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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52화 : 위기의 일본.


2. 위기의 일본.

에레보스 암살단이 본격적으로 우리를 노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다음 날… 밤 12시 경. 우리와 에레보스의 일전은 좀더 확실히 결 정되었다. 산드라가 이번에는 동료들 몰래가 아닌 정식 특사 자격으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라면 박쥐가 되어, 혹은 박쥐처럼이라도(?) 창문으로 날아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인 이미지라서 그런가………..? 조금 전 산드라가 얌전히 현 관문을 두드리던 모습은 왠지 어울리지 않았어. 뭐, 그거야 어쨌든. 나는 거실에서 산드라와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했고, 대교는 슬그머니 부엌으로 향했다.

과연………… 밤이라 그런지 어제 낮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군. ‘뱀파이어 귀부인 카라’의 압도적인 요염함과 기괴한 매력에 비하면 뭔가 약간 빠진 다 싶긴 해도,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아. 으음. 그것도 뭐, 그렇다 치고…………

“그러니까, 날짜는 내 말대로 하는데………… 장소는 그쪽이 결정하겠다, 이거지?”

“예. 특별한 의미는 없고, 캡틴께서 일본의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諸島)가 마음에 든다고……… 그쪽의 섬들을 돌아보며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쳇. 우리 나라도 경치 좋은 데 많구먼, 왜 굳이…”

아차! 그게 아니구나. 개판치고 싸울 건데 우리 나라가 아니면 더 좋은 거잖아? 물론 내가 남의 나라 땅이라고 함부로 파괴할 만큼 양심 없는 놈은 아니지만………… 어? 근데 가만? 오가사와라 제도라면…… 뭐야…………! 거긴 내가 지난번에 천지파멸식으로 깽판쳤던 곳이잖아?

“어~ 저기, 거긴 좀………… 지난 번에 내가 살짝(?) 미쳐 날뛰었던 곳이 거기잖아. 그때, 거기 해저 지반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라구. 만약 또 지반에 충격이 가해지기라도 하면, 옆 나라 일본이 당장 위험해지거든? 다른 곳으로 하면 안 될까?”

-전 잘 모르는 얘기지만, 어쩌면 우리 캡틴이 그걸 노리고 장소를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진유준 님의 마음 속에 족쇄 하나를 더하기 위해……”

쯧.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나란 놈은 당장 내가 죽게 생겼을 때도 인도주의를 따지고 그 나라 생각해 줄 인간이 못 되는데……… 으으음. 어쨌든 이건 어쩔 수 없을 것 같군.

“할 수…… 없지. 그쪽에서 나름 신사적으로 나오는 상황이니까, 장소 정도는 나도 그냥 인정해 주지.”

“알겠습니다.”

이거야 원. 서울의 위기에 이어 일본의 침몰 위기인 셈인가?

“그런데・・・・・・ 진유준 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에레보스의 멤버들에게 결코 방심하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세계의 지배자들이 공인 한・・・・・・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암살단이란 말입니다.”

산드라는 처음부터 무거운 분위기였으나 한층 더 심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린 동료들 사이의 유대감이 적은 편이라, 저도 각자 어느 만큼의 전력을 숨기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해요. 하지만…………… 적어도 그들 모두 한 명 한 명이… 진유준 님과 동급,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한 자들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호오~ 나름 더 도발적인 표현을 쓰기 시작하네?

“……흠. 그건, 산드라 당신 자신도 포함되는 얘긴가?”

“훗. 물론이에요. 전 이래 뵈도, 한때는 영국과 유럽 대륙의 카톨릭 전사들이 연합하여 추적하고도 감당하지 못했던… 그들에겐 ‘공포의 마녀’로 악명을 떨치던 존재였답니다.”

영국과 유럽의 연합…………?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실감이 나지 않지만…… 지금 산드라가 발산하기 시작한 ‘살기’는 확실하게 와 닿는 군.

“제가 말씀드렸었지요? 지난 번………… 시그마 님과 제가 대교 님께 당할 때는 결코 전력을 다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오늘 밤, 그걸 증명 해 드릴까요?”

이런…………..! 이 여자, 자신이 직접 깽판을 쳐야지 내가 더 심각해질 거라고 판단한 건가? 하지만…

“저기, 산드라. 나도 이번 일에 나름 긴장하고 걱정하면서 대비하는 중이거든? 근데 왜 굳이 시비를 걸려고 하지? 내가 그렇게 방심 상태로 보여?” “그건…… 지, 지금 그런 태도가 문제라고요!”

산드라가 기어이 짜증을 내는 바람에, 나는 한쪽 귀를 후비던 손가락을 빼야 했다. 생각해 보니 소파 쿠션에 편히 반쯤 누워 있는 자세도 좀 아닌 것 같아서 몸을 약간 바로 세워 주었다.

