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4부 – 68화 : 퍼클과 세클


8. 퍼클과 세클

대교는, 나의 대교는 강하다.

객관적인 전력이 날 능가할 정도라서 내가 일일이 걱정해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대교의 강함만을 믿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산드라! 대교를 어디로 데려간 거지?”

산드라는 몸을 가누고 앉아있기도 힘겹다는 기색으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섬, 지하……”

땅속? 하필

“대교님 자력으로는 탈출할 수 없는 깊숙한・・・ 출입로는 미리 파괴해두었기에 제 능력 외에는 방법이 없을………….”

“알겠어. 힘들면 더 말하지 마. 할 얘기 있으면 텔레파시를 쓰던가하고.”

내가 살기를 거두며 말하자 산드라는 물론이고, 시그마도 뜻밖이라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죽어가는 산드라를 압박할 필요는 없 을 것 같았다.

지금 산드라는 분명 ‘미리 출입로를 막았다’라고 했지? 그렇다는 건 그냥 땅속이 아니라 인공적이든 자연적이든 동굴의 형태를 띤 장소라는 거야. 내가 물속에 워프 되었을 때처럼 흙에 파묻히는 형태로 워프된 것이 아니라면 일단 긴급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이 가능해.

-시그마! 내 영력까지 담긴 심도에 사드라가 상당한 부상을 당한 건 알겠어. 하지만 어째서 저렇게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 당신들은 소위 ‘심장에 말뚝 박기’ 외에는 죽일 수 없는 거 아니었어?

내가 묻자 시그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오. 우리 종족은 고대에 위대한 여신과 맺은 순혈의 계약에 따라 서글픈 영생을 약속받았소. 하지만 산드라는 나를 위해 금기된 힘을 사용 하는 길을 선택했소. 자신의 마스터인 나이 피를 마심으로서 ‘블러드 드래프트’에 의한 힘을…………?

-잠깐!

우쒸. 바쁜데 뭔 설명이 이렇게 길어?

-간단히 말해서, 당신 피를 먹고 강해지긴 했는데, 그 부작용으로 불사가 아니게 되었다는 거지?

‘그렇소. 피의 맹약을 어긴 블러드 드래프트는 불사의 계약까지 무효화하기 때문이오. 그렇기 때문에………….’

또 길어지려해서 한손을 들어 흔들며 시그마의 말을 끊었다.

-이제 대충 알았으니까, 댁은 이제 뒤로 좀 빠지쇼.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나는 시그마가 약간 민망해하거나 말거나 그의 옆을 스쳐지나가 산드라 앞에 섰다. 산드라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나름 초연한 표정으로 희미 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진유준님. 하지만 대교님이라면 그곳에서도 쉽게 생명을 잃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옘병! 웬만한 사람이면 땅을 파다파다 지쳐서 포기할 정도로 깊은 지점이라 이거지?

-몽몽. 너도 방법없냐? 그동안 뱀파이어들에 대한 데이터도 꽤 쌓였을 거 아냐.

「죄송합니다, 주인님. 현재 코드명 산드라는 자신들의 기본 에너지 운용 시스템을 벗어난 편법을 사용한 상태여서 저도 적절한 간섭을 하기 어렵 습니다. 최선을 다해 의료 패턴을 운용해보겠습니다만, 외부 도움을 통한 대교님 구출 패턴도 병행하실 것을 권고합니다.」

지하무림 수하들에게 지하 발굴 장비를 공수해 오라는 얘긴데, 그게 가능하다해도 그 또한 시간이 너무 걸리고 막연해. 역시 이 여자, 산드라를 살 려서 다시 데려오게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수밖에 없어. 그런데 어쩌지? 어쩐다?

“몽몽. 라프는? 라프의 마력을 이용할 방법은 뭐 없겠어?

「이미 코드명 라프의 비공인 에너지응용은 진행 중 입니다.」

“아!!”

산드라의 입에서 약한 신음성이 흘러나오더니 옆으로 스르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움직이려고 했지만, 한 발 먼저 시그마의 검은 망토가 산드라를 감싸 안고 있었다.

-몽몽! 어떻게 된 거야?

「저의 의료 에너지 운용으로 인해 세포붕괴가 늦추어지고 있습니다만, 30분 이상 진행을 늦추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런 제기. 믿었던 몽몽도 겨우 진행을 늦출 정도라니, 내가 여자에게 이렇게 심하게 칼질을… 아, 아니. 지금 죄책감이든 자괴감이든 그런 거 느낄 때가 아니야. 뭔가, 뭐든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하자. 생각해내는 거야, 진유준!

‘진유준님. 당신이 그 마족 늑대의 힘을 이용해서 산드라를 도우려는 것은 알겠소. 하지만 어쩔 수 없을 거요. 고대로부터 내려온 피의 계약은 그만 큼 절대적이오. 이제…, 나의 여인은 꽃잎에 머금어진 새벽이슬이 햇살 아래 스러지듯…, 항상 원하던 바람이 되어 내 곁을 떠나겠지’

시그마의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그의 의식에 가득했고, 산드라는 처연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산드라. 나에게 더 이상 과거의 사랑은 없어. 지금의 사랑도 이제 신조차 찾을 수 없는 무(無)의 공간으로 돌아가겠지만… 나는 기꺼이 당신 의 사랑과 함께 영생을 버리겠어’

‘그러지 마세요, 마스터. 나의 사랑이 당신의 옛사랑을 대신하게 된 것은 죽음의 공포마저 잊을 정도로 기쁘지만…, 당신은 저와 함게 떠나시면 안 돼요. 당신은 언제나 바람이 머무는 나의 신전으로 언제까지나……..?

“그만! 스톱~ 셔럽!”

난 나오는 대로 외친 후. 이 애절한 연인을 향해 으르렁댈 수밖에 없었다.

“뭔 연애질 텔레파시를 나한테까지 들리게 하고 난리야! 정신 산란하게!”

쳇. 이제야 머쓱해하며 둘 다 조용해지는군. 뭔 뱀파이어들이 저렇게 맥없이 상황을 받아들여? 물론 너무 오래 살아서 오히려 더 그럴 수도 있겠… 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난 지하 깊숙한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대교를 상기하며 이를 악물고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내 영력이 담긴 칼질도 칼질이지만, 애초에 산드라가 금단의 힘을 쓴 거 자체가 에러였던 거야. 뱀파이어 서브가 자기 마스터의 피를 빠는 것을 금 지하고 어길 경우에는 X되게 만들어놓은 것은 아마도 뱀파이어들의 여신격인 어떤 존재…! 그렇다면 그 정도 상위의 존재라면 고위 마족이라면 저 ‘계약 위반 벌칙’을 무마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난 당연히 뱀파이어의 여신이 누구고 어디 짱 박혀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대충 그 비슷한 위치와 성향을 가진 고위 마족은 알고 있지. -몽몽. 라프 나오게 해.

