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5화 : 집으로
5 집으로
언제까지나 대교와 함께 옛 추억의 장소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당근, 현실상 말도 안 되는 바람이었기에 나와 대교는 청문회(?)가 시작된 후 한 시간 정도만에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릴게요.”
“나도 마찬가지요, 측백나무 형씨. 앞으로는 종종 놀러 오리다.”
대교는 내가 나무를 부르는 호칭에 풀썩 한 번 웃은 다음에야 경공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천년 측백나무의 가지가 잘 가라는 인사를 하듯 흔들렸 다…고 느낀 건 역시 기분 탓이겠지…………?
“자룡대주.”
나는 이륙을 시작한 헬기의 좌석에서 자룡대주를 불렀다.
“…아까 얘기했던 옛 건물 복원 전문가들 있잖아.”
“예, 천주.”
“좀 더 많이 ・・・ 그러니까, 최대한 많은 실력자들을 물색해줘.”
내가 너무 막연하게 얘기했나?
“아니, 복원해야 할 대상에 대한 정보가 먼저 필요하겠군. 곧 자료를 준비해서 줄 테지만, 우선 아까 내가 돌아본 ‘계곡 전체’라는 것만 알아둬.” “…비화곡 부활입니까?”
“그래. 자룡대주는 비화곡을 어느 정도나 알고 있지?”
“현재의 위치와 규모, 세세한 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적어도 비화곡이 옛날 중원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 해들은 바 있습니다. 당연히 천주께서 그 곳과 깊은 인연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하긴, 그랬겠군. 나 때문에 대부분의 지하무림이 비화곡과의 전쟁에 동원되었었으니 말이다.
“전설에선・・・ 당시 비화곡주의 의형(義兄)으로서 그의 복수를 끝낸 후, 차기 비화곡주의 자리를 마다하고 떠나셨다고 합니다만……….”
“약간 다르지만… 대충 비슷해. 사실 난 비화곡이 마음에 들었지만 어쩔 수없이 떠난 거였거든? 그래서……….”
…어? 잠깐. 미처 생각 못했던 문제가 있었구나. 비화곡과 지하 무림은 엄연히 다른 조직이었는데 지하무림을 동원해서 비화곡을 부활시킨다면 지 하무림인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드리려나…………?
“자룡대주님.”
내가 잠시 망설이자 옆자리의 대교가 나선다.
“부디 말씀을 놓아주세요, 천모(天母).”
오호? 다른 사람도 아닌, 자룡대주가 망설임 없이 대교를 천모라 칭한다?
아직도 나의 시간여행과 몽몽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대교의 경우는 달리 숨길 방법도,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기에 그냥 사실 그대로 모두에 게 알려준 상태이다. 단, 천년 전에 대교가 나와 헤어지게 된 사연은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라고 얼버무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인가? 천지파멸식을 발동했을 때의 인간 같지 않은 나를 보며 학을 뗀데다 ‘감당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진짜 대교의 출연이 겹쳐져서 자 룡대주의 심경에 큰 변화가 온 듯 싶은 걸?
“…아직. 저와 천주는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해요. 그러니 그런 호칭은 아직 타당하지 않아요.”
“예?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됩니다!”
어랏? 전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흥분까지?
“전의 제가 어떤 입장이었든, 두 분의 사연을 알게 된 이상 그런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같은 여자로서 납득할 수 가 없습니다.”
…으음. 역시 나의 첫 여제자. 뒤끝 없이 깔끔 상쾌하도다!
“…고마워요. 하지만 오래 미루는 건 아니에요. 추모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1년 정도의 기간을 두었을 뿐이에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대체 누구이기에 그럴까, 하고 의아해하는 표정의 자룡대주.
“그리고… 천주께선 현재 부상 중이시니 제가 어사조(御使組)를 맡아 호위를 총괄하기로 했어요.”
“알겠습니다, 천모. 아니, 지금부터 조장이라 칭해야겠군요.”
“그렇게 부탁해요.”
흐음. 확실히 다르다. 대교에 대한 눈곱만큼의 적대감이나 경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화곡 문제는 아직 이분도 세세한 모두를 결정해 놓은 것이 아니고, 그리 시간에 쫓기는 일도 아니에요. 천천히 준비해 주세요.”
“그리 알겠습니다. 신임 어사조장님.”
자룡대주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돌아서자 대교가 내 손을 잡아 내력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당신께선 여전히 수하들을 때로 지나치게 배려하고 생각해 주시는군요.
-내가 그랬나?
-그런 특별한 비화곡주, 그런 다정한 마군황이 전 너무 좋아요.
-어, 야아. 네가 자꾸 그러면 그게, 솔직히 좋긴 좋은데… 영 쑥쓰러워서………….
-이런 말들도 천년 동안이나 참아왔는걸요?
대교가 그 동안의 ‘한’ 을 풀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닭살 커플?
-그런데… 아직 포기하지 않았네요.
대교의 시선이 향한 방향에는………….
-설마 자룡대주 얘기야?
_같은 여자만이 느낄 수 있지요. 자룡대주는 아직도 당신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어요.
-그럴 리가…! 내가 보기엔 요번에 내가 천지파멸식 쓰는 걸 목격하고 아주 질려버린 것 같던데?
-천하의 당신께서도 여자의 마음은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사랑에 빠진 여자는 때로 공포심마저도 하나의 ‘두근거림’으로 오해를 하곤 한답니 다.
뭐시여. 이건 또 무슨 이론………?
현명한 여자인 만큼, 잠시 묻어 둘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다시 당신께로 향한 마음을 불태우게 될 거예요. 어쩌면 산불처럼 예고도 없이.
