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53화 : 위기의 소녀.
3. 위기의 소녀.
정말이지 뜬금없이, 우리 미령이 때문에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크레이지 파이어, 자니…………! 그리고 그를 추격해 부상까지 입혀 놓은 옛 동료들의 등 장! 이럴 때는 보통………… 그러니까, 내가 명랑 소년 만화(?)의 주인공이라면… 전후 상황을 따질 것도 없이 무조건 저 불쌍한(?) 자니를 구출해주 고 보겠지…? 하지만…………
“어, 그래. 내가 보기에도 댁들 내부 문제인 거 같군.”
난 어른(?)인 관계로………… 이렇게 겨울의 여왕 콤비 쪽 입장을 먼저 인정해줄 수밖에 없어.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여긴 내 구역이거든? 이거, 어떻게 생각해?”
침묵의 유령은 아직 별다른 기색이 없었지만, 겨울의 여왕은 살짝 냉소를 띠기 시작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죠?”
“뭐… 배신자를 어떻게 하던지 맘대로 해. 다만, 니들끼리 싸우다가 서울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으면, 그 꼴은 못 본다 이거지 “뭐.”
나는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고 조금 뒤로 물러나며 대교까지 물러서게 했다. 그 사이 몸을 일으킨 자니의 몸에 사르륵~ 불길이 일었다.
“어, 너도 마찬가지야. 어딘가 그을리기라도 하면, 너도 가만 안 둬.”
나의 경고와 함께 정글도에 맺힌 내력이 파르스름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살짝 뽑힌 대교의 청명검도 찡~ 날카로운 음향으로 화답했다.
“오우~ 맙소사! 나보고 어쩌라고!”
짜식이, 괜히 곤란한 척하네. 정말 우리에게 피해를 주기 싫으면 얼른 우리가 없는 곳으로 튀면 되는 건데, 그럴 형편은 안 되는 모양이지? “당신들 정말……!”
겨울의 여왕 얼굴에 짜증이 떠오르며 그녀 주변의 눈보라가 더욱 짙어지며 거세지기 시작했다. 얼핏, 눈보라 속에 치명적인 암기형태의 결정 같은 것이 생기는 것도 감지되었다. 이대로 전초전….? 까짓, 못할 것도 없지. 여하간 지금의 내 입장 표명은 정당하다 이거야.
“누나!”
예상, 혹은 기대대로 침묵의 유령이 입을 열었다.
“그만두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대로 배신자를 넘겨주자고?”
“어쩔 수 없잖아. 넘버 원은 약속된 날까지는 이 사람과 싸우지… 아니, 접촉조차 하지 말라고 명령했어. 자니를 놓쳐서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명 백히 우리 실수야.”
“……쳇.”
흐으음. 저 남매들 역시 넘버 원에 대한 충성심은 확실하군. 갈수록 넘버 원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는 걸……? 대체 어떤 녀석이기에 이런 녀석들이 이렇게 철저히………
음? 침묵의 유령은 갑자기 걸음을 옮겨 자니에게 다가섰고, 자니는 흠칫 긴장하여 불길을 일으키며 물러섰다. 그러나 침묵의 유령은 자니를 무시 하고 지나쳐 내 앞으로 왔다.
“진유준 씨……!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응? 뭐, 뭘?”
쯧. 가까이 보니까 더 깡마르고 음침한 느낌의…………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의 유령 분위기네.
“우린 당신의 뜻에 따라 당신의 구역에서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만약 다른 장소에서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무조건 방해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이, 이 유령, 보기보다 화끈하긴 한데. 아직 협상의 묘미(?)는 잘 모르는 것 같기도…
“좋아. 당연하지. 저 녀석은 본래 우리 편도 아닌데 뭐.”
난 선선히 동의해 주었고, 침묵의 유령은 아주 깔끔하게 돌아섰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인 겨울의 여왕이 자니와 나를 번갈아 노려보았으나, 결국 그녀도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눈보라에 쌓인 남매가 서서히 땅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밝은 한낮임에도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나는 씨익- 사악하게(?) 웃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내 구역’이 어디까지인지 기준을 정하지도 않고 가버렸네, 그려.
얼마 후. 나는 백화점 부근의 패스트푸드 점에 자니와 함께 마주 앉았다. 대교는 먼저 백화점으로 돌아갔기에 나와 자니 둘뿐이었는데, 테이블에는 4,5인분의 세트 메뉴가 쌓였다.
“오우~ 예! 이제야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군!”
희희락락 빅 사이즈 햄버거부터 입에 무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약간이지만… 진짜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딴 건 몰라도 배곯는 것처럼 불쌍한 건 드문 거니 말이다.
