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6화 : 화려한 원룸
6 화려한 원룸
“원판, 너! 대체 여긴 왜………….”
내가 입을 열자. 원판은 조용히 특유의 미소를 그리며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와요. 주인집 아드님.”
엑. 이 자식 설마?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자, 잠깐.”
지금 이 녀석까지 소미령이처럼 우리 집에 들어오겠다는 거 맞지….? 근데 왜? 아니 어떻게? 프리메이슨에서 자력으로 탈출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12인의 사도. 그 늙은이들이 처음으로 혼돈과 두려움에 쌓여 있을 때… 내가 재빨리 제안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거지.”
원판은 예의 사악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내게 그윽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 경험해 보았다시피, 진유준을 잘못 건드리면 금단의 마신 강림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완전한 미래 로봇 확보 프로 젝트’는 전면 중단…………! 그 대신 당분간 폐기되었던 부적합 프로젝트 중 하나를 채택, 시험적으로 운용한다.”
“부적합프로젝트? 그거 혹시 친한 척하기?”
“훗! 역시 재미있는 표현을 하는군. 사실 비슷해. 비록 폐기되기는 했었지만, 분명히 정식으로 그런 프로젝트가 제안된 일이 있었어. 당신에게 인간 적으로 접근하여 신뢰와 우정을 쌓고 나아가 로봇 동동과의 교감까지 이룸으로서 당신의 부재시 몽몽의 거부감을 최소화하며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최종 목적. 좀 더 이상적인 목표는 진유준까지 스카웃.”
“…그딴 택도 없는 계획에 결재가 난 거냐?”
“앞서 말했듯, 지금 12인의 사도들은 패닉 상태거든. 설마 수백, 수천 킬로 바깥의 적이 공간 자체를 베고 찢으며 초월해서 자신들에게까지 직접 칼을 휘둘러 올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던 거지. 항상 높고 폐쇄적인 권좌에 앉아 손가락 하나, 지껄이는 말 한마디만으로 적을 처리해 온 늙은 이들로서는… 평생 처음 겪어 보는 공포일 수밖에 없었던 거야.”
12인의 사도와 프리메이슨의 현재 분위기를 전하는 원판의 얼굴에 상당히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암튼. 그래서 그 적임자로 네가 뽑혔다구? 이 나에게 접근해서 ‘신뢰와 우정’씩이나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자로?”
“일단 지금까지의 실적이 있잖아. 우린 서로 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름 친하게 지내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였으니 말이야.”
원판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놈이 보냈었던 짜증 만땅의 이모티콘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식전부터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핫~! 너무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지 말아줘. 나는 지금 당신에게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한시적이라고는 해도, 평생 처음으로 자유 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말야.”
“자…유?”
“그래. 지금까지의 프로젝트에는 지속적이고 집요한 다각도 감시도 포함되어 있었지. 하지만 그 또한 ‘진유준을 자극하는 요소’로서 함께 잠정 중 단이 결정되어 어제 부로 모두 철수했거든.”
오호라- 그래서 이 녀석이 방금 12인의 사도에 대해서도 막 얘기하고 그랬구나. 이거 대교가 애써 실행한 자살 특공 작전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 나고 있는 걸?
이 정도면 임시 환생 대교가 용암에 뛰어들기 전에 놈들에게 강조했던 ‘인질 문제’까지 좀 안심해도 되려나…………..? 사실 전부터 보천구룡대(保天九龍 隊)에게 우리 가족들의 호위를 맡겨 놓기는 했지만 역시 불안했었는.. 어, 또 잠깐.
“원판 너, 벌써 계약서 쓴 거냐?”
“음. 마침 방이 비어서 어제 바로 대리인을 통해 당신 어머니와…”
젠장. 나중에 구양대주에게 한 소리 해야겠군. 가드가 너무 허술하잖아, 이거.
“……뭐. 하는 수 없지. 방 놀리느니 계집애 같은 녀석에게라도 놔야지, 뭐.”
“과연, 현실적이군.”
나는 원판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우리 집, 아니 세상 어디에서건 상식인 주의사항을 얘기해 주어야 했다.
“살인 금지.”
“OK.”
“살벌한 수하들 출입 금지.”
“물론.”
“사치 금지…는 좀 이상하지만,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곤란해.”
“주의하지.”
“월세 밀리면 죽어.”
“당근.”
쳇. 내 흉내를 내다니…………! ・・・음, 근데 생각해보니……
“…너 무지 부잔데. 월세 쫌 올리면 안될까?”
“불가! 이미 계약서에 도장 찍었음.”
으음. 이래서 계약서에 도장은 신중하게 찍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어멋! 얘! 얘 왔네?”
이 시간쯤에는 항상 그렇듯, 마악 현관문을 열고 나오시던 어 머니께서 예상대로 크게 놀라신다.
“어떻게 지금 와? 응? 밤 비행기 탄 거야? 응? 전화 좀 하지!”
“예, 뭐. 암튼 다녀왔습니다!”
상당히 오래 집을 비웠음에도 우리 어머니답지 않게 그 점을 따지지 않으시는 건 아무래도 내가 ‘외국에 갔다왔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얘, 하은이는? 하은이 어떻게 됐어?”
