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121화
121화. 초대 받지 않은 손님 (2)
“뭐야 저 병신은? 뭔데 앞으로 나서?”
“어라? 저것 봐. 엘프들 사이에 인간이 있었잖아?”
“푸하하하! 진짜네. 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엘프의 숲에 와선…… 진짜 운도 지지리도 없지.”
“어이. 뭐 하는 놈인지 몰라도 오늘 재수 없게 걸렸다고 생각해라. 가만히 있으면 아프지 않게 끝내 줄게.”
“끌끌끌. 맞아. 우리가 착해서 팔다리 하나 정도만 자른 다음에 금방 숨통을 끊어 주거든.”
처음, 진혁이 엘프들 사이에서 나왔을 때만 해도. 중화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은 웬 머저리 하나를 다 보겠느냐는 듯 반응했다.
당연한 이야기다.
겁대가리를 상실하지 않는 이상, 소규모 공격대에 육박하는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나서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어진 광경에…….
이곳에 있는 모두는 그 말을 내뱉었던 스스로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야만 했다.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현됩니다.]
중국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다.
검기를 발현시키기 위해선 노력의 끝을 경험해야 하며.
검강을 발현시키기 위해선 재능의 끝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검강이 검 전체를 감싼 걸로도 부족해 1m 이상 솟구칠 정도로라면…….
그건, 마주한 순간 삶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 또한 말이다.
덜덜덜덜!
서른 명의 플레어들이 제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압도적인 힘 앞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거, 검강이라니…….”
“이런 구석진 곳에 초절정급……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우, 우리론 안 돼. 아예 승산이 없어.”
조금 전까지 낄낄대던 모습은 간데없고, 꼬리를 말은 쥐새끼들처럼 입을 쩍 벌린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진혁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시선이 마주친 놈들이 차례대로 고개를 떨궜다.
“처음에는 다른 집 집안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어.”
어디까지 이곳은 엘프들의 영역.
외부인이 끼어들 자리는 아니다.
그렇다.
약간 친분을 쌓았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난 손님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적어도 전쟁과 학살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어야지.”
무기를 잡지 않은 여자와 어린애, 그리고 노약자까지 죽이다니.
그건 쓰레기들이나 하는 짓이다.
양심 따위는 아예 개나 줘 버린.
그리고.
그런 벌레 같은 놈들에게 인간 대우를 해 줄 생각 따윈 손톱만큼도 없었다.
툭.
‘검마제왕보’가 발동되자, 진혁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끄아아악!”
“으아악!”
붉은 운무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검기로는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거기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보법으로 인해 상대가 대응할 시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콰콰콰콰콰콰!
검압만으로도 살이 찢기고 뼈가 갈라졌다.
잘린 팔다리가 바닥에 나뒹굴며 지옥도를 연출했다.
허나, 진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죽이고.
베고.
쓰러뜨린다.
기껏해야 10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절반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 살려줘!”
“팔이…… 내 팔이!”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가득 찼다.
“이 악마 같은 놈아! 우리가 졌으니까, 그만 포기할 테니까, 제발 적당히 좀 하란 말이다!”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순간, 공격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진혁이 검을 아래로 떨궜다.
“어이가 없네.”
입에서 나온 말엔 여러 가지 감정이 실려 있었다.
“너희는 엘프들이 살려 달라고 애걸했을 때 봐줬냐?”
오히려 그걸 비웃으며 더욱 잔혹하게 찍어 눌렀지. 게다가 그걸 자랑스럽다는 듯이 떠들어댔고.
“나는 더도 덜도 말고 딱 똑같이만 해 줄게.”
역지사지가 어떤 건지…….
……지금부터 제대로 한번 느껴 봐라.
진혁이 단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콰득!
그리고 그대로 목에 핏대를 세우던 녀석의 몸을 그대로 쪼개 버렸다.
마치, 더 이상 협상이나 대화 따위는 없다는 걸 경고하기라도 하듯.
“흩어져라! 빌어먹을! 어떻게든 본대에 알려야 한다!”
