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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292화


292화. 검은 염소들 (2)

게이트 너머에서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거대한 검은 가지.

그것에 달린 수많은 입과 이빨.

그리고.

이빨에서 떨어지는 액체에서 검은 염소의 형상을 한 수십 미터 크기의 염소들이 나타났다.

‘슈브 니구라스’의 사념체 병사들이다.

숫자는 다섯 마리뿐이지만, 하나하나가 얼마나 강력한 마력을 지녔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끄아아악!”

“아아악!”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다.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세포들이 비명을 지른다.

“끄으으…….”

마법계열 플레이어들은 가까스로 견뎌냈지만, 이미 전의는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 무슨 놈의 저런 괴물이…….”

“우리로는…… 절대 못 막아.”

더 강한 랭커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번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아니, 만에 하나 랭커들이 온다고 해도 과연 저것들의 털끝이라도 건드릴 수 있을지…….

도저히 그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꿀렁하고.

강물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물결을 따라 퍼져 가는 정체불명의 액체.

전신이 본능적으로 경고를 보냈다.

저건 위험하다고.

“도망……쳐!”

플레이어들이 실드를 잔뜩 끌어올린 채 뒤에 있던 시민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콰콰콰콰콰콰콰!

검은 파도가 순식간에 플레이어들이 있는 강변을 휩쓸었다.

실드는 유리조각처럼 박살났고 뒤에 있던 탱커들이 충격을 견디지 못해 입에서 피를 쏟았다.

“아아악!”

“꺄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는 동료들.

방패도, 실드도 모두 의미가 없다.

지옥이다.

여긴 지옥의 한복판이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얼어버린 손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들도 이럴진대…… 일반인들은 오죽하겠는가?

그야말로 압도적인 공포.

그런데.

파도가 무언가에 막혀 튕겨 나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플레이어들 앞에 다수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발해 길드의 간판 딜러인 천민수와 메인 공격대였다.

“발해다! 발해 길드의 천민수야!”

“성유물도 있어. 대군 방어용 ‘천리장성(千里長城)’이다!”

“우. 우리 살 수 있는 건가?”

A급 최상위 플레이어 중 하나인 천민수.

그리고 그와 함께 온 플레이어들도 전원이 상위 등급 유적 공략 경험이 있는 이들로 구성된 공격대였다.

게다가 거점 방어에 특화된 ‘초록색’ 등급의 성유물까지 가지고 올 줄이야.

[천리장성의 특수 효과 ‘산천진기(山川珍奇)’가 발동됩니다!]

[거점의 방어력이 500%만큼 상승합니다!]

[사기가 +30만큼 상승합니다!]

[개인이 보유한 모든 스탯이 +3만큼 상승합니다!]

[(절대 판정 효과): 모든 적들의 어그로가 성벽에 집중됩니다!]

천리장성을 대폭 축소시켜 놓은 외형의 성유물이 빛을 발했다.

황금색 운무가 일어나며, 갑천을 따라 길고 긴 성벽이 나타났다.

동시에.

“그오오오오…….”

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검은 염소들이 움직였다.

쿠웅!

강의 밑바닥에 무거운 충격이 느껴졌다.

워낙에 커다란 덩치를 지닌 탓에, 작은 파도가 천변까지 밀려오기 시작했다.

“처, 천민수 플레이어님. 저놈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분석 팀에 따르면 저 수많은 이빨이 달린 나뭇가지가 적의 본체입니다. 하지만, 놈은 이미 몇 차례나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데 실패하고 있죠.”

“본체는 넘어오지 못할 거라는 말씀입니까?”

“적어도 지금은요.”

천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에 있는 마수들은 아마 놈이 부리는 부하 정도일 터.

한국의 주력 길드들과 일본의 지원이 올 때까지는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다.

“다들 준비해. 놈들이 성벽을 들이박아 대는 동안 단숨에 뒤에서 기습을 가할 거니.”

천민수가 함께 온 동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섯 마리라…….”

“세 명이서 하나씩 맡으면 되겠지?”

“강하긴 한데, 본체 쪽만 움직이지 않으면 해볼 만해. 두 발로 걷는 염소니까 연수를 절단내버리면 되겠군.”

스릉!

철컹!

각종 병장기들이 뽑혔다.

