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7화 : 평화 속에 찾아온 마물
7 평화 속에 찾아온 마물
“그러니까… 소령아.”
“예, 형부.”
“어, 야아~.”
“우헤헤~ 유준 오빠 또 쑥스러워 한다!”
이젠 소령이에게까지 놀림감이 된 신세지만, 뭐… 나쁠 거야 없지.
“인마. 장난치지 말고 대답이나 해. 정말 원판이 너의 왕자님이 아니라 이거지?”
내가 다시 한 번 묻자, 이번에는 소령이 녀석이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며 쑥스러워 한다.
원판이 이사를 온 후에 소미령 이들도 당연히 지들 방으로 복귀하면서 원판과 만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건지, 원판을 보고도 미 령이는 물론이고 소령이도 별 동요를 보이지 않았었다.
…소령이는 전부터 자신의 노트복에 나의 초특급반칙성호화기능미래로봇 ‘몽몽’ 과 같은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었지. 게다가 그 이름은 소령이가 자신의 왕자님과 만날 증표’ 라고 했단 말야?
난 원판 녀석이 어린 소령이에게 접근해서 그 이름을 가르쳐 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 당시 ‘몽몽’이란 이름을 알고 있으며 대교 자매들 중 한 명에게 접근할 만한 녀석이 원판밖에 없을 것 같아서였어. 그런데 아니라 이거지?
“호음~ 그렇다면 …………….”
내가 돌아보자 소령이 옆에 앉아 있는 대교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대교도 모른다면… 대교가 소령이와 미령이를 은사의 간부에게 맡기고 주가혜와 육체에 봉인(기억 봉인이 곧 영혼 봉인이나 마찬가지) 된 다음에 예의 왕자님을 만난 모양이지…….? 으음. 시실 이건 소령이가 그냥 얘기해 주면 간단한 문젠데, 요 녀석이 이것만은 대교에게도 숨긴다니 문제로군. 나는 다시 미령이에게도 시선을 던져 보았지만, 미령이도 고개를 저었다.
“대체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하죠? 소령 언니의 왕자님이 누구라는 것이 유준 오빠에게 중요한가요?”
이해할 수 없다는 미령이의 반응도 당연한 거지만… 음. 이걸 말해야 하나?
나는 아무래도 당사자인 소령이가 신경 쓰여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계속 생각해봤는데, 물론 우연일 수도 있기는 해. 몽몽이라는 이름은 사실 강아지를 그리 부르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야. 하지만… 히필 기계인 노 트북에 그런 이름이라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말야.”
“훗~! 그런 말을 하는 유준 오빠야말로 그… 음. 몽몽에게 몽몽이란 이름을 붙였잖아요.”
미령이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왠지 난 그냥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말야. 내가 생각하는 건…….”
뽀로롱~ 소리와 함께 요몽이 모습을 드러냈고, 방안의 모두에게 보이는 모드였다.
「우리 주인님은요! 직관력이라고, 뭐든 알아맞추는 사기능력이 있거든요?」
“아! 요몽이다! 요몽이 나왔다!”
대뜸 기뻐하는 소령이. 그리고 다른 녀석들도 모두 요몽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처음으로 이 녀석들에게도 몽몽의 존재를 알려주고 그 증거를 보여주었는데 그게 잘한 짓인지 어쩐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렇게 대교와 항상 붙어다니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녀석들에게 계속 숨기는 것도 미안한 노릇이긴 했어.
물론 나의 수하들도 믿을 수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천주인 나에 관한 모든 사항이 오픈 되는 것보다 계속 ‘미지의 신비함’ 이 란 부분이 남아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서로에게 말이다.
「후음~ 아마도 주인님의 두뇌 어딘가에서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걸 거예요. 그러니까 주인님 말씀을 한 번 믿어 보시라구요오!」
대교를 제외한 자매들은 요동의 말에 귀기울이기보다, 녀석의 모습 자체가 귀여워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난 요몽의 응원에 힘입어 다시 모두에게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소령이에게 몽몽이란 이름을 가르쳐 주었거나, 여하간의 이유로 ‘몽몽이란 이름의 기계’에 집착할 만한 인물은…….”
어느 사이 모두의 시선이 다시 내게 모여들고 있었다.
“대교. 넌 나와 헤어진 후, 그 친구에게 ‘몽몽’의 존재를 알려 주었었다고 했지?”
“예. 그분만은 믿을 수 있고, 또 그분의 도움 없이는 제 뜻을 이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그 친구로서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이었을 거야. 그러니 나에 관한 모든 수수께끼의 근원인 몽몽의 정체를 알게 되자 굉장히 놀라는 한편, 몽몽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 일종의 ‘한’이 될 수도 있었겠지. 그・・・ 정보 수집이 직업이자 가장 좋아하는 취미 였던 천이단 체질, 내 친구 천우신에게는 말이야.”
음? 소령이의 반응이 뭔가 심상치가 않은데……..?
다른 자매들은 ‘설마’, ‘정말?’, ‘과연’… 대충 그런 정도의 대단치 않은 감정을 섞어서 느끼고 있을 뿐인 것 같았다. 그러나 소령이만은 그 커다란 눈을 더욱 더 크게 만들며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채 격한 동요를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소령・・・아?”
대교가 먼저 알아채고 가까이 다가앉으며 어깨를 안아주자 소령이는 그제야 겨우 진정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얼마간은 더 뭐 라 입을 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말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를 유지하기까지 했다.