“이런 대화 중에 어떻게…………”

“미안. 숙녀 앞에서 실례를 했네. 무심코 그만…

“그, 예의가 문제가 아니에요! 우릴 상대로 그렇게 태평한 마음이다가는……………

“에이~ 사람이 어떻게 항상 까칠하게만 살아.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좀 편히 쉴 수도 있는 거지.. 왜 그래? 아마추어처럼.”

“무, 무엇보다! 이렇게 쉽게 저를 믿어도 되는 건가요? 어쩌려고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저를 맞을 수 있는 거죠?”

“내가………… 잠옷바람인 거? 그거야 자려고 했는데 당신이 예고도 없이 왔으니까…..”

“아우. 그게 아니라, 맨손이잖아요! 칼이 주무기인 남자가!”

“내 칼?”

난 가볍게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정글이를 불렀고, 즉 시 척~! 내 손 안에 정글도가 쥐어졌다. 내 방의 침대 밑에서 날아오는데 1초의 반에 반도 안 걸린 듯 싶었다.

“아……? 지금 이건……… 염동력(念動力, telekinesis)?”

“……아니, 동양의 무공 용어로 능공섭물(綾空攝物)이라고 하지. 기본적으로는 염동력과 비슷하긴 해.”

훗. 산드라의 조언에 따라 산드라에게 정글이의 정체를 숨긴 셈이군. 어쨌거나………… 정글이의 간단한 호출 쇼(?)를 선보였을 뿐인데도, 산드라의 표 정이 꽤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진유준 님의 전투력은…………… 병기의 유무에 따라 극단적으로 바뀐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였는데………… 설마 이런 류의 능력까지 있을 줄 은……”

“어허~ 산드라도 나에 대해, 아니 동양의 무공에 대해서 공부를 좀더 해야겠군. 서점에 가면 무협지 많으니까, 참고 삼아서 한 번 봐봐.”

“무협・・ ・지……?”

“어, 난 중국 김용 아저씨 거도 좋지만, 우리 나라에도 잘 쓰는 사람 많아. 좌백, 금강, 용대운, 검궁인, 서효원… 에고. 일일이 들기에는 너무 많 네. 아, 그런데 유기선인지, 윤기선인지 뭔지 하는 사람 거는 서점에 혹시 있더라도 보지마. 그 사람 소설은 내용이 좀 즈질이래.”

“……김용, 좌백, 금강, 용대운, 검궁인, 서효원…… 유기선 빼고….”


산드라가 추천 작가들 이름을 되뇌고 있는데, 부엌에 있던 대교가 차와 다과가 담긴 상을 들고 나왔다.

“마침 좋은 홍차가 있어서 준비해 봤는데, 다른 차를 원한다면………

“아! 아니에요. 제가 실은 영국 출신이라, 홍차를 무척 좋아합니다.”

“아하~! 다행히 제 짐작이 틀리지 않았네요.”

………음. 그러고 보니 주가혜였을 때의 대교는 홍콩에서 자랐었지? 그래서 산드라의 영국식 발음이라던가, 그런 걸 감 잡았던 모양이군. 어느 정도 달라지던 분위기는 대교가 합세함으로서 아예 화기애애한 티타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흐음~ 요전에는 대교가 단칼에 산드라의 목을 잘라 버린 일도 있는데……… 그럼에도 이 두 아가씨, 꽤 분위기가 좋네……………? 하긴 뭐, 그 정도 일은 서로 가볍게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워낙에 특이한 내력을 가 진 아가씨들이긴 하지만…… 응? 끼익~ 문소리가 들린 건 부엌 옆의 작은 방이었다. 훗. 특이한 내력의 인물 한 분이 더 나오시는군.

“아, 닥터 제이께서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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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가 말을 걸어 보았으나, 닥터 제이는 아무 것도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 듯 멍한 표정으로 거실을 가로 질러 화장실로 향했다. 대교가 애써 시선 을 돌리고 있는 건, 닥터 제이가 팬티 바람에 평소의 흰 가운만 대충 걸친 행색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저 양반, 저노무 박사 가운은 아주 밤낮을 가리지도 않는군. ……흠. 볼일 보는 동안에 잠이 좀 깨신 듯………… 닥터 제이는 화장실에서 나오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나서야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쩝. 음.

“아, 예.”

“초롱이는?”

•왔나, 산드라”

“아……… 그 아이는 함께 오지 못했어요.”

“……하긴. 어린 아이는 한참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이군.”

닥터 제이는 여전히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천천히 놀다 가게. 나 신경 쓰지 말고.”

“아, 예에.”

닥터제이가 다시 휘적휘적 부엌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자, 산드라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차기 사도 후보로까지 거론될 정도의 남자…………! 프리메이슨의 수천 과학자 그룹의 리더로서, ‘악마의 두뇌’를 가진 자로 경외 받는 남자 의………… 저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어, 그래서 그런지 가계 하나는 똑소리 나게 보시더라구. 며칠째 10원도 한 틀려, 계산이.”