“으으으으…….”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살아남은 몇몇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주를 선택했다.
전력을 다해 질주한다면 최소한 하나나 둘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다.
추격자가 쫓을 수 있는 사냥감은 한 번에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래. 그게 정석이긴 한데…….
안타깝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진혁이 활을 잡았다.
[Lv1 ‘적색마탄(赤色魔彈)’이 발동됩니다!]
붉은 섬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퍼억!
왼쪽 숲으로 달려가던 남자의 머리가 사라졌다.
퍼퍽!
“컥?”
이번엔 정면으로 달리던 여자의 심장에 바람구멍이 생겼고.
그렇게 한 발. 두 발.
시위를 떠나는 화살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퍼어억! 퍽! 퍼퍼퍼퍽!
달려가던 플레이어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더 이상 숲속에서 들리는 인기척은 없었다.
***
[왼쪽 능선].
엘프의 숲 최남단에 위치한 이곳엔, 중화 길드의 공대장 중 하나인 쉬에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쉬에화는 여기서 전체적인 작전을 총괄하며, 숲 외각으로 그 누구도 들어오거나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직접적으로 포로를 잡진 않지만, 수월한 진행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역할이다.
그런데.
“쉬에화 님. 정찰대 소속 플레이어들이 뵙고자 합니다.”
쉬에화의 텐트 밖에서 경비를 서던 남자가 보고했다.
끄덕.
쉬에화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알았으니 빨리 와서 내용이나 말하고 꺼지라는 뜻이다.
이미 지난 몇 시간 동안 수십 차례 정찰대 플레이어들이 들락날락거려 댔으니 그럴 수밖에.
곧이어, 검은색 복면을 쓴 세 명의 플레이어들이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은밀기동 목적으로 창설된 중화 길드의 정찰대였다.
“말하세요.”
찻잎을 우리던 쉬에화가 짧게 입을 열었다.
“6번 구역을 맡았던 소대급 부대인데. 조금 전에 확인할 결과 모조리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뭐라고요? 전멸?”
그제야 쉬에화의 손길이 멈칫했다.
충격적인 소식에, 그녀의 하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예. 대부분 즉사지만, 개중에는 최대한 고통을 오래 주고 싶었는지. 일부로 상처를 낸 듯한 흔적들도 함께 확인됐습니다.”
부하가 고문당했다는 말에도 쉬에화는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관심을 끄는 건 다른 쪽이었다.
“흐음. 6번 구역이라면 레인저들의 수가 많지 않은 곳일 텐데. 의외네요. 뭔가 다른 변수라도 있는 걸까요? 그쪽 소대 구성이 어떻게 됐다고 했죠?”
“B급 다섯에 C급 스물여섯이었습니다.”
“애매하긴 했네요……. 이번엔 A급으로 셋은 넣어서 보내세요. 아! 기왕이면 태 부관이 직접 가주셨으면 해요. 기왕 하는 거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거든요.”
“예. 제가 직접 가도록 하겠습니다.”
텐트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이 곧바로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즉시 플레이어들을 이끌고 6구역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뭐 하세요? 보고 다 끝났으면 이만 물러가지 않고?”
이미 떠났어야 할 정찰대가 어째서인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느긋하게 서서 뭉그적거리는 모습.
오히려 가장 앞에 있는 놈은 텐트 내부를 뻔히 훑고 있지 않은가?
설마……?라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누굽니까 당신!”
쿠쿠쿠쿠쿠!
쉬에화의 몸에서 거센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이제야 눈치 챈 거야? 이렇게 허술해서 어떻게 공대장 자리까지 올랐는지 모르겠네.”
복면을 쓴 남자의 입에서 익숙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스륵.
진혁이 복면을 벗고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음…….
역시 입을 가리는 갑갑한 천 조각 따윈 질색이다.
나머지 둘도 복면을 벗었다.
실비아와 또다른 레인저 엘프였다.
“강……진혁……!”
쉬에화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날 아나?”
“……당연하죠.”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얼마 전 한국에 있는 토크쇼에서 중화 길드에게 크게 한 방 먹인 랭커를.
