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선택과 준비
‘도와 달라.’
보통 사람들이 흔히 주고받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고.
진혁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결코 아니었다.
언제나 홀로 설계를 했고 홀로 판을 흔들었다.
나머지는 그저 거들 뿐.
그런데.
‘이 녀석이 도움을 구하다니.’
천유성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상황이 얼마나 심상치 않은지 짐작이 갔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꺼내려는 게 분명하리라.
“천마신교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냐?”
“설명하자면 긴데, 골치 아픈 놈이 냄새를 맡았어. 자세한 이야기는 뭐라도 먹으면서 천천히 하도록 할게. 모처럼의 휴식인데,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어?”
“빌어먹을. 잔뜩 심각한 분위기란 분위기는 다 잡아놓고. 이제 와서 밥이 목구멍에 넘어갈 것 같으냐?”
“응. 잘 넘어갈 것 같아.”
“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일단 잘 먹어야지. 안 그래?”
진혁이 힐끗 나머지 사람들을 바라봤다.
“짐은 배가 고프느니라.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오늘 못 먹은 고기와 디저트가 그리울 것 같다.”
“저도 이미 한 번 죽은 목숨을 진혁 님께서 살려주신 거라. 헤헤. 무엇보다 진혁 님이랑 함께하면 어떻게든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요?”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한국 음식이 그리웠는데, 잘됐네요. 대신 한우 갈비라는 걸로 사 주세요.”
긍정적인 반응이다.
“당연히 사 드려야죠. 자, 유성아. 한우 갈비가 먹고 싶다고 하시네.”
“아니. 대체 왜 내가 밥값을 내야 하는 거냐?”
그거야…….
“당연히 네가 여기서 제일 나이가 많으니까.”
선비 옷을 입었으면 당연히 지엄하신 유교의 법도에 따라야지.
장유유서는 삼강오륜의 근본 중 근본이다.
하늘의 율법이 지엄하거늘, 어딜 아랫사람에게 얻어먹으려고.
“우, 웃기지 마라! 그런 거라면 엘리스 씨나 안드리아 씨는…….”
천유성이 다급하게 외치려는 걸 진혁이 도중에 끊었다.
“참고로 거주자는 뺀다. 쟤넨 유교가 뭔지 장유유서가 뭔지도 몰라.”
“유교라면 먹는 것이냐? 기왕이면 달달한 거면 좋겠구나.”
“저도 처음 들어봐요!”
엘리스와 안드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잘 먹을게. ‘형’.”
진혁 역시 처음으로 존칭을 사용했다.
연장자에 대한 존경심이 뚝뚝 묻어 나오는 표정을 지은 건 덤이었다.
“…….”
천유성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완전히 당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당한 데다, 다들 잘 먹겠다며 감사의 인사까지 하고 있는 터라 이제 와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광진구에 위치한 그랜드 워커힐 호텔이었다.
1인당 50만 원짜리 코스 요리가 나오는 최고급 식당.
곧이어, 마블링이 50% 함유된 각종 특수 부위들이 순차적으로 나왔다.
“오오오! 이 맛은?”
“와아아…….”
모두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특히나 엘리스와 안드리아는 연신 입을 오물거리며 비싼 소고기들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할……부도 가능한 겁니까?”
천유성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유연화와 이태민까지 참여했기에, 가격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솟구쳤다.
***
어느 정도 배가 차자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상층부의 존재와 좌호법,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까지. 다양한 종류의 주제가 쏟아졌다.
물론, 히든 퀘스트의 존재나 몇 가지 중요한 정보는 그럴듯하게 얼버무렸다.
상층부의 존재가 올 것이라는 것도 스승님에게 들었다는 식으로 포장했고.
“……천마신교에서 그런 일이 있었군. 그렇다면, 상층부의 놈들이 조만간 아래로 내려온다는 뜻이냐?”
“아마 그렇게 될 거야. 정확히 몇 층으로 내려올지. 아니면, 탑 밖으로 튀어나올지는 모르지만, 어디가 됐든 지옥이 되는 걸 피할 수는 없겠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생존하는 것만 생각한다는 뜻이야.”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지금 수준에선 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진조나 마왕들은 물론, 신격들마저도 50층의 존재들에겐 이길 수 없었으니까.
‘나 역시 눈이 부실 정도로 독보적인 성장을 했다고 한들, 지금 상태에선 무리일 수밖에.’