소령이로서는 정말이지 보기 드문 반응인데… 이걸 어떻게 해석한다지? 우선적으로, 그 왕자님이란 사람에게 소령이가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 다는 건 당연한 건데… 그가 바로 나와 대교처럼 천 년 전부터 이어진 인연일지 모른다고 하면. 그렇다면 당근 ‘감격’, ‘감동’ 뭐 그런 감정이 솟구 치겠지………?
근데 소령이가 지금 보이고 있는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그런 감정들과는 조금 다른… 좀 더 밝지 못하면서도 격렬한 느낌이다. 난처함? 약해. 죄 책감? 애매해 절망? …응? 이건 너무 강한 거 같기는 한데 그래도 왠지 이게 가장 가까운 것 같은 걸? 뭐시여! 대체 왜?
나는 나의 분석 자체를 믿어야 할지 어떨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현 상황에서 소령이가 저런 반응을 보일 이유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 다.
“맙소사-!언니! 설마, ‘독고민성’ 오빠가 아니었던 거야? 설마! 설마, 언니의 왕자님은 아직도……”
미령이가 뒤늦게 뭔가 깨닫고 소령이 못지않게 흥분하고 있었다.
“안 돼!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미령아!”
격하게 소리친 소령이가 대교의 손마저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가 버렸다.
“소아!”
당연히 대교가 따라 쫓아나가고, 소교의 눈치를 보던 금동이까지 소교의 허락과 동시에 뒤를 따랐다.
“하아아~.”
미령이만 남아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난 내가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에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얼마간을 미령이 눈치만 봐야 했다. “미령아.”
소교였다.
“이미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게 된 것 같아.”
소교의 침착한 말에 미령이도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민성이라고, 저와 소령 언니의 양부(養父)와 먼 친척뻘 남자가 있어요. 당연히 GM의 간부이며 이번 암천주의 후보일 정도로 뛰어난 사람 이기도 해요. 그 독고민성은 저희가 양부에게 거두어질 당시에 양부와 함께 만났었고, 저희들과 나이 차가 그리 크지도 않고… 그래서 지금까지 도 저희들과 친하게 지내오고 있어요. 전 당연히 그 사람이 언니의 왕자님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미령이는 말끝을 흐리며 멈추더니 또 한숨을 몰아낸다.
“하아~ 그런데 언니에게는 독고민성 오빠보다 더 끔찍하게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이 있었죠. 하지만 애초에 이성으로서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 었기에 오래 전에 잊고 포기한 줄… 알았어요. 저도 바로 조금 전까지 말이에요.”
아…………! 그런 거였구나! 처음부터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아예 포기했지만 그래도 잊지는 못하고 있던 상대가 ‘운명의 동반자’ 라면 오히려 더 고통스런 일이 될 수밖에 없겠지…………! 그럼 난 지금 큰 실수를 한 거…………? 과거의 친구를 찾고 싶은 욕심에 현재의 정상적인 상황을 뒤흔든⋯ 에구 구, 어째 미령이도 내게 지긋이 원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걸? 으… 에라 모르겠다! 내친김이다!
“그 사람 혹시…..”
“저희들 양부, 아버지의 친아들이에요.”
역시나.
“그 사람 이름은?”
“당연히 저희와 같은 ‘천’ 씨죠. ‘천신조’라고 해요.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천년 전의 그분과 비슷한 느낌의 이름이네요.”
으음. 소미령이들 양부의 이름이 ‘천진명’으로서 천씨라는 건 이미 몽몽의 조사로 알고 있었지. 하지만 천우신의 천가장과는 전혀 다른 파였다. 다 른 계열까지 따지자면 더더구나 중국에 천 씨가 어디 한둘인가? GM 소속 인간들 중에도 천씨는 수두룩했기에 그걸로 의심해 본 적은 없었어. 더구 4……
“미국 명은 ‘아놀드’, 킹 메이커(King Maker) 중에서도 유독 뛰어난 수완가라 하여 마스터(Master) 칭호를 더 붙여 부르고… 보통 ‘더블엠 천’이 라 불린다고 해요.”
“…그보다 미령아. 여기 이 몽몽의 조사로는 너희들 양부에게 친자식이 없다고 나왔었거든? 물론 너희 GM에 대한 예의랄까, 신 연옥도의 깊숙한 자료까지 빼낸 적은 없지만………….”
“천 오빠는… 몇 년 전에 아버지와 우리 곁을 떠나 혼자 미국으로 가버렸어요. 화가 난 아버지는 의절을 선언하고 GM의 모든 공식 데이터에서 천 오빠가 자신의 아들이란 사실을 지워버렸지요. 그만큼 분노가 컸던 거예요.”
미국으로 가서 혼자 자수성가로 ‘킹 메이커’ 즉,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의… 뭐더라? 아, 로비스트………? 아니면.. 음. 하여간, 상당히 대단한 위치의 인물이 되었다는 거로군. 그건 일단 지금은 젖혀두고, 여기서 포인트는……
“미령아. 그 친구가 그렇게 떠나버린 건 혹시………….”
“언니 때문에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천 오빠는 그렇게 떠난 후로 우리들에게조차 연락 한 번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만약 천 오빠가 그런 의도로 아버지를 떠난 거라 해도 그 뜻을 이루기는 어려울 거예요. 아버지는 고집불통이라 절대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테고, 소령 언니도 결코 아버 지를 배신하지 못해요.”