“가게를…… 봐요?”

“응. 우리 건물의 슈퍼 말야.”

“어제 진유준 님을 찾으러 왔다가, 닥터 제이가 가게 안에 있는 걸 목격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 가게를………… 저…… 악마의 두뇌가?”

“인기 좋아, 단골들한테.”

산드라가 잠시 말을 잃은 사이, 현관 쪽에서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지가 알아서 열고 들어오는 남녀 가 있었다.

“원…판? 꽤 오랜만에 온다, 너?”

“후후~ 좀 바빴습니다, 유준 형님. 어떤 분이 잔득 어지럽히고 간 에볼루션 필드 정리를 지휘하느라 말입니다.”

언제나처럼 비서 ‘란’과 함께 들어 온 원판이 산드라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마도……… 에레보스?”

“어, 맞아. 산드라………… 공간의 마녀래.”

“음. 그렇군요.”

원판은 아직 프리메이슨 소속의 간부이고 산드라는 조직의 배신자이다. 그러나 원판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더니 부엌으로 들어갔 다.

“야, 야! 뭐해? 뭘 뒤지는 거야?”

“아…… 오다가 깜박해서.”

원판은 뭔가를 들고 나오더니 대교를 향해 씨익- 예의 살인미소를 날렸다.

“라면 두 개, 빌려갑니다. 형수님.”

“어, 어머! 어, 얼마든지요.”

“이쒸! 언제 갚으려고!”

“천천히.”

난 뻔뻔한 소리만을 남기고 돌아서서 나가는 녀석에게 방석이라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비서 란이 하도 매섭게 째려보는 통에 그냥 슬며시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다.

“쳇. 내일 라면 박스 하나 더 뜯어야겠네.”

투덜거리는 나에게 산드라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실험체로 출발했으면서도, 사도들과 직접 소통할 정도의 요직에 오른………… 게다가 최근에는 닥터 제이의 뒤를 이을 자로 꼽히기까지 하 는………… 입지전적인 천재……………! 마스터 크라우드…………! 그가 맞는 건가요?”

“응. 방금 그 라면 훔쳐 간 놈이, 그 놈이야. 우리 집에선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내지.”

“아이 참. 훔쳐 가다니요. 그리고 가끔씩 가게도 봐주시잖아요.”

대교, 이 녀석. ‘형수님’이란 말에 뻑 갔군. 지금까진 ‘현대의 원판’에 대해서 부정적이더니……………

“가게………… 방금 그 마스터 크라우드도 말입니까?”

“어. 처음엔 그랬는데, 앞으로는 안 맡길 생각이야. 저 놈한테 홀린 여자들의 남친이 행패 부리러 오는 바람에 귀찮아지더라구.”

“진유준 님 댁의 가게……”

“응?”

“혹시 핵 폭탄이나, UFO 같은 걸 파는 곳입니까?”

살짝 정적이 감돈 후, 나와 대교가 먼저 웃었고 산드라 역시 픽 웃었다.

“하핫! 이제보니 산드라도 농담 좀 하네?”

“훗. 글・・・・・・쎄요.”

어째……… 산드라는 완전히 농담으로 한 소리가 아닌 눈치로군. 하긴, 우리 집 식객 콤비가 진짜 맘먹고 나서면 핵 폭탄 아니라 더한 것도 유통시킬 수 있을 테니…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끝으로 산드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런데, 지난번의 그 마계의 늑대, 라후의 혈족이 보이지 않는군요.”

“라프? 그 녀석은 지금 자고 있어. 요즘 잠이 좀 많아져서.”

지금 몽몽이 만들어낸 아공간(亞空間) 속에 있다는 얘기까지 해줄 생각은 없지만……… 암튼, 라프 녀석이 요즘 잠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라프는 본래 잠을 잔다는 개념조차 없는 것 같았었다. 하지만 얼마 전 판타지아 섬에서 마계 괴물들의 공격을 받다가 본체가 넣어놓은(?) 봉인이 깨 진 후로는 웬일인지 진짜 강아지처럼 자주 잠을 자게 된 것이다.

“전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진유준 님, 대교 님. 부디………”

산드라는 끝까지 우리에게 당부하고 싶은 바가 많은 것 같았지만, 결국 말을 맺지 않고 돌아섰다. 날 완전히 믿어도 된다고 판단했다기보다는 이미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신세이니 그냥 ‘포기(?)하고 믿어 볼 수밖에 없다’쯤 되는 심정이지 싶었다. 무책임한(?) 나는 그녀를 배웅하고 나서, 다시 소파 앞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어? 또 하시게요?」

“그래, 요몽. 잠시 쉬었으니……… 레벨 3, 아니 2까지는 하고 자야겠다.”

몽몽(요몽)의 가상현실 수련 시스템은 갈수록 더 효율적으로 최적화 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여하간 뺑이치기’라는 것만은 천년 전이나 지금 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아침.

