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307화
307화. 무림맹(武林盟) (2)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자 내부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소유현과 단목일이 대뜸 목청을 돋웠다.
“다들 저 말을 믿는 건가요?”
“적이 오는 길을 예측한다니. 놈들의 동선을 그 자가 무슨 수로 꿰뚫어본다는 말입니까?”
“난데없이 나타나서 이런 기밀이나 풀어대고. 오히려 저 자가 첩자인지 아닌지 의심해 봐야겠어요.”
“껄껄걸! 시주의 말씀이 맞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혜명과 걸중길을 제외하곤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특히나 소유현과 단목일은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천유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움을 구하진 못 할망정 의심병에 걸려 물어뜯기 바쁜 건가. 한 세력이 기울어지는 과정은 어딜 가나 똑같나 보군.”
“뭐라고? 우리 힘으로는 역부족하다 이 말인가?”
단목일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망조가 들었다는 말을 고깝게 들을 리 만무했다.
“아니, 당신들은 강하다. 하나같이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지.”
막강한 무력과 수많은 무인들을 보유한 세력.
그 누가 감히 무림을 약하다고 평가할까?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전투가 아닌 전쟁.
더 넓은 대국에서 이기기 위해선….
더욱 큰 변수가 필요하다.
“그 녀석에겐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단 한 명.
“나라면 이 제안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거다.”
말을 하고도 스스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천유성이 짧게 혀를 찼다.
그래.
진혁이란 놈은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제멋대로 행동하는 얄밉고 능글맞은 고인물.
언젠가 반드시 쓴맛을 보여주고 싶은 원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딱 한 가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면….
이곳에 있는 모두를 포함해 놈은 그 누구보다 탑의 높은 곳까지 가봤다는 점이다.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 녀석이라면 어쩌면….
‘탑의 30층대 후반을 넘어 봤을 지도 모르지.’
신격들이 거주하는 곳으로만 추정되는 미지의 장소.
처음엔 허무맹랑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일까.
그 망할 놈과 알고지내면 지낼수록. 그 가정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에게 너무 과한 평가로군요. 천유성. 그대처럼 칼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하려화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다.”
“흐음.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두 분이선 꽤 친밀한 사이인 것 같은데… 천공자는 그와 무슨 관계인 건가요?”
관계라….
“내가 조만간 넘어설 놈…이라고 해두지.”
천유성이 담담하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후. 천 공자라면 충분히 가능해요. 그럼, 저도 실례하겠습니다. 부디 좋은 답변이 오길 기다릴 게요.”
“진혁 씨 말을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없… 아니, 그건 장담하기 힘들 것 같긴 하네요.”
그 뒤를 추혼사영과 테레사가 이었다.
***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던 진혁과 엘리스와 합류했다.
“낙양에는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온 거냐? 덕분에 그 망할 놈들을 상대하면서 한참이나 기다렸단 말이다.”
천유성이 차갑게 내뱉었다.
진심을 담아 투덜거리는 게 어지간히 불편하긴 했던 모양이다.
“미안. 조금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근데 중간에 좀 꼬여서 다른 곳으로 오느라고 늦었어.”
“저와 함께 왔으면 편하게 왔을 걸, 강 공자도 정말 다양한 도전을 즐기는 성격인가 보네요. 우리 제자도 좀 배워야 할 텐데 말이죠. 안 그래요 천 공자?”
추혼사영이 천유성의 양 볼을 잡고 잡아당겼다.
“스, 스승님! 제발 체통을 좀 지키십쇼!”
“어머나. 까칠해라. 처음엔 그렇게나 검을 알려달라고 조르면서… 강해지기 위해선 스승님 밖에 없다더니. 변했네요. 차갑게.”
“이게 그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 겁니까!”
“이젠 목소리까지 높이는 건가요. 스승은 너무 슬퍼서 흑흑….”
천유성이 추혼사영에게 곤혹을 치르는 사이, 옆에 있던 테레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혁 씨. 상대 측에서 정말로 진혁 씨가 한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저기 있는 대표들은 잘 모를 테지만, 무림맹의 첩보부에 그 지도를 보여준다면 대번에 깨달을 것이다.
천마신교가 노리고 있는 거점들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
또 지금까지 잃은 거점들과 이어질 경우 판 전체를 뒤흔들어버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남은 건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뿐이죠.”
안달이 나 있는 쪽은 무림이다.
