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223화
223화. 거인들의 성채 (2)
엘리스와 티본이 향한 곳은 제국의 진형이었다.
막대한 부를 자랑하는 제국답게 타이탄을 비롯한 기사단은 물론, 수천에 해당하는 보병 병력을 계곡 아래에 배치해 둔 상태였다.
“하아…… 진짜 멀긴 머네. 그 말미잘 같은 놈도. 어떻게 말 한 번 실수했다고 여기까지 보내냐? 넌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엘리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짜증이 가득 실린 말투.
5시간 가까이 움직인 탓에, 피로도가 극에 달해 있었다.
“달그락. 저도 레이디 마스터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레이디 마스터라고? 내가?”
“예. 마스터의 안주인님 아니십니까?”
“안주인…….”
엘리스가 그 단어를 천천히 곱씹었다.
“흐음 큼! 여러 칭호로 불려 오긴 했지만, 꽤나 나쁘지 않은 어감이구나. 하긴, 나처럼 기품 있는 존재에겐 그에 걸맞은 칭호가 필요하긴 하지.”
“음, 기품이라면 그 성녀라 불린 분이 조금 더 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마스터를 통해 주위에 있는 분들에 대해 찾아보고 있는데, 역시 우아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건 그분이…….”
“야…….”
“예?”
“너 아예 곰탕으로 끓여 줄까? 뼈대가 소라 국물이 아주 진하게 나올 것 같은데?”
엘리스가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쿠쿠쿠쿠쿠!
주먹만 한 붉은색 핏방울들이 티본의 주위를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여, 역시 레이디 마스터님이랑 비교하면 성녀고 뭐고 간에 비교 대상 자체가 되질 않죠. 달그락. 달그락.”
“그래.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네.”
잔뜩 콧대가 높아진 엘리스가 모았던 마력을 흩어 버렸다.
그리고 기분이 좀 풀어졌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국의 본대가 모여 있는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물론, 언노운을 상징하는 가면을 착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일에 있어 엘리스는 어디까지나 언노운의 대역에 불과했으니까.
***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들과 사소한 사건이 있었지만, 엘리스는 평화롭게 일을 잘 마무리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이번 원정에서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귀족의 개인 텐트였다.
“……그래서. 내일 밤 거인 놈들의 성채에 펼쳐진 결계가 약화되니, 그때를 노려라. 이 말인가?”
베인슈텔른 공작이 보낸 심복.
호비에르 백작.
푸짐한 덩치에 두 겹으로 겹친 턱과 금색 콧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닭고기를 통째로 씹어 먹는 건 더더욱 인상적이긴 하다.
“맞아. 무림 놈들한테 선수를 뺏기지 않으려면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야. 그쪽도 결계에 대해서 눈치를 챈 것 같더라고.”
“결계라…….”
호비에르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여러 가지로 냄새가 나는 이야기였지만,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가면을 쓴 상대가 거인들을 상대로 성벽에서 보여 줬던 무용이 워낙에 엄청났기 때문이다.
‘강진혁이라는 인물은 다루기 까다로워 공작께서도 거리를 두라고 하셨지만. 이자는 아직까지 제대로 파악이 되어 있지 않아.’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회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그 누구도 떠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혹시, 내가 포섭할 수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대마도사를 영입하게 된 전과는 거인들의 성채를 얻는 것만큼이나 크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원거리전에서 최고의 화력을 자랑하는 게 바로 마법사 아니던가?
기사와 타이탄과 더불어 제국의 3개 축을 담당하는 고급 전력인 만큼 그 가치는 감히 숫자 따위로 따질 수 없었다.
‘혹시 상대가 수작을 부리더라도 우리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가 있으면 얼마든지 변수에도 대비할 수 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성채에 관한 정보는 고맙게 받아들이지. 그건 그렇고. 듣자하니, 그대가 강진혁이라는 자와 함께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맞아. 서로 상부상조하고 있는 사이야. 요즘 들어 심술궂긴 해졌지만.”
“흐음. 그건 좀 이상하군.”
“뭐가 이상한데?”
엘리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호비에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자와 함께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플레이어 하나가 제안할 수 있는 대가엔 그 한계가 있을 터. 하물며, 그대 같이 위대한 대마도사가 굳이 일개 개인에게 얽매여 있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호비에르는 제국이 많은 걸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강조했다.
상대를 띄워주면서 동시에 더 밝은 미래가 있다는 걸 알려준다면.
반드시 넘어올 거다.
‘제까짓 게 감히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겠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너희와 함께하면 내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거야?”
상대의 입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건 넘어왔다.
“물론이다. 네가 바라는 게 그 무엇이든 우리가 반드시 이뤄 주지.”
호비에르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폈다.
그런데.
“무리야.”
엘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무리라니.”
“너희로는 절대 내 소망을 이뤄 줄 수 없어. 아……. 자존심 상해 하진 마. 너희가 아니라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기가 막히는군. 우리가 지닌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나 본데, 우리가 바로 탑 중층부의 최대 세력. 제국이다.”
“너희야말로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잖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희로는 무리야.”
“허면, 강진혁이란 인간은 가능하다는 건가? 우리도 하지 못하는 걸 고작 그 인간 하나가 이뤄 줄 수 있다고?”
수많은 병력과 풍족한 영토.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쌓아 올린 대제국.
