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63화 : 세계정화재단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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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63화 : 세계정화재단 가는 길


3. 세계정화재단 가는 길

문득 눈을 떴다.

으음. 뭐지? 난 단지. 그러니까, 술잠을 푹 잘 자서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뜬.. 그런 것뿐인 거, 그런 거 같은데 말이지. 근데 왜 이렇게 묘하고 낮 선 기분이 드는 걸까?

난 살짝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자연스런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결가부좌를 틀어 앉는 것도 습관적이라 별다른 것도 없었다. 대체 뭐가 특별 한 아침인 건지 알 수 없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지만, 결국 피식 한번 웃는 것으로 생각을 멈추었다. 내가 깨어난 장소가 신생 구중천 내의 우리 처소, 비화곡 성지를 재현한 곳의 침상 위라는 사실만 일단 인지하며 쩝 입맛을 다셨다.

뭐. 이유야 아무려면 어떻겠어. 그렇게 퍼먹었으면서도 숙취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 거 같고… 응?

“달렉~!”

윽! 그러고 보니 어제 저 달렉 집사도 선물 받았었지?

“달렉~! 파괴하라! 파괴하라~!”

훗! 저게 달렉 캐릭터의 특성이긴 했던 거 같긴 한데… 말이지. 저 대사와 함께 할 수 있는 집사 일이…………

“파괴하라! 주인님의 숙취를 파괴하라! 주인님의 숙취를 파괴하라! 달렉~!”

오호~ 나름 참신한 걸?

바깥 접견실인지 뭔지에서 대기 중이었던 모양인 달렉 집사는 얼음판 위를 미끌어지듯 빠르면서도 자연스럽게 내 침상까지 다가왔고 지잉- 열린 몸통에서 뭔가 담긴 잔을 꺼내고 있었다.

숙취해소 음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음. 달달하면서 시원한 거 자체가 좋구먼.

“달렉~! 이제 곧 주인님의 잔여 숙취가 파괴될 것입니다. 달렉~!”

“훗. 땡쓰, 달렉.”

빈 잔을 달렉 집사의 집게 발(?)에 건네주고 있자니까 호호릉~ 요몽의 생기있는 비행음이 들려왔다.

“하이~ 주인님 !좋은 아침!”

“그려, 그려. 니도 좋은 아침. 요몽.”

“후후~ 간밤에 너무 퍼 드시, 아니, 아니 하여간 좀 많이 과음하셔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멀쩡히 부활하셔서 기뻐요. 이제 주인님께선 알콜 분해 전문 주화장창도 최고 경지에 이르셨나 봐요. 추카, 추카!”

내 주화장창의 업그레이드는… 뭐, 그렇다 치고, 요몽 녀석이 이렇게 생기 있는 모습인건⋯ 음. 그래. 역시 몽몽의 은빛 오랏줄 봉인이 사라져있군. 식신마군 수준의 요리사들이 만든 요리까지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미각 인식 업데이트 패치, 요몽의 가상공간에서의 능력을 디테일하게 제한하는 은빛 오랏줄…! 우선 이 두 가지가 요몽을 다루는데 쓰이는 ‘당근과 채찍’ 쯤 되는 것 같군. 거기에 또 뭔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하여간 몽몽 녀석 요몽 다루는 능력까지 놀랍게 발전한 모양이야.

난 몽몽의 새로운 ‘관리 모듈’과 그 원천이 되는 소위 ‘창의력’에 대한 궁금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굳이 물을 필요도 없이 차츰 알게 될 테고, 음. 그래.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꿀잠까지 멈추고 진행해야하는 주요 일정이 있어. 어제 닥터 제이와의 술자리에서 닥터 제이는 오늘 아침에 그 녀석. 그래 그녀석이 마지막으로 합류한다고 했었지?

“요몽! 그 녀석, 레인. CR의 대장 레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아. 코드명 레인. 그는 이미 도착했어요. 하지만 닥터제이와의 면담이 좀 길어지는 분위기라 제가 아직 보고를 미루었지요. 어차피 그는 치유과정 을 그리 서둘지 않아도 되니까 주인님께선 조금 여유있게 그를 만나셔도 될 거예요. 왜냐하면, 훗. 그래요. 울 몽몽 오빠가 이번에 정말 엄청나게 업그레이드가 되어서리, 앞서 진행 중인 CR들 치유과정에서 얻은 데이터를 추가 활용하여 진행 시간 단축 및 안정화 으음. 그러니까 주인님께선 좀 느긋하게 일정을 진행하셔도 되는데… 근데 제가 좀… 뭔가 살짝 겁나기도 하고 그냥 기분이 좋기도 하고… 많이 이상한 기분이에요.”

요몽은 밝고 생기 있는 상태 그대로 복잡한 기분을 떠올리고 곤란해 하고 있었지만 나는 새삼 비죽 웃음이 지어졌다.

몽몽 녀석의 성장이 장난 아니긴 한 모양이네. 그 ‘새로운 서포터 관리 모듈이 효과적이라서 요몽의 군기를 잡은 것이 아니라, 몽몽의 변화 자체가 요몽을 스스로 따르게 만들 정도라는 거 같아. 이거, 이거 나도 좀 더 분발해야겠는 걸? 몽몽의 주인님 노릇 제대로 하려면 말이지.

“훗. 알았다, 요몽. 어쨌든 잠은 이미 깨었으니 천천히 CR5로 가자.”

“어, 그럼 세이버 원을 깨울게요. 아, 다른 두 마리는 현재 대교님과 소미령님 자매들과 있어요. 소령님과 미령님이 세이버들을 보고 어찌나 좋아하 는지 대교님께서도 결국 세이버 쓰리를 임시 임대랄지… 하여간 구중천을 떠날 때까지는 함께 지내도록 허락하셨어요.”

이건 당연한 전개로군. 원판 비서 ‘란’처럼 고양이 공포증이 있는 경우만 예외로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양이과 녀석들의 매력은 절대적이니 까 말야.

“아참. 실은 아까 대교님께서 여기 오셔서 주인님의 숙면 모드를 한참 기분 좋게 보고 계시다가 가셨었는데, 지금은 동생분들과 드라마 시청을 하 고 계세요. 동생분들 취향에 따라주시느라 그렇게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약간 애매한 블랙타임이네요.”

“애매하고 뭐고 그냥 계속 동생들과 있으라고 전해줘. 구목 녀석 호출 전까지는 대교가 굳이 함께 해야 할 일정은 없으니까 말야.”

“넵.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근데 주인님…, 음…….”

요몽은 뭔가 나에게 묻고 싶은 일이 생각난 듯 가까이 날아와 망설이는 듯 했지만 결국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포릉! 사라졌다. 녀석이 대교 에게 가기 전에 달렉 집사에게 명령을 하달했는지, 세이버들의 우리 문이 열리며 세이버 원이 어슬렁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난 승차감 환상의 괴수 자가용에 탑승한 채 처소를 나섰다. 그대로 CR5를 향하면서 난 다시 생각해보았다.

