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100화
100화 회색 신전 (4)
서걱!
극한으로 압축된 화염에 닿자, 철로 된 방패가 종잇장처럼 잘려 나갔다.
“마, 마력을 주입한 방패가 한 방에 박살나다니.”
“으아아아! 이거 무슨 레이저 수준이잖아!”
그 말대로다.
불줄기는 태우는 게 아니라 잘라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수가 수백 개가 넘는다는 거다.
더군다나 불줄기는 사방에서 동시에 거리를 좁혀 오는 탓에, 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타케시가 당황한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왼쪽이 정답인 것 마냥 말했던 건 다름 아닌 진혁이었으니까.
제발, 이 살인 트랩도 하나의 퍼포먼스일 뿐 얼마든지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해 주길 바라면서.
그러나 진혁은 슬그머니 타케시의 눈길을 피했다.
“이야. 누군지 몰라도 아주 공격대를 지옥으로 끌고 왔네. 보통 이런 건 공대장 잘못 아닌가?”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은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당했다.
타케시는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다.
“어, 어떻게든 피해야 됩니다!”
막는 게 아니라 피해야 한다.
탱커의 방패가 견디지 못했다는 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저 불줄기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젠장!”
“모두 뛰어라!”
사무라이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발목과 무릎. 허리와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살인 함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미친 듯이 움직였다.
‘하여간 뉴비들이란…….’
피식 웃은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검은색 스크롤을 꺼냈다.
그리고 봉인되어 있던 인장을 풀었다.
우우우웅!
[결계사의 1차 전직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결계사가 되기 위해선…….
이런저런 설명이 장황하게 늘어졌지만, 진혁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상태창을 스킵해 버렸다.
어떤 걸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이상, 설명 따위를 읽고 있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직을 위해 결계의 편린을 구현화하는 것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지.’
진혁이 손가락 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파츠츠!
새하얀 스파크가 일어났다.
곧이어 허공에 거대하고 화려한 문양이 나타났다.
바로 룬어가 새겨진 결계였다.
[결계 ‘미흡한 물리 방벽’이 발동됩니다!]
[전직 퀘스트의 첫 번째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미흡한’이란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제법 그럴 듯한 형태의 결계가 펼쳐졌다.
‘전직을 하기 전이라 이 정도가 한계로군.’
본래 결계사로 전직을 하려면 탑 1층에 있는 도서관에 처박혀서 최소 6개월간 초급 룬어를 익혀야 한다.
물론, 전투에 활용 가능한 결계를 사용하려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심지어 게임에 푹 빠져 살던 진혁조차도 마지막 단계인 고대 룬어를 익히는 데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확실히…… 절대 만만한 분야는 아니야.’
괜히 비인기 직업으로 분류된 게 아니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가상 현실을 선택했는데, 도서관에서 주야장천 공부나 해야 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가, 강진혁 플레이어님 이건 대체…….”
“마법……인 건가?”
“아니. 뭔가 달라. 저 문자는 처음 보는 건데?”
이영권과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갑자기 나타난 룬어에 당황했다.
이들도 간혹 스킬을 통해 발동되는 결계는 본 적이 있었지만,
이처럼 정식 룬어로 발동되는 진짜 결계는 처음 봤던 것이다.
하지만, 감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당장 코앞까지 불줄기들이 다가왔으니까.
“저걸 상대로는 스킬이나 능력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도 움직여야 합니다.”
이영권이 방패와 갑옷을 바닥에 던져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셔도 돼요.”
진혁은 정육면체 형태로 플레이어들을 감싼 결계를 보며,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가, 가만히 있으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영권이 되물었지만, 진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콰콰콰콰!
불줄기가 결계에 부딪쳤다.
“큭!”
“우아아악!”
플레이어들이 비명을 질렀다. 결계와 함께 몸이 절단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어?”
“뭐야 이거. 멀쩡하잖아?”
결계의 표면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불줄기는 결계의 표면에서 멈칫하다 오히려 반대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폴짝폴짝 뛰고 있는 사무라이 길드의 플레이어들을 향해서.
“아. 미안! 그쪽으로 하나 더 간다.”
진혁이 오른손을 살짝 드는 걸로 사과를 대신했다.
“이럴 수가…….”
이영권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놀란 건 지켜보던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걸 튕겨 내다니.”
“믿을 수가 없군. 리플렉터 계열의 스킬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가 있을 줄이야.”
“역……시 S급은 차원이 다르네요.”
진혁이 대단하다는 건 이미 여러 영상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한국의 16번째 S급 랭커.
검귀라 불리는 천유성은 물론, 흑운 길드의 마스터. 홍덕표를 찍어 누른 괴물.
4층과 5층을 최초로 정복한 선구자.
줄줄이 나열되는 업적들만 하더라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나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단순히 영상이나 말로 전해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이야기다.
두근! 두근! 두근!
모두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정상급 랭커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안정감.
결계 앞은 사지였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슬슬 가 볼까.”
진혁이 움직였다.
결계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헉!?”
“가, 강진혁 플레이어님! 잠시만요!”
“예?”
“아직 함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맞아요. 지금 나가시면 위험해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이영권이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그곳엔 처참하게 죽어 가는 사무라이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전후좌우에서 몰아치는 불줄기를 피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그리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아. 그 이야기였나.
“제가 타이밍 맞히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사실, 저걸 300번 연속 티끌만 한 상처 없이 피하면 아이템을 하나 주거든요.”
[타들어 가는 불꽃]이라고.