-나도 그 동안 여러모로 업그레이드를 했다만.. 넌 이제 아주 예언까지 하게 된 거냐?
-설마요. 그냥 그녀 말대로 우린 같은 여자이니 좀더 쉽게 감이 올 뿐이에요.
대교는 문득 배시시 웃는다.
—그러고 보니. 당신께서 무심결에 쓰시는 용어. ‘업그레이드’ 같은 말을 제가 자연스럽게 알아듣게 된 것이 왠지 신기하고 기뻐요.
그렇게 말하며 대교는 살며시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왔다. 나는 그런 대교의 체온을 음미하며 눈을 감으려고 했었다.
“이제 더는 안돼요~!”
윽, 소령이?
“언니하고 오빠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참았지만 이제 소령이는 더 못 참겠어.”
“야, 야. 뭐 어쩌려고? 어? 너희들까지?”
어느 사이 소교와 미령이까지 소령이 뒤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흐응~ 바로 이러려고 그러지욧!”
대뜸 달려든 소령이가 대교의 품에 안기며 꺄륵 소리를 냈다. 아예 대교의 무릎에 앉아버리며 언니야, 언니야를 연발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령 이에게 밀린 내가 어이없어 하는 가운데, 미령이도 입을 열었다.
“이제 잠시 우리 자매들에게도 시간을 주시겠어요. 유준 오빠?”
“야. 아까 이미 니들끼리도 요란하게 인사를 했었잖아.”
“아주 잠시였죠. 우리 자매들의 정을 너무 무시하지 말아주세요.”
말은 그랬지만 미령이의 입가에 머금어진 미소는 상당히 사악했다(?).
“…솔직히 눈 • 꼴·시·어·서·요.”
헛. 니들이 바로 ‘커플지옥 솔로천국’을 모토로 한 솔로부대 특수 공격대였냐?
난 계속되는 소령이의 몸부림(?) 어택과 미령이의 노골적인 말 스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이 아이들이 이렇게 짓궂을 줄은…………
대교가 난처하다는 듯, 그러나 결코 불쾌해하지 않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는 쩝 입맛을 다시며 녀석들이 온 녀석들의 자리로 쫓겨 갈 수밖에 없 었다. 그런 나에게 소교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전에 오해하고 쌀쌀맞게 대해서 죄송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요.”
“그, 뭐… 어쨌든, 넌 이제 좀 괜찮니?”
“…예. 저도 언젠가 유준 오빠처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요.”
얘도 자룡대주처럼 ‘정리한 듯한데 어째 좀’정도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평온해 보여서 내 마음까지도 한결 가벼워 지고 있었다.
으음. 근데………….
소령이의 재롱(?)과 미령이의 앙큼한 애교에 쌓여 행복해하는 대교를 보고 있자니, 새삼 저 두 마리 (?) 강아지와 고양이가 예비 처제들이라는 사 실이 실감나기 시작한다.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지? 뭐, 물론 어떻게고 뭐고 그냥 진행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거지만…………….
나는 지금 이대로 대교를 데리고 집에 갈 생각이고, 당근 대교를 부모님께 소개할 것이다. 내가 뜬금없이 신부감을 데리고 가는 것만으로도 부모님 께서 놀라 취침하실 지경일 텐데…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자취소녀들이 신부의 동생들이라고 하면 과연 부모님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시려 나・・・・・・?
「주인님.」
“음. 왜.”
「닥터 제이로부터의 연락입니다.」
뭐시라………? 그 양반이 먼저? 어쩐다? “…조금 있다가 내 쪽에서 연락한다고 해.” 「알겠습니다.」
으으음. 닥터 제이. 닥터 제이 그 양반………
내가 새삼 닥터 제이를 경계하게 된 것은 이번에 대교로부터 듣게 된 얘기 때문이었다.
“닥터 제이, 그 남자가 먼저 제게 말을 걸어 왔었어요.”
대교의 영혼을 볼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 어머니를 담당했던 의사선생께서는.
영혼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길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날 수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대교처럼 영혼임에도 오랜 수련을 했거나,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의지… 예를 들어 원한 같은 걸 품은 영혼이 모습을 드러내길 원했을 때나 실체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상태의 영혼을 볼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이 소위 ‘영능력자’ 라는 걸 의미한다.
물론 닥터 제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고, 그걸 지금까지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수상하다는 건 아니지. 그는 초창기의 몽몽처럼 자신 에 대한 걸 쉽게 알려주지 않겠다는 걸 이미 공언했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닥터 제이는 제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자,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알려주었지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와 상의했던 일들을 충실하게 수행해 주었지 만… 그래도 뭔가 수상한 점이 있는 사람이에요. 무엇보다… 당시 영혼 상태의 저조차 그가 프리메이슨의 일원이 되기 전의 일을 알아낼 수가 없었 “지요.”
프리메이슨에 들어가면서 과거의 혼적을 철저히 지웠다면 서류상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혼 상태의 대교가 몇 년 동안 조사를 했음에도 ‘그를 아는 누구도’ 찾아 낼 수 없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몽몽의 스캔으로는 성형 수술 같은 건 안 했다. 설마 아는 사람을 전부 죽여 없앴다…..? 아니, 그런 가정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아무리 조용히 살아온 사람이라도 자신의 얼굴만 아는 정도의 사람들까지 전부 죽이려 들면,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스무 살 초반(닥터 제이가 대교를 만났을 때의 추정 나이)이 되도록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모두를· …? 게다가 그 나이에 프리메이슨의 가장 중 요한 프로젝트를 맡을 정도의 천재가 그렇게 눈에 띄지 않고 살았었다고………?
“…젠장. 연결해.”
그래. 혼자 맷돌만 굴리는 것보다는 직접 부딪치는 것이 내 방식이지.