드르르르륵~

변함없이 가게 셔터 올리는 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의외로 성실 슈퍼 아저씨 닥터 제이. 그는 카운터에 앉자마자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초롱이는 안 왔었던 건가?”

“내 참. 어제 기억 안나요? 산드라에게 직접 물어봐 놓고선.”

“음…… 그랬었나, 내가?”

이 양반, 지난밤엔 몽유병 수준으로 잠에 취한 상태였었군. 나보다 이 양반이 진짜 무방비 생활이네.

“……초롱이, 많이 예뻐졌지?”

“후후. 애가 웃는 게 아주 사람 잡아요.”

“1년 정도 전에 헤어진 후, 에레보스에 차출된 것이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기어이 그리로 간 거였군.”

“네, 뭐. 거기서도 나름 이쁨 받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조만간 ‘회수해야죠.”

“회……수?”

“닥터 제이가 거의 키웠다면서요. 그럼 당연히 우리 식구로 봐야지요.”

“하긴…… 훗. 기대하겠네.”

“뭐………… 결전 날짜는 확정된 거고, 장소도 구체적으로 결정되면 또 산드라가 알려 주러 올 겁니다.”

“……산드라가 수고 많군. 명색이 최강의 암살단의 멤버인데 전령 노릇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게요. …………음. 혹시 산드라의 과거에 대해서 아세요?”

“아니. 처음 그녀와 그녀의 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영국의 강력한 뱀파이어에게 귀속된 마녀(魔女) 가문이 떠올랐을 뿐이네.” 

에? 마녀 가문? 별명이 아니라 진짜 마녀?

“그녀들 자신도 상당히 뛰어난 마녀라서, 굳이 다른 세계의 악마를 소환하여 힘을 빌리지 않아도 여러 가지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고 하지.”

“……이를테면, ‘순간이동’ 같은 거요?”

“뭐, 구체적인 건 나도 잘 모르네. 다만………… 그녀들에 관한 기록에는 ‘유령 같은 출몰’, ‘바람의 정령과 같은 이동’ 같은 묘사들이 자주 나온다고 하 더군. 텔레포테이션(teleportation) 능력이 유전되는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거야.”

흐음~ 역시 순간이동은 뱀파이어로서가 아닌, 그녀 자신의 능력이었던 거군. 어쩐지 뱀파이어가 무지 빠르다곤 해도 순간이동 능력까지 있다는 얘 기는 못 들어봤다 했더니…………

“그럼………… 그 마녀 가문을 지배하는 뱀파이어에 대한 기록도 있나요? 에레보스 넘버 투, ‘공간의 지배자, 시그마’도 능력이 좀 애매해요. 안개화는 못하는 것 같은 데, 자기 공간…… ‘영역’은 만들 수 있더라구요.”

“글쎄…..? 더 이상은 나도 잘 모르겠군. 방금 말한 기록도 실은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고 ‘마신일’ 군을 통해서 들은 얘기였어.”

흠. 그쪽 얘기는 역시 그 남자로 이어지는 건가? 계속 ‘인연 맺기 싫다’고 했었지만………… 결국 그 남자에 월급 준다는 곳・・・・・・ ‘세계정화재단’이란 수 상한 회사에는 나 스스로 찾아가 봐야 하려나…………..? 우리 쪽에도 오컬트 존재 에스가 생겼고, 당장 며칠 후에 싸워야 할 뱀파이어 커플 시그마와 산 드라에 대한 정보도 필요하니… 아, 라프의 상태도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구나? 으으음. 역시 가급적 빨리, 내일 모레쯤 한 번..

“헌데, 자넨 지금 나에게 다른 할 말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었나?”

“아……참! 원판!”

난 뒤늦게 인상을 긁으며 물었다.

“그 자식, 내가 일어나기 전에 슬쩍 나갔다면서요? 어디 간대요?”

“내게는…………… 예전에 머물던 아파트에 잠시 들를 일이 있다고 하더군.”

내가 쳐들어가서 ‘블러디 울프’ 부대와 싸우다가 정글도에 흠집 생겼었던 그 아파트인 모양이군.

“언제 돌아온대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 친구가 내 수하도 아닌데 일일이 보고할 리가 있나.”

그 자식, 옛날 아지트에는 또 뭔 볼 일이 있어서… 아, 아니. 그냥 괜히 자리를 피한 건 아닐까…? 젠장! 삼자대면으로 원판과 닥터 제이, 두 음 흉남들의 꿍꿍이를 들어보고 싶었건만……… 우연하게도(?) 내가 잠에서 깨기 전에 원판 놈이 외출을 해버린 것이다. ……쳇. 잠시 더 참아 줘야겠군. 이제 닥터 제이가 함께 있게 된 이상, 삼자대면 겸 회담(?)은 언제든 할 수 있을 테니…………

「주인님.」

“음. 왜, 요몽.”

