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202화
202화. 타락한 성녀 (2)
“설마…… 이걸 노렸다고?”
베이로둠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성녀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찾은 것도 자신이었다.
그걸 이용해 타락이라는 생각을 한 것도 자신이었고.
모든 준비들이 완벽했다고 확신했건만.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너무나 꼬여 버린 실타래는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인간들의 수준을 얕잡아 봤단 말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의 격이 너무나도 떨어졌다.
가장 강한 축에 속한 플레이어들조차도 자신의 마법 몇 방에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렸으니까.
군대를 비롯한 모든 병력들도 언데드 군단에 의해 궤멸되다시피 한 상황.
인류를 과대평가할 만한 구석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단지 저 인간 하나가 규격 외라 불릴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군.’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터무니없는 무력과 상황을 설계하는 능력.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여유까지.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바로 저 인간 하나를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베이로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저 인간을 상대로 전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성녀까지 잃은 마당에 이 이상의 피해를 감수할 순 없지. 분명, 지금까지는 네놈의 승리다. 하지만 너무 일찍 축배를 들진 말거라. 나 역시 준비해 둔 한 수가 남아 있으니까.”
베이로둠이 흑각 주사위를 꺼내들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주사위의 면들이 동시에 빛나기 시작했다.
***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건 설마……?’
흑각 주사위의 마지막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그 녀석’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10층대 보스 몬스터가 이걸 알고 있을 줄이야.
쉽게 가나 했더니 이 녀석도 믿는 구석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파츠츠츠!
주사위에 떠오른 문양들이 하나로 겹쳐졌다.
고대 룬어가 문양을 중심으로 6개의 각인을 만들었고.
그 각인 위로 검붉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화끈하고.
마력의 파장이 피부를 찔렀다.
“호오.”
옆에 있던 테레사의 입에서도 흥미롭다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당연한 이야기다.
지금 저 너머에서 오고 있는 건.
마계에서도 강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근접계 최강의 몬스터였으니까.
저벅.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푸른 안광과 새하얀 피부를 가진 백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앞서 만났던 놈들과는 다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에 해당하는 데스나이트였으니까.
무거운 갑주 따윈 필요 없다는 듯. 대마법 방어진이 새겨진 얇은 판금 갑옷에 팔다리가 훤히 드러난 복장.
기동력을 우선시하는 신발과 균형 잡힌 몸.
단순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완벽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괴물이었다.
“날 제압한 것도 바로 저놈이야. 정확히는 순딩이 녀석을 제압한 거지만.”
테레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꽤 골치 아프긴 하겠네.”
마법사인 베이로둠이 후방 지원을 맡고.
데스나이트가 전방에서 적을 막는다.
공수의 분담이 완벽했기에, 단 두 명으로도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조합이었다.
물론.
그 조합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어때. 상대할 수 있겠어?”
“그럭저럭? 나도 마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니 저번과는 다르겠지.”
“그럼, 데스나이트 쪽을 부탁할게. 나도 리치 녀석이랑 노는 게 더 편할 것 같거든.”
“그거야 상관없지만,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약속?”
“앞으로도 계속해서 강한 위치에 있어야 해. 내 흥미가 떨어지지 않게끔 말이야.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너에게 검을 겨눠도 되지 않아도 될 테고. 순딩이 녀석도 소중한 사람을 잃어서 슬퍼할 일도 없을 거야.”
워낙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만 잊고 있었다.
지금 테레사는 타락한 상태.
함께 어울려 주고 있는 건 단지 내가 가진 마기가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이중인격의 특성상 이 전투가 끝나면 다시 본래의 인격이 주(主) 인격이 될 테지만, 한 번 타락한 이상 언제든지 지금의 성격이 깨어날 수 있다.
‘만약 마왕이나 상위 마족이 현현할 경우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기에 테레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 그들에게 밀리지 말라고.
그리고.
원래 있던 인격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도와달라고.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있던 일이 생각나네. 기억나? 그때도 넌 지금처럼 불안해했었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래성처럼.”
테레사와 처음 만났던 날.
테레사에게 당부한 게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을 믿어 달라고.
“그래 확실히 기억나는 것 같아.”
테레사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는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기념일을 까먹지 않는 남자는 싫지 않아. 물론, 네 곁에 붙어 있는 찰거머리 여왕님 때문에 이 이상은 다가가지 못하겠지만.”
크그그극!
테레사가 대검으로 바닥을 긁으면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간격이 좁혀진다.
데스나이트 역시 검을 쥔 채 자세를 잡았다.
“한 번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군. 그대는 나에게 상대가 되질 않는다. 명예를 안다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서라.”
“어머나. 시체 주제에 명예는 본 드래곤 밥그릇에서나 찾으시고요. 나는 한 대 얻어 터졌던 걸 갚아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
서로 다른, 그러나 비슷한 기운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폭풍전야의 고요함 속에 테레사와 데스나이트가 서로의 거리를 가늠했다.
세 걸음, 두 걸음…… 그리고 한 걸음.
일격에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거리로 테레사가 진입했다.
공기가 급변한다.
팽팽하게 조여졌던 호흡이 일순간에 폭발했다.
이어진 건, 대화 따윈 필요 없는 맹수들의 처절한 사투였다.
콰아아앙!
묵직한 대검을 다루는 테레사가 파괴력을 추구한다면…….
카카카강!