아공간이 열리자 즉각 라프가 뛰어나와 내 어깨에 앉았다. 나는 그런 라프의 목덜미를 잡아서 손에 들고 다시 생각해보았다.

시그마는 라프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다고 했고, 몽몽도 비슷한 입장이야. 하지만 난 왠지 이 라프를 통해서 뭔가 더 할 수 있을 거 같단 말야? 내가 전에 뭔가 본 듯한 기분이… 그게, 그러니까, 라프와 본체인 라후의 혈족은 분명, 그래. 늑 대.

난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상기하며 라프를 들고 산드라에게 다가섰다. 지난번에 산드라가 라프를 처음 보았을 때는 어느 정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까지 있는 것 같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서인지 오히려 인간 여자가 귀여운 동물을 보는 것처럼 사랑스러워하 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라프. 이 누님이 많이 아야한 상태다. 니가 어떻게 좀 해줘.”

난 밑도 끝도 없이 말하며 라프를 산드라의 가슴에 내려놓았다. 산드라는 의아해하면서도 팔을 들어 조심스럽게 라프에게 손을 뻗었고, 라프는 가 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라후의 혈족들과 싸우면서 그들에게 부상을 입혔을 때, 그들은 분명………….

라프는 문득 혀를 내밀어 산드라의 손을 살짝 핥아보더니, 곧 그녀의 상처를 주목하고 그쪽으로 기어가 상처를 핥아주기 시작했다.

“아?”

산드라가 놀라며 몸을 움찔했다. 당장은 고통을 더 느끼는 것 같았으나, 라프를 밀쳐 내거나 하지 않고 계속 놀라워하는 기색만 떠오르고 있었다. “아아~ 이거, 이 마랑은 대체.. 아하아~!”

약간 야릇한 음색이 섞인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은 산드라의 상처가 나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빙고! 이게 정답이었어!

나는 나의 월광절화결에 상처 입은 라후의 혈족이 그 상처에 침 한번 발라주는 것을 끝으로 여유 부리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하지만 나 외의 모두는 기뻐하면서도 황당해하는 것 같았다.

「맙소사! 라프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건 몽몽 오빠도 못 알아냈는데, 주인님께선 어떻게 아신 거예요?」

-요몽. 원래 상처엔 침 바르는 게 짱이야. 라후의 혈족이 그러는 걸 보기도 했었지만, 사실 나도 가끔 습관적으로 그러거든.

「아, 맞아요. 그러고 보니 주인님도 작은 생채기는 약 안 쓰고 그냥 침 한번 바르고 마시죠? 으~ 그렇다면 주인님도 야생 짐승 수준이라는 결론?」

-됐거든.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주인님.」

훗. 도통함이 살짝 모자랐던 몽몽이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모범적이군. 아, 라프 이 녀석! 벌써 끝냈나?

폴짝 뛰어올라 내 어깨로 돌아온 라프를 쓰다듬어 주면서 산드라를 돌아보니, 그녀는 거짓말처럼 멀쩡해진 상태로 몸을 일으키며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산드라는 내 재촉에 따라 서둘러 대교를 데려오기 위해 사라졌고, 난 시그마에게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이 라프는 댁네들의 여신과 동격쯤으로 추정되는 마족의 직계야. 엄밀히 말하면 그냥 라후의 혈족 본체와 같은 존재라고 할까?

‘나보다는 진조와 가까운 혈통의 마랑임은 알고 있었소. 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라프를 바라보는 시그마의 시선에는 경외감에 가까운 감정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그보다, 당신말요. 굳이 내 피로 뭔 고리를 만들어서라도 나에게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거 아뇨? 산드라를 통하지 않고 말이지.

‘그렇소. 산드라가 날 위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소.’

그랬는데 타이밍 못 맞춰서 산드라의 오버를 막지 못했다는 얘기군.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다른 이유보다, 근본적으로 이 남자의 스타일이 좀 우유부 단 하달지, 뭔가 단호한 성향이 부족해서 일이 이상하게 흐른 거 같아. 아무래도 저간의 사정은 이 친구보다 산드라를 통해 듣는 편이 나을 거 같 은…건 그렇다 치고, 산드라는 또 왜 금방 안 오는 거야? 명색이 순간이동 능력자인데 몇 초 만에 파팍 갔다 와야 하는 거 아냐?

「주인님. 지하로부터 이상 진동이 감지되었습니다.」

-뭐?

「아직 분석 중입니다만, 일부 파장에 대교님의 무공이 구현될 때의 파장과 일치합니다.」

에? 대교가 지하에서 빡 돌아 있다가 산드라가 오니까 다짜고짜 살수를 펼쳤나? 산드라가 변명이든 뭐든 하기도 전에 메롱되면 또 일이 꼬이게 되 는 거 아냐?

-몽몽. 어쨌든 지금 감지된 걸로 위치 파악되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추정 거리가 너무 멀어서 주인님의 전음이 전달될 가능성이 낮습니다.

-젠장. 시그마. 당신과 산드라는 정신이 연결되어있지? 지금 어떤 상황인거야?

나는 다급하게 물었지만 시그마는 별다른 감정변화 없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상하오. 당신의 여인은 산드라의 손길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소. 하지만 산드라를 공격하는 것도 아닌 모양이오.’

「주인님. 암반파괴를 목적으로 한 에너지 파장이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 그래. 이젠 나도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이고야. 대교, 이 아가씨 혹시 쫀심 때문에 자력으로 탈출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건가? 얼결에 지하에 갇힌 것에 빡도 돌아있겠다, 쫀심 문제까지 더해져서 짱짱한 내공을 풀파워로 발동하여 지하 공간을 다 작살내면서 뚫고 나오고 있는 중이란 말인가?

아무리 대교라도 설마 내가 천지파멸식 쓸 때 같은 사태를 일으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난 내가 전에 지은 죄가 있다 보니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몽몽. 현재 상황이 해저 지반에 문제를 일으켜서 일본에 대지진을 발생시킬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현재로서는 주인님께서 우려하시는 상황발생 가능성이 낮습니다. 불안하시면 제가 알려드리는 좌표로 최대한의 내공을 사용한 전음으로 대교님 을 설득하실 것을 권고합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싶어서 내공을 최대한 끌어 모으며 몽몽이 알려주는 좌표로 정신을 집중했다.

-대교! 진정해! 진정!

몇 백 미터가 넘는 땅속에 전음을 보낸 적이 없어서 들렸는가 모르겠네. 어디 다시 한번 해볼까?

-대교! 대교 너도 일본 우동 국물이나 입에 맞는 간식도 있다며? 좀 진정하라구!

“오라버니?”

내가 두 손을 모아 땅바닥을 향해 외치는 자세를 엉거주춤 푼 것은 대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 대교. 왔어?”