“음. 음! 굳~! 음~ 굳! 한쿡 버거도 이렇게 그레이트 할 줄은!”
“………배고프면 다 그런 거지. 암튼, 너도 능력을 쓰는 만큼 음식으로 에너지 보충이 필요한 모양이지?”
“음! 음! 것두, 그렇지만…… 꿀꺽! 침묵의 유령 놈 때문에………… 안심하고 식사할 시간이 없어서…….”
하긴, 침묵의 유령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으음. 어쨌건 음식으로 에너지 보충하는 건 ‘투명 소녀, 소냐’나 다 른 CR 아이들과 같군. 나 같은 경우도 뭘 먹지 못하면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하지만, 실제 싸움에 필요한 에너지인 내력은 별개라고 할 수 있다. 하지 만 소냐를 비롯한 CR애들은 음식물 섭취가 능력에 직결되는 모양이었다. 연료(?) 대비 능력 발휘의 규모를 보면 고작 1리터의 주유로 몇 천 킬 로쯤 갈 수 있는 차라고 할 만큼 엄청나게 연비가 좋은 셈인 것이다. 하여간, 어쨌든………… 나의 내력처럼 행성 에너지를 끌어 쓰는 것이 아니라, 자체 생산 방식이란 건데…
“니들 다 그런 체질인 거냐? 아, 시그마와 산드라는 조금 다른 것 같긴 했지만…….
“음………… 역시 우리 멤버들의 정보를 알아내고 싶어서 날 도와준 거였나?”
자니의 표정이 비로소 약간 신중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난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아니. 궁금한 게 많은 거야 당연하지만, 굳이 네 녀석에게 빼내고 싶진 않아. 네 녀석을 구해 준 건 단지…………
난 미령이가 있는 백화점 쪽을 슬쩍 돌아 본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 미령이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얘기만 듣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얼른 그 얘기나 털어놔봐. 응?”
비교적 태연히 웃으며 물었지만, 내 속마음은 달랐다. 혹시라도 미령이가 상처받을 만한 일이 있었으면………… 넌 네 옛 동료들보다 먼저 우리 손 에 아작 나고 시멘트로 데코레이션해서 인천 앞 바다에 퐁당이다!
나의 깍두기스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니는 약간 쑥쓰러워 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음……… 내가 그녀를 처음 보게 된 건, 그야말로 달콤하고 절대적인 운명의 안내에 의한 것이었어. 그래……… 그날 밤, 내가 그녀의 침실에 침입했던 건 어디까지나….”
당장 시멘트 섞어야겠군.
“아, 물론 결국 13호가 있는 객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즉시 나와야 했지만……”
음. 시멘트 잠시 대기.
“나의 작지만 정열적인 불꽃에……… 살며시 드러난 그녀의 잠든 모습은…… 우으~ 난 절대로 평생 그 순간의 감동을 잊지 못할 거야! 난 그날 밤, 밤하늘을 날고 또 날았지만 열기를 삭힐 수 없어서, 결국 바다 속에 뛰어들어야 했어! 하지만 그 차갑고 거대한 바다도 나의 불타기 시작한 하트를 식히지 못하고 밤새 부글부글 끓어야 했어!”
・그러니까, 원래는 ’13호’, 즉 조담놈과 끝내지 못했던 승부를 내기 위해서 호텔에 침입했던 건데, 미령이 방으로 잘 못 들어갔고……… 한눈에 뿅 갔다 이거군.
“난 결국 참지 못하고 아침이 밝기 전, 다시 그녀의 침실로 향했어!”
시멘트 다시 섞자.
“그리고… 난 보고 말았지. 그 어둡고 아득한 창가에서………… 애처롭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그녀를.”
시멘트… 가, 문제가 아니라! 뭔 소리여, 이건?
“나, 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어. 너무나 간절히… 내 이 두 손의 열기로 그녀의 눈물을 마르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야, 야! 누구 불태워 죽일 일 있냐?”
내가 무심결에 끼어들자, 자니는 입술을 불쑥 내밀며 인상을 긁었다.
“아, 알았다. 그냥 들을 테니 계속해.”
나름 낭만적인 고백에 초치지 말라는 무언의 항의 때문에, 난 계속 얌전히 녀석의 오버스런 얘기를 들어 주어야 했다.
