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66화 : 신이 짝사랑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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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66화 : 신이 짝사랑하는 여자.


6. 신이 짝사랑하는 여자.

세계정화재단 최강의 발화능력자, 주혜원.

그런 주혜원의 화염벽은 이제 화염 커튼쯤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그만큼 유인호가 화염의 숲을 헤치며 나아가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나와 정글이의 기운이 보태진 현천기공의 위력은 확실히 절대적!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전부가 아닌 거 같아. 유인호 이 친구, 정신없이 달려올 때의 심상치 않은 표정도 그렇고, 주혜원에게 다가가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이 감정은…, 흐음. 글쎄, 섣불리 뭐라 규정하긴 좀 그렇고, 하 여간 보통 사이는 아닌 거 같군.

… 싫.. 미워.’

응? 이건?

・・・ 싫어. 모두 싫어. 미워. 모두 미워

역시 주혜원의 의식이 전해지는 것 같은데…, 근데 어쩐지 현재보다 많이 어린 음성인거 같기도 한데…………

주혜원은 이제 자신의 무릎을 두 팔로 안고 잔뜩 웅크린 자세로 고개까지 깊이 숙이고 있었다. 나와 유인호는 이미 그녀 바로 앞까지 도착해 있었 지만, 그녀는 그런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인호의 뒤에 선 나로서는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으나, 그가 얼마나 주혜원을 안 쓰럽게 바라보는지는 느낄 수가 있었다.

싫어. 아픈 거 싫어…미워. 아프게 하는 것들 미워.’

어떤 상황, 어떤 누구를 거부하는 마음인지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 싫어. 아파. 싫어. 아픈 거 이제 싫어, 싫어. 미워. 전부 싫어. 전부… 미워.’

젠장! 주혜원의 마음이 만들어낸 화염속이어서일까…? 이 막장 아가씨의 슬픔과 고통이 이렇게 절절하게 느껴진다. 으~ 제기랄! 나야말로 싫어, 이런 감정!

“싫어…! 전부… 사라져. 전부, 전부 사라져버리게 전부 태워버려야…………….’

웃-! 차츰 빠르게 열기가 치솟는… 우쒸! 내 이럴 줄 알았다. 어린 시절의 (아마도) 슬픔과 고통을 빡돔으로 표출하는 전형적인 전개…! 이봐, 유인 호! 이 친구야! 내가 보기엔, 현재 상황에서의 남자 주인공은 자네야, 자네! 그러니까 주인공답게 빨리 어떻게 좀 해 보라구!

“주혜!”

오~ 남자 주인공(?) 유인호가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예상 및 기대대로 주혜원의 화염이 주춤하는 기색이 역력해지…는 거 같기는 해도 아 직장난 아닌데, 이 친구 어쩌려고………….

나는 유인호에게 보내던 현천기공의 기운을 거두며 등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유인호가 그걸 원한다는 전음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주혜! 나야, 인호.”

유인호는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로 몸을 낮추더니 조심스럽게 주혜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흠칫, 그녀의 어깨며 전신의 떨림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그녀로부터 번져 나오던 모든 것들까지 한순간에 움직임을 멈추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정도가 아니라, 진짜………….

“인호씨?”

문득 고개를 든 주혜원이 커다랗게 뜬 눈으로 유인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깜박 졸다 제풀에 깨어난 사람처럼 멍하니 유인호를 보다가 간신히 입 을 떼기 시작했다.

“이, 인호씨가 여기 왜? 여, 여긴, 나, 난… 어… 아? 아!”

주혜원이 버벅대는 사이에 그녀의 엄청난 화염 공간이 일시에 힘을 잃고 허둥지둥(?) 사라지고 있었다. 상당히 긴장하여 여러 가지 상황을 대비하 던 나로서는 어이없고 허탈할 정도였다.

뭐니? 유인호가 뭔가 잘 해결해 줄 거라고 기대를 하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장 아가씨의 폭주가 진정될 줄은… 거~ 참. 주혜원은 유인호의 부축을 받으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다가 문득 뭔가를 깨닫는 거 같더니, 유인호의 얼굴이며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만져보며 울상이 되었다.

“인호씨! 괜찮아? 다쳤어? 다친 거야? 많이 아파? 나 때문에 또… 어떻게! 어떻게!”

유인호는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을 펑펑 쏟고 ‘어떻게!’ 만 반복하는 그녀를 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난 괜찮아. 아프지 않아”

“거짓말! 아프면서! 이렇게 다쳤는데! 또 나 때문에!”

여주인공(?) 주혜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목 놓아 (?) 울기 시작했고, 우리의 불심 청년 주인공께서는 결국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끌 어당겨 품에 안았다. 나는 공연히 벌쭘한 입장이 되어서 쓴웃음과 함께 등을 돌려주었다.

막장 아가씨의 셀프 멜로 막장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살짝 들기는 하는데… 그래도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쯤에서 더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된 거면 다행. 이라고 하기는 아직 이르려나?

-요몽! 우리 차 어떠냐? 무사하냐?

「어~ 그게, 여긴 거리가 좀 멀어서 정밀 스캔을 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외장의 손상은 장담하기 어렵지만, 내부 시스템의 자가 점검 결과는 오케 이! 였어요.」

-흐음. 그래. 우리 차는 보기와 달리 내부 전자 시스템은 최첨단이지. 아, 그럼 혹시 차를 네가 먼 곳으로 이동시키기도 했었던 거냐?

「당근입죠! 저 이상한 발화능력자 주혜원이 방화불쇼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미 잽싸게 여기서 젤루 먼 위치에 최대한 짱박았었지요.」

-오호~ 따로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너 스스로 그렇게 기특한 행동을?

「그럼요. 차에 들어간 ‘돈’이 얼만데!」

훗. 요몽 녀석, 다른 건 몰라도 ‘나름 살림꾼’이 되어가는 건 인정해줘야겠군. 자아~ 그럼… 난 내가 수습에 나섰던 목적이 충족된 셈이니까, 이대 로 그냥 가면 되려나?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유인호는 말없이 주혜원을 안고 달래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이번 막장 화염쇼(?)가 시작된 근본 원인이 궁금 했지만, 이 시점에서 저 막장 주혜원에게 말을 걸어봤자 좋은 일은 없지 싶었다.

대교는… 음. 알아서 이쪽으로 오고 있군. 그럼 같이 우리 차 상태나 좀 더 확실히 체크한 다음에 어디 그을린 데라도 있으면 재단에 손해배상 청구 를…….

「주인님. 자룡대주로 부터 다시 연락이 오네요. 제가 보기엔 아까처럼 특별히 중요한 용건은 아닌 거 같아요. 제가 대신 적당히 처리할까요?」 -그래라.