내가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보자 대교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오라버니도 참. 어떤 일을 걱정하신지 알겠고, 저의 공력을 높게 평가해 주시는 것도 고마워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만한 공력이 없어요.”

“아니, 뭐. 난 그냥 혹시나 해서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야.”

“저야말로 걱정했어요. 제 행방이 묘연한 상황에서도 산드라씨를 해치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대교의 걱정은 핀트가 어째 쫌.

내가 이미 해쳤다가 어영부영 부활시킨 산드라도 어색한 태도로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늦어져서 걱정하셨군요. 저도 돌아갔을 때 대교님이 보이지 않아 놀랐어요. 설마 그 사이에 그곳을 그 정도 거리까지 부수며 나아가셨을 줄…….”

“어멋! 산드라씨! 다쳤었군요!”

대교는 약간 과장되게 놀라는 목소리와 태도로 산드라의 말을 끊더니 그녀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피는 척 했다.

「후후. 대교님도 참. 대교님이 울트라짱 쎄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새삼 내숭이시네.」

요몽은 재미있어 했지만, 나는 솔직히 마냥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대충 좋게 상황이 마무리된 셈이군. 그럼 다음 놈들과 싸우기 전에 정리 좀 하고 가야할 것 같군.

“자, 자! 다들 여기로 모이! 모이!”

손짓으로 모두를 내 앞으로 불러 모은 다음 시그마, 산드라 커플을 얼마간 취조(?)해 보았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뱀파이어 커플이 처한 상 황과 입장을 대충 알아낼 수가 있었다.

전부터 짐작했던 데로 시그마는 블랙 놈에게 약점이 잡혀있었던 거군. 근데 그 수법이 뭐? ‘시그마의 심장이 묶여있다.’고? 흑마술인지 뭔지 이쪽 세계 수법은 나나 몽몽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그래서 블랙의 명령에 따라 우리와 ‘최선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산드라. 블랙 놈은 언제고 원할 때 그 묶여있는 심장을 조여서 파괴할 수 있는 거라 했지? 그리고 그건 시그마가 아무리 자신의 영역 안에 숨어 있어도 막을 수 없고 말이야.

‘예. 아, 아니. 솔직히 저희들도 확실히는 모릅니다. 감히 실험해 볼 수가 없었고, 어차피 영역을 무한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보통 이런 ‘저주’같은 수법들은 그걸 건 놈들 해치우면 풀리지 않나?

‘예. 하지만 블랙은 너무 강해서 저희들이 감당할 수가 없기에 부끄럽게도 진유준님 같은 분이 나타나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블랙이 그렇게 강해? 둘이 함께 싸워볼 엄두도 못 낼만큼?

‘그, 그건……’

산드라는 당황하여 똑바로 대답 못하고 시그마는 더욱 침통한 분위기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군. 그냥 찔러 본건데, 이 나름 막강 커플은 진짜 블랙 과 싸워본 적도 없으면서 두려워하고 있었어.

-한가지 더, 이 시그마의 영역은 프리메이슨의 카메라나 여하간의 장비들은 차단할 수 있는 거지? 그럼에도 중요한 얘기는 텔레파시로 하려는 거 보니까, 블랙 놈만은 놈의 어떤 특수능력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는 거고 말야.

잠시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결국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뱀파이어 커플을 보고 있자니 내심 한숨이 나왔다.

둘 다. 정신적으로 너무 약하군. 물론 웬만한 인간들보다야 강할지 모르지만, 소위 요괴로 분류되는 종족의 강자들치고는 정신력 쪽이 너무 약해. 그걸 감안해도 블랙 놈에 대한 두려움은 좀 지나친 거 같지만 말야.

“일단, 이거부터 그만두자.”

‘예?’

“전음과 텔레파시로 대화하는 거 말야. 당신들이 텔레파시를 쓰면 뭔가 비밀 얘기 같아서 나도 전음으로 대화하도록 신경을 써왔었는데, 이제 보 니, 반격의 기회를 노리느라 조심하는 거라면 몰라도, 이건 상대한테 겁먹고 소곤거리는 분위기잖아! 난 이딴 거 못 참아!”

난 산드라가 당혹해하거나 말거나, 더 목청을 높였다.

“당신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블랙 놈이 아니야! 그게 누군지, 내가 한번 맞춰볼까?”

‘추측이 틀리면 멍멍이쪽인데’라는 생각이 스쳤으나 이미 늦었다.

“혼돈의 사도!”

말해 버렸다. 시그마와 산드라는 멍하니 날 바라볼 뿐, 아직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 하고 있지만 내친 김에 마무리 덧붙이자.

“한때 엘(L)이라고 불리며 나와 대교를 괴롭혔던 악질 사도. 하지만 알고 보니 그 놈은 허수아비 대리가 주제넘게 설친 거였고, 진짜 혼돈의 사도 는 따로 있다지? 난 그 알 수 없는 꼬마 녀석이 당신들을 에레보스로 만든 사도라고 생각해.”

「주인님! 진짜예요? 그 괴상한 꼬마 사도가 이 뱀파이어 커플의 두목이라고요?」

-요몽. 나 알면서! 찍은 거야, 찍은 거. 그러니까 확인은 이제부터 해야지.

난 요몽과 뱀파이어 커플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아님 말고.”

「윽! 역시나 주인님다운 발뺌 화법!」

-그래도 임마.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야 에레보스 멤버들 중에서 이 커플이 가장 이질적인 존재이듯이 사도들 중에서는 필립이 유일하게 오컬 트 전문으로써 이질적인 존재인거 같았거든, 그리고… 이번에도 내 직관력 만세인거 같다.

뱀파이어 커플 중 산드라가 먼저 하하아 한숨을 토해냈다.

“그분, 혼돈의 사도를 이미 만나셨던 겁니까?”

“응. 얼마 전, 그러니까 한 열흘쯤 되었나?”

옆을 돌아보자, 대교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정도 전이었어요. 그런데 산드라씨, 전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 ‘필립’이라는 소년 사도는 그렇게 위험한 존재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 제 안 목이 모자랐던 건가요?”

“그건… 그분 자신은 분명 다정한 성품인지도 모르지만, 그분의 능력은… 아, 죄송해요. 저로서는 그분에 대해 더 언급할 수 없어요.”

“뭐, 굳이 더 묻고 싶지도 않아. 난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어, 블랙 놈이 강하다고는 해도 당신들을 자력으로 구속할 정도의 마력이라던가, 하여간 소위 오컬트쪽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꼈었거든. 그러니까 아마도 필립 녀석이 시그마에게 금제를 걸고 그걸… 음, ‘계약 승계’, 그런 용어였 었지? 하여간 블랙 놈에게 금제 통제권을 넘겼을 거야. 그렇지?”

“예. 인간 마도사들의 계약승계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개념은 비슷합니다.”