닥터 제이는 어제 레인, 그리고 단짝 콤비인 마편동 형제의 늦은 합류를 알려주면서… 음, 그래. 단지 알려 주었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어. 하지만 그때 난 녀석들, 그중 레인은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건 이 시점에서 다른 CR들은 몰라도 녀석들의 대장인 레인에게만은 뭔가 확인 할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근데 왠지 뭔가 생각이 잘 정리가 안 되네? 이건 아무래도 레인 녀석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하자.

그럭저럭(?) 평정심을 유지하며 CR5로 향하고 있자니까, 현재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의 복도 끝서 낯익은 몇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 다.

「후후~ 제가 닥터 제이에게 주인님의 기상과 바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더니 바로 접촉 지점으로 이동해 왔네요.」

하긴. 꼭 CR5 앞에서 봐야하는 건 아니지. 다만 보안관계상 아. 현재의 층은 4층과 5층 사이의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고 했었지? 그러니까 여긴 이미 웬만큼 보안 안전지대였던 거군.

“여어~ 오랜만이네 레인.”

“예. 정말 오랜만인거 같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진유준님.”

“나야 뭐, 항상 적당적당, 대충 살아가니까, 항상은 아닐지 몰라도 대체로 안녕한 편이지. 너희들은 어때?”

뭐. 저희들도 대체로 그랬습니다.”

암시에 걸리지 않은 상태의 마편동 형제가 쭈뼛거리며 어색한 태도를 보이는 건 예상했지만, 요녀석 레인도 뭔가 느낌이 다르네? 전에는 많이 마 신일’스럽게 가장된 여유로움을 보였는데 지금은 그게 아닌, 그냥 진짜 녀석의 자연스러운 여유..? 대충 그런 느낌? 훗! 역시 이 녀석의 평소 모습 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자기 암시에 의한 것이었나 보네.

레인. 사실 너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정말 엄청 많은데… 지금은 시간과 타이밍이 좀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만 먼저 물을게.”

난 잠깐 생각을 더 정리해 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인. 넌 내가 너희들을 에레보스 놈들과 싸우게 하려는 거 정도는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예. 그리고 그건 저희들 특히 제가 오히려 더 원하고 있습니다.”

“… 그건 혹시 블랙 때문인가?”

“… 훗. 역시 거기까지 벌써 파악하고 있으셨군요.”

“아니, 아니. 그 정도로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건 아냐. 그냥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정도?”

“후후. 바로 그런 점이 당신의 가장 무서운 능력, 직관력이겠지요. 예. 맞습니다. 당신께서 언제부터인가 느끼시게 된 그대로… 블랙과 저는 쌍둥이 형제입니다.”

에고야. 정말이었군. 그렇다면……….

“네가 일단 제대로 각성하면 블랙 녀석처럼 상당히 다양한 능력을 장난 아니게 쓸 수 있게 되겠군. 그런 거 자체는 좋은데… 음. 모르겠다. 조담놈 이 날 꺾고 내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너도 블랙이 되고 싶은 건지 그게 좀 걱정이긴 한데……………..

난 약간 어정쩡한 태도이면서도 결국 핵심사항을 말한 셈이었고 녀석의 반응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 걱정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합니 다.”

레인은 처음 보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전 적어도 당신만큼이나 지금의 제가 인식하는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 아무래도 내가 괜한 기우를 했었던 거 같군.

“짜식! 어른인 척하고 다닐 때는 좀 그랬는데, 이제 진짜 어른 다 된 거 같네?”

나는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고 레인도 조금 쑥스러워하는 기색과 함께 마주 손을 잡아왔다. 사실 아직 약간은 불안한 요소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악수를 하는 녀석의 손아귀에서 전해오는 뭔가가 이제야 녀석이 보호 대상이 아닌 ‘전우’라는 인식을 강하게 해주고 있었다. 난 악수를 마치 자마자 뒤로 조금 물러서며 말했다.

“사실 너에게는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얘기가 꽤 많았어. 하지만 적어도 듣고 싶은 얘기는 다 들은 기분이다.”

“그럼 하시고 싶은 얘기는 아직 남았다는 말씀이군요.”

“아니. 지금은 그것도 때가 좀 아닌 거 같고, 일단 넌 빨리 너의 형제들과 합류하는 것이 우선이겠어. 나도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막 떠올랐고 말 야.”

내가 오늘은 일단 여기서 찢어지자는 뜻을 보이자 레인은 빠르게 내 마음을 이해한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레인이 마편동 형제와 함께 돌아서자 닥터 제이도 그들을 따라 나서며 슬쩍 몇 마디를 흘렸다.

“좋은 콤비가 될 거 같군. 자네들은.”

-당신의 생각, 계산대로… 말이죠?

노골적으로 찌르는 전음을 보내니, 닥터 제이는 짐짓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몸짓과 함께 멀어져 갔다

-비출… 아, 아니다.

몽몽을 비상호출하려다가 문득 멈춘 건 허공에 이미 몽몽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훗. 우리 몽몽 선생도 이제 돗자리 깔아도 되겠군.

「별말씀을. 전 다만 CR5 시스템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보고를 위해 대기 중이었을 뿐입니다.」

과연, 도통한 우리 몽몽 선생. 복귀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 정도로 일을 진행해 버렸다 이거지? -좋아, 몽몽.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

「별 말씀을. 그보다 조금 전 코드명 레인에게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고 하셨습니다.」

-어, 그래. 그랬지. 근데 그건… 음. 모르겠다. 몽몽, 너도 알다시피 난 뭔가 목표가 생기면 그와 관련된 준비를 나름 다각도로 하는 스타일이잖아? 근데 이번엔 웬일인지. 소위 ‘나답지 않게 지내왔어.

난 괜히 가려워지는 옆머리를 극적이며 멋쩍은 표정을 지어야했다.

-레인과 얘기하다보니까, 그제야 생각이 나더라고. 내가 그동안 한번도 CR들과 에레보스의 전투에 관한 작전을 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말이 야. 그래서 빨리 그 작전이란 걸 짜야한다는 다급함이 생겼던 건데… 그런데 이상도 하지? 난 또 왜 금방 그게 귀찮아지는 걸까?

분명 중요한 사항임에도 귀찮아지고 의욕이 안생기고… 그래서 결론은… ‘대략 난감.’

난 그렇게 난감한 기분이었지만 몽몽은 내 상태에 대해 뭔가 알겠다는 듯 비죽이 웃었다.

「현재 주인님의 심리 상태에 관한 몇 가지 설명 패턴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언어화하여 청취하시는 것보다는, 주인님 스스로 천천히 자신의 마음에 적응하고 이해하는 그러한 방식을 권고합니다.}

-말인즉슨 옳다만・・・ 그런 노력하는 거까지 귀찮으니까 문제지.