으으으음. 여하간 일단은 그 친구가 천우신의 환생자라고 가정해 보자. 그럼 일찌감치 소령이에게서 뭔가를 느끼고… ‘남매’의 인연을 벗어나기 위 해 스스로 친부와의 의절을 선택했다…는 추정도 가능해지기는 한다. 분명 그 친구라면 소령이를 얻기 위해 그런 짓까지 할 만하기도 한데… 여기 서 또 커다란 문제가 있군.
・젠장. 이런 모든 가정이 ‘나의 애매난감한 직관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나 이거 혹시 뺄 생각으로 괜히 소령이만 괴롭히게 된 거 아냐?
「…코드명 ‘더블엠 천’에 관한 모든 데이터를 수집하여 곧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그려. 부탁해, 몽몽.”
하긴. 다른 방법 없지. 어디 있나 알아내서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얼마 후.
나는 혼자 옥상에 올라 착잡한 마음을 달래려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그러나 몇 모금 빨지도 않고 불을 꺼버려야 했다.
…쯧. 간만에 한 번 펴보는 건데 맛도 더럽게 없네. 그 동안 체질 자체가 바뀌어 버린 건가…………? 에효,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데………
소령이는 결국 대교에게 체포(?)되어 집으로 돌아왔고, 대교를 비롯한 자매들의 위로와 금동옹의 나름 격려를 받고는 얼마 되지 않아 평소의 밝은 소령이로 돌아온 것 같았다.
겉으로는 그런데… 과연 속마음도 그런지는 알 수가 없지. 아예 포기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정말 ‘꿈속의 왕자님’으로써 동경의 대상으로만 여기 고 지내왔던 모양인데… 내가 그걸 들쑤셔버린 셈이니. 이거 참.
“뭘 하고 있는 거야?”
눈치 없는 조담놈이었다.
“전심전력으로 회복에 힘써도 부족한 상황이 아니었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상 아직은 할 일이 별로 없다. 물론 매일 꾸준히 운기조식을 하고는 있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되어서 몽몽의 미래 의학데이 터를 포함한 다각도 연구의 성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아까그 꼬맹이들 방에서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보군.”
“쓸데없이 내일에 참견하지 말고 네놈 수련이나 열심히 하는 게 어때?”
“흥. 기껏 걱정을 해줘도 화를 내는군.”
내 걱정…………? 지난 번 비행기에서는 ‘내가 왜 네놈을 걱정하겠나!’ 라며 펄펄 뛰던 놈이 뭐가 어째?
“크흠. 음.. 무슨 일인지 몰라도, 기분 전환하고 싶으면… 흠. 오늘 밤 나의 ‘귀신 사냥’에 따라와도 좋아.”
귀신・・・ 사냥?
물론, 귀신 어쩌고 하는 일에 내가 혹해서 참가할 리가 없었다. 오늘 비록 소령이와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근래 들어 그 어느 때보다 평화 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요즘이다. 굳이 먼저 나서서 이상한 일에 뛰어들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젠장. 결국 따라오고 말았네.
나는 앞장을 선 조담놈이 경공을 전개하여 어둠 속의 담장을 훌쩍 뛰어 넘는 것을 보았다.
조담놈 저 자식………! 잘도 소령이를 꼬드겼겠다?
내가 거절하자 조담놈은 은근 슬쩍 소령이에게 같은 얘기를 홀렸던 것이다. 호기심 많은 소령이가 반색을 하고 따라나선다고 하니 세트 메뉴(?)인 미령이도 어쩔 수 없이 같이 간다 하고… 나도 두고 볼 수 없게 되었고, 당근 대교도 나를 따랐다.
여기에 혼자 남고 싶어 하지 않는 소교까지 합세. 결국 원판만 뺀 우리 원룸 멤버 전원이 소위 ‘귀신 사냥’에 동원 된 셈이었다. 현재 시간은 자정을 앞둔 밤 11시 40분경.
“여긴 아무래도… 학교인 것 같네요.”
담장 너머 어둠을 뚫고 건물들의 분위기를 살핀 대교의 말이었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여긴 집에서 보통 사람 걸음으로 2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에 있는 ‘서경 중학교’였다.
“학교 괴담이라고 해서 보통 이런 곳에 무서운 얘기들이 많이 퍼지곤 하지.”
“그건, 저희 중국 학교에서도 그래요.”
현역 학생인 소교의 맞장구였다.
“맞아요. 우린 실제 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임무 때문에 얼마간 지낸 일은 있거든요.”
어린 정보요원 미령이의 호응.
“소령인 귀신 얘기 좋아. 재밌어.”
…그나마, 소령이가 이렇게 신나(?)하니 다행이군.
_뭐 하는 거야? 빨리 들어오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고!
조담놈의 전음이다. 빌어먹을 놈.
“대교. 전음 좀 부탁해.”
-너! 오늘은 봐 주겠지만, 또 이런 식으로 애들 끌어들이면 가만 안 둬! …라고 하시는군요.
대교는 대충 이런 식으로 내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아, 알았으니까 빨리 들어오기나 해.
응? 놈의 전음에 아주 약간이나마 ‘떨림’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이것 봐라?
막강 대교는 양손으로 각각 나와 소교의 손을 잡고 공공보법을 펼쳐 순식간에 담장을 넘었고, 소령이와 미령이, 금동이는 자력으로 우리 뒤를 따랐 다.
“잠깐.”