「소령 님하고 미령 님이 공항에 도착하셨어요. 아, 사영 님도요.」

“어, 그래?”

내일이 소교의 생일이라 가족들이 모두 모이기로 한 것이다. 내 친구이자 모두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천우신’도와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얼마 전의 ‘KKK단에 의한 캔들 리 암살 기도’ 사건 때문에 꽤 바쁜 상황이라고 했다.

“저기. 죄송해요. 교대로 하기로 해놓고, 계속 가게를 맡기게 되네요.”

“난 상관없네. 차에서 대교 양이 기다릴 테니 가보게. ………아. 그 전에 거기 그 출입구 왼쪽의……… 어, 그래. 그 마른 오징어 봉지를 옆 칸으로 옮겨 걸어 주게.”

내가 영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하자, 카운터의 닥터 제이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 약 1분 22초 후부터 그 위치에 비칠 햇빛이 가장 이상적인 각도로 ‘마른 오징어 구매 충동 증가 효과를 가져 올 것이며, 이는 약 11분 가 량 지속될 걸세. 그리고 그 시간 안에 해장술과 안주를 찾는 인근 노동자 두 명이 가게를 방문할 가능성이 78.4%에 달하네.”

“……아, 예에.”


나는 약간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가게를 나와 키트 1.5호에 올랐다. 출발해서 큰길로 나가는 지점에서 잠깐 멈춘 사이에 백미러를 보니, ‘인근 노동 자’로 보이는 분들 두 명이 우리 가게로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 후, 나와 대교는 시내의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백화점 앞으로 나왔다. 우리가 여길 온 건, 사영 어르신과 소미령이들이 공항에서 곧장 이쪽으로 올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백화점 앞은 꽤 많은 사람들이 오가거나 서 있었지만, 약간의 역용술(易術)을 쓰고 있는 대교 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훗. 이런 상황도 산드라가 보면 못마땅해 하려나…………? 며칠 후면 세계 최강의 암살단과 생사결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예비 처제 생일 파 티 준비나 하고 있으니 말야. 솔직히, 마음속에 불안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특히, 아직 한 번도 직접 만나보지 못한 에레보스의 넘버 원이 란 놈이 대체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진 놈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또한, 이번 일………… 에레보스가 12인의 사도를 배신하고 날치기로 한 상황 자체가 프리메이슨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높아. 내가 생각해 봐도 나란 놈은 수하로 쓰기엔 너무 위험하고 기분 나쁜 요소가 많 은 타입이잖아…? 내가 사도들 입장이라도…………… 수모를 참아가며 굳이 스카웃하는 것 보단, 가급적 없애버릴 방법을 더 찾겠지. 뭐………… 그건 이해 가 되긴 하는데………… 이번 에레보스 사태에 대한 12인의 사도들의 공식 입장은, 어제 밤 원판 놈이 라면으로 야식 먹고 나서야 밝혔었다. 내용은…… ‘우리도 잘 키워 놓은 애들이 배신해서 열 받고 골치 죽겠음. 하지만 우리도 감담 못할 애들이니, 진유준 선생이 대신 처리해 주면 고맙겠삼.’

……대충 이랬다. 그렇다면 놈들에게 대한 정보라도 알려달라니까, 그것도 곤란하단다. 본래 에레보스 멤버들은 12인의 사도가 각각 한 명씩 극비 리에 양성한 거라 사도들도 자기가 키운 에레보스가 아니면 잘 모른다나? 게다가 넘버 원을 포함한 몇 명은 바뀐 지 얼마 안 된 사도들의 전대 사도 들이 양성했던 거라서 지금의 사도들은 몇 번 본 적도 없다고………… 쳇. 그야말로 뻔한 수작이지. 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 더 따지기도 어렵 고…………… 일단은 적당히 넘어갈 수밖에 없어. 뭐…………… 그렇다고 내가 아주 순순히 그냥 넘어가 줄 놈은 또 아니지?

“대교.”

“예, 오라버니.”

“어제 밤, 내가 원판에게 했던 얘기 말인데………… 음. 내가 놈들에게 ‘에레보스를 처리해 주는 대가를 요구한 거 말야.”

“아…………! 예. 12인의 사도들이 곧 ‘승인’했다면서요?”

“그래. 그러니, 우리……… 뭘 요구할까? 세계가 모두 자기들 거라는 자들에게 말이야.”

“후후. 그야 유준 오라버니 마음이죠.”

“으음~ 조촐하게………… 미국이나 유럽에서 경치 좋고 살기 좋은 땅 덩어리를 뚝 떼어달라고 할까? ‘대교 랜드’ 만들게 말야.”

“어머?”

“좋잖아? 대교 랜드에 가면 대교의 이름을 딴 바다도 있고, 대교 산도 있고, 대교 강에 대교 다리에… 아, 대교 대교는 좀 헷갈리려나?”