으음. 근데 나 지금 왠지 현재 상태 적응을 위한 최선책을 떠올린 거 같네…, 그래. 이런걸 뭐 생각하고 고민하고 어쩔 필요가 있나? 그냥 내키는 대 로 가자. 어쨌든 반드시 해야 할 타이밍에서는 그냥 하게 되겠지 뭐.

난 어떤 의무감 같은 거 때문에 애써하려던 생각들을 접고 새삼 가볍게 아함~ 하품을 했다.

-좋아, 몽몽. 나 CR아그들 생각은 잠시 접기로 했다. 아, 그래도 궁금했던 거 한 가지는 묻자. 몽몽 너, 계속 녀석들과 닥터 제이의 모든 것을 체크 하고 마크해 왔겠지?

「그렇습니다, 주인님.」

-그럼 레인의 활동도 거의 알고 있겠지만. …그냥 여기 오기 직전에 뭐 했는지만 얘기해줘, 그러니까, 여기서 자신들의 각성을 위한 준비가 끝났 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늦게 합류한 이유는 뭐였던 거지?

「코드명 레인의 활동은 계속 주인님께 약속한 대로 형제들을 더 찾는 것으로 일관되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결정적인 부분에 서 달랐습니다.」

이것 봐라? 녀석이 뭔가 날 속였다고?

「… 그는 형제들을 더 찾아내기는 했으나 더 이상 누구도 이곳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맞아. 나도 그 점이 좀 이상해서 아까 그걸 묻고 싶었었어. 뭐, 결국 묻지 않긴 했지만 말야.

「물으셔도 상관은 없었을 것이라 판단되지만, 묻지 않으신 것이 더 현명하셨습니다. 그는 주인님께 나쁜 뜻을 가지고 형제들을 더 깊이 숨어있으 라 지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뭐야, 이거. 더 깊이 숨어 있으라고 했다고? 그럼 그 이유는 혹시 날 아직 믿지 못해서? 내가 녀석들까지 위험해지게 할까봐?

「비슷하지만 약간 다릅니다. 그는 단지 그만큼 자기 형제들을 많이 아끼고 조심하는 것이라 판단됩니다. 현재까지의 모든 정황 데이터 분석 결과, 그는 현재 주인님께서 거두신 멤버들만으로도 충분한 전력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또한 현재 주인님께서 거두신 CR들은 대부분 수명이 얼 마 남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과연, 그렇게 된 거군. 레인은 계획없이 급하게 끌어 모은 아이들을 맡긴 게 아니었어. 녀석은 당장 치유가 급한 아이들과 프리메이슨과의 전쟁 에 도움이 될 정도로 전투력이 뛰어난 아이들을 나름대로 엄선하여 내게 맡긴 거였어. 날 신뢰하고 내게 의지하고 싶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만약을 대비한 거야. 하핫. 고 녀석 참. 아, 아니지. 녀석만은 당당한 사내로 인정해 주기로 해놓고 너무 어린아이 취급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되지.

흠. 어쨌거나 그럼 추가로 찾아낸 아이들은 아직 남은 수명이 약간 여유가 있다는 얘기군.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코드명 레인은 오늘 이곳에서 닥터 제이로부터 CR들에 관한 주인님의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크게 안도하는 것 같았습 니다.」

-내 구체적인 계획? 혹시 전투 참가 희망자만 참가시키고 다른 아이들은 전투에서 배제하여 자유롭게 지내게 하는 것이 기본방침. 그리고 아이 들이 편하게 지낼만한 장소로… 난 일단 괴수 섬과 화이트 아일랜드 추천… 뭐 이 정도 생각하는 거? 어? 그러고 보니 어제 술김에 닥터 제이에 게 그런 얘기도 했었던 거 같네?

「홍홍홍. 주인님께선 분명 그러셨어요.」

윽. 요몽 녀석이 갑자기 끼어드는군.

「닥터 제이를 떠보려다가 괜히 자기 속마음만 내비쳤다고 후회하시더니 술김에 싫은 기억을 살짝 날리셨었나 봐요오.」

-몽몽. 쟤 좀 어떻게… 음. 아니다. 어쨌건 그래서 레인이 날 더 신뢰하게 되어 내 앞에 자기 암시 없이 나서고 그랬다는 것도 알겠고.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웃으며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내 생각대로 CR아이들은 내가 추천하는 장소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미래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거네? 그, 치?

「그렇습니다, 주인님. 주인님 생각대로라면 괴수섬에 CR들만의 왕국이 만들어지고, 화이트 판타지아와 이곳 구중천은 언제든 올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안식처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CR들에게는 그러한 긍정적 환경들 중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 한 선택권을 주고 싶어하는 주인님께 모두, 특히 이제 코드명 레인도 완전히 감복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감복했다는 표현은 왠지 어색하고 몽몽도 살짝 망설이며 쓴 거 같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더 딱히 더 적당한 표현은 없는 거 같군. 어쨌든 중요한 건・・・ 녀석들도 만족, 나도 만족! 좋군. 이런 전개 너무 좋아.

「어, 근데요 주인님. 기분 좋으신데 약간 찬물일거 같아서 좀 그렇지만..

뭐야. 몽몽도 아니고 요몽이 이 시점에서 찬물 발언 할게 있다고? 몽몽이 망설이며 요몽을 말리지 못하는 기색으로 보아 몽몽도 판단이 어려운 문 제인데 요몽이 그냥 지르는 분위기지?

-일단 얘기해 봐, 요몽. 정말 찬물이면… 음. 아니다. 내가 그렇다고 울 귀염둥이 요몽에게 생사령을 쓴다거나 할 소인배 주인님이 아니지, 암. 언 능 불어,

「저기, 지금 왠지 조금 무서운 협박을 받은 기분이…………. J

-에이 아니래두. 그냥 편하게 얘기해, 요몽.

요몽은 나의 사악 모드 발동을 걱정하며 좀 더 뜸을 들이기는 했지만, 결국 수다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음. 그게요, 레인은 이번 여정에서 마지막 코스로 한국땅을 찾았었어요. 그리고 그들, 문제의 그들을 추적하여 모두 찾아내더라고요?」

이거 뭔 얘긴지 아직은 감이 잘 안 오네. 우리나라에도 CR들이 있어서 그들을 찾았다는 그런 얘긴 일단 아닌 거 같은데?

「레인이 찾아낸 그들은 바로 주인님 친구분들을 테러한 싸가지 양아치들…! 네, 주인님께서 너무 약하게 처리했다고 항상 후회하시는……… J -자, 잠깐. 정말이냐? 정말 레인이 그 놈들을 찾아냈다고?

난 조금 당황하여 요몽과 몽몽까지 돌아보았지만 녀석들 모두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 젠장. 난 분명 그때 그 양아치들을 너무 약하게 처리해서 두고두고 찜찜한 기분이긴 했지만 그걸 레인이 어떻게 알고… 아니 아는 건 어찌 알아 냈다고 해도 그렇지, 녀석이 왜 굳이 그 녀석들을.. 아, 혹시 이건…….