대략 30분 정도 후. 자니는 사춘기 소년 같은 얼굴로 식은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고, 난 녀석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던져야 했다. 이 녀석이 훔쳐 봤던 걸 빼면, 미령이가 인식할 정도로 만난 건 우연을 가장한 두 번과 따로 약속은 했지만 아주 잠깐 스쳐간 수준의 만남 한 번…………! 아니, 아 니………… 만남의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결국 중요한 건 ‘거의 100%’ 이 녀석 혼자의 짝사랑이란 거야. 얘기만 들어도 그게 너무나 확실하건만, 이 녀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냐? 계속 미령이 주위를 맴돌면서 엉뚱한 선물 공세나 할 거야?”
“엉뚱한…… 음. 선물? 아, 오늘 공항에 차를 보내 준 거 말이군.”
자니는 손에 묻은 소스를 쪽쪽 빨아먹는 것으로 식사를 마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게 다가 아니란 건 알아.”
“뭐?”
“미령은….. 나의 작고 달콤한 소녀는………… 그런 차가 부러웠던 것이 아니야. 그녀가 바라보며 눈물지은 건……… 그녀가 바라보던 사람은 자기 동 생……! 미령 보단 못해 도 꽤 귀여운 그 소녀는………… 지금 자신의 연인과 한참 뜨거운 사랑에 빠져 있거든. 그러니 그녀가 진정 슬퍼하는 건, 어째서 자신에겐 나처럼 멋진 왕자가 나타나 주지 않는가…………! 바로 그거였다구!”
…………아마도 미령이가 소령이와 천우신이 함께 호텔을 나서는 걸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장면 해석은 역시 너무나 터무니없었다. 천 년 전부터 사치 를 모르던 천우신이 어쩌다 그런 차에 소령이를 태우고 외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령이가 그런 장면을 보고 눈물지었을 리가 만무했다. 보나마 나 미령이는 암 생각 없이 보고 있는 걸 지 멋대로 해석한 것 같은데…………… 이건 콩깍지가 씌어도 정도가 좀 심한 상태로군.
“차를 보낸 건, 나의 장난! 가벼운 장난에 불과했어. 하지만…… 음. 어쩐다? 앞으로는 진짜 멋진 선물만 해주고 싶었는데·
문득 씁쓸 + 쓸쓸해지는 표정.
“아무래도 이제 힘들 것 같아. 겨울의 여왕은 그럭저럭 상대할 수가 있겠는데…… 침묵의 유령, 그 자식이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 난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자니는 침묵의 유령에게 칼질 당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기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설핏 웃었다.
“당신, 곧 그 녀석들과 싸우기로 했지?”
“어, 그래.”
“이길 자신 있지?”
“응.”
“그럼 난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겠네?”
“그야 네 맘이지만….. 좀 쪽팔리지 않냐?”
“……창피하다는 뜻이지?”
“맞아.”
자니는 붉어진 얼굴로 애써 계속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그래. 창피해. 이 천하의 자니가………… 훗! 정말 몰랐네,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생기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지 말야.” 이 녀석…………
“…………다 그래, 임마. 니들이… 아니, 니가 그 동안 잘못되었던 거고.”
“다 그렇다고…? 당신, 진유준도?”
“당연하지.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강해질 수 있는 거야. 죽으면 안 되니까, 내가 죽으면 슬퍼할 누군가가 있으니까 말야.”
“……그런……건가? 나도 죽으면 미령이 슬퍼할까?”
“당연・・・・・・ 그, 글쎄?”
“아아~ 역시 그렇겠지? 그래, 미령은 날 그리며 어두운 밤하늘에 그 가련한 눈물을 뿌리겠지…………?”
야, 야! 난 ‘글쎄’라고 했다? 굳이 강조하기 미안해서 속으로만 외쳤지만,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내가 소리 내어 말해 줬어도 못 알아들을 상태인 듯 싶었다.
“……음. 결심했어.”
응? 자니 녀석은 내게 손을 내밀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충고 고마워! 나, 크레이지 파이어…………… 자니 엠블럼! 그녀를 위해서, 미령을 위해서 반드시 살아남겠어! 만약 녀석들이 떼 지어 덤벼들더라도 반 드시………! 만약 넘버 원이… 음……”
왠지 자신이 없어져서 망설이던 자니는 어물쩍 ‘여하간 살아남겠어.’라고 말을 맺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 아무리 각오를 단단히 해도 넘버 원은 무서운 모양이군. 어쨌거나…………
“오늘 식사… 언젠가 꼭 갚아 주겠어. 고마워!”
어느 정도 예전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떠나는 자니를, 나는 잡지 못했다. 왠지 녀석을 내가 부추겨서 위험한 상황으로 내몬 기분이 들기도 했 다. 하지만…………… 어린애도 아닌 녀석을 내가 보호해 준다고 나서는 것도 웃기고………… 으음 모르겠다. 여하간 살아남아라, 이 엉뚱한 암살자 녀석아! 파 이팅~!