“아이 참. 전 오라버니께서 주시는 건 뭐든 좋지만………… 그래도 그건 좀 창피할 것 같아요.”

“훗.”

사실 대교 랜드는 방금 막 생각난 거고, 처음부터 딱히 뭔가 욕심나는 것이 있어서 대가를 요구했던 건 아니었다. 12인의 사도가 곤란해할 만한 일 이면 뭐든 상관없는 것이다.

“뭐…… 대교 너도 천천히 생각해 봐.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말야.”

그래. 놈들은 내가 며칠 후 에레보스 놈들에게 당하여 세상하직하고, 어제 밤의 약속도 무효가 되길 기대하고 있겠지만…. 내가 어디 순순히 당해 줄 놈인가? 나, 진유준….. 꽤 독한 놈이라구.

「주인님.」

응? 이제 오는………….. 에? 기다리던 나와 대교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더 놀라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고급 차가 많이 오가는 서울 시내 일지라도 보기 힘든 차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롤스로이스……? 그것도 최고 대빵 커서 안에 욕실까지 있을 법한・・・・・・ 그야말로 영화나 해외 토픽 (?)에서나 보던 거잖아?

“어머! 저 애들이 왜 저렇게 사람들 눈에 띄는 짓을……”

대교가 조금 당황했고, 나 역시 지금 막 차에서 내리고 있는 사영과 소미령이들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소령이가 먼저 쪼르르 달려 와 내게 매달려 버렸다.

“유후~! 오랜만! 유준 오빠, 아니 형부우-!”

“어, 야아!”

「……지금 이쪽을 촬영 중인 휴대폰의 데이터는 전부 제가 손봐 놓겠습니당.」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에고. 일단 좀 대피해야겠다. 난 서둘러 백화점 옆의 골목으로 모두를 이끌고 들어가서 나름 더 외진 구석까지 가서야 입을 열었다.

“어, 어쨌든 반갑긴 하다, 니들. 아………… 그리고 장인 어른도 잘 오셨어요.”

“흠. 장인이란 호칭은 아직 반갑지 않네. 뭐…… 잘 오긴 했네.”

훗. 여전히 까칠하려고 하시나, 그래도 많이 풀어진 느낌이로군.

“한국엔 처음이시죠? 어떻습니까?”

“처음은 아니야. 하지만…………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라네.”

응?

“내 목표가 되자 곧바로 한국으로 도망친 녀석이 있어서…… 뭐, 관광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오래 머물지는 않았었단 얘기였네.”

역시 그런 얘기였군. 하여간 무서운 장인 어른이라니까.

“후후. 그럼 이번엔 천천히 노시다 가세요. 우리 부모님들도 곧……”

“아니, 그럴 순 없지. 캔들 리 경호도 경호지만…… 으음. 그와는 별개로, 자네 부모님들과의 만남은 좀더 신중하게 길일을 정해야 할 것이야.” 이 양반, 역시 보기보다 구식……. 응? 한쪽에서 대교에게 가벼운 책망을 듣고 있던 소령이의 항변에 내 귀가 쫑긋(?) 반응했다. 뭐………..시라? 아까 그 차가 ‘미령이의 남자 친구가 보내준 거였다고? 난 물론이고 사영 어르신과 대교의 눈도 잔득 커지며 미령이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미령이는 비 밀을 폭로한 소령이를 노려보며 입술을 삐죽였지만, 곧 우리 모두의 눈빛 공격에 항복을 선언했다.

“미안해요. 진짜 남자친구도 아니고, 숨기려고 했던 것도 아니에요. 사영 아빠가 괜히 오해하실 것 같아서…………”

사영 아빠는 또 뭔 호칭…… 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진짜 남자친구가 아니라고? 아니, 그보다 미령이 같은 어린 소녀에게 저런 차를 선뜻 보 내주는 남자가….. 으~ 이거 더 수상하잖아? 미령이 저 녀석 설마, 원조……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더 추궁하는 시선을 마 구 발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 참! 그 사람,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가지고 곤란하게…………”

“헤헤~ 꽤 멋진 사람이에요. 중국인이 아니고, 백인이긴 하지만요.”

“백인?”

소령이의 연이은 폭로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미령이의 전생 아빠, 사영 어르신이었다.

“사실이냐, 미령아!”

“아…… 그게, 정말 남자친구 아니에요. ‘자니’는 그냥………”

응? 지금… 뭐라고? 설마…………

‘자니’라는, 꽤 흔한 이름 하나 듣고 대뜸 에레보스의 ‘크레이지 파이어, 자니’와 연관시키는 건 너무 뜬금없는 일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아무래도 가볍게 들어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저께………… 전격의 악마 토르가 무심코 자니 얘기를 꺼내자, 환영의 천사가 막았었지…………? 초롱이도 자 니에 대해서 뭔가 언급을 하려다 못했………… 아, 가만? 그때 분명 초롱이는 ‘자니가 미국에서………… 까지 말을 했었어. 뭐야, 설마 진짜 그 녀석 이…………? 난 새로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었으나, 미령이는 나보다 몇 배나 강력한(?) 사영의 시선과 심각한 살기(?) 때문에 날 의식하지 도 못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냐.”