“애초에 필립이 왜 그랬는지도 궁금하긴 한데, 그 녀석과 관계된 얘기는 산드라가 해줄 수 없다고 했지? 마계 쪽도 군기가 꽤 쎈가 봐?”

“그,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분은… 아, 하여간, 혼돈의 사도님을 그렇게 하대하기까지 하는 당신이란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거예요! 그분 은, 그분은…….”

산드라는 필립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아 보였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됐어, 산드라. 내가 궁금한 건 나중에 필립에게 직접 들을 생각이니까, 산드라는 더 무리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좀 쉬어. 여기 안전한 애인의 영역 속에서 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해주며 몸을 조금 돌리자 대교도 산드라와 시그마에게 살짝 목례를 해보였다.

“잠시만요. 이대로 가신다는 건가요?”

“어, 우리 싸움은 버얼써~ 끝난 거잖아. 어느 한쪽이 꼭 죽어야 끝나는 거라고 규칙을 정해놓은 것도 아니고… 우린 이제 우리와 싸우고 싶어서 안 달 난 녀석들 만나러가야지, 뭐.”

“바로 그들, 그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뭐 하러 물어? 싸우다보면 알게 될 텐데.”

내가 너무 태연하게 대꾸하니까 산드라는 더 할 말이 없어지는 모양이었다.

“좀 전에 말했듯, 내 생각에는 당신들이 사서 걱정을 한 거지, 이 영역은 안전할거야. 그러니 오랜만에 둘이 오붓한 시간 가지고 있으라구. 만의 하 나 블랙 놈이 이 안까지 엿볼 수 있다 해도 지금부턴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을 걸? 안 그래, 대교?”

“후후. 맞아요, 산드라씨. 오라버니와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릴게요.”

나는 시범을 보이듯 대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다정하게 숲을 빠져나왔고 시그마와 산드라 커플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우리를 보내고 있었다.

“아아~ 내가 재단에서 친절한 영애씨한테 물들었나? 친절한 유준씨가 된 기분이네.”

“아뇨. 오라버니께선 본래 이런 분이에요. 항상 너무나 다정하고 친절하죠.”

“에이~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진실(!)을…큼. 흠. 어쨌든 대교. 이제 다음 상대는 대교가 한번 골라볼래?”

“예? 제가요?”

대교는 내가 미리 어느 정도 순서를 정해놓았다고 생각했었는지, 조금 난처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참. 몽몽. 지금 놈들이 각각 어딨는지 확인 가능하면 좀 알려줘.”

「주인님. 몽몽 오빠가 지금 좀 바빠서 제가 대신 보고 드릴게요.」

“응? 이 시점에서 몽몽에게 바쁜 일이 생겼다고?”

「예. 이 섬은, 코드명 시그마의 영역 때문에 외부와의 통신까지 단절되어 있잖아요. 그걸 대비했는지, 프리메이슨에서는 블랙박스처럼 대용량 저 장장치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몽몽 오빠가 그거 보안 깨고, 내용 좀 손본다고 작업 들어갔지요.」

흐음. 몽몽은 시그마 커플이 우리와 싸운 장면만 살리고 다른 대화 장면 같은 건 적당히 손보려는 건가? 몽몽도 나름 친절한 몽몽씨가 되었군, 그 래.

“그리고, 주인님. 방금 말씀하셨던 에레보스 멤버들 동향 말인데요, 우리가 이 섬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상황은 애써 확인할 것도 없이 이렇게 다 볼 수 있네요.」

뭐야, 이거. 요몽 녀석이 띄워주는 영상창이 하나, 둘・・・ 전부 일곱 개. 그리고 각 창마다 각각 다른 섬들의 구석구석이 촬영되는 미니 창들로 가득하네?

“이거, 니들이 해킹한 거냐? 아니면 혹시 공개방송인거냐?”

「두 번째요. 주인님께서 코드명 블랙과 만나신 시점에서 프리메이슨 측으로 부터 흑해1호에 자신들의 장비가 찍은 영상데이터를 송출해주기 시 작했거든요.」

호오. 그랬단 말이지? 이 인간들, 어차피 몽몽의 해킹을 막기 어려울 거 같으니까 그냥 대범한척 하기라도 한 건가?

「자아~ 그러니 잘 보시고 한번 골라보세요, 대교님.」

요몽이 장난스럽게 외치며 한쪽으로 물러나자, 일곱 개의 영상 창들에 각각 자리하고 있는 에레보스 놈들의 면면이 확대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대 교는 쓴웃음을 지으며 조금 망설이더니 바로 옆 두 번째 섬을 선택했다.

“에? 진짜? 진짜로 다음 상대를 저 녀석으로 하겠다고?”

“예. 내키지 않으시면 바꾸셔도…..”

“아, 아냐. 이번엔 대교에게 맡기기로 했잖아.”

조금, 아니 많이 뜻밖이었다. 난 사실 대교가 지난번 ‘떡볶이의 원한 때문에 환영의 천사를 다음 상대로 지목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대교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대를 고른 것이다.

얼마 후.

우리가 탄 고무보트는 라프의 마력을 이용해서 시그마의 영역을 벗어나 정상적인 바다로 나오게 되었다.

「어, 모든 섬들의 상황이 우리가 뱀파이어의 영역 속에 들어가기 전과 같아요. 다들 별 생각 없이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별 생각이 있었어도 시그마의 영역에 맘대로 침입할 수 있는 녀석은 없었을 거 같지만… 암튼 이제 대교가 선택한 섬으로 가자.

「이미 아쿠아린 형제가 알아서 방향을 잡았네요. 그리고 원판씨 연락이예용.」

“뭐냐, 원판. 네가 해설자로 나서기라도 할 거냐?”

“허락해 주신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보다 당장은 첫 번째 싸움의 결과가 궁금하군요.”

“뱀파이어와 싸웠으면 뻔한 거 아냐? 둘 다 목 자르고 심장에 말뚝 박아서 끝냈지, 뭐.”

“…왠지. 잠깐 싸우다가 친해져서 곧 유준 형님의 수하가 될 예정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훗. 그 정도까진 아니고, 그냥 싸우다가 정들어서 차마 죽이진 못했다 정도로 해두자.”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알고 더 묻지 않도록 하죠. 다만… 첫 싸움부터 블라인드로 진행되어 불만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요즘 한국의 기업들 도 사원채용시 블라인드 방식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들었습니다만, 소위 몸빵 전문인 유준 형님께서 이러시면 곤란하죠.”

“야! 내가 카메라 막았냐? 왜 나한테 그래!”

“전 그저, 기브 앤 테이크를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앞으로는 신경 좀 써주시기 바랍니다.”

우이쒸! 관전 허용해달라고 저자세로 나오던 놈이 안면 바꾸고 갑질 모드로 나오려하네? 이거 중계권료고 뭐고 다 취소하고 깽판 쳐 버려?