-선…물? 난 분명 요몽 말처럼 후회하고 있었어. 내 친구들에게 그런 고통을 가하고 다른 누구에게든 그런 짓하고도 양심의 가책 따위 없이 살아 갈 사회의 기생충이며 쓰레기들을 난 나 자신의 살의와 광기를 잠재우는데 급급해서………….

「주, 주인님.」

「주인님! 진정하십시오!

요몽과 몽몽이 동시에 외쳤지만 나는 그 전에 이미 스스로 급제동 브레이크를 작동하고 있었다.

-어~ 쏘리, 쏘리! 놀라게 해서 미안타, 요몽 남매. 그리고 너도, 그래 세이버 원, 너도 겁먹지 마. 하핫! 미안미안. 이래서 내가 계속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봉인해 두고 있었나봐. 하지만 괜찮아. 이젠 괜찮으니까 음. 그래 계속하자. 레인이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나에 대한 선물로서 그놈들 처리를 결정했는지 그 과정은 그렇다 치고, 우선 결론부터 알자. 레인의 스타일로 봐서 아마 그때 그 자리의 모든 놈들을 철저히 빠짐없이 찾아냈을 테고… 그 다음 어떻게 처리했지?

내가 빠르게 마음을 다스려 진정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몽몽 남매는 망설였다. 결국 대표로 입을 연 것은 몽몽이었다.

「참고로, 코드명 레인이 주인님의 활동에 관한 상세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현재 주인님께서 가까이 두신 CR들의 정보활동 때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저로서도 아직 레인과 다른 CR들간의 통신 루트를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추정되는 유력 루트는 텔레파시에 의

-저기, 잠깐 몽몽. 너 지금 내 심리 상태가 쬐금 불안정한 구석이 있다고 해서 그러냐? 자꾸 초기의 장황 설명 모드가 나오는 거 같다? 지금 얘기 정도는 나도 쉽게 짐작 가능한 얘기잖아. 나도 이 생활 짬밥이 얼만데………………

내가 살짝 인상을 긁어 보이자, 몽몽이 조금 민망해하는 기색으로 웃었다.

「… 죄송합니다, 주인님. 저 역시 전체 시스템 재구축이 끝나지 않아 예. 실수를 했습니다. 일시적인 모드 변경을 취소하겠습니다.」

몽몽은 순순히 실수를 인정하며 쓴웃음 같은걸 떠올리긴 했지만 곧바로 더 밝아지며 보고를 재개했다.

「코드명 레인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3일전이었습니다. 그가 문제의 ‘저급 비주류 인간들을 포획하는데 2일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레인과 마 편동 형제의 기본 능력치로 보아 고의로 천천히 사냥을 진행하였음은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레인 일행이 문제의 저급 비주류 인 간들에게 얼마나 극심한 공포심을 느끼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요몽의 교육상 좋지 못하기 때문에 정보 공유를 금지한 상태입니다.」

-음…? 그러고 보니 지금 어느 사이 요몽이 보이지 않네? 네가 요몽을 딴 데 보내거나 한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요몽 스스로 간 것입니다.」

흐음. 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는 걸 스스로 거부하게 되었다는 건가? 몽몽의 교육 때문인지 어쩐지 여하간 나름 기특한 패턴이군. -좋아. 이쯤에서 나도 원판 놀이나 한번 해보자면… 레인 녀석, 그 빌어먹을 어린 쌍쌍바 시키들을 살벌하게 사냥하여 한군데로 모았겠지? 그리 고 아마도… 나의 기본 행동 강녕이랄지, 그런 걸 지켜서 놈들을 바로 해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도 너와 요몽이 사실을 밝히길 꺼려했다는 건… 역시 레인은 그 양아치들에게 뭔가 죽음에 이를 정도의 장치를 해놓고 왔다는 그런 추리가 성립되는군.

내가 비교적 담담한 태도로 상황 분석을 시작하자 몽몽은 슬며시 경청모드로 들어가고 있었다.

-레인의 특기는 암시, 최면 뭐 그런 거니까, 그 저급 양아치 놈들에게도 뭔가 조건을 붙여서 암시를 걸었을 가능성이 높지. 앞으로 또 깝죽대고 진유준의 심기를 건드리면…, 이라는 건 좀 그렇고, ‘남들을 해치는 행위 금지’ 정도 되려나? 그리고 그런 조건을 무시하고 내 친구들에게 했던 짓을 누구에게라도 하려고 들면… 음~ 기본적으로는 사냥당할 때 정도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 어쩌면 자살? 혹은 놈들끼리 서로 죽이기…? 그 정도? 어떠냐, 몽몽. 대충 비슷하냐?

-… 대충이 아니라 거의 정답을 유추하셨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라고 제가 판단했었던, 주인님의 선택이 남아있습니다만, 그에 관해서도 이미 선택을 하신 것으로 판단되는군요.」

-선택이고 뭐고, 난 그냥 알았으면 된 거지 뭐 하고 말 것도 없잖아. 레인 녀석이 바보도 아닌데 어련히 알아서 자 잘 마무리했겠지. 이를테면… 그 양아치 놈들에게 건 암시가 딱 ‘죽음’이진 않겠지. 막연하게 ‘해친다…정도? 그러니까 레인은 그 양아치들에게 충분히 선택권을 준거지. 먼저 나 쁜 짓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나쁜 짓을 선택했을 때에도 그로인해 죽음의 징벌을 당할 것인지 적당히(?) 고통 받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잡을 것인 지… 그건 그 녀석들 마음에 달린 거야 ‘해친다’를 ‘죽인다’로 해석하는 건 그 녀석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일 테니까. 그러니까 최종 및 결론 을 내리자면… 더 이상 내가 스트레스 받으며 생각할 건 없음. 덧붙이자면 레인에게 땡쓰 기특. 이정도?

난 왠지 가벼운 독서나 영화 관람 후에 감상문을 쓴 기분으로 말을 마쳤다. 몽몽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 살 짝 거슬리기는 했다.

뭐랄까… 비약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몽몽에게 새삼 사용자 자격 테스트를 받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거슬리는 마음이 코딱지 만큼이라면, 업그 레이드판 몽몽에게 어울리는 주인이 되어간다는 기쁨은 ‘하늘만큼 땅만큼은 너무 유아틱한 표현인가? 하여간 종합적 결론은 ‘대략 만족’이로군.

-좋아 몽몽. 이 문제는 이제 마무리된 거로 하고, 다음 일정 진행하자. 에레보스 놈들과 한판 뜨기로 한건 내일 모레이고, 난 그전에 세계정화재단 에 꼭 들르고 싶으니까, 여기일은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끝내야겠지?

