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422화
422화. 천세(千歲)의 사도 ‘니라샤’ (1)
하늘을 빼곡이 뒤덮은 붉은 꼬챙이들.
감히,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최강의 창들이 지면을 향하고 있었다.
“엘리스….”
니라샤가 혀로 입술을 적셨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소속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괴물들뿐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최강을 꼽으라면 바로 저 은발의 여자가 일 순위였다.
혈액 마법을 사용하는, 중장거리전에 특화된 딜러.
혼자서 능히 대형 길드의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베일에 싸인 랭커였다.
하지만, 니라샤는 엘리스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천세의 신격들로부터 그 정체에 대해 들은 것이다.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한때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한 탑의 절대자 중 하나.
지금은 비록 전성기의 힘을 완벽하게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일개 플레이어가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였다.
“그 많은 부하들을 다 처리하고 여기까지 왔다고?”
콥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수정 동굴’을 통과해 본거지에 입성한 지 30분도 안 됐는데. 가장 방어가 튼튼한 선장의 텐트까지 도달할 줄이야.
“세상엔 분수란 게 있는 법이다. 거기에 맞게 살아가야만 제 명대로 살 수 있는 법이지.”
엘리스가 담담하게 현실을 고했다.
“원래라면 네놈들이 뭘 하든 관심 따윈 없었다만, 너흰 내 계약자에게 칼을 겨눴다.”
죽어야 할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다.
이 세상에 계약자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 하나뿐이었으니까.
[엘리스가 고유 능력 ‘블러드 로드’를 개방합니다!]
쿠쿠쿠쿠쿠!
마력이 요동치며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이제 손짓 한 번이면 이 일대는 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강진혁이나 너나… 아주 나를 머저리로 보고 있구나. 내가 그런 대비도 없이 너희들과 싸우려고 한 줄 아느냐?”
그 엄청난 폭풍을 마주하고서도 니라샤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다.
순간, 오싹하고.공기가 급변했다.
우우웅!
니라샤의 손에 쥐고 있던 나무 파편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비마나(Vimana)의 파편’.
신들의 궁전이라 불리는 공중 요새의 일부로. 천세의 신격들이 마력을 쏟아 부어 만든 성유물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꼬챙이들과.
땅에서 솟구치는 황금 화살들이 충돌했다.
콰콰콰콰콰콰!
허공에 눈부신 불꽃이 점멸했다.
신화 속에 나오는 대전쟁을 보는 것만 같다.
그 정도로 서로가 주고받은 한 수는 터무니 없는 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
엘리스가 동공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설마, 천세의 신격들이 이 정도로 니라샤를 밀어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니라샤가 준비한 카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니라샤가 2차 전직 능력 ‘아바타’를 발동합니다!]
혼신일체와 동일한 효과를 지닌 게 바로 ‘아바타’다.
신을 플레이어의 몸속에 깃들게 하여, 일시적으로 그 격에 도달할 수 있는 힘.
강진혁과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아무리 날고긴다고 하더라도….
45층을 지배하는 천세의 힘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하하하! 이거 진짜 짜릿한데…? 지금이라면 누가 와도 지지 않을 것 같아.”
니라샤가 광소를 터뜨렸다.
“흐음. 진조와의 전투라… 오랜만에 아래 층계에 온 보람이 있겠구나. 격한 싸움이 될 것 같으니, 어디 마력부터 좀 보충해볼까?”
아바타의 능력과 연결된 건 천세의 신격 중 하나인 ‘락샤샤’.
흔히 불교에서 나찰(羅刹)로 알려진 피의 마술사였다.
우두둑!
콰득!
“끄아아악!”
“사, 살려주십쇼. 선장!”
주위에 있던 해적들의 몸이 기괴하게 우그러졌다.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콥스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미 이렇게 하기로 합의가 끝났기 때문이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그래? 그럼, 가자고!”
니라샤와 락샤샤의 목소리가 하나로 겹쳤다.
파치칙!
검은색 구체들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빠르다.