“유준 형님.”

“어, 알았어. 앞으로는 액션씬에 신경 좀 쓰마.”

으~ 돈 앞에 비굴해지고 마는 인간 진유준.

“아, 이번엔 그 때문이 아니라. 저로서도 두 번째 선택지는 뜻밖이군요.”

응? 원판과 노닥거리는 사이에 두 번째 섬에 거의 다 와 가네?

“금빛의 요정, 프리제타. 그 아이와의 싸움을 이렇게 서두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유준 형님이 아끼시는 CR들과 같은 연구소 출신임을 이미 알게 되어 상대하기 싫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 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형수님 이셨군요.”

쳇. 역시 즉각 눈치 까는군.

“형수님.”

원판이 자신을 부르자, 대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그냥. 그 아이의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잠시 나와 원판, 혹은 이 모든 중계방송을 보고 있는 모두가 침묵에 빠지는 것 같았다.

“아, 그, 이유야 어쨌든 결정되었으니까 번복은 없어.”

내가 조금 어색하게 덧붙이자 원판은 쿡- 한번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이제부터 우리쪽이 제공하는 영상데이터는 싸움이 진행되는 장소에 한정될 것입니다.”

“그건 상관 없을 정도가 아니라, 그게 더 좋지. 서로 상대방 진영의 움직임을 다 알고 있으면 재미없잖아.”

원판은 중계 해설까지 할 생각은 없는지 그냥 접속을 끊었고, 우리의 고무보트는 두 번째 섬의 해안에 도착했다. 나로서는 뱀파이어 커플의 섬에서 보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사이 먼동이 터오며 두 번째 섬이 점차 더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뱀파이어 커플의 섬이나, 구중천내의 내 연무장보다도 작은 거 같군. 프리제타, 그 녀석 혹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완전히 뒤덮을 수 있을 정도 크 기의 섬을 고른 건 아닐까?

문득 처음 프리제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꽤 큰 별장 내부를 가득 메웠던 금발 머리카락의 향연 장면이 날 쓴웃음 짓게 했다. 프리제타의 아름 다운 금발은 한 올 한 올이 철사줄 이상이고 길이며 숫자가 얼마나 늘어나는지 알 수도 없었다. 말이 금빛의 요정이지, 난 ‘금발 마녀’라는 생각을 먼 저 떠올렸었다.

그거야 어쨌든, 아직은 어디에도 프리제타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고 서서히 밝아오며 선명해지는 섬의 전경이 아름답게 보일뿐인 상황이 로군. 그리고 이 섬, 나름 아름답긴 해도 꽤 단순한 지형이네. 우리가 도착한 모래사장이 섬의 절반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거 같고, 나머지 공간은 빽 빽한 나무숲이며 전체적으로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곳이라서 저 나무숲만 아니면 프리제타가 어디에 있건 바로 보일 것 같기도 한데 말이지. “오라버니. 늦잠꾸러기 아가씨의 잠은 어떻게 깨우는 것이 좋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이 섬의 프리제타를 보여주는 영상에서 프리제타는 눈을 감고 있었어. 대교가 그래서 망설이고 있었군. 그렇다면………… “프리제타! 일어나! 학교 갈 시간이다!”

내공을 실은 나의 음성이 섬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다음순간, 우리 바로 앞의 모래가 미세하게 튀었다.

핏!

윽! 젠장! 놀래라! 머리카락 몇 올을 모래 속에 숨기고 있었다 이거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올이 상당한 고수의 암기 스피드로 찔러들어 온 것이었다. 만약 적중되어 몸 어딘가를 꿰뚫리 게 된다 해도 치명상은 아닐 것이지만 그런 일을 당할 때의 감각은 상상만으로도 소름끼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보통 사람들 얘기고, 나와 대교에게 지금의 공격은 ‘학교가기 싫어’라는 앙탈수준이었을 뿐. 대교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 망설이다 몇 걸음 뒤에서 따르기로 했다. 프리제타 하나를 나까지 협공하기는 좀 그렇고, 어디 적당하게 관전할만한 장소가…, 웃!

파아앗!

나, 아니 대교까지 포함한 넓이의 모래사장이 동시에 폭발하듯 솟구치고 있었다.

모래 속에 이렇게 많은 머리카락이? 그리고 이 움직임 패턴은?

사방에서 솟구친 머리카락들이 휘릭- 빠르게 우리의 전신에 휘감겼다. 이대로 당겨지는 순간 우린 수십 조각의 토막이 날판이었다.

번득! 사사삭~!

우리의 정글도와 청명검이 동시에 빛을 발하자 토막이 난 것은 프리제타의 금발들 쪽이었다. 난 숲을 헤치고 가다가 낮게 쳐진 거미줄이 몸에 잔뜩 붙어버렸을 때의 기분을 느끼며 몸에 붙은 머리카락들을 떼어냈다.

“역시 이정도 부비트랩으로는 안 되는군요.”

프리제타의 앳되고 고운 목소리가 숲속에서 들려왔다.

“가급적 당신들 얼굴을 보지 않고 죽일 수 있기를 바랐는데…

하아~ 저 요정 목소리로 말하는 내용이 참 거시기하네.

“프리제타! 난 이쯤에서 멈출 거고, 너한테는 대교만 갈 거야. 그러니 이제 굳이 힘을 분산할 필요 없어.”

정말인가요? 그러셔도 괜찮겠어요? 그 언니 혼자서는 더 힘들 텐데요.”

“프리제타. 방금 네 말이 그 예쁜 언니를 짱 나게 한 거 같다.”

“짱난다? 무슨 뜻이지요?”

“곧 알게 될 거야.”

대교는 일견 평소의 걸음과 자세로 숲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는 이미 뽑혀진 보검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아! 화가 났다는 표현이었군요.”

순진한 소녀요정 같은 프리제타의 음성에 긴장기가 섞이고 있었다. 대교가 나아가는 나무들 사이로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사이에 머리카락이 소위 ‘목 자르는 와이어’ 형태로 설치되 있는 건가? 저 부비트랩을 의식하면서 프리제타의 공격에 대응하는 건 쉽 지 않겠어. 대교는 과연… 음?

대교가 숲의 바로 앞에 멈춰서 스윽- 발검의 자세가 되는 모습이 가까운 영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각도 중계방송 중이라는 걸 깜박했군. 어쨌건, 지금 대교의 저 자세는 ‘뇌전일식(雷電-式)?

번쩍!

나의 삼시전결 몇 개를 합쳐놓은 듯한 섬광이 나무들 사이에 작렬했다. 대교의 뇌전일식은 그야말로 단칼에 그녀가 가려는 방향을 상하로 갈라버 린 것 같았다.