「그렇습니다. 세계정화재단 방문시의 세부 일정은 저도 예측이 어려우나 주인님께서 가늠하신 진행패턴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다 만, 주인님께서 특정 인물과의 만남을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예약 전화를 권고합니다.」

-특정 인물?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아무래도 익숙한 ‘마신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전화 통화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데다 직접 만난다 해도 지금까지와 같 은 패턴으로 제한된 얘기밖에 못들을 것 같았다. 그래. 그 인간, 어딘가 닥터 제이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 상대하기가 영 껄끄러워. 차라리 그의 유일한 상관인 듯한 지부장을 만나는 것이 나을 거 같긴 한데…. 근데 이 여자, 그래 여자라고 했지? 마신일이나 옥환, 그밖에도 아직 만나지 못한 초강력 울트라 짱쎈 영능력자들을 수하로 거느린 그 여자… 그 여자의 능력 때문에 만나기가 왠지 껄끄⋯ 아니 솔직히 약간은 무서울 정도… 젠, 장…! 무섭다고? 나 진유준이? 나에 대해서 뭐든 꿰뚫어 볼지도 모를 그 여자의 능력이…? 아니 그 여자가? 그게 뭐든 무섭다고? 내가? 이 진유 준이?

어찌어찌 내 안의 본심을 깨닫자 반사적으로 반발심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귀차니즘도 좋지만 이런 기분만은 예외였다.

-몽몽. 재단에 연락해서 지부장 면담 요청해줘.

「… 알겠습니다, 주인님. 일정을 세계정화재단 한국 지부장과의 만남에 중점을 두겠습니다. 헌데 저는 약 1시간 후부터 다시 레인 일행의 각성 과정에 집중해야합니다.」

응? 너 이제 완전히 본체로 복귀하는 거 아니었어?

난 무심결에 그렇게 물었지만, 생각해보니 몽몽은 아까 CR각성 시스템이 ‘거의 완성’이라고 표현했었지. ‘완전히’가 아니고 말야.

-어~ 물론 요몽의 서포트도 꽤 쓸만하고, 요즘 들어 발전 속도도 빠른 거 같긴 하다만………………

「요몽과 패티의 서포트 활동에 불안정성이 많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서포터 관리 모듈은 그녀들을 빠르게 안정적인 서포터로 서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따라서………….」

-훗! 그냥 믿고 기다려 달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주인님.」

난 왠지 피식 웃음이 나왔고 몽몽도 마주 웃었다.

-알았따, 알았어. 도통한 몽몽 선생이 보증하는데 믿어야지, 뭐.

「감사합니다, 주인님. 현 시간부터 요몽을 다시 주인님 서포트 책임자로 임명하겠습니다. J

몽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어? 진짜야, 몽몽 오빠?”라는 요몽의 음성이 아주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와아~ 주인님 만세! 짱! 정말 고마워요오!」

호들갑스럽게 나타난 요몽은 기쁨에 찬 날개짓으로 정신없이 날았다.

요몽이 별거 아닌 일로도 호들갑스러운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번엔 특히 상황에 비해 지나친… 즉, 오버를 하고 있군. 요 녀석, 업그레 이드판 몽몽이 내 서포트에 집중하게 되면 자기 할 일이 없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직위강등, 지위격하, 백수신세(?) ・・・ 뭐 그런 상황을 걱정했었던 건가?

난 결국 피식거리며 몽몽을 돌아보았다. 몽몽은 신나하는 요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정색을 하고 내게 고개를 숙여왔다.

「주인님. 그럼 전 다시 CR들 각성 시스템 관리 모드로 복귀하겠습니다.」

-어, 그려. 수고!

스륵 사라지는 몽몽의 뒤쪽 허공에서 요몽이 빠르게 비행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어? 세계정화재단으로부터 메시지 답신이 왔네요? 아, 그러니까 좀 전에 몽몽 오빠가 먼저 주인님의 뜻을 메시지로 전달했었거든요. 그 답신이 온 건데…………」

요몽은 비행을 완전히 멈추고 메시지를 확인하는 기색이더니 다시 살며시 날아서 내 정면의 허공에 섰다.

「프리메이슨이 두려워 할 정도로 캡짱 쎈 울 주인님. 그런 주인님조차 꺼려하셨던 곳답게 만만찮은 답신이 왔네요.」

요몽이 띄워주는 메시지 창의 내용은 이랬다.

-지부장님의 전언, ‘진유준씨가 날 만나고자 한다면 언제든 환영. 인연이 닿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을 것.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진유준씨의 마음 이 시키는 대로.’-

…쳇. 요몽 말대로 만만치 않군. 소림 성승의 난해한 선문답스러우면서도 왠지 쉽게 이해가 될 듯도 한… 젠장, 안되겠다. 이런 상대는 역시 정면 승부하는 것이 좋겠어. 그것도 내일까지 기다릴 것 없이 가급적 빨리!

항상 간다간다 하면서도 미루었던 세계정화재단 방문과 방문 목적까지 좀 더 확실해지자, 내 머릿속은 귀차니즘을 딛고 바쁘게 회전하기 시작했 다.

일단 요몽. 난 내 처소로 복귀해야겠다. 그러니까 그곳으로 대교를 불러줘. 그리고……….

요몽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는 사이에 내가 탄 세이버 원은 그리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도 빠르게 지하 8층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 처소의 현관 (?)앞에는 대교가 세이버 투와 함께 기다리고 있다가 밝은 미소로 나를 반겼다.

“간밤의 상황 때문에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이 좋아보이셔서 기뻐요.”

과연 우리 대교 ・・・ 랄까? 특별할거 없는 안부인사 정도의 말인데도 내게 자연스러운 따스함이 전해지며 평정심 아래의 약간이지만 분명 남아있던 마음의 찌꺼기랄지, 하여간 부정적인 무언가가 씻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처소의 연못 옆 돌테이블에서 달렉 집사가 준비해 준 아점을 먹으며 내가 대충 다시 짜본 일정을 대교에게 들려주었다. 대교는 내가 갑자기 재단 방문 및 지부장 만남에 중점을 둔 일정을 짜고, 서둘러 진행하는지가 의문인 듯했지만 굳이 자세한 얘기를 묻지는 않았다.

“오라버니께서 숙고하여 결정하신 일인데 제가 토를 달 이유는 없겠지요.”

얼핏 ‘당신의 뜻에 무조건 따르고 의지하겠습니다’ 정도의 무조건 순종적인 대사처럼 들린다. 하지만 대교의 차분하면서도 안정적인 음성과 눈빛 은 뜻대로 하시길, 만약의 경우에는 뒤에 제가 있습니다’라는 적극적인 의지가 느껴지고 있었다.

“흠. 들었지, 요몽. 울 이쁜 대교 마님의 허락도 받았겠다, 이제부터 일사천리, 논스톱으로 진행하는 거다.”

“옛썰~! 명령에 따라, 앞으로 두 시간 이내에 출발 준비를 완료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닷!”