엘리스가 공중에서 방향을 바꿨다.
피로 만든 꼬챙이들이 구체를 영격하기 위해 폭사되었다.
콰콰콰쾅!
또 다시 하늘이 검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박살 났던 구체 조각들 속에서 날개와 비슷한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송장 파리라고 하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꽤나 지독한 놈들이지.”
락샤샤가 후욱하고 바람을 물어넣었다.
그러자 생명을 가진 송장 파리들이 엘리스를 파먹기 위해 짙은 구름을 형성했다.
“세월이 많이 좋아졌긴 좋아졌구나. 덜 떨어진 천세의 청소부가 나에게 싸움을 다 걸고.”
“후후! 이것도 다 인과의 연장인 법.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거라. 아타락시아의 망령이여.”
“아무리 날뛰어봤자 소용없어! 이제 우리 간다라 길드가 모든 길드의 기준이 될 거다!”
락샤샤와 니라샤가 동시에 외쳤다.
부우우웅!
바람이 요동치는 소리와 함께 검은 파리 구름이 엘리스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순간.
엘리스의 등 뒤로 붉은 고리가 나타났다.
고유 성창. ‘개벽의 계시록’.
만상을 태워버리는 겁화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기 시작했다.
“역시, 굉장하군.”
“그래봤자야. 파리들이라면 얼마든지 있어.”
죽이고 태워도 소용없다.
숫자상 압도하는 건 이쪽이었으니까.
송장파리가 엘리스의 시선을 끌고 틈틈이 마력으로 만든 챠그람을 투척했다.
궤적이 공중에서 바뀌는 챠그람은 불길이 덜한 곳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게다가.
[콥스가 성유물 ‘유령선의 은화’를 발동합니다!]
해골 모양이 그려진 은화가 빙그르르 회전했다.
타앙!
콥스의 화승권총이 불을 뿜었다.
“그깟 총알로…!”
엘리스가 즉각 반응했다.
아무리 락샤샤와 싸우고 있다고 한들, 콥스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지 않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콰직!
혈액으로 만든 방패에 바람 구멍이 생겼다.
“끌끌끌! 고인물 코퍼레이션인지 나발인지… 너희야말로 이 바다에서 나에게 덤빈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1/3확률로 상대의 방어를 일체 무시해버리는 효과.
29층에서라면, 설령 아이기스의 방패나 헤라클레스의 육체라 할지라도 꿰뚫어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큭….”
엘리스가 몸이 크게 휘청였다.
상처는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지만, 회복에 마력을 써버린 탓에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너져버렸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특히, 저 둘의 연계는 상위 존재를 사냥하는 데 완벽하게 특화되어 있었다.
최소한 저 총만 없더라도 이렇게 위협적이진 않을 텐데.
그러나, 콥스를 먼저 처리하기엔 락샤샤와 니라샤 쪽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죽어라!”
각기 다른 공격이 연계되었다.
전후좌우.
타이밍을 빼앗고 허를 찌르는 절초들이 폭풍처럼 이어졌다.
엘리스가 사력을 다해 대응했으나, 모든 걸 막아낼 순 없었다.
콰아앙!
“아아악!”
고리를 파괴당한 엘리스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 유명한 아타락시아의 가주도 별수 없군. 추하게 발버둥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곧 편하게…음?”
다가오던 니라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뭔가, 왼쪽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헉!”
콰콰콰콰콰콰!
한 줄기 선풍이 지면을 가로질렀다.
* * *
‘바람의 영역’과 ‘태초의 불꽃’.
그리고 그 위에 고대종의 브레스가 덧씌워졌다.
3개 속성의 폭풍에 적중당한 니라샤가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끄으으….”
울컥하고 목구멍에서부터 쇠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신격의 힘을 고스란이 받아들였음에도 방금 전 공격은 감당하기 버거웠다.
“저… 인간이 강진혁인가.”
락샤샤가 고구마를 타고 날아오는 진혁을 바라봤다.
과연….