나는 앞장서서 문제의 학교 건물로 들어가려는 조담놈을 블러 세웠다.
“얼결에 따라와서 자세한 얘기는 하나도 못 들었어. 대체 무슨 일인 거야?”
“아, 그랬던가?”
조담놈은 새삼 힐끗 어두운 학교 건물들을 살핀 다음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본래 이 학교에는 옛날부터 무서운 전설이 많았다고 하더군. 밤마다 아무도 없는 음악실의 피아노가 혼자 연주 된 적도 있었고, 미술실에 걸려 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밤새 춤을 추고 논 학생이 있었는데 아침에 보니 거울이 없었다던가? 게다가 사람들이 헤아릴 때마다 매번 개수가 바 뀌는 계단…………! 음. 그 계단을 혼자 올라가면서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그 얘기는 좀 믿기가 어렵더군. 그런데 또 최근에는………….”
나는 조담놈이 너무나 진지하게 늘어놓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가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야. 너 혹시, 라이벌인 친구에게 옥상에서 떠밀려 추락사한 여학생이 떨어질 때의 상황 그대로, 그러니까 거꾸로 서서 머리를 바닥에 콩콩 찍어가 며 친구를 찾아 교실을 뒤지고 다닌다는 그런 얘기는 아냐?”
“아! 콩콩귀신! 오리지널 너도 아는구나! 으음. 역시 유명한 전설이었군.”
더욱 심각한 표정이 되어 본관 건물을 노려보기 시작한 조담 놈 뒤에서 나는 포옥~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야, 인마! 여긴 남녀 공학이 아냐!”
“응? 그게 무슨…….”
“뭔 소린지 모르겠어? 네가 들은 건 이 학교의 전설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국방방곡곡 모든 학교에 다 몇 개씩은 있는 그냥 심심풀이 괴담이란 말 야! 심지어 일본, 중국의 학교에도 비슷한 얘기들이 있을걸?”
내 말에 자매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그럴 리가? 그 아이들이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데?”
“그 아이들……? 네가 공원에서 삥 뜯기고 있는 거 구해줬던 애들?”
“어, 맞아. 착한 애들이라 내게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어.” 쯧. 그 녀석들 언제 한 번 만나서 주의를 좀 줘야겠군.
“…그게, 그걸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다만 그건………….”
응? 뭐야?
「주인님!」
몽몽의 경고. 이어 조담놈과 대교가 거의 동시에 흠칫 긴장하더니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 역시… 비록 내공을 잃은 몸이기는 했 지만, 분명 그 방향으로부터 뭔가 수상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사사삭ᅳ
우린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화단과 담장사이의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뭐…야, 저건?
교문 쪽이었다. 담장을 넘어 온 우리의 행동이 허무하게도, 누군가가 교문을 밀어 열고 운동장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몽몽이 즉시 확대하고 어둠 까지 걷어 보여주는 영상을 보니 요즘의 개량 한복도 아닌, 진짜 고풍스런 전통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저 얼굴은 뭐야? 무슨 남자가 저렇게 새하얀 얼굴에 시뻘건 입술을 하고… 윽. 그러고 보니 완전 ‘저승사자’ 삘이네.
한가지, 머리에 검은 갓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정말 보면 볼수록 저승사자와 같은 용모와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찜찜해져서 조담놈을 돌아 보니, 놈은 오히려 기세등등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저없이 ‘저승사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훗~! 분명 ‘살아 있는 인간’ 이란 걸 감지했다 이거지?
“대교. 네가 영혼 상태로 저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저 녀석 반응이 어땠지?”
“음… 그냥 놀라 주저 앉아서 움직이지 못했었던 것 같아요.”
역시 그랬군. 저 자식… 의외로 겁이 많아. 이런 오컬트 계통의 일에 대해서 말야. 얼결에 친해진 학생들 앞에서는 학교의 귀신들 따위 자신이 다 없애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겠지만, 막상 혼자 오려니까 무서워서 우릴 끌어들인 거지.
나는 왠지 조담놈이 코딱지만큼은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조담놈은 소리 없이 빠르게 예의 저승사자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지만 저승사자는 아직 놈의 등장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 손에 뭔가, 칼이나 막대기 정도로 보이는 길죽한 걸 천에 말아 들고 있었는데, 왠지 아직 움직이지 않고 본관 건물 쪽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도 가자.”
나와 자매들은 일제히 일어나 우르르- 그러나 나름 조심하면서 운동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이봐!”
조담놈 놈이 기선을(응?) 제압하려는 듯 내력을 담아 저승사자를 부르자, 저승사자가 흠칫 놀라 돌아보고 있었다.
“웬 놈인데 이 시간에 애들 학교에 침투한 거냐?”
정작 담을 타 넘은 조담놈이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예의 저승사자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는 잠깐의 놀란 기색을 빠르게 지우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허허~ 댁이야말로 학교의 관계자는 아닌 듯한데, 이런 시간에 어인 일이시오.”
에? 웬 고풍스런 말투? 그, 뭐… 외형 스타일에 나름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닥치고 네놈부터 대답해! 네놈이 이 학교의 귀신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냐?”
“허어ᅳ 막무가내의 무례한 청년이로군. …응?”
저승사자는 비로소 나와 자매들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에 조담놈이 칼을 뽑고 있었다.
“야! 그만둬!”