요몽이 기운찬 대답과 함께 포릉 사라지자마자, 나는 대교에게도 살짝 명령조로 말했다.

“대교! 대교는 다시 동생들에게 가서 상황을 이해시키고… 음. 구체적인 지시는 필요 없겠지?”

“저도 옛썰. 아니, 저는 비화곡 버전으로 존명!”

장난기를 담아 명령을 받드는 대교에게 나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가면서 먹을 도시락은 식신마군 식당에서 알지?”

“후후~ 이번엔 복명!”

비화곡 모드에 이어 지하무림 모드까지 보인 대교가 처소를 나가고, 혼자 남은 나는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문득, ‘내가 지금 뭔가 익숙지 않은 심리상태에서 모든 일을 너무 성급하게 처리하려고 드는 건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스쳤다. 하지만 난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난 사실 내가 현재 어 느 정도로 긍정적인 정신상태로 각성된 건지 잘 모르겠어 심지어 언제부터 뭘 계기로 이렇게 된 건지 조차 알 수가 없어. 그래서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잘 서지 않기도 한 건데… 그래도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내가 본래의 나라는… 그런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져. 그러니까… 더 이 상 나 자신을 의심하지 말고 이대로 가자. 그러는 거다. 진유준!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시작한 내 입가가 빙긋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략 두 시간 정도 후.

나와 대교는 내 계획대로, 최소한의 사람들에게만 우리의 행보를 알린 상태에서 구중천을 떠나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와우! 이거 정말 묘하네요?」

-뭐가 말이냐, 요몽.

「그게요. 따지고 보면, 지금 주인님께선 특별하게 새로운 일정을 결정하신 게 아니잖아요. 단지 일정의 순서를 바꾸었을 뿐인데… 그런데도 완전 히 전혀 다른 상황전개가 되는 거 같아요.」

・완전히 전혀 다르다는 건 좀 오버겠지만… 나도 기분이 많이 다르긴 하네.

내가 어느 정도 요몽에게 공감을 표하며 옆을 돌아보니, 대교도 곱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다른 생각들은 다 접고, 대교가 챙겨온 식신마군의 도시락을 언제 까먹을까를 생각하며 흐뭇하게 눈을 감았다.

다시 두 시간 정도 후.

식신의 도시락을 맛나게 해치운 내가 창밖을 보니, 벌써 낯익은 한국 땅의 지형이 보이고 있었다.

또다시 한 시간 후.

우리를 태운 나의 자가용 키트 1.5호가 신나게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흐음~ 공항에서의 주인님 행동 패턴으로 봐선 차도 광분모드로 운전하실 줄 알았는데 말이죠. 의외로 조신하게 모범 운전을 하시네요?」 -얌마. 공항에서 공공보법과 은신술을 써서 빠져나온 건, 그렇게 해도 피해볼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난 어디까지나 모범 시민이란 말야. 「후후. 주인님의 모범성은 왠지 기준이 좀 거시기 하지만… 암튼 기본적으로는 인정해 드립죠.」

요 녀석. 너, 계속 조용하다가 나와서 까부는 거 보니까 뭔가 애매한 보고를 할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엑! 그걸 어떻게… 으~ 원래도 눈치마왕이셨는데 이젠 눈치마신쯤으로 업그레이드 되셨나 봐요.」

-됐거든? 그냥 보고나 해봐, 애매하든 어쨌든.

「어, 그게. 내용은 좋은 건데 타이밍이 좀 그래서.. 아, 잠시만요. 저 앞에서 고속도로를 빠져 나가셔야해요!」

응? 이쯤에서 나가는 곳이 있었던가?

난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속도를 줄여서 요몽이 알려주는 출구로 차를 몰았다.

현재 위치는 경기도 안성에 도착 직전…쯤 되려나? 안성에는 친척들이 많아서 자주 오간편인데… 이쯤에서 빠져나가는 톨게이트가 있었던가? 여기가 정말 톨게이트로 가는 길 맞나 싶을 정도로 한적한 산길을 몇 분쯤 가서야 겨우 작은 톨게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이패스가 있어서 그리 로 나갈까도 했지만, 일부러 사람이 있는 출구를 선택했더니, 졸고 있던 중년 여자가 흠칫 눈을 뜬다.

「아, 굳이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여긴 정상적으로 등록되어 운영되는 요금소에요. 이 여자 분도 정직원이며 이미 제가 신원확인까지 마쳤어.」 요몽의 말처럼 나도 요금을 내고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별다른 수상함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문제는요,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이 출구를 안내하지 않게 세팅되어 있다는 점이지요.」

역시 그랬군.

새삼 세계정화재단이 만만찮은 조직임을 느끼고 있는 내 앞으로 완만한 경사와 굴곡의 산길 도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뭔가를 깨달은 나는 차 창을 조금 열어보았다.

와우우~ 쥑이는데.

청량한 산 공기가 기대이상이었고, 조수석의 대교도 작게 탄성을 울렸다.

“아아~ 이런 장소, 이런 공기・・・ 너무 오랜만이에요.”

“하핫! 나도 그래. 우린 그동안 너무 여유가 없이 지내 왔나봐. 지금처럼 심상치 않은 조직을 찾아가는 길뿐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변에는 항상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뭔가가 존재했을 텐데 말이야.”

“후후. 정말 그랬었던 거 같아요. 요즘 유행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우린 너무 많이 놓치고 있었나 봐요.”

“그래. 그 ‘소확행’이라는 거.. 이젠 우리도 좀 제대로 챙기며 살자구. 음~ 그런 의미에서 대충 차 적당히 세우고 뽀뽀 좀 하고 갈거나?”

「주인님!」

“야아!”

「아니, 전 방해하려던 게 아니라… 호홍.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되겠네요. 네, 두 분은 하시려던 거, 그 시시때때 불쑥불쑥 키스타임 욕구를 채우셔 도 되겠어요. 전 잠시 사라져드릴까요?」

“얌마! 분위기는 이미 건전하게 파토 났잖아!”

내가 짐짓 목청을 높이자 대교도 피식 웃고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요몽. 이제 네가 방금 왜 나섰는지 말해보렴.”

「어, 그게요. 대교님. 좀 전의 갈림길에서 좌회전을 하셨으면 재단가는 길이 점점 힘들어지게 되는 거였어요. 코드명 마신일, 그 사람은 ‘일반인 대상의 미로형 결계 기본 패턴이라고 했어요. 그 사람은 또, ‘진유준님이라면 따로 알릴 필요도 없는 장난수준’이란 말도 하긴 했네요.」

흐음. 심플하게 정리하면, 재단에서 설치한 미로형 결계를 내가 별생각 없이 통과했다는 얘기로군. 이런 식의 헤맴 유도용 갈림길은 아직 더 많 을 거 같지만 내 직관력은 그걸 생까고 갈길 잘 갈 수 있게 해줄 것 같군.