덩치가 큰 만큼, 거리를 좁히면 공격할 곳이 많다.

바로 그때, 염소들이 천리장성 앞에 도달했다.

콰아아앙!

손이 장벽에 닿자, 굉음이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장성은 과거 국경을 지켰던 것처럼 지금의 일격 역시 견뎌냈다.

……지금이다.

“셋에 간다.”

천민수가 무게중심을 낮췄다.

물 위에서 전투가 가능할 수 있도록 경량화 마법과 이동 속도 증가 마법이 중첩되었다.

“하나.”

마력이 다리로 모이는가 싶더니.

“둘.”

툭!

츳……!

바닥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셋.”

모두가 사라졌다.

노린 곳은 검은 염소들의 후방.

정확하게 틈을 찌른 기습이었다.

그런데.

“어……?”

분명, 사각에서 파고들었음에도 천민수의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이 느낌, 이 감각…….

틀림없다.

[대상에게 어그로 효과가 발동되지 않습니다.]

천리장성의 특수효과가…… 초록색 등급의 성유물의 절대 판정 효과가…….

먹히지 않는다.

게다가 코앞에 다가가고 나서야 천민수는 비로소 느꼈다.

자신들이 가늠한 건 검은 염소의 표면에 있는 마력.

심층부에는 표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길하고 끈적끈적한 사념들이 탁류처럼 흐르고 있었다.

“아…… 안 돼!”

다급히 고함을 쳤으나 이미 늦었다.

플레이어들을 감지한 검은 염소의 몸에서 수십 줄기의 선들이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익!

검은색 선이 천민수와 나머지 플레이어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리고 그보다 더 비릿한 철분 맛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쿨럭…….”

천민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라진 하반신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광경이었다.

“그오오오오!”

검은 염소 한 마리의 뿔에 마력이 응집됐다.

선이 아닌 구체.

사념이 모인 마력 덩어리가 눈부신 광휘를 발산했다.

콰콰콰콰콰콰콰!

구체가 천리장성을 지나 그 뒤에 있던 플레이어들까지 증발시켜 버렸다.

[천리장성이 돌파되었습니다.]

도로와 건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그저 가볍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지형과 지물이 바뀐다.

그렇게.

가장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었다.

***

한국 각성자 협회 본부.

이곳은 현재 숨소리 하나하나가 들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덜덜덜!

한상진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믿었던 성유물이 저토록 허무하게 박살날 줄이야.

갑천에 나타난 다섯 마리의 마수는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협회장님. 방금 미국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워싱턴 일대 반파. 추정 사망자만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쪽도 마찬가지예요. 투입된 올림포스 길드와 중소 길드에서 보낸 공격대 3개가 전멸했고 사단급 부대 역시 사라졌다는 정보입니다.”

“중국 광저우 쪽도 방금 게이트가 개방됐는데, 사실상 도시 방어를 포기했다고…….”

여기저기서 최악의 소식만 이어졌다.

고작 30분.

단, 30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

그동안 너무나 순탄하게 탑을 올라왔다.

유럽의 리치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몇몇 굵직한 아웃브레이크가 있었지만, 어차피 그건 한국과는 해당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안심했다.

한국만은 안전할 거라고.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라도 누군가가 나서 해결해 줄 거라고.

‘방심……과 자만이 지금의 결과를 낳은 건가.’

어쩌면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자신들에게 내리는 벌로서.

“혀, 협회장님.”

“……알고 있습니다.”

한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자책이나 절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야 할 때이지.

“코드 레드로 격상하겠습니다. 청와대에는 제가 직접 연락하도록 하죠.”

코드 레드.

아직까지 한 번도 발령된 적 없었지만, 각성자 협회장에게 주어진 고유 권한이다.

한국이 보유한 플레이어들로 처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아웃브레이크가 일어날 경우 그 지역을 버리고 후방에 경계선을 재구축하는 절차다.

“대전에 남아 있는 플레이어들과 군, 경찰들은 시민들의 대피를 최우선으로 해 주시고 계룡과 세종 그리고 옥천을 2차 집결지로 지정하겠습니다.”

세 곳 중에서 검은 염소들이 향하는 곳이 확정된다면.

그때 장거리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모든 화력을 집중시킬 계획이었다.

“랭커들 위치는 지금 어디쯤입니까?”