하은이? 맙소사! 그 생각을 못했다!
“에그머니!”
어머니께선 화들짝 놀라시는 건 물론이고, 그 직후 완전 얼음 상태로 굳어 버리고 있었다. 뒤늦게 내 등 뒤의 원판.. 하은이의 쌍둥이 오빠(혹은 본 체?)인 원판을 발견하셨기 때문이다.
“하은이? 아니, 나, 남자? 어떻게 이런 일이…….”
으으!~ 진유준, 이 바보야! 어떻게 이런 상황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거냐!
“처음 뵙겠습니다. 큰 이모님.”
원판 녀석의 저 자연스러운 인사는 이 자식! 첨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구나!
“전 하은이의 쌍둥이 형제 하운이라고 합니다.”
“쌍둥이이~? 아이고 어쩐지!”
나는 어머니께서 정신없이 원판의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 하시는 모습을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서 와! 어서 와, 얘야!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천년 전 천하마도인들의 두목이었으며 현재도 세계의 지배자 프리메이슨의 간부이며 초거대 기업 DP의 회장님이신 원판을 어머니께선 ‘얘야’ 라 고 부르며 손을 잡아끌며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신다.
“어? 하은이? 이거 뭐야! 남자 아냐?”
거실로부터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데도 난 바로 따라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대교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더라도. 이런 뻔한 상황조차 예상 못했던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몽몽?”
「죄송합니다, 주인님. 전 주인님께서 이미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받아들이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야 인마. 그래도 이런 상황 생각해봤냐고. 한 번 물어 보기라도 했어야지. 딴 때는 잘도 사소한 거까지 챙겨서 경고해 주고 그러던 녀석이 말야!”
「죄송합니다, 주인님. 시정하겠습니다.」
「와아~ 만세! 원판 씨가 주인님과 동거라니!
“야, 야!”
「우광 굳~!」
“에이 쒸! 요몽 너, 진짜 혼나 볼래?”
「예에? 왜요? 이제 원판 씨는 주인님의 적도 아니잖아요.」
…응? 그…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제기, 난 암튼 저 녀석이 체질적으로 싫단 말야!”
「피이~ 또 괜히 그러신다. 아니면 정말 원판 씨 말대로 동족혐오?」
“몽몽!”
「에? 또 방에 감금? 히잉ᅳ 이건 횡포야!」
돌아가시겠네. 요몽 저 녀석은 대체 왜 원판에게 꽂혀 가지고 저래?
나는 거실에서 들려오고 있는 부모님과 원판의 대화 소리를 잠시 더 들어보다가 결국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물론 요몽 말대로 지금 의 원판은 적이 아니다. 함께 프리메이슨과 싸우는 동맹군이며, 또한 그 동안 여러 가지 상황을 겪으면서 솔직히 놈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줄어 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당분간 한 집에 사는 것까지 허용했던 건데 ・・・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난 절대… 젠장! 이런 정도까지 바라진 않았단 말야!
“유준 형님! 왜 이제 들어오십니까?”
으으으! 저 아저씨가(실제 나이는 할아버지뻘?) 지금 나보고 뭐래?
“추운데 안 들어오고 뭐 했니 그래. 자 이거 좀 가져가라.”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오시다 내게 과일 접시를 건네주시고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속절없이 원판에게 과일을 갖다 바치고는(?) 잠시 머뭇대다가 결국 원판과 아버지 사이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젠 회사직원에게 부탁해 이곳의 방을 얻은 겁니다. 큰 이모부.”
“으음. 그랬구나. 이렇게 젊은데 큰 회사를 운영하려면 고생이 많겠구나.”
졸지에 원판의 이모부가 되신 아버지는 원판에게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 시선을 보내고 계셨다. 이어 어머니까지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오시며 입을 여셨다.
“그래도 그렇지, 왜 우리하고 상의도 없이 사람을 보내서 방을 계약했어? 얘, 하운아. 그냥 집에 들어와라. 방 많다. 유준이하고 있어도 되고………….” “엄니!”
내가 반사적으로 다급하게 항의의 뜻을 표하자. 어머니의 날카로운 흘겨봄 어택이 들어왔다.
“얘가 왜 이래? 나이도 비슷한 사촌 동생인데 뭐가 어때서?”
으허허어~ 사촌 동생…이래…………! 원판이 나의… 동생…………? 오우 노우~!
“하핫! 아닙니다, 이모님. 그러면 형님도 저도 불편할 겁니다. 그러실 것 같아서 말없이 방을 얻은 겁니다.”
“그래도 그게 아니지. 조카를 돈 받고 재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어머니, 그뿐 아니라 전부 다 아닙니다요. 제발 저 악마의 위장을 알아채시기를……………!
…그러나 내가 어머니께 바라는 바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가급적 수습하는 방향으로 냉정하 게 생각을 해야 했다. 밖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원판 녀석이 우리 부모님께 얘기한 놈의 과거 스토리는 대충 이랬다.