“하핫~! 축하하네, 유준 군.”
웃음을 앞세운 닥터 제이의 음성은 지극히 밝았다.
“드디어 그토록 염원하던 사랑을 찾았으니 지금 아주………….”
“저기요. 됐거든요?”
일단 약간의 시비조로 한 번 나가볼까?
“흐음. 이제 대교 양에게 모든 사실을 들어 알게 되었을 텐데 화를 내다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한 모양이로군.”
“당근. 게다가 당신한테는 특히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었는데 그게 전부 구라였다는데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까?”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자네는 내 말의 진위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파악하는 ‘훈련’도 해야 한다고 말야.”
“…별로 재미없어요.”
“재미, 재미라.. 하긴, 재미없는 일을 하는 건 정말 재미없지.”
이 양반, 참 싱거운 말장난을 하네.
“…뭐. 그 동안 저 자신이 바보같이 굴었으니 화를 낼 자격도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눈곱만치 들기는 하네요.”
다시 생각해보면 볼수록 내가 정말 바보 같기는 했다. 특히…………
“프리메이슨에서는 애초에 대교의 얼굴조차 모르고 있었던 거죠?”
“그래. 그녀의 용모는 프리메이슨이 가진 미래 로봇의 깨진 데이터, 즉 ‘복원 불가’ 영역에 속해있지.”
“…만약 프리메이슨에서 주가혜의 용모가 대교와 같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진작에 어떤 식으로든 관리를 했을 거라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너 무나 당연한 건데, 그걸 전 당신들 말에 넘어가서 생각하지 못했죠. 사실 정말 당신들이 대교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라면 ‘대교를 모른 체하라’고 알 려주기만 해도 되는 건데… 당신들은 오히려 대교의 안전을 강조하면서 제가 대교를 곁에 두도록 유도했죠.”
“맞아. 자넨 대교 양의 일에는 너무 물러서 탈이야. 물론 그런 점 때문에 우리 계획이 수월하게 진행된 거지만 말이야.”
“대교는 전부 ‘상의’했다고 표현하던데… 정말 그런 겁니까?”
“아무래도 내가 주모자라고 의심하는 것 같군. 하지만… 놀랍게도 ‘자살’은 그녀 자신이 먼저 생각해낸 거라네. 그것만이 진 유준의 천지파멸식을 촉발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래서 결과는요? 당신들이 원하는 정도가 되었나요?”
“일찍도 물어보는군. 음… 그게 아무래도 내가 바라던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자네가 소환한 에너지가 너무 거대하고 강력해서 내가 장악한 인공위 성의 카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네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자네는 공간을 찢고 12인의 사도 모두를 공격해 버린 모양이더군.”
“예, 뭐. 그러긴 했죠.”
“거기까지는 내 기대 이상이었지만… 현재 조사결과로는 엘을 제외한 12인의 사도 모두 목숨을 부지한 것 같아.”
제기. 그 난리를 친 것치고는 실속이 없었나 보네.
“…자넨 대체 그 엄청난 에너지를 어디로 낭비한 거지?”
“예? 낭비……? 어, 그게…….”
그렇게 물으니까 뭐라 얘기해야 할지. 그러니까 난 그때…
“…신. 혹은 타임 씨?”
“무슨 말인지 알겠네. 내가 그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군. 자네가 그런 스타일이란 걸 말이야.”
으음. 이거 어째 내가 도리어 추궁 당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
“직접적인 원수보다 근본적인 원인제공자를 친다…………! 분명 옳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자네처럼 신에게조차… 음, 자네 식으로 말 하면 ‘신에게조차 개기는 성격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발상과 행동이었어. 이건 나의 결정적인 계산 미스였군.”
“…저를 받은 의사에다가, 쭈욱 지켜봐 왔다면서 그런 것도 몰랐나요?”
“그러게 말이야.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달까? 분석 하는 대상에 애정을 가지고 있을 때는 감정이 섞여 완전히 냉정해질 수가 없었던 모 양이야.”
“…쳇. 처조카에게 보내는 애정이 조금만 더 깊었으면 아주 잡았겠수다. 아니, 사실 내가 좀 튼튼한 편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이승 하직 했을 겁니다.”
“미안하네. 자네에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이 양반이…………! 갑자기 왜 답지않게 신파조로 나와? 맘 약해 지게스리………….
“어, 어쨌든 이제 당분간은 프리메이슨 놈들도 우릴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겠죠?”
“그래.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대교 양이 어려운 결심을 하고 실행했던 건데, 효과가 없으면 곤란하지. 자아 그러니 그 사이 우린 착실히 놈 들에게 결정타를 먹일 준비를 하자구.”
“…그 전에 한 가지 물을 게요.”
“그러게나.”
“뭐, 간단한 건데. 프리메이슨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디에서 월 하셨던 거죠?”
이제야 본론이로군.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
“몰라, 나도.”
이런 제기!
“장난하십니까?”
“아니, 아니… 사실이야. 난 그 전까지의 기억을 잃었거든.”
“…정말…입니까?”
・…응? 대답이 늦어?
“아니, 미안. 거짓말이었어.”
우쒸- 이 양반 진짜 장난하나~?
“…나도 다 됐군. 자네에겐 더 이상 거짓말을 하기가 싫어지니 말이야.”
“그렇다면……….”
“그래도 지금 말해 줄 생각은 없네. 언젠가 이 지겨운 싸움이 끝나고 나면 말해 주도록 하지. 한가지, 난 자네와 대교 양을 해칠 뜻이 없다는 점만 은 믿어주게.”
뭐랄까, 진심이 느껴진다…..? 아니면 내가 또 말려든 건지도 모르지만……….