“20분 정도 거리예요.”

단군과 싸울아비는 이미 탑에서 모든 랭커들을 불러들였고.

곧, 일본에서 사무라이 길드 역시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들이 전부 모인다면 막을 수 있을까요?”

통신을 담당하던 직원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찾으려는 듯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한상진은 헛된 희망팔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무리일 겁니다.”

영상을 통해 본 검은 염소들의 강함은 지금까지 본 어떠한 마수와도 달랐다.

단순히 강하고 약함의 척도가 아닌, 인간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짙은 위화감이 뿜어져 나왔으니까.

만에 하나 본체로 보이는 이빨이 달린 가지까지 나오게 될 경우, 인류는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럼, 저희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작전에 모든 걸 들이부어야 한다는 말씀이에요? 무기력하게. 다 죽을 걸 알면서도…….”

“그건 아닙니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다.

단군과 싸울아비로는 무리일 거라 생각하지만.

딱 한 명.

희망이라 부를 수 있는 잔불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저 지켜봐야 하는 현실이 괴롭고 힘들겠지만, 기다려야 합니다. 그 사람이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요.”

한상진이 처음으로 싱긋 웃었다.

“그러니 저희도 포기하지 말죠. 저희마저 무너진다면 밖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분들을 뵐 낯이 없어집니다.”

***

콰콰콰콰!

한 줄기 선풍이 유적 안을 가로질렀다.

빗발치는 하얀 섬광이 곤충들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온몸을 꿰뚫어버렸다.

“메인 공격대 역할을 혼자서 다 하다니. 세상에나…….”

“체내에서 마력탄을 만드는 속도도…… 빠른 수준이 아니야. 저런 건 처음 봤어.”

“마력 운용도 말도 안 되고. 전투 센스까지. 진짜 괴물이네요. 이래서야 저희도 총기류를 사용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착각하지 마. 저 사람이니까 가능한 거지. 다른 사람은 어림도 없다고.”

뒤따라오던 타이탄 길드의 랭커들이 멍하니 한 마디씩 내뱉었다.

상태창이 나타난 직후 180도 달라진 진혁의 태도.

이미 수백 마리가 넘는 사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은 벌써 다 죽이고 아래로 가 버리셨네요. 이런 속도라면 여유롭게 16층을 공략할 수 있겠어요.”

“좋아할 일이 아니야. 저 정도 실력자조차 전력을 다해야 할 정도로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없다는 거다.”

에이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이단의 눈엔 확실히 보였다.

지금 곤충들의 사체에 남아 있는 흔적들.

냉정하게 마력을 조절하는 것 대신, 한 시라도 빨리 숨통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집념이 느껴졌다.

***

그리고 타이탄 길드가 뒤처져 있는 사이.

홀로 앞장선 진혁은 네임드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툭.

바람처럼 질주하던 발이 마침내 멈췄다.

“……아직도 바글바글하네.”

진혁이 짧게 혀를 찼다.

식인 식물들과 비행형 곤충들. 그리고 중형급 갑충들까지.

이곳엔 지금까지 죽인 벌레들보다 더 많은 종류의 군집체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비켜라.”

진혁이 총끝을 앞으로 겨눴다.

“키이이…….”

“케엑, 케엑.”

각종 곤충들이 대답 대신 이빨을 드러냈다.

역시나 대화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전부 쓸어버리고 다음으로 가는 수밖에.

[고유 능력 ‘바람의 영역’이 발동됩니다!]

다시 한 번 날뛰기 위해 온몸이 가속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후후. 홀로 여기까지 오다니. 인간 치곤 제법이구나. 네가 여왕님의 아이들을 해치는 놈이더냐?”

거대한 나비의 형상을 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여성체의 몸에 거대한 나비 날개가 붙어 있는 형태였지만.

네임드 몬스터 ‘므르시엘리오’.

이 녀석이 벌레들에게 지성을 불어넣고 또 그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하는 놈이다.

“나는 위대한 여왕님의 수족. 므르시엘리…….”

타앙!

총구가 불을 뿜었다.

직선으로 날아간 마력탄이 나비의 두개골을 그대로 강타해버렸다.

“크윽…….”

므르시엘리오의 이마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이 망할 놈이 말을 하는데 비겁…….”

타앙! 타앙! 타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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