예전에도 50층 한 층을 돌파하는 데만 3년이 넘게 걸렸으니. 고작 레벨 100이 넘는 정도론 상처하나 입히는 것도 만만치 않을 거다.
따라서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정파 쪽에서도 지원을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쪽 고수들이라면 놈들의 최하급 병사들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어때. 설득할 수 있겠어?”
“무리일 거다. 지금 무림맹에선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일전에 마무리 짓지 못한 중층부의 패권을 다투기 위해 무림맹은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여기에 천마신교까지 개입하게 생겼으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이 펼쳐질 터.
이 부분도 절대 소홀히 여겨선 안 된다.
좌호법…… 아니, 사마자 그 능구렁이 역시 뱀파이어 가문과 하스팅까지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탑 내부야 그렇다 치더라도 탑 외부는 반드시 대비를 해야 해. 적어도 일반 시민들이 죽는 건 막아야 할 테니.’
진혁의 고민을 짐작했는지. 천유성이 한 마디 덧붙였다.
“정 불안하면, 대형 길드에게 말해 보는 게 어떠냐? 거기도 도움이 되긴 할 거다.”
“음.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갑자기 나타나서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니 무조건 제 말을 믿으세요. 라고 하면 믿어 줄 것 같지가 않더라고. 내가 그동안 대형 길드를 여러 번 벗겨먹은 전적이 있어서 더욱더 믿으려 하지 않을걸?”
“하긴, 네 이미지가 썩 좋은 건 아니지. 나라도 의심부터 했을 것 같긴 하다.”
천유성이 고민의 여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그렇게 빨리 수긍해 버리면 상처잖아.
나름대로 도움도 많이 줬단 말이야.
“그럼, 테레사 씨는 어떠냐? 너랑 달리 이미지도 좋고 인지도도 높을 텐데?”
“테레사 씨……는.”
테레사는 인지도는 좋았지만, 7대 길드로 구성된 연합에서 탈퇴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발언권이 없었다.
부탁을 해 봤자 곤란하기만 할 뿐이겠지.
유천영 어르신 역시 탑을 오르는 것과 관련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가능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번 일을 대대적으로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어느 정도 영향력도 있으면서 신뢰도 높게 이 사건을 대비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필요하다.
“우선 각자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고. 태민이는 내가 몇 가지 포인트를 알려 줄 테니, 기계군주를 이용해 거점 방어에 대비해 줘. 연화는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모아 태민이를 지원해 주고.”
“알겠어요. 형.”
“응 오빠. 할아버지한테도 말해 볼게.”
“나머지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적힌 리스트를 줄 테니. 반드시 일주일 안에 끝내. 각자가 더 좋은 계획이 있다면 주도적으로 우선순위를 바꿔도 좋아.”
남은 기간 동안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한다.
생존 확률을 1%라도 올리기 위해서라도.
***
같은 시간.
일본에 위치한 사무라이 길드 본사.
“허억! 허억, 허억…….”
타케시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신은 땀에 흥건하게 젖었고. 호흡이 걷잡을 수 없이 가팔랐다.
길고긴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이럴 수가…….”
사용도 하지 않았건만, ‘반쪽 미래시’가 저절로 발동했다.
이런 적은 고유 능력을 얻은 이후 처음이다.
뇌리에 선명하게 박힌 장면으로 볼 때 이건 틀림없는 진실.
다시 말해 능력이 향상된 게 틀림없다.
하지만, 타케시의 얼굴에서 기쁨이나 희열 따위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재와 불 그리고 죽음.
무너지는 건물들과 산처럼 쌓인 시체들은 종말을 고하는 마지막 장면들이었다.
당장 알려야 한다.
일본 정부든, 세계 각성자 협회든. 사무라이 길드나 다른 대형 길드의 수뇌부들에게든.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려야만 한다.
한데.
“알린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대체 어느 누가 저걸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무리야. 전 세계가 힘을 모은다고 해도 절대 막을 수 없어.’
이건 그런 수준의 레벨이 아니다.
천재지변처럼, 그저 자신만은 피해가길 고개를 숙이고 기도해야 하는 종류지.
바로 그때.
타케시의 머릿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신격 ‘강진혁’.
플레이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압도적 위용을 보여줬던 절대자.
그분이라면…….
‘어쩌면 이 일을 해결해 주실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가능해. 그분이라면 분명.’
문제는 인류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으니 구해 달라고 선뜻 부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고. 이쪽이 필요한 것만 해결해 달라고 떼를 썼다간 또 다른 천재지변을 마주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길드에 말해서 값비싼 걸 전부 모아야겠어. 뭐가 있더라? 마음에 드실 만한 게 몇 개는 있던 걸로 아는데.’
