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200화
200화. 화산(華山)의 검, 백설린(白雪璘)
사박.
풀을 스치는 소리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마치, 무게라고는 느껴지지 않은 것처럼.
한 송이의 매화를 연상케 하는 자태.
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오는 기품은 ‘아름답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화산(華山).
무림 9파의 일원이자, 가장 아름다운 검법을 보유했다고 알려진 명가다.
“화산의 백설린이라고 합니다.”
백설린이 다소곳이 포권을 올렸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과연…….
곤륜과 더불어 천마신교와 시도 때도 없이 부딪치며, 살아남았다는 게 허언은 아닌 듯싶다.
가주가 아닌 젊은 고수가 이토록 강한 걸 보면 말이다.
상대의 수준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천유성과 월영도 싸움을 멈췄다.
뒤쪽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유연화와 이태민 역시 굳은 얼굴로 상황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하지만.
딱 한 명.
진혁만큼은 속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애써 삼켜야만 했다.
‘크으. 역시 격전지일수록 씨알 굵은 물고기들이 많다니까.’
이미 탐식의 눈을 상대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파악해 둔 상태였다.
이름과 나이는 물론.
고유 능력과 스킬…….
그리고 그것들을 복사하기 위한 조건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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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백설린(白雪璘)
성별: 여
나이: 25세
레벨: 115
힘 51 민첩 83 체력 56 내공 172
고유 능력: 매화백운검(梅花白雲劍)
스킬: Lv17 ‘육합검법(六合劍法)’, Lv17 ‘매화삼십육신검형(梅花三十六神劍形)’, Lv17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Lv17 ‘청운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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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조건: 화산의 신묘한 검은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백설린은 그 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가진 후기지수로 화산의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녀가 가진 모든 능력을 끌어내게 한 뒤. 5분간 모든 절기를 피할 수 있다면, 백설린이 가진 고유 능력과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게 됩니다.]
단순히 막거나 상쇄시키는 거면 몰라도.
궤도를 전부 읽어 피한다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것이 백설린 정도 되는 고수를 상대로 한다면 더욱더 말이다.
게다가 백설린뿐 아니라 그녀의 뒤로 몇 명의 남녀가 더 있었다.
좀비 웨이브 때 만났던 무림의 일원들.
바로 제갈천과 황보군악, 그리고 남궁현과 당소하였다.
“혼자 상대하기 힘들 것 같으니 우리도 한 손 거들어 드리지.”
“흐음. 검귀 녀석하고는 여기서도 만나네.”
“나머지 놈들도 본 기억이 있어요. 저기 어린 공자 한 분은 처음 뵙습니다만……. 플레이어라고 하기엔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네요.”
전원이 검기를 다룰 줄 아는 고수들이다.
스윽.
척.
거기에 하급이긴 하지만, 데스나이트 넷과 5서클의 경지에 도달한 리치 여섯 마리까지 합류한 상태다.
쿠쿠쿠쿠쿠!
베이로둠의 주위로 검은색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너희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즐기기 위해 손속에 사정을 뒀을 뿐. 이런 놈들 쯤이야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쓸어 버릴 수 있다.”
자존심이 상한 듯한 말투에서 다양한 감정이 뚝뚝 배어 나왔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이냐?”
“저 인간. 말장난을 하며 시간을 질질 끌고 있습니다. 당신 역시 힘의 반의반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건 저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백설린이 힐끗 진혁을 바라봤다.
당황한 듯 우물쭈물 거리고 있으나 저건 다 연기다.
아주 고도의.
“시간을 끌고 있다?”
“조금 전, 사라진 고대종과 정령수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혼란을 틈타 모습을 감춘 고구마와 5대 원소의 정령수.
소환수들이 주인을 지키지 않고 사라졌다는 건 더 중요한 임무가 있다는 뜻일 거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라고 한다면…….
“……설마.”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베이로둠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백설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라이프 포스 베슬.”
리치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며, 불멸의 존재에게 있어 가장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아킬레스건이다.
그렇다.
“저 남자가 찾고 있는 건 바로 당신의 생명줄입니다.”
***
‘호오.’
진혁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나름대로 난잡하게 판을 흔들며, 정신을 분산시키려고 했는데.
저 여자는 정확하게 이쪽이 노리는 의도를 간파했다.
실제로 고구마와 정령수들은 베이로둠의 라이프 포스 베슬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중이었고.
그걸 손에 넣는지의 여부가 이 싸움의 성패를 결정하는 열쇠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시작부터 어긋났다.
“네놈……. 정말로 간사한 짓거리만 골라서 하는구나. 본드래곤을 무시하고 게이트를 넘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나 역시도 같은 방식으로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던 것이냐?”
베이로둠의 안광이 격하게 타올랐다.
“불필요한 싸움은 피하자는 주의여서 말이지.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해야 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라이프 포스 베슬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그건…….”
“위치는 알고 있어. 성녀를 타락시키기 위해 다량의 마기가 필요할 테니 그 근처에 갖다 뒀겠지.”
진혁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베이로둠이 할 말을 잃었는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경악과 놀라움이 혼재된 마력은 리치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보여 줬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놈이군. 허면 묻겠다. 아직 목적을 달성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는 이유는 무엇이냐?”
이유라…….
“간단해. 이런 걸 말해 줘도 우리가 질 가능성은 없거든. 내 애완동물들은 반드시 맡은 임무를 완수할 거다. 물론, 성녀 역시 네 녀석의 뜻대로 타락하지 않을 테고.”
“한 마디로…… 모든 일이 네놈이 원하는 대로 풀릴 거라는 말인가?”
“그런 뜻이야.”