내 외침 때문에 조담놈이 멈칫했고, 그 사이에 이번에는 저승사자가 손에 든 것에 감겨 있던 천을 풀어 버렸다. 예상대로 긴・・・ 목검쯤 되는 것 같았 다.
「장미목 장미과의 낙엽성 교목. 즉, 복숭아나무로 제작된 목검입니다.」
응? 복숭아나무 목검?
내가 언젠가 들어본 복숭아나무 가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며 다가섰을 때에는 이미 조담놈과 저승사자, 두 사람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 이 팽배해 있었다.
“그대들의 정체를 밝히시오! 그대들이야말로 이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원흉인 것이오?”
에고. 이 저승사자 같은 아저씨까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학교에 진짜 뭔가 문제가 있긴 한 모양이네.
“흥~ 헛소리 말고 네놈 정체나 밝히시지!”
조담놈이 생사금마도결을 전개하려는 순간! “대교.”
사라락- 조용히 우아하게 순간이동(?)을 해버린 대교가 그들 사이에 섰다.
“어? 왜 또 방해하는 거야?”
조담놈은 인상을 긁었지만 저승사자는 오오-하는 감탄성을 울리고 있었다.
“마치 밤의 유령과 같으면서도 명주 천처럼 아름다운 신법(身法)! 대체 처자는 누구시오!”
“전・・・ 저기 계신 분의 안사람이 될 예정인 대교라고 합니다.”
에고, 대교야. 첨 보는 사람에게 뭔 인사말이 그래?
“어… 그, 그러시오?”
역시나 조금 황당해하는 저승사자. 대교 또한 지가 말해 놓고도 감당을 못해 잔뜩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 뒤에 있던 소령이와 미 령이의 우우~하는 야유가 들려왔고, 조담놈도 어이없어하면서 칼끌을 내리고 있었다.
ᅳ아아- 창피해요. 하, 하지만 이 사람을 가까이 대하니 웨, 왠지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단순히 거짓말을 안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얘기인 것도 같지 만… 암튼. 저 남자는 대교조차 영향을 받을 정도로… 뭔가 특이한 능력이 있다는 얘 긴가?
“아무래도 거기 계신 분이 수장이신 것 같구려. 이 몸은 남장군(南將軍), 남장군이라 하오이다.”
남장군・・・・・・? 아무래도 본명은 아닌 것 같지? 어쨌든, 나도 일단은 포권으로 인사.
「주인님. 코드명 남장군. 해당 인물의 육체 스캔 결과, 현재 두 개의 영체 (靈體)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짧은 시간에 분석이 어려울 정 도로 강력한 에너지를 방사하고 있습니다.」
엥? 그럼 저 양반 혹시…………
“허헛~ 흔히들 무당이라 부르는 박수올시다.”
과연, 박수무당. 남자무당이었구나. 신내림. 즉, 다른 강력한 영체를 받아들인 모양인…………!
“그, 뭐냐… 복숭아나무 가지, 그 중에서도 동쪽으로 난 가지는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있다면서요?”
남장군의 손에 들린 목검을 보며 슬쩍 아는 척을 해 보았다.
“오~ 잘 아시는구려.”
그야 요즘 세대나 잘 모르지, 시골 할머니들쯤 되면 다들 아시는 거라서 나 역시 우리 할머니께 들은 얘기였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밤에 복숭아나 무 목장(작은아버지 댁)에 가는 걸 무서워하니까, 안심하라고 들려주셨던 것이다.
“…남장군. 당신 혹시 세계정화재단사람?”
그냥 한 번 물어 본 건데…………
“흐음. 어찌 그리 잘 아시오.”
맞군. 쫌 관계있다 싶으면 꼭 조직원이 등장하는 걸 보니, 그 노무 재단인지 뭔지는 이쪽 세계를 꽉 잡고 있는 모양이다.
“본인은 당신과 초면일 뿐더러, 아직 신분조차 짐작도 못하겠소.”
비로소 약간 경계심을 띠기 시작하는 남장군.
“그야, 우리 지하무림도 그쪽 재단에 일을 의뢰한 적이 있고…………”
“지하무림?”
남장군은 잠깐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 같더니 바로 아-하는 탄성을 울렸다.
“실례했소! 중국에 그런 이름의 비밀조직이 있다는 건 일찍이 들은바 있소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댁네 마신일 씨하고 옥환 씨. 두 사람과도 만났었죠.”
남장군의 입에서 연이어 탄성이 터진다.
“그랬었구려. 허허- 이거 재단과 보통 인연이 아닌 분인 모양이오. 단시간에 그 두 사람을 만나셨다니 말이오.”
역시 그 두 상반된 이미지의 괴물 인간들은 같은 재단 조직 내에서도 상당히 잘 나가는 모양이군.
근데… 이 사람은 지부장에게 나에 대한 얘기를 듣기는커녕 우리 지하무림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갈지…………? 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래도 마신 일, 옥환급의 거물은 못되는 모양이네.
「주인님. 해당 인물 육체의 복합 영체 분포도, 즉 육체의 지배권 비율은 현재 거의 동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흐음. 그래서 말투가 저런 건가…………? 소위 조상신을 모시고 있는 상태?
“…헌데 중국에서 여기까지 어인 일로…………….”
“집이 여기예요.”
“응?”
“우리 동네라구요. 난 한국인인데, 어쩌다 보니 중국 조직을 거느리게 되어서.. 뭐, 세계화 시대니깐.”