…자기는 하은이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얼마 안 되어 소위 부잣집으로 입양을 가게 되었고… 몇 년 전 이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친부모 의 존재와 동생 하은이까지 알게 되고… 이젠 하은이를 데려와 잘 지내고 싶다 하고. 그런데 하은이는 친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가출을 해 버리 고… 그래서 자신은 하은이가 이 집으로 올 거라 예상하였기에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으음. 진실을 왜곡한 부분이 많기는 해도, ‘하은이의 가출’이라던가, 나 역시 하은이 얘기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했어야 할 ‘사실인 거짓말’도 있군. 그러고 보니… 천년 전에는 내가 먼저 멋대로 원판의 형님 행세를 했었던가………? 그랬던 내가 지금 놈과의 관계에 이토록 질색하는 건 너무 이기적 인 건지도………….
“몽몽. 요몽 풀어줘.”
「예, 주인님.」
빌어먹을…………! 결국에는 이렇게 납득해버리는 내가 싫다, 싫어.
“저. 그럼 큰 이모님.”
원판은 이사 준비를 해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 역시 함께 일어섰다. 현관까지 따라 나오신 어머니는 원판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내가 그냥 서 있자. 대뜸 걱정부터 하신다.
“어쩌니. 도배도 아직 못했는데 오늘 바로 들어온다는구나.”
“걱정 마세요. 저 녀석 무지 부자라 지가 다 알아서 할 거예요.”
“그러는 거 아니다. 남도 그리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을, 저 아인 남도 아니질 않니.”
저 녀석은 남이랍니다 어머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겨우 멈추었다.
“히여간, 오기 전에 우리끼리 다 얘기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넌 근데 어쩌자고 전화로도 이런 얘기를 하나도 안 했니, 그래?”
“어, 그게… 저도 마지막까지 하은이 찾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아~ 군대 가기 전까지는 부모님께 한 점 부끄럼 없는 대한민국모범아들이었거늘…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거짓말을 해대는 불량자식이 되었을 꼬!
“에그. 하은이 고것은 대체 왜 철없는 짓을 해서 이렇게 여러 사람 힘들게 하누. 그럴 애 같지는 않았는데………….”
“걔도 나름대로 힘들 거예요. 이모부하고 좀… 심하게 다투었거든요.”
심했죠. 지 아빨 총으로 쏴버릴 정도였으니??
“에이그. 그놈은 하여간.. ・! 근데 이들! 너 진짜 니 이모부한테 주먹을 휘두르거나 한 건 아니지?”
“…그러라면서요.”
“얘! 그건 그때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어머, 너 진짜 그랬어?”
“아뇨. 그냥… 이모부한테 직접 그런 건 아니고… 이모부 회사에서 말썽은 좀 부렸죠.”
아주 심각하게, 회사(?)가 박살이 나도록!
“진짜? 그래도 괜찮았어? 응? 너 뭐 잘못된 거 아니지?”
“걱정 마세요. 아무 일 없었으니까요. 그보다……….”
원판 놈이 먼저 깽판(?)치고 가는 바람에 분위기가 좀 거시기 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미룰 수도 없는 일이기에, 나는 슬쩍 어 머니의 팔을 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다른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우선…….”
나는 아직도 츄리닝 차림으로 안방에 들어가시던 아버지까지 감히 호출한 다음 말을 이었다.
“두 분 다 옷을 좀… 그러니까 아주 정장은 아니어도 뭔가 좀 신경 써서 입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뭐냐? 무슨 일인데 그래?”
“누가 또 왔니?”
“예. 그게… 이번에 나갔다가… 내친 김에 아예 데리고 왔어요.”
대체 이놈이 뭔 소리를 하나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시는 두분.
“저 실은 사귀는 애인이 있었거든요.”
“뭐?”
놀라실 때는 내용 관계없이 무조건 인상을 긁는 우리 아바마마.
“진짜니? 지금 데려왔다고?”
역시나 이런 일(?)에는 즉각 흥미부터 보이는 대한민국 표준 아주머니, 울 엄니.
“…예. 근데 한국 사람이 아니에요.”
“뭐야?”
한층 더 놀라시는 아바마마.
“설마 니 컴퓨터 속의 그 아가씨?”
역시나 놀라운 직관력(?)의 어머니.
“이 할머니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거 연예인 사진이야! 연예인!”
“나도 TV에 나오는 것도 봤수. 얘가 외국인이라고 하니까 그냥…….”
“외국이고 한국이고, 얘가 연예인 만나고 다닐 주제나 돼?”
“이이는? 우리 아들이 어디가 어때서요!”
“저기, 두 분! 걔가 걔 맞아요! 주가혜라고 알려져 있지만 본명은……”
어랏? 갑자기 분위기가 팍- 다운된다. 심지어 대교임을 알아맞추신(?) 어머니까지 ‘장난하냐?’ 라는 표정이 되어 버리시네?
“얘, 아들. 실없는 소리 말고, 누굴 데려왔으면 빨리 들어오라고 하기나 해. 밖에 춥잖니.”
역시 믿지 못하시는군.
“암튼, 지금 데려올 테니까 준비해 주세요.”
“허헛~ 오늘은 식전부터 이게 무슨 일들인지 모르겠군.”
