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358화
358화. 새로운 무기 (3)
“들어오시죠.”
하스팅의 허락에, 공간이 일그러졌다.
쿠웅!
육중한 발걸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천사.
키자키엘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상급 관리자시여.”
에덴에 소속된 상급 영체가 하스팅의 영역에 접근한 것이다.
“후후. 이게 얼마 만에 만나는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군요.”
“지난번 관리자님을 만났을 때는 아직 중급 관리자셨으니까요.”
“그랬죠. 당시엔 키자키엘 님께서도 전사장이 아닌 말단 천사셨지만요.”
몇 만 년 만의 만남.
그 정도로 관리자들은 탑 내부에 있는 거주자들과 접점을 만들지 않았다.
그게 상식이었고 그게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판엠 씨. 당신은 이만 나가 보세요. 지금부터 진중하게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군요.”
“아, 알겠습니다.”
판엠이 재빠르게 문 밖으로 사라졌다.
“용케도 이곳을 찾아내셨군요. 표면상으론 거주자 분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만.”
“제 나름대로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어서 그런 거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말씀해 보세요.”
하스팅이 슬쩍 손을 뻗어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소 차가운 포도주와 치즈, 그리고 40층에서만 얻을 수 있는 버터로 만든 빵이 추가되었다.
“하스팅 님께서도 현재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세력 전쟁이라든지 혹은 왕관의 소유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탑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는 저희 관리국에서 모두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허면, 이제 막 탑에 들어온 플레이어가 탑의 가장 고귀한 성유물 중 하나를 가진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거야 당연히……. 어떤 물건이든 그 물건의 격에 맞는 소유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에덴 쪽에서도 같은 입장 아닙니까?”
키자키엘의 얼굴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아닙니다. 가브리엘은…… 그 인간과 계약을 맺었다고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더군요.”
“설마요. 그게 정말입니까? 천계의 위대한 대천사가 그런 무책임한 말을 했다니…….”
하스팅이 일부러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도 믿기 힘들었습니다만, 그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종이야말로 신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저라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심상치 않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무얼 해 드려야 하는 거죠?”
“강진혁이란 인간의 위치에 대해서만 알려 주시면 그 뒤는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키자키엘이 아공간에서 하얀 빛이 나는 창을 꺼내들었다.
성유물 ‘여호수아의 뿔나팔’.
성채를 무너뜨린, 에덴에 소속된 최강의 성유물 중 하나가 나타났다.
“아래층에 가할 수 있는 있는 공격은 한 번뿐입니다. 하지만.”
그래.
한 번으로 충분하다.
절대 판정 효과가 붙어 있는 ‘여호수아의 뿔나팔’에서 나오는 일격은 제우스의 ‘아스트라페’와 동일했으니까.
단일 대상 공격으로는 최상위에 랭크된 일격이라는 뜻이다.
“그건…… 꽤나 재밌는 제안이군요.”
하스팅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
드디어 지긋지긋한 거머리를 끝장낼 수 있는 회심의 카드가 들어왔다.
***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또 다른 관문이 무너졌다.
“하악. 하악…… 하아아…….”
만신창이가 된 베리엘이 비틀거리며 날아올랐다.
날개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걸 보니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래서 자존심을 함부로 부리면 안 된다니까.
“이야. 역시, 대단하네. 정말로 이 함정들을 전부 돌파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진짜 마왕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후후…… 이, 이 몸이 괜히…… 마계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베리엘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콰아앙!
아공간과 함께 나타난 육중한 쇠공이 머리와 부딪쳤기 때문이다.
“……커억.”
베리엘이 균형을 잃고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이제 출구가 보이는 상황이었기에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워낙 기습적으로 가해진 일격인 것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원인이었다.
서서히 사라져 가는 분신체.
마력이 모두 고갈되어 원래 있던 마계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아……!”
깜빡 잊고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관문에선 이 함정이 있었다는 걸 그만 잊어먹고 있었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순수한 실수다.
결코 검은 사도가 되라느니 뭐니 하는 압박을 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진혁이 씰룩이는 입가를 애써 진정시키며 베리엘을 바라봤다.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못해서 정말 아쉽지만, 오늘 도와준 건 절대 잊지 않을게.”
“너…… 분명, 마지막에 공이 떨어지는 곳을 봤던 것…… 같았는데…….”
“착각이야. 때마침 거기 날파리가 날아다니더라고.”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베리엘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넌 마족이 되어야 한다. 누구보다도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베리엘의 분신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마족이라…….’
그것도 나름대로 재밌을 것 같긴 하다.
3차 전직을 그렇게 해버릴 경우 에덴과는 영원히 적대 관계가 되어야 할 테지만, 그 처절한 맛은 다른 곳을 선택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종류일 테니까.
하지만, 그건 지금 고려할 문제가 아니다.
세력 간의 다툼이나 3차 전직은 몇 개월은 지난 후에 생각해도 충분한 주제였으니.
‘일단 준비물 좀 가볍게 사 볼까.’
안으로 들어가기 전, 몇 가지 구매해야 할 쇼핑 리스트들이 있었다.
‘코인 거래소’에 들어간 진혁이 재빨리 아이템들을 쓸어 담았다.
-캐러멜 밀크 우유 가루 1kg – 1,000코인
-만년 빙하석 1개 – 30,000코인
-오토르강 캣닢 1포대 – 2,500코인
-트윈 무당벌레 100마리 – 10,000코인
좋아.
이걸로 필요한 건 전부 갖췄다.
진혁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10개에 해당하는 관문들은 전부 돌파했고 마지막 한 관문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부턴 베리엘의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다.
덜컹!
마지막 문이 개방되었다.
[11번째 관문 ‘하벨리안의 둥지’에 들어갑니다.]
후욱 하고.