파티 시작종을 울렸던 내가 이렇게 밖으로 튀어서 딴 짓하고 다니는 건 확실히 미안하긴 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자룡대주의 술꼬장 섞 인 투정을 들어줄 기분이 아니야. 자룡대주 그 아가씨, 아까는 대충 이해해주고 넘어갔지만, 어디 감히 이 천주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난리였 던・・・ 응? 가, 가만? 이거 혹시………….

나는 나도 모르게 대교를 향해 마주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전에 들었었지만 간과하고 있던 마신일의 얘기가 새삼 떠오르며 주혜원의 행동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게, 그러니까. 주혜원, 저 막장 다혈질 아가씨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존재는, 잘못된 신앙심을 가진… 소위 ‘광신도들이라고 했어. 그래서 이곳 을 찾았던 ‘블랙 제수이트(검은 예수회)’ 패거리들과 시비가 붙었고, 결국 그들을 모두 단신으로 메롱 시켜버렸다고 했었지.

그래서 내가 계속 내심 저 막장 아가씨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했었고 말이지.

그 점을 생각하면 오늘의 상황이 더욱 뜻밖의 전개였던 셈이었다. 나에게 집적댈 예정이었으며 상당한 강적인 블랙 제수이트 패거리를 대신 처리 해준 그녀와 쐬주 한잔 나누는 건 고사하고, 도리어 죽네 사네 대판 싸울 뻔 했었으니 말이다.

그 황당한 시비와 싸움 전개 상황이 모두 자룡대주・・・ 그녀 때문이었어! 그녀가 전화기에 대고 목청껏 ‘천주’라고 외쳐대는 바람에 주혜원이 그걸 듣고 나를 ‘사이비 종교의 교주’쯤으로 오해를 했던… 우이쒸! 뭐 이딴 상황이 다 있어? 타임씨, 당신!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이렇게 치사스럽게 상황 연출을 해도 되는 거냐구~!

내가 사건의 전모를 깨닫고, 대략 사 십여 분이 더 흐른 후.

우리 일행은 재단 건물 휴게실에 모여 앉게 되었다. 나와 대교, 유인호와 소희 남매까지는 아까의 실외 티타임 멤버들이었으나, 이번에는 막장 화 염 아가씨 주혜원도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후훗~ 얘기 들어 보니까, 정말 황당하게 오해가 발생했었네요.”

이곳에서 대화하자는 제안을 했던 유소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주혜 언니가 솔직히 조금, 다혈질이긴 해요. 하지만 오늘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약간 더…..”

유소희가 조심스럽게 주혜원을 변명해주려고 말을 늘어놓고 있자, 주혜원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 여자 때문이야. 신수의 여자 윤태영! … 어찌나 까탈스럽게 잔소리가 많은지, 하여간 같이 있으려니까 아주 미치는 줄 알았어!”

신경질적으로 책임전가를 하던 주혜원이 문득 옆을 살피자, 유인호가 차분하게 말했다.

“주혜! 윤대리님은 본분을 다하신 것뿐이야. 그리고 오늘 일은 누구보다 먼저 이분들, 유준 형님과 대교님께 사과드려야 한다고 생각해.”

주혜원은 유인호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불만인 듯 입술을 삐죽이며 뾰로통한 표정이 되는 것 같았지만, 곧 하는 수 없다 는 듯 우리 쪽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내가 좀, 아니, 많이 못돼먹어서 상황 파악도 제대로 안하고 막 화를 냈어요. 그러니까 당신차든 뭐든 보상을………….”

“주혜!”

유인호가 조금 엄한 목소리를 냈고, 유소희는 주혜원의 옆구리를 찌르며 작게 ‘언니 통장 지금 다 동결 상태야’라고 알려주는 거 같았다.

“아, 음… 하여간 미안, 해요.”

어거지로 하기 싫은 사과를 하는 것이 너무나 역력했지만 왠지 기분 나쁘다기보다 웃음이 먼저 나왔다.

“훗. 알겠어. 그 성의 없는 사과, 받아들이지. 그리고 피해보상은 내가 쏴야했던 쏘주값으로 퉁치기로 하고 말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해하는 세 사람을 위해서, 나는 우리와 블랙 제수이트 놈들과의 악연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 그러니까, 얼마 전에 주혜원이 그놈들을 해치워준 건, 내 입장에서는 매우 고맙고 쐬주 한잔 쏴야할 상황이었던 거지.”

내 상황설명을 이해한 주혜원은 잠시 입을 벌리고 어쩔 줄 몰라 할 정도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인호씨! 들었지? 소희야, 너도 들었지?”

“으, 으응, 언니가 이분들 수고를 덜어드리긴 했나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반응뿐인 유인호와 달리 유소희는 어색하게라도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유준 대형.

-응? 지금 뭐라고 했지, 인호아우?

-대형께선 그런 일을 당하시고도 주혜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아니, 그 얘기 말고, 날 뭐라고 불렀냐고. 대형? 아까는 형. 님. 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아, 그건・・・・・・

주혜원을 빨리 납득시키기 위해서 알기 쉬운 호칭을 사용했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래는 이 친구가 아무하고나 쉽게 호형호제를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감 잡고 있었다.

-후후~ 아무려면 어때. 기왕 그렇게 부른 거 그냥 그렇게 가자구. 난 오늘 이렇게 속 깊은 아우님을 얻게 되어서 기분이 좋구먼. 아우님은 이런 형 님은 별로인건가?

-아, 아닙니다. 음… 알겠습니다.

전음 끝에 굳이 고개를 숙여 보이는 폼이 ‘그럼 앞으로는 정식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뜻을 덧붙이는 것 같았다.

으음. 유인호의 행동을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너무 오버일지도 모르지만………….

「주인님! 유소희님으로 부터의 메시지 송출입니다.」

음?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으면서 뭔 전화메시지를………….

「평소처럼 그냥 알려드릴까요? 아니면 유소희님 모드에 맞춰서 확인하실래요?」

테이블 너머에서 배시시 쪼개고 있는 유소희의 한 손이 자연스럽게 테이블 아래로 내려트려져 있었다.

-일단 몽드폰 화면으로 띄워봐.

…흠. 메시지 내용은 지 오빠처럼 주혜원을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거로군. 하여간 어지간히 예의바른 남매… 인건 인건데…

-소희양. 소희양은 전음을 쓰지 못하는 건가?

유소희는 내 전음에 조금 놀라는 것 같았지만 곧 다시 미소 지으며 테이블 밑의 전화기에 집중하는 기색을 보였다.