나는 아버지의 탄식을(?) 뒤로 하고 현관을 나섰다. 그러나 아무래도 차까지 돌아갔다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대교.”
작게 부르자마자 하늘로부터 스르르- 아름다운 신형이 내려와 내 앞에 착지한다. 공항에서 산 개량 한복으로 갈아입은 대교였다.
“부, 부르셨어요?”
원판 때문에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대교는 더 참지 못하고 먼저 날아(아마도)와 버렸던 것이다.
“너도 봤겠지만, 원판 녀석이 지금 우리 집에 와 있어. 그건.. 응? …야, 대교.”
“예? 예? 바, 방금・・・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는지…..”
으음. 대교 녀석, 완전히 얼어 있군.
“저기. 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부모님들은 그렇게 무서운 분들 아냐. 굉장히 상냥… 음. 하여간 널 반겨 주실 거라구.”
“하, 하지만… 제가 한국인, 아니라고. 그래서 싫어하시면 그게, 그럼 전, 전…”
“어허 ~ 그런 분들 아니라니까?”
내가 애써 달래는데도 드물게 말까지 더듬으며 대교는 쉽게 진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하의 대교가 이렇게까지 버벅대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다독거려야 하지?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니, 원.
“몽몽, 금동이. 금동이 좀 호출해 주겠어?”
「알겠습니다, 대교님.」
응? 갑자기 금동이는 왜 찾는 거지?
몽몽이 금동에게 그들만의 신호를 보내자, 금동이가 대기 중이던 옥상으로부터 뭔가 투욱 대교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걸 받아든 대교가 비로소 조금 진정을 하는 것 같았다.
청명검…………! 에구, 설마 저걸로 뭘 어쩌자는 건 아니겠지?
나는 순간적으로 대교가 집안으로 쳐들어가서 청명검을 휘두르며 ‘당장 주님을 내게 넘기지 않으면…………….’ 어쩌고 하면서 날뛰는 광경을 떠올리 고 말았다. 당연히 즉시 고개를 저었고, 대교는 나의 망상과 달리 청명검을 안고 잠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쯧. 너무나 오래 기다려 왔던 일이라서 조금이라도 뭔가 잘못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정말이지… 반대의 경우였을 때의 나는 엄청 무신 경하고 뻔뻔했었던 거구나.
“죄송해요.”
대교는 나보다도 오래 자신과 함께했던 애병기를 안고서야 겨우 진정했는지 비로소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음. 어쨌든 이제 좀 괜찮아?”
“예. 저도 이렇게 떨릴 줄은 몰랐어요. 마치 처음 비취각에서 창천각으로 발령 받고 곡주님 처소 담당이 되었을 때처럼 그렇게 긴장이 되어요.” 심경을 밝힌 대교는 다시 한 번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청명검을 다시 옥상의 금동이에게 던져 주었다. 금동이는 이제 정글도와 청명검, 두 개나 되 는 병기의 운반책이 된 것이다.
…어쨌든, 대교가 이제야 겨우 자신을 되찾은 것 같군. 입술을 새삼 야무지게 다물며 날 돌아본다.
나는 즉시 현관문을 열고 대교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거실로 올라서고, 대교를 확인한 우리 부모님들은 순간적으로 경직! 그리고 잠 시 후.
“에그머니!진짜네! 진짜야! 이걸 어째 그래~”
어머니는 원판을 만났을 때만큼이나 어쩔 줄 몰라 하시고, 아버지는 계속 나와 대교를 번갈아보며 눈만 껌벅이고 계셨다.
“어머, 세상에 어쩜,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다 있대? 저 한복 입은 것 좀 봐! 여보! 뭐라고 말 좀 해봐요!”
“큼. 험. 손님을 앞에 두고 웬 호들갑이요!”
역시나 우리 아바마마다운 반응.
“처, 처음・・・ 뵙겠습니다.”
대교가 고개와 상체를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인사하자 두 분은 또 바로 서로를 마주 보신다.
“한국말 하네요.”
“험. 거 인사하는 거 정도야 배웠겠지.”
말씀은 그러셔도, 아버지는 비로소 안심이라는 표정이 되시고 있었다.
“어서 와요, 아가씨. 유준아! 거 뭘 그리 서 있기만 하냐? 얼른 저기, 저기 앉으라고해.”
아버진 거실 소파를 가리켰지만, 대교는 내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정식으로 인사를… 절을 올리고 싶대요.”
“어이구~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으음. 아무래도 어머니는 외국인이라면 전부 ‘별세계의 존재’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어, 절? 그런 거 안 해도 되는데… 요즘 처자답지 않구나.”
역시 말씀과 달리 어머니보다도 먼저 자리에 앉는 아버지.
대교는 한국식 예절도 많이 공부했다고 했는데 오. 정말 제대로 큰절을 하는 걸….?
한복을 입고 있으니 더더구나 운치 있고 고아해 보이는 우리 대교…………! 부모님의 얼굴에도 신기한 광경을 보는 듯한 표정과 기특하다는 표정이 교 차하는 것 같고…….