“하는 수 없군요. 지금까지처럼 ‘의심하면서도 할 수 없이 공조’ …뭐, 그래야겠군요.”
“훗! 전 비화곡주 극악서생이 아니랄까 봐, 사람을 슬프게 하는 말을 잘 골라 하는군.”
거참. 이 양반. 오늘따라 유난히 감상적으로 나오네?
통화를 끝내고 나니, 나는 아무래도 조만간 이 양반을 직접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에 보통이 아닌 사람이니 목소리만 들어서는 진 심 파악이 어렵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난 왜 이 양반을 대할 때면, 이렇게 냉정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이것도 나의 직관력이 작용한 거라면…………! 지금까지 그가 내게 보여 준 모든 것들 중 내 직관력에 ‘아군’으로 판단할 수 있는 요소가 탐지된 거라 면… 그런 거라면 다행인 건데………….
나는 대교와 재회한 이후 가장 찝질 떨떠름한 기분이 되어 눈을 감아야 했다. 문득,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전쟁이 재개될 땐 되더라도 당 장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 쉬고 싶고, 또 빨리 대교를 소개하고 싶었다.
몇 시간 후.
나는 헬기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여객기로 갈아탄 상태에서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대교 또한 내 옆에서 같은 자세로 앉아 눈을 감 고 있었다. 나야 그냥 뻘 자세고 대교도 제대로 운기조식(運氣造息)을 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몽몽에게 말하듯 아주 작게 말을 걸었다.
“그냥, 동생들과 좀더 놀지 그래?”
-그러고 싶기도 하지만… 모두 너무 지쳐 있어요. 아무래도 모두 지난 며칠 동안 잠을 설쳤었나 봐요.
“…하긴, 지들 큰언니 대교의 생사가 묘연한데다 나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걱정을 끼쳤나 봐요. 특히 당신께는 정말죄송해요.
“거, 그런 말하지 말래두. 너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잖아. 그리고 그 덕에 적어도 당분간은 모두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 같고 말야.”
-닥터 제이에게 확인해 보셨나요?
“응? 몰라? 몽몽이 너한테 보고 안 했어?”
—예.
몽몽 녀석, 알아서 모든 일을 대교에게 보고 할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요전 일이 지도 양심에(?) 찔렸었나 보다.
몽몽이 대교의 명령 때문에 나에게 대교의 자살 계획을 미리 보고하지 않은 일을 말한다. 사실 몽몽은 나에게 받은 ‘대교의 명령을 따르라’는 명령 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역시 배신당한 기분도 다소 들었었다.
그래서 난 웃는 얼굴로 ‘그래도 좀 섭했다’ 라는 소리를 잊지 않고 했었던 것이다.
“으응. 그 양반도 아직 다 확인한 건 아닌 모양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죽인 엘 말고는 나머지 12인의 사도 전부 살아 있나 봐.”
-그랬군요. 하지만・・・ 12인의 사도들을 몰살시키고 싶어한 건 닥터 제이와 크라우드 씨이고,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지금의 결과가 오히려 더 잘된 거라고 생각해요.
크라우드 씨?
다른 사람도 아닌 대교가 원판의 이 시대 이름을 쓰니까 왠지 묘한 느낌인 걸?
…만약 죽은 자가 있었다면 새로운 후계자들이 나올 테고,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겠지요. 당신께 두려움을 품게 된 지금의 구 성원들이 계속 있는 편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흐음. 듣고 보니 그러네? 닥터 제이와 원판이야 12인의 사도에게 원한이 있다지만, 우리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니까 굳이 새로운 인물들을 상대 할 필요는 없지.
-그런데… 저도 닥터 제이가 설마 당신 댁 이모님과 그런 인연을 맺을지는 몰랐어요. 그리고 하연님이 크라우드 씨의 여동생으로 환생한 것도 알 아채지 못했고요.
그런 거야 대교가 미리 알았다고 해도 꼭 막아야 할 당위성이 없는 일들이었고, 그보다……………
“대교야. 너 나 때문에 굳이 원판을 그렇게 부르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아, 그건 아니에요. 왠지 크라우드 씨는 전대 비화곡주라기보다, 어디까지나 이 시대 인물이라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응……?
대교가 원판에게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어쩌면 그건…………….
“내가 곡주였던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거 아닐까? 더구나 원판은 이 시대에 온지 엄청 오래 되어서 이제 이 시대 사람이나 마찬가지고 말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에게 있어 곡주님은 한 분뿐이니……….
음. 곡주님 소리가 싫은 건 아니지만, 왠지 그 호칭에만 묶이는 것도 좀 거시기한데………
-하지만… 지금은 마군황의 자리에 계시니 저도 천주라 호칭을 바꾸어야겠네요.
“글쎄. 어쩐지 네가 천주라고 부르면 좀 안 어울릴 것 같은 데……………? 그냥 달링~ 자기야 뭐 그런 좋은 호칭 많잖아~?”
_아이 참. 공식석상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흐흐 그럼 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르겠다는 거지?”
-아이 참. 그것도 싫어요.
“…어, 그러고 보니 너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네?”
어찌어찌 천년 동안이나 묻지 못했던 말인 셈이다.
“너, 그때 말야. 소림사에서 나와 함께 백팔나한진을 깰 때… 나에게 뭐라 부르려고 했던 거지?”
-어머? 그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계셨어요?
쯧. 이런 괘씸한 것을 봤나. 지는 온갖 소소한 것들을 다 기억하면서 나는 그 한가지로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 취급하는 거냐? -사실 별거 아니었는데………….
그러면서도 살짝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우오오- 더 궁금해진다.
―오라버니………!
응?