그 압도적인 세력과 인간 하나를 같은 저울에 올리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하지만.
엘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어투로 대답했다.
“너희 전부를 끌어 모은다 해도 그 녀석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최강이자 최악의 랭커.
그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은 채 묵묵히 위로 향하는 플레이어.
“이 탑에서 내 소망을 이뤄 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엘리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드리웠다.
“그건 그 녀석 단 한 명뿐이야.”
***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진혁이 예고했던 시간에 근접하자.
제국과 무림, 양 측의 진형에선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월영과 엘리스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성채의 결계가 약해지는지 확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그 망할 거인왕의 목을 따고 거점을 손에 넣어 주마.
-천마신교가 완전히 밖으로 나오기 전에,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천마와의 싸움에서 승산이 있어.
서로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한 채.
자정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보름달이 완전히 차오른 순간.
우우우웅!
성채 주위에 있던 투명한 막이 미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틀림없다.
결계에 무언가 이변이 생겼다.
“타이탄을 보내라! 어떤 저주가 해체됐는지 파악한 다음 즉각 본대를 보낼 것이다!”
호베이르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각 대주들은 절정급 위주로 별동대를 편성하세요. 결계만 해결할 수 있다면 반나절 안에 성채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겁니다.”
백설린과 남궁천도 이에 빠르게 상황을 판단해 결정을 내렸다.
적막에 잠겨 있던 숲에 거대한 전운이 드리웠다.
***
같은 시각.
진혁은 홀로 거인들의 성채로 향했다.
결계 내부로 진입하자, 묘한 위화감이 전신을 얽매었다.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전후좌우의 감각이 왜곡됩니다.]
[7성급 결계 ‘마력의 틈’으로 인해 저주의 일부분이 발동되지 않았습니다.]
[내부로 깊숙이 진입할 경우 추가적인 저주가 중첩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몽환의 실낙원’을 약화시키기 위한 결계를 그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
시간이나 재료가 부족하다는 건 둘째 치고.
12성급 결계에 틈을 찾는 일이 워낙에 까다로웠던 탓이다.
‘해체한 저주는 스킬이 랜덤으로 발동되는 저주인가 보군.’
가장 까다로운 저주인 전후좌우의 감각 왜곡을 막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이것만으로도 제국과 무림을 낚기 위한 미끼를 충분할 테니까.
진혁이 앞에 있던 거인의 종아리를 툭하고 건드렸다.
“알고 있지? 혹시라도 거짓 암호를 말해 경비들을 부르는 것 따위의 수작을 부렸다간…….”
“거, 걱정 마라.”
“걱정은 안 해. 만약 그러면 아예 네 주니어 2세를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면 되니.”
“…….”
어기적어기적 걷는 거인의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다.
맞아서는 안 될 부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게 틀림없으리라.
“테크리오쉬.”
굵고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직, 거인들의 입을 통해서만 열리는 비밀 루트.
바로 이걸 위해서 어제 주위를 정찰하고 있던 거인 하나를 생포했었다.
쿠쿠쿠쿠쿠!
높이만 수백 미터에 이르는 성채의 일부분에 거인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틈이 만들어졌다.
과연, 이래서 내부 정보가 가장 좋은 법이다.
“나, 나는…… 할 걸 다 했으니. 이제 그만 가 보겠다.”
거인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으음. 미안하지만,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내가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다는 주의라서 말이지.”
“서, 설마, 이렇게까지 했는데. 날 죽이겠다는 거냐?”
“너는 거인이고 나는 인간이야. 애초에 죽이고 죽이는 관계가 당연하지. 무엇보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경비 병력에게 이 일을 알릴 생각이잖아 너?”
정을 주고받는 건 그럴 만한 상대에게나 가능한 이야기다.
너처럼,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라.
“히, 히이익!”
공포에 질린 거인이 등을 훤히 드러낸 채 도망치려 했다.
이제라도 고함을 지르며, 동료들에게 경고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쩌저저적!
순식간에 얼어붙는 성대에선 그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제법 운치 있는 동상이네.”
진혁이 7m 크기의 얼음 덩어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전후좌우의 감각이 왜곡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빙하조형으로 만들어진 조각에 흠잡을 곳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그 정도 제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바로 그때.
쿠우우웅!
쿵! 쿵! 쿵!
꽤나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적……이다!”
“인간 놈들이 떼거지로 몰려온다!”
“왕께 알려라. 적들이 온다고!”
거친 고함 소리가 반 박자 늦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드디어 두 세력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제국과 무림 그리고 거인들까지.
체스판의 말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서둘러야겠어.’
진혁이 다소 어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조금 더 적응의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저벅.
그렇게 통로를 타라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칠흑 같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눈이 부실 정도의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황금 장미들로 가득 찬 정원.
그리고 그 한가운데 솟아 있는 백색 나무.
아포칼립스 속 마지막 실낙원을 표현한 것처럼 그 광경은 그저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 속에서도 진혁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싹…….
전신의 감각이 극도로 달아올랐다.
신경이 타들어 갔고 세포 하나하나의 흐름마저 느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혁은 알고 있었다.
이 나무 앞에 서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코인 거래소가 오픈됩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최소한의 방비를 하는 것뿐.
진혁이 거래소에 있는 아이템들을 빠르게 훑었다.
이중에서…….
……이번 난관을 돌파하게 해 줄 히든 피스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