“전… 장소(長嘯주씨 가문의 성자, 후자 쓰시는 분의 장녀, 주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유준 오라버니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되어 참으로 기 쁘게 생각합니다.”
…좀. 너무 미리 준비한 티가 나는 인사 같기는 했지만, 나름 고풍스런 인사말에 우리 두 분의 표정에는 더욱 크게 ‘신기+ 기특’ 이라는 글자가 새 겨지고 있었다.
“거, 뭐하고 있소. 어서 가서 과일이라도…………….”
“아니에요, 아버지. 가만 계세요, 어머니. 제가 가져올게요.”
나는 어머니가 뭐랄 틈도 없이 재빨리 일어나 부엌으로 감으로서 자리를 피해 버렸다. 대교가 약간 걱정되가는 했지만, 이건 내가 월 어떻게 도울 수도 없는 문제이고, 또 어설피 도와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대교를 믿고 전적으로 맡기기로 한 것이다.
「흐음. 이거, 이거 뜻밖인데요오.」
훗. 요몽 녀석, 내 말투 흉내를 내는 건가?
「우리 대교님이 설마 저렇게 평범틱한 소심 아가씨 비스무래 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왜. 대교라면 어떨 거라고 생각했냐?”
「우음… 좀더 당당하고 지적이며 고고한・・・ 그러면서도 예의가 바르고 정숙해 보이는… 그러니까 주인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대교님 의 모습이요.」
“흠. 나도 솔직히 그런 모습을 예상한 적도 있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나의 부모님께 첫선을 보이는 날이니 긴장을 할 만도 하지. …뭐, 저런 소심 모드의 대교도 괜찮지 않냐?”
「오호. 역시 눈에 콩깍지가 수십 겹은 쓰이셨군요.」
“짜식이……!”
「헤헤~ 실은 너무 너무 부러워서 그래요. 아- 전 언제나 멋진 짝을 만날 수 있을지…………
…요몽 녀석. 인격 독립 짬밥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짝을 찾고 난리인지, 원.
나는 대충 과일 접시를 챙겨서 다시 부엌을 나섰다. 계속 신경 써서 듣고는 있었지만 가까이 가자 더 확실하게 흐뭇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나이는 몇 살이냐, 언제부터 우리 아들을 알게 되었냐, 부모나 유창한 한국어로 조신하면서도 또박또박 잘도 대답을 하니 아버지의 대교에 대 한 호감도는 급상승…………..!
음. 어머니도 마찬가지인 것 같기는 한데 왠지 아직은, 아니 어머니는 어째 점점 더 초반의 놀람을 극복하시고 본격적인 탐색 모드로 들어가시는 것도 같은데……..?
아무래도 어머니들에게 ‘시자가 앞에 붙는 순간, 며느리들에게만큼은 절대 고수가 된다는 일설이 사실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는 것은 대교 역시 막상 실전에 부딪치자 오히려 점점 긴장이 풀리는지, 표정에 점점 자연스러운 본래의 미소가 떠오르고 말투나 모든 것이 평소로 돌아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유준아. 넌 어떻게 이런 아가씨와 사귀면서도 그 동안 집에 한 마디도 안 했니? 벌써 만난 지 꽤 오래 되었다면서?”
예. 천년에다 몇 년쯤 더 붙여야 할 정도…라고 할 수는 없겠지?
“에- 그게, 엄니. 엄니도 아시다시피 요즘 제가 좀 많이 바빴잖아요. 그 전에는 저하고 대교도 아직 확실하게 만난 게 아니어서 말씀드리기도 좀 “뭐해서요.”
역시나 찔리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이 정도로 두루뭉실하게 표현하는 수밖에 없지.
“그리고 넌 아르바이트를 해도 어떻게 그런 걸 우리한테 말도 없이 했었니 그래?”
“연예인 보디가드가 꽤 짭짤해요.”
“뭐, 그러다가 저 아가씰 만났다니 잘되긴 했다만………….”
최근 대교의 보디가드를 했다는 거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니까 뭐..
“암튼 두 사람. 잘 사귀어 봐. 내가 보기에 아가씨가 아주 참하고 맘에 드네. 우리 유준이 때문에 한국말도 열심히 공부했다 하고… 참… 음. 대견한 아가씨네.”
유창한 한국어 부분이 가장 맘에 드시는 것 같다…고 하면 너무 아버지를 무시하는 생각일까?
“말씀 놓으시고, 그냥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아버님.”
“음. 어… 그, 그럴까? 대교…라고 했지?”
“예, 아버님.”
아버지는 흔한 말로 입이 턱에 걸리고 계셨다. 큰형의 와이프, 큰형수는 사실 좀 너무 현대적인 스타일에 차가운 편이고, 작은 형은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종종소위 껌 좀 씹고 침 좀 뱉는다는 여자 분들과 교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교가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근데, 대교 양? 우리 유준하고는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지?”
비로소 요점 확인 공략을 시작하는 어머니.
“어허 이 사람! 그런 걸 뭐 묻고 그래? 지들끼리 알아서 만나다가 때가되면………….”
“아닙니다, 아버님.”
