까 어느 사이 지 집(금속 몸체)으로 숨 어버렸네? 생각보다 낯을 가리는 성격인걸?
“…그런데 천주.”
“음. 왜, 자룡대주.”
“외람되지만… 조금 전, 실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으, 응? 왜, 왜?”
“천모께서・・・ 황급히 달려나와 어디론가 달려가시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대교도 참…! 그렇다고 뭔 도망을 다… 으음? 가만..? 오버하는 걸 보면 뭔가 보긴 본 건가…? 으~ 젠장.
“어. 그게, 그냥 내가 잠깐 뭔가 심부름을… 큼! 흠! 음… 나도 잠시 좀… 어, 미안. 다들 잠시만 대기하고 있어 줄래?”
“복명!”
“아참. CR애들은?”
“현재 위치의 주변에 경호대형으로 포진 중입니다.”
“어… 뭐, 이제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으니까, 다들 복귀 시켜서 다 같이 쉬고 있어.”
“복명!”
나는 고맙고 충실한 수하들을 뒤로 하고 부끄럼쟁이 대교가 숨어버렸다는 방향의 숲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교도 대교고… 사실, 빨리 혼자 실험을 해보고 싶었어. 조금 전에 다시 정글도를 잡았을 때 느낀・・・ 업그레이드판 정글이의 이… 아직은 미지에 가까운 힘…! 이건 어쩌면 나의 잃어버린 내공을 어느 정도 대신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몽몽. 지금의 정글도에서 측정되는 에너지가 분명 나의 본래 내공 못지않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주인님. 그러나 그것은 에너지 총량의 단순 비교일 뿐으로………….]
“알아. 내공과 정글이의 기운이 많이 다르다는 건 말야.”
그래. 현재 정글이의 엄청난 기운은 기존에 있던 패도광협 선배와 나의 ‘염’ 즉, 정신 에너지에 광염 어르신의 방대한 정신 에너지가 합쳐졌기 때문 이지. 정신 에너지를 내공처럼 쓰는 건 당연히 해본 적이 없.. 아니, 사실 정신 에너지라는 걸 이렇게 구체적으로 느껴 본 것조차 처음인 셈이야. 하 지만 그래도 왠지 뭔가 어찌어찌 될 것 같기도 한 건… 광염 어르신의 에너지가 정글이에게 전해질 때… 그 어르신과 나의 영혼이 겹쳐진(?) 상태 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말하자면 아주 남의 것 같지는 않은 느낌이랄까?
난 새삼 손안의 정글도와 정글이의 기운을 가늠해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흐음~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사방에서 CR들이 대장간 쪽으로 몰려가는 기척이 느껴지는군. 실수할지도 모를 연습을 애들에게 보이고 싶 지는 않으니까 다들 지나간 다음에 아, 잠깐.
“…몽몽. 닥터 제이는?”
[코드명 닥터 제이의 현재 위치는, 코드명 광염이 입원 중이었던 병원의 영안실로 확인되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이동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추정됩 니다.]
으음. 닥터 제이가 낮에 광염 어르신의 유해를 병원의 가족들에게 돌려주러 갔다는 보고는 들었었어. 하지만 아직까지 거기 머물러 있을 줄은 몰랐 는데… 옛 친구의 장례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모양이시군.
난 문득 광염 어르신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내가 미안해야 할 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광염 어르신의 가족들이 지금 그 어떤 경우보다 허망한 유해를 모시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광염 어르신의 유해에는 ‘고착화된 정신 에너지’가 없는 상태이니… 음. 이런 얘기에는 아무래도 몽몽 식의 표현이 어울 리지 않는 것 같군. 우리 어머니께서 불교 신자여서 나도 좀 주어들은 게 있으니 그쪽으로 생각해보면………
사람이 죽을 때, 혼(魂)은 육체를 떠나 하늘로 가도 백(魄. 고착화된 에너지?)은 육체에 남는다고 한다. 보통의 경우 그 백은 서서히 흩어져 사라지 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꽤 오래도록 유해에 남아 조상의 혼과 자손들을 연결하는 매개체 노릇을 한다고도 한다. 산소를 못 쓰고 잘 쓰는 것에 따라 자손들에게 흉행이 나타난다는 얘긴, 유해가 묻힌 땅의 기운에 영향을 받은 백의 작용이라는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광염 어르신의 백, 그 강대한 정신 에너지는 유해가 아니라 여기 이 정글도에 고스란히 옮겨져 있으니… 어르신의 진정한 산소는 바 로 이 정글도라고나 할까…………?
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새삼 정글도를 눈앞으로 들어 올려 보았다. 지금 정글도에 서린 기운의 파르스름한 빛은 내공이 집중 될 때의 달빛 닮은 빛 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귀기(氣), 도깨비불 같았다.