「오랜만에 심언(心言)을 들어서 조금 놀랐네요. 할아버지께서는 이걸 심언이라고 부르셨어요. 저는 배우지 못했고 오빠도 저에게 잘 안 써서 잊고 있었는데 재밌네요.」

맙소사…! 이런 장문을 거의 말로 하듯 빠르게, 그것도 한손으로 찍어대…? 이, 이것이 소위 요즘 아이들의 ‘엄지 신공’인 것인가?

-허어~ 놀랍군. 내 전음보다 소희양의 문자 신공이 더 대단한 거 같아.

「ᄏᄏ. 저보다 빠른 아이들도 많아요. ᄏᄏᄏ」

– 이거야 원. 요즘 아이들은 그야말로 ‘손가락 전음’을 쓰는 셈이로군.

「ᄏᄏ 그런 셈이네요. 아 죄송해요. ᄏᄏ이런 거 싫어하시죠?」

-아니, 그런 건 상관없어. 난 내 자신은 채팅 같은걸 하면서도 정문을 선호하는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초성체든 뭐든 쓰는 걸 탓하는 성격도 아니거든. 근데 그보다……….

-요몽. 이제부터 유소희의 메시지는 유소희 목소리로 실시간 재생해줘.

난 그런 명령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이건 기밀사항이라 마신일도 알려주지 않았을 텐데… 실은 말이야.

난 몽드폰을 슬쩍 들어 보이며 전음을 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영능력자도 탐지할 수 없는 형태로・・・ ‘요정’이 봉인되어 있어. 그래서 메시지 정도는 직접 보지 않아도 바로 내용을 알려주지. 그 리고 이제부터 소희양 메시지는 아예 소희양 목소리로 전달해 주기로 했어.

유소희의 얼굴에 흥미진진해하는 표정이 번져가고 있었다.

「“정말요? 진짜 이게 제 목소리로 전달된다고요?”」

-어, 그래. 지금 그렇게 되고 있어.

「“와아~ 대단해요! 이렇게 쓰면 혹시………?”」

-후후. 그래. 진짜 소희양이 말하는 것처럼 감정까지 느껴지는군.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쫌 신기하네?

사실 별거 아닌, 장난수준의 요령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유소희와 나는 초장거리 전음망이 생긴 셈이었다.

-좋아. 그럼 우리 이제 주혜원양을 은따 시키고 우리끼리 찐한 대화 좀 나눠 볼거나?

유소희는 소리죽여 쿡 웃었고, 바로 옆의 주혜원은 우리 쪽 분위기를 전혀 모른 채 자기 전화기의 사진들을 유인호에게 보여주기에 바쁜 거 같았 다.

다시 이십여 분이 더 흐른 후,

나와 엄지공주 유소희는 전자전음(?)으로 많은 비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의 꿀잼 전음 채팅이 끝난 건 주혜원이 뭔가 눈치 까는 기미가 보 였기 때문이었다.

“아, 실은 우리끼리 이걸로 깨통 대화 좀 하고 있었어. 같이할까?”

주혜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새삼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유인호에 대한 각별한 감정 때문에 덮어져 있다고는 해도 쉽게 숨겨질 수 없는 주혜원의 만만찮은 본성이 느껴지고 있었다.

“당신, 아니… 이제 뭐라고 부를까? 아니, 부를까…요?”

“뭐, 그쪽 편한대로 해…요. 주혜…양!”

유소희를 통해서 알게 된 이 아가씨의 본명은 ‘주혜이고, 그건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허용된다고 했지. 과연 지금의 나에게는….

“… 좋아. 앞으로 나는 진유준씨, 라고 부를게요.”

흐음~ 일단 1차이며 큰 관문하나는 통과한 셈이로군. 아직 ‘아군 리스트’에 올리기에는 이르겠지만 적어도 잠재적인 적은 아니게 된 거 같으니 오 늘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할 거나?

“나도 오케이. 그리고 내가 아까 주혜양에게 쐬주 한잔 쏘고 싶다고 한건 진심이었지만, 오늘은 때가 좋지 않은 거 같네. 그러니까….”

난 주혜원, 아니 주혜 양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유인호, 소희 남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이제 이 스트레스 만땅 아가씨를 위로해줄 파티 타임 가지러 가는 게 어때? 두 사람이 오늘 여기에 온 건 그 때문 이었다며!”

내가 살짝 거짓부렁을 섞어서 말했다. 조금 전 유소희와의 전자전음을 통해 알게 된 거지만 이들 남매의 오늘 진짜 약속대상은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소희는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요. 그래서… 음. 주혜 언니 좋아하는 거 잔뜩 사왔는데 에고, 피자는 다 식어서 굳었겠다.”

소희의 너스레에도 유인호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곧 최 과장님이 오실 겁니다. 그때까지는 함께 있겠습니다.”

역시 불심 모범 청년다운 태도로군.

“인호 아우. 우린 괜찮아. 원래 우린 자네들 손님이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이제 어디든 이 주혜양, 자네 애인을 모시고 가서 좋은 시간 보내라군!” 

“예? 저,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

“어허~ 뭔 그런 내숭을! 어여 가! 언능! 우리가 더 불편해!”

유인호는 불심이고 무심이고 다 놓쳐버린 듯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고, 어느 사이 먼저 일어난 유소희가 짓궂은 웃음과 함께 오빠의 팔을 잡아 일으 키기 시작했다. 문제의 축인 주혜양은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감추려 애를 쓰지만 흔한말로 ‘좋아 죽겠는 기색이 확연했다………….

“유준 형님! 오해는 말아 주시…………”

“유소희! 언능 오빠 체포해서 압송하도록!”

“옛 썰!”

갑자기 진행된 유인호 체포 압송 작전을 지켜보며 나는 빠이빠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요몽. 오늘 우리를 여기 대빵에게 안내해 주기로 한 사람, 현재 위치는?

「아직 주차장에 있어요. 아까 코드명 ‘주혜’와 싸웠던 코드명 ‘신수의 여자’, 그리고 그녀의 상관으로 판단되는 남자 한명… 그 둘과 뭔가 계속 상 의를… 아, 지금 끝내고 인사하는 분위기예요.」

그럼 곧 이쪽으로 오겠군. ‘회원 관리과’라는 곳의 과장이라는 ‘최윤희’… 이번에는 또 어느 정도의 초능력자려나?

아까 주차장에서 나와 유인호에 의해서 소위 ‘주혜원 사태’가 종결되자, 그제야 재단의 다른 사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처음엔 위험 상황 감지 및 대처 패턴이 뭐 이리 느린가 싶었는데, 전체적인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어딘가로 보고하는 남자의 통화를 일부 엿들어보니까, 보고를 받은 대상이 마신일, 그 인간인 거 같았다. 아무래도 그 인간이 미리 다른 사원들에게 연락해서 ‘뭔 일이 있어도 참견하지 말고 구경만 해도 무방.’ 정도의 지시를 내려놓았지 싶었다.