-그냥 한 번쯤은 그렇게 불러 보고 싶었기에………….
어… 물론, 상당히 듣기 좋은 소리이기는 하지만… 음. 내가 너무 오래 생각하며 기대를 했었나? 막상 알게 되니 조금 싱겁기도 하군. ᅳ…유준 오라버니.
취, 취소. 느무느무 좋다.
“그, 거, 앞으로는 그냥 계속 그렇게 부르면 안 될까?”
-원하신다면 그리 하겠지만 익숙치가 않아서………….
고작 호칭 바꾸는 거에 뭐 그렇게까지 부끄러워 할 것까지는… 음. 큼. 거, 뭐… 나도 좀 기분이 묘하긴 하지만서두…….
다른 녀석들에게 오빠라 불리게 된 것도 좋았지만 대교의 입에서 나오는 오라버니 소리에는 차원이 틀린 감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으으음. 대교의 입에서 나오는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라버님…………? 어? …님?
“대교. 너 날 너무 뜨문뜨문 보는 거 아냐?”
ᅳ예? 그게 무슨 표현이지요?
“우습게 보냐는 말이여.”
ᅳ제가 어찌 그런……………
“그때 잘 듣지 못하기는 했지만, 분명 끝에는 ‘님’자가 붙었었어. 물론 오라버님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니가 나에게 쓰려 했다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어색하잖아.”
…그것도 기억하고 계셨네요. 하지만 전 당신께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분명 처음에 망설인 말은 오라버니였고, 두 번째는 또 달랐을 뿐.
흐음. 그때부터 다양한 호칭을 연구하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좋아. 그럼 그 두 번째 호칭은 뭐였지?”
나는 매우 진지하게 물었지만, 대교는 어느 틈에 붉어진 얼굴을 수습해 버린 상태였다.
-안 갈켜줘요.
으혹!
“야아, 왜에~.”
-그건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게 되실 거예요.
에구구. 천년에서 또 더 미뤄지는 거냐?
나는 대교가 엄한 곳에서 은근 고집이 있다는 걸 알기에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으, 응? 왜, 왜?」
아. 나 왜 이러니? 아무리 오빠가 아빠 되고… 뭐 그런다지만 벌써부터 왜 이리 싱숭생숭하고 그러지?
-오라버니 부모님들께선 어떤 여자를 좋아하실지. 저 같은 것이 과연 그분들 마음에 찰지 걱정이에요.
“니가 어디가 어때서. 내가 오히려 빠지는 형편인데… 어쨌든 우리 부모님들도 널 보던 엄청 반기실 거야. 내 장담하지.”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흐음. 천하의 마봉낭자(魔鳳娘子)이며 마중제일녀 대교 양께서도 시부모 되실 분들 뵙는 건 긴장되는 모양이로군. 난 장인 어른 사영 만날 때 별로 그런 거 못 느꼈었는데… 내가 너무 뻔뻔한 건가?
“대교야 잠시만. …몽몽.”
「예. 주인님.」
“우리 부모님께 미리 연락을 드렸다고 했지?”
「주인님께서 천지파멸식을 멈추고 난 후,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사이 댁으로부터 연락이 왔기에 제가 주인님을 가장하여 간단한 안부를 전했을 뿐입니다.」
“그럼 지금 당장 연락을 해줘.”
주인님. 현재 한국 시간은 새벽 1시 20분입니다. 주인님 부모님들의 평균 취침시간이 지났습니다.
에구. 내가 너무 신선놀음, 아니 대교놀음(?)에 빠져서 시간개념까지 상실했구나. 지금 타고 있는 건 초고속 항공기가 아니니 이대로라면 내일 아 침쯤 한국에 도착할 것 같은데… 미리 연락도 안 하고 식전부터 신부감을 데리고 가면 더 놀라시려나?
「주인님!」
ᅳ주님!
응? 얘들이 왜 동시에 부르고 난리지? 그리고 대교는 여전히 습관을 고치지 못한…………..
“천주!”
어랏? 자룡대주까지 날 부르며 달려오네?
“운기조식 중에 송구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천주의 지시를 받아야 할 것같습니다;
“뭔데 그래?”
「주인님. 창밖을 보십시오.」
대체 뭔데 다들 이렇게 호들갑을 어라랏? 저게 뭐야? 전・・・ 투기? 전투기가 우리 비행기를 따라오고 있어?
「중국 공군에서 개발하여 작년부터 실전배치 된 J-117 기종입니다. 제원상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스텔스기지만, 미공군의 F-117를 흉내낸… 소위 ‘짝퉁’입니다.」
몽몽은 이어서 J-117기의 제원을 상세히 띄워 보여주기 시작했다.
명색이 스텔스기인데도 뭔가 문제가 있는 짝통이라 우리 비행기 레이더에 걸렸던 모양이군. 몽몽은 당근 진퉁이라도 잡았을 테고, 대교는… 음. 우 리 대교가 진짜 더 대단해지긴 대단해진 모양이네. 비행기 안에 탄 채 바깥의 스텔스기(비록 짝퉁이지만)를 감지해내다니 말이야.
“통신을 시도했지만 응답이 없습니다. 본 기는 무장이 없는 여객기지민, 아래층에 대기 중인 전황마군(戰湟魔君)의 전마(戰魔) 부대는 공대공(對 空) 병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훗. 역시 준비성 좋은 수하들이라니까.
“…일단 잠시 더 기다리며 살펴봐. 물론 전황마군에게 반격 준비는 하도록 하고 말야.”
“복명!”
대체 무슨 일일까나..? 프리메이슨이 벌써 분위기를 수습해서 온 거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이상하고·
「주인님. J-117기가 본 항공기로의 근접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정밀 스캔 거리 밖이냐?”