성유물, 코인, 마정석.
무엇이든 아낄 때가 아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알려 그분의 뒤를 지원할 수 있는 공격대를 뽑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쩌면 실례를 범한 걸 용서해 주실지도 몰랐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타케시가 곧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뚜르르…….
짧은 통화음이 지나가고.
딸칵!
“무슨 일인가?”
사무라이 길드의 마스터인 요시오가 전화를 받았다.
“지금 당장 길드의 랭커 전부와…… 일본 각성자 협회장님의 화상 회의를 준비해 주십시오.”
“설마……!”
“예. 제 미래시에 무언가 보였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알겠네. 바로 연락을 돌리도록 하지.”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
미래를 볼 수 있는 랭커의 예언.
난이도를 가늠할 수 없는 재앙이 닥칠 거라는 말에,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꼬만이: 아니, 또또 오바하네. 꿈인지 뭐시기인지 선무당이 하는 소리에 왜케 난리임?
-jsh3: 그러게. 어떻게든 돈 타내려고 불안감 조성하는 말 한 마디에 다 낚인 거 아니냐?
-white: ㄴㄴ. 타케시 저 랭커. 나도 아는데 은근히 맞히는 것도 많았음.
-kc27: ㅇㅇ. 3개월 전 미국이랑 일본 연합 레이드에서도 저 사람 예언 덕분에 공격대 전멸할 위기 피했잖아. 그것도 기가 막히게.
-슈리마의 황제: 각국 정부와 대형 길드에서 난리난 거 보면, 마냥 허언은 아닌 듯.
-크링냐: 그럼 전부 다 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임?
-예루미나: 설마, 뭔가 방법이 있겠지.
-Haenaeng: 너무 걱정들 하지 마. 플레이어 수가 몇인데, 충분할 거야. 아마도.
우려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불안해져 가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방송을 통해 성명을 발표하던 타케시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저희는 모든 자원과 인력을 동원해 S급이신 강진혁 플레이어님을 지원하기로 합의했으며, 그분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즉시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끝냈습니다.”
-ksb: 강진혁? 내가 아는 그 강진혁?
-병신 나는이다: 와. 그래 강진혁이 있었지!
-Mujin: ^^
-나만믿어봐: 거기다 전 세계 랭커들이 전부 힘을 모으면 해볼 만하겠는데?
-fore: 강진혁을 중심으로 모인다니.
-YJH: 가슴이 웅장해진다.
-묘일: [속보] 대형 길드 마스터, 부마스터 잠시 뒤 뷰튜브에서 공격대 전원 소개하고 인터뷰 발표한다고 함.
-리챠: 진짜네. 세상에. 이거 레이드 규모 최대가 될 것 같은데?
-효자손: 랭커들도 그렇고 플레이어 수도 그렇고. 엄청날 듯. 기왕이면 언노운도 함께 모였으면 좋겠는데. 요즘 활동이 좀 뜸하던데 당연히 오겠지?
-JeLuce: 북유럽 쪽에서도 최상급 성유물을 준비했다고 하더라. 진짜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아.
‘역시, 그때 살려 두길 잘 했어.’
시련의 탑 커뮤니티와 타케시의 행동을 지켜보던 진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반쪽 미래시’가 도움이 될 날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해줬다.
각종 길드에서 밀려들어오는 지원 약속으로 인해 개인 연락창이 폭주할 지경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야차의 아이템 세트는 전부 진혁 님께서 부탁드렸던 것들로 교환해드렸습니다. 아이템은 개인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확인하실 수 있고요. 근데,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무기는…….”
릭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까지 진혁의 전투는 전부 관찰해왔지만, 이런 류의 무기를 사용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가장 애용했던 무기거든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좋은 거래를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침, 야차에 관한 아이템들을 원하시는 분이 계셨거든요. 아! 그리고…….”
큼! 큼!
릭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거래에 있어 가장 민감한 부분인 수수료에 관해서 말을 꺼내려는 것이다.
“얼마였죠?”
“거래에 드는 비용과 인건비 등을 포함해 250만 코인 되겠습니다.”
“으음.”
250만 코인이라…….
필요한 아이템을 교환해 준 건 고마운데, 뭔가 그 많은 코인을 수고비로 주자니 너무 아깝다.
“그러지 말고. 저랑 간단하게 내기 하나만 하시죠.”
진혁이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