“허헛~ 그랬었구려. 그리고 듣고 보니 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일행들뿐 아니라 지
하무림 전체의 수장인 모양이구려. 이거 실례가 많았소이다.”
남장군은 새삼 정중하게 상체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마신일은 분명 ‘지부장 왈, 진유준 당신은 우리와 별 인연 없음.’이라고 했었는데, 그 인간이 거짓말을 했나? 이건 상당히 인연이 많은 거 아냐?
쬐금 지난 후,
“재단에 신고가 들어온 건 오늘 오후 5시경이었다고 합니다. 신고자가 회원이라고는 해도, 전에 허위 신고를 한 적이 있는 학생이라 접수 후에 저 에게 업무가 배정되기까지 약간의 지체가 있었습니다.”
말투를 보니 복합 영체의 육체 지배권 비율…………! 그게 조상신에서 본인으로 거의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남장군은 본관 건물, 아니 학교 전체를 다시 한 번 쓰윽-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신고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렇듯 몹쓸 기운이 팽배해 있으니 말입니다.” 남장군은 문득 나와 일행들 모두를 살펴보더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 된다.
“다들 굉장한 기운을 타고난 분들이고 특히 마군황과 부인, 두 분은 놀라운 영력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영격(靈格)이 이미 인간 이상인 것으로 생각될 정도인데………….”
대교는 ‘부인’이란 호칭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있었지만, 난 조금 다른 이유… ‘인간 이상’이란 표현이 ‘인간이 아닌 악마’ 라는 소리로 들려서 씁 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도 정말 이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사악한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 뭐・・・ 아주 안 느껴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원체 이런 계통의 일을 안 좋아해서,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할까요?”
“흐음. 그렇군요. 거부감을 가지고 스스로 영안을 봉인하고 있으면 당연히 아, 그리고 또한…….”
남장군은 문득 피식 옷었다.
“이렇게 강력한 기운을 지니고 있으니 웬만한 사기(邪氣)는 애초에 감히 범접도 못하겠군요.”
어…………? 그랬던 건가?
이번 천지파멸식 발동 때, 난 머리의 차크라까지 완전 오픈, 100% 활성화가 되었었다. 끝나고 나서 다시 닫혀 버렸다고는 해도 왠지 전보다 영안 이 더 밝아지고 영력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예전보다 더 잡다한 영체들이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던 건 평소의 자연스런 영력 방사가 강해 진데다 나 못지않은 대 교까지 함께 있어서 웬만한 것들은 아예 접근도 못했던 거라는 얘기로군.
“쳇!”
음? 조담놈?
“계집애처럼 조잘조잘, 무슨 말들이 이렇게 많아? 뭔가 있는 게 확실하면 당장 들어가서 없애버리면 끝나는 일 아냐!”
“…그럼 너 먼저 후딱 들어가서 그러던가.”
“뭐?”
흐흐ᅳ 조담놈 녀석 망설인다. 망설이고 있어.
“그… 오늘은 다 함께 왔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래도 오리지널 네가 아직은 모두의 보스이고……….”
“내가 앞장서 달라고? 그러지 뭐.”
자존심 상함과 안도의 표정이 교차하는 조담놈을 지나쳐, 나는 대교와 함께 선두에 서서 건물의 현관으로 향했다. 사실 좀 더 놀려먹을까도 했지 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
집에서 걱정하실 테니 귀신이든 뭐든 빨리 정리하고 가야겠지…………? 지금의 난 내공보다 영력을 쓰는 싸움 쪽에 더 강한 상태이니 직접 선두에 나 서도 상관 없… 응? 어라랏?
“으왓! 나, 나왔다!”
평소의 녀석 답지 않게 약간 호들갑스런 조담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놈이 놀란 것이 약간 이해가 가기는 했다. 가까워진 건물의 유리로 된 현관문 너머로 음산한 무언가가 서 있었던 것이다. 분명 사람의 형체였고 보일 듯 말 듯 흔들리는 몸체 주위로 마치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떠올라 살랑거리는 머리카락들이 지극히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둘…………..? 이런 식으로 현관에서 귀신이 등장하는 학교괴담도 있었던가? “으음. 굉장한 귀기입니다. 모두 조심하십시오.”
남장군이 모두에게 경고하며 예의 귀신을 치는 복숭아나무 목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제에 기랄!”
조담놈도 이를 악물고 날 추월하여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다리가 약간 후들거리는 것이 내게 보일 정도로 겁을 먹었으면서 이를 악물고 공포를 찍 어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린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 이거지…………..? 제법 기특하군.
나는 큰맘먹고 놈을 거들어 주기로 결정하고 정글도 손잡이를 잡았다. 대교를 제외한 자매들이 뒤에서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소심한 ‘화이팅’ 소 리를 보내왔다.
“월광절화결..”
원광절화결 특유의 달빛이 조담놈의 칼에 맺히기 시작했다.
저 자식 또 오버한다! 이런 곳에서 월광절화결을 쓰면 귀신은 둘째치고, 현관 전체가 아작이 날 텐데…
끼이_?
금동이였다. 여전히 소교의 품안에 있는 금동이의 의아해하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나 또한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교!”
나는 대교를 부르며 그녀의 손을 잡았고, 우린 동시에 공공보법을 발동! 눈부신 스피드로 현관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둬!”
나의 외침은 한 박자 늦었다.
“반혼참(返魂新)!”