마신일이 원판이나 닥터 제이 식으로 암중에서 여러 가지 내가 곤란해 질 상황을 유도했다는 건 뻔한 일이지만, 여기서는 참아주기로 하자. 여긴 그 인간 앞마당이니까 말이지. 그보다 내가 당장 궁금했던 건 이제 곧 만나게 될 최윤희 과장이라는 여자의 부서가 ‘회원관리과’라는 점이었다. 그 래서 그 점을 유소희에게 물었더니……………

「“아, 윤희 언니요? 그 언니의 별명 중에서 하나는 ‘자원봉사자’예요. 후후. 무슨 얘긴지 아시겠죠? 워낙 다정한 성격이라 평소에도 부서 가리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다 도와주곤 하는데, 오늘처럼 사원들이 다 노는 날에는 말할 것도 없죠. 오늘은 당직도 아니라서 우리와 만날 약속을 해놓고도 또 저렇게 상황 수습하는데 열을 올리고… 아, 그리고 지부장님 비서 역할도 종종 수행하니까, 아마 오늘 두 분을 안내해드리는 것도 그 언니가 맡을 지도 모르겠네요.”」

유소희의 이런 설명에 이어서 마신일의 메시지도 도착했었다.

「재단 내에서의 안내 및 전반적인 민원처리는 최윤희라는 미녀가 수고해 줄 겁니다. 즐거운 시간되시길.」

두 정보통의 말을 종합해보면, 공연히 여기저기 참견하고 다니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거의 모든 부서 업무에 영향력을 가진 멀티 실무 능력자라 는 건데… 흠. 오는군.

아까 바깥에서 얼핏 보았던, 나와 비슷하거나 약간 위의 나이일 듯한 여자가 막 휴게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자를 보면서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의외로 평범하네?’였다.

아니, 내가 이렇게 경계심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능력을 숨기고 있는 거라면, 그 자체가 대단한 거로군. 그렇다면………

“안녕하세요. 최윤희라고 합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되어 죄송………….”

“아뇨. 그쪽이 죄송하실 거 없구요. 음~ 소위 ‘선수들끼리 서로 재봐야 피곤하니까, 가급적 심플하게 진행합시다, 우리.”

많이 무례하고 성급한 패턴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최윤희는 푸웃-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이더니 곧 자세를 바로하며 환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진유준님. 먼저 말씀드리자면, 제 별명은 ‘구슬마녀’ 입니다.”

구슬 마녀…? 에레보스의 ‘환영의 천사처럼 마음을 읽는 텔레파시스트라는 건가?

“예. 맞습니다.”

에? 역시?!

“아, 지금은 진유준님의 마음을 읽은 것이 아닙니다. 저의 짐작일 뿐이었으니, ‘맞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라고 해야겠군요.” 오호. 이 아가씨 봐라?

최윤희는 먼저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바로 가시죠. 지부장님께 안내하겠습니다.”

잠시 후.

나와 대교는 최윤희를 따라 건물 안쪽 후미진(?) 위치의 엘리베이터에 오르게 되었다.

“실은, 지금 바로 지부장님을 만나시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지부장님이 쉬시는 시간은 저도 가늠하기 어렵거든요.”

“호오. 다른 중요하고 급한 일 때문이 아니라, 단지 쉬느라 손님을 기다리게 하시겠다?”

“… 정말로 불쾌해 하시는 건 아니네요. 후훗. 실은 지부장님께 ‘휴식 혹은 취침’이 필수라는 사실도 기밀에 속하는 건데… 그 정도는 알고 계시는 군요.”

아니, 몰랐어요. 댁네 지부장님의 특수 능력은 상당한 체력소모라는 부작용이 있는 모양이군요.”

“아, 그건.. 음. 마비서님께선 내가 아는 정도는 다 말해도 상관없다고 하셨으니….”

최윤희의 말이 멈춘 것은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인 8층에 도착했기 때문이었고, 모두 내리자 다시 어딘가로 향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도 지부장님에 대해서 마 비서님만큼 알지는 못합니다. 제가 가진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더 깊고 멀리 보시는 분이라는 건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죄송합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렵네요.”

“흐음. 당신 능력으로도 대빵의 비밀은 읽어낼 수 없었다는 얘기군요.”

최윤희는 나의 ‘대빵’이라는 표현 때문인지 작게 웃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 8층의 복도에는 지금 우리가 도착한 문 하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구중천에 있는 우리 처소의 현관보다 조촐한… 결국 그냥 평범한 목재 문이로군. 응? 우째 이렇게 긴장감 없이 막 들어가는… 아, 그렇군. 여긴 대기실..겸, 마신일의 사무실인 모양이군. 다시 말해 ‘비서실’인 거로군.

대략 이 십여 평 정도의 일반적인 개인 사무실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창가에 위치한 책상 위에는 ‘마신일’이라는 명패가 있었지만 당연히 본인은 없고 덮개가 열려진 노트북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책상으로부터 약간 더 안쪽의 문을 최윤희가 힐끔 확인하는 거 보니까, 저 문이 지부장실로 연결되는 거 같고………….

-요몽. 마신일은 아직도 바쁘다냐?

「예. 방금 여기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아, 답신이 오긴 왔는데……………

「내 책상에 키핑해둔 초코바를 지켜주셈.」

“저기, 그거 버리지 말라는데요?”

내가 몽드폰 화면을 들어 보이며 말하자, 마침 책상 위에서 마신일이 말한 초코바를 집어 들고 책상 옆의 휴지통을 보던 최윤희가 동작을 멈추었 다. 그녀는 낮게 한숨 지며 고개를 저었지만 결국 다시 본래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한입 베어 물어 대략 3분의 2가 남은 초코바 사수 성공. 메시지 송신완료. 답신은 도착하는 대로…………….」

-됐거든.

“저기, 최윤희 과장님. 얼마나 기다려야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몇 가지 상의를 좀 드려도 될까요? 마신일씨는 웬만한 민원(?) 그쪽에 애기하면 된다고 하던데요.”

“아, 예.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어머?”

마신일의 책상위에 세팅되어 있는 기계장치에서 낮은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최윤희는 꽤 긴장하는 기색으로 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다. “지부장님?”

“… 최과장이 수고해 주었군요. 손님들을 안으로… 부탁해요.”

“예,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처음으로 듣게 된 지부장의 음성은, 분명 작지 않은 크기였는데도 왠지 낮게 가만가만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음색이었다. 분류하자면 듣기 좋 은 미성에 속할 거 같은데도 최윤희는 상당히 긴장하는 거 같았고, 나 역시 왠지 몸과 마음이 전에 없이 굳어지고 있었다.

