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211화
211화. 일문일답(一問一答) (1)
진혁이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걸 위해서 기사의 예를 갖추고 근엄한 말을 쏟아냈던 건가.
역시….
‘예상했던 대로군.’
이렇게 될 거라는 건 펜하이머가 처음 접촉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오히려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고민이 됐었는데. 먼저 이야기를 꺼내줘서 다행이다.
‘하지만, 최대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떨어지는 게 더 있겠지.’
어려운 듯. 곤란한 듯. 밀당을 잘해야 펜하이머도 부탁을 하는데 더 많은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자기가 하고도 쉽지 않은 부탁이라는 걸 느꼈는지. 펜하이머가 재빨리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그냥 부탁드리는 건 아닙니다. 당연히 고생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 법. 이번 일을 수락만 해주시면 황실의 보물창고에서 원하는 게 무엇이든 한 가지를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이미 황제폐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호오.
꽤 좋은 걸 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 통 크게 나올 줄이야.
아무래도 펜하이머가 황제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을 너무 가볍게 본 것 같다.
중층부에서 최고로 부유한 제국의 보물창고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기연이었으니까.
“크흠! 큼! 제가 제국과 펜하이머 님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꼭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절대 보물이 탐나서가 아닌 거 아시죠?”
“……예. 물론, 그렇시겠죠.”
펜하이머가 떨떠름하게 대답했을 때였다.
“……!”
“오물….”
음식을 먹던 엘리스와 진혁의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판자촌으로 향해 다가오는 다수의 발걸음.
일반인은 아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어느새 판자촌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전부 사라져 있었다.
“꼬리를 밟은 놈들이 있군요.”
한 박자 정도 늦게 펜하이머도 이변을 깨달았다.
“숫자가 제법 되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귀족들 쪽에서 보낸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제국 내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곳인데 대체 어떻게….”
펜하이머가 짐작이 가지 않는 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는 건. 귀족들보다는 다른 쪽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겠지.
진혁이 기감을 집중하자. 밖에서 다가오는 놈들의 수가 하나둘 파악되기 시작했다.
총 스물 일곱.
기분 나쁜 마력이 문 밖에서 스멀스멀 흘러들어왔다.
코앞까지 다가오니 확실히 알겠다.
지금 밖에 있는 놈들이 결코 평범한 적이 아니라는 걸.
끈적끈적하게 뇌수를 찌르는 기운은 묘한 위화감마저 느껴졌다.
‘싸우는 수밖에 없나.’
문이 하나뿐인 건 둘째 치고 이런 좁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온다.”
엘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콰아앙!
문이 산산조각이 났다.
***
나타난 건 인간이 아니었다.
“끼이이이….”
“그에에엑!”
아니, 정확히는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이라 표현하는 게 맞으리라.
검은색 침을 질질 흘리는 망자(亡者)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쨍그랑!
창문들에서도 다수의 망자들이 허리를 들이밀었다.
어떻게든 내부로 기어들어오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꽤나 그로세트크하게 다가왔다.
“왼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펜하이머가 검을 뽑았고.
“오른쪽은 나네.”
엘리스도 핏방울을 모아 꼬챙이를 만들었다.
그렇게 망자들이 사정거리로 들어온 순간.
펜하이머와 엘리스가 동시에 움직였다.
서걱!
콰콰콰콰콰콰!
푸른빛으로 타오르는 오러블레이드와 시뻘건 꼬챙이가 망자들의 몸을 난도질했다.
종이장처럼 찢겨 나가는 망자들.
공격 하나 하나에 형언할 수 없는 마력이 실려 있던 터라, 연약한 살과 뼈로 이루어진 몸뚱이로는 도저히 버텨낼 수 없었다.
그래.
그게 정상이어야 했건만….
“키이이…!”
“케에엑!”
몸이 너덜너덜해진 망자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떨어져나간 살과 뼈가 순식간에 붙으며, 오히려 처음보다 더 거대한 모습으로 변했다.
상처 부위에 검은색 가시가 돋아낸 건 덤이었다.
쭈우우욱!