「지금 막 유효거리에 들어섰습니다.」
“어머?”
몽몽은 스캔으로, 대교는 창밖을 통해 육안으로 정체불명 전투기의 탑승자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나도 궁금해서 쥐꼬리만한 내력을 모두 눈으로 모을까 하다가 참고, 몽몽과 대교의 보고를 기다려 보았다.
「닥터 제이의 지하 기지에서 만났던……………」
“다, 당신? 아, 틀려요.”
「코드명 ‘조담놈입니다.」
뭐시라?
조담놈…………..? 언젠가 내 앞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벌써….?
“어떻게 저토록 당신과 닮은 자가………….”
“저토록이 아니라 ‘조금’ 이겠지.”
“예?”
“나하고 ‘조금 닮은 놈’ 이라서 내가 조담놈이라고 이름 붙였지. 혹시라도 시력 안 좋은 사람들이 헷갈릴까봐. 녀석 얼굴에 X자 표시도 해놓고 말 야.”
나의 억지(?)에 대교는 아하 하는 표정이 되고 있었다.
“저놈, 생사금마도결이 특기이고 무지막지 강하기는 한데 얼마 전 나한테 깨지고 닥터 제이에게 버림받은 다음에 빡 돌아서 어딘가로 사라졌던 녀석이야.”
“아~! 생각났어요! 닥터 제이가 진행하던 ‘생사금마도결 프로젝트’! 닥터 제이가 모은 소년 기재들 중 가장 우수한 천재 소년은 13호였었던 것 으로 기억해요.”
“역시 우리 대교, 기억력 한 번 좋다. 저 녀석, 13호가 맞아.”
“…나중에 성형을 한 모양이군요. 소년 시절의 용모는 좀 더 예쁘장했었던 것 같.. 아, 죄송해요!”
“야. 대교, 너.”
으~ 이 밀려드는 배신감!
“그래. 난 하나도 안 예쁜 소년이었다. 지금은 더 망가졌지. 나도 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전 곡주님, 아니 오라버니를 비하하려 더 것이 아니라………….”
“됐네, 이 사람이! 나 삐졌쓰!”
“아~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전 정말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나는 대교가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짐짓 심통 맞은 얼굴로 대교를 외면했다.
…흣. 내가 예쁘장하지 못한 걸로 비관하는 남자였다면 비화곡에서 원판과 비교될 때 벌써 혀 빼물고 자결했겠지. 물론 계집애 같은 얼굴을 싫어하 는 건 나와 같은 남자들이 대부분이고 보통 여자들은 다르다는 거 알지만, 대교는… 우리 대교는 보통 여자가 아니지. 암.
처음에만 순간적으로 불쾌했지, 곧 그런 감정은 사라지고 없는데도 난 계속 인상을 긁기로 했다.
대교는 헤어질 당시보다도 성숙해진 몸매와 얼굴에 천년 동안이나 도를(?) 닦은 탓인지 나와 말하고 있지 않을 때는 지극히 어른스럽고 어딘가 신 비로운 여신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런 그녀가 내 앞에 서는 이렇게 별 것도 아닌 일에도 냉정을 잃고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보이는 것이다.
“저어ᅳ 진짜 그런 뜻이 아니…..”
“몽몽,”
살짝 무시해 주시고.
“저 녀석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해당 J-117기의 비행 패턴 분석 결과, 본 항공기의 움직임과 동조하여 초 근접 비행을 시도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 근접…………? 이거, 이거. 저 녀석 혹시……………?
나는 잠시 더 생각해보고, 슬쩍 대교를 한 번 살핀 다음 입을 열어 외쳤다.
“자룡대주! 비행 방향과 고도를 잠시 고정해서 유지하도록 해!”
“복명!”
자아- 어디 보자. 언뜻 보기에도 어렵게 주변을 쭈뼛거리는 것 같았던 J-117기가… 음. 역시 우리 쪽 비행이 단순해지니까 수월하게 아래쪽으로 근접해 오는 것 같지………….
“…….”
“왜?”
“진짜 화내시는 건 아니죠?”
“응. 당근이지. 뭔일 있었어?”
“치이ᅳ 너무하세요! 이렇게 절 놀리시다니!”
안도하는 듯하면서 한 편으로 뾰로통해지는 대교의 얼굴을 감상하는데……
「주인님!」
오! 조담놈! 역시 그럴 생각이었구나!
몽몽이 보여주는 영상 속의 조담놈은 J-117기에서 자신이 탄 조수석? 혹은 수송석? 하여간 조종석 뒤쪽의 독립된 좌석의 창을 열고 있었다. 수백 킬로 속도로 날고 있는 비행기에서 과연… 오옷! 도약했다!
망설임도 없이! 하핫! 멋진데?
비행기간의 거리가 아무리 가까워졌다고 해도 이런 고도에서 이런 스피드… 그런데 성공했다! 우리 비행기 바닥에 벽호공(功) 같은 것으로 달 라붙었어. …응? 근데 내가 왜 저 녀석을 응원하고 있는 거지?
“자룡대주! 응급 수리반을 대기시켜 주세요! 위치는………….”
음. 몽몽이 이번에는 대교에게도 생중계 해줬나 보다. 내가 할 말을 대교가 먼저 해주는군.
조담놈은 자기 칼로(여전히 정글도 닮은) 비행기 바닥을 가르며 들어오고 있었다.
“……대교. 아무도 놈과 싸우지 말라고 해줄래?”
대교의 전음으로 내 명령이 전달되자 놈을 에워싸던 전황마군을 비롯한 전마부대원들이 일제히 물러난다. 조담놈도 그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주저없이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몽몽의 화면 속에서 한 발 한 발 다가오던 조담놈의 영상이… 음. 드디어.