저 여자는 자기 대빵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내가 이러는 건 좀 많이 웃기는 건데… 제기. 내가 추측하고 있는 지부장의 능력은 확실히 만나기 껄끄 러운, 그런 거긴 한데 까짓 거, 그럼 일단 내식대로 한 가지 테스트를 해볼까?

-대교. 미안하지만, 넌 잠시 대기해줘.

대교는 의아해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었고, 난 혼자서 최윤희를 따라서 지부장실로 통하는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어~ 안녕하쇼~ 처음 뵙겠다!”

짐짓 목청 높여 외치다시피 인사하며 한손도 크게 흔들어보였다. 안에서 우릴 기다리며 서있던 귀부인틱한 지부장께서는 일견 별다른 반응을 보이 지 않는 것 같았다.

“어~ 봤으니까, 전 이만 갈랍니다아! 잘 지내쇼~!”

다시 크게 작별인사를(?)하고 휘릭- 몸을 돌려 나와 버렸다.

-요몽. 방금 장면 지부장 위주로 리플레이!

난 내가 들어가면서 본 지부장의 모습과 돌아선 이후의 모습까지 요몽의 녹화 화면으로 확인해 본 다음, 대교를 돌아보았다.

-대교. 놀랬으면 미안. 미리 말해주지 못한 건 나도 방금 즉흥적으로 떠오른 거라…………..

난 내 행동의 의미를 간략하게 설명했고, 대교는 빠르게 이해하고 작게 탄성을 울렸다.

-아~그랬었군요. 이곳의 주인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줄은…………….

-아직도 완전히 확인된 건 아니야. 이제 들어가서 좀 더 알아보자구.

다시 지부장실로 몸을 돌려보니, 나를 안내해 들어갔던 최윤희 과장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문가에서 멍하니 굳어져 있었다. 겸사해서 이 과장 아가씨도 테스트해 본 셈이 됐군. 내 행동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건 내 마음을 읽히지 않았다는 거니까 말이야. 나는 대교와 함께 다시 지부장실로 들어가서 이번에는 정중하게 권하며 고개까지 숙였다.

“지하무림의 진유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부장님.”

바로 조금 전의 일은 아예 없었다는 듯 쌩까기 모드로 나가며 고개를 들어보니, 지부장도 고개 숙여 답례하고 잔잔하게 웃는 얼굴을 들고 있었다. 잠시 후.

임무를 무사히(?) 마친 최윤희 과장은 밖으로 퇴장했고, 나와 대교는 한쪽 응접 케이블에 앉아, 지부장이 직접 따라주는 차 대접을 받게 되었다. 요몽 녀석이 ‘엄청 예쁘다는 소문이 많다’고 하더니만, 진짜 장난이 아니긴 하군. 뭐랄까… 뱀파이어 귀부인 ‘카라’에게서 끈적한 색기를 빼고 동양적 색채를 더하면 비슷한 이미지가 되려나..? 그래서 내가 아까 얼핏 봤을 때부터 무심결에 ‘귀부인’이라는 표현을 떠올렸던 거 같지만… 이 지 부장께서는 솔로라고 했으니까 귀부인이 아니라 귀처녀, 혹은 귀아가씨… 으음. 나 또 왜 이러니?

난 또 뜬금없이 딴 길로 새려는 정신을 추스르며 해야 할 말이 뭔지를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쉽게 골라지지가 않았다.

뱀파이어 귀부인 카라와는 용모 분위기만 닮았지, 성격은 반대로 가벼운 대화 자체를 별로 즐기지 않는 스타일 같은 느낌이랄까…? 으으음. 어차 피 잡담으로 분위기 띄우기 어려운 상대라면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나가는 게 나으려나?

“저기, 그쪽의 능력・・・ ‘예지력’ 맞죠?”

“… 맞습니다.”

이런. 너무 쉽게 대답이 나오니까 오히려 살짝 김이 새네.

“처음 들어올 때 장난을 치셨던 건 저의 예지력을 테스트해본 거겠죠? 제 반응을 보고 아셨겠지만, 저도 항상 모든 일을 앞서 보는 것은 아니랍니 다.”

“훗. 그래요. 그냥 이렇게 물어봐도 될 걸 괜히 그런 짓을 했다싶긴 하지만… 뭐, 내 성격이 원래 좀 그래서………”

이 여자, 아까는 알아보기 힘들만큼 표정 변화가 미미하더니만, 이제 와서 한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군. 다시 생각해보니까 웃겼다는 건가?

“아, 미안해요. 오늘 진유준님의 행동이 우습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문득 예전일이… 오래전에 저의 능력을 알게 된 어떤 사람도 오늘 진 유준님이 보인 행동과 비슷한⋯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서 제 능력을 테스트했던 일이 생각났거든요.”

예전에 나와 비슷한 행동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이거 왠지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네, 그려.

“그 사람, 혹시 내가 아는 사람입니까?”

이것 봐라? 조금 굳어지는 거 보니까, 내가 아는 사람 맞나보네?

“제가 실언을 한 거 같군요. 특별히 숨겨달라는 부탁을 받은 일은 없지만, 그래도 그 사람 얘기는 좀………….”

“잠깐. 그 사람 혹시…, 닥터 제이 아닙니까?”

지부장은 잠시 난처해하는 것 같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하여간 그 양반 안 끼는 데가 없다니까.”

난 혼자 툴툴대다가 다시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당신의 그 예지력으로 알고 있는 미래 정보를 닥터제이에게 제공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는 거겠죠?”

“물론이에요. 저는 소위 ‘천기를 누설’해서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고, 그 사람도 ‘정해진 미래’를 싫어해서 듣고 싶어 하지 않았죠.”

그건…, 그럴 줄 알았다. 그 양반, 그리고 원판…, 그 인간들은 ‘자신이 계산해서 만들어 낼 미래’만을 좋아하는 스타일들이니까 말이지. 으음. 근데 이제 뭘 물어본다…? 이 여자의 능력이 예지력이라는 건 추측일 뿐이어서 미리 질문거리를 많이 생각해두지 못한데다, 예지력이라는 게 본래 엄청 난해한 구석이 있어서리……………

예지력이란 게 말입니다.”

그래. 예지력 자체에 대한 얘기가 우선이겠어.

“보통 어떻게 발휘되는 겁니까? 예지몽 같은 꿈 얘기는 많이들은 편이었는데 말이죠.”

“… 재단에 등록된 예지 능력자들의 대부분은, 말씀하신 예지몽으로 능력이 발현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다양한 형태로 미래를 보고, 읽거나, 느끼기도 합니다. 조금 많이 피곤하죠.”

“어째 통제가 잘 안 된다는 말씀 같네요.”