그날 저녁.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소미령이들은 우리 집 거실에 소교에게 줄 선물을 늘어놓고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핏 보기에, 소교뿐 아니라 ‘금동이’에게 줄 선물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후훗. 결국 금동이 생일도 소교와 같은 날로 정했다 이거지?”
내가 웃으며 묻자 대교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홍콩에선 벌써 그런 컨셉으로 파티를 준비 중이래요.”
난 마주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심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난 지금 우리 집 옥상으로 올라와 있는 상태이고, 우리 집은 다른 집들보다 높은 편이라 주 변의 풍경이 거의 막힘없이 보였다.
하지만………… 자니 녀석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수상한 낌새도 없군. …………쯧. 난 역시 오지랖이 너무 넓은 건가…………? 실질적으로는 이제 겨우 두 번 밖에 못 만난 녀석이고, 냉정히 말해서 놈들 중 누구라도 쉽게 믿어선 안 되는 상황인데…………
“음. 아무래도 계속 신경이 쓰이시는 모양이네요.”
“응? 아…… 그렇지 뭐.”
말을 안 해도 날 너무나 잘 아는 대교가 곱게 웃으며 팔짱을 끼어 왔다.
“이렇게 다정한 분이라서 제가 더 좋아하는 거예요.”
크흠. 얜 또 왜 쑥쓰럽게스리……………
“하지만 적어도 이번만은 그를 냉정하게 보내신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그럴・・・・・・까?”
“예. 우린 지금 겉으로 웃을 뿐, 결코 쉽게 웃을 수도… 그래서도 안 될 상황 속에 있으니까요.”
으음. 역시 대교도 속으로는 나 못지않게 각오를 다지고 있었군.
“그리고…… 저 때문에라도 말예요.”
“응? 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돌아보니, 대교의 표정이 어느 사이에 서늘한 마중제일녀(魔仲第一女) 모드로 변해 있었다.
“……우리 미령이의 짝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그런 왕자병 걸린 불장난 철부지 따위!”
에?
“이제까진 몰랐었지만, 만약 앞으로도 그런 껄렁한 양아치 암살자 따위가 계속 미령이 주위를 맴돌며 집적대는 걸 보게 된다면, 제 청명검이 결코 용서치 않을 거예요.”
이런, 이런……… 이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데……..? 이제 보니 대교도 꽤나 까칠한 언니였군. …..아니, 예전부터 대교는 동생들에게 ‘어머니’ 역할 까지 겸하고 있었지…………? 으음. 이렇게 되면 나는 오늘 자니 녀석을 두 번 구해줬던 셈인가…………?
“더구나 우리 미령이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거늘……”
“어, 맞다! 같은 GM의 챈……!”
“후후. 그래요, 그 사람. 비록 신분은 아직 낮다고 하지만…………… 그렇게 성실하고 속이 깊은 남자는 일단 합격점을 줄 수 있지요.”
오~ 역시 우리 대교는 사람 볼 줄 아는구먼.
“그래. 그 친구가 정말 진국이지.”
“다만…… 그 사람 같은 경우는, 그가 오히려 아직 미령이를 제대로 보고 있지 않다니………… 그게 더 문제예요. 더구나……”
“어, 그 친구는 소령이를…………… 음. 하지만 그 친구의 소령이에 대한 감정은 진짜 연애 감정이 아닐 거야. 어디까지나 천 년 전의 소령이에 대한 동경 으로……”
“저도 그렇기를 바래요.”
챈, 그 친구…… 자니와는 반대의 입장에서 큰일 났군. 자칫하면 조만간 목숨이 위태롭겠어.
“사실, 미국에서 자니가 보았다는 미령의 우울한 모습은………… 바로 그 때문인 듯해요.”
음? 아까 미령이와 잠깐 따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그런 얘기까지 들은 모양이군.
“저도, 소령이도 짝을 찾았고.. 소교도 일단은 금동이라는 소중한 친구가 항상 곁에 있게 되었으니……… 자신만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했 던 모양이에요. 비록 미령이 스스로도 ‘잠깐의 허튼 생각이었다고 표현했지만요.”
흐으음. 천하의 미령이가 그런… 크리스마스를 앞둔 솔로들의 감정에 빠졌을 줄은………… 아, 그럼 이거, 자니의 판단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었던 건가…………? 물론 아무리 그래도 미령이가 ‘외로우니까, 양아치 암살자라도 좋다. 그저 놈팽이만 옆에 있어다오’라는 식의 생각을 할 녀석은 아니겠지 만 말야.
