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180화
180화. 권천지룡(拳天之龍) ‘암황(暗皇)’의 수제자 (2)
시련의 탑 8층.
10,000km에 달하는 미로로 층계 전체가 이루어진 이곳은 그야말로 천연의 험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천 갈래의 길로 이어진 통로들과 셀 수 없는 함정들은 이곳을 통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해 주는 듯 보였다.
‘여기도 참 자주 놀러 왔었는데…….’
미로의 입구로부터 몇 백 미터 떨어진 지점, 홀로 서 있던 진혁이 과거의 기억을 곱씹었다.
운영자가 숨겨 놓은 이스터 에그를 찾는답시고 10,000km에 달하는 미로 전체를 구석구석 살피던 건…… 지나고 나니까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추억이었다.
바로 그때.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주군. 흑풍회 서른 명, 모두 준비 완료했습니다.”
170cm의 다소 왜소한 체형.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를 지닌 소년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양호명이 자신을 대신하여 보낸 수족으로…….
이름이 ‘월영(月影)’이었지 아마?
양호명 말로는 회 내에서도 손꼽힐 만한 실력자라고 했다.
결코 발목을 잡지는 않을 거라고 큰 소리를 단단히 쳤지.
내공은 그럭저럭 탄탄하게 다져 놓은 것 같은데, 겉보기엔 영 비실비실해 보이긴 한다.
‘과연 내실은 어떠려나?’
진혁이 ‘탐식의 눈’을 사용해 녀석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이름: 월영(月影)
성별: 남
나이: 22세
레벨: 47
힘 20 민첩 55 체력 19 마력 11 내공 60
직업: 호위무사
고유 능력: 음영극살(陰影亟殺)
스킬: Lv10 ‘무음보(無音步)’, Lv8 ‘검강(劍罡)’, Lv7 ‘흑천공(黑天功)’, Lv7 ‘호신강기’, Lv7 ‘충심(忠心)’
——————————————————
[상세 설명: 월영은 천애고아로 걸음마를 채 떼기 전부터 양호명에게 거두어진 흑풍회의 암기입니다. 요인암살과 호위에 특화되어 있기에 곁에 두고 쓰면 매우 효율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단, 대상의 사고방식이 남들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다루는 데 매우 깊은 주의가 요구됩니다.]
[복사 조건: 현재 월영은 당신을 신뢰해서 따르는 것이 아닌, 양호명의 명령 때문에 함께하는 상태. 그의 충성심을 얻을 수 있다면, 대상이 가진 고유 능력과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를 이용해 원거리는 물론, 중거리와 단거리 공격에도 특화된 고유 능력, ‘음영극살(陰影亟殺)’.
‘호오.’
이거 꽤나 먹음직스러운 게 튀어나왔다.
암황의 수제자라고 거짓말을 해 둔 덕분에, 여러 가지로 쓸 수 있는 카드들이 대폭 증가되었다.
영월은 물론, 이번에 빌린 흑풍회의 정예 30명도 탑을 공략하는 데 있어 매우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시선이 복사 조건으로 향했다.
충성심을 얻어야 한다라…….
‘솔직히 나 정도면 알아서 충성심이 솟아오를 테니 그리 어려운 능력은 아니군.’
평상시처럼만 행동해도 영월이 자신의 사람이 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인성이면 인성. 실력이면 실력. 복지면 복지.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대표로서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은 전부 갖췄으니.
‘이제 슬슬 가 봐야겠네. 일단 거리를 두고 상황 파악부터 좀 해 볼까.’
진혁이 미로의 입구가 잘 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웅성웅성!
입구에는 제법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익숙한 길드의 마크도 더러 있었고.
무도회니 뭐니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곳에 초대받지 못했던 길드들은 탑의 공략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쟁쟁한 경쟁자들이 한눈을 파는 지금이야말로 2인자들이 위로 치고 가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그런데.
‘흠?’
주위를 훑던 진혁의 눈에 익숙한 인물이 하나 보였다.
긴 적발을 늘어뜨린 여자.
바로, 마인 협회의 멜레나였다.
큼지막한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은 전부 알아볼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지?’
인류의 미래를 위해 탑을 공략하겠다는 숭고한 의지는 아닐 테고…….
최근 들어 지나치게 잠잠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건 너무 수상쩍은 냄새가 풍긴다.
확인을 해 보려면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나는 잠깐 저 여자에게 말 좀 걸고 올 테니까. 사람들 눈에 띄는 행동 하지 말고 얌전히 숨어 있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굳이 저희가 숨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겁니까?”
“너야 제법 반반하게 생겼지만, 나머지는 밤길에 마주칠까 무섭게 생겼잖아. 굳이 이런 말을 내가 내 입으로 해야겠냐?”
상처투성이에 수염이 덥수룩한 남정네들이 검은 옷을 입고 우르르 몰려다닌다고 생각해 봐라.
그게 은밀 기동이냐.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나 다름없지.
아니, 경찰서에 신고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속하의 생각으론 생긴 게 문제가 된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강한 인상은 전투에 있어 상대를 위압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월영이 정말로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꽉 막힌 게 어디 사는 누군가 생각나려 한다.
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이런 놈들한테는 상식을 들먹이며 설득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진혁이 흑풍회 한정으로 무조건 먹히는 마법의 단어를 꺼냈다.