“예. 훈련에 따라 가까운 미래를 원하는 타이밍으로 볼 수 있게 된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도 자기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일에만 가능 한…, 그런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본인은 훈련을 안 하셨단 말씀인가요?”

“전… 훈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할까요? 제 능력을 자각했을 무렵에는 이미 제 곁에 항상 강력한 가디언이 있었으니까요.”

마신일… 역시 그인가? 그가 이 여자를 지키기 시작한건 상당히 오래전부터인 모양이군.

“하긴, 어떤 나라에서는 소위 ‘용하다’라고 소문난 점쟁이인지 역술가인지에게 쿠데타 성공 여부를 물었던 경우도 있다고 하니… 지부장님처럼 진 짜 예지능력자는 노리는 자들이 장난 아니게 많겠네요.”

“예. 그래서 마비서가 항상 수고가 많아요.”

“…프리메이슨 같은 경우는 어떤가요? 그들도 지부장님의 예지… 미래 정보를 원할 거 같은데?”

“그들은 저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필요로 하지는 않아요. 그들 역시 자신들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건 또…, 그럴만한 거 같군. 몽몽처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데이터 집합체는 탐내고 있지만, 예지력은 상대적으로 좀 너무 막연한 능력이니까 말이야……………

음.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 여자, 이제 보니 나못지않게 험난한 인생을 나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해왔겠네. 프리메이슨은 그렇다 쳐도, 예지력을 탐내는 자들은 세계에 셀 수도 없이 많을 테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왠지 더 뭔가 캐묻기가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뭘 물어봐도 담담하고 솔직하게 다 말해주는 분위기라서 오히려 뭔가 캐내는 보람도 없고…, 이렇게 신사적, 아니 숙녀적인가? 하여간 이렇게 나오는 여자를 상대로 의심하고 취조하듯 하고 있는 내가 왠지 한심한 남자라는 자괴감까지…………

난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해져서 지부장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슬며시 옆을 돌아보았다. 출입문 반대편의 커다란 창문으로 구름 몇 점이 한가로이 떠도는 정경이 보이고 있었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거… 그래도 꽤 편리하고 좋은 점도 많겠죠?”

“딱히…….”

없겠군. 예지 능력의 가장 큰 장점은 위기 대처에 용이하다는 점일 텐데, 이 여자의 경우에는 그 예지능력을 노리고 찾아오는 위기가 더 많은 판국 인 모양이니 말이야.

“그, 그래도 가족이나 가까운 누군가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거나 하면, 미리 알고 구출하기가 수월·

“안 되더군요.”

“예?”

“전 지금 이 순간에도 ‘불확실한 미래’를 믿고 있어요. 하지만…, 나쁜 미래를 바꾸는 시도, 지겹도록 해봤지만 아직까지 성공한 일은 거의 없었어 요. 전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저의 언니를 지키지 못했어요. 그리고 또…, 음. 그만할게요.”

이런 제기럴! 저런 사연조차 비교적 담담하게 얘기해서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지만, 이건 진짜 가장 치명적인 예지능력의 부작용일세!

“어…, 그게. 갑자기 문득, 예전에 본 미국 오컬트 드라마가 생각나네요. 두 명의 백인 형제가 퇴마사 활동을 하는 스토리였는데………….”

“‘슈퍼 내츄럴’, 저도 봤어요.”

“아~ 지부장님도 보셨구나. 거기 보면 어떤 에피소드에선가 ‘대 예언가’ 캐릭터가 나오잖아요. 그대 예언가’는 주인공 형제를 위기에서 구해주기 위해서 자신도 대책 없이 강력한 악마 앞에 나서는데…, 그때 ‘대 예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천사들의 대장, ‘천사장까지 출동하려든다는, 그래서 악마가 제풀에 겁먹고 달아나는, 그런 장면이 있었죠.”

에고.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꺼낸 거냐? 으~ 어쨌든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해야……………

“천사장이 직접 지상에 내려와서 지켜야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 신의 사랑을 받는 귀중한 존재이며 언젠가 인류를 구원한다거나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누가 나 좀 말려줬으면 좋겠네.

“아니, 그런 얘기까진 좀 그렇고! 암튼, 자신이 ‘대예언가’로서 신의 사랑을 받는 귀중한 존재라는 그런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는 건 어떠실 x…….”

지부장의 얼굴에 처음으로 뚜렷한 감정이 실린 시니컬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저는 그 신과 사랑…, 차버리고 싶네요.”

‘차버리고 싶다’고 표현했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차버렸고, 만약 신이 눈앞에 현신하기라도 하면 진짜 발로 차버릴 것 같은 분위기…? ・・・ 쯧. 신인지 타임씨인지, 짝사랑이었군.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져서 손 털고(?) 일어서고 싶었지만, 대뜸 그러기는 어려워서 어색하고 뻘쭘하게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난 조금 전에 왜 미드 얘기까지 꺼내고 오버질 했던 거지? 나 혹시 그동안 타임씨에게 미운정이라도 생겨서 대신 변명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건가? 아니면 혹시 타임씨가 살짝 나에게 강림하여 심하게 토라진 애인을(?) 달래려 들었다던가, 우이쒸. 별 생각 다 나네.

“음~ 저도 지부장님께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대교? 그래, 대교. 분위기 메롱 되었는데 너라도 어떻게 좀 해다오.

“지부장님의 그 눈, 방금 분명히………

응? 이건 또 무슨 얘기지?

「오~ 과연 우리 대교님! 상대의 순간적인 변화를 놓치지 않으셨네. 역시 짱이야!」

대교의 말과 요몽의 호들갑 때문에 나도 재빨리 지부장을 살폈지만, 그녀는 이미 살짝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아… 이런, 보셨군요.”

이거 왠지, 저러다가 고개를 들면 엄청 무서운 귀신얼굴이라는 괴담 분위기가..”,

“음.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왠지 조금 민망해서……….”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든 지부장의 얼굴은 내 기대(?)와 달리 조금 전과 똑같이 심하게 귀티나게 아름다울 뿐이었다. 다만 대교가 지적한 눈이 약간 뭔가, 그러니까 검은 빛이 아니고 약간의 색채가 생긴듯한, 이거, 설마?

지부장은 시선을 조금 더 올려서 나와 대교 사이의 위쪽을 응시하며 정신을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왼쪽 눈이 신비로운 에메랄드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흑주님! 흑주님의 눈동자와 똑같아요! 심지어 에너지 파장 일치도가 90프로 이상!」

맙소사. 요몽의 보고가 아니어도 알 수 있을 만큼 정말 흑주의 오드아이와 같은 뭔가가 느껴져. 뭐… 냐. 이 여자, 흑주와는 무슨 관계인거지? 아, 아니 그보다, 설마 흑주도 위험한 예지력 소유자?