“그래서…… 내일 소교의 생일 파티에는 ‘GM의 중견 간부, 재키 챈’도 초대를 했답니다. 그 남자의 진심을 알고 싶어서요.”
에구. 조만간이 아니라, 바로 내일이로구나. 챈의 생사가(?) 결정되는 날이…………!
“제 마음대로 결정해서 화내시는 건……… 아, 아니 그보다…………”
대교는 문득 새초롬한 표정이 되며 내 옆구리를 살짝 찔러왔다.
“치이~ 뭐예요, 그런 표정은? 제가 설마 그 남자를 청명검으로 위협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아,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흠. 암튼, 내일 한 번 보자구. 사실 그 친구가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 나도 좀 화가 날 것 같기는 해. 남자가 자기 마음도 확실하게 보이지 않아서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하면 곤란하지. 암.”
“그……쵸?”
“우리 미령이가 어디 꿀리는 구석이 있다고…… 감히, 말야!”
“그쵸? 그쵸?”
아무래도……… 챈. 웬만하면 내일 어떤 핑계로든 나오지 말고 짱 박혀 숨게나. 꼭꼭. 난 말과 달리 속으로 그렇게 기원(?)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옥상에 올랐다. 식전에 가볍게 몸을 풀기 위해서였고, 보통은 아무도 없기 마련이었지만, 오늘은 웬 일인지 닥터 제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닥터 제이는 아침부터 나에게 매우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그는 경악하는(?) 나에게 태연 하게 덧붙여 말했다.
“……나도 함께 출발하겠다고 했네만,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가게는요? 단골 아주머니들의 원성은? 과학적, 물리학적 고찰이 숨 쉬는 점포 운영은?”
나는 나름 절실한 반대의 뜻을 표명했으나, 닥터 제이는 여유 있게 웃을 뿐이었다.
“훗. 그보다, ‘왜’냐고 묻는 것이 먼저 아닐까?”
“그야……”
“난 소교 양의 생일 파티 같은 일에 참석하려는 것이 아닐세.”
하긴, 닥터 제이와 소교는 친하기는커녕 아직 만난 적도 없는 사이지.
“중국의………… 자네 조직, 지하무림의 ‘비밀 연구소’에 가고 싶네.”
…………으음. 언제고 다시 얘기가 나올 줄 알긴 했지만…………
“그 동안 보아 온 몽몽 군의 능력과 이번 과제의 난이도를 계산해 봤을 때, 이제 곧…………… 빠르면 며칠 안으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 “네.”
“그래서………… 이제 슬슬 ‘준비’에 참여하고 싶으시다고요?”
“맞아. 설사 실질적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관여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적어도 하운 군을 위해서는 말이야.”
“……몽몽이 CR애들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아내서 실행한다 해도, 프리메이슨 놈들이 그것을….. ‘원판이 아닌 닥터 제이의 도움’ 때 문으로 인식하게 말이죠?”
“뭐, 그런 거지. 난 본래 CR의 창조주였으니, 더욱 설득력이 있을 걸세.”
하긴…………..! 흐음. 이 양반, 며칠 가게에서 얌전히 있다 했더니……… 이런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건가? 그리고.
“원판은요? 그 녀석은 잠깐 와서 라면만 축내고 나가서는 왜 안 들어오는………… 아, 어제 낮에도 잠깐 왔다 갔다면서요? 나 없을 때!”
“흐흣. 하운 군도 지금 좀 난감한 처지인 모양이야. 그 동안 꽤 오래 부재중이었던 사도 중의 한 명에게 호출된 모양이거든.”
“아, 필립…… 말이에요?”
“그런 것 같아. ‘골치 아픈 꼬마를 상대하러 간다’는 암시를 남긴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걸세.”
“암시…………? 어느 정도 안전지대(우리 집 부근)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그런 식인 겁니까?”
“뭐, 어디서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은가. 지금처럼 몽몽 군의 과학적인 필드와 자네의 다소 비과학적이지만 효과적인………… ‘엿보면 죽어’ 필드 중 심에 있을 때라면 몰라도 말이지.”
“그럼………… 필립은 그 녀석을 왜 호출한 걸까요?”
“글쎄………? 그 염세주의 꼬마의 생각을 난들 알겠는가마는…………… ‘진유준’ 자네에 대해서 새삼 여러 가지를 캐물을 생각이 아닐까 싶긴 해. 며칠 전 의 만남으로 자네에 대해서 잔뜩 호기심이 생긴 것 같으니 말야.”
“호기심……? 나에 대해서요?”