“좋아.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겠어. 근데 너, 아니 너희들, 그 마신일과는 언제부터 통화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냐?”

「삼십분쯤 전에요.」

“아, 혹시 네가 하려다만 보고가 그거냐? 마신일과의 통화?”

「어~ 그게, 보고드릴 중요사항은 그전에 거의 확인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저희들의 정탐활동이 그 사람에게 걸려버린 거예요.」

마신일을 몇 번 직접 만나서 그의 능력치를 어느 정도 눈치까고 있는 나로서는 그럴 법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이었지만, 그에 대해 얘기로만 들었던 대교는 새삼 긴장하여 요몽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 그동안 쌓인 재단 관련 데이터를 저희들이… 훗. 솔직히 몽몽 오빠 혼자서 다 분석한 결과, 그 마신일이라는 사람은 한국 지부의 지부장 비서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가디언’이라는 거예요. 여러 가지 그런 정황을 발견할 수 있기도 했지만 그쪽, 소위 오컬트계열 종사자들 중에는 마신일 씨를 ‘한국의 그 여자를 지키는 남자’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나 봐요.」

몽몽 녀석, 누군가와 직접 전화 인터뷰라도 했었던 건가…? …음. 어쨌든 마신일이 한국 지부장 가디언에 특화된 존재라면, 그 전제조건에서 파 생되는 여러 가지 유용한 정보가 많겠는 걸? 예를 들어………………

「어, 그래서 몽몽 오빠는 마신일씨가 현재 재단에 없다면, 지부장은 반대로 반드시 그와 함께 나갔거나 지부안의 안전공간에 있을 거라고 했어 요.」

그래. 바로 이런 얘기.

「그래서 저와 패티는 계속 마신일씨를 탐문해왔었는데요, 아까 삼십분쯤 전에 패티가 그를 발견하는데 성공했지요. 그가 위성에 촬영된 지점은 ‘목포’라는 도시의 항구였고, 저희들의 추가정밀 탐색결과 그의 주변에 지부장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전혀 없었어요. 따라서 ‘지금 만나러 가시는 지 부장이 안전지대인 재단 안에 있을 가능성이 엄청 높아졌음.’이라는 보고를 드리려고 했지요. 주인님께서는 이미 재단으로 가시는 중이라 유용한 보 고인지 애매해서 보고를 망설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마신일씨 쪽에서 먼저 잽싸게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뭐예요?」

요몽이 허공에 띄우는 문자 메시지는 이랬다.

-조금 전 내가 느낀 시선은 그대들, 진유준씨의 요정들이었나요?-

훗. 왠지 문자 메시지를 찍으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마신일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군.

「처음엔 저희 둘 다 많이 놀라서 패티는 또 방에 숨어버리고… 하지만 호홋~ 제가 누굽니까. 저 요몽은 주인님 빽을 믿고 누구와도 당당히 상대할 수 있는 왕땅 언니 요정 아니겠습니까? 전 주인님 서포트 책임자로서 그와 당당하게 이런저런 대화까지 나누었습죠.

요몽은 기세등등 ‘음뿌하핫~’ 모드가 되었지만, 나는 그냥 피식 싱거운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어째 영양가 없는 수다만 떨었을 거 같긴 하지만. 뭐, 패티보다 요 녀석이 내세울 수 있는 장점도 그런 거니까. 아, 근데 그보다 대교의 기색이 심상치 않군.

“대단…하네요, 그 남자. 그리고 그런 자를 수하로 두고 있는 여자 지부장에 대한 호기심도 더욱 커지고 있고요.”

「문제의 그 여자, 세계정화재단의 한국 지부장에 관한 데이터는 사실상 거의 없어요. 일반적인 공식문서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재단 자체의 공개 자료에도 어물쩍 이름만 나오네요. 비공식 여러 루트를 통해 확인된 거라고 해봐야… 성별, 여자, 이름, ‘오영애’, 나이, 이십대 중반에서 삼십 대 초반. 뭐… 이정도가 다네요. 아참. 이쁘긴 하다네요. 엄청 무지막지 예쁘다는 의견이 지배적인데… 훗. 그래봐야 우리 별세계 안드로메다 정복자 급 미모의 대교님께는 감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요.」

다른 사항은 그렇다 치고, 이름이 오영애……? 이거 참.. 난 왜 갑자기 ‘친절한’, ‘막돼먹은’ 뭐 이런 말들이 떠오르는 거지?

난 ‘영애’라는 이름에 선입견을 심어버린 한국 영화와 드라마들 때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분위기 깨짐’을 느껴야했다. 대교는 나와 달리 이름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고 지부장과 비서인 마신일에 대해 진지하게 뭔가 생각을 해보는 것 같았다.

으으음~ 차안의 분위기가 어영부영 좀 이상해진 거 같군. 뭔가 분위기 바꿀 대화거리가… 응?

「와아~ 미로 결계 코스가 끝나는 지점이네요. 제 안내도 없이 주인님 직관력만으로 다 통과해 버리셨어요.」

에고. 요몽 말처럼 별생각 없이 일행들과 수다까지 떨면서도 미로코스를 잘 통과한 거 자체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운전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좋지 않아. 운전할 때는 좀 더 운전에 집중하자, 진유준.

내가 지나치게 풀어졌다 싶은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에 차는 산길과 자동차 전용도로로 여겨지는 큰길과 만나는 지점까지 도착해있었다.

일단 습관적으로 차를 세우긴 했는데, 이거 어째 자동차 전용도로도 산길 못지않게 한산・・・ 아니 이건 한산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냥 텅 빈 도 로 분위기일세?

“요몽. 여기 이 도로에도 재단에서 뭔가 설치해서 다른 차들이 오는 걸 통제하고 있는 거냐?”

「그건 아닌가 봐요. 그냥 새로 생기는 도로인데, 현재 위치에서 재단 방향으로 10여 킬로 정도, 반대편으로 5킬로 정도까지 완성되어 있는데 다른 도로와 아직 연결되지 못한 상황인가 봐요. 재단 가는 길은 도로가 끝나는 지점 부근에 있구요.」

요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고, 나의 키트 1.5호는 여유롭게 텅 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의 산길에서도 다른 차를 보지 못하긴 했지만, 이렇게 넓은 왕복 6차선 도로를 혼자 달리는 건 또 색다르구먼. 으으음…, 그러고 보니 군 입대를 앞둔 어느 날인가 새벽에 큰 형 차 몰래 몰고나왔을 때, 그때도 이런 분위기의 도로를 경험했었지. 그때도 지금처럼 텅 빈 도로를 신나게 달 리다가 서서히 몰려드는 안개에 살짝 당황하면서도 왠지 신기한 기분도 들었던건 그렇다 치고..! 뭐니? 이 안개? 그때는 새벽이었고 계절도 달 라. 현재의 계절에 이렇게 짙은 안개가 깔릴 수도 있는 건가? 이거 혹시………………

「안심하세요, 주인님. 여긴 지대가 높고 근처에 물가가 있어서 그래요. 결계 같은 건 아니예요.」

그런・・・ 건가? 전에 들었던 안개생성 원리가 으음. 그런데 이 안개,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인데도 기분은 왠지 그때로 돌아간 듯한… 그러니 까. 이 안개가 마치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과도 같고… 나와 내차가 고요히 강물과 함께 흐르는 듯한………….