부비트랩이고 나발이고 그냥 단숨에 날려서 길을 열었군. 어디, 프리제타는… 흠. 카메라가 프리제타도 가까이 비춰주는데, 저 녀석 아직 비교적 여유가 있어 보이는군. 자신을 향해서 거침없이 오고 있는 대교를 보면서 살짝 홍조를 띤 저 표정은… 저 요정틱한 녀석도 나름 전사 기질이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

만만치 않은 프리제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잠시 갈등했다. 관전 자체는 이 모래사장에서 대충 중계방송을 봐도 되는 거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 하여 좀 더 가까이 접근할지 어떨지를 선택해야했던 것이다.

대교가 다치는 건 당연히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대교가 프리제타를 어찌하는 것도 좀… 음, 어쩐다? 역시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있다가 싸움이 너무 심각해지면 어떻게든 말려야 하려나?

스스스스~

너무나 실감나는 화질의 영상이 보여 지고 있어서 프리제타의 눈부신 금발이 움직이는 기척까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프리제타는 순식간에 자신 의 금발로 스스로를 휘감고 있었다.

어렸을 때 봤던 일본 애니 중에서 ‘미소녀 변신물’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장르(?) 애니에서 여주인공이 변신하는 장면을 빠르게 돌리는 듯한 모습 이야. 그 결과로 만들어진 저건・・・ 금빛의 갑옷?

지난번에 잠깐 싸울 때는 커다란 머리카락 고치를 만들어서 그 속에 숨는 식이더니 이번에는 몸에 딱 붙는 전신 슈트 형태로군. 그리고 역시 머리 카락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창이 두 개! 저게 프리제타의 진짜 전투 모드인건가?

금빛 방어 슈트와 금빛 창으로 무장한 프리제타는 훌쩍 가볍게 도약하여 대교 앞에 내려섰다. 두 아름다운 소녀의 탈을 쓴(?) 무서운 여인네들은 살짝 묘한 미소를 교환하는가 싶더니, 파팟! 불꽃 튀는 접전을 시작했다.

빠, 빠르다! 대교는 당연하지만 프리제타가 대교의 스피드에 뒤지지 않다니! 내가 프리제타를 너무 얕봤던 건가? 이거 이거………………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싸우기라도 하듯 긴장하여 싸움현장 쪽으로 한걸음을 떼었다. 그 순간이었다.

「주인님!」

요몽의 경고보다 빨리 내 위기감지 센서가 등 뒤의 서늘함을 잡아냈다. 즉각 반격의 태세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뒤로 돌아서니, 눈앞의 바닷물 속에 서 스르르- 귀신같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침묵의 유령?”

물귀신처럼 물속에서 나온 침묵의 유령은 별명처럼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물에서는 유령능력이 안 되는 건지 그냥 힘을 아끼느라 쓰지 않는 건지 몰라도 흠뻑 젖은 몰골 때문에 안 그래도 굶어죽은 귀신같은 녀석이 더욱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프리제타를 상대하다보면 네가 꼭 끼어들 거 같긴 했어.”

내가 비죽이 웃으며 말하자, 유령 녀석의 깡마른 얼굴에 약간 의아해하는 기색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내가 말이야. 한때 ‘진중매’ 혹은 ‘사랑의 전도사’쯤으로 불리던 몸이거든. 네가 프리제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정도는 바로 느낌이오더 군.”

침묵의 유령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스윽- 몸을 낮추더니 품에 안고 있던 일본도를 왼손에 쥐고 허리춤에 붙이고 있었다.

어째 일격필살의 공격으로 내입을 막겠다는 결의가 느껴지네. 어설픈 심리전으로 벌집을 건드린 셈인가?

유령놈은 차분하면서도 빠르게 보법을 밟으며 전진해왔고, 나 역시 한걸음 성큼 앞으로 내딛었다. 다음 순간.

쩡!

모든 과정이 생략되고 오직 거대한 범종이 울린 것 같은 타격음만이 존재한 것 같았다. 그만큼 놈의 발도는 빠르고 파괴적이었으며 나의 발도 역시 비슷한 급이었다.

우쒸! 이놈도 예상보다 강하네? 수면폭결(睡面爆訣)로 대비했는데도 평수라니.

나는 저릿저릿한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유령놈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따라붙을까하다 그만둔 것은 놈이 침묵을 깨 고 뭔가 말할 듯한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 이름은 사사키 겐지.”

“응? 너, 일본놈, 아니 일본인이었어?”

으음. 아무리 내가 일본에 안 좋은 감정이 있다 해도, 그걸 모든 일본인에게 표출하는 건 좀 아니지? 근데 이 녀석이나 누나인 ‘겨울의 여왕’도 완전 동양인은 아닌 거 같은데 우째 완전 한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걸까?

침묵의 유령은 내 의문에 자세히 설명해줄 마음은 없는 듯, 다시 발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도 일단은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고 다시 수면폭결 을 준비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면폭결은 생사금마도결 중에서 가장 첫 발도에 특화된 도결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유령놈의 발도술처럼 대놓고 모든 것을 발도에만 거는 도 결은 아니야. 놈의 발도 스피드와 파괴력에 똑같이 받아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그건 이미 방금 전의 격돌에서 증명된 셈이었다. 난 만반의 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수면폭결을 펼친 거였고, 유령놈은 인사차원에서(아마도) 날린 공격이었음에도 평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놈의 발도술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저 놈은 첫 발도에 목숨 건 유파에서 검술을 익혔지 싶어. 그러니 어떻게든 첫 발도만 잘 막아내거나 피하면 간단히 내 쪽의 흐름으로 넘 어와서 손쉽게 낙승하는 그림이 나오기는 해. 하지만…, 우띠! 이 노무 성질머리가 문제야! 놈의 발도에 정면으로 맞부딪치지 못한다는 생각 자체가 왕짜증! 에이쒸! 몰라! 발도술이 뭐 별건가?

나는 정글도를 쥔 손에 힘을 빼며 상체를 오른쪽으로 살짝 더 높였다. 나의 바뀐 자세를 의식했는지, 신중하게 다가서던 유령 놈의 걸음이 멈추어 졌다. 놈의 움푹 들어간 두 눈이 더욱 서늘한 안광을 발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한걸음 내딛는 동작은 물론이고 신체의 모든 동작 하나하나 단 일도에 거는 저 집중력과 기백! 저런 자의 공격권 안에 드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 위…’라는 식의 내레이션이 일본 쌈박질 작품에 자주 나오곤 하지. 게다가 그런 비슷한 타입끼리 만나기라도하면 온종일 서로 째려보고 서 있다가 한쪽이 지쳐서 틈을 보이면 그때 단칼에 승부가 나는, 그런 게 엄청 멋있는 모습처럼 미화되곤 하던데… 난 어렸을 때부터 그게 멋지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 뭐야, 그게. 재미 없겠스리!