응? 저 대교의 비장한(?) 표정은・・・・・・? 아니, 잠깐.
“전 유준 오라버니와 반드시 부부의 연을 맺을 것이옵니다!”
아버지가 막 들어올리시던 과일이 툭~ 다시 접시로 떨구어졌고, 어머니 입 속의 과일이 아작 하고 씹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후.
나와 대교는 약간 민망한 기분으로 둘만 거실에 남겨져야 했다. 화기애애했던 (정상적인 표현은 참 오랜만에 쓰는 듯) 분위기가 대교의 과감한 발 언으로 인해 다소 뻘쭘하게 바뀌어 버렸었고, 잠시 후 두 분은 ‘아버지가 당뇨약 드실 시간.’이라는 핑계로 안방에 들어가버리셨던 것이다. 아버지 당뇨약은 항상 거실에 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실언을 한 거죠?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두 분 다 조금 놀라셔서 그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제가 그만 마음이 너무 앞서서…
“에이- 괜찮테두? 훗! 게다가 어쨌든 난 기쁜 걸? 네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마, 말하지 말아요.
짜식. 지가 지 입으로 말해 놓고 새삼 부끄러워하기는…………! …음, 근데 그나저나!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아직 남성위주의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할 수가 있다.
남자가 무례하게 여자 집에 쳐들어가 대뜸 ‘따님을 주십시오.’ 그러면 ‘패기만땅 매력청년’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여자가 좀 적극 적인 행동을 하면 ‘무슨 여자가……’ 라는 반응이 나오는 일이 평균적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대교가 경솔한 발언을 한 것이 사실이긴 했 다.
에효. 그래서 결혼 얘기를 꺼내도 내가・・・ 그것도 ‘결혼을 염두에 둘 정도로 진지하게 사귄다’ 식으로만 얘기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앞으로 1년 동 안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훈훈해지는 분위기에 탄력 받은 대교가 살짝 오버해서 대뜸 일을 저질러 버렸으니…………. “몽몽!”
「예, 주인님. 도청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
매우 죄송스런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안방의 대화를 엿들을 수밖에 없었다. 대교야 당근 몽몽 없이도 가능하지만, 하늘같은 예비 시부모님들의 대 화를 엿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얌전히 내게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얼마 후,
대교는 ‘됐다’는 어머니를 따라 굳이 부엌으로 향했고, 나는 아버지에게 끌려 안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인마!”
“예, 아버지. 말씀하시지요.”
“…허허~ 이 녀석 이거, 이거 누굴 닮아서 이리 으둥스럽누?”
“흐흣~! 그야 당연히 아버지를 닮았겠죠.”
“흠. 재주 좋은 건 확실히…
으음. 그 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왕자, 아니 황제병을 알게 되는 순간이군.
“어쨌든. 너도 알다시피 난 외국여자에 대한 편견 같은 건 없다.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 그런 걸 따져서는 안 되지, 암.”
사실 아버지는 보수와 진보를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해야 할까…………? 상당히 고리타분한 유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시면서도(내가 이거에 상당기간 세뇌되었음) 당신께서 ‘이거다’ 싶은 부분에 있어서는 한없이 의식을 개방하고 앞서가는 분인 것이다.
“그리고 얘가 참 괜찮은 거 같고. 그렇기는 한데…….”
죄송하지만 이미 엿들어서 다음 나을 말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서두르는 건 좋지 않아. 넌 아직 학교도 마치지 않았잖냐.”
“예. 그래서 이미 우리끼리도 1년은 더 기다리자고 약속했습니다.”
“어, 그래?”
이놈이 뜻밖에 기특하군…이라는 표정?
“음. 그럼…….”
“대교가 유명한 가수인 것이 좀 그렇죠?”
“가수고 뭐고, 요즘은 여자들도 다 사회활동 하고… 또 맞벌이 안 하면 제대로 벌지도 못하는 현실인 걸 안다. 하지만…………….”
에이- 아버지도 참. 여자는 무조건 밖으로 내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라는 거 내가 뻔히 하는데……………
“그건 여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굳이 원할 경우에나 그러는 거다. 남자가 무능해서 여자에게 일을 시켜서는 안 되는 거야!”
윽. 조금 전엔 아버지께 죄송한 생각을 했었던 듯…………!
“그런데… 저 아이가 그렇게 유명한 아이라면, 아무래도 씀씀이가 남다를 거야. 넌 그걸 감당할 수 있겠냐? 그리고 보통 화려한 연예인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평범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넌 그런 걸 신중하게 생각해보기는 했냐?”
흐으음. 엿들을 때 두 분 사이에 오간 말들에는 이렇게 구체적인 얘기까지 나오지 않았었는데… 이런 큰일에는 어른들이 확실히 현실적이며 다각 적인 생각을 하시는구나.
난 새삼 약간 감탄하기는 했지만, 역시 난 요몽 말대로 눈에 콩깍지가 수십 겹 쓰인 청춘.
“저기, 아버지. 우선 말이죠. 대교는 우리 집에 오겠다고 벌써 하던 일은 다 때려 치고 은퇴해 버렸어요. 물론 나중에 다시 하겠다고 해도 전 말릴 생각 없구요. 쟤 노래… 정말 잘하거든요?”