이름과 달리 오컬트 계열과는 상관없는 초식. 그러나 그 어떤 존재라도 무사할 리 없는 극강의 초식이 이미 펼쳐진 후였다. 그와 동시에 남장군의 목검에서도 무언가 눈부신 섬광이 번득 뿜어져 나왔다.
“대교! 조심!”
빠증! 파츠춧-!
거의 동시에 요란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우리 눈앞의 공간이 눈부신 달빛과 그 못지않게 신비로운 또 하나의 섬광으로 가득했다.
츠츠츠츠츳~
표현키 어려운 소리와 함께 빠르게 스러지는 빛의 커튼 너머에서 조담놈의 격렬한 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또! 또 왜 막는 거야!”
대교에 의해 공격이 막힌 건 겨우 두 번짼데 뭐 저리 난리인가 싶었지만, 조담놈으로서는 회심의 일격이었던데다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었기 때문에 더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짓이오!”
남장군도 조용하나 확실하게 자신의 영력 공격을 막은 내게 이유를 물었다.
“어, 그게. 이건 귀신이 아닌 것 같거든요?”
믿을 수 없다는 남장군의 표정이 어느덧 기막혀하는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우리 등 뒤의 현관문이 열리며 분명 살아 있는 인간, 원판과 놈의 비 서 란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야, 넌. 같이 오고 싶으면 말을 할 것이 왜 몰래 따라와서 말썽이냐, 말썽이? 넌 대체 내 말을 뭘로……”
내가 문득 말끝을 흐린 건, 원판이 나름대로 내 말을 따르려는 증거(?)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원판은 분명 길거리 좌판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어 샀음이 분명한, 후줄근하고 촌스러운 디자인의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머리도 빗질을 안 했는지 대충 흐트러져 흐르고… 그런 앞머리 아래의 두 눈과 얼굴의 3분의 1쯤을 두텁고 단순한 디자인의 뿔테 안경이 가리고 있었다.
이 녀석… 나름 신경 써서 ‘안 꾸민 건가? 게다가 혹시………………
“유준 형님 분부대로 사람들 눈에 뜨지 않을 늦은 시간에 산책을 나왔습니다만…뭔가 잘못된 모양이군요.”
젠장. 할 말 없게 만드네? 그치만.
“그래도, 야. 하필 왜 여기냐? 역시 우리가 여기 온다는 거 알고 온 거지?”
“그렇지 않습니다, 진유준님.”
란이었다.
“근방을 지나는 도중. 길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강아지 한 마리가 운동장을 배회하는 것을 발견하고 들어왔을 뿐입니다.” 흐음. 이 여자로서는 기분 꽤 좋았겠는걸? 원판과 데이트를 즐기다가 원판이 자신을 따라서 이런 곳까지 와주고…………….
“마스터께서는 작고 귀여운. 특히 강아지를 좋아하시지요.”
에? 뭐시라?
“란, 당신이 아니고… 원판이 강아지를 쫓아온 거였다고? 거원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를………….”
“훗! 역시 진유준님은 마스터께 너무 많은 편견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군요. 마스터는 이다지도 모든 면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분이거늘…………
원판을 바라보는, 저 이글거리는 시선은 변함이 없군. 특급 미녀의 저런 시선조차 담담하게 무시하고 표정 변화 없는 원판놈의 뻔뻔함도 여전하고 말이다. 여하간. 오늘 왜 이래? 이거 귀신 사냥하러 온 거 맞아?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되는건데?
“이럴수가! 분명 무시무시한 귀기였거늘…………!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체를 묻지도 않고 전력을 담은 공격을 아아- 저의 수양이 너무나 부족했 던 모양입니다!”
남장군은 거듭 고개를 저으며 자책하고 있었다. 원판의 극악 오러를 귀신의 기운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저기요. 본래 이 친구가 한 극악하거든요? 첨 만나는 더구나 남장군 씨처럼 민감한 사람은 착각할 만도 하죠.”
위로(?)를 해봤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인간을 공격했다는 자책감이 너무 큰지 남장군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들어가기 도 전에 특수공격대 한 명이 ‘나름 아군’에 의해 무력화 되어버린 것이다.
응? 조담놈… 저 녀석도 눈치가 심상치 않은데?
조담놈은 계속 나와 대교, 원판을 번갈아 가며 노려보고 있었는데, 결국 뿌드득 이를 갈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교가 약간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문 앞을 비켜주자 놈은 거칠게 유리문을 밀어 붙이며 혼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짜 빡 돌았나 보다. 이제 건물 안의 귀신들이 만약 있다면 걔들이 걱정인 걸? 건물 자체도 좀 걱정이고…………….
“제가 따라가 볼까요?”
“아냐. 대교. 잠시 그냥 놔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안으로부터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술실, 음악실… 3학년 2반 8반… 아, 2학년 교실로… 3반 5반……………」
자룡대주도 수습하려면 고생께나 하지 싶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조금 궁금해져서 눈을 감고 머리 쪽의 어딘가를 ‘연다’는 느 낌에 잠시 집중해 보았다.
차크라의 일시 활성화………? 모르겠다. 그냥 좀… 머리가 몽롱해지다가 다시 개운해지는 느낌 정도……?
눈을 떠보았다. 주변의 풍경이나 사람들의 모습에선 별다른 걸 느끼지 못하겠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건물 쪽의 상황… 창문이며 벽을 통과해 서(?) 뛰쳐나오는 영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이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건 거꾸로 선 여학생 귀신이었다.