난 역으로 정글도를 쥔 손에 더욱 힘을 빼며 약지 손가락 하나정도로 겨우 정글도를 유지하며 앞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놈의 눈이 순간적으로 뱀처럼 독기를 발했지만, 어쩐 일인지 그 폭발적인 발도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아니, 못한 거야, 이 바보. 내가 피식 웃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말이지.

“바보.”

입 밖으로까지 비웃음을 던지자, 그제야 유령 놈이 인간처럼 우오오- 괴성을 지르며 일도를 날려왔다.

까칵!

금속이 울리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건 내 정글도의 비명은 아니었다. 놈의 일본도를 깨 버린 정글도가 모래톱에 카악 박혔고, 나는 왼 손까지 동원해서 두 손으로 정글도를 역으로 쳐올렸다.

“으랏차!”

뭔 멋없는 기합성이 문제가 아니라!!

“야, 야! 이씨!

나는 다급하게 몸 전체를 뒤로 날렸지만 멈춰지지 않은 정글도의 끝이 유령 놈의 목을 긋고 있었다.

저 자식! 발도 승부에 패했다고 그렇게 멍청하게 서있으면 어떻게? 자칫했으면 저 녀석 목을 통째로 싹둑 할 뻔했잖아! 우쒸. 칼끝에 조금 베인 거 정도로는 죽기까진 않겠지? 으음. 일단은 그런 거 같은데?

침묵의 유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한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고 목에서 많은 피가 나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녀 석은 아무래도 자신의 목 부상보다 손에든 일본도가 반 토막이 나있는 현실에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일본도라는 거 말이야. 하도 다들 엄청 강하고 명검이고 어쩌고들 해서 한번 노려봤는데 깨지네, 뭐.” 내가 일부러 더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침묵의 유령 사사키는 천천히 날 돌아보며 겨우 입을 달싹였다. “처, 처음부터 이 칼을, 노렸던 겁니까?”

“그래. 넌 나의 어딘지 모를 빈틈을 노리느라 뺑이 쳤겠지만, 난, 빤히 보이는 너의 칼이 목표였어서 훨씬 쉬웠지. 우리의 승부는 그것 때문에 갈린 “거야.”

“일본 검술에도 비슷한 수법이 있소. 하지만 그건, 그건…….”

흐으음. 곤란하게 되었군. 이 녀석을 생각보다는 쉽게 제압하게된 건 다행이고, 말문이 열린 것도 좋긴 한데… 어째 뭔가 건설적인 대화를 할 상태 가 아닌 거 같아. 그렇다고 그냥 무시한 채 대교 쪽 싸움관전에 몰입하기도 좀 그런데 어쩐다?

-요몽. 대교 쪽 상황을 간략하게 모니터 해봐.

「대교님 짱. 프리제타 나름 짱.」

-야!

「호홋. 그만큼 막상막하라는 뜻이에요. 저 프리제타 정말 예상외로 강하네요. 스피드와 파괴력, 방어력까지 대교님께 결코 밀리지 않으면서 벌써 삼천 합을 넘겼다고요.」

-에고야. 우리 쪽 칼질 세 번은 명함도 못 내밀겠네. 요즘 아가씨들 왜 이렇게 무섭냐?

「그러게요? 그런데 주인님께도 무서운 아가씨 한 명이 더 오고 있네요.」

요몽이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니, 바다 수면의 약간 위 허공으로 하얀 눈보라가 구름 같은 형태로 날아오고 있었다.

-유령 동생을 구하기 위해 겨울의 여왕 누님이 행차하시는군. 요몽, 내 사전명령 기억하지?

「물론입죠. 벌써 시행 중입니다요.」

겨울의 여왕을 품고 있는 눈보라는 빠르게 해안에 도착하며 매서운 찬바람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에이~ 감기 걸리겄네에!”

과장된 태도로 장난을 쳐봤지만, 눈보라가 잦아들며 동생 옆에 모습을 드러낸 겨울의 여왕은 내 쪽을 향하지도 않고 있었다.

“졌구나, 빨리도! 누나말 안 듣고 작전도 없이 허둥지둥 갈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

쌀쌀맞게 동생을 질타한 겨울의 여왕은 그제야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항상 빈손이었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긴 막대기 같은 것을 천에 감싸 동생이 일본도를 가지고 있을 때처럼 품에 안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진유준씨. 여전히 경망스럽고. 그런데도 강하네요.”

“훗. 너도 여전히 썰러엉~ 하네.”

겨울의 여왕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자신의 품에 안고 있던 물건의 천을 벗겨냈다.

이런 제기! 기껏 부러트렸더니, 또 일본도야?

이 썰렁하신 겨울의 여왕마마도 칼잽이였나 했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칼을 동생에게 건네주며 나름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해서 요도(妖刀)를 챙겨왔더니, 잘됐지 뭐니.”

“누나. 난 그건 쓰고 싶지 않아.”

침묵의 유령은 왜인지 고개를 저었지만 겨울의 여왕은 키득 웃었다.

“나도 사랑하는 동생에게 이런 칼을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어쩌겠니. 네가 프리제타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하는 남자는 이 칼의 요력(妖 力)으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강하잖아.”

요도? 요력? 그러고 보니까 칼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네. 게다가 손잡이 끝에 이상한 눈 같은 장식이 붙은 것이 딱 일본 판타지 애 니의 단골 병기 스타일이야.

난 이걸 ‘경사 났네.’라고 표현해야할지 어떨지 망설여야했지만, 정글이는 벌써 징징 흥분하는 것 같았다.

“저기, 미리 말해두는데, 그런 칼 쓰면 더 상황이 안 좋아 질수도 있어. 실은 내 칼도 약간, 그러니까 보통 칼은 아니거든? 그런 거와 만나면 우리 애도 흥분해 버린다구.”

에고. 나 지금 만류하는 충고한 거야? 부추긴 거야?

결국 부추김 쪽이 되고 있었다. 침묵의 유령이 요도인지 뭔지를 받아들었던 것이다.

“이봐. 오해는 말아줘. 아까 너의 칼을 부러트린 건 내 칼의 이상한 힘이 작용해서 그런 건 아니었어.”

오해를 말아달라는 것이 무리였나? ‘이제 보니 내 칼을 정정당당하게 깬 것이 아니었군.’이라는 표정으로 새삼 불타오르고 있어, 저 유령 녀석. 「에효~! 울 주인님 또 쌈질 욕심에 자폭멘트 날리셨네. 암튼, 파이팅이요!」

-됐네, 이 요정아.

난 새삼 정글도를 고쳐 잡으며 어깨에 걸쳤다. 다시 살기등등한 모습이 된 침묵의 유령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겨울의 여왕은 슬 며시 놈의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새로운 요괴칼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한데 저 겨울의 여왕도 문제로군. 동생의 신형 뒤에 숨어 있다가 어떤 형태로든 기습을 노리려는 것 같은데… 어? 저거 설마?