낮게 착 깔린 음성이, 마치 ‘살해 목표물의 이름을 묻는 듯한 분위기로군.

“그냥……… 우연히 만나서 잘은 모르고…….”

“뭐어?”

“아, 아직 뒷조사를 해볼 정도로 친해 진 것도 아니란 말예요. 평범한 회사원 같은 건 아닌 줄 짐작했지만……… 그래도 공항에 갑자기 저런 차를 보 낼 정도의 사람일 줄은……”

“……나이는?”

“스물…………. 대여섯 정도?”

“풀 네임.”

“그건・・・・・・ 몰라요. 아이 참. 고작 세 번 만났을 뿐이에요. 그것도 두 번은 우연이었고요.”

“우연이 겹치고 겹쳐서 필연이래요오~”

“언니!”

소령이가 끼어든 틈을 타, 대교는 슬며시 사영의 팔을 잡았다. 대교가 전음으로 뭐라고 말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영도 결국 어느 정도 ‘살벌한 아 빠’의 표정을 풀고 있었다.

“크흠. 미령이 네가 철부지 바보도 아니고, 알아서 잘 처신할 거라 믿고…… 음. 하지만 다음에는 이런 일도 나에게 숨기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네. 그럴게요, 아빠.”

미령이답지 않게(?) 순종적인 태도와 대답에 만족한 사영이 비로소 완전히 인상을 폈다.

“후후. 누군지 몰라도, 우리 미령이를 놀라게 해주려고 했던 모양인데…….”

대교가 미령이의 어깨를 감싸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부자인지 몰라도… 앞으로 큰일이로구나. 누구라도 우리 미령이를 진짜 놀라게 하긴 힘들 텐데 말이야.”

대교의 말에 미령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에 다소 씁쓸해 하는 표정인 건 틀림없는 것 같았다. 하긴, 미령이 자신도 범 상치 않은 신분인데다, 주변에 온통 상식을 초월한 존재들뿐이니………… 설사 상당한 재벌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해도 미령이 앞에서 폼 잡는 데는 애 로사항이 많겠어. 으음. 굳이 ‘놀라게 하는’ 것이 기준이 된다면… 아직 누군지 모를 자니가 내가 아는 그 녀석쯤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잠시 후. 우린 예정대로 백화점에서 쇼핑을 시작했다. 조금 전의 일은 벌써 잊은 듯, 소령이와 미령이는 다시 찰딱 자매가 되어서 함께 소교의 생일 선물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교 역시 녀석들과 함께 쇼핑하는 재미에 빠지는 것 같았고, 사영 어르신은 그런 자신의 딸래미들을 흐뭇한 표정 으로 따라다니고 다니고 있었다. ・・・쳇.

본래는 나도 별 생각 없이 어울려 다닐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이거 아무래도 자꾸 신경이 쓰여서・・・・・・ 아, 가만? 나는 대교에게 화장실 간다고 만 알리고 슬쩍 뒤로 빠졌다. 예전에 이 백화점에 왔을 때, 어딘가에 스티커 사진 찍는 곳이 있었다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요몽에게 자니의 얼굴 사진을 뽑도록 해서 미령이나 소령이에게 보여줘 봐야겠어. 아까 그 차를 보내준 렌트 회사로 비용을 송금한 계좌도 수상하다하니, 짚고 넘어 가는 것이 좋겠………

「주인님!」

응? 돌아보니, 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웬 놈팽이 하나가 우리 소미령이들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애인인 듯한 여자도 있는 녀석이 개념 없이………… 으음. 근데 저 녀석뿐이 아니로군. 가만 보니까 넓디넓은 백화점 안에서 소미령이들에게 향한 시선은 한둘이 아니었다. 대교 는 변장 중이라서 뺀다 쳐도, 소미령이들도 워낙 어디서나 튀는 소녀들이기 때문이었다. 깜찍함에 깜짝 놀랄 용모도 용모고, 여기서는 한국과 중국 어가 섞인 수다 소리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는 듯 싶었다. 그건 그런데…… 이런 일로 요몽이 날 불렀을 리가……………

어? 내 시선이 멈춘 곳은 나로부터 가장 먼, 내려가는 쪽 에스컬레이터 앞이었다. 이번 층 입구의 기둥 옆에 조금 낯익은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청바지에 청점퍼를 입고 머리에는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지만,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저, 저 녀석은……… 이런………… 제기! 진짜 에 레보스의 자니잖아…………? 저 녀석이 정말로 미령이 원조 교제(?)의 주역이었단 말야? 이건 또 무슨 전개인 건지………… 의심을 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확인이 되니까 상당히 난감했다. 내가 어쩔까 망설이는 사이, 대교는 물론이고 사영까지 뭔가 감을 잡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대교가 가족 대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략 5분 후. 일단 큰 키로 소위 먹어 주면서, 지나는 한국 아가씨들의 시선을 받고 있던 자니가 문득 긴장했다. 그제야 자신의 바로 뒤에서 살기를 발산하기 시작한 대교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아…………! 미스~??”