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아래층으로 이어진 출구로 실제의 조담놈이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 조담놈!”
“오,리,지,널…………! 날 그렇게 부르지 말했지?”
윽! 대뜸 칼질?
인사 아닌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놈의 삼시전결(三失電訣)이 벼락처럼 내게 쏘아졌다.
빠층!
강렬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내 눈앞에 커튼처럼 드리워진 대교의 옷소매 자락 때문에 바로 조담놈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흔한 말로 안 봐도 비디오다.
“주가혜? 아니, 그녀가 아닌가?”
나는 대교의 횐 소매 자락을 들춰 조담놈에게 고개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천년전의 마중제일녀 대교. 오리지널 우리 대교지.”
“오리지널 대교?”
조담놈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구겼지만, 곧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기습적으로 날린 삼시 전결을, 내 옆에 앉아 있던 대교가 순식간에 내 앞으로 이동하며 막아낸 것이다.
으음. 근데 청명검(淸明劍)의 옆면으로 삼시전결을 막아내다니… 역시 지금의 대교는 장난이 아닌데?
“오랜만이네요, 13호.”
대교가 건네는 인사에 조담놈의 눈이 휘둥그래지고 있었다. 그런 조담놈에게 대교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한국의 백두산. 새벽 4시의 천지호.”
호오- 조담놈은 우리 백두산 천지호에서 수련한 적이 있나보네?
“아앗! 다, 당신 설마!”
“이제야 기억해주는 건가요?”
“그 예쁜 여자 유령?”
으음. 영혼 상태외 대교가 살피러 갔을 때 목격했던 모양이군. 그렇다면 저 녀석도 어렸을 때부터 소위 영안(靈眼)이 밝은 편이었나 보다.
“담소사! 주가혜가 어렸을 때 본 유령과 닮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또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당신 정말 뭐야?”
조담놈은 놀라운 비행기 갈아타기 생쇼를 하면서까지 여기 온 목적을(대체 뭔지는 몰라도) 잊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다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 그냥 네가 봤던 대교는 이렇게 부활하기 전의 영혼이었다는 것만 알아둬. 아, 전의 주가혜도 우리 대교가 임시로 환생 했던 거라고 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쉽겠지?”
내가 대충 요점을 추려 말해 주었지만, 조담놈의 표정은 오히려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너무 요약했나? 음. 그나저나 간만에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더 기분 묘하네. 거울도 아닌 내 얼굴을 이렇게 마주 보는 건・・・ 에고, 밤에 보면 좀 무 섭겠다.
“제기! 뭐가 뭔지 모르겠군. 아무튼, 여자 쪽은 아무래도 좋아. 난 너 진유준! 오리지널 진유준을 죽이러 온 거니까!”
“그렇다면… 저도 상관없는 일이 아니에요.”
대교는 조용히 대응하며 청명검을 비스듬히 옆으로 내린다.
“흥! 오리지널! 넌 여자의 치마폭에 숨어 있을 셈이냐?”
‘여자의 치마폭’이란 건 보통 비유법으로 쓰일 텐데 오늘의 난 진짜 말 그대로 대교의 치마폭 뒤에 있게 되었군. 뭐, 암튼.
“별 수 있나? 난 지금 꽤 큰 부상을 입어서 내공을 못 쓰는 상태야. 게다가…………….”
나는 솔직하게 말해 준 다음, 우리 이쁜 대교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지금 대교는 지난번에 너와 싸웠을 때의 나보다 강해.”
믿기 어렵다는 듯 대교를 새삼 찬찬히 살피는 조담놈. 그런데… 어째 금방 시선을 거두는 걸? 허어- 얼굴이 빨개지네, 저놈.
“내, 내가 여, 여자와 싸, 싸울 것 같아?”
저 순진함만 날 많이 닮았… 음. 암튼. 조금 전의 삼시전결도 대교가 막아냈던 지점을 보면 막지 않았어도 아슬아슬하게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것 같다.
“그럼 뭐, 어쩌게? 내공도 못 쓰는 부상자를 이겨서 생색을 내고 싶은 거야?”
“치이!”
흠. 예상대로 미련 없이 칼을 내리는 걸 보니…………
“진짜였군. 설마 했는데 정말 내공을 잃다니………….”
역시 이 녀석은 내게 뭔 일이 있었는지 대충은 알고 온 거다…
“…닥터 제이가 그러더군. 오리지널, 네가 뭔가 오버해서 굉장한 힘을 사용하다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졌다고 말야.”
닥터 제이와 완전 의절을 한 줄 알았더니 연락 오면 받긴 받나 보다. 그런데 천지파멸식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는 모양이네? 하긴 그게 그렇게 개 나 소나 다 아는 거였으면 지구가 멸망을 해도 벌써 몇 번을 했겠지?
“게다가 조금 아는 자들에게 알아보니 DP의 본사에도 뭔가 큰 일이 있었던 것 같고… 그게 오리지널 네가 한 짓인가?”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미쳐 날뛸 때 베어낸 공간 너머의 어딘 가 중 한 곳이 DP본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응. 그런 거 같아.”
“쳇! 무슨 대답이 암튼. 그럼 언제 회복되는 거냐?”
“기약은 없어. 원체 심한 상태거든.”
이렇게 솔직히 밝혀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얘기하다 보니까 그냥 막 다 말해 버렸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런..”
“훗! 날 걱정해 주는 거냐?”
“웃기지 마! 내가 왜 네놈을 걱정하겠나! 승부가 미뤄지는 것이 싫어서 그럴 뿐이야! 난 오리지널 널 반드시 넘어서서 네놈의 인생을 차지할 거란 말이다!”