가시에서 뿜어진 연녹색 액체가 벽에 닿았다.
그러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이 삽시간에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이런 해괴한 몬스터가….”
“쳇. 우리랑 상성이 좋지 않아.”
가까스로 피한 펜하이머와 엘리스가 질린다는 표정을 자아냈다.
바로 그때.
퍼억!
펜타그리스의 어금니로 만든 활에서 하얀색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가장 앞에 있던 망자의 이마에 바람구멍이 생겼다.
진혁이 재차 화살에 시위를 당겼다.
퍼어억!
“케에에엑!”
두 번째 놈의 머리에도 마찬가지로 바람구멍이 생겼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정확한 일격이다.
시위를 당기고 화살이 발사되는 평범한 동작마저 아름답게 보일 만큼.
그런데.
그그극!
키킥!
머리가 파괴된 망자가 기괴하게 몸을 뒤틀며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러블레이드나 엘리스의 능력이야 언데드에게 뛰어난 효율을 보이는 건 아니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별의 가호’와 ‘데이라이트’로 강화한 화살까지 소용없다고?
이런 경우는 진혁으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재밌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대체 얼마만의 일일까?
알지 못 하는 미지의 적과 마주하는 게.
쿠쿠쿠쿠쿠!
진혁이 익숙하게 마력을 재배열했다.
[Lv2 ‘천라지망(天羅地網)’이 발동됩니다!]
투명한 파장이 주위에 있는 적들에게로 이어졌다.
‘정면은 열 다섯, 측면에 각각 여섯씩 퍼져 있군.’
천라지망을 통해 적들의 수와 위치를 파악한 뒤.
[Lv11 ‘빙하조형(氷河造形)’이 발동됩니다!]
광역 군중제어 효과가 있는 빙하조형을 통해 발을 묶었다.
바닥에 돋아난 얼음 서리들이 망자들의 발바닥에 늘러 붙었다.
여기에 마무리를 짓는 건, 베이로둠 때와 마찬가지로 다중융합을 통한 새로운 스킬의 발현이었다.
[고유능력 ‘만다라(曼茶羅)’와 고유능력 ‘천독(千毒)’, 스킬 ‘거인의 손아귀’가 융합합니다!]
우우우우웅!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무려, 세 가지 스킬의 융합.
몸에 큰 부담이 가긴 했으나, 비정상적인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해야만 한다.
[융합에 성공했습니다!]
[고유능력 ‘거신의 일격’을 획득하셨습니다!]
[융합된 능력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연이어 나열되는 상태창들.
순간. 진혁의 주먹을 중심으로 하얀색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마력이 시계방향을 그리며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회전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지금!’
극한을 뛰어넘은 폭풍이 일직선으로 뻗었다.
콰콰콰콰콰콰!
주먹이 향한 방향으로 눈부신 섬광이 가로질렀다.
권(拳)이 대상을 파괴하기 위한 거라면.
거신의 일격은 대상을 징벌하기 위한 것이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 무차별적인 응징.
상반신이 모조리 날아간 망자들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후우우….”
진혁이 깊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결계로 주위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소음까지 줄이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네.’
워낙 막대한 마력을 일순간에 쏟아 부은 터라, 몸에 가해지는 압박도 상상을 초월했다.
근육이 삐걱이고 혈관이 모조리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농…담이지?”
망자들은 그 일격을 맞고도 멈추지 않았다.
또 다시 기괴한 각도로 몸을 뒤틀며 일어나는 걸 보자, 진혁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이번 일은 귀족들이 꾸민 짓이 아니다.
이교도니 뭐니 하면서 사술을 극도로 혐오하는 놈들의 특성상, 이런 일을 벌일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놈들이 보유한 수준으로는 이 정도 괴물들을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했다.
가장 큰 후보가 목록에서 사라지자, 두 번째 후보가 목록의 최상위로 올라왔다.
이런 사술을 거리낌 없이 부릴 수 있으면서 그만한 힘과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들….
동시에.
‘나에게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집단.’
그런 놈들은 단 하나뿐이다.
“마인협회.”