“… 지금 혹시 당신의 소중한 소녀, 에메랄드 킬러를 생각하고 계신다면, 일단 안심하세요. 그녀에게는 저와 같은 예지력이 없으니까요.”

이, 이거 진짜 ‘친절한 영애씨’로군.

“바로 그 얘기부터 해줘서 고맙기는 한데…, 근데 대체 어떻게 된 거죠? 흑주와 당신은 대체…….”

“잠시만요.”

친절한 영애씨는 두 눈을 감고 자세를 바로 하여 잠깐 진정하는 기색이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본래의 깊고 검은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이 눈은 우리 업계에서는 ‘에메랄드 문(Moon)’으로 불려요. 이 눈을 가진 사람의 능력은 이미 아시는 대로………….”

“잠깐. 물론 흑주를 봐서 대충은 알지만 자세히는 모르는데 좀 더 설명 부탁합니다.”

““에메랄드 문을 가진 특별한 오드아이’에 관한 역사적 사건들이라던가, 자세하게 설명하려면 조금 길어질 거예요. 우선 알고 계시는 정도, 보통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역의 에너지 흐름까지 잡아낼 수 있다는 사실만 이해하셔도 될 거 같네요.”

그야 그 정도쯤 되는 능력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기는 했지.

“두 분께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에메랄드 킬러의 ‘안전’이겠지요?”

“당연하죠. 우리 흑주가 이쪽 세계에서 그렇게 유명한 존재라면, 혹시 지부장님처럼 이쪽 세계의 누군가에게 노림을 받고 있는 거 아닌가요?”

“우리 재단에서 파악한 바로는 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만약 그녀가 지금처럼 계속 능력을 사용하고, 심지어 더 큰 능력까지 자각하게 된다 면………….”

“더 큰 능력이라고요? 설마 당신과 같은 예지력?”

“에메랄드 문의 힘 자체에도 또 다른 비밀이 있어요. 아, 하지만 예지력 쪽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겠군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가계 (家系)와 저의 가계가 먼 과거에 어떤 형태로든 인연이 있을지 모르거든요. 보통 이런 능력은 유전되는 경향이 커서……”

“… 일단, 지부장님과 흑주가 바로 확인 가능한 친척은 아니란 얘기군요.”

“현재까지의 재단 조사로는 그래요.”

“… 혹시 댁네 재단에서는 오래전부터 우리 흑주의 존재를 알고 감시하고 있었던 건가요?”

“감시라기보다, ‘보호’라고 하는 편이 좋겠네요. 다만 지금까지는 그저 관찰 정도였을 뿐이고, 조만간 그녀의 주 활동무대인 미국 지부에서 정식으 로 보호사원을 파견할 예정이지요.”

그 보디가드가 정말 순수한 보디가드라면 고마워해야 할 일이겠지만, 그래도 지금 내 기분은 좀

그러고 보면, 언젠가 흑주의 에메랄드 눈동자에 깃든 힘이 아무래도 이쪽 계열 같아서, 내가 먼저 여기에 상담의뢰를 해볼 생각을 한 적도 있긴 했 다. 그렇다고는 해도 설마 이렇게 역사 깊고 복잡한 스토리가 얽혀있을 줄은………….

“진유준님 입장에서는 우리 재단을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겠지요. 하지만 에메랄드 문의 소녀, 흑주는 인류 진화의 중요한 열쇠 중 하나여서 재단에 서도 소중하게 보호할…….”

“저기요! 나 이제 왠지 짐 싸들고 집에 가고 싶어지고 있어요.”

난 정말로 그런 심정이 되어서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난 오늘 원래 많은 것을 알고 싶어서 여기 온 거기는 한데, 이건 좀 지나치잖아!

-오라버니. 이제 잠시 쉬시는 편이 좋겠어요.

대교의 다정한 전음과 테이블 밑으로 잡아오는 보드라운 손길에 어느 정도 힘이 나는 느낌이기는 한데…, 으음, 어쩐다? 다른 건 몰라도 흑주에 대 한 애기는 좀 더 듣고 싶은데………….

“후후. 아무래도 제가 조금 지나쳤나 보군요.”

응? 이 친절하고 아름다우신 지부장의 목소리에 슬쩍 장난기가 느껴지네?

“실은, 닥터 제이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언제고 당신이 재단을 찾게 되면, ‘가급적 많은 얘기를 한꺼번에 들려주기 바란다’ 라고요.”

윽~! 내가 당한 거였나? 그 얄미운 두뇌파 악당 닥터 제이와 이 지나치게 친절한 지부장 여자에게?

“그렇다고는 해도, 저 역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 편안한 대화를 해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거든요.”

고개를 들어보니, 친절한 지부장께서는 곱게 웃으며 자신의 찻잔에 남은 차를 비우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저에게 미처 듣지 못한 사항들은 곧 마 비서를 통해서 전달될 겁니다. 흑주, 그 사랑스러운 소녀에 관한 자료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제가 아무리 제 본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두 분의 허락도 없이 두 분의 인생을 들여다본 ‘대가’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진짜 친절하고 아름다우신 지부장께서는 사후 A/S도 철저하구먼. 어떤 형태로든 시비 걸기가 어렵겠어.

-오라버니. 이제 저에게도 잠시 시간을 주시겠어요?

-으, 응? 무슨… 시간?

대교는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고, 거긴 우리가 마신 차가 준비되었던 장소였다.

“아까부터 이쪽에 있는 차 잎의 향이 코 끝에 걸렸는데, 제가 준비를 해도 괜찮을까요?”

대교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고, 주인장 지부장께서는 오히려 감사하다는 표정으로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난 후.

대교의 참전 선언으로 시작된 수다 배틀 2라운드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난 결국 삼십여 분 만에 슬며시 지부장실을 나서야 했었 다. 화장실 핑계를 대고 나온 거지만, 그냥 들어가지 않고 비서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어도 안에서는 나를 찾지 않고 있었다.

대교가 주가혜로 환생하기 전, 영혼 상태로 돌아다닐 때 이곳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이유라던가, 대교도 궁금한 점이 많았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보이네.

나도 기다리는 동안에 그냥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나올 때까지 비서실에서 대기 중이던 최윤희 과장을 통해서 그동안 재단에 오면 해 야지 싶었던 일들을 몇 가지 처리했던 것이다.