“대교.”

짧게 이름을 밝힌 대교는 자니가 아는 체를 하거나 말거나 아래층 방향을 턱짓해 보였다. 무심결에 주춤 뒤로 물러서던 자니의 등이 툭, 내 몸에 부 딪쳤다.

“……오우. 두 사람 다, 너무 감이 빠르네. 하지만 난 아무 짓도………….”

“닥치고! 얌전히 따라 나와.”

애써 너스레를 떨려던 놈의 입이 다물어 진 건, 나와 대교의 살기가 장난이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자니 놈은 우리 불량(?) 남녀 가 양쪽에서 압박하는 가운데, 얌전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왠지 삥 뜯기(?) 분위기의 주체가 된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10분쯤 후. 우린 자니를 백화점 부근의 나름 으슥한(?) 골목 안으로 데려갔다. 우리 뒤의 골목 입구에 빠르게 공사 안내 표지가 세워지며, 공 사현장 인부로 위장한 내 수하들이 길을 막았다.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한 대……… 아, 아니, 이건 아니고…… 으음. 뭐부터 물어야 할지…………

“당신, 에레보스의 자니…………! 맞죠?”

대교가 먼저 차갑게 묻자, 자니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대결 약속을 해놓고…… 이 무슨 파렴치한 짓이죠?”

“파렴・・・・・・치? 움・・・・・・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난….. 으움~ 난 그저 미령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오우. 움. 그게, 움……”

냉랭한 대교의 반응에 자니는 더욱 난처해하며 혼자 입속말로 애매한 소리만 웅얼대고 있었다. 평소에는 가볍고 말이 많지만 정작 중요한 일로 상 대를 납득 시켜야 하는 상황에는 약해서 버벅대는 타입이지 싶었다.

“너, 에레보스에서………… 탈영(?)한 거냐?”

결국 내가 핵심 사항을 물어봐 주니까, 즉시 반색을 한다.

“오우~ 맞아! ・・・・・・움? 그게 맞나? 탈영? 우움. 역시 맞아! 우리는 군대라고 할 수도 있지.”

“우리 미령이・・・・・・ 때문에?”

“아핫? 미령… 움, 핫! 움~ 미령, 귀엽고, 예쁜, 새침데기………… 자니………….. 조, 좋은……가? 핫핫핫! 핫학~? 으~!”

이 녀석, 순진한 건지 그냥 바보인 건지…………… 웃다 말고 배를 잡고 쭈그려 앉은 자니 놈의 점퍼 안쪽에서 붉은 선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대교. 나도 궁금한 게 많지만.. 일단 이 녀석, ‘치료’ 좀 해주면서 듣기로 하자.”

“……예. 그래야겠네요.”

“흐으~ 비겁한 기습을 당해서………… 그 자식…………! 침묵의 유령…………!”

………흠. 이 탈영병(?)은 역시 겨울의 여왕과 침묵의 유령에게 추격 당하다가 한 판 붙기도 했었나 보군. 근데 부상을 입힌 건 겨울의 여왕이 아니라 침묵의 유령………? 침묵의 유령은 벽을 맘대로 통과하는 능력 말고도 뭔가 강력한 공격 수법이 있는 건가?

「주인님. 천의마군(賤醫魔君)을 호출했………… 어맛? 주인님!」

요몽의 경고 직후, 나와 대교에게도 심상치 않은 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들 머리 위쪽 옆 건물의 옥상………….! 예상대로 겨울의 여왕이 네. 회색 정장차림에 여전히 날카롭고 완고한 기숙사 사감 분위기의………… 흠. 지금은 몸 주위로 때 아닌 흰 눈가루(?)가 날리고 있는 것이…………… 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 겨울의 여왕다운 모드인 것 같군. ……어, 근데 콤비인 침묵의 유령은・・・・・・ 음? 침묵의 유령은 자니로부터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의 ‘벽’에서 스르르- 출몰(?)하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창백한 안색의 병 걸려 죽은 유령 분위기인 건 여전했으나, 품에 긴 칼을 안고 있는 점이 전과 달랐다. 일본・・・・・・도? 저것이 자니에게 부상을 입힌 무기인건가?

“실례.”

겨울의 여왕이 짧은 인사와 함께 우리 앞으로 뛰어 내렸다. 아니, 눈보라와 함께 날아 내렸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부끄럽게도………… 우리들 내부 문제를 들키고 말았군요.”

돌려 말하고 있었으나 ‘그러니까 자리 좀 비켜줄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로서는 다소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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