「아, 주인님. 원판씨 연락이에요.」

에? 원판 녀석이 이 타임에 웬 전화질?

“아, 유준 형님? 접니다. 바쁜 일정을 진행중이신건 알지만, 너무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뭐야? 이 녀석 목소리가 왜 이렇게 심각해? 프리메이슨 놈들이 뭔가 위험한 짓을 시작했다는 건가?

“그동안 많이 망설였지만… 이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유준 형님. 프리메이슨의 숨겨진 비밀, 그들의 과학력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프리메이슨이 가진 미래과학, 거기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들의 과학력은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뭐야. 그럼 몽몽과 맞상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과학력을 그들 스스로 개발했다고? 아니면 설마 외계에서 날아온 UFO 같은 걸 통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현 시대 지구에도 오버 테크롤로지가 가능한 두뇌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게다가 바로 이곳 한국의 서울에 말입니 다.”

우리나라의 서울…? 프리메이슨이 엄청난 과학력을 확보한 건 상당히 오랜 과거의 일인데 그 당시의 서울에 닥터 제이급 인재들이 집단을 이룰 정 도로 있었다고? 이게 사실이라면야 자랑스러운 일일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좀…………….

“유준 형님. 형님께서도 ‘세운상가’를 아시고 심지어 방문하신 적도 있을 것입니다.”

…세. 운. 상. 가…? 큰 형과 작은 형이 라디오 만들 부품 산다고 뻔질나게 드나들며 야한 노루표 책만 사왔었던 나도 몇 번 가보긴 했는데 그냥 이런저런 구경만 잔뜩하고 왔던 추억의 그 곳?

“과거 프리메이슨의 사도들은 세운상가, 특히 뒷골목에 숨은 인재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많은 인재들을 스카웃했으며 그중 가장 뛰어난 이는 바로 닥터 제이였습니다.”

닥터 제이의 숨겨진 과거가 세운상가 출신이었다는… 그런 얘기?

「주인님. 닥터 제이도 다자간 동시 통화를 요청합니다.」

“여보세요. 유준군? 날세. 지금 하운군과 통화중이지? 나의 과거에 대해서도 들었을 테고 말이지.”

난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저 멍할 뿐이었고, 닥터 제이는 아랑곳없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진실은 바로 그랬었던 거라네. 나도 사실 세운상가 뒷골목의 나의 작은 점포가 지금도 그리워. 그곳 생활은 비록 넉넉지는 못했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였는데 말이지. 그런데 그 노무 이상한 도심개발인지 뭔지를 생각도 없는 자들이 멋대로 진행하면서 나와 친구들은 제대로 보상도 못 받고 쫒겨나서리, 난 그만 빡돌아서 프리메이슨의 스카웃 제의에 오케이 했고…………….”

이 인간들 이거, 지금 콤비로 장난치는 거…? 근데 장난치곤 목소리에 너무 리얼한 감정이 묻어나고 있어. 그렇다고 믿어주기에는 내용이 너무나 어이없고…………….

“… 그러니까 유준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빨리 지하무림을 동원하여 각지에 흩어져 은거중인 세운상가 출신 기술자들을 찾아내게.”

“맞습니다, 유준 형님. 그들을 다시 모을 수만 있다면 몽몽보다도 뛰어난 로봇을 만들 수 있을지도…….”

아와! 이 인간들 진짜.

“저어 유준 오라버니.”

대교? 대교는 또 왜 뭔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말을 걸지?

“중요한 통화중에 죄송하지만.. 제가 그동안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났어요.”

대교는 좌석 사이의 콘솔박스를 열더니 거기서 뭔가를 꺼냈는데, 그건 두 권의 책이었다.

얼핏 봐도 오래된 고서적 아니 아예 노골적으로 천년전 비화곡 성지나 연옥도에서 봤던 무공비급 삘이 나는 책들이네? 근데 앞쪽의 책 제목이… 설…마?

생사금마도결2.

난 다시 어이없어지기 시작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호기심으로 대교가 표지를 넘겨서 보여주는 첫 페이지의 문장 몇 줄을 읽어보았다

-이것은 나 연옥서생이 죽기 전에 남기는 생사금마도결 후속편으로써, 일명 ‘아줌마도결’이라고도 불리기 바란다.

…왠지 한숨이 먼저 나왔지만 일단 다음 줄도 읽었다.

-생사금마도결을 익힌 자가 후속편인 이 아줌마도결까지 익히게 되면, 무림대소사에 다 참견하고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의 소소한 비밀까지 떠 버리고 소문을 내도 누구하나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최강의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경지에 이르른 자는 ‘아줌마 군황’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뭥미…는 옛날 유행어고, 요즘 인터넷에서는 지금의 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하려나?

“많이 놀라셨죠, 오라버니. 저도 어머님을 모시고 갔던 시내의 도깨비 시장에서 이런 비급들을 발견할지는 몰랐어요. 요몽! 이거 닥터 제이께 검증 받아야하니까 그분께 영상 전송해줘.”

“…오오~ 이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연옥서생의 진짜 최후의 유작들? 오오오~ ‘생사금마도결2’도 놀랍지만 ‘천지파멸식’의 후속편은 더 놀랍 군!”

…대체 뭐지, 이 상황은? 내가 지금 설마 나도 모르게 졸면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천지파멸식의 후속편 제목은 ‘천지파면식!’ 적에게 ‘직장에서 파면당하는 충격과 공포, 절망을 느끼게 하는, 그러한 ‘전율의 마공!’… 유준군. 자 넨 이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겠어. 축하하네.”

“저도 축하드립니다, 유준 형님. 빨리 그 무공비급을 완성하여 저를 구해주십시오!”

갈수록 점입가경이로군.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운전하다말고 이렇게 정신없이 졸 리가 없잖아? 그럼 이건, 그 안개…? 요몽은 괜찮다고 했 지만 역시 수상한 안개. 아, 아니다! 안개를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요몽의 말부터 이미 환각내지는 환청이었던 거야! 이, 이런 젠장. 내가 너무 방심했었나?

“후후. 유준 형님 바보~.”

“유준, 메롱, 일세. 하하핫!”

「오홋홋! 주인님 놀리기는 역시 꿀잼!」

“오라버니. 장난쳐서 죄송~.”

환각 속 캐릭터들이 마무리 약 올림 멘트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먼.

모든 것이 수상한 안개가 만들어내는 환각이라는 걸 깨닫기는 했는데… 근데, 그럼 이제 여기서 어떻게 빠져 나와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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