“후후~ 재미있는 현상이지. 지나치게 모든 일에 흥미를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상대하기 껄끄러운 꼬마였는데. 이제 헛점이 보이기 시작할 거 야. 아, 물론 하운 군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상대가 갑자기 등장 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혹스럽기도 하겠지만 말야.”
“어………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원판에게도 필립 얘기는 안 해줬었다고 했죠?”
“흐후후. 그래서 어제 헤어질 때 ‘고생 좀 하게.’라는 신호를 보냈었지.”
…………내참. 대체 둘 사이에선 뭔 신호를 어떻게 주고받으며 의사소통을 한다는 건지 감이 안 오네. 그야말로 ‘눈으로 말해요’라는 거야, 뭐야? “정말 둘이 같은 편 맞는 거예요?”
새삼 물었지만, 닥터 제이는 피식거리고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제 가게는 다시 수하들 중 한 명에게 맡겼는데 말야.
난 홍콩 행 비행기 좌석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보천구룡대의 요원이 가게를 봐줘도 별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도 괜히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 네? 그 동안 너무 화려한 멤버들만 써와서 그런가…………..? 어쨌거나, 이렇게 온 식구가 전부 출동하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 아, 어쩌면 원판은 귀 가를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가급적 그 녀석에게 맡겨야겠군. 난 기어이 원판의 핸드폰에 ‘가게 좀 봐라’는 메시지를 남기고서야 비행기 안을 확인 해 보기 시작했다.
내 옆에 대교가 앉아 있는 거야 당연하고, 내 앞으로 소미령이들과 사영 어르신… 그리고 또 그 앞에는 조담놈이 외로이 앉아 있군. 자룡대주가 함께 앉아 주지 않고 다른 어사조 멤버들하고 있어서 그런지, 다소 심통이 난 기색………인 거야 내 알바 아니고….. 음. 뭐, 별 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군. 최근 몇 번은 전용기를 이용했었으나, 이번에는 그냥 일반 항공을 이용하는 중이었다. 우리 외의 다른 승객들이 신경 쓰이는 걸 보니 나도 약 간 VIP물이 든 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내가 무슨 탐정 만화 주인공도 아니거늘, 항상 사고에 휩싸이는 팔자다 보니………… 내가 최대 한 조심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길인지도 모르지만……………
「주인님!」
에? 이런 제기, 생각하기 무섭게 엄한 놈이 타네. 출입문의 계단이 치워지기 직전에 쏘리~를 연발하며 올라타는 녀석은 다름 아닌 자니였다. 「주의하세요. ‘특정 패턴 에너지 왜곡 장비를 가진 자가 탑승하고 있어여!」
자니도 탈영하기 전에 몽몽 용 스텔스 장비를 지급 받은 모양이군. 이미 우리에게 얼굴 다 팔린 놈이 스텔스 장비는 뭐 하러………… 어, 가만? 지각 탑 승객은 자니 외에 한 명이 더 있었다. 일견, 검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20대 신사라는 것 외에 특별한 점은 없어 보였다. 자니는 언젠가의 나처 럼 ‘항공사 직원’으로 사기를 쳤는지 대충 앞에 앉는 것 같았지만, 검은 양복 남자는 좌석표를 들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뭐…지? 분명 처음 보는 인물인데……… 어째서 이렇게 익숙한…… 묘하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거지?
“요몽. 지금 ‘주의할 인물’이라고 한 건 혹시 자니가 아니라………”
「예. 불장난 자니 말고, 저 남자요, 저 남자!」
요몽의 확인과 함께, 천천히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남자에게서 더욱 불길한 기운을 풍겨오고 있었다. 자니, 저 멍청이! 추적자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도 눈치를 못 챈……… 아, 아니 잠깐…? 에레보스의 멤버가 변장을 하고 자니에게 접근한 거라면, 비행기 밖에서 해치울 수도 있었는데 굳이 자니와 함께 비행기에 오를 리가 없잖아…………? 그럼…… 누구야, 이 놈은? 내가 약간 노골적으로 노려보고 있는데도 정체불명의 검은 양복은 내 시 선을 무시한 채, 태연한 걸음으로 우리 좌석을 지나쳐 갔다. 우리 뒤의 세 번째 정도 좌석………? 으음, 어쩐……다? 이미 탔는데 섣불리 시비를 걸기 도 그렇고……… 내가 망설이는 사이에 비행기는 이륙 준비를 마치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쳇. 일단 두고 보는 편이 나으려나?
……………이런. 우리 대교는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군. 저… 자니 녀석 때문에 말이야. 소미령이들은 지들끼리 소근소근 수다를 떠느라 자니가 타는 걸 못 본 것 같았으나, 대교는 저 양아치가 감히 또.. ’라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린 채 자니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교. 지금 자니가 문제가 아니야.