새삼 열을 내며 외쳐 대지만, 어째 어딘가 기운이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내 상태가 궁금해서… 그냥 그 이유만으로 전투기까지 몰고 그 난리를 치면서 온 거냐?”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침 근처에 공군 기지가 있었을 뿐이야.”
닥터 제이로부터 내 소식 듣자마자 공군기지에 침투, 전투기 강탈, 조종사납치… 뭐 그랬다는 거군. 이거 참. 성질 급하고 무모한 건 나보다 한 술 더 뜨네.
“암튼, 이제 확인했으니 갈거야?”
“뭐?”
조담놈은 왠지 약간 난처해하는 것 같았다.
저 녀석.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왔구나. 이거, 이거 지난번에 한판 뜰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저 녀석 완전 순진 단순 덩어리네.
본래 저런 성격인 건지, 평생 백두산 같은 곳에 짱박혀서 생사금마도결만 익히느라 다른 경험이 거의 없어서 단순해 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래도 비슷한 환경이었을 덕방 녀석에 비하면 엄청 양호한 상태인 것 같아 다행이다.
알고 보니 순진남 조담놈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눈치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대교 옆을 스쳐 지나 조담놈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천주. 손님을 접대해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 자룡대주.”
흐음. 여자, 그것도 미모의 자룡대주가 다가가자 역시 당황하는군.
“안녕하십니까? 전 천주를 모시는 어사조의 자룡대주라고 합니다.”
“어, 나, 난…….”
“조담놈님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조담놈은 크윽- 하는 소리와 함께 이를 악물더니 새삼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룡대주는 아랑곳 없이 한쪽의 좌석을 손 짓하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모두 VIP 석입니다. 쉬고 계시면 곧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아니. 난…….”
“실례지만, 원하시는 차를 말씀해 주시면 모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 아니. 난 그냥, 아무거나..”
자룡대주 VS 조담놈・・・ 자룡대주 WIN!
이른 아침 6시의 인천 공항.
정말이지 뜬금없이 날아와 얼결에 우리 손님이 되어버린 조담놈. 녀석은… 결국 한국에까지 따라와 버렸다.
“아- 드디어 당신의 고향인 한국 땅에 제가…!”
대교는 비행기에서 내리며 살짝 감동하는 것 같았다. 영혼 상태로는 벌써 몇 번을 와봤을 테고, 주가혜로서도 와봤지만, 그래도 현재의 느낌은 남 다른 모양이었다.
“오리지널!”
“왜, 조담놈. 아, 아. 흥분하지 마. 릴랙스~ 릴랙스~”
“치이 좋다! 당분간은 그 웃기지도 않는 호칭을 참아주지!”
흐음. 나름 뭔가 더 각오를 한 표정이다.
“…지금부터 오리지널 네놈이 회복될 때까지는 내가 지켜주겠다.”
으잉? 이건 진짜 뜻밖의 전개인걸?
“그러니까 하루빨리 회복해라. 그리고 내 손에 죽는 거다!”
거, 같은 말이라도 참………………
“저기, 말은 고마운데… (대체 뭐가?) 너도 보다시피 내게는 뛰어난 수하들이 많거든? 게다가 대교도 있고 말야. 그러니 굳이 나 따라 다니면서 수 고할 것 없이 어디 딴 데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게 어떨까?”
“흥! 뛰어난 수하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걸?”
조담놈의 시건방진 말은, 당연히 지하무림 엘리트 어사조 멤버들의 투지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스윽 조담놈을 둘러싸는 내 수하들과 씨익 웃으며 칼을 뽑는 조담놈.
“모두 동작 그만!”
엄청 열 받았음에도 나의 낮은 명령 소리에 즉각 행동을 멈추는 나의 기특한 어사조들.
“하아- 인간아, 인간아~ 여기가 어딘데 여기서 칼을 뽑고 지랄이십니까, 응?”
내가 나도 모르게 살기를 담아 말하자. 조담놈도 조금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놈은 그제야 공항 경비대의 대원들이 몰려오고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자룡대주. 부탁해.”
“복명.”
자룡대주는 즉시 사태 수습을 위해 경비대 쪽으로 달려갔고, 나는 조담놈에게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네가 나의 곁. 아니, 근처에라도 있으려면 두 가지를 약속해야 해. 하나는 절대로 우리 가족들이나 날 아는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말 것! 또 하나는 결코 내 수하들과 싸우지 말 것!
이 두 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넌 나와 싸우는 건 고사하고 대교와 생사결을 벌여야 할 거야.”
조담놈은 입술을 깨물며 갈등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나는 시간여행을 했을 때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떠나 있었던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과 함께 우리 동네 어귀에 접어들 수 있었다.
하아아- 어찌 보면 무림시절보다도 파란만장한 시간을 압축해서 겪고 오는 것 같기도 하네. 훗! 그래서 그런지 저 철물점이며 세탁소 간판까지 반가운 걸?
나는 약간의 감상적인 기분에 쌓여 혼자 차에서 내렸다. 차는 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주차한 상태고 대교에게 남아서 기다리라고 한 건… 아무래 도 놀라실 수밖에 없는 부모님들께 먼저 말로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와아아~ 집이다! 집!」
요몽이 저도 기쁜지 정신없이 날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멋?」
「주인님!」
요몽도, 몽몽도, 그리고… 나도 놀랐다. 아침 안개가 자욱이 깔린 우리 집 앞에 아주 낯익은 사내 한 명이 긴 바바리코트 자락을 날리며 서 있었 기 때문이었다. 분명 사내 녀석이면서 여자보다도 아름답다는 저… 원판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