쟁쟁한 인맥과 그동안 쌓아 온 업적으로 인해 진혁은 이미 중화 길드 내에서도 최고 요주 인물로 취급받고 있었다.
“당신이…… 이곳엔 어쩐 일이죠?”
“적을 박살내려면 역시 눈이랑 귀부터 제거해야 하니까. 작전 본부로 쓰고 있는 이곳부터 노리는 게 정석이지. 물론, 그곳을 책임지고 있는 공대장까지 없앨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거기에 텐트 내부에 있는 작전 지도까지 모조리 볼 수 있으니, 이곳에 잠입한 건 꽤나 나쁘지 않은 한 수였다.
“우리를 적대하겠다는 뜻인가요? 진심으로요?”
“먼저 건드린 건 너희야.”
진혁이 선을 그었다.
“이해가 안 되네요. 고작 엘프들을 위한답시고 저희와 척을 지려고 하다니. 이곳에 있는 랭커가 몇 명인지 알게 된다면 지금 내린 그 결정, 후회하게 될 거예요.”
“아니, 후회 따윈 안 해. 그리고 너희들.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남궁천이 와도 힘들 판에. 고작 랭커들 좀 데리고 왔다고 너무 자신만만해 하는데?”
“웃…기지 마세요. 당신은 남궁천 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분은 여기 오실 필요조차 없어요. 저희 수준에서 충분히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남궁천의 이름이 나오자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남궁천 그 녀석.
대단하긴 한데, 글쎄. 그렇게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할 만큼 대단한 건 아닐 텐데…….
마지막으로 봤던 게 탑의 18층 부근이었던가?
한창 거인들과 끙끙대면서 고전하고 있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훨씬 더 많은 지원을 받고 성장했을 테니 그때보단 강해졌겠지만, 그래 봐야 천유성보다 두세 단계 위일 거다.
물론, 이 모든 사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니 쉬에화로선 저토록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곳에 없는 남궁천이야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너희 쪽 정보가 모두 새어나갔다는 거지.”
“그걸 알아냈다고 해서 뭘 어쩌실 생각인가요? 당신 외에 다른 공대장들을 상대할 만한 실력자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요?”
정보가 중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정보에 따라 작전을 수행해 줄 유능한 병력이 뒷받침되었을 때의 이야기.
고작해야 엘프들뿐이라면, 결코 나머지 공대장들의 적수가 될 순 없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사실, 나서기 싫어하는 녀석이 웬일인지 이번에 무거운 몸을 움직였어.”
이미 계약자의 ‘의식 공유’를 통해 저 멀리 있는 녀석에게도 이 장면이 전해졌을 것이다.
중화 길드의 공대장이 지금 어디쯤 있는지.
주요 병력들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전부.
그리고 아마도…….
“그 녀석. 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지는 않을 거야.”
너희들이 한 빌어먹을 짓거리 때문에, 상당히 화가 많이 나 보였거든.
***
쿠쿠쿠쿠쿠!
붉은 핏줄기가 천천히 위로 솟구쳤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
리커창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감히, 이 숫자와 멤버라면 한 층의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도 충분히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게 착각이었다.
지상에서 20m가량 떨어진 상공.
한 쌍의 날개로 부유하는 진조가 지상에 있는 모든 적들을 관조했다.
“나는 엘프 같은 것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실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어.”
세상 근심 없이 너털웃음이나 흘려대는 펜하임도.
까칠하게 툴툴대는 테슬론도.
왠지 모르게 자신의 계약자에게 들러붙는 실비아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이 좋아했다. 이곳에 있어서 모처럼 얼굴을 피고 웃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녀석들이 그 모든 걸 망쳤다는 점이다.
“너희는 내 계약자에게 함부로 지껄였어.”
진혁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건.
오직, 자신 하나뿐이어야 한다.
그러나 놈들은 그 규칙을 어겼다.
“그게 너희들이 죽는 이유다.”
그 말을 끝으로.
하늘에서 붉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