-예?
난 천천히 뒤로 고개를 돌렸고, 대교도 따라서 뒷좌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두 사람과 시선이 마주친 정체불명의 사내가 쌔액- 기분 나쁘게 쪼 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놈의 얼굴이 실룩 스륵- 변하기 시작했다. 역용술(?) 아니, 그보다! 이게 뭐야………! 원판? 원판이 역술을? 혼란스러워 하는 우리의 의식 속으로 원판의 얼굴을 한 놈의 목소리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유준 님과 대교 님. 에레보스의 수장, ‘블랙 크라우드’가 인사드립니다.’
470
브, 블랙 크라우드……………? 그리고 에레보스의 넘버 원………… 이라고?
‘그냥, 블랙・・・・・・ 블랙이라고 불러 주시면 될 것 같군요.’
이런, 제에엔장! 나와 대교는 약속이나 한 듯 놈과의 눈싸움(?)을 피해 정면으로 고개를 바로 했다. ‘블랙 원판'(?)이 뒤에서 쪼개고 있다고 생각하 니 왠지 소름이 끼쳤다. 놈이 낯익다고 느꼈던 건………… 얼굴은 역용(변신?)을 했어도 몸이………… 체형이 원판 놈과 똑같았었기 때문이었나……………? 블랙 크라우드……………! 에레보스의 왕땅은………… 원판의 카피 ・・・・・・ 복제인간이었던 건가…………? 게다가 이전의 허접한 복제와는 다른………… 오히려 원판의 육체 적 약점까지 완벽하게 보완한 완성형 버전(?)…………? 조금 전 블랙 원판인지 그냥 블랙인지는, 우리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그리고 얼굴이 변할 때의 모습이 어딘지 우리가 쓰는 역용과는 달랐다. 즉, 텔레파시와 변신… 최소한 두 가지 능력을 가진 건 확실했다. 게다가………… 다른 멤버들의 놈 에 대한 충성심을 봤을 때, 뭔가 다른 강력한 능력도 있다고 봐야겠지…………?…..옘병. 이게 진짜 뭔일이다냐! 대글빡만 좋은 원판도 적일 때는 감당하기 빡센 판국에 뭐 저런 육체까지 괴물인 녀석이……………
‘후후후~ 듣던 대로 대단한 커플이로군요.’
음?
‘두 분 다 정신적인 방어가 놀라워요. 제 진면목을 알게 된 순간에는 작은 틈이라도 생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빌어먹을…………! 역시 목소리까지………… 들을 수록(?) 원판과 똑같아. 우이쒸! 정신 챙기자, 진유준! 블랙이고 화이트고 나발이고, 적은 적일 뿐! 나는 예상을 살짝 넘어 버린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볍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넌……… 블랙? 그럼 레드나 옐로우, 그런 애들도 있는 거냐?
‘훗. 그러고 보니, 예전에 화이트의 다른 복제를 보신 적도 있었군요. 사실 화이트의 복제 및 강화 실험체는 한둘이 아니었지만……… 성공작은 그와 동급의 이름을 부여받은 저 하나 뿐입니다.’
과연……… 원판을 부르는 태도부터가 ‘동급’이라고 주장하고 있군.
‘모두 폐기 처분되어… 레드, 옐로우, 블루…… 어떤 색도 없으니 안심하시길…..?
-그나마 다행이군. 몇 명이 되었든 짜증나는 건 마찬가지였을 텐데 말야.
‘화이트는 진유준 님과 꽤 친해졌다고 들었는데ᆢ 아~ 저도 화이트와 같으니, 저도 당신을 형님이라고 부르…………
-헛소리하지마!
‘흐응. 역시 화이트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신 듯……’
-우쒸! 헛소리 말랬지? 그딴 놈은 하나만으로도 짜증난다는 뜻이야! 넌・・ 쯧. 블랙? 원판도 네놈의 존재를 알고 있냐?
…………아니요. 어린 시절에 잠시 만난 적은 있지만, 그는 저도 이미 폐기 처분된 것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음………… 다른 사람 앞에서 본래의 얼굴을 보인 것 자체가 꽤 오랜만이로군요.’
흐음. 어떤 사도인지 몰라도, 성공작이다 싶으니까 냉큼 빼돌려서 자기 전용 암살자로 만들었었던 모양이군. 어쨌거나…………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너, 여긴 왜 나타난 거냐? 너도 그냥 인사차
‘그렇습니다. 두 분과의 정식 대결에 앞서………… 아, 하지만 겸사겸사…라고 할까요? 사실 저 크레이지 파이어 자니가 날 배신한 이유를…………… 원인 제공자를 직접 보고 싶기도 했죠.’