얇고 긴 장검을 다루는 데스나이트는 속도와 가벼움으로 우위를 잡았다.
검게 치솟은 오러에서 나오는 파괴력과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공방전이 오고갔다.
예술로 승화된 검격.
[테레사가 Lv17 ‘망국(亡國)의 깃발’을 사용합니다!]
[1분간 모든 능력치가 10%만큼 상승합니다!]
문양이 지워진 망국의 깃발이 세워지자.
테레사의 몸놀림이 달라졌다.
퍼걱!
아래에서 위로 뻗은 대검이 단숨에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날려 버렸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고개를 젖혀 충격을 최소화시킨 데스나이트의 검이 테레사의 견갑을 파고들었다.
일진일퇴(一進一退).
살을 주고 뼈를 얻기 위해서 검과 검이 서로의 급소를 노렸다.
***
툭! 툭!
진혁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저쪽도 한창 불이 붙은 거 같으니 우리도 시작해야지?”
“검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줄 아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이다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음?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너랑 싸울 때 검을 쓸 일은 없어.”
진혁이 두 자루의 검을 그대로 아공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너는 마법만으로도 충분하거든.”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는 데 있어 강한 마법사와의 전투는 필수다.
그 대상이 베이로둠 정도의 실력자라면 더할 나위 없는 연습 상대가 될 수 있겠지.
게다가 이번 기회에 융합의 ‘두 번째 단계’까지 사용해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법만으로 충분하다라……. 하하하! 그래. 그럴 수 있지. 처음에 내가 너무 우습게 보인 것 같구나. 아무리 그래도 이런 취급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미친 듯이 이어지던 웃음소리는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베이로둠이 세 개의 손가락을 폈다.
“세 수. 정확히 세 수 안에 끝내 주마.”
우우우웅!
천천히 하늘로 솟구치는 몸.
베이로둠이 지면에서 약 10m 높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순간, 녀석의 뒤로 붉은색 육망성이 나타났다.
1초도 안 되는 찰나에 5m에 이르는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네놈도 서클을 만들 줄 아니, 연산 속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연산 속도.
얼마나 빨리 복잡한 마법진을 그릴 수 있느냐가 마법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같은 서클이라도 어느 쪽이 먼저 선공권을 갖느냐에 따라 결과가 아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클이 높은 마법사들은 이 연산을 순식간에 끝마칠 수 있었고 낮은 서클의 마법사는 모든 수읽기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설픈 마법사들의 이야기고. 나정도 되면 그 차원이 한 단계 바뀌게 된다.”
리치가 반대 손으로 또 다른 마법진을 만들었다.
이중 영창.
그것도 속성이 전혀 다른 종류로 이루어진 이중 영창이다.
“마법학개론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내가 이중 영창을 할 줄 아니까 너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거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네놈은 이 몸이…… 영창을 몇 번이나 동시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동시에 서로 다른 영창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곧 마법사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다.
그리고 베이로둠은…….
우우웅!
우웅!
우우우웅!
한 번에 30개의 영창을 구현할 수 있었다.
무려, 다중 영창!
등 뒤에 나타난 수많은 육망성들이 하늘을 가득 수놓았다.
하나같이 한 방에 상대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만한 위력을 지닌 마법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나다.”
탑의 상층부를 지배하는 마계.
마왕과 마족들 사이에서 인정받아 당당히 제2 마법병단을 이끄는 군단장.
그 모든 수식어구들이 가리키고 있는 게 바로 불사의 마도사, 베이로둠이었다.
베이로둠이 위에서 아래를 굽어다 내려다봤다.
“왜? 너무 두려워서 몸이 굳어 버리기라도 한 것이냐? 하긴, 격의 차이를 느낀 이상 응당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한 거겠지.”
진혁이 꼼짝도 하지 못하는 걸 본 베이로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때.
피식.
실소를 머금은 진혁이 천천히 수식언을 읊었다.
[고유 능력 ‘불의 원소’와 ‘빙하조형’…….]
두 개의 스킬을 융합한다.
그리고.
[……’데이라이트’가 융합합니다!]
거기에 세 번째 스킬을 추가한다.
융합의 두 번째 능력은 두 개의 능력이 아닌, 그 이상의 고유 능력과 스킬들을 융합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량의 마력이 소모되는 대대적인 마법전 대신, 마법과 근접 전투를 적절하게 섞어 왔었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다.
적어도 이 녀석에게는 진정한 다중 영창이 무엇인지 가감 없이 보여 줄 생각이었다.
[고유 능력 ‘트리플 매직’을 융합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융합된 능력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새로운 얻은 능력을 ‘결계’를 통해 강화하고.
강화된 능력을 기반으로 다중 영창을 재현한다.
우우우웅!
하나둘.
진혁의 어깨 너머로 고대 룬어를 기반으로 한 결계와 마법진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베이로둠의 안광이 격하게 흔들렸다.
고작 30개 따위가 아니다.
……눈으로 헤아릴 수조차 없다.
셀 수 없이 많은 마법진들이 하늘을 잠식하고 있었다.
[10성급 ‘다중연식 결계’가 구축되었습니다.]
제한 시간 1분.
[‘무한의 마법’이 발현됩니다!]
마법병단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수식어구는 없지만.
고인물에게 그런 허황된 치장 따위는 필요 없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지 않더라도.
그저 이 세계를 즐길 수 있는 자가 진정한 탑의 주인이었으니까.
“나는 이 한 수로 끝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