은퇴한 대교 먹여 살리는 문제는… ‘전 이미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 혹은 ‘그 부자들의 두목’ …이라는 소리를 할 수는 없겠지?
“너, 설마 저 아이 재산을… 음. 아니다.”
“아들을 뭘로 보시는 겁니까!”
“미안하다.”
“…암튼, 대교의 됨됨이는 앞으로 함께 지내보시면 알게 될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겠지.”
대충 합의? 혹은 허락 받기가 끝난 것 같군.
“유준아, 너, 저 아이 부모는 만나서 허락을 받기는 한 거냐? 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했나?”
“예. 그래서 아버지만 만났었는데… 홍콩에서 제법 큰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너 설마……….”
“아버지!”
“미안하다.”
나는 비로소 기쁜 마음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다시 한 가지를 물으셨다.
“야! 남자끼리니까 묻는데, 너 혹시 저 아이… 음. 벌써 섣불리 데리고 잔 건 아니겠..”
나는 말없이 아버지를 돌아보았고, 아버지는 나의 서글픈(?) 표정을 정확하게 읽으시는 것 같았다.
“됐다. 나가서 밥이나 먹자.”
아버지에게 허락 받은 걸 따로 알릴 것도 없었다. 안방에서 나와 보니 대교는 부엌에서 어머니와 다정한 모녀가 출연하는 듯한 CF한 편을 찍고 있 었다(?).
대교는 본래도 생활력 강한 소녀 가장 출신이지만, 내가 태어날 때 함께 깨어난 이후 이 시대의 생활상, 특히 한국 가정을 열심히 공부해 왔다고 했 다. 그 덕에 너무나 부엌일을 잘하는 대교에게 어머니도 놀라며 흐뭇해하고 계신 것 같았다.
흐흐흐흐~(나 왜 이러니?) 드디어 대교의 잠입, 아니 입성 성공 인가…………? 이제 1년. 1년 동안 내가 할 일만 남은 셈인가…?
난 새삼 나의 절대 임무인 ‘단전 복구 및 더 강해지기’를 떠올렸지만, 지금은 그런 부담감마저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행복할 뿐이었다.
대교의 우리 집 입성 후, 열흘이 지난 어느 날.
“야, 원판!”
나는 옥상에서 혼자 궁상을 떨고 있는 원판을 불렀다. 나는 궁상이라 부르고,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환상의 자태라고 부르는 모양인 ‘홀로 바람 속에 서서 긴 머리채 날리기’를 하고 있던 원판이 배시시 쪼개며 날 돌아보았다.
“너, 내가 경고했지?”
“무얼 말입니까, 유준 형님.”
“그렇게 꼬리치고 다니지 말라고 말야!”
원판은 피식 한 번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을 한 바도 없거니와, 그런 경고를 받은 기억도 없습니다만………….”
응? 그랬었나?
“아. 암튼! 너무 남들 눈에 뜨이는 짓을 하지 말라고… 뭐, 대충 그런 뜻의 얘기는 했었잖아.”
“제가 뭔가 잘못 한 일이 있나요, 형님?”
우선 그 느물대는 존대와 형님 소리부터 닥치라고 했으면 좋겠지만, 그걸 트집잡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저기, 저쪽을 좀 봐. 저기, 저기도! 조짝도!”
원판은 천천히 내가 가리킨 방향들을 돌아보았고, 그 이웃집 창가며 베란다마다에서 정신없이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들이 화들짝 놀라 집안 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전 딱히 적극적으로 한 짓은 없습니다만?”
“젠장.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타고난 그 재수 없는 용모도 죄라면 죄야! 넌 겨우 열흘만에 온 동네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잖아.”
정말 그랬다. 저 귀염둥이 인형 미모 소미령이들도 최근에야 소문이 나기 시작한 모양인데, 뒤늦게 합류한 이놈은 지 말로 ‘심심해서 몇 번 시장이 며 동네 여기저기를 산책했다는 것만으로 온 동네 여자들을 홀려(?) 버린 것이다.
“평지풍파라… 이런 현상에 무슨 현실적인 문제라도?”
“아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집으로서는 좋은 현상이 더 많기는 했다. 금동이로 인해서 올랐다가 녀석이 없어진 후 다시 내려갔던 우리 슈퍼의 매상은 소미령이들 때 문에 몰려든 인근 학교들의 중고딩들에(더 나이 많은 놈팽이들도 상당수인 듯) 의해서 따블로 올랐으며, 요 며칠은 원판 보러 온 처자들로 인해 따 따따블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는 큰 이모부 가게 카운터를 잠시 봐드리는 것도 안 된 다는 건가?”
“어, 그건 지난번처럼 내가 아버지 병원에 모시고 간다거나 할 때는 그럴 수도 있는 문젠데……”
내가 필요한 부분만 빼먹으려는 악덕 주인집 아들래미의 심보…는 조금(?) 아니다. 내가 봤을 때, 원판은 지금의 평범한 생활에 관한 모든 상황을 상당히 즐기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네가 차지한 3층 방을 네 멋대로 뜯어고친 건, 그건 어머니께서 인정하셨으니까 됐다 치자. 하지만 그 공사 때문에 항의하러 나왔던 네 옆방 아 저씨!그 아저씨는 왜 다음날 초췌한 몰골로 방 빼고 사라졌지?”