블랙 놈은 우리 앞에서 여전히 암것도 모른 채 웃고 있는 미령이를 새삼 살펴보는(?) 것 같았다.
“과연, 대교 님의 동생답게 남다른 매력을 가진 소녀로군요. 육체의 미적 가치는 둘째치고라도, 겉보기와 달리 강인하고 순수한 정신에 자신만 의 색깔이 뚜렷한…….
-야, 야! 함부로 들여다보지마!
내가 외침과 동시에 파츳- 대교의 섬광분소지가 놈에게 쏘아졌다.
‘으음………… 의외로 대교 님 쪽이 더 다혈질이셨군요. 자칫, 큰일 날 뻔했습니다.’
쳇. ‘큰일 날 뻔’만 했다 이거지? 섬광분소지는 천 년 전의 무림에서 가장 빠르다고 알려졌던 지법…………! 객관적으로 봐도 나의 삼시전결 스피드와 맞먹는다. 놈은 그걸 순간적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간단히 피한 것이다. 대교는 뒤로 검지를 겨누어 권총처럼 섬광분소지를 쏘았던 자세 그대로 놈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의 공격을 피한 것만 봐도, 당신이 보통 고수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또 다시 파렴치한 짓을 한다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을 당 하게 될 거예요.
대교의 매서운 경고에도 놈은 전혀 긴장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왔다.
‘실례를 했군요. 어린 소녀의……… 대교 님 동생 분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대교는 놈의 공손한 사과에 약간이나마 마음이 풀리는 기색이었고, 나 역시 놈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너, 역시… 원판과는 다른 것 같군.
…………무슨, 의미입니까?’
-의미나 마나, 원판은 너와 다르다고! 원판은………… 그 싸가지는 입으로 존댓말을 써도 속마음은 그게 아니거든? 항상 지가 최고라는 생각에 남을 내려다보는 놈이야. 그런데 넌 진심으로 우리에게 존대를…………… 아니, 그게…… 너도 왠지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지만………… 하여간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놈이란 것이 느껴져.
음? 왜 대꾸가 바로 나오지 않는 거지? 틀린 소리였다고 해도 상관없는 얘기긴 했지만…………
‘과연…… 감이 빠른… 제 예상을 뛰어넘는 분이로군요. 역시 이렇게 미리 만나러 오길 잘했던 것 같습니다.’
으음. 다행히 얼추 맞긴 한 모양이네?
‘네………… 맞습니다. 전 화이트와 다릅니다. 그는 ‘지배자’로서 태어났지만, 저는 ‘암살자’로 태어났으니까요.’
웃…………! 어째 갑자기 뒤통수가 더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저는 저의 표적이 된 사람들을 항상 진심으로 존중하고 경외하죠.’
음? 경외……? 표적에게 그럴 필요까지나?
‘그래야 더…… 그의 생명을 정지시킬 때의 보람이 커지지 않겠습니까?’
·쳇. 중간 과정은(?) 다를지 몰라도, 결국 싸가지 없는 건 화이트나 블랙이나 그놈이 그놈인 것 같군.
-어쨌거나……… 블랙 너도 원판… 화이트 놈 정도는 자기 말 지키는 놈이긴 하지?
‘물론입니다.’
-들었지, 대교? 인사하러 왔다하고, 인사 대충 나눴으니까………… 이제 신경 끄자.
난 에라 모르겠다하고 의자에 깊숙이 편하게 몸을 묻었다. 대교도 잠깐 망설이는 것 같다가 결국 내 어깨에 슬쩍 머리를 기대왔다.
-블랙. 반가웠다. 너도 여행 잘 해라.
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진짜 놈을 향한 신경을 꺼버렸다. 그게 끈다고 형광등처럼 척척 꺼지는 일이겠는가마는, 하여간 그런 의식과 함께 대 교의 손을 잡았다. 아직 긴장을 풀지 못하던 대교의 손에서 차츰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오라버니도 차암…………! 이런 대범함을 저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대범함은 무슨, 그냥 암 생각 없는…………… 뭐, 하여간………… 신경 써봐야 우리 손해잖아? 소교하고 금동이 선물 얘기나 좀 해보자구. 어………….. 금동이 녀 석에게 줄 모자를 열 개나 샀다고?
-후후. 열한 개예요. 우리들이 세 개씩, 아버지께서 두 개.
-에? 사영 어르신도?
잠시 냉랭한 위기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비행기 안에 다시 평화로운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적어도 우리 닭살 염장 커플에게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