어찌 되었든, 이 기운..! 희대의 명인이 남겨 준 이 에너지를 그냥 썩힌다면, 그건 분명 너무나 아까운 노릇이야. 어떻게든.. 음. 우선은 이렇게 한 번 해볼까…………?
난 정글도를 다시 어깨에 걸치고 평소처럼 천천히 정글도로 비루 내공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의 내공과 정글도의 기운이 합쳐지는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며… 출도!
쉬익~!
윽? 에구머니나, 젠장!
원했던 결과는 고사하고, 난 그만 정글도를 놓쳐버렸다.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나간 정글도는 저만치 먼 풀숲으로 기운차게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에구구구..! 지금 정글도에 손잡이가 없다는 걸 깜박하고, 그만 평소의 감각으로… 에이 쒸!
이번에 광염 어르신이 정글도를 수리하느라고 손잡이를 빼냈는데, 원체 오래 되어 딱 붙은 목재라서 빼내며 아예 부셔버렸던 모양이었다.
빨리 손잡이부터 다시 만들어야… 응?
난 정글도를 주우러 가려던 동작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졌다. 꽤 먼 거리로 날아가서 찾을 일이 걱정일 정도였던 정글도가 불쑥 저 혼자(?) 날아올 랐던 것이다.
아핫! 정글이 저 녀석 좀 보게?
다시 모습을 드러낸 소년 정글이는 자기 본체인 정글도 위에 서서 마치 스케이트보드를 타듯 날렵한 모습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손 을 들어보이자 너무나 완벽하게 내 손안에 척! 복귀했다.
하하핫! 이거 이거 예상 밖의 상황인 걸?
자동으로 돌아온 것뿐이 아니었다. 스케이트보드와는 달리 정글도가 강하게 회전하면서 날아왔음에도 안전하게 손잡이 부분이 내 손아귀로 들어 온 것이다. 내가 평소에 정글도를 던져서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했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 녀석… 너, 그동안 나하고 놀던(?) 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거냐?”
정글이는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어쩐 건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막연하기만 했던 ‘신(新) 정글도’의 활용법을 단번에 알 게 된 것 같았다.
어쨌든. 일단, 기초부터(?) 확인해야겠지…………?
난 천천히 걸음을 떼며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다. 이번엔 얇은 쇠 손잡이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어쨌든 조금 전처럼 다시 내공을 주입하며 출도 준 비를 했다.
어디… 우리 정글이가 교과서(?) 몇 권까지 공부를 마쳤는지 한 번 볼까나?
다음 순간, 어두운 산길에는 내가 즐겨 쓰는 생사금마도결의 초식들이 연이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내공을 잃기 전과 거의 다름없는 위력으로!
얼마 후,
“좋아! 이번엔 아예 졸업시험… 월광절화결(月光切花訣), 참화지수(斬花之首)·
아, 아차차!
[주인님!]
이미 달빛이자 염화의 빛이 출수 되고 있었기에, 난 황급히 정글도를 틀어 각도를 바꿔야 했다.
부우우우-
오리지널 참화지수처럼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생성된 푸른 실선이 전방의 숲을 비스듬히 자르며 날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참화지수가 위로 지 나간 숲의 아래쪽에서 스윽- 작고 하얀 인형이 몸을 일으켰다.
“유준・・・ 오라버니?”
“어 그래. 나야, 대교.”
난 간만에 마음껏 생사금마도결을 펼치며 걷다보니, 부끄럼쟁이 대교가 숨어(?) 있는 곳에 거진 다 도착했다는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그거 혹시……”
“음. 맞아. 월광절화결의 참화지수였어. 놀라게 해서 미안.”
뭐, 내가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설마 끝까지 대교를 인식 못했겠는가마는…………
“아아~”
대교는 감격에 겨운 탄성과 함께 나는 듯 달려왔다.
“드디어 당신께서 무공을 내공을 되찾으신 건가요? 아~ 어떤! 대체 어떤 기연으로 이렇듯 갑자기………….”
“어.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예?”
“후후- 대교 너도 구분하기 힘들 만큼 오리지널과 똑같았던 모양이지? 나와 정글이의 퓨전 월광절화결이 말야.”
표현은 좀 그렇지만, 하여간 개념은 그랬다. 대교는 일순 실망하는 듯했지만, 곧 더 큰 호기심에 사로잡힌 표정이 되고 있었다.
“사실 내공을 되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도 있지. 아직은 정글이와 내가 함께. 그것도 정글이 위주로 초식을 펼칠 수 있는 상태인 거지 만… 곧 각각 역할을 분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아직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대교를 보며 웃었다.
“간단히 말해, 난 이 정글도를 나의 ‘단전’으로 만들 생각인 거야.”
그래 난 참 엉뚱한 곳에서 내 제2의 단전을 찾아낸 셈이지. 불과 쇠에 미친 남자의 미친 불꽃… 광염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