“푸하하하! 이제 보니 그냥 자만심에 미쳐 버린 인간이로구나. 좋다. 나 혼자서 미물들을 전부 짓밟아 버리는 것도 어렵진 않지만,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쓰도록 하지. 어디, 네놈의 자신감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성녀의 곁에서 즐겁게 지켜보도록 하마.”
베이로둠이 옆에 있던 백설린과 무림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고 함께 싸우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자 백설린 역시 망설임 없이 양 손으로 검을 잡았다.
파츠츠츠!
검강이 발현된 검이 앞으로 뻗었다.
눈부시게 발현된 광휘.
한눈에 봐도 천유성이나 월영이 감당하기에 힘들어 보이는 경지다.
그 사이.
베이로둠은 몇몇 리치들을 대동한 채 테레사와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백설린을 비롯한 무림의 일원들과 데스나이트들에게 맡긴 뒤, 먼저 앞질러간 정령수들을 추격하기 위함이었다.
‘라이프 포스 베슬을 지키고 성녀를 타락시키기만 한다면, 이 싸움에서 내가 질 변수는 없다.’
베이로둠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보다 더 완벽하고 확실하게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방법은 없으리라 확신하면서.
“들었다시피 당신들은 잠시 이곳에 계셔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백설린이 검을 휘둘러 자신의 앞 5m 지점에 선을 그었다.
이것은 경고장이다.
넘는 순간, 상대가 그 무엇이든 베어 버릴 거라는.
“후우. 하는 수 없지.”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송곳니와 쌍룡검 한 자루를 꺼냈다.
양손에 길이가 서로 다른 검이 쥐어졌다.
“리치를 쫓지 않고 싸울 생각인 거냐?”
천유성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당연히 따라가겠다고 할 줄 알았던 진혁이 싸움을 선택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솔직히 검으로 저 여자를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어떡해? 네가 썩 마음에 들지 않긴 해도 목이랑 몸이 따로 다니는 걸 두고 볼 만큼 내가 모질지 못하거든.”
미운 정도 정이라고.
검성이 죽어서 장례식장에 간다면, 목구멍으로 육개장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그 말은 설마…… 내가 저런 놈 하나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응? 아니었어? 아무리 봐도 3합 안에 죽을 것 같은데?”
“…….”
천유성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당장 꺼져라. 저 여자를 비롯해 무림의 떨거지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니.”
쿠쿠쿠쿠쿠쿠!
살기가 공간을 잠식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흉흉한 기운이 천유성의 몸을 통해 발현되었다.
‘일단 하나는 낚았고…….’
“주군.”
월영이 진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응?”
“저런 놈보다는 제가 더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이 끝나면 주군께서 가장 신뢰하는 검이 저라는 것을 약조해 주십시오.”
“저 못돼먹은 놈보다 잘 싸운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사실 나는 널 제일 믿고 있어. 그러니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해 봐.”
“저, 정말입니까?”
“그럼.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린 다 같은 암황님의 수족이잖아. 평범한 플레이어들이나 무림인들하고는 그 뿌리가 달라.”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천유성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역시 사원끼리의 경쟁 체제는 훌륭한 동기 부여가 된단 말이지.’
인센티브니 워라벨이니 하는 것보다…… 바로 옆에 얄미운 라이벌 하나 박살내는 게 더 짜릿한 쾌감을 자아내는 법이다.
고개를 끄덕인 진혁이 마지막으로 유연화와 이태민을 향해 행운을 빌어 줬다.
“저 녀석들이 무림 쪽 녀석들을 맡아 주는 동안 너희는 데스나이트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줘. 너무 무리하진 말고.”
“오빠는 걱정 말고 어서 가. 데스나이트 정도야 맨 주먹으로도 박살낼 수 있으니까.”
“테레사 씨를 구해 주세요. 형.”
유연화가 건틀릿에 마력을 주입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태민 역시 드론들을 재차 가동시켰다.
정말로 든든한 동료들이다.
뒤를 맡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만큼.
베이로둠이 준비한 검과.
이쪽이 준비한 검.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날카로울지가 지금부터 결정될 것이다.
콰앙!
‘검마제왕보’를 사용한 진혁이 곧장 베이로둠의 뒤꽁무니를 쫓기 위해 크게 도약했다.
백설린의 눈에 이채가 스며들었다.
“선…… 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부우우웅!
화려하게 장식된 검이 사선을 가로 질렀다.
그러나.
카카카캉!
검격은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천유성이 태산과도 같은 기세로 백설린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가 선인지를 정하는 건 네가 아니다.”
“주제를 모르시는 분이군요. 고작 당신들만으로 저를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너야말로 뭘 모르는 것 같군.”
천유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 가장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저 녀석이 아닌 바로 나다.”
검성(劍聖).
검의 끝에 이르러 그 모든 걸 깨우친 자.
과거 천유성은…….
화산의 초절정 고수인 ‘매화검수(梅花劍秀)’마저 쓰러뜨린 최강의 플레이어였다.
***
탓!
타앗!
시야가 빠르게 바뀐다.
심장이 터질 것만큼 빠르게 달렸으나, 베이로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공간 이동으로 이동한 모양이군.’
대마도사란 별칭답게 베이로둠은 이미 진즉에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는 곳에 도착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몇 분을 달리자. 진혁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진혁조차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첫 번째는 베이로둠이 흑각 주사위를 다룰 수 있는 실력이 과거 마왕과 비교했을 때 밀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녀석의 상세 설명에 있던 ‘자신의 지적 탐구를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위험이나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자입니다.’라는 말이 지닌 의미가 기존의 상식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고동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마경(魔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