그러니 먼저 접근해 오기 전까진 적당히 이 주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된다.
“으음. 그럼 그동안 저희는 뭘 하고 있어야 할까요?”
“밥.”
엘리스가 단칼에 끼어들었다.
한 단어일 뿐이었으나, 결코 거역할 수 없는 강제성이 실린 음성이었다.
밤새 통로를 지나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몸.
거기에 공복까지 더해졌으니 엘리스로선 참을 만큼 참은 셈이다.
“밥 먹기엔 시간이 조금 이르지 않…”
“아니면 네 피라도 좋아. 요즘 마력이 부족한 것 같은데, 이참에 제대로 보충 좀 하지 뭐.”
엘리스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위로 올라갔다.
이건 위험하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 앞에 음식 진짜 끝내주게 하는 데가 있었어. 여긴 생선가게고 여긴 옷집이고. 아 여긴가?”
진혁이 다급히 아무 식당이나 박차고 들어갔다.
웅성웅성!
이른 시간임에도 내부는 제법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급한 마음에 그럴 듯해 보이는 곳을 찾았는데, 꽤 괜찮은 곳을 선택한 듯싶다.
“어서 오십셔. 뭘로 드리면 되겠습니까?”
일행을 발견한 점소이 하나가 재빨리 다가왔다.
“여기 적혀 있는 거 전부 다 내놓거라. 짐이 전세를 낼 터이니 시끄럽고 미개한 인간들은 모두 내쫓도록 하고.”
엘리스가 거만하게 의자에 걸터앉아 명령을 내렸다.
“예… 예? 저…손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죄송합니다. 애가 좀 모자라서.”
“감히, 짐에게 모자라다…읍읍!”
엘리스가 금궤를 꺼내려는 걸 진혁이 간발의 차이로 제지했다.
“여기서 가장 잘 하는 걸로 인원수에 맞게 주세요.”
진혁이 가까스로 점소이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잠시 뒤.
한상 가득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올라왔다.
“오오오! 진짜 맛있겠다. 이건 내꺼… 가 아니라. 크흠! 짐의 입맛에도 그럭저럭 맞을 것 같구나.”
“잘 먹을게요. 진혁 씨도 어서 드세요.”
“흐음. 현지에서 먹는 중화요리도 나쁘지 않군.”
“후후. 많이들 드세요.”
젓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엘리스가 고기를 한입 가득 오물거렸고, 테레사 역시 오향장육 한 점을 먹으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음. 확실히 나쁘지 않은 맛이다.
하지만, 중화요리의 정수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나라면 여기서 조금 더 재료 특유의 향을 살릴 수 있는 조합을 생각했을 텐데….’
진혁이 음식의 맛을 올리기 위해 몇 가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쳇! 시끄럽기는.”
“참으십쇼. 대사형. 저놈들이 예의나 법도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음식이란 자고로 몸을 움직이기 위해 섭취하는 것. 무의 길을 걷기 위해선 식도락을 멀리해야 하는 법인데… 저 놈들은 저렇게 추잡스럽게 먹어대는구나.”
옆쪽에서 날이 선 음성이 들려왔다.
평범한 손님이 아니다.
대부분 고된 일을 하던 손님들과는 달리 하나같이 뽀얀 얼굴들을 하고 있었으니까.
‘정파에 소속된 놈들인가.’
복장 역시 완전히 달랐다.
정갈한 백의와 허리춤에 찬 장검은 심신을 수련하는 도인들의 상징.
그렇다.
소유현과 함께 온 무당파의 도사들이다.
숫자는 남자 셋과 여자 하나.
그 중에서 굉장히 수려하게 생긴 남자는 격이 달랐다.
“사숙께서 회의에 탑 외부에서 온 자들도 참여할 거라 했는데, 그게 저들인가 봅니다.”
“추혼사영이 제자로 받았다는 놈도 있어요. 천유성이라고 했던가요? 뭐… 생긴 건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요.”
“약해 빠진 것들이 뭘 안다고 우리를 돕는다는 건지 참… 안 그렇습니까, 대사형?”
“그만큼 천마신교 놈들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다는 뜻일 거다.”
대사형으로 불리는 남자가 찻잔을 홀짝였다.
“뭐야, 저 녀석들은?”
고기를 한 입 가득 물고 있던 엘리스가 두 눈을 치켜떴다.
“시비를 거는 모양인데… 어떻게. 한 판 붙을 거냐?”