파츠츠츳-

유령의 몸에서 무수한 총탄 같은 것이 튀어나와 내게 쏘아지고 있었다. 난 다급하게 신형을 뒤로 날리며 정글도를 회전시켜 도막을 형성해서 그것 들을 막아냈다.

핫! 자칫 위험할 뻔했네. 이 기습 패턴을 빨리 눈치 까서 다행이었어.

“뭐야, 겨울의 여왕! 동생 몸을 뚫고 얼음탄 같은걸 날려도 되는 거야? 너무 매정한 누님인 걸?”

내가 짐짓 모른 체하고 외치자, 겨울의 여왕은 동생의 뒤에 숨기고 있던 몸을 다시 드러내며 쓴웃음을 흘렸다.

“이미 알고 있었군요. 우리 남매에게 이런 공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겨울의 여왕은 태연했고, 그녀의 얼음탄 수십 발에 꿰뚫렸던(?) 침묵의 유령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미리 알고 있었다기보다, 방금 깨달은 거야.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데 지금까지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심리적 맹점? 그런 말이 맞나? 하여간 유령동생에게 어떤 장벽도 통과할 수 있는 진짜 유령같은 능력이 있다면, 그 몸을 다른 물체가 통과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걸 깨닫고 저의 기습에 재빨리 대처한건 칭찬해 주겠어요. 하지만 이제 알았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걸요?”

“그건… 그렇겠네. 네가 동생 걱정 없이 아무 때나 어느 각도에서든 공격을 해올 수 있다는 조건은 변함없으니, 말이야. 아, 게다가 나에게는 더 큰 문제가 또 있을지도 모르겠군.”

난 짐짓, 그러나 진심도 많이 담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침묵의 유령. 너, 실은 내 칼도 통과시킬 수 있는 거지?”

침묵의 유령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당신의 칼에 내 능력을 걸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정당한 승부를 위해 목숨을 거는 거 솔직히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조금 전 당신 칼에 목이 베어졌을 때, 아니 베였다고 인식했을 때, 순간적으로 느꼈던⋯, 죽음의 공포 때문에 말입니다.”

난 녀석의 솔직한 고백에 약간 놀랐고, 겨울의 여왕은 어째 다른 이유로 놀라는 것 같았다.

“진유준씨. 당신 정말 특이한 사람이군요. 내 동생에게 이렇게 많은 말을 하게 만들다니.”

내참. 별걸 다가지고 특이한 사람이라네. 지들이 더 특이하면서.

“어쨌든 말이야. 그쪽 공격은 제한이 없고 내 칼은 침묵의 유령을 통과해 버려. 여러모로 나한테 불리한 조건뿐이잖아! 안 그래도 2대1은 불공평했 는데 말야!”

나의 이유 있는 항변에 겨울의 여왕은 비웃음부터 앞세우며 입을 열었다.

“훗.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 우리 쪽에서 뭔가 양보해야 한다는 건가요?”

허허~ 이거야 원. 전부터 이 남매가 보기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하네. 뭔가 시간을 끄느라 계속 말을 걸고 있음 을 눈치 채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이젠 내가 뭔가 요구하면 들어주기까지 할 기미까지 보이네. 이게 소위 엘리트로만 키워진 아그들의 한계인 건 가?

“아니, 뭐. 그쪽에 뭔가 요구할건 아니고, 그냥 우리도 쪽수를 좀 늘리겠다는 거야”

이제야 안색이 굳어지는 겨울의 여왕.

-아쿠아린 형제! 니들도 참전이다! 상대는 프리메이슨 최고의 엘리트, 겨울의 여왕!

「“와! 드디어!”」

기쁨의 전자 전음과 함께 겨울의 여왕 뒤쪽의 바다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솟구쳤다. 언제 봐도 장관인 거대 물기둥 두 개 위로 푸른 바닷빛 전신 슈트를 입은 미소년들이 서있는 모습은 내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게 했다.

뉘집 아그들인지 자알~ 생겼기도 하네. 후훗. 솔직히 저 녀석들, 각성 전에는 어류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서 조금 괴기스럽기까지 했는데, 각성이 되어서 본래 인간 얼굴이 되니까 그야말로 동화 속 바다의 왕자님들일세.

난 내가 키운(?) 아그들 감상하느라 웃고 있었지만, 겨울의 여왕 안색은 그렇지 못했다. CR들을 하찮은 실패작들로 여기는 그녀였지만 지금 등장 한 아쿠아린 형제는 결코 실패작 따위가 아님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쿠아린 형제. 상대는 아무리 어쩌니 해도 여자분이다. 살살해라.”

“옛 썰! 왕대장!”

으음. 저 왕대장 호칭만은 어떻게 좀 해야 하는데……………

“누나. 여긴 나한테 맡기고 누나는 저 애들 상대해 줘.”

겨울의 여왕이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으니까, 침묵의 유령이 침착성을 되찾는 것 같군.

동생의 말에 힘을 얻은 듯, 겨울의 여왕은 잠시 놓치고 있던 특유의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가 서서히 눈보라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근데 주인님. 겨울의 여왕을 막기로 한 건 아쿠아린 형제가 아니었잖아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거죠? 전 물론 신인 꽃돌이들을 봐서 좋긴 하지만요.」

-그냥. 아쿠아린 형제한테 우리 운송일만 시키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또… 음. 일단 좀 보자.

아쿠아린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십 여 미터정도 높이의 물기둥에 각각 앉거나 서 있었고, 겨울의 여왕도 눈보라를 이용해서 그 정도 높이까지는 어 렵지 않게 떠올라 있었다. 아쿠아린 형제들은 쌍둥이라서 얼굴이 똑같았고, 머리가 여자애처럼 길고 지금 팔짱을 낀 자세로 버티고 서있는 녀석이 형이라고 했다.

“우린 컨피던셜 레이더스의 아쿠아린 형제! 난 형인 ‘퍼클’, 동생은 ‘세클’이야. 우리 특기는 보시다시피 물과 많이 친한 거.”

퍼클? 세클? 쟤네들 이름이 이렇게 독특했었나? 하여간 퍼클 녀석, 태도는 다소 시건방져 보여도 나름 예의바르게 자기들 소개를 하는군. 하지만 겨울의 여왕은 비죽이 비웃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흥. 수많은 연구소들에서 태어난 셀 수도 없이 많은 실패작들 중에서 그나마 조금 나은 녀석들인 모양이네.”

퍼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고, 장난꾸러기 분위기로 물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세클은 좀 더 노골적으로 겨울의 여왕을 노려보기 시작했 다.

“세이렌 자매들만큼 쌀쌀맞네.”

퍼클에 이어 세클도 입을 열었다.

 “세이렌 자매들만큼 요사스러워.” 

이윽고 두 녀석은 동시에 외쳤다.

“그럼, 혼내줘야지!”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