“그런 자들의 불쾌한 시선을 형님은 느낄 일이 없었겠지만…….”
나도 천년 전 니놈 육체를 사용할 때 느껴봤다는 말은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어쨌든, 형님 말대로 ‘살인’은 하지 않았고 곧바로 다른 사람이 들어왔으니 된 거 아닌가?”
원판이 말하는 다른 사람이란, 놈의 비서 ‘란’이었다. 당연히 그 여자의 세련된 미모도 사람들의 눈에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게 넌 어렵게 자유를 누리게 된 거니까, 솔직히 이런 말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하는데… 그래도 난 네가 되도록 쓸데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맞은편 집의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반 쳐진 커튼 너머로 희미한 인형이 비치고 있었다.
저 집의 주인아주머니가 며칠 전 우리 어머니께 하소연했었는데…….
‘방을 빼며 다음 사람부터 전세금을 올려 받기로 한 방이 있는데, 나간다고 했던 현재 거주 아가씨가 댁에 새로 온 총각에게 홀려 안 나간다고 버틴 다. 그 아가씬 최근 직장도 잃고 돈도 없는데 무슨 짓이라도 해서 추가 전세금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기세가 더 불안하다’
…대충 이런 얘기였다.
“…앞으론 좀 더 주의하죠.”
원판은 여전히 잔잔히 웃고 있지만, 어딘지 슬픈 듯한 미소와 함께 내게 등을 돌렸다.
젠장! 왠지 내가 되게 나쁜 짓하는 기분이네. 하지만 저놈이 저렇게 생겨 먹은 건 분명 반칙 ・・・ 응? 뭐야? 저 녀석은 또 왜 왔어?
조담놈이었다.
저 녀석은 자룡대주에게 부탁해서 덥수룩한 수염을 얼굴의 반 정도가 가려질 정도로 붙이고, 항상 썬그라스를 끼는 식의 변장을 함으로서 ‘얼굴을 보이지 말라’는 내 조건을 어설프게 클리어 했다. 그리고는 현재 우리 집 1층 방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음. 저놈은 며칠 전 공원에서 애들 삥 뜯고 있던 양아치들을 모조리 밟아버렸다지? 다음 날 우리 집까지 쳐들어오려고 했던 양아치들의 추가병 력도 남김없이 아작이 났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저 사고뭉치를 허용한 건 실수인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트집을 잡아 쫓아버렸으면 좋겠는 데………….
“후후훗~!”
조담놈이 과거의 자기 보스였던 원판에게 시건방진 웃음을 날리는 군. 자기를 직접 키운 닥터 제이 말고는 원판조차 안중에 없다는 건가?
“천하의 화이트 크라우드, DP의 회장님께서 이런 후줄근한 집에 살면서 때로 쥐구멍만한 가게의 카운터까지 본다…………? 이거, 정말 웃기는 신세 가 됐군 그래?”
후줄근? 쥐구멍? 저 자식이 근데…
불끈 살기가 솟았다. 그러나 어째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걸음을 멈춘 원판이 천천히 조담놈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조담놈이 찔끔 기 가 죽어 버렸던 것이다.
“네놈의 자유 따위, 존재 자체도 언제든지 지워버릴 수 있다. 조용히, 얌전히 지내라.”
예의 극악오러를 발산하며 낮게 속삭이듯 몇 마디를 남긴 원판이 다시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는데도 조담놈은 꿀쩍 마른 침을 한 번 삼켰을 뿐, 아무런 대꾸나 행동도 하지 못했다.
나는 나대로 조담놈으로부터 몸을 돌리며 신경을 꺼버렸다.
지들끼리 저러는 건, 진짜 쌈만 안 나면 내 알 바 아니고… 그 보다, 또… 오네?
나는 낮게 한숨을 쉬며 난간에 팔을 걸치고 저만치 골목 어귀로 들어서고 있는 차를 보았다.
열흘 전에 지네 집으로 돌아갔다가 오늘 다시 놀러 온다고 연락이 왔기에 나는 내 전용 차 중 하나를 공항으로 보냈었다. 차는 주차공간이 모자라 는 우리 집 앞을 지나쳐 몇 집 건너의 놀이터 앞에 정지하고 있었다.
차 문이 열리고.. 놀이터에서 농구를 하고 있던 녀석들의 플레이가 일제히 멈추고 있었다. 젊은 남자가 타고 지나가던 자전거가 비틀, 휘청 갈짓자 운행을 하다가 겨우겨우 사고를 모면한다.
황금빛 원생이 금동옹을 안고 있는 꿈결처럼 신비로운 소녀, 소교가 날 발견하고 손을 들어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평범하고 조담놈 말처럼 후줄근해 보일 정도로 오래 된 원룸 건물에 불과했던 우리 집은 뜻하지 않게 인근 원룸 계의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