라프와 라프의 목줄 상태는 최윤희 과장이 직접 자기 능력으로 스캔해 보더니, 자기네 도구실에서 뭔가 보강된 목줄을 만들어 줄 건데, 조만간 우 리집에 택배로 보내 준다나? 내일 모레 싸울 예정인 에레보스의 멤버들 중 이쪽 계열인 ‘공간의 지배자 시그마’, ‘공간의 마녀 산드라’ 커플에 대한 정보도 최윤희 과장을 통해서 어느 정도 수집할 수 있었고… 쯧.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몸으로 하는건 하나도 없어서 그런지 계속 지루~하구먼.

십여분 정도 후.

나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비서실은 물론이고 아예 건물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주차장 쪽으로 난 계단을 막 내려서는 순간, 정글이가 움 찔했고 나 역시 뭔가 느껴져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아래로부터 마주 올라오고 있는 이 남자 아까 주차장에서 ‘신수의 여자’ 윤태영을 뭐라고 훈계하던, 그녀의 상관인 듯한 남자인 것 같은데. 근 데 이 남자, 이거, 이거………………

아까는 먼발치에서 봤을 뿐이라 몰랐었지만,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은 정글이도 나도 긴장 타야 할 무언가가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말끔한 정장에 바바리코트까지 갖춰 입고 풍채가 좋아 간부급 인물 느낌이 나는데, 정글이가 일찌감치 반응하는 걸로 보아 ‘칼’ 형태의 병기 사용자지 싶었 다.

흠. 이 남자도 우리 쪽의 기운을 느꼈나? 문득 걸음을 멈추는군.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음을 떼어 우리 쪽으로… 웃. 정글아, 진정! 여긴 적진이 아 니야. 저 남자도 그냥 지나갈⋯ 응? 왜 갑자기 한손을 품속으로 넣는 거지? 게다가 날 무섭게 응시하면서. 젠장, 이거 설마… 웃!

남자가 무서운 속도로 손을 빼는 순간, 나 역시 등 뒤의 정글도를 맹렬한 속도로 고쳐 맨 후, 남자가 내민 명함을 받아들었다.

‘감찰부 과장 홍인상’

그렇군. 역시 감찰부 사람이었어.

“안녕하십니까. 아까 저희 재단의 사원과 잠깐 난처한 일을 당하셨던 분이지요?”

“아, 예. 뭐, 그런 일이 있긴 했는데… 그쪽 감찰부 사원 덕분에 잘 넘겼습니다.”

“하핫! 저희 윤 대리 말씀이로군요. 그 친구가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하핫~”

사람 좋게 웃으며 몇 번이고 나나 일행인 대교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를 물었고, 내 차 걱정도 좀 해주다가 결국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 섰 다. 그리고 난 나대로 계단을 밟고 내려가 주차장 쪽을 향했다.

「주인님. 방금 뭐하신 거예요?」

-그냥, 낚시 놀이. 심심해서.

확실히 표면상 그런 측면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조금 전의 그 남자, 홍인상 과장은 그냥 괜히 손님 안부 챙기러 다가온 건 아닌 것 같았 다.

그 남자 자신도 그렇고, 품안의 정체불명 무기에서 느껴졌던 그 불길한 기운…! 어쩌면 ‘옥환’이라는 터미네이터 남자만큼이나 강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쪽도 인사치레하는 척 하면서 탐색하는 눈치였으니, 지금쯤 나처럼 강적과 한 판 뜨지 못한 걸 아쉬워하고 있으려나?

난 아쉬움을 뒤로하고 텅 빈 주차장을 하릴없이 산책했다. 아까의 사건으로 몇 대있던 차들까지 싹 빠져나가서인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주인님. 8층을 보세요. 여기 지부장과 대교님이 창가에서…………」

-뭐?

고개를 들고 내공을 눈으로 집중해서 보니, 지부장실 창가에 나란히 선 대교와 친절한 영애씨가 뭔가 대화를 나누며 커튼을 매만지고 있는 것 같았 다.

「… 대교님께서 커튼을 교체하면 분위기가 확 달라질 거라며 디자인과 색을 추천해주고 계세요. 지부장은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고 요.」

-요몽. 너도 지금 낚시 놀이했지.

「예? 전 그냥 대교님 상황을 전했을 뿐인데, 왜 그런 말씀을……………」

-됐다.

대교와 친절한 영애씨..! 도대체 여자들은 처음 만난 사이에 어떻게 저런 대화와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아직도 멀었단 말인가?

「주인님! 에레보스의 연락책, 산드라로 부터 연락이 왔어요!」

오오~ 이게 웬 떡이냐(?).

“… 진유준님?”

“산드라! 어디야? 언능 싸우자!”

“예?”

산드라는 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더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우리의 캡틴이 통화를 원합니다.”

“어, 그래? 하긴, 이제 대결이 코앞인데 양쪽 짱끼리 통화 한번 하긴 해야겠지.”

“… 진유준님. 접니다, 블랙 크라우드.”

“어, 그래. 반갑다. 언능 후딱 싸우자!”

“… 훗. 장난이시긴 한데, 진심도 많이 느껴지는군요.”

“하아~ 맞아. 내가 지금 상태가 좀 그렇다. 뭐랄까… 니들과 싸우기로 한 건 일주일도 채 안 지났는데, 기분은 어째 십년도 넘게 기다리는 거 같다 고 할까?”

“… 저 역시 오랜 기다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치? 그러니까 우리 날짜를 하루정도 당길까? 사실 난 오늘도 상관없는데, 내 수하들이 술 좀 깨고 그럴 시간이 필요해서………….”

수화기 너머에서 큭큭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웃는 건지, 진심을 알고 그게 재밌어서 웃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저도 같은 심정이었습니다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쯧. 또 뭘까?

“저희들이 배반하고 떠난 프리메이슨, 그들로부터 저희들에게 정식으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자신들의 접근을 허용해 달라고 말입니다.” “뭐? 그게, 지금 무슨 말이냐?”

“프리메이슨에서 우리의 싸움, 그 현장을 관전하고 싶어 한다는 얘깁니다.”

이것 봐라? 이건 또 뭔 수작이지? 보고 싶으면 그냥 어떻게든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놈들이 왜 새삼스럽게… 아, 가만?

“12인의 사도, 그들이 직접 온다는 거냐?”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극도로 조심성이 많으니까요. 다만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보고 싶어 하겠지요.”

몽몽이 추적해서 찾아낼 찬스라는 얘기군. 놈들의 대비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오히려 에레보스와 합심하여 뭔가 함정을 준비하려는 걸 수도 있

는 거지만…, 뭐. 아무려면 어때. 난 어차피 놈들이 갈라섰다는 거 자체를 믿어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지.

“좋아, 블랙, 그들의 관전을 허용하겠어. 하지만 그래도 결투 약속은 조금 당기자. 시간은 내일 밤 자정. 오케이?”

“… 알겠습니다. 오늘밤 마지막으로 좋은 꿈꾸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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