무언가의 숨결이 느껴졌다.
약 7m에 이르는 기다란 몸에 흰색 갈퀴털.
마치, 족제비과를 연상시키는 듯한 외형이다.
하벨리안.
펜타그리스와 마찬가지로 탑에 머무르는 환수 중 하나이다.
“캬옹.”
침입자를 발견한 하벨리안이 낮게 포효했다.
자신의 영역에 함부로 발을 디딘 이에 대한 경계를 숨기지 않으면서.
“걱정 마. 해치려고 들어온 게 아니니까.”
진혁이 양 손을 들어 해칠 의사가 없음을 피력했다.
이곳에 온 건 어디까지나 둥지 안쪽에 있는 ‘결정’을 확보하기 위함이지. 하벨리안과 치고받고 싸우려는 의도는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환수가 얌전히 있어 줄 리는 만무하다.
애초에 아무리 온순한 환수라도 제 집 안방에 쳐들어온 놈을 봐주는 경우는 없었다.
“캬오오오!”
진혁이 물러나지 않자, 누워 있던 하벨리안이 일어났다.
동시에.
쿠쿠쿠쿠쿠!
하얀 서릿바람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극한의 냉기 속성.
얼음을 다루는 환수답게, 주위의 기온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토록 건조하고 더웠던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온다.
진혁이 자세를 잡았다.
파아아앙!
곧이어 얼음으로 만든 날카로운 칼날이 쇄도했다.
정면에서 총 일곱 개.
오롯이 속도에 치중된 정면 공격이다.
[Lv18 ‘빙하조형(氷河造形)’이 발동됩니다!]
진혁의 손끝을 따라 새하얀 결정이 일어났다.
중요한 건 연산 속도.
다시 말해, 얼마나 빠르고 완벽하게 하벨리안의 빙계 마법을 상쇄하는지 여부다.
콰콰콰쾅!
14개의 얼음 줄기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캬오!?”
하벨리안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지금껏 모든 침입자들을 일격에 끝내 버렸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당황하는 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캬오오오!”
파츠츠!
입가에 맺히는 눈부신 광휘.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마력이 응축됐다.
드래곤의 브레스와 유사한, 환수 특유의 브레스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걸 정통으로 맞았다간 둥지 안에 얼음 조각상이 하나 추가될 뿐이다.
‘빙하조형(氷河造形)’
진혁 역시 마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타이밍과 위력. 그리고 기세까지.
눈과 얼음이 미친 듯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늘의 검’.
하늘에서 내려온 얼음줄기와…….
‘땅의 검.’
……땅에서 솟구친 얼음 줄기가 하나로 맞닿았다.
무시무시한 냉기가 단숨에 하벨리안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허나, 얼음 속에서도 브레스의 발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쿠쿠쿠쿠쿠쿠!
두 개의 검이 하벨리안을 붙잡은 건 채 1초도 되지 못했다.
마법 속성 저항력이 터무니없이 높은 탓이다.
‘이걸로 막을 거라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어.’
잠깐의 생긴 틈.
[‘혹한의 방벽’이 발동됩니다!]
진혁의 앞에 룬어들이 새겨진 얼음 방패가 나타났다.
마치, 툰드라 지대에 홀로 솟은 거산처럼.
브레스에 맞서는 벽이 만들어졌다.
바로 그 순간.
응축되었던 브레스가 해방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
엄청난 충격이 느껴진다.
브레스가 정통으로 방패 위를 두드렸다.
“큭!”
‘간극’과 ‘적응형’ 능력치가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근육이 놀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브레스가 영원히 계속되진 않을 테니까.
“크으으…….”
그 말을 증명하듯.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브레스가 잦아들었다.
……지금이다!
진혁이 순식간에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구매해 뒀던 아이템들을 꺼냈다.
“캬오?”
난데없는 진혁의 행동에 하벨리안이 또 다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 온갖 종류의 음식 재료들을 꺼냈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캐러멜 밀크 우유 가루 1kg’와 ‘만년 빙하석’이 합성됩니다.]
작고 하얗게 갈려나가기 시작한 얼음.
거기에, 브레스로 인해 공기 중에 녹아든 마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묘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캬……오?”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에 하벨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꼬리를 살랑 움직였다.
***
‘군침이 돌겠지.’
진혁이 피식 웃었다.
지금 구입해 둔 것들은 각각 개별적으로는 크게 하벨리안의 구미를 당기진 못했으나 하나로 조합할 경우 엄청난 시너지를 만든다.
특히 ‘브레스’를 통해 흘러나온 특유의 마력이 가미되면, 하벨리안이 죽고 못 사는 별미가 완성 된다고 해야 할까.
거기에.
‘이세계 식당’ 스킬로 인해 고양이과 환수에게 최적화된 조리법까지 추가되었으니.
제아무리 이슬만 먹고 산다는 환수라 할지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물론, ‘멘트라 테이밍’과 ‘교감’ 스킬 역시 그 철벽같은 경계심을 허물어뜨리는 데 톡톡히 제 역할을 다했다.
“캬, 캬오오오…….”
하벨리안이 코를 킁킁대며, 갓 만들어진 빙수로 다가왔다.
어느새 꼬리는 미친 듯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실낱같은 경계심이 남아 있던지, 완전히 방어 태세를 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남은 유리 방패는…….
핥짝.
빙수를 혀로 핥는 순간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져버렸다.
“……!!”
하벨리안이 단숨에 빙수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게 눈 감추듯 먹는다는 게 이런 걸 보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제 여유롭게 결정을 확보할 수 있겠어.’
진혁의 시선이 둥지 중앙으로 향했다.
형언할 수 없는 빛을 간직한 결정체.
드디어 태양의 사구에 있는 마지막 볼일을 해결할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