“…콩콩귀신? 저거 진짜 있었던 거야? 에고, 베였다. 조담놈 녀석, 달아나는 애한테까지 도강(剛)을 날려버리네? 어. 화장실 귀신? 저건 반쪽이 나버리는구먼. 실험실 인체 모형에 얼씨구~ 홍콩할매 귀신하고 입 찢어진 여자가 왜 학교에 있었던 거야? 저건 또……”
내가 해주는 중계방송을(?) 대교자매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나의 중계가 얼마쯤 더 지속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본론이다’ 라는 느낌이 들었다. 건물 안으로부터 설사 내가 신경써서 영안을 살리지 않았다고 해도 보였을 것 같은 빛과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촹!
4층의 유리창 하나가 깨지며 뭔가가 뛰쳐나왔다. 그것은 신비로운 광채에 쌓인 한 마리…………….
개? 아니 늑대? 설마, 라후의 혈족? 아, 아닌가?
형체도 어딘가 달랐지만 결정적으로… 저 어딘가 어설픈 늑대는 지금 뒤이어 유리창을 박살내며 쫓아나온 조담놈으로부터 달아나느라 정신이 없 었다.
마계의 귀족이라는 라후의 혈족이 조담놈을 상대로 저런 모습을 보일 리가 없겠지……? 음. 하지만 어딘가 닮은 것도 같기는 한데 … 혹시 그 삼형 제 늑대 말고도 찐따 혈족이 있는 거 아닌가?
“저 마물이 바로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장군이 겨우 기운을 차린 듯했다. 그는 넓은 운동장 여기저기를 날고 달리며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조담놈과 정체불명의 늑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본래 학교라는 장소는 사춘기 학생들의 불안한 뇌파와 에너지를 양분 삼아 많은 영혼들이 모여들기도 하고 심지어 요괴가 생성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실체화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이 학교에는 어쩐 일인지 저 강한 마력을 가진 마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 비율이 높아진 것입니 “다.”
“좀 전의 그… 떠도는 소문과 닮은 귀신들은 그럼………….”
“무수한 학생들의 동일한 상상이 만들어내고, 저 마물로부터 힘을 얻어 실체화 된 것입니다.”
흐음. 소문도 혹은 거짓도 거듭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건가? 암튼 저 늑대가 원흉이라면 저 것만 없애면 다 끝… 어? 가만? 저거 뭔가 이상한데?
“대교. 준비해줘. 어커면 또 네가 조담놈을 막…”
어랏? 저 늑대가 알아서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하네? 그것도 일직선으로… 나한테?
“조심하세요!”
대교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나와 대교를 향해 늑대 마물이 뛰어 올랐다. “비켜!”
늑대의 뒤를 바짝 쫓아오며 이미 월광절화결을 준비한 조담놈이 외쳤다.
“안돼옷! 당신이 그만둬요!”
“빌어먹을!”
조담놈의 멈출 수 없는 일격! 그 일격 아래 늑대는 혼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이어 조담놈의 칼과 대교의 검이 격돌! …을 안 했다? “끄으으으윽~!”
조담놈은 내리치던 칼을 멈추느라 이를 악물고 모든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간신히 멈춰진 조담놈의 칼과 대교의 청명검 사이의 공간은 종이 한 장이나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우욱!”
에구. 설마 주화입마?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코와 입가에 피 찍흘린 꼴로 씩씩대며 우릴 노려보고 있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뭐, 뭐야……! 또, 또오… 왜……?”
이제 화를 낼 힘도 없어진 모양이었다.
“어, 그게. 미안. 얘도 어째 아는 놈 같아서……….”
늑대 마물은 조담놈에게 당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 커다란 덩치는 순전히 뻥카! 즉,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 이 작은 녀석이 자신의 영력인 지 마력인지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눈을 속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조담놈의 일격에 적중되려는 순간 입체영상(?)을 풀고 달아나 내게 안겨 온 것이 다.
“너 혹시.. 라혈꼬(라후 혈족의 꼬리)?”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들고 혀를 내밀어 내 턱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야, 야~ 그만! 그만!”
한동안 목에 감고 다니던 거라 느껴지는 기운은 확실히 낯익은데… 이게 어찌된 거지? 어떻게 그냥 꼬리였던 게 완전한 새끼 늑대로… 게다가 이 거 전과 달리………….
“아 그 강아지예요. 마스터와 제가 발견했던!”
“이봐들, 이게 어딜 봐서 강아지야. 늑대지, 늑대.”
어쨌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인다……………! 내 손에 부드러운 털과 몸이 만져진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진유준님이 키우던 늑대 새끼였던 겁니까?”
“아냐, 란 내가 키웠다기보다 음. 하여간・・・ 남장군씨?”
나는 남장군에게 대강의 사연, 라후의 혈족과 벌였던 사투와 재대결 약속의 증표인 이 꼬리 (?)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라혈꼬 제거를 위해 출동 한 이 계통 조직의 요원이니 내 소유권(?)을 확실히 알려야 물러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후의 혈족을 소환한 자가 마신일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 남장군은 당근 납득했고 어느 사이 대교 자매들 모두가 모여들어 라혈꼬를 만져보 느라 정신이 없고.. 엄청 뜻밖이지만 어째 진짜 작은 애완 동물을 좋아하는 모양인 원판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쉬운 눈길을 보내고 있고… 음. 요 놈 요거, 인기 좋네?
우리가 간만에 즐기고 있는 평화 속으로 뛰어든 마물은… 너무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