최근 상층부의 거대 세력들과 신격들이 관심을 보이는 플레이어답다.
고작 일개 인간 주제에 이토록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진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엘리스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다친 덴 없고?”
“나, 날 구하러 와준 것이냐?”
“당연하지. 네가 얼마나 고급 인력인… 게 아니라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료를 버려둘 리가 없잖아.”
“하나뿐인 소중한… 동반자….”
엘리스가 홍시처럼 빨개진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뭔가 했던 말이 많이 생략되고 왜곡된 것 같긴 하지만,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다.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라샤….”
“강진혁!”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국에서부터 시작된 지긋지긋한 악연.
그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 마침내 다가왔다.
“그래도 가능하면 내버려두려고 했어. 천세의 간택을 받은 사도라면 탑을 등반하는 데 도움이 좀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무리 멍청해도 정도가 있지. 설마, 탑의 등반보다 내 쪽을 괴롭히는 데 더 열정적일 줄 몰랐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맞서 싸우는 것보다 그 시간에 다른 이득을 취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천세와의 관계는 험악해지겠지만, 무대가 이 정도 갖춰졌으면 둘 중 하나는 퇴장하는 게 맞으리라.
척,
진혁의 한 손에 ‘홍련’이 나타났다.
반대쪽엔 망령 나무의 낫이 자리 잡았다.
“조금 전에 네 애인이 어떻게 당했는지 보지 못한 모양이구나.”
“애인이 아니라 메인 딜러.”
“곧, 네 애인하고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지.”
“메인딜러라고!”
제발 말귀 좀 알아들어라.
이것들이 아주 단체로 귀를 틀어막았나?
“큼큼! 계약자, 가만히 있어 보거라. 썩 나쁘진 않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모오기!”
엘리스와 고구마까지 고개를 끄덕여 댔다.
그때였다.
타앙!
날카로운 총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진혁의 앞에 펼쳐두었던 방어 마법들이 모조리 박살났다.
카아앙!
마지막에 홍련으로 궤도를 빗겨낸 게 고작이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몸에 바람구멍이 생길 뻔했다.
“호오. 그래도 반응은 나쁘지 않군.”
콥스가 총구를 재차 겨냥했다.
“하지만, 과연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까?”
정신없이 몰아치는 릭샤샤의 능력과 그 가운데서 펼쳐지는 자신의 저격.
이 콤비는 제3자가 개입했다고 해서 뒤집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저 표적만 늘어난 것뿐이지.
더군다나, 필드에 영향을 미치는 성유물까지 보유하고 있는 이상 모든 변수를 차단해 버릴 수 있었다.
‘배신자의 소금’.
바다에 빠지면 능력치가 절반으로 감소하는 29층의 특성을….
……육지에까지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성유물이었다.
아직까지 이걸 사용할 만한 상황이 없었기에 아껴두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의 위협이 닥친다면, 균형 자체를 엎어버릴 수도 있었다.
“알고 있어.”
“뭐?”
“네가 가지고 있는 성유물에 대해서는 전부 알고 있다고.”
‘데비 존스의 화승권총’. ‘유령선의 은화’. 마지막으로 ‘배신자의 소금’까지.
이미 모든 성유물과 그 특징들을 꿰뚫고 있었다.
“이제… 그럼, 내가 준비한 걸 보여주지.”
진혁이 천천히 모았던 마력을 해방했다.
[고유 능력 ‘만상공유(萬祥共有)’가 발동됩니다.]
상대가 신격의 힘을 빌렸다면….
이쪽은 또 다른 신화를 재현할 뿐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최대치로 발동됩니다!]
[전장 선택 ‘월광(月光)의 숲’이 펼쳐집니다!]
시야가 변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세계가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달빛이 쏟아지는 어두운 숲.
이곳은 시련의 탑 39층. 진조들의 영토다.
정확히는….
과거, 엘리스가 자신을 배신한 가주들과 마지막으로 맞서 싸운 곳이었다.
“어느 쪽의 호흡이 더 잘 맞는지 시험해보자고.”