천유성 역시 살기어린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호전적인 두 녀석답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하지만.
의외로 진혁은 평화로운 미소를 만면에 가득 머금고 있었다.
“참아. 곧 있으면 같이 싸워야 할 소중한 동료인데 여기서 칼부림이나 할 순 없잖아?”
사마자를 비롯한 천마신교의 전력은 막강하다.
그런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무림맹의 전력을 허투루 낭비해선 안 되겠지.
“너 뭐 잘못 먹었어? 안 어울리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어이가 없군. 시비를 걸면 삼족을 멸한다음 그 위에서 잔치를 벌일 놈이. 이걸 참는다고?”
“와아. 진혁 씨. 드디어 사람이… 되셨네요.”
여기저기서 다양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평소 내 이미지가 어떻길래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모르겠네.’
나름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물론, 저 녀석들이 함부로 입을 놀린 것에 대해선 나름대로 벌을 주긴 할 거다.
“다들 잠깐만 있어봐.”
진혁이 돼지고기로 만든 요리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찾은 곳은 주방.
“소, 손님?”
점소이는 물론, 이번엔 요리를 맡은 숙수들까지 놀랐다.
음식을 먹어야 할 손님이 대뜸 음식을 만드는 곳에 쳐들어왔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물론, 작은 보석이 달린 귀걸이 한 개를 건네자 모두의 입이 꼭 다물어졌다.
“응? 내 귀걸이 하나가 어디 갔지? 분명 조금 전까지 차고 있었는데. 어디 흘렸나?”
밖에 있던 엘리스가 뭐라 중얼거린 것 같지만, 진혁은 못 들은 척 그 말을 넘겼다.
“하다하다 이전 요리까지 직접 하는 건가요? 저 사람은?”
“천것들이나 하는 요리 따위를 하겠다니… 가지가지 하는군.””
“저는 오히려 저런 근본도 없는 놈들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당파 놈들이 수근대는 소리가 식당 한켠에서 울려 퍼졌다.
‘그래, 고기를 입에도 안 댄다 이거지?’
하지만, 그건 고기를 혐오해서가 아니다.
그저 육식이라는 본능을 깊고 깊은 감옥 속에 가두어둔 것뿐이지.
무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도 교육에 있어 나쁜 방법은 아니었지만….
무당의 금기를 어기게 한다면 그 쾌감은 배가 될 것이다.
약점 역시 제대로 잡을 수 있을 테고.
조만간 이 놈들을 장기말처럼 부려먹을 생각을 하니 연신 입가가 씰룩였다.
‘한달 정도 굶긴 옆집 뽀삐로 만들어주마.’
[Lv8 ‘이세계 식당’이 발동됩니다!]
진혁의 손끝을 따라 은은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이 감각.
이 느낌.
‘좋아.’
화르륵!
불길이 거세게 치솟았다.
진혁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음식 재료를 만졌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화려하면서 절도 있는 동작은 수십 년간 요리를 해온 장인의 솜씨와 같았다.
“아…어?”
“뭐, 뭐야 이 손님.”
말리려던 숙수들도 어느새 넋을 놓고 진혁의 요리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가게 안에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꿀꺽….
“아니,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런 향이.”
“아니, 대체 안에서 뭘 만들 길래 이런 냄새가 나?”
“우리한테 준 건 개밥이야 뭐야? 어이, 점소이. 당장 지금 안에서 하고 있는 것 좀 내와 봐.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까. “
분명, 음식을 먹고 있는 데도 모두의 입에서 군침이 줄줄 흘러 내렸다.
“이, 이럴 수가.”
숙수들의 총책임자 역시 식욕을 돋우는 향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요리 경력 40년 외길.
쟁쟁한 경쟁 주루와 객잔들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내가 배운 건 요리 따위가 아니었어.”
불을 다루는 솜씨.
조미료간의 오묘한 조화.
음식 본질의 맛을 끌어내는 능력까지.
이건 황실 숙수들조차 넘보지 못할 영역이다.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요리에 비하면 자신이 내놓은 음식들은 한낱 음식물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당의 도사들 역시도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사, 사형.”
“음식…이라는 게 원래 이런 겁니까?”
“사, 사술이라도 부리는 것 아닐까요?”
“…….”
육식은 무당의 금기 중 하나.
하지만, 저걸 먹지 않았다간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주방에서 나온 진혁이 슬며시 다가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요리 접시를 든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