“천마신교의 대업을 달성하려면,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아. 그러니 내 말을 따라.”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월영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월영으로부터 떨어진 진혁이 곧장 멜레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플레이어들 틈에서 무언가 곰곰이 상념에 빠진 적발의 여자가 보였다.
“이야. 이런 곳에서 다 보네?”
진혁이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물론, 멜레나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과 매한가지였다.
“너, 너는……!”
“큰 소리 내지 말고. 여기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봐야 손해인 건 나보다는 너 아니야?”
백주 대낮에 마인이 활보한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
여기서 사발 한 번 거하게 풀었다간 멜레나가 장작 위에서 활활 타는 걸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 진짜 한번 해 봐? 아주 그냥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그건……!”
멜레나가 힐끗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다들 미로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데 정신이 팔린 상태였기에, 이쪽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아, 알겠어. 알겠다고! 뭐든 말해 줄 테니까. 우선 자리를 좀 옮겨.”
“현명한 판단이야.”
진혁이 멜레나의 뒤를 따라 수풀 사이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말해 봐. 마인들이 어째서 8층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그것부터 들어보고 판단하게.”
진혁의 질문에 멜레나가 움찔했다.
허나 잠시뿐이었다.
어떠한 거짓말이나 변명으로도 속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사실, 며칠 전에 독특한 마력이 검출되었어. 정확히는 미로를 탐사하던 동료 중 하나가 우연히 발견한 거지만.”
“독특한 마력이라고?”
“당신이라면 알 거야. ‘이중 파동’에 대해서.”
“층계와 층계 간에 연결이 될 때 나타나는…….”
“그래, 바로 그거. 8계층과 9계층 사이에 통로가 연결됐다는 뜻이지. 나도 그걸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야.”
층계 전체가 미로뿐인 8층과 중형급 몬스터들이 즐비한 9층이 연결됐다.
그 사실에, 진혁의 전신에 소름이 일어났다.
‘설마…… 두 계층이 연합을 했다는 건가.’
그렇다는 건 지금 이곳의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높아졌다는 뜻일 터.
“미로 안에 들어간 플레이어는 몇 명이나 되지?”
진혁이 다급히 물었다.
“꽤 많았어. 알다시피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은 널리고 널렸잖아? 지금도 미국의 대형급 길드 하나가 안에 들어가 있는 중이야.”
이미 늦었다.
멜레나에게 물어야 할 질문들이 더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따라와.”
진혁이 멜레나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자, 잠깐만! 나도……?”
“당연히 너도 안으로 들어가야지.”
어디서 혼자서만 쏙 빠져나가려고?
회사와 사원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운명 공동체다.
멜레나가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했지만, 한 번 붙잡은 물고기를 놔 줄 진혁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월에게 도착한 진혁은 또 다시 거대한 충격에 휩싸여야 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피고 있는 영월과 게거품을 문 채 쓰러져 있는 플레이어들이 있었으니까.
수백 명에 이르는 플레이어들 중 의식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후우…….”
참자.
아직 애라서 그럴 수도 있다.
무엇보다 여기엔 의외로 그럴듯한 변명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명해 봐. 짧은 버전으로.”
“주군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가능하면 보는 눈이 없어야 한다고.”
“그건…… 그랬지.”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기절시킨 거냐?”
“속하는 지엄하신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영월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이제야 시스템이 말했던 게 이해가 된다.
사고방식이 남들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다루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했던 게 말이다.
진혁이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됐다. 당장 미로로 들어갈 준비부터 해.”
이미 안에 들어가 있는 플레이어들이 있다고 하니. 전부 다 시체로 변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
미로의 입구로부터 약 20km 떨어진 지점에는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또 연락이 두절되다니…….”
남자가 중얼거렸다.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길드, ‘록히드’.
그리고 남자는 길드의 대들보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AAA급 랭커로, ‘잭 프리드먼’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었건만 프리드먼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8층에 있는 미로를 돌파하기 위해 데리고 온 전력은 록히드 길드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제1 공격대였다.
전원이 A급 이상의 판정을 받은 데다 10층 이상까지 공략한 경험이 있는 플레이어들로만 뽑아 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전에도 성공했던 미로가 너무도 버겁게 느껴졌다.
‘……다르다.’
단순히 미로의 복잡함이나 함정의 난이도가 어렵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무언가 근본적인 게 바뀌어 있었다.
전신에 달라붙는 끈적끈적한 공기.
입구에서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안으로 들어올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프리드먼이 힐끗 허공에 떠 있는 상태창을 바라봤다.
[0h:0m:1s]
시간을 표시하는 상태창이 지금 막 소진되었다.
삐빅! 삐빅!
요란한 알림음이 울려 퍼졌고.
주위의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공대장님. 방금…… 3시간이 전부 다 되었습니다.”
3시간.
척후 조를 이끄는 케이티가 저 안으로 들어간 뒤 경과한 시간을 의미했다.
동시에 13명의 척후 조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고.
“빌어먹을.”
프리드먼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대체 무엇이 있길래 척후 조가 가는 족족 연락이 두절된다는 말인가?
본대의 위험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대전제는 알고 있었으나,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을 이어 나갈 순 없었다.
결국.
“레인저는 대기한다. 요리스, 마이클. 앞장서라. 우리가 직접 안으로 들어가겠다.”
탱커와 딜러로 구성된 플레이어들이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