진혁이 천천히 그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망자들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저벅.
눈웃음이 꽤나 인상적인 서양 남자가 망자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원래라면 조금 더 힘을 뺀 뒤에 등장하려고 했는데, 덕분에 타이밍이 살짝 어긋났네요.”
“날 아나 봐?”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저희에게 언노운에 관한 거짓정보를 흘려, 천유성에게 안내한 장본인을 말이죠. 덕분에 제가 그분 오피스텔까지 찾아가서 싸우느라 하루를 꼬박 날렸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정신병동에서 랜슬롯이란 칭호를 지닌 호센벨트에게 그런 정보를 흘렸던 일이 기억났다.
평범하게 휴일을 보내고 있던 천유성의 오피스텔이 반파되고. 분노에 찬 천유성이 검을 뽑으려 했던 일도 덩달아 떠올랐고.
“그렇다는 말은 너도 그 원탁인지 뭔지 하는 곳에 일원이라는 건가?”
“예. 편하게 가웨인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가웨인이라….
새삼스럽지만 작명 센스 하나 만큼은 여느 중2 못지않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녀석의 이름 따위가 아니다.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는 점이지.
“꽤 재밌는 장난감을 만들어 온 모양인데, 바로 공격하지 않는 다는 건 뭔가 하고 싶다는 말이 있다는 걸로 해석해야 하나?”
신성력에도 저항력을 가진 터무니없는 망자들을 데리고 있으면서도. 정작 가웨인은 적극적으로 공격에 힘을 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포위망을 굳힌 채 위협만 할 뿐.
단지 그뿐이었다.
“역시, 듣던 대로 눈치가 빠르시군요. 사실 강진혁 플레이어님에게 한 가지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마인들의 밑으로 들어와 뒤나 닦아주라는 개소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저번에도 말했지만, 싫은 놈들하고 한 배를 탈 바엔 죽는 게 낫다는 주의라서 말이야.”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솔직히 저희가 손을 잡아봤자 마지막엔 서로의 목덜미에 칼을 꼽을 거라는 건 너무나 뻔하지 않겠습니까?”
물과 기름처럼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관계.
아무리 겉으로 웃으면서 손을 잡아봤자 이 이야기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가웨인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에, 어설픈 거짓말 대신 직설적인 본론을 꺼내든 것이다.
“그럼 뭘 제안하고 싶은 거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교환. 진혁 님이 저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시고. 저 역시 진혁님에게 궁금한 것들을 여쭤보겠습니다.”
이건… 꽤나 흥미로운 제안이다.
마인 협회에 관해서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었는데, 그걸 물어볼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정보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가웨인이 하는 말은 분명, 메리트가 있었다.
‘시간을 끌 겸 잠시 어울려줘야겠어.’
대화를 하는 사이, 펜하이머가 바닥에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낡아빠진 집이긴 했지만, 안전가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뭔가 준비해둔 장치가 있는 거겠지.
“제안을 받아들인다 치고. 서로가 질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어떻게 보장할 거지?”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고유능력이 바로 신뢰를 깨뜨리지 못 하게 강제하는 거니까요.”
[가웨인이 고유능력 ‘신뢰의 천칭’을 발동합니다!]
[양쪽은 순서대로 서로에게 질문을 하며, 상대는 반드시 그 질문에 진실로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침묵할 경우 그 질문의 가치에 대응하는 정보를 제공해야합니다.]
[이를 어기는 자는 천칭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순식간에 진혁과 가웨인의 발 밑에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천칭이 나타났다.
톱날 같이 날카로운 쇳덩이들이 보였다.
상태창에 적힌 대로 거짓을 고할 경우, 그 즉시 톱날들이 맞물리는 참사로 이어질 게 틀림없었다.
“신뢰적인 부분은 신용해도 될 것 같네.”
“제가 먼저 질문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선공권보다는 후공권이 취향이다. 대화를 하며 얻은 사소한 정보들을 통해 더욱 핵심을 찌를 수 있는 질문들을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가웨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첫 번째 질문은….
……완전히 허를 찌르는 종류의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