이후에 요긴하게 사용할 특수 아이템을 준다.
이거 나름 고급 정본데…….
어떻게.
같이 도전해 볼 용자가 있으려나?
진혁이 싱긋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괜……찮습니다.”
“가, 강진혁 플레이어님 많이 모으세요.”
“저희는 뒤에서 구경만 할 게요. 암요.”
히든 아이템을 준다고 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하여간, 요즘 뉴비들은 근성이 없다니까.
우두둑!
가볍게 관절을 풀은 진혁이 결계 밖으로 나갔다.
수십 개의 불줄기가 빼곡하게 몰려왔지만, 이미 모든 패턴을 외운 고인물에겐 귀여운 수준이다.
머릿속으로 재생되는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춰.
‘판사님. 비트 주세요!’
진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삼삼 우삼삼. 다음은 1m를 앞으로 뛰어서 굴러야 했지?’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틈들이 보였다.
이번엔 저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죽는 상황.
그럼에도 진혁의 얼굴에선 인간이면 당연히 나타나야 할 긴장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
“하하…… 진짜 할 말이 없네.”
이영권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역시 5층에 있는 검투장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고. 또 각종 매스컴으로부터 엄청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상상도 가질 않아.’
자로 잰 듯한 움직임과 멀리서도 느껴지는 자신감.
그리고 그 모든 걸 넘어서 이 상황을 즐기는 자세까지.
그 어떤 분야에서도 상대를 넘어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래서 김기태 팀장님이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거였구나.’
사실 이영권은 이곳에 오기 전 한 가지 당부를 들었다.
이번 레이드에서 싸울아비 길드가 얻을 수 있는 모든 이득을 포기하자는 내용의 당부를.
처음엔 김기태 역시 길드에 유리한 쪽으로 조건들을 배치하고 싶었으나, 이내 더 큰 미래를 보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다.
보상, 명예, 독점.
한국 2위의 초대형 길드가 그 모든 걸 내려놔야 한다면 그 누가 납득하겠는가?
대기업이 욕심을 부리는 경우는 있어도 이점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는데?
그러나 그 이유를.
‘간부들이 현명한 거였어.’
이영권은 지금 이 순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
불줄기는 30분이 넘어서야 잦아들었다.
‘역시 땀을 흘린 뒤엔 보상이지.’
진혁이 묘하게 생긴 붉은색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바로 [타들어가는 불꽃]이었다.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네.’
모든 게 계획했던 대로 흘러갔다.
이제 메두사만 처리하면 ‘그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재료는 전부 모일 터.
목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저나.
‘몇 명이나 살아 남았으려나?’
아공간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집어넣은 진혁이 이번엔 사무라이 길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허억. 허억. 허억.”
“내…… 내 팔이! 내 팔이 없어!”
“으아아악! 요…… 요시다가 죽었어!”
“빌어먹을! 당장 부상자랑 사망자 파악부터 해라! 질질 짜지 말고 움직이란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자신만만하게 들어왔던 놈들 중에서 멀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실력이 뛰어난 마에다와 녀석이 필사적으로 지킨 타케시만이 경상을 입은 데 그친 상황.
역시 불난 집 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다.
그게 얄미운 놈의 집이라면 더욱더 말이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게 결계가 딱 30인용 정도라 더 들여보내주고 싶어도 들여보낼 수가 없었네요.”
진혁이 사무라이 길드에게 다가가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 이 망할 자식!”
마에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열로 인해 눈썹이 그슬려서 그런가.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네?”
“순진한 얼굴로 ‘네?’ 같은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한국 놈들이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는 건 이 함정의 존재와 대비책에 대해 알고 있었단 뜻일 터! 내 말이 틀렸나?”
“뭐 대충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게 문제가 되나요?”
“무, 문제가 되느냐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렇잖습니까. 싸울아비에서 독점한 미궁에 함께 오겠다고 떼쓰는 걸 받아 주고. 또 당신들이 30층에 있는 고인물인지 나발인지가 버스 태워준다고 낄낄대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박살났는데, 그걸 왜 저희한테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네요.”
“닥쳐라!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서 우리가 죽어나가고 있는데, 구해 주지 않은 건 쓰레기들이나 하는 짓이다. 네놈에겐 일말의 동정심 같은 것도 없단 말이냐!”
동정심 같은 소리하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런 개소리를 연속으로 내뱉을 수 있는 것도 재능의 영역이다.
하긴.
이해는 한다.
“원래 방사능 많이 먹다 보면 정신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영화에서 보면 감마선 맞고 플루토늄 먹방하면 슈퍼 히어로가 되곤 하지만.
현실에선 운이 좋아야 탈모고 보통은 백혈병에 걸리는 비참한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얼마나 삶이 고달프겠는가?
“……뭐?”
충격적인 발언에 마에다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몇 초간이가 곱씹었다.
“가, 감히 그딴 말을 하다니. 미쳤어. 이건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외교 문제?”
진혁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는 정치인이 아니야.”
외교니 뭐니 하는 것이야 윗대가리들이나 신경 쓰는 거지, 이쪽이 알 바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나한테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할 거야. 이곳의 함정은 아직 끝난 게 아니거든.”
진혁이 차갑게 내뱉었다.
동시에.
쿠쿠쿠쿠쿠!
흩어졌던 불줄기들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찰나.
겹겹이 둘러싼 화염은 어느새 하나의 형(形)을 이뤘다.
“쉬이이익!”
불